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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_마지막 수업을 위한 수정본
- 메이
나는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노동운동을 영상으로 기록하는 노동자뉴스제작단이라는 단체에 소속된 활동가, 그리고 열한 살 아이의 엄마다. “6년”은 개인 작업으로 진행 중인-다큐멘터리의 주인공,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과 만난 2011년부터 2017년 지금까지의 시간이다. 이 6년은 다큐멘터리라는 결과물로 완성되지 못해 아직 끝나지 않은 시간이기도 하다. 끝내려고 발버둥 칠수록 더욱 조여드는 거미줄 같은 시간 위에서 난 죄 없는 다른 이들을 미워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나를 증오했다. 그리고 그런 나의 상태를 치유하려고 숱하게 노력했다. 이제 와 돌아본다. 작업은 못 했지만 그 6년의 발버둥이 내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아이가 태어나 네 살이 되도록 가계형편은 점점 나빠졌다. 아이가 태어날 무렵 반지하 단칸방의 전세금을 빼서 주택담보대출을 잔뜩 끼고 산 아파트 대출이자는 매달 무섭게 아가리를 벌렸고, 남편이 운영하는 국선도 도장은 비싼 월세를 내고 나면 남는 게 없거나 적자였다. 우리 집의 안정된 수입은 당시 내가 노동자뉴스제작단에서 상근활동을 하며 받는 80만 원이 전부였다. 짬짬이 알바도 하고, 시댁 식구들에게 돈을 꾸기도 하고 당장 몇만 원이 없어 힘든 달에는 아이 돌 반지를 야금야금 팔아 생활했다. 한창 유행하던 신조어, 하우스푸어이자 워킹푸어가 따로 없었다. 집을 내놨다. 시세차익은 바라지도 않고 그간 힘겹게 낸 대출이자라도 건졌으면 했는데 그런 바람마저 뻥 차였다. 헐값에 겨우 팔고 났더니 다시 집을 구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남편의 도장을 좀 더 싼 월세 건물로 옮기면서 도장 한 쪽에 칸막이 공사를 해 살림 공간을 마련했다. 다시 마련한 옹색한 집이 서러웠는데 거기다 엄마와 이혼하고, 경비 일을 하다 실직한 나의 아버지마저 모셔야 했다. 원래 어른이라면 돈 벌어 결혼하고 아이 낳고 집 한 칸씩 늘려가며 살다 자기 집 장만하는 거 아니었나? 선량한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도 제대로 된 어른 구실도 못하고, 자꾸만 내쳐지는 것 같아 억울했다. 돈을 쫒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옳다고 믿는 일을 하는 게 사치인가, 왜 좋은 사회 만들려고 노력하는 활동가들의 희생은 당연시하면서 활동비는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가, 내가 활동하는 공간에 처음으로 문제의식이 생겼다. 하루하루 자라는 아이와 기쁘게 눈 마주치며 행복해지고 싶은데 현실은 늘 일에 허덕이고 시간에 쫓겨 아이의 존재가 버거웠다. 왜 나는 아이 엄마가 된 이후 영상활동가의 세계에서도, 다큐멘터리 감독의 세계에서도 그저 일하는 능력이 떨어진 천덕꾸러기가 된 걸까, 누구나 행복한 세상 만들자는 사람들이 일하는 공간이 이렇게 엄마 활동가를 배려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원망 섞인 질문이 절로 튀어나왔다.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있지만,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고, 오히려 계속 끝 간 데로 떠미는 것 같은 삶이 힘겨워, 사람도 싫고 일도 그만두고 싶었다. 싸늘해진 내 마음처럼, 4월인데도 춥다고 기억되던 그해 봄, 무심코 넘기던 시사 주간지에서 그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사진을 보게 됐다.
사진 속 그들은 낯설었다.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공장을 점거하고 싸우던 투사의 모습이 아니라 집단 상담을 하느라 둥그렇게 앉아 있는 평범한 중년 아저씨의 모습이었다. 그중에는 곧 무너져내릴 것처럼 울고 있는 노동자도 있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뉴스 화면에서 사라졌을 뿐인데 그들을 잊고 있었다. 파업 이후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한 번도 떠올려보지 않았다. 투쟁하고 파업할 때는 관심 가지다가 그것이 끝나고 나면 각자의 일상으로, 다른 관심거리로 눈을 돌리는 사람들과 나는 뭐가 다른가, 내가 옳다고 믿는 노동운동의 현실은 고작 이런 건가?사람 귀한 줄 모르고, 목표를 위해 활용하다 쓸모없어지면 거림낌 없이 버리는 자본주의의 생리와 뭐가 다른가? 어느날 갑자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상의 궤도에서 내쳐진 사람들, 성실하게 일했을 뿐인데 인정은커녕 하루아침에 버림당한 존재의 참담함, 거기다 더해진 고립감이 내 회의감과 연결돼 증폭됐다. 둥그렇게 앉아있는 그들 사이에 나도 들어가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울고 싶었다. 여기 이들이 이렇게 아파하고 있어요. 누구보다 “우리”라고 불리는 내가 일하는 공간, 노동운동한다는 사람들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그렇게 2011년 초여름, 일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을 잠시 접고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집단심리치유 과정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들과 만났다.
촬영하면서 참 많이 울었다. 당시 촬영본에는 그러면 안 되는데 카메라 뒤에서 눈물 콧물 훌쩍이는 나의 소리도 담겨있다. 그렇게 울고 나면 한결 내 마음도 가벼워지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그들의 이야기에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내 안의 억울함, 분노, 슬픔 때문에 우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안의 쌓여있는 그런 감정들은 때로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공감하는데 방해물이 되는 것 같았고, 겉으로 드러나는 나의 모든 표현을 검열하게 했다. 그렇게 말해도 될까? 웃어도 될까? 이게 옳은 걸까? 조심스러워하고 눈치를 살폈다. 가벼워지고 싶은 생각이 절실했다. 아이에게서 먼저 신호가 왔다. 아이가 다섯 살 되던 해, 어린이집 원장님은 내게 조심스레 아이 심리검사를 권유했다. 친구에게 별 관심이 없고,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애써 담담한 척하며 어린이집을 나섰는데 무릎이 꺾였다. 자책감이 밀려왔다. 사무실에 일손이 딸려 아이 낳고 2개월 만에 반상근으로 복귀한 나는 사무실에 있는 시간 외에 아이를 돌봐야 하는 오전과 밤에도 일을 해야 했다. 아이가 어릴 때는 아이 재워놓고 일하고, 젖 먹여놓고 일하다, 아이가 커서 혼자 앉고 걸어 다닐 때부터는 뽀로로 같은 만화를 컴퓨터로 보여주며 일할 시간을 확보했다. 주위 엄마들은 그렇게 일찍 영상에 노출시키면 안좋다고들 이야기해줬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난 시간들을 무수히 되감기해보며 자폐검사를 하고, 지능발달 검사를 하고, 부모양육태도 검사를 받았다. 아이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데, 그런 마음을 또 아이에게 들키면 안될 것 같아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척 노력하며 아이손을 잡고 병원과 상담기관을 다녔다. 병원의 검사에서는 별 이상 없는 것으로 나왔지만, 사회성 발달을 위해 아이는 놀이치료를 하기로 했고, 엄마인 나도 상담을 진행했으면 좋겠다는 권유를 받았다. 놀이치료 상담을 위해 만났던 상담 선생님은 내가 아이를 가슴으로 품지 않고 아이 키우는 일을 성공적으로 마쳐야 할 하나의 과업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 아이의 정서발달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보이지 말아야 할 곳을 들킨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리고 겁이 났다. 뭐하러 이렇게 아등바등 사는 것일까 다시 회의감이 고개를 쳐들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일찍 하원 시켜 놀이치료상담을 받으러 다녔다. 시간을 마련하는 것도 비용도 부담스러웠지만, 그것만큼은 확보하고 싶었다. 놀이치료 받는 아이를 기다리며 나는 대기실에서 책을 읽거나 핸드폰을 들여다보거나 멍때렸다. 그리고 끝내고 나온 아이와 짜장면이나 떡볶이로 종종 외식 했다. 어느 날 문득 그 시간이 내게도 쉼이구나 느껴졌다.
2012년 봄,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은 정리해고 이후 동료의 스물두 번째 죽음을 겪으며 서울 한복판 대한문에 분향소를 차렸다. 더는 죽음이 확대돼서는 안된다는 절박함이었다. 분향소를 절대 허용할 수 없다는 서울시와 경찰들의 방침으로 매일같이 충돌이 발생했다. 덕분에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정리해고와 그로 인한 연이은 죽음은 신문과 뉴스를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나도 바빠졌다. 집단 상담만 기록했던 내 카메라가 다시 시작된 그들의 투쟁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쌍차문제에 관심을 가질 때 더욱더 많이 알려내야겠다 싶었다. 그래서 대한문 분향소 투쟁을 속보 영상으로 만들어 발 빠르게 알려낼 영상팀도 꾸렸다. 하지만 투쟁하는 그들에 비해 난 늘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괴로웠다.
쌍차 노동자들의 전쟁 같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난 그럴 수 없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서야 나는 촬영을 하러 대한문으로 나갈 수 있었고, 아이가 하원 하는 시간에 맞춰 돌아가야 했다. 그래도 아이는 어린이집에 제일 늦게까지 남아있는 경우가 많았고, 주말이면 촬영하는 나를 따라 대한문 분향소에 함께 나오기도 했다. 아이가 분향소에서 뭘 하며 놀 수 있나, 촬영하느라 아이를 방치하는 나도 싫었고, 아이 신경 쓰느라 촬영에 집중할 수 없는 것도 싫었다. 미안한데 계속 아이 행동거지에 짜증 내는 나는 엄마로서 최악이었다. 쌍용차 노동자들의 투쟁 기록 외에 노뉴단에서 진행하는 다른 영상 프로젝트 일도 해야 했다. 그렇지않으면 활동비를 마련할 수가 없다. 집, 사무실, 대한문을 세 꼭지점으로, 쳇바퀴 도는 다람쥐마냥 종종댔지만 늘 죄책감이 따라다녔다. 아이와 있는 시간엔 대한문 분향소 천막을 지키고 있는 쌍차 노동자들에게 미안했고, 쌍차 노동자들 곁에 있을 땐 아이가 맘에 걸렸다. 개인 작업으로 쌍차 노동자들을 촬영하는 나를 배려하느라 가중된 다른 영상작업들을 껴안고 있는 노뉴단 동료들에게도 미안했다. 어디에 있어도 내가 100프로로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시간들에 마음이 지쳤다. 몸도 무거워져, 점점 촬영하러 가는 날의 간격을 넓히기도 했고, 도망가듯 몰래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쌍차 해고 노동자들은 대한문 분향소를 시작으로 새누리당사 앞 농성, 평택 송전탑 고공농성, 단식농성, 오체투지, 굴뚝 농성 등 힘겨운 투쟁을 계속 이어갔다. 그리고 나는 이대로 포기하지 않기 위해, 도망가지 않기 위해 심리치유를 시작했다. 에니어그램 검사를 해보고, 타로 공부를 하고, 멀리 인천으로 상담을 받으러 다니기도 했다. 이기적으로 보이더라도 나를 지켜야 다른 사람도 지킬 수 있다는 걸 끊임없이 되뇌었다. 내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내 생각을 드러내지 않으면 작업을 할 수는 없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당시 쌍차 다큐는 무슨 내용으로 만들 거야 묻는 사람들에게 난 자세히는커녕 제대로 된 문장 하나도 말하지 못했다. 외국어를 배우는 심정으로 글쓰기 공부를 시작했다. 그사이 아찔한 벼랑 위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듯, 나를 전전긍긍하게 하던 쌍차 해고노동자들과도 점점 친해졌다. 카메라 뒤에 숨어 그럴듯한 광경을 담으려던 저격수가 아니라 가끔은 카메라를 밀쳐두고 눈 마주치며 대화했다. 때로는 아무것도 안 하면서 힘겨워하는 그들 옆에 그냥 있기도 했다. 그렇게 친구가 됐다. 그리고 내 친구들은 2016년 2월, 길고 긴 투쟁 끝에 일부이긴 하지만 복직을 했다. 그들의 복직을 지켜보며 나 또한 길고 긴 터널에서 빠져나온 게 느껴졌다.
네 살이던 아이가 이제 열한 살이 됐다. 일 년 동안 했던 놀이치료 덕분이었는지, 그 시간을 온전히 함께 나와 보낸 덕분인지, 아니면 내가 가벼워져서 그런지, 아이는 잘 지낸다. 아직도 친구보다 책과 컴퓨터 보는 시간을 더 좋아하지만 밤늦게까지 일하는 엄마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책에서 배운 것들을 아빠와 수다 떨기 좋아하며, 사람이 초등학교는 나와야 한다는 가르쳐주지도 않은 말을 하며 씩씩하게 학교로 향한다. 그래도 아직 엄마와 다큐감독의 시간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한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아이에게도, 쌍차 해고노동자들에게도 100%로 존재할 수 없는 게 미안하다. 하지만 이제는 그 미안함으로 나를 더는 짓누르지는 않는다.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시간은 없다. 나는 한정된 내 시간을 쪼개 엄마 역할을 했고, 쌍차 노동자들의 투쟁을 기록했으며, 노뉴단 활동을 했고,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가졌다. 무엇하나 양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쌍차 노동자들을 오랫동안 지켜보며 생각했다. 그들은 고통받고 있는 게 아니라 싸우고 있다는 걸, 모두 복직하겠다는 희망을 품고 밤을 이겨내고 겨울을 버텨내고 있기에 존경받을 만하다는 걸. 투쟁은 결국 삶이다. 튕겨내려고 하는 세상에서 버티기 한판과도 같은 삶. 버티고 버텨야 구석진 한 귀퉁이 자리를 내주는 삶. 그 징글징글한 버티기의 시간이었던 지난 6년을 사람들과 나눠보고 싶다. 그 시간을 잘 버텨낸 내 친구들을 주인공으로 돋보이게 하고 싶고, 앞으로도 더 잘 싸울 수 있도록 격려하고 싶다. 그리고 다큐 못만들었다고 구박하고 무시하는(?) 내 주변사람들에게도 내 6년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해보고 싶다. 6년의 첫 키워드, 증명이 이제 겨우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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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메이, 한달음에 읽고 말았어요. 너무나 소중한 글! 왜 제게 이리 소중하게 느껴지는지는 조금 더 생각을 가다듬고 댓글 남길께요. 이 글을 메이의 육성으로 들었을 학인들, 부럽습니다!
제람! 잠시나마 핸드폰 너머로 엠티의 순간을 함께 해서 기뻤어요
인사 전해주려고 핸드폰 들고 뛰던 제람의 모습이 기억에 남네요
"소중한 글"이라니...괜히 기분이 좋아요^^
촬영본에 담긴 메이의 눈물, 콧물 훌쩍이는 소리 잘 듣고 보았어요. 아드님 얼굴도 생각나고. 글쓰기 모임 하면서 반성도 했지만 불필요한 죄책감, 강박 벗어 던질 수 있어 좋았어요. (요새는 주말마다 태극기 부대가 대한문 앞을 차지하고 있지만)대한문 지날 때마다 메이의 눈물, 콧물 생각날듯. 자유롭게 가볍게 메이가 다큐 완성하길 바랍니다. 상영 시 꼭 연락주시고요. 나도 돌반지 팔아 쌀 사먹고, 어린이집 비 내고 했는데. 우리 새끼들 금값 먹고 자랐으니 귀하게 클 것이오. ㅎㅎ
콧물은 잊어줘요ㅋㅋ
자유롭게! 가볍게! 깻잎의 주문 넘 고맙고 힘이 됩니다
그 때 금값이 한창 올랐을때라 톡톡히 덕좀 봤죠^^
메이.... 이번 글 너무 좋았어요. 물론 그것보다 더 감동적인 것은 6년동안 놓치 않고 지내온 메이의 시간이겠죠. 카메라 너머의 메이 눈은 늘 따뜻한 것 같아요. 언제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 같은...
메타포라 통해 메이를 알게되서 반갑고 좋았어요. 또 봐요 우리
아...아쉬워요~ 나루랑 좀 더 찐~한 시간들을 보내고 싶었는데...
또 봐야죠 당연히! 와식의 공간에서 만나면 더욱 더 좋을듯 ㅋㅋㅋ
무엇 하나 양보할 수 없었던 메이의 삶과 버티고 버텨야 한구석이라도 차지할 수 있는 해고 노동자의 삶이 교차하네요. 메타포라3기의 마지막 과제가 6년된 과제의 마지막을 가리키고 있는듯 해요. 그 방향으로. 주저하지 말고. 달려요, 우리! ('우리'는 오바지만^^ 마음이 그렇다고요. 달려요, 메이! 우리는 박수를 치겠삼.)
마고! 찡~~~~해지네요. 흐흐
고마워요. 길고 재미없는 글 읽어줘서,응원해줘서...
마고 댓글을 읽으니 초등학교 운동회때 달리기 출발선에 서서 엄청 떨며 출발 신호를 기다리던 어떤 아이가 자꾸 생각나요^^
@메이 일단 달리기 시작하면 '달리기'에만 집중할 수 있을 거예요. 언제 떨었냐는 듯, 언제 걱정했냐는 듯. 두 발 모두 땅에서 떨어져 허공을 짚는, 그 순간의 자유를 느껴요^^
@마고 남풍이 분다! 달려야겠다 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