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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믿음으로 열매맺는 달☜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2:22)
마8:23-27절) 믿음이 작은 자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가시다가 호수 위에서 큰 돌풍(突風)을 만나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이 돌풍을 보고서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을 깨우면서‘살려 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책망하시 면서‘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큰 믿음이 있고, 작은 믿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돌풍(突風)을 만났을 때, 무엇인가 좀 더 나은 믿음의 행동을 하기를 기대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 풍랑 속에서 어떻게 하기를 바라셨을까? 또 우리는 어떻게 하면, 작은 믿음이 아니라, 큰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Ⅰ.배 안에서 주무시는 예수님
우리가 본문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예수님의 일행이 어떻게 하다가 호수 위에서 이 무서운 풍랑을 만나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은 어떻게 하다가 이 무서운 풍랑을 만나게 되었습니까?
8:18절)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보고 많이 몰려와서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곳에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또 귀신 들린 사람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께 많이 몰려오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갈릴리에서 예수님의 인기(人氣)가 상승하고, 사람들의 호응(呼應)도 높아가고 있을 그때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사역을 중단하시고, 제자들만 데리고 호수를 건너가자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생각하기에는 그 곳을 떠나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지금 잘되고 있는 일을 중단하고, 생판 모르는 곳에 가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든지 때가 있는 법이고, 그 때를 놓치면, 성공하기가 어렵습니다.
제자들이 생각하기에는 비로소 예수님이 때를 만나서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사역을 중단하시면서 딴 곳으로 가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곳에서 새로 장사를 시작했는데, 이제 막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여 많은 고객들이 몰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장사를 중단하고 다른 곳에서 새롭게 장사를 시작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8:23-24절)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지금 제자들은 아주 좋은 기회를 포기하고, 새로운 일터를 찾아 호수를 건너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더 멋진 일을 계획하고 있으리라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을 따라 호수를 건너는 제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엄청나게 큰 풍랑(風浪)이었습니다.
육지에서 큰 바람을 만나는 것과 바다나 호수위에서 큰 바람을 만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입니다. 즉 육지에서는 아무리 큰 바람을 만나도 피할 곳이 있습니다. 큰 바위 옆으로 피하든지, 굴속으로 들어가면, 바람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약간 움푹한 곳에 들어가서 몸을 숙이거나 엎드리고 있으면, 바람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다나 호수 위에서는 전혀 피할 곳이 없습니다. 꼼짝없이 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주 좋은 기회를 포기하고 호수를 건너는데, 도저히 피할 수 없는 큰 바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도저히 빠져나갈 길이 전혀 없었습니다.
찬송가 462장 *큰 물결이 설레는 어둔 바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갈릴리 호수는 수면(水面)이 지면(地面)보다 낮고 수위에 있는 산은 높아서 바람이 한 번 불면 물이 끓는 것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본문 24절에서‘큰 놀’이라고 했는데, 원문에는‘큰 지진’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람이나 물결이 일정한 방향으로 몰아친 것이 아니라, 마치 미친 것처럼 제멋대로 뛰놀았다는 것입니다.
남미(南美)에 가면, 말이나 소를 타고 로데오를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말이나 소가 미친 듯이 날뛰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 그 잔등에 붙어 있느냐? 에 따라 승자가 결정됩니다. 제자들이 만나게 된 것은 호수의 로데오였습니다. 물이 완전히 미쳐서 이리저리 날뛰므로 도저히 배에 붙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하셨습니까? 배 위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물론 그 엄청난 소동 중에서 과연 예수님이 계속 주무실 수 있었겠느냐? 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배가 그렇게 요동치고 제자들이 소리를 질러댔다면,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주무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말 그대로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은 배에 계셨지만, 의논 상대도 되지 못했고, 그들에게 어떤 일을 지시하실 처지도 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아마 너무나 피곤하셨던 모양입니다. 예수님께서 풍랑이 치는 배 위에서 주무신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는 진실로 한 인간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무시지 않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주무신다면, 그는 하나님이실 수가 없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가시면서 주무시는 예수님은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대개 군대에서 장군들은 전쟁이나 위기 상황이 발생하면, 잠을 자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하들은 자고 있을 때도 혼자 일어나서 적진(敵陣)을 살핍니다. 부하들이 이것을 보면,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모릅니다.
즉 ‘우리 대장은 지금도 잠을 자지 않고 우리를 위해 걱정하고 있구나 이런 대장이라면 그를 위해 충성을 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감격해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배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그리고 제자들이 얼마나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는지, 모르신 채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무시는 예수님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역시 그도 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즉 *왜 예수님은 한창 잘되는 사역(使役)을 갑자기 중단하셨을까? 이런 일이 있을 줄 모르셨을까? 그리고 정신없이 주무시는 저 모습은 영락없이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다*우리에게는 이럴 때가 없습니까?
분명히 자기 나음대로는 믿음으로 결정했다고 생각하는데, 상황은 최악이고, 당장 굶어죽게 되었으며, 아무리 기도를 해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그런 경우에 처해 있는 분은 안계십니까?
그럴 때,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망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가 있을까? 우리가 이런 풍랑을 만나면, 어디로 피하겠습니까? 예수님도 나약한 한 인간으로써 주무시고 계십니다. 이때 과연 어디서 도움을 구하겠습니까?
구약의 요나서를 보면, 요나가 탄 배가 엄청난 풍랑을 만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자기들 안에 죄인이 있어서 이런 풍랑이 일어났다고 하며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 제비가 요나에게 뽑혔고, 그는 하나님을 피한 죄를 고백하며,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진짜 요나를 바다에 던졌더니,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 그 미친바람과 물결을 잔잔케 하기 위해서 제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누구를 호수에 던져야 호수가 잔잔해지겠습니까?
Ⅱ.믿음이 작은 자들아
제자들은 처음에는 이런 위기 가운데서도 주님을 깨우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피곤한 주님을 좀 더 주무시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이 풍랑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깨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도무지 살 수 없겠다고 생각되었을 때, 물론 완전히 믿었던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께 이렇게 부탁해 보았습니다.
8:25-26절)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제자들이 두려워서 예수님을 깨웠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이 작은 자’라고 하신 것은 분명히 제자들이‘이렇게 했으면, 더 좋았겠다’는 기대를 갖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즉 제자들이 한 행동은 예수님의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대하신 믿음의 행동이 무엇이었으며, 오늘날 우리에게 주님이 요구하시는 신앙은 무엇일까? 우선 예수님은 늦게 깨웠다고 책망하시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태도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어려움이 닥치자마자 곧바로 예수님을 깨우면서‘예수님, 우리 모두가 죽을 것 같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어떻게 좀 해주십시오..’라고 했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큰 믿음을 가진 자들아, 어려움이 생기자마자 곧바로 나를 깨웠구나. 앞으로도 어려움이 생기면 곧바로 나를 깨우도록 해라. 너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하셨을까?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은 코미디가 되고 말 것입니다.
어려움이 생겼을 때, 우리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해 보아야 합니다. 오히려 눈앞에 큰 어려움이 닥쳐서 가족들이 모두 죽게 되었는데도 무책임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잘못된 자세일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마치 번지점프 하는 사람들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의 순간에도 당당할 것을 원하셨을까? 즉 배가 마구 요동치는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우리는 모두 십자가 용사들이야. 절대로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모두 주님과 함께 당당하게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고 했다면 주님이 그들을 칭찬하셨을까?
주님이 제자들에게 *내가 보니까 너희들은 정말 일본의 사무라이들 같구나, 나는 죽음을 하찮게 여기는 너희들을 제자 삼은 것을 정말 기쁘게 생각한다*라고 말씀하셨을까? 그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이 작은 자*라고 책망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의*두려움’때문*이었습니다.
8:26절)...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예수님은 제자들이 심하게 무서워하는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책망이 아니라, 위로일 수도 있습니다.
즉 너희들은 이 정도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는데, 공연히 지나치게 두려워했구나*라는 위로가 섞인 책망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 엄청난 풍랑 속에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을 신뢰하기를 바라셨을까? 물론 그렇다면 좋겠지만, 사람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일상적인 두려움에 대해서 제자들을 책망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두려움일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왜 제자들이 이런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느냐? 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이 이 무서운 풍랑을 겪으면서 가졌던 두려움은 보통 두려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믿음을 전부 삼켜버리는 그런 두려움이었습니다. 이런 두려움을‘공황(panic)’이라고 말합니다. 완전히 두려움에 빠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두고서 책망하신 것입니다. 왜 제자들이 이런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을까?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가는데,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 나설 때는 어느 정도 배고플 수도, 고생을 할 수도 있다는 각오는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들 모두의 생명을 한꺼번에 삼키려는 그런 풍랑이 일어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막상 눈앞에서 일어나니까 그들이 그동안 가지고 있던 믿음은 한순간에 바닥을 드러내고, 그들은 전혀 믿음이 없는 자처럼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곧‘믿음이 작은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느 정도는 자신에게 어려움이 닥쳐오리라는 것을 각오합니다. 이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을 믿고 따르는데, 자신이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거나, 아니면 자신이 생각했던 한계를 훨씬 넘어선 어려움과 고난이 닥쳐올 때, 우리의 믿음은 사라져버리고, 무서운 불신앙에 빠지게 됩니다. 즉 우리의 믿음은 금방 동이 나버립니다.
그때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엄청나게 분노합니다. 즉 자기 자신을 학대합니다. 그리고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보다 더욱 심한 침체에 빠져서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즉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또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불평을 쏟아놓습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가장 심한 상처를 주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학대함으로써 사실은 하나님께 불평을 퍼붓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지적하신 것은 곧 이런 불신앙입니다. 찬송가 534 *어려운 일 당할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 무서운 풍랑에 두려워한 것을 보고‘믿음이 작다’책망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풍랑에도 전혀 느낌도 없고, 두려움의 감정도 없다면, 그 사람이 이상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책망하신 것은 제자들이 지나칠 정도로 두려워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제자들에게 기대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나름대로 배를 움직여보려고 시도한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 안에 일어나는 엄청난 두려움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그들이 풍랑을 보고 긴장했더라면 잘한 것입니다.
즉 *지금 우리 앞에는 엄청난 풍랑이 일어나고 있다. 대단한 위기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우리 모두 다 죽고 말겠다* 이 정도로 생각했다면, 정상적인 것이고, 전혀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다. 우리 배에는 주님도 함께 계신다. 그런데 왜 이런 풍랑이 우리에게 일어내야 할까? 그리고 이럴 때 주님은 왜 무기력 하게 주무시기만 할까? 무엇인가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닐까? 우리가 주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것이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 아닐까?’그들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침체(沈滯)에 빠졌던 것입니다.
믿음이 없을 때, 우리가 늘 하는 소리는‘왜 이런 일이 하필 나에게 일어나야 하는가?’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지금 나는 믿음이 하나도 없다. 나는 지금 영적으로 침몰하고 있고 갈 데까지 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런 소리를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인간이고, 이 세상에 사는 이상 우리에게는 얼마든지 미처 생각지 못했던 큰 어려움이 올 수도 있습니다. 진짜 믿음은 바로 그때 사용되어야 합니다.
즉 *지금 내 눈앞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지금 내 속에는 완전히 믿음이 동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주님을 의지하겠다. 주님이 지금까지 나에게 아름다운 것을 주셨으니 고난의 잔도 다 마시겠다*라고 다짐하면서 자기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두려움과 싸워야 합니다.
자기의 감정대로 갈 데까지 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작은 신앙입니다. 물론 우리가 사람인 이상 처음부터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주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여기서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주님의 생명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음란한 생각이 일어나려고 할 때, 그것을 중단하고 꾹 참습니다. 즉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생각과 감정과 싸워서 그것이 자기 인격을 정복하지 못하도록 중간에 막아버리는 이것입니다.
중간에라도 눈을 뽑거나 손을 자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큰 믿음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런 음란한 생각이 들면, 도대체 어떻게 *사람이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지 않을 수 있단 말이야. 행동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생각뿐인데*하면서 생각과 감정이 갈 데까지 갑니다. 이런 믿음을 *막가파 믿음*이라고 합니다.
생각과 감정이 갈 데까지 가고 난 후에 후회하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작은 믿음*입니다.
우리는 막다른 골목에서 피할 수 없는 환란이 닥치면 *이것으로 내 생명이 끝나는 것이 아닐까?*하는 두려운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생각과 감정이 갈 데까지 가면,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믿음을 사용해서 속에 있는 두려움을 억누르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제자들이 주님을 깨우면서 8:25절)...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불신앙입니다. *주여, 우리는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말 좀 해보십시오...*라는 항의(抗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사용해야 합니다. 언제 사용해야 합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극단적인 어려움에 빠졌고, 하나님은 주무시는 것처럼 우리를 어려움에 방치해 두실 그때 불신앙이 우리를 삼키지 못하도록 속에 있는 두려움과 싸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끝까지 갈 데까지 가는 사람은 작은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믿음은 쓰라고 주신 것입니다. 우리 속의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생각과 감정과 싸우는 것이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Ⅲ.작은 믿음과 큰 믿음의 차이
사실 호수 한 가운데서 이런 무서운 풍랑을 만나면, 믿음이 크든, 작든,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큰 믿음이나 작은 믿음이나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사실 주님이 주신 큰 믿음이든, 작은 믿음이든, 쓰십니다. 그러나 나타나는 결과는 완전히 딴판입니다. 작은 믿음은 그 어려움만 면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어려움이 지나간 후도 전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는 어려움 가운데 무사하게 살아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면서 과거와 똑같은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려움 가운데 믿음을 사용하는 사람은 폭풍속에서 하나님의 음성과 간섭하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어려움을 통과한 후, 그는 전과는 완전히 다른 상태의 믿음을 소유하게 됩니다.
8:26-27절)...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까 그 즉시 바람과 바다가 순종하면서 잔잔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나타냈습니까?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떤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그들 은 이 엄청난 기적을 보면서 나타낸 반응은 겨우‘놀랍게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다시 자기 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폭풍 속에서도 믿음을 사용하여 불안과 두려움을 이기고 끝까지 주님을 기대한 사람은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기뻐하고 춤을 추며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기쁨이 충만해서 더욱더 자신의 믿음을 사용하게 되는데, 그 다음부터는 아무 일에나 다 믿음을 적용하게 됩니다. 그는 일단 엄청난 승리를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사용한 사람에게 주시는 승리의 면류관이 무엇일까? 그것은 곧‘충만한 기쁨’입니다. 즉 기쁨의 면류관입니다.
그러나 일은 은혜스럽게 끝났는데, 기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음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큰 일이 다 끝난 후, 반성(反省)회를 하면서 서로 싸우고 상처를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려울 때, 믿음을 사용하는 사람은 폭풍우 속에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 사람의 말대로 하면, 다 살게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로마로 끌려가던 중‘유라굴로’라는 무서운 폭풍을 만났습니다.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살 소망이 끊어진 상태에서 여러 날을 먹지 못해서 기진맥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죄수 바울의 뇌리에 자꾸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 음성은 너무나 분명해서 절대 오류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극단적인 환란 가운데서 일어나 사람들을 지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모두 살 수 있었습니다. 믿음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갈 데까지 가는 사람들을 사용해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빨리 주님 앞에 자신의 믿음 없음을 고백하고 새롭게 일어서야 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100퍼센트 어두움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캄캄한 감옥 속 같은 곳에서도 마음속에는 이상하게 확신(確信)이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등불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작은 믿음’이라고 하셨는데, 이 작은 믿음은 구원받는 데 어떤 영향을 줄까? 저는 작은 믿음이라 해서 그것이 구원 얻는 데 지장을 준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예수님께서‘믿음이 없는 자들아’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믿음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단지 그들은 그 믿음으로 속에서 일어나는 불신앙을 이기지 못해서 큰 두려움에 빠졌을 뿐입니다. 그러나‘구원받지 못하는 믿음’도 있습니다. 그런 믿음은 병 치료를 받는 것으로 끝난 사람들의 믿음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로 가면 병이 낫는다고 믿었고, 또 그 믿음대로 병이 나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능히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께 나아가게 하는 매개체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병 나은 것으로 그치지 않고, 주님을 곧바로 믿는 자리로 나아오기를 원하셨습니다. 즉, 주님이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시는 것을 보고‘당신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 이십니다’라고 고백하고 믿는 신앙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그러나 병 낫는 것만 믿었던 사람들은 그가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셨을 때‘놀랍게 여길’뿐이었습니다. 즉 이상하게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큰 믿음’이나‘작은 믿음’이라고 할 때, 그 사람이 감당하는 일의 크기를 보고 그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은 매우 통이 커서 다른 사람들은 생각할 수 없는 수백 억짜리 일을 해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목회를 해도 수만 명이 모이는 목회를 합니다. 거기에 비해서 얼마 되지도 않는 사람들을 가지고 쩔쩔 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것은 은사로서의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어떤 사람에게 탁월한 리더십을 주셔서 큰 사업을 감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 해서 그것이 바로 그의 믿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없이도 리더십으로 할 수 있습니다.
Ⅳ.주무시는 주님과 명령하시는 주님
아마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다면, 정신분열증에 걸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제자들은 상반된 주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육체의 피곤을 이기지 못해 배 위에서 곤하게 주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주무시는 예수님은 진정한 인간이셨습니다. 절대로 하나님은 주무셔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시121:4절)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무셨습니다. 그것도 그냥 주무신 것이 아니라, 폭풍 속에서 제자들이 죽어가는 것도 모르고 주무셨습니다. 그런데 그가 일어나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까 마치 바람과 바다가 그의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즉시 잠잠해졌습니다.
과연 이 세상의 누가 바람에게 명령하고 바다를 책망할 수 있을까? 그분은 분명히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하나님께서 완전한 사람이 되셔서 그들 가운데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말씀 한 마디면 바람과 바다도 잔잔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 무엇이 답답하다고 이렇게 육신이 되어 피곤을 이기지 못해 배에서 주무시고 계시냐? 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은 말씀 한마디로 되지 않습니다. 그가 친히 오셔서 우리의 죄를 감당하셔야 하고,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셔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큰 혼동을 겪습니다. 그분은 사람이면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사람처럼 피곤하여 주무셨는데, 깨어나서 말씀하시니까 바람과 바다가 그분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이것은 절대로 인간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를 보아야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즉 어떻게 해야 우리가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습니까?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마음대로 하나님을 만들어서 믿지 않게 됩니다.
오직‘좋으신 하나님’만 믿었던, 사람들은 어려움이 닥쳐오면, 신앙이 뿌리채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어려움도 하나님의 손아래 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 불신앙과 두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이런 어려움을 통해 다시 한 번 우리의 믿음 없음과 연약함을 고백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어려움 중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높여드립시다. 그러면 그 어려움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아-멘
찬송가 543장 *어려운 일 당할 때*
오늘의 묵상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시37:5-6)
*매일 새벽 4-5시 기도하는 습관을 가집시다.*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46:5)
오늘의 기도제목
▣ 壬寅年 *정착과 부흥의 해*
주님! 셀(cell)공동체, 예배공동체, 선교공동체로 부흥.성장케 하옵소서.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고 하신 주님! 내게 맡겨주신 재물과 나의 생명 주님께 드려 도구로 사용되기를 원합니다.아-멘
◁가족같은 교회. 교회같은 가족▷
☞ 교갱원의 엄격한 규칙을 지켜 낙오자 없이 모두 성숙한 복된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 癸卯年 *신실하고 충성된 일꾼을 세워 성장하는 해*
※후반기는 필(必)히 행정서식을 작성제출해야 교갱원소속 A급셀(cell)로 자립 새출발 할 수 있습니다.(정착완료. 양식보존. 새벽기도. 교갱원설립후원. 춘추심방. 실명으로 소통)
후원계좌 NH콕뱅크 302-8772-0191-01(헌금 내용)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정 의 영 목사 ☎ 010-8772-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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