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책이 영지에 관한 책이다. 영지(靈地)란, 말 그대로 신비하고 신령스러운 땅을 일컫는다. 보통의 이론과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지만, 수천 년 이어져온 역사가 증명하는 땅이다. 한눈에도 수려하고 신비로운 풍광, 그리고 그 위에 세워진 사찰과 역사적 흔적들. 그곳에서 승려와 도사를 비롯한 정신수행자들은 우주의 흐름과 기운을 느끼고, 선비들은 인간됨과 마음의 결을 다듬었고, 민초들은 신산한 삶을 달래며 간절한 소원을 빌었다. 자연에 철저하게 기대어 살아야만 했던 그들은 자연에서 존재의 이유와 삶의 지혜를 온몸으로 체득하며 살았던 것이다. 자연이 곧 종교이자 지혜의 보고요, 치료사였던 셈이다. 코로나로 인해 지친 우리에게 기운을 주는 땅의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오늘날의 우리는 어떠한가. 도시 문명이 발달하고 자연을 자원으로만 보면서 인간은 점점 자연으로부터 멀어져 왔다. 현대인들이 겪는 여러 정신적 문제들은 어쩌면 여기에서 기인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 조용헌은 사주명리학자로, 강호동양학이라는 독보적 분야를 개척하며 문필가로 활동해 오고 있다. 청년기에 도사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전국의 내로라하는 명산을 찾아다닌 그는 일찌감치 물아일체, 자연과 하나가 되는 순간에 인간 삶의 모든 괴로움이 떨어져나간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었다. 평범한 여행가가 아닌 칼럼니스트로서의 집필 활동은 바로 자연의 기운을 통해 지혜와 위로를 전해주기 위한 작가만의 방편이었다.
2021년, 인류 문명의 대전환이 이뤄지는 시기라는 전망이 쏟아진다. 그 틈에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새롭게 경험하면서 한편으로는 혼란과 불안, 무력감에 빠져들고 있다. 특히 코로나 바이러스로 개인이 고립되다시피 하면서 혼자서 감내해야 하는 시간들이 길어지고 있다. 저자는 이 시국을 우려한다. 사람은 바깥 즉 자연에서 공급받아야만 하는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물, 바람, 숲, 흙, 햇빛, 달빛 등 이런 순수한 자연의 에너지를 공급받아야만, 몸과 마음의 기운이 원활히 돌아가고, 바른 생각과 바른 판단으로 삶을 조화롭게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영지란, 달리 말하면 명당(明堂)이다. 명은 태양과 달이며, 아침과 저녁, 따듯함과 차가움, 열정이자 이성이다. 양쪽의 기운이 균형을 이루는 땅에서 특별한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신라말기 도선 국사는 전국에 3,600군데의 명당이 있다고 설파한 바 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 자체가 명당이자 영지라는 말이다. 지난 40여 년 동안 중국과 일본, 유럽 등 전 세계의 명산을 찾아다녔던 저자는 국내 영지와 명당도 해외에 뒤지지 않음을 체험했다.
저자가 말하는 영지의 기준은 첫째, 지리적으로 강한 기운이 온몸에 전해진다. 둘째, 풍수지리적으로 절묘한 위치에 자리한다. 셋째, 풍광이 매우 뛰어나다. 넷째, 기록과 구전으로 신비로운 전설이 전해온다. 다섯째 큰스님이나 대학자 등 역사적 인물이 태어나거나 머물렀다. 여섯째 승려와 도사, 선비, 민초들의 수많은 발길이 끊이지 않는 기도처이다. 일곱째 유서 깊은 사찰이 자리한다(고대의 영지 터에 불교가 들어와 자리잡음). 여덟째 풍부한 사료와 문학,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 있다.
그 가운데 저자와 인연이 있고, 이야기와 역사적 자취가 남아 있는 영지를 이 책에 우선 소개한다. 영지의 첫 번째 기준이 되는 ‘터의 기감’을 보통 사람들이 느끼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지면에서 흥미로운 이야기와 사료로써 영지를 만난 다음, 현장에서 느끼는 감은 더욱 생생하게 다가올 것이다. 오대산 적멸보궁, 계룡산 등운암, 가야산 해인사, 팔공산 갓바위, 덕유산 영각사, 대성산 정취암, 경주 문무대왕수중릉 등, 책에서 소개하는 영지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익숙한 산, 단순한 지명으로만 알고 있었던 곳에 숨은 이야기들에서 신선한 감동과 함께 옛 사람들의 치열한 삶과 지혜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산의 풍수와 기운을 느끼고 이야기 등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산이 나와 맞을지 자연스럽게 짐작해 보게 된다.
산마다 암자마다 다 기운이 다르다. 풍광이 다른 것은 당연하지만 그 터에서 올라오는 땅 기운이 다르다는 것이 중요하다. 비유하면 비타민 같은 터가 있고, 단백질이 올라오는 터가 있고, 어떤 터는 칼슘에 해당한다. 칼슘이 부족할 때는 칼슘이 많은 터에 가서 몇 년 살다 보면 보충이 된다. 타이밍마다 부족한 기운이 다를 수 있다. 공부의 정도에 따라 요청되는 에너지도 다 다르다. 특히 사람의 기질에 따라 다르기도 하다. 성질이 급한 사람들은 물이 감아 돌거나 호수가 앞에 보이는 수기가 풍부한 터에서 살면 자연히 완급 조절이 된다. 반대로 내성적이면서 조용한 성격의 사람들은 바위가 험하게 돌출된 도량에서 살다 보면 또한 보강이 된다. (본문 60쪽)
논리와 이성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 앞에서 인간은 절망하지 않고 자연에 기대어 신을 불렀고 그렇게 온갖 난관을 극복해 왔다. 자연스럽게 저자는 불교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특히 지리산 편에서는 ‘당취’ 이야기를 심도 깊게 파헤친다. 당취는 조선시대 승려들의 비밀 결사 조직을 일컫는 용어로, 서민들을 착취하는 양반이나 부자, 벼슬아치들을 응징하는 조직이었다. 임진왜란(1592~1598년) 당시 주요 전투에서는 서산 대사를 중심으로 한 승군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지리산을 거점으로 활동한 당취들의 흔적을 오랫동안 좇아온 저자는, 깨달음을 구하고 살생을 금하는 수행자들이 왜 칼을 들 수밖에 없었는지를 밝혀낸다. 이밖에도 자장, 한암, 탄허, 청화, 초의, 검단 스님들의 칼끝같은 수행과 결기를 통해 영지가 불교를 만나면서 영적 기운이 더 한층 깊어졌음을 알 수 있다. 영지는 홀로 영지일 수 없다. 더 좋은 삶,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정성어린 기도와 무수한 행이 있기 때문에 영지로 거듭난 것이다.
40여 년 전국의 명산을 누빈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새롭게 영지를 답사했다. 전에 가 본 곳이라도 대부분 다시 방문했다. 지리산 영랑대의 경우 해발 1,700미터 정상까지 15kg짜리 배낭을 메고 왕복했다. 찬 부슬비를 맞으며 온몸의 기운을 소진한 강행군이었다. 생생한 현장감을 살리고, 더불어 그 사이 달라진 작가 자신의 생각을 새롭게 정리하기 위해서이다. 덕분에 지리산 영랑대의 경우, 신라시대 화랑들이 이곳에서 어떤 마음으로 훈련을 받았는지, 왜 하필 이 깊은 산속에서 야영을 했는지 감춰진 사실들을 밝혀냈다. 또 지리산 빗점골에서 25년째 작은 오두막에서 수행하는 스님을 만나 한담을 나누며 “한 곳에 집중하면 그것이 도”라는 이치를 구하기도 했다. 멋진 풍광과 기운, 그리고 그 속에서 만나는 여러 인연들로 작가는 삶의 허무함과 고달픔을 달랜다고 고백한다.
영지는 신령한 땅이다. 성스러운 장소이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지는 곳이다. 수록된 227컷의 사진과 화보을 보는 것만으로도 영지의 신령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나의 존재 이유와 삶의 진가를 비로소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