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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알의 희망(검열삭제본)
信天함석헌
희망 전에 현실 눈뜨라
씨알 여러분, 우리는 희망을 말하려 하지만 희망을 말하기 전에 우선 우리 현실에 눈을 뜨지 않으면 안됩니다. 현실을 모르고서 그리는 희망은 하나의 꿈 밖에 되는 것 없습니다. 사람들은 툭하면 “꿈을 가져라!” 하지만 그 소리 잘못 들었다가는 망하는 소리 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하지만 그것도 잘못된 말입니다. ‘잘’ 보다는 ‘바로’ 가 문제입니다. 잘은 본능적으로 알지만 바로는 깊이 생각하고 힘써 배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생각은 없이 잘 살기만 하자는 말은 귀에 쏙 들어가긴 쉽지만. 그것은 사기, 횡령, 살인, 강도 하는 것들도 문제없이 동의할 줄 압니다. 덮어놓고 잘 살아보자는 것은 마치 눈을 싸매어 주는대로 내버려 두고 북소리에 따라 빙글빙글 춤을 추며 신이 나서 돌아가는 어리석은 계집종과 마찬가지 입니다. 사람은 꿈도 있어야 하고 잘살잔 욕심도 있어야지만, 그보다도 더 필요한 것은 깨는 일입니다. 현실에 눈을 뜨고 바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역사의 의미는 현실 속에 나타나 있고 현실의 촛점은 나 곧 자아(自我)에 있습니다. 내가 뭔지, 내 선자리가 어디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그것도 모르고 꾸는 꿈은 정말 자면서 꾸는 허망한 꿈입니다.
눈을 싸매인 채 돌아가며 추는 춤은 갑자기 한 순간에 구렁에 떨어져 누구를 위해 장난감이 됐었던 지도 모르고 죽어버리는 미친 노름뿐입니다.
예수께서는 멸망하는 시대에 나셔서 악독한 정치 밑에 희생이 되어 목자 없는 양떼 같이 헤매는 씨알들을 건져주시려고 “목마른 사람은 내게로 오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은 내게로 오라” “나는 세상의 빛이라.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하셨는데, 그것을 위험시하는 지배자들이 반대하여 말하기를 “당신이 당신을 증거하니 그 증거는 무효라” 했을 때 대답하시기를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 말은 참되다” 하셨습니다. 이 말이 아주 중요합니다.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종교적 깨달음과 역사의 이해가 있어야 사람입니다. 그래야 자기가 살고 남을 살릴 수 있는 바른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본능대로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서 나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깨달은 것이 인간 살림의 시작입니다. 그것을 철학의 말로 한다면 생명에서 나와서 생명으로, 혹은 도(道)에서 나와서 ‘도’ 로 돌아간다는 것이고. 역사적으로 하면 뜻에서 나와서 뜻을 이룸으로, 뜻에 돌아가는, 그리하여 영원히 자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러한 정신적인 의미의 실현이 없다면, 이름이야 국가라 했거나, 민족이라 했거나. 또 무엇이라 했거나간 모두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하늘은 모르는 “땅에서 나온” 소리, 정신적인 것은 생각도 하지 않는 “인간적인 기준에서” 하는 소리입니다.(요한 8장 15절) 나무를 뿌리도 잎도 가지도 다 잘라버리고 나무통만 남으면 죽은 나무이듯이, 인생을 그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것을 가르쳐 주려도 않고 맹목적으로 잘 살아보자고만 하는 정치는 사람 속이고 세상 망가치는 정치입니다. 그것은 참이 아니고 거짓입니다. 살자는 욕심만 있고 뜻 찾을 줄 모르는 무지한 귀에는 그런 말만이 가장 좋게 들리기 때문에 씨알을 무식하게 만들어 놓고 나라를 도둑해 자기만을 위하려는 간악한 지배자들은 언제나 잘 살게 해준다, 복지사회를 이루게 한 다, 하는 것을 소리를 높여 선전하지만. 그것은 마치 나무를 크게 하기 위해 뿌리와 잎을 다 잘라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씨알은 그런 것을 믿어서는 아니 됩니다. 씨알이 믿고 충성을 바쳐야 할 분은 오직 하나 〈진리의 임금〉 뿐입니다. 임금이라지만 사실은 임금이 아닙니다. 임금이란 것은 지배자들이 자기를 숭배시키기 위해 만든 우상입니다. 그 우상을 깨치고 인간을 영원히 해방시켜 자유하게 하기 위해 부득이 알아듣도록 하는 칭호가 그것입니다. 참에 어찌 높고 낮고가 있으며 다스린다 복종한다가 있겠습니까? 내가 여러분을 향해 소경 귀머거리가 됐다고 하는 것은 이 우상들이 여러분 위에 씌워놓은 주문(况文)을 스스로 벗도록 하기 위해 하는 말입니다. 꿈은 깨는 순간 다 허망한 꿈이 돼버리는 것이고, 주문은 “주문이었구나!” 하는 순간 다 벗겨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 하는 것입니다.
눈이 어두운 것만이 소경이 아니요 귀가 먹은 것만이 귀머거리가 아닙니다. 정치가 제도적으로 언론을 막아,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보고 듣지 못하게 하고, 보아서 안되고 들어서 안될 것만을 보고 듣게 하면 씨알 전체가 눈과 귀를 가진 채 소경 귀머거리가 됩니다. 무엇이 보고 들을 것이고 무엇이 보고 들어선 안되는 것입니까? 사실은 보고 들어야 하는 것이고 조작은 보고 들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조작입니까? 모든 사람이 다 스스로 하는 인격을 가지고 서로 협동하여 살자는 정신에서 자연과 사회를 위해 마음껏 일하는 데서 나오는 결과가 사실이고, 다스린다는 이름아래 생산적인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한 것을 나라라는 이름을 빌어 뺏어다가 자기네의 안락한 생활본위로 모든 것을 지배하려는 사람들이 자기네 하는 일을 합리화하고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모든 제도 선전, 설명 보고가 조작입니다.
옛날 사람의 살림이 단순하던 때에는 그런 폐단이 비교적 적었으나 소위 문명이라 하여서 지식 기술이 발달하여 자연보다 인위적인 것이 인간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자 야심있는 것들이 정치기구를 도둑질하여서 남을 합법적으로 압박 착취하는 일이 많게 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교육이 골고루 되지 못한 때에 일반 사람의 무지 무기술인 것을 타고 되는 일이 많습니다.
현실 모르면 어떤 희망도 허망
씨알 여러분. 씨알이라는 말부터가 그렇듯이 여러분은 자연 속에 자라신 분들입니다. 그러므로 거짓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문명, 특히 정치란 거의 전부가 사람의 꾀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이 거짓입니다. 그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것을 바로잡자는 것이 우리 사명입니다. 내가 여러분을 향해 부르는 뜻은 거기 있습니다. 자연 속에서 스스로 선한 줄을 알지도 못하면서 선한 여러분들을 간사한 지배주의가 의식적으로 속이고 있습니다. 스스로 나라를 이루고 있는 여러분은 나라한다는 의식조차도 없이, 나라에서 나서 나라를 살면서, 일해서 나는 모든 것을 나라에 바치면서도, 공이란 생각도 말도 아니하는데, 나라 밖에 서서 그것을 자기 소유로 만들려는 사람들은 스스로 목소리를 높여 애국자로라 하고, 모두 자기의 공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아셔야합니다.
여러분, 내가 당했던 것은 우리 현실의, 즉 여러분 자아의, 지극히 작은 한 단면(斷面)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듣고 나시면 반드시 그런 일이 어찌 있을 수 있는냐고 놀라실 것이고, 아무리 자기네 마음대로 잡아다려서 하는 정치기로서, 인간 양심을 가진 이상,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분개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것은 사실이요, 나 자신이 벌써 몇 번이고 당하는 사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을 모르시면 어떤 희망을 그리고 어떤 계획을 하셔도 다 허망한 것입니다. 모르고 있을 때는 무사태평한 줄 알았다가 들어서 알고 나면 마음이 불편하고 분이 치솟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분과 내가 서로 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육체는 제 몸만을 제 몸으로 알지만, 정신은 남의 일을 내 일로 느낍니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 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남의 일을 내 일로 알아서 하나가 될 줄 아는 것이 곧 나라입니다. 그 하나는 지극히 작은 것도 다 포함합니다. 몸 에 여러 가지 지체 기관이 있지만, 그 지극히 작은 부분에 고장이 생겨도 몸 전체가 앓습니다. 그것이 곧 우리의 내 몸이란 몸입니다.
우리 정신적인 큰 몸에서도 지극히 작은 것이 학대를 당하여도 전체가 아파하고 도와서 고쳐줍니다. 그것이 나라입니다. 참 의미에서 신체의 각 부분에 경중, 귀천이 없듯이, 나라에서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사람이 나라 살림을 하게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발은 늘 더러운 데만 접하지만, 그것 없이는 머리가 머리 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 몸을 잘 아는 사람일수록 발을 중히 여깁니다. 씨알은 나무의 뿌리, 잎 같은 것이요, 몸의 발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씨알을 지식없다 무시하면 되겠습니까? 정치란 팔, 다리 같은 것, 나무에서 한다면 통, 큰가지 같은 것인데 그것이 크고 힘 있다 해서 뿌리 잎을 무시하면 어찌 되겠습니까? 민본(民本)이란 말은 그래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체의 어느 부분에 병이 나거나 상처가 나면 반드시 그 아픔을 부르짖어야 합니다. 아프다는 감각은 경고입니다. 이제 학생들의 데모란 곧 그 아프다는 부르짖음이요, 강연회란 그것을 전신에 알리는 일입니다. 그래야 온 몸이 다 합력하여 그 부분을 고치고 그래서 성한 몸이 되어야 올바른 정신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나라의 일은 그래야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방해하는 정부는 마치 나무통이 저만 굵기 위해 양분을 다른 데로 보내지 않고. 부족을 호소해도 아니 들어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한 때는 굵어질 수 있겠지만, 결국은 그 나무는 죽을 수밖에 없고, 나무가 죽는 날 그통의 운명은 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운명을 모르고 부와 권력을 독점하려는 것은 참말 목석(木石)같은 마음입니다.
자유언론 없으면 죽음
신문, 잡지, 라디오, 텔레비전이야말로 중요한 것인데 정당이 지성을 무시한 통나무 같은 마음을 가지고 뿌리 같은 근로자들과 나뭇잎 같은 지식층의 기능을 통제하며, 아래서 올라오는 양분을 위로 보내지 않고 위에서 동화작용으로 만들어낸 진액을 아래로 내려 보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무통만이 지나치게 비대했기 때문에 나무가 살아있기는 하지만 정상적인 발육을 못합니다. 나무의 본성은 뿌리를 대지에 박고 잔가지를 하늘가에 뻗어 하늘땅의 음악을 하나로 조화하자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인데, 이제 그것을 못하니 그 모양이 살아는 있으나 꼭 분재자의 화분에 있는 참나무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나무의 본성입니까? 본성은 하늘가에 버티고 서잔 것이요, 사철을 따라서 오는 가지가지 바람에 따라 굉장한 우주곡을 천지 사이에 아뢰잔 것입니다. 분재를 감상한다지만 그것은 군주주의적(君主主義的) 귀족주의적(貴族主義的) 예술입니다. 어느 면의 미(美)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병(病)입니다. 남의 병을 완상(玩賞)을 하는 것은 고등한 예술이 아닙니다. 노예주의의 잔혹한 비열한 심리입니다. 나무는 또 그래서 될지 모르지만, 하나의 민족을 어찌 분재를 하노라고 밤낮 싹둑싹둑 자르고 지지며, 그것을 스스로 앓고 낫게 하노라 소리 없는 고통을 하는 것을 잡아 인간심정을 가지고 감상할 수 있습니까? 하물며 그것을 수완이라 하고 국제 전시장에 자랑하는 일이겠습니까? 나무기 때문에 분속에서도 사는 본능이 있는 모양으로 사람도 생명이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구차한 생을 영위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역사는 아닙니다. 분재의 참나무가 참나무지만 참나무는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자유언론 없이 하라는 말만을 하고 들으라는 말만을 듣고 자라고 보면 자랐어도 자람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죽음보다도 더한 타락입니다.
생명의 본성은 자라는 것이고 자라자면 필연적으로 항거하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분재라도 정말 오래 가면 그 병든 나무라도 분을 터치고야 맙니다. 그것을 못하게 하는 예술가는 아주 하등 예술가입니다. 정치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씨알은 항거하는 것입니다. 화분도 못터치는 참나무는 참나무가 아닙니다. 새를 장 안에 가두고 그 고민하는 슬픈 노래를 재미로 듣던 예술가가 나중에 그 새가 부르다 부르다 못해 병든 심장이 터져 죽는 날 그것을 비극으로 감상을 하고 있다면 그것도 예술일까? 그런 따위 씨알의 간을 말려죽이면서 그 치적에 도취하는 정치인도 인간일까? 분재나 장 새의 경우는 그 기르는 자와 길음을 받는 자가 서로 딴 물건이지만 정치에서는 소위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 받는 자가 한 인격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그 다스리는 자의 죄가 곧 다스림 받는 자 자신의 죄입니다. 그러므로 씨알은 끝까지 반항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마치 제 몸을 사랑하는 사람이 발가락 끝에 독균이 들었을 때 될 수 있는대로 온전히 고치려 힘쓰지만 정말 부득이한 경우에는 그 한 발가락을 자르고라도 몸을 건져야 하는 것같이 자기 비대에만 힘쓰고 씨알 전체를 분재를 만들어 자기의 완상감을 만들려는 정치가가 있을 때는 끝까지 사랑의 반항을 하다가 정말 듣지 않으면 분을 깨칠 결심을 하면서라도 반항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그때는 발가락 자른 것이 발가락 사랑함이듯 분 터침이 분 살리는 일입니다. 분은 곧 정치제도입니다.
혹은 와서 묻기를 격변하는 이 시대에 있어서 우리 민족의 희망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합니다. 그 심정은 잘 압니다. 그러나 나는 거기 대답하지 않습니다. 인생이란 희망 있으면 살고 없다면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삶은 절대의 명령으로 받아서만 그 의미가 알려집니다. 그 의미를 알지도 못하는 귀에 대답하여도 소용이 없습니다. 알지 못하는 것은 알려고 하는 열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물의 깊이는 목마름의 강도에 비례합니다. 올해의 희망은 무엇입니까? 그것도 겉도는 마음입니다.
희망은 절망하는 사람만 갖는다
희망은 절망하는 사람만이 가집니다. 마치 반석에 이르지 않고는 산 샘을 못얻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희망이 있다해서 웃고 없다해서 우는 사람, 한가한 사람입니다. 정말 살자는 마음이면 현실을 보고 절망 아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살려 애써보다가 팽개치고 종살이라도 하며 살아가보자 하는 놈 산 놈이 아닙니다. 반항하다가 죽더라도 종살이는 못하겠다 하는 놈이 정말 산 놈이요, 산 놈이기 때문에 죽어도 삽니다. 산 생명에는 죽음이 없습니다. 희망은 그런 사람과만 말할 수 있습니다. 생명 자체 안에 희망이 있다는 말입니다. 또 다시 말하면 불멸의 생명을 믿어서만, 믿음 그 자체가 희망이요, 생명이란 말입니다.
분재 재배자가 나무를 제맘대로 심지만 분재의 주인은 그 분재자가 아니고 그 나무 자신입니다. 장에 새를 기르는 사람이 맘대로 기르고 노래를 가르치지만 새장의 주인은 아닙니다. 죽고 사는 것이 나무에 있고 새에 있지, 그 기르는 놈에 있지 않습니다. 나라의 역사도 그렇습니다. 지배자가 제 마음대로 씨알을 이리 끌고 저리 끌지만, 그 노릇을 하는 권리는 씨알에 있지 지배자에 있지 않습니다. 씨알이 지배자에 복종하니 그러지 만일 죽기로 한하고 반항한다면 지배자 자신은 쌀을 한톨 생산할 수도 실을 한치 만들 수도 없습니다. 종살이 아니 하는 권리는 씨알에게 있습니다. 다만 문제는 현실을 바로 파악하나 못하나에 있습니다. 똑바로만 본다면 나무는 분이 죽는 곳임을 알 것이고, 새는 장이 죽는 곳임을 알 것이고, 씨알은 그 제도가 자기의 죽는 곳임을 알 것입니다. 그런데 모르는 것은 바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은 몸을 위한 것이지 생명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몸을 생명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욕심을 그 몸에 쓰고 정신에 쓰지 않습니다. 그것이 잘못 보는 것입니다. 어느 역사도 죽음으로써 참 생명의 길을 드러내며 증거해준 사람없이 바로 된 역사 없습니다. 옥 속에 절대의 힘을 품으면서도 참을 바로 보지 못하는 씨알 앞에 자기를 죽여 생명의 아구를 트이어 보여줄 때 씨알에게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희망입니다. 본래 희망(希望) 의 ‘希’ 는 지금쓰는 ‘稀’와 마찬가지로 드물다는, 잘 뵈지 않는다는 뜻이고, ‘望’은‘月’ 곧 달을 그려서 높이 있어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11장 첫 머리의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볼 수 없는 것의 확증이라는 말이 이 뜻을 잘 말해줍니다.
절대 희망을 갖는 것이 씨알
그러므로 근본 희망은 하나님에 있습니다. 근본 희망, 곧 절대의 희망이 살아나면 모든 희망이 다 있습니다. 희망을 가지는 것이 씨알입니다. 도토리 없이 참나무가 있을 수 없고, 알갱이 없는 도토리가 도토리가 아니듯이 씨알없이 나라가 있을 수 없고. 희망 품지 못한 씨알이 씨알일 수 없습니다. 씨알이 딴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은 다 씨알입니다. 그러나 가지는 지위가 있고 소유가 있을 때 이미 씨알이 아닙니다. 그 가진 것으로 인해 제 속에 있는 알갱이를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내가 씨알을 맨사람이라 하는 이유는 여기 있습니다. 논어에 ‘불환무위환소이립’ (不患無位患所以立)이란 말이 있습니다. 자리 없다 걱정말고 어떻게 설 것인가를 걱정해라 그 말입니다. 사람마다 지위 지위하지만 참 지위 곧 참 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가졌다고 나의 사람됨을 한치 더 높여주는 것 같습니다. 죽은 후에까지 나의 자리를 가지는 것은 나의 섬으로만 됩니다.
‘位’자가 사람 ‘人’ 에다 또 사람이 일어선 것을 그린 ‘立’ 자를 쓴 것은 그 뜻입니다. 정말 자리는 사람으로서 완전히 독립해 설 줄 아는 그 자리, 대지 위에 하늘을 쓰고 서는 그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아무리 뺏으려 해도 못뺏는 자리, 감옥에 가두어도 못뺏는 자리입니다. 그 밖의 지위는 종이 위에 있는 자리입니디. 씨알은 사람이 종이 위에 그리지 않는 사람으로 본래 타고난 그 자리에 섰는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의 알갱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위 가졌다는 사람일수록 그 본래의 자리에서 멉니다. 그러므로 그 알갱이 곧 사람으로서의 덕(德)을 잃고 있습니다.
그러면 알갱이 없이는 씨가 못되듯이, 거짓자리 탐을 내 참 자리를 버린 소위 지위 있다는 것들이 그 속에 인간의 알갱이를 품지 못했을 것은 정한 일입니다. 즉, 망하는 자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씨알에는 절대의 희망이 있습니다. 오늘 현실의 의미는 우리에게서 인류의 장래를 위한 그 씨알을 닦아내자는 데 있습니다.
씨알의소리 1979. 1월 80호
저작집30; 없음
전집20; 8-421
'씨알의 희망'은 정부 당국에 의해 검열 삭제되어 79년 1월 씨알의소리에 발표 되었고 1995년 4월호에 삭제되지 않은 원문을 다시발표 된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