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온병의 시작은 스탠리가 아닌 써모스
시작하기 전에
오늘 소개할 최초의 브랜드는 써모스입니다. 보온병을 최초로 만든 곳이죠. 국내에서는 스탠리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지지만 외국에서는 포크레인, 호치키스처럼 보온병을 써모스라고 부른다고 하네요.
1980년대 일본 회사에 매각된 이후 디자인이 조지루시 보온병처럼 바뀐 것 같아 아쉽습니다. 반면 스탠리는 써모스보다 7년 늦게 등장했지만, 클래식 라인을 아직도 출시하고 있는데 말이죠. 이럴 때는 어떤 브랜드의 제품을 구매해야 할지 고민이 많이 되는데요. 결국 써모스를 구매해서 작년부터 사용하고 있답니다.
제가 사용하고 있는 모델은 ‘써모스 퀵오픈 스트레이트 텀블러’인데요. 실제로 사용한 소감은 엄청 가볍고, 뚜껑을 한 바퀴만 돌리면 열려서 편리합니다. 개인적으로 텀블러는 세척이 불편해서 잘 안 쓰게 되지만, 텀블러를 자주 쓰시는 분이라면 추천할 만한 제품인 것 같습니다.
1. 발명가와 사업가는 다르다
19세기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대학에는 극저온에 관해 연구하는 화학자 제임스 듀어(James Dewar)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가스가 액화될 정도로 극저온으로 냉각시키는 것은 값비싼 작업인데요, 듀어는 그 비싼 공정을 들여 만든 액체들이 증발하는 것을 막아야 했습니다. 1892년 여러 시행착오 끝에 유리로 된 플라스크 2개를 겹치고 그사이의 공기를 빼면 온도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죠.
듀어는 유리 기술자였던 라인홀트 부르거(Reinhold Burger)를 고용해 자신이 발견한 방식으로 단열 플라스크를 제작해 실험에서 유용하게 썼습니다. 이 단열 플라스크 덕분인지 듀어는 1898년 최초로 액체 수소 생산에 성공하고 노벨상 후보에도 오릅니다.
하지만 특허 문제로 알프레드 노벨과 사이가 나빠져서인지 노벨상은 받지 못했고, 단열 플라스크에 대한 특허도 내지 않습니다. 그래도 듀어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극저온 액체 단열용기를 ‘듀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듀어에게 단열 플라스크를 제작해 주던 라인홀트 부르거는 이 단열 플라스크가 일상생활에서도 유용하게 쓰이리라는 것을 직감합니다. 부르거는 단열 플라스크에 보호 금속 케이스를 씌어 1903년 일상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단열 용기에 대한 특허를 받죠. 이듬해에 Thermos라는 상표를 등록하고, 1906년에는 알버트 아슌브레너(Albert Aschenbrenner)와 구스타프 팔렌(Gustav Robert Paalen)과 함께 GmbH* 회사를 설립합니다. 뒤늦게 드워는 자신의 발명품에 대한 지적재산권을 주장하기 위해 소송을 제기했지만 패소합니다. 이후 1907년 써모스 GmbH는 써모스 상표권을 3곳에 매각해 미국, 영국, 캐나다에서 독립적으로 운영됩니다.
참고로 Thermos 라는 브랜드명은 이름 공모전을 열어 당선된 이름으로 “뜨겁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Therme”에서 유래한 것이죠.
- GmbH : 독일의 유한책임회사, 오너가 기업의 채무에 대한 책임이 없다.
2.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써모스
1907년에 세워진 미국의 써모스는 써모스 보온병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1909년 알래스카-유콘-태평양 박람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고, 그 외 7개의 세계 박람회에서 수상하면서 큰 관심을 이끌었거든요.
영국의 써모스에서는 1911년 유리 충전재를 최초로 기계 생산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로써 유리 진공 기술 분야를 선도하고, 공정을 자동화함으로써 생산 속도를 높일 수 있었죠. 이 영향으로 써모스 제품의 인기는 높아졌고, 공장을 계속해서 옮기며 생산량을 늘립니다. 1923년에 출시한 대용량 보온병인 블루 보틀과 점보 저그도 인기를 끌며 사업은 순항하죠.
※ 참고로 스탠리는 1913년에 금속 진공격벽 구조 보온병을 출시하며 등장합니다.
3. 아웃도어에서 요긴했던 보온
써모스 보온병은 20세기 초반의 탐험가들에게도 필수품이 되었는데요. 극지탐험가 프레데릭 쿡(Frederick A. Cook), 남극을 탐험한 어니스트 새클턴(Ernest Henry Shackleton), 북극점에 최초로 도달한 로버트 피어리(Robert Edwin Peary), 비행기를 발명한 라이트 형제 등이 써모스 보온병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죠. 뿐만 아니라 1950년대 프랑스 등반가들의 안나푸르나 1봉 초등, 1953년 영국의 에베레스트 초등, 1954년 이탈리아의 K2 초등 때도 써모스 보온병이 함께 했습니다.
탐험은 물론 전쟁에서도 요긴하게 사용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영국의 써모스는 영국군에게 보온병을 제공했는데요, 천 대의 폭격기가 출격할 때마다 1만 개의 써모스 보온병이 함께 갔다고 하죠. 미국의 써모스에서도 전쟁 동안 보온병 생산량의 98% 이상이 군사용과 원자력 연구소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써모스 보온병은 전시동안 널리 사용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써모스의 제품은 인기를 끌게 되는데요. 일상생활에서뿐만 아니라, 과학, 의학, 산업 분야에서도 유용하게 사용됩니다. 기름 퇴적물 감지, 열대어 운반, 혈청 및 조직 보존 및 운반 등에 사용되었죠.
4. 보온병? 커피포트가 있는데 왜 씀?
써모스는 1966년 스테인리스를 이용한 보온병을 출시합니다. 1985년에는 커피 버틀러를 선보이며 큰 인기를 얻고요. 1988년에는 스테인리스보다 내구성이 좋은데 가벼운 티타늄 소재의 보온병을 출시합니다. 티타늄 보온병은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전문 산악인들에게 인기였다고 하죠.
이처럼 여러 제품을 출시하며 전성기를 누리던 써모스는 다양한 가전제품이 나오면서 위기에 처합니다. 특히 커피포트의 등장으로 따뜻한 커피를 오래 유지할 수 있게 되자, 가정 내에서 보온병에 대한 필요성이 줄어들죠. 결국 써모스는 1989년 일본의 고압가스 회사인 일본산소(Nippon Sanso, 현 다이요닛산)에 매각됩니다.
고압가스 회사라고 해서 뜬금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요. 사실 일본산소는 써모스를 인수하기 전인 1978년에 세계 최초로 스테인리스 보온병을 개발하며 보온병 시장에서도 이름있는 기업이었습니다.
5. 그릴 사업으로 잠깐의 외도
일본산소에 매각된 써모스는 성장이 정체되어 있던 보온병 대신 다양한 시장에 도전합니다. 1989년에는 보온병 기술을 응용한 진공 보온 조리기 셔틀쉐프를 발매하죠. 셔틀쉐프는 한 번 조리한 제품을 다시 가열하지 않고 보온을 유지한 상태에서 그대로 먹을 수 있는 장치였어요.
1990년에는 몬테 피터슨(Monte Peterson)을 써모스 CEO로 영입하며 당시 시장 규모가 연간 10억 달러였던 가정용 바비큐 그릴의 신제품 개발을 추진합니다. 1993년 출시한 써모스 전기 그릴은 돔 형태의 뚜껑으로 열기를 보존하고, 기존 그릴에서 열선의 위치를 개선한 장치였는데요. 299달러라는 비교적 높은 가격대에도 첫해부터 히트하며 전년 대비 매출액 13% 증가, 시장점유율 2%에서 20%로 증가하는 성과를 이뤄내죠.
그렇게 그릴 회사가 되나 싶었는데, 다행히 1996년 그릴 사업을 매각하고 원래의 단열 용기 사업으로 돌아옵니다. 2005년에는 진공단열 커피메이커라는 요상한 제품을 출시하기도 하지만, 별 탈 없이 보온병 사업을 현재까지 이어 오고 있죠.
참고
첫댓글 보온병에 이런 깊은 내막이 있었군요
알고나면 더 유익하게 잘 활용케 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사소한 것들의 역사는 깨알정보 입니다~^^
그렇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