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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465. [역경의 열매] 조혜련 (1-28) 머리통만 보고 기뻐 "고추 달아라! 떡도 맞추고!"
아들 귀한 장손집에 딸만 연이어 네번… 호랑이 태몽까지 꾼 다섯번째 출산
개그우먼 조혜련씨가 두 손을 모으고 환하게 웃고 있다. 조이컬쳐스 제공
나는 1970년 5월 29일 경상남도 고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장손이었던 우리 집은 대를 이을 아들이 필요했다. 첫째를 딸로 낳았을 때 친할머니는 "그래 첫째 딸은 재산이라 카더라"면서 마음의 위로로 삼으셨다.
또 둘째 셋째를 딸로, 넷째도 딸을 낳자 엄마의 실망은 물론이고 할머니의 역정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이를 낳고 나면 할머니는 문을 빼꼼히 열고 "아들이가? 딸이가?"라며 성별 확인을 하시고는 딸이라는 말을 들으면 "나와서 밭매라!"셨다. 일거리를 준비해 아들을 낳지 못한 대가를 치르게 하신 것이다.
다섯 번째 아이를 가졌을 때 엄마는 그동안 한 번도 꾸지 못한 태몽을 꿨다. 꿈속에 커다란 호랑이가 먼 곳에서부터 돌진해 엄마 뱃속으로 훅하고 뛰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용맹스러운 호랑이가 꿈속에 나타났으니 누가 아들이라고 믿지 않겠는가.
엄마는 확률적으로도 다섯 번째 정도 되면 '이제 아들이 나올 것'이라는 확신을 하고 산부인과를 방문해 성별 확인도 하지 않았다. 매일 다르게 불러오는 배를 어루만지며 엄마는 아이에게 이렇게 주입했다.
"니는 아들이다. 아들이어야 한데이. 나를 살려낼 아들이다."
드디어 열 달이 되어 산통은 시작됐다. 아이의 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머리통이 빠져나오자 모두 탄성을 질렀다.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아이의 머리통이 장군감처럼 큼지막하고 튼실했기 때문이다. 아이를 다 빼내기도 전에 할머니랑 아버지는 머리통만 보고 기뻐서 조씨 집안에 아들이 태어났다며 환호를 질렀다.
"고추 달아라! 떡도 맞추고! 하하하."
짚으로 엮어 미리 준비해 둔 고추를 꿰어 처마 밑에 매어 달고 잔치를 하기 위해 방앗간에 전화를 걸어 떡을 맞추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아이의 몸이 엄마 뱃속에서 다 빠져나오며 해산의 고통이 끝나갈 무렵 아이를 받는 걸 도와주던 아주머니가 "뭐꼬! 이를 우짜면 좋노!"라며 작은 탄식을 뱉어냈다. 이유는 달려있어야 할 고추가 어디에 끼었는지 본인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 달 동안 아들이라고 철석같이 믿어온 엄마는 고추가 달려 있지 않다는 말에 울음을 터트리며 이렇게 내뱉었다. "이를 우짤끼고. 배신자 가스나!" 내가 태어나자마자 엄마한테 들은 말은 배신자였다. 내가 뭘 배신했단 말인가. 그냥 나는 태어났을 뿐이고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말이다.
그날 밤 엄마는 옆에서 쌔근쌔근 자고 있던 나를 거꾸로 엎어놓은 채 이불을 뒤집어씌웠다. '꼴도 보기 싫은 가스나! 그냥 확 죽어버리라.' 이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태어난 지 몇 시간도 안 된, 목도 못 가누는 아이를 엎어놓는다는 것은 죽으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한참 뒤에 엄마가 이불을 들쳐보니 땀을 잔뜩 흘리면서 아주 잘 자고 있더란다. 질긴 목숨이었다. 여섯 번째, 일곱 번째도 딸을 낳은 엄마는 여덟 번째 만에 드디어 아들을 낳았다.
약력=한양대 연극영화과 졸업,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석·박사, 평택대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신학박사 과정, 1992년 KBS 개그맨 공채 10기 데뷔 후 연기자 가수 강연자 어학강사 방송인으로 활동, 일본어 중국어 관련 다수의 어학교재와 '열렬하다 내 인생' '조혜련의 미래일기' 등 저서 발간, 2017년에는 '성경낭독이 있는 찬송' 앨범 1, 2집 발표.
* [역경의 열매] 조혜련 (1) 머리통만 보고 기뻐 "고추 달아라! 떡도 맞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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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조혜련 (3) "니 얼굴에 연예인 되면 나는 대통령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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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
***[역경의 열매] 조혜련 (2) 호기심에 엄마 따라간 시장, 베테랑 장사꾼 되다
쑥스러워 큰소리 못 내는 엄마 대신 앞치마 두르고 '쑥갓 사세요' 외쳐
조혜련씨가 1985년 경기도 군포시 산본 집 앞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다.
우리 가족은 1978년 경기도 군포시 산본으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몸이 약하셔서 일하지 못 해 할머니와 어머니가 농사일을 도맡아 하셨다. 생활비 대부분은 비닐하우스나 밭에서 뜯은 채소를 대량으로 시장에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도매로 넘기다 보니 이윤은 많지 않았다. 농사일은 힘든데 생활은 늘 쪼들렸다.
밭에서 일하고 있는 엄마에게 다가가 "엄마, 참고서 사야 하는데 돈 좀 줘!"라고 말하면 엄마는 그냥 주는 법이 없었다. "이 돈 잡아먹는 귀신아"라며 돈을 내동댕이쳤다. 나는 여기저기 흩어져 땅속에 박힌 동전들을 손으로 파서 꺼내 들고 울면서 학교에 가야 했다.
엄마는 안양중앙시장에서 쑥갓을 팔았다. 하루는 나도 그곳이 너무 가보고 싶었다. 시장으로 가는 엄마를 따라 버스에 올라탔다. 엄마는 차비가 아깝다며 버스 뒷문에서 나를 발로 차 문 밖으로 밀어버렸다. 그날은 시장에 가지 못했지만 버스에서 내동댕이쳐지면서 결심했다. "꼭 그곳에 입성하리라!"
얼마 후 나는 엄마를 따라 시장에 발을 내디뎠다. 우리는 상점도 없이 가게와 가게 사이에 작은 대야 하나를 놓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구걸하듯이 장사하는 수밖에 없었다. 시장에서의 엄마는 소심하기 짝이 없었다. 나도 잘 안 들리는 개미 소리 만한 목소리로 "쑥갓 들여 가이소, 싱싱합니더"라고 속삭였다.
쭈뼛쭈뼛 쑥스러워하는 엄마 앞에 내가 나섰다. "쑥갓 사세요. 엄마가 지금 밭에서 갓 뜯은 거라 엄청 싱싱해요. 비타민과 무기질도 풍부해요!" 어디서 주워들은 어설픈 영양 이론까지 꺼내놓으며 소리쳤다. 초등학교 5학년짜리 여자아이가 떡 하니 앞치마를 두르고 큰소리로 외치니 지나가는 아줌마들이 두 단, 세 단 많이 사주셨다.
호기심으로 엄마를 따라간 시장에서 나는 마치 10년 정도 그 일을 한 베테랑처럼 자리를 잡게 됐다. '쑥갓 파는 초등학생'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어느 순간부터 엄마는 시장에 오지도 않고 밭에서 물건을 공급해주느라 바빴다. 나는 시장의 장사꾼이 돼버렸다.
장사하면서 몇 가지 힘든 점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내가 장사하는 옆집 가게 아줌마의 끈질김이었다. 엄마 없이 혼자 장사하고 있으면 아줌마는 은근슬쩍 말을 걸어왔다.
"쯧쯧. 네 엄마 계모지?"
"아뇨, 우리 엄마 계모 아니고 진짜 우리 엄마인데요!"
"아냐, 네 엄마는 계모야!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이렇게 어린아이를 시장통에 내돌려."
몇 날 며칠을 자기가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나를 괴롭혔다.
또 다른 하나는 단속반 아저씨들한테 걸릴 때였다. 장사하고 있으면 나무 몽둥이를 든 아저씨가 내 쑥갓이 든 대야를 집어 들어서 트럭에다 던져버리며 이렇게 말했다. "얘! 빨리 집에 가. 어린 게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나는 질세라 간절하게 트럭에 매달려서 아저씨한테 애걸복걸했다. "아저씨 힘들게 먹고살라고 하는데 쑥갓하고 대야 주세요. 부탁이에요." 끝까지 매달리는 나의 뒤로 쑥갓하고 대야가 흩어져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그래도 목숨을 지키고 물건들을 되돌려 받은 것에 뿌듯해했다.
재미와 호기심으로 시작한 장사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중학교 2학년 때까지 4년간 이어졌다. 이렇게 번 돈으로 언니들의 참고서와 집안의 생활비까지 충당할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조혜련 (3) "니 얼굴에 연예인 되면 나는 대통령 되겠다"
한양대 공대 추천 받고 원서 준비 중 주위 권유로 연영과로 바꿔 합격하자 진학 반대하던 엄마 막말
한양대 연극영화과 재학시절 조혜련씨가 제주도를 방문해 기념촬영을 한 모습.
"니들 인생에 대학은 없다. 고등학교 마치고 무조건 돈 벌어라."
중3 가을, 엄마는 귀한 아들을 제외하고 셋째, 넷째, 다섯째, 여섯째 딸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놓고 이렇게 공표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반감이 확 일어났다. 순간 결심했다. '나는 대학을 꼭 가야겠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공대를 추천했다. 한양대 화학공학과. 사실 한양대 공대는 나름 성적도 높았다. 대학 졸업 후 대기업에 취직도 잘된다는 이야기도 들었던 터라 다른 생각 않고 그곳을 택하려고 했다.
대학 원서 내기 3일 전, 친한 친구 세 명이 찾아왔다. 친구들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내 진로에 관한 이야기였다. "혜련아 너는 사람들을 웃기고 너무 재미있어. 네가 얼마 전에 학교 축제 때 연극을 하는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 너는 꼭 그 일을 했으면 좋겠어!"
친구들의 이야기인즉 나는 웃기고 에너지가 많아서 그것을 살리는 일을 했으면 한다는 거였다. 그게 바로 연극영화과였다. 나를 위해 며칠 동안 세 명이 고민했다고 한다. 감동을 받았다. 자기의 일도 아닌데 남의 인생을 위해 그렇게 진심으로 고민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말이다.
친구들은 개척교회를 다니는 크리스천이었다. 몇 번 교회를 나오라고 권유했지만 나는 당시 교회를 나갈 형편이 아니어서 거절했다.
고등학교 때 성격이 활달해서 축제나 연극제가 있을 때 연기도 하고 사회를 보며 사람들을 재미있게 해주는 끼는 있었지만 '내가 연예계 일을 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외모도 그랬지만 엄마가 이 사실을 알면 밭에서 호미 들고 쫓아올 일이었다.
3일 뒤 나는 원서를 내러 학교에 갔다. 당연히 내 손에는 담임이 써준 화학공학과 원서가 들려있었다. 그런데 무슨 힘에 이끌렸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냥 원서에 쓰인 학과를 연극영화과로 고치고 원서접수처에 줄을 섰다. 왜 그랬는지 모른다. 외모도 자신 없고 연기를 배워 본 적도 없었지만 그냥 그쪽으로 이끄는 강한 힘에 마음이 끌렸다. 친구들의 순수한 그 마음이 고맙기도 했고 또 내가 대학에 떨어지면 엄마가 좋아할 것 같기도 하고, 마음이 복잡했다.
당시 연극영화과 경쟁률을 보니 187 대 1이었다. 원서를 접수해 놓고 나서도 내가 합격할 확률은 거의 없겠다 싶었다. 아니,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내가 한 번에 떡 하니 합격한 것이다. 내 수험번호를 전화로 불러주자 안내원은 "축하합니다. 합격하셨어요"라고 말했다.
사실 한 번에 붙지 않으면 우리 집 사정상 재수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승부수를 그냥 던진 것인데, 붙은 것이다. 1989년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엄마는 내가 연극영화과에 합격했다는 말을 듣고 아니나 다를까 입에 거품을 물며 쏘아붙였다. "뭐, 연극영화과? 아이고, 니 얼굴에 니가 연예인 되면 내는 대통령 된다. 이 가스나야!"
말을 해도 어쩜 그렇게 예쁘게 하실까. 결국 나는 연예인이 됐고, 엄마는 대통령이 안 됐다. 첫 연기 시간, 설레는 마음으로 독백을 준비해갔다. 연기를 본 교수님은 나에게 딱 잘라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사람 웃기는데 타고났다. 연기보다 개그를 해라!"
***[역경의 열매] 조혜련 (4) 개그맨 시험에 떨어진 후 낙심… 과자 공장으로
결선서 한 팀이었던 김국진 오빠만 합격… 상실감에 휴학하고 집 나와 공장에 취직
1996년 한양대 연극영화과 졸업식에서 아버지 조용도씨(왼쪽)와 함께 찍은 사진.
나는 개그맨이 되기 위해 콘테스트에 나갔다. 우여곡절 끝에 경기대학교를 다니는 김국진 오빠를 만나게 됐다. 우리는 한 팀이 돼 KBS 개그콘테스트를 준비했다. 국진 오빠는 싱거운 개그스타일을, 나는 조금 과장된 연기를 각각 준비했다.
우리는 1차 시험을 무사히 통과했다. 욕심이 난 나는 2차 예선에서 1차 때보다 더 과장해서 연기했다. 결과는 한 팀임에도 불구하고 국진 오빠만 합격하고 나는 떨어졌다. 삶의 의욕이 사라졌다. 학교 가는 것도 싫고 집에 들어가기도 싫었다. TV에 나오는 국진 오빠의 모습은 더더욱 볼 수 없었다.
개그맨 시험에 떨어지고 큰 상실감에 학교를 휴학했다. 집을 나온 뒤 과자 공장에 취직했다. 가족들 눈치 보느라 그동안 못 먹어본 과자라도 실컷 먹어보자는 심산이었다. 고되고 힘든 단순한 노동이었다. 열두 시간 동안 서서 과자를 포장해야 했다. 좋아하는 과자를 먹으며 버티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밤샘 작업은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잘못하면 깜빡 졸다가 컨베이어벨트에 손이 끼는 사고를 당할 수도 있었다.
야간 근무를 하는 어느 날이었다. 기숙사 로비에 TV가 켜져 있었다. 코미디 프로그램 '봉숭아학당'이 방영되고 있었다. 맹구와 오서방의 우스꽝스러운 연기를 보고 있는 동료들이 밝게 웃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기숙사 로비의 풍경은 커다란 충격을 줬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웃음을 주는 사람이 되자'고 결심했다. 공장 생활 8개월 만에 짐을 싸서 한양대 연극영화과로 복학했다.
1992년 KBS '청춘스케치'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휘트니 휴스턴의 'I will always love you'를 충청도 버전으로 코믹하게 불러 1등을 했다. 그 후 송은이 김생민 등과 함께 '코미디 외인극단'이라는 팀에 합류해 콩트로 데뷔했다. 시간이 지나고 국진 오빠랑도 재회했다.
"나는 네가 언젠가 될 줄 알았어. 넌 어디서도 못 본 캐릭터야. 열심히 하자."
MBC 코미디프로 '울엄마'라는 코너에서는 서경석과 콤비로 연기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 팝송에 재미있는 발음을 붙여 재구성한 '아나까나'라는 노래를 할 때면 사람들은 웃어댔다. 영화 '반지의 제왕'의 캐릭터인 '골룸'도 연기했다. 골룸을 연기할 때면 머리카락 몇 가닥만 남겨둔 채 눈썹은 다 밀고 이빨은 다 썩은 분장을 해야 했다. 나뭇잎 하나 거칠 정도의 옷을 입은 뒤 "마이프레셔스 골룸, 골룸!"만 계속 외치며 마치 천식에 걸린 듯이 기침을 해야 했다.
사람들은 박장대소했다. 공장에서 피곤한 동료들이 봉숭아학당을 보며 배꼽 잡고 웃었던 그 웃음을 드디어 나도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게 된 것이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경험도 여러 번 있었다. SBS 쇼예능 '스포츠 대 탐험'이라는 프로에서 혼자 패러글라이딩으로 산에서 뛰어내려야 했다. 비행 도중 조교와의 무선이 끊겼다. 뒤늦게 쫓아온 조교의 도움을 받아 착지를 시도했지만 얼음 바닥에 머리가 먼저 착지돼 큰일 날 뻔했다.
또 한번은 스쿠버다이빙에 도전하던 중 25m 바닷속에서 수경에 물이 찬 것을 빼내려고 벗었다가 바닷물을 들이마셔 버렸다. 그 순간 정신이 아찔해지고 동공이 풀리며 패닉 상태에 들어갔다. 조교의 도움으로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살아날 수 있었다. 이렇게 위험했던 순간을 돌이켜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때 죽지 않고 지금 살아있는 이유가 있구나!'
***[역경의 열매] 조혜련 (5) 일본 고급 커피숍 바닥 기며 "마이프레셔스, 골룸!"
지난 5월 서울 블루스퀘어 아이마켓홀에서 열린 개그맨 전유성 데뷔 50주년 기념 공연에서 골룸으로 분장한 조혜련씨가 밝게 웃고 있다.
1992년에 데뷔했으니 연예인으로 활동한지도 27년째 접어들었다. 가장 힘들었을 때를 꼽으라면 일본에서 도전장을 내고 활동했던 7년간의 시기였던 것 같다.
내 나이 30대 중반, 딸 윤아가 여덟 살, 아들 우주가 여섯 살 때이다. 방송 활동으로 늘 바빠서 아이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했다. 어린 딸은 엄마를 너무도 좋아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제일 먼저 하는 말은 이거였다.
"엄마 오늘은 안 나가요? 나랑 놀아줄 수 있어요?"
"엄마 오늘 일 있어!"
"내일은요?"
아이들은 엄마의 자리를 원했지만 나의 삶은 늘 분주했다. 일이 없으면 일을 만들고 그걸 이루기 위해 앞만 보고 달리는 불도저 같은 삶을 사는 나였다. 더 나아가 일에 대한 욕심은 한국 활동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바쁜 방송 활동 중간에 잠시 짬을 내어서 일본으로 여행 갈 기회가 있었다. 그때 호텔에서 우연히 일본방송을 보게 됐다. 잘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일본 예능프로그램 분위기가 한국방송과 상당히 흡사하다고 생각했다.
'일본어를 할 수 있다면 일본방송에 도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국으로 돌아와 무작정 서점에 가서 일본어책을 산 다음 '히라가나'부터 하나씩 익혀나갔다. 두 달 정도 공부한 후 먼저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던 탤런트 윤손하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왕래도 없었던 그녀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무턱대고 부탁했다. 손하 도움으로 나는 일본 매니저와 만나게 됐다.
일본의 유명 대형기획사의 매니저를 하라주쿠에 있는 고급커피숍에서 만났다. 일본 매니저는 나한테 할 수 있는 개그를 한번 보여달라고 했다. 그때는 일본어를 잘하지 못해 몸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고급스러운 커피숍의 바닥을 기어 다니며 나는 "마이프레셔스, 골룸!"을 외쳤다. 물구나무도 섰다. 너무 긴장한 탓에 그만 바닥에 '꽈당'하고 넘어지고 말았다. 나의 행동에 많은 사람이 당황해했다. 매니저는 통역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나이가 적은 것도 아니고 한국에서는 스타라고 하는데 신인으로 도전하겠다는 당신의 열정을 높이 삽니다. 그러나 일본어를 할 수 있어야 활동할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6개월 동안 열심히 일본어를 공부해서 그땐 통역 없이 만납시다."
한국에 돌아와 집 근처에 사는 일본인 선생님과 매일 세 시간씩 수업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늘 바빠서 같이 놀아주지 않는 엄마를 보며 속상해했던 딸은 이제 일본어 공부까지 하는 엄마를 보며 입이 삐쭉 나와 있었다. 하루에 100개씩, 6개월 동안 1만개의 단어를 외웠던 것 같다.
나는 다시 매니저를 만나러 일본으로 향했다. 호텔 로비에서 통역 없이 나와 매니저 두 사람만 만나기로 약속했다. 인사를 나누고 2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매니저가 하는 말을 내가 알아듣고 내가 하는 말을 그 매니저가 알아듣는 것이 아닌가.
"6개월 전에 골룸만 외치던 그 혜련이 맞아요? 어떻게 이렇게 빨리 일본어로 말할 수 있게 되었죠?"
그는 황급히 자기 차에 나를 태우고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그날 나는 일본 기획사와 계약했다. 드디어 일본방송에 도전하게 된 것이다. 그 도전에 어떤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신인으로 열심히 하겠다며 무식하게 "도전"을 외쳤다.
***[역경의 열매] 조혜련 (6) 전화기 너머 딸 윤아 "엄마 아니라 그냥 연예인 같아"
사랑 목말라하는 가족 생각에 마음 아파
조혜련 집사가 2005년 7월 딸 김윤아(왼쪽), 아들 우주와 함께 놀러 간 수영장에서 재미있는 표정을 지으며 사진을 찍고 있다.
7년 동안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바쁘게 활동했다. 주위에선 나이도 많고 가정도 있고 한국 일도 바쁜데 굳이 일본까지 가야 하냐며 말렸다. 불도저 같은 나를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내 인생은 언제나 새로운 도전에 목말라 있었다.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밑 빠진 독' 같은 것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삶은 매우 달랐다. 한국에서는 베테랑 스타였지만 일본에서는 혼자 무거운 짐을 들고 대중교통을 두세 번 갈아타며 이동해야 했다. 일본방송에 출연하는 것도 하늘의 별 따기였다. 출연했다가도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해 울면서 매니저와 반성의 시간을 반복했다.
두 평 넓이의 방으로 혼자 돌아오면 외로움이 몰려왔다. '내가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하는 거지? 그만둘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에게도 드디어 기회가 왔다. '산데쟈폰'이라는 TBS 시사오락 프로그램에서 출연 섭외가 들어왔다. 매니저가 오랫동안 담당PD에게 부탁해 출연자로 한번 나가게 됐다.
생방송으로 뉴스 시사를 다루는 프로그램이라 더욱 긴장됐다. '윽! 왜 이렇게 말이 빨라. 어쩌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MC가 나에게 물었다. "한국에서는 음주운전을 하면 어떻게 되죠?" 나는 연습한 대본의 내용대로 "한국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음주운전을 하면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이어서 "음주운전을 반복해서 걸리면 어떻게 되죠?"라고 물었다. 대본에 없는 질문이었다. 생방송 중에 '대답 못 해요'라고 말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 있는 단어와 표현들을 총동원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거지가 되겠죠!"
'거지가 된다'는 말에 스튜디오는 난리가 났다. 출연자 모두가 당황해하며 "다메(안돼)!" "혜련, 다메이와나이데네(말하지 마)"를 연발했다.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방송에서는 '거지'라는 단어는 차별적인 뜻을 담고 있어 방송언어로 부적합했던 것이다.
나는 무엇을 하지 말라는 것인지 몰라서 다시 한번 "고지끼와다메데스까?(거지라고 하면 안 돼요?)"라고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반전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3년 동안 고정 패널로 활동하며 '혜련'이라는 이름을 일본에 알렸다. 제법 유명한 프로그램에서도 섭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 활동을 시작하면서 잦은 비행과 무리한 일정으로 인해 내 몸은 점점 지쳐갔다. 가족도 내 사랑에 목말라했다. 어느 날 혼자 일본 집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여덟 살 된 딸 윤아였다. 힘이 없는 목소리였다.
"엄마 나 너무 열이 나고 아파. 열이 40도래."
"그래? 그럼 할머니한테 해열제 달라고 해서 먹고 자."
"아니! 엄마가 찬 수건으로 내 몸 좀 닦아줘. 엄마가 와서 해줘."
"엄마 지금 일본이야!"
윤아가 갑자기 소리쳤다. "알아! 근데 엄마! 나는 엄마가 필요한데 엄마는 항상 내 옆에 없어. 엄마 일본 활동 그만두면 안 돼? 일본이 나보다 더 중요해? 엄마 제발…." 전화기 너머로 윤아가 큰소리로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너 왜 이렇게 엄마한테 생떼를 써! 엄마도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엄마가 어떻게 지금 가! 그리고 울지마. 울면 더 열나. 엄마 말 들어 윤아야!" 울음을 그칠 줄을 모르던 윤아가 이렇게 말했다. "엄마는 엄마가 아니라 그냥 연예인 같아. 으앙."
나는 전화를 끊었다. 계속 울고 있는 소리를 듣고 있을 여유도 없었지만 마음이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조혜련 (7) 성급하게 도전한 일본활동 7년 만에 마침표
한·일간 역사·문화 모르고 한 행동과 말, 국내 팬들의 오해와 질타의 대상 되기도
조혜련 집사는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지 못하고 도전했던 7년간의 일본 활동에 대해 "후회되고 반성된다"고 고백했다.
일본에서 7년 동안 활동하면서 내 이름을 많이 알리기도 했지만 가장 많은 안티팬을 만들기도 했다. 예능프로그램에서 내가 하는 발언이나 행동들은 질타의 대상이 됐고 또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요리 프로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사랑의 앞치마'라는 요리 경연 프로였다. 나는 요리를 잘하지 못한다. 그날 요리 경연의 메뉴는 스파게티였다. 스파게티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사 먹을 줄만 알았지 만들어 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개그우먼이 되기 전에는 열 명이 북적대는 집에 살았고 개그우먼이 되어서는 요리를 할 여유가 없었다. 요리 대결이 시작됐다. 내가 만든 요리를 먹은 사회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혜련, 왜 이렇게 맛이 없어요?" "저는 한국 사람이라서 스파게티는 잘 못 만듭니다"라고 답했다. 그 방송이 나간 뒤 한국 인터넷 웹사이트에는 네티즌의 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한국 사람인데 스파게티를 제일 잘 만든다. 그런데 조혜련은 왜 일본에 가서 한국 사람은 마치 스파게티를 못 만드는 것처럼 이야기하지?' 생각해보면 맞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애드리브로 이렇게 말하고 싶다. "한국 사람 중에서 저는 스파게티를 못 만드는 사람에 속해요." 이렇게 예민한 일들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일본 방송에 도전한 것이다.
일본에서 유명한 '링컨'이라는 쇼 예능프로그램에 나갔다. 워낙 인기 프로여서 출연하는 것이 꿈이었다. 내가 출연하는 날 운동회가 특집으로 편성됐다. 오프닝에서 운동회를 축하하기 위해 여자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다 같이 손뼉을 쳤다. 나는 맨 앞줄에 섰는데 그 방송이 나간 뒤 한국이 발칵 뒤집혔다.
그 가수가 부른 노래는 '기미가요'였다. '기미가요'는 일본 국가다. 천황의 통치시대가 영원하기를 염원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노래는 우리 대한민국에는 아픈 노래였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 총독부는 일본 정신이 가장 잘 드러나는 이 노래를 조선인의 황민화 정책을 위해 하루에 한 번 이상 부르게 하며 아픔을 줬다.
정말 그 노래가 그런 뜻인지 몰랐다. 또 그 가수가 기미가요를 오프닝으로 부르는지 모르고 나가서 손뼉을 친 나는 그 방송이 나간 후 엄청난 후폭풍을 맞았다. '조혜련 친일파 아니냐' '일본 불교를 믿는다던데 무슨 관련이 있는 거냐'며 일파만파 퍼졌다.
너무 후회되고 반성되는 것은 일본에 진출하기 전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고 더욱 신중했어야 했다. 그렇게 하지 못하고 성급했던 도전은 나에게 많은 아픔을 안겨줬다. 7년 동안 일본어를 배워가며 도전한 노력은 물거품이 됐다. 결국 나는 일본 활동을 중단했다. 그렇게 강했던 내가 일본 활동으로 날개가 꺾였다.
태어났을 때 아들이 아니라고 낳자마자 엎어놓았어도 고개를 옆으로 돌려 살았고, 시장에서 쑥갓을 팔 때 단속반에 쫓겨 다녀도 당당했고, 계집아이가 쓸데없이 대학 갔다고 빗자루로 맞았을 때도 괜찮았던 내가 우울증에 시달려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일본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그냥 확 뛰어내려 버릴까? 오늘로 내 인생이 마무리된다면 고통받지 않을 텐데'라고 되뇌었다. '아, 이 괴로움은 언제 끝나지?'
***[역경의 열매] 조혜련 (8) 개그맨 시험에 떨어진 후 '일본불교'에 심취
언니가 믿도록 권유, 도시락 싸들고 하루 열시간씩 기원… 어느덧 그 종교의 대표적 연예인 돼
고모가 권유한 일본 종교를 반강제적으로 믿어야 했던 조혜련 집사(둘째 줄 왼쪽 네 번째)와 가족들.
부모님이 1978년 경기도 군포시 산본으로 이사 오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고모는 우리 가족에게 믿으면 좋은 종교가 있다며 소개했다.
"일본에서 건너온 불교라는데 절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수행하는 거라고 하더라. 이 종교가 남들도 좋다고 하니까 한 번 믿어봐라." 열심히 믿으면 스스로가 자기 속에 있는 부처의 불성(佛性)을 끄집어 낸다는 종교였다. 고모는 우리 가족에게 일본불교를 권유해놓고 정작 본인은 믿지 않으셨다.
잘 사는 딸이 종교를 믿으라고 권유하니 할머니는 우리 가족에게도 강요했다. 고모가 산본에 가진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소작농으로 살아야 하는 우리 가족은 할머니의 명령을 따라 이 종교를 믿어야 했다.
나는 강제로 종교를 가지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쭈그려 앉아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도 싫어서 열심히 하지 않았다. 맏언니는 교리까지 공부해가며 가장 열심히 그 종교를 믿었다. 내가 개그맨 시험에 낙방하고 방황하고 있을 때 언니는 나에게 열심히 그 종교에 관해 설명을 해주며 믿도록 권유했다. 열심히 종교활동을 하면 용돈을 매일 준다는 조건까지 내세웠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던 나는 이왕 하는 거 정성을 다해 도전하고 꼭 개그우먼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종교에서 하는 행위 중 하나는 한 구절을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기원'이라고 한다. 기원을 하기 위해 찾는 장소를 '회관'이라고 부른다.
나는 매일 도시락을 싸 들고 회관에 가서 기원했다. 하루 열 시간씩 100일 간 도전했다. 그것을 '백만편 도전'이라고 부른다. 하루 10시간 동안 회관에 앉아 기원하다 보면 다리에 쥐가 났다. 그래도 다리 사이에 방석을 2개씩 끼워 넣고 참아내야 했다.
100일간의 기원을 달성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개그우먼이 됐다. 100일 기원을 달성한 나의 기원 덕분이라고 여겼다. 그 뒤로 더욱 종교활동을 열심히 했다. 어느 순간 나는 한국에서 그 종교의 대표적인 연예인이 됐다.
이 종교의 체험담을 전하기 위해 전국 집회도 다녔다. 일본에서도 방송 활동을 하면서 외롭고 힘들 때면 도쿄에 있는 회관을 찾아가서 마음을 다스렸다. 일본 연예인이나 스포츠인, 정치인 등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교류 하며 위로를 삼기도 했다. 한 달에 한 번 대집회가 열리면 다같이 모여서 그 종교를 이끄는 회장의 연설을 들었다. 그분을 존경하며 그 마음을 담아내려고 애썼다.
회장의 생일이 되면 일본 도쿄 중심가에 있는 회관에 수천 명의 사람이 모였다. 회장에게 생일선물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긴 줄을 섰다. 나도 최고급 과일을 사서 줄을 섰다. 나를 비롯해 그곳에 줄을 선 사람들은 멀리서나마 그 회장의 얼굴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긴 기다림도 지루해하지 않았다. 일본불교는 이렇게 내 인생의 긴 시간 나의 일부분이 되었다.
내 나이 마흔 살이 넘어 정신적으로 힘들어지고 우울해지는 시기가 찾아왔다. 그렇게 열심히 했던 종교활동도 나를 지탱해주지 못했다. 내 마음을 붙잡아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연스레 나의 믿음도 서서히 약해지고 식었다. 일본불교 활동을 그만둔 뒤 이른바 사람들이 좋아하고 따른다는 유명인사가 보이면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난 또 다른 진리를 갈구하며 이곳저곳을 찾아 헤맸다.
'이 세상 어딘가엔 내가 찾는 진리가 있을 거야!'
***[역경의 열매] 조혜련 (9) 난생처음 선물 받은 성경책, 펼쳐보지도 않아
자기계발서에 빠져 독서에 열심일 때 김원희 찾아와 꼭 읽으라며 성경 건네
조혜련 집사가 2008년 서울 여의도 MBC에서 열린 방송연예대상 시상식에서 축하공연 중 골룸으로 변신해 열정적인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
일본 방송 활동을 중단한 뒤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급기야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로 내 심리상태는 바닥까지 내려갔다.
"언니, 이거 선물이야. 꼭 읽어봐!" '시크릿(The Secret)'이라는 책이었다. 내가 걱정됐던 친한 동생은 자기계발서 책이라도 읽으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해서 이 책을 선물했다고 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바쁘게 방송하느라 독서를 못 했었던 터라 '한번 읽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별 기대하지 않고 읽은 책에서 예상치 못한 재미와 감동을 느꼈다.
이후 나는 서점에 가서 자기계발서 위주의 책들을 닥치는 대로 샀다. 하루에 한 권씩 책을 읽었다. 살고 싶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으로 책을 의지하며 독서에 빠졌다. 독서는 내게 새로운 활력소를 줬다. 우울했던 심리상태도 조금씩 회복돼갔다.
이때 읽었던 책 가운데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가 쓴 '의식혁명(Power vs. Force)'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예전에 읽었던 책들보단 수준이 꽤 높은 편이었다. 나는 책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수십 번을 읽었다. '의식혁명'에서 호킨스 박사는 20년 동안 '근육측정법'으로 수백만 건의 테스트를 거쳤다. 인간의 몸이 생명을 지지하는 것에는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그렇지 않은 것에는 부정적으로 반응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호킨스 박사는 인간의 의식 수준을 1부터 1000까지 정했을 때 부정적인 의식은 수치가 낮고 긍정적인 것은 수치가 높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수치심은 20, 증오는 50, 기쁨은 570, 평화는 600으로 측정된다. 성경은 수치가 무려 880으로 매우 높았다. 난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수치를 매길 수 없는 무한대로서 측정이 불가하다고 밝힌 대상도 있었다. 그건 바로 조물주였다. 수십 번 이 책을 반복해서 읽으면서도 매번 나는 '성경'과 '조물주'라는 단어를 그냥 스쳐 지나갔다. 애써 외면하고 싶었다.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고 너무 싫어하는 단어들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일요일 아침 이날도 독서를 하고 있었는데 배우 김원희로부터 전화가 왔다. "언니, 내가 언니 집 근처 교회에 다니는데 혹시 시간 되면 잠깐 들를 수 있어?" '나를 교회로 끌어들이려는 것 아닌가'하는 불안한 생각에 거부감도 들고 귀찮기도 했지만 집에서 가깝다고 하니 하는 수 없이 가겠다고 답했다.
운동복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까지 안고 집을 나섰다. 나는 차를 몰고 교회로 향했다. 주차장에 들어서자 입구에서 원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같은 교회를 다니고 있던 표인봉 오빠와 함께 나를 친절하게 반겨줬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원희가 미소를 지으며 무엇인가를 건네줬다.
"언니, 이거 선물이야. 꼭 읽어봐." 성경책이었다. 난생처음 받아보는 성경책 선물이었다. 아마도 처음 만져보는 성경책이었던 것 같다. "어. 고마워." 대답은 이렇게 했지만 속마음은 별로 고맙지 않았다. 원희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그날 받은 성경책을 펼쳐보지도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 책장 구석에 성경책을 던져 놓으며 구시렁댔다.
"아니 읽을 책들이 얼마나 많은데 나한테 이딴 걸 읽으라고?"
***[역경의 열매] 조혜련 (10) "언니, 날 위해 기도는 고맙지만 난 하나님 믿지 않아"
한국에서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내다 오랜만에 밴쿠버에서 만난 성미 언니 매일 중보기도 드렸다고 고백
조혜련 집사(오른쪽)가 자신을 위해 중보기도를 해준 이성미씨와 재밌는 표정을 짓고 있다.
나는 개그우먼 이성미 언니랑 개인적으로 아주 친하게 지냈다. 언니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이야기도 잘 들어주는 편한 존재였다. 우리는 집도 가까워서 자주 만나 밥을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언니와 나는 종교가 달랐다. 성미 언니는 교회를 다녔고 나는 일본 불교를 믿고 있었다. 성미 언니는 예수를 믿지 않는 나를 안타까워했다. 몇 번이나 교회에 같이 가자고 권유했다. 그때마다 나는 황소고집으로 내 종교를 지키며 거부했다.
성미 언니는 욕쟁이였다. 말끝마다 욕을 붙여서 말했다. 어릴 때부터 엄마 없이 혼자 외롭고 힘들게 자란 언니가 쓴 뿌리들을 입으로라도 풀다 보니 입버릇처럼 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친하게 지내던 성미 언니가 2002년 방송 활동을 접고 아이들과 함께 캐나다 밴쿠버로 훌쩍 떠나버렸다. 언니가 떠날 때 참 많이도 울었던 것 같다. 이제 나한테 구수하게 욕해줄 언니도, 날 챙겨줄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쪽이 너무나 허전하게 느껴졌다.
성미 언니가 떠나고 4년이 지났을 무렵 언니가 너무 보고 싶어서 밴쿠버로 찾아갔다. 한참 일본 활동을 시작하고 몸도 마음도 모두 힘들었을 때였다. 현실에서 괴로워했던 내가 답을 얻을 수는 없었겠지만 그래도 언니에게 털어놓으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밴쿠버에서 오랜만에 성미 언니를 만난 나는 깜짝 놀랐다. 한국에서 봤던 욕쟁이 언니랑 달라도 너무 달랐다. 욕하는 모습은 아예 찾아볼 수도 없었고 얼굴은 마치 매일 오일로 마사지를 해서 번들번들한 것처럼 광채가 났다. 무언지 모르게 편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언니는 밴쿠버에서 믿음 생활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했다. 매일 새벽기도를 나가고 성경을 읽으며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됐다고 했다. 욕을 붙여서 말하던 언니의 입도 하나님이 개입해서 싹 고쳤다고 고백했다.
그날 밤에 언니가 나에게 이상한 고백을 했다. "나 사실 너한테 할 말이 있어. 내가 매일 새벽기도를 나가는데 네 이름을 하나님께 이야기해. 혜련이가 하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언니가 중보기도를 하는 사람들 목록 중에 6번이 김용만, 7번이 조혜련이라고 했다.
누군가를 위해 한 번 중보기도를 하기도 쉽지 않은데 단 하루도 빼먹지 않고 4년을 그것도 새벽에 기도해 온 것은 정말 대단한 마음이다. 그날 밤 나는 성미 언니한테 편지를 썼다. '언니 나를 위해서 기도해주는 건 고맙지만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아. 미안한데 내 이름은 빼줘. 나는 내 종교 활동 열심히 할 테니까.'
7년 뒤 성미 언니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밴쿠버가 너무 편하고 좋아서 돌아오기 싫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 당시 한국에서는 연예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들이 일어났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성미 언니에게 한국으로 돌아가서 외롭고 지친 연예인들을 연합시키라는 마음을 주셨다고 했다. 하나님의 그 음성을 듣고 언니는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와서 성벽을 재건하는 마음으로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와 '연예인 연합예배' 공동체를 만들었다.
성미 언니가 한국에 돌아올 때쯤 나는 너무 힘든 상황이었다. 일도 하기 싫고 삶의 아무런 의욕이 없었다. 우울증과 무기력증에 빠져 있었다. 가장 큰 원인은 일본에서 활동하며 느낀 자괴감과 두려움이었다. '인생은 무엇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맞는 것일까'를 늘 고민하던 시기였다.
***[역경의 열매] 조혜련 (11) "우정을 빌미로 종교를 강요해?"… 이성미와 절교 다짐
평소 기독교 싫어하지만 이성미 부탁에 연예인 연합예배에 참석… 느닷없는 내 소개에 당황하며 뛰쳐나가
조혜련 집사가 2009년 서울 롯데시네마 홍대입구점에서 열린 '작가와의 만남, 아름다운 책 인터뷰'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국에 돌아온 이성미 언니를 서울 동부이촌동의 한 식당에서 만났다. 우리는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 무렵 나는 '미래일기' '열렬하다. 내 인생'이라는 책을 발간하고 자기계발 강연자로 바쁘게 활동했다. 그러나 나의 헛헛한 마음은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성미 언니가 갑자기 진지하게 말했다.
"오늘 연예인 연합예배가 있는데 한 번만 가보자."
"난 안가! 나는 신을 안 믿어. 언니!"
"내가 너를 위해 7년 넘게 기도했으니 한 번은 가줄 수 있잖아."
"움직이기 귀찮아."
"횡단보도만 건너면 돼."
알고 보니 우리가 만난 곳이 온누리교회 앞의 한 식당이었다.
나는 기독교를 믿는 소위 예수쟁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철저히 기독교를 비난했다. 길을 지나가다가 십자가를 보면 "여기가 무슨 무덤이야? 왜 이렇게 벌건 십자가가 많은 거야? 왜 이렇게 이스라엘 종교가 판을 치냐!"면서 놀려댔다.
교회 다니는 친구랑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하나님은 공평하다면서 왜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병으로 죽고 또 아프게 태어나는데?"라며 비난했다.
하나님과 기독교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던 내가 성미 언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교회로 끌려갔다. 예배를 본다는 장소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실내는 조금 어두웠고 약간 통통한 사람이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몇몇 연예인들은 일어서서 두 팔을 올리고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어색한 표정으로 쭈뼛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둘러보니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들도 꽤 많이 있었다. 설교시간, 이날은 이단을 연구하는 전문가가 왔다. 이단으로 구별된 단체를 알려주고 거기에 속해있는 연예인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는 그런 시간이었다. 내가 들어도 '정말 말도 안 되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꽤 많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단 강의가 끝나갈 무렵 마지막 소개 영상이 나왔다. 그런데 중보기도가 필요한 사람이라며 갑자기 내 사진이 뜨는 것이 아닌가. 나는 너무 놀랐다. 정신적으로 큰 충격이 올 지경이었다.
이때 성미 언니가 무대 앞으로 나가더니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말했다. "오늘 혜련이가 용기를 내서 여기에 왔습니다." 너무 당황한 나는 고개를 숙이고 성미 언니를 보며 말했다. "하지마. 하지 말라고!" 언니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혜련아 일어나봐." 앉아있던 다른 연예인들이 "아멘!" "할렐루야!"를 외치며 손뼉을 쳤다. 그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가수 션도 있었다. 나는 야속한 표정으로 성미 언니를 쳐다봤다. 언니는 내 표정이 안 보이는 듯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천천히 일어섰다. 모두 나를 주시하며 "아멘"을 외쳐댔다. 그리고 충격적인 언니의 한마디가 들렸다. "앞으로 나와봐."
'뭐라는 거야? 일어선 것도 창피한데 앞으로 나오라고?' 나는 앞으로 나가는 척하다가 성미 언니와 사람들을 등지고 문을 박차고 나왔다. 성미 언니와 나와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순수한 우정을 빌미로 종교를 강요할 수 있어? 이건 배신이고 배반이야!'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서 '이성미'라는 이름과 전화번호를 지워버렸다. 이제 다시는 성미 언니에게 연락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렇게 성미 언니는 내 인생에서 멀어져 갔다.
***[역경의 열매] 조혜련 (12) 이혼 후 새로운 만남… 아! 이 사람도 크리스천
같은 아픔 공유하다 친구에서 부부로… 평생 존댓말 할테니 교회 가자는 제안에…
조혜련 집사가 2011년 경기도 고양시 SBS 일산제작센터에서 열린 '붕어빵' 프로그램 100회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아들 김우주군과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나는 2012년에 이혼했다. 대중에게 웃음을 주는 사람으로서 아픈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많이 고민하고 노력도 했다. 하지만 끝내 이혼 절차를 밟게 됐다. 아이들에게도 큰 상처와 아픔을 안겨줬다. 나의 삶은 매우 피폐해져 갔다. 모든 게 싫었다. 인기도 돈도 방송도 말이다.
이혼 후 방송을 접고 중국에서 지냈다. 중국어를 전공한 바로 밑의 여동생이 중국어를 가르쳐줬다. 중국어를 더 잘하고 싶은 마음에 유학을 결심했다. 현지 대학 방문 후 도움을 주신 분들과 함께 식사하러 갔다. 우연히 그곳에서 괜찮은 사람을 만났다.
중국에서 사업하는 그 사람도 나처럼 이혼의 아픔을 겪었다. 그와 대화를 하다 보니 나의 아픔을 나눌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위로해 주는 좋은 친구가 됐다. 그 사람이 바로 지금의 사랑하는 남편이다. 몇 달 동안 좋은 만남을 이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그가 갑자기 나에게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아니 이건 또 웬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인가?' 알고 보니 이 사람도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을 믿은 크리스천이었다. 이성미 언니의 휴대폰 번호를 지워버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종교로 부딪히기 싫었던 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지만 나쁘게 생각하지 않아. 내가 내린 결론은 세상의 모든 종교는 하나라고 생각해. 인간이 행복하게 살려고 하는 진리는 힌두교든 불교든 천주교든 기독교든 다 똑같다고 생각해. "
그러자 대뜸 그 사람은 화를 버럭 내며 이렇게 말했다. "아니 자기는 진짜 잘못 알고 있어. 절대로 똑같지 않아. 다른 모든 것들은 인간이 만든 종교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진리이자 신앙이야." 흥분해서 말하는 그의 눈에서 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종교 이야기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아주 민감한 사안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사람을 저지시켰다. "그만 이야기하자. 자기도 성미 언니랑 똑같아!"라며 쏘아붙였다. 그 후 더는 이야기가 거론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남편은 '조혜련이 꼭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해달라'며 중보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주일이면 남편 혼자 한인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어느 주일이었다. 이날은 세례를 받은 내 또래의 자매가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나누는 간증의 시간을 가졌다고 했다. 남편은 그 자매의 간증을 듣던 중 내 얼굴이 그 자매와 겹치는 경험을 했다고 고백했다. 아직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며 받아들이지 않는 내가 강대상 위에서 간증하며 예수님을 증거하는 모습이 환상처럼 보인 것이다.
"하나님, 조혜련도 저 자매처럼 예수 만난 경험을 간증할 수 있게 해주세요." 남편은 나를 전도할 기회만 엿보며 간절히 중보기도를 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두 살 어린 남편은 나에게 늘 반말을 했다. 나는 서로 존대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 "존댓말을 쓰자"고 부탁했다. 그러자 남편은 조건이 하나 있다고 했다. "평생 존댓말을 할 테니 교회 한 번만 가자!"
주일 교회에 한 번만 함께 가 주면 평생 존댓말을 해준다는 것이었다. 머릿속으로 계산해보니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교회 한 번 가는 거로 평생 존댓말을 들으며 살 수 있다니 괜찮네!' 그때 나의 종교에 관한 가치와 철학은 탄탄했다.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남편에게 교회에 함께 가겠다고 말했다.
***[역경의 열매] 조혜련 (13) 찬송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
남편 따라 시어머니 다니는 교회 참석… 예전에 믿던 종교보다 따뜻함 느끼며 "예배에 한번만 더 와볼게"
조혜련 집사가 2012년 SBS TV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 출연해 이혼과 일본 활동을 둘러싼 오해와 소문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몇 주가 지난 어느 주일, 남편을 따라 시어머니가 다니고 있는 교회에 따라갔다. 서울 강남구 수서의 작은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예쁘고 아담한 교회였다. 쭈뼛거리며 어색하게 앞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혹시나 사람들이 알아볼까봐 고개를 푹 숙였다. 잠시 후 예배가 시작되는 종이 울렸다.
찬양대가 반주에 맞춰 찬송가 3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를 불렀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성가대의 화음이 아름다워서였을까. 아니면 정말 성전에 계신 성령의 이끄심이었을까. 나도 모르게 찬송을 듣는 순간 그만 눈물이 뚝 떨어졌다.
눈물과 함께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는 정말 쓸데없는 자다. 쓸데없는 가스나로 태어나서 엄마가 죽으라고 엎어놨고, 대학에 합격해서 돈 버리는 짓을 했다며 부지깽이로 얻어맞았고, 열심히 일본에서 방송 활동을 했지만 결국은 오해를 받으며 욕만 듣던 나, 그런 쓸데없는 자가 바로 내가 아닌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찬양대의 찬송은 계속 이어졌다.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이라는 가사가 들렸다. '내 형편은 나를 낳은 엄마도 형제들도 내 아이들도 모른다. 심지어 나 자신도 내가 왜 이렇게 불도저처럼 자신을 괴롭히며 사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내 모든 형편을 아시는 주는 누구란 말인가?'
잠시 후 황명환 담임목사님의 설교가 이어졌다. 목사님의 첫 인상은 정말 인자해 보였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 성경책을 펼쳤다. '출애굽기? 굽기라고? 출애가 뭔데 굽지?' 옆에 앉은 남편을 쿡쿡 찌르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출애가 뭔데 굽는 거야?" 남편은 순간 억지로 웃음을 참는 듯했다.
성경을 뒤적거리며 다른 제목들을 살펴봤다. '민수기? 민수는 한국 사람인데 성경을 쓸 때 한국 사람 민수씨도 같이 집필을 도왔나? 누가복음, 이건 누가 썼는지 모르는 건가? 에베소서, 이건 마리아가 애를 갖는 내용인가?' 성경 제목을 훑어본 후 다시 목사님의 설교를 듣기 시작했다.
이날 설교 말씀의 주제는 출애굽기 31~32장에 기록된 '금송아지 사건'이었다. 430년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이 모세를 리더로 세워 주셨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을 빠져 나와 시내산에 안착하게 된다. 40일 동안 시내산 위에 올라가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모세를 기다리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금귀걸이, 목걸이로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이 자신들의 신이라며 좋아서 춤추며 뛰노는 장면이었다.
생전 처음 듣는 성경 말씀이었다. '참 이스라엘 백성들 너무하네. 하나님이란 존재가 그렇게 힘들게 종살이하던 자기네들을 애굽에서 탈출시켜 줬는데 고작 40일 그 시간 동안 모세를 못 기다리고 배신하나? 참 어이없네.'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았지만 성경 속 이스라엘 사람들이 너무 의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남편이 내게 물었다. "자기야, 오늘 예배 어땠어?" "응, 뭐 그냥 그렇지 뭐." 나는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사실 예배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좋았다. 예전에 믿던 종교는 내가 스스로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정성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날 예배에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묘한 따뜻함과 촉촉함이 있었다. "다음 주는 안 올 거지?" 남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음…. 다음 주에 한 번만 더 와볼게." 남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역경의 열매] 조혜련 (14) "교회 다니든 다니지 않든 성경을 읽어보자"
예배 좋아지기 시작하자 하나님의 존재 알고 싶은 마음 생기고 한 번도 읽지 않았던 성경까지 궁금해
2009년 12월 서울 여의도 MBC방송센터에서 열린 방송연예대상에서 버라이어티부문 특별상을 받은 조혜련(왼쪽), 선우용녀가 수상소감을 밝히고 있다.
교회에 한 번 더 와 보고 싶었던 이유는 금송아지 사건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궁금해서였다. 나 혼자 성경을 읽어볼 수도 있었지만 교회에 와서 온화하게 생긴 목사님께 직접 설교로 듣고 싶었다.
나는 남편, 시어머니와 함께 또 한 번 교회를 찾아 예배를 드렸다. 궁금했던 금송아지 사건은 잘 해결됐다. 모세가 하나님께 이스라엘민족을 용서하지 않을 거면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고 하면서 부르짖는 장면은 진짜 리더다웠다.
이날은 담임목사님께 인사도 드렸다. 남편은 목사님께 내가 누구인지 소개했다. 미소를 머금은 목사님이 내게 하신 말씀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조혜련 성도님의 모습을 보니 그동안 참 많이 분주하게 사신 것 같네요. 이제 그 분주함을 내려놓고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시면 좋을 것 같네요."
목사님 말씀이 맞았다. 돈과 명예 때문이었을까, 성취감 때문이었을까.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바쁘게 사는지 알지도 못 한 채 내 삶은 늘 분주했다. 나도 이 분주함을 내려놓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내려 놓는지 방법을 찾지 못했다.
'분주함을 내려놓고 주 안에서 평안함을 누리라'는 목사님의 말씀이 내 뇌리에 꽂혔다.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이 그 주님이신 건가?' 남편과의 존댓말 사건을 통해 반강제적으로 교회에 가게 된 나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알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찬양대의 찬송, 목사님의 설교 등 예배의 모든 것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예배를 드리다 보면 왠지 모를 눈물이 흘렀다. 매주 드리는 예배는 마치 메마른 땅처럼 갈라진 내 마음 위에 촉촉이 내리는 단비 같았다.
내가 제일 궁금한 건 성경책이었다. 44년 동안 살면서 다른 책들은 열심히 읽었지만 성경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못 했다. '내가 교회를 다니든 다니지 않든 성경을 읽어보자. 혹시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남편에게 따져 물으리라!'
다짐하고는 집 근처 도서관에 갔다. 관련된 서적들을 찾아 펼쳐놓고 성경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6일 동안 세상을 만드셨다는 이야기는 신화적인 느낌이 들었다. 노아의 홍수와 바벨탑 사건 이야기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신비하고 놀라웠고 요셉의 이야기는 너무 흥미로웠다.
창세기를 넘기자 출애굽기가 나왔다. 출애굽은 모세가 이끌었다. 나도 이 장면은 본 적이 있었다. 가끔 TV 주말의 명화 같은데서 지팡이를 쥔 할아버지가 많은 사람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가는 그 장면을 보면서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게 바로 이 출애굽기의 내용이었다.
출애굽기 25장부터는 깜짝 놀랐다.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짜되 길이는 두 규빗 반, 너비는 한 규빗 반, 높이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디자인, 건축학과도 아니고 어떠한 설명도 없이 왜 이런 내용이 나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레위기로 넘어가니 문제는 더 심각했다. 번제, 화목제 등 생소한 용어와 황당한 내용이 계속됐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기 시작했다. 민수기는 아주 불친절한 숫자세기였다. 숫자를 세는 건데 뭘 어떻게 왜 세는지 도저히 답이 안 나왔다.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는 신약은 구약보다 훨씬 쉬웠지만 무엇을 뜻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결국 나는 조용히 성경을 덮고 이렇게 생각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이건 사람이 읽을 책이 아닌 거 같아! 이 책이야말로 비밀, 시크릿(secret)이네!'
***[역경의 열매] 조혜련 (15) 눈물로 기도하는 남편 보며 "이제 믿겠습니다!"
교회 다닌 지 3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 '영접기도' 제의한 남편… 진땀 흘리며 대답 못하자 날 위해 기도
조혜련 집사(가운데)가 2010년 경기도 고양 킨텍스에서 열린 '케이블TV방송대상 M 슈퍼콘서트'에서 멋진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
몇 달 동안 씨름하듯 성경을 뒤적거리며 매주 교회를 다녔다. 성경의 내용은 다 알지 못했지만 교회에 가면 내가 읽었던 내용도 언급됐다. 그동안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평안함도 느껴졌다. 무엇보다 남편과 함께 매 주일 교회를 다녀서 행복했다.
막연했지만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의지하고 무엇이든 다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교회를 다닌 지 3개월쯤 됐을까. 어느 날 퇴근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온 남편이 뜬금없이 '영접기도'를 하자고 했다. '영접기도는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물었다. 남편은 자기가 묻는 말에 스스로 납득이 가면 "아멘"하고 대답하면 된다고 했다. 묻는 말에 대답할 자신이 있었다. 남편이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지금까지 조혜련은 내가 주인 되어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이제 제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세주요, 나의 주인으로 영접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려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려 합니다. 조혜련 성도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당신의 아버지로 인정합니까?"
나는 "아멘"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입은 열었지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니 왜 대답이 안 나오지?'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마치 세례요한 아버지 사가랴가 아들이 태어나기 전 말을 못 한 것처럼 말이다. 남편은 몇 번을 반복해서 물었다. 대답하지 못하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나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나는 대답하고 싶었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진땀을 흘리며 남편에게 말했다. "자기가 대신 대답해주면 안 돼?" "안돼! 자기 스스로 고백해야 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을 한 뒤에도 자신들이 믿던 우상들을 버리지 못해 '금송아지'를 만들어 낸 것처럼 나에게도 내가 믿던 우상의 찌꺼기가 온몸에 배 있는 듯했다.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남편이 성경을 펼쳤다. 그리고 눈을 감고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나를 잡고 있던 남편의 손에서 느껴지는 강한 힘은 마치 하나님이 나를 잡고 계시는 것처럼 느껴졌다. 기도하던 남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정말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건가? 정말 예수님이 날 위해 돌아가셨나? 내가 직접 눈으로 못 봤는데'라는 의심과 '아멘'을 외치며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은 마음이 내 안에서 싸우는 듯했다. 내면의 갈등이 느껴졌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어느 순간 소리를 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앞에서 나를 위해 울고 있는 남편을 보며 용기를 냈다.
남편이 다시 내게 물었다. "하나님이 혜련이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는 이를 믿는 혜련이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이 진리야. 믿는다고 대답해봐. 흑흑." 울먹였다. 나는 용기를 냈다. 입을 열어 작은 소리를 내보았다. "네. 네에…"
내 대답 소리는 점점 커졌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입 밖으로 큰소리를 질렀다. "네! 믿습니다. 아니 믿고 싶습니다. 흑흑흑…. 이제 믿겠습니다. 엉엉." 나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울음을 터뜨렸다. 어린 아기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자마자 세상을 향해 큰 소리로 울어대는 것처럼 나는 엉엉 소리 내며 울었다.
***[역경의 열매] 조혜련 (16) "네가 하나님을 믿게 되다니"… 성미언니 감격의 눈물
주님 영접 고백 후 진정한 자유 느껴… 지인들 축하받으며 교인 등록, 성미언니 떠올라 전화하니…
조혜련 집사(왼쪽)가 2018년 1월 수서교회에서 '교우의 삶 나눔' 후 황명환 담임목사와 함께 활짝 웃고 있다.
영접 기도를 하면서 "믿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순간 나를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짐이 뚝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처음 느껴보는 자유함이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그동안의 내 인생은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해야 했고 결과에 책임지며 살아야 했다. 그렇게 살아낸 내 삶은 늘 너무나 버겁고 힘들었다. "나도 아들만큼 가치 있어요. 여기요! 나 좀 봐주세요"라고 소리쳐야 했다. '나'라는 존재를 인식시키며 인정받기 위해 미친 듯이 아우성치며 분주하게 달려왔다. 그 삶은 행복하지도 평안하지도 않았다.
내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영접하겠다고 고백했을 때 주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내 딸아! 그렇게 힘들게 너 자신을 몰아가며 괴롭히지 않아도 된다. 쑥갓은 쑥갓다우면 되고 장미는 장미이면 되듯이 너는 그냥 있는 그대로 너 다우면 된단다.'
그날 밤 나는 살아계신 예수님을 내 안에 영접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첫사랑의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영원히 잊지 못할 감격의 시간이었다. 남편과 나는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내 마음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남편은 다 아는 듯했다.
'주님! 감사합니다. 나를 만나주시고 나의 주인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영원히 당신과 함께하겠습니다.'
두 달 뒤 교회에 교인으로 등록했다. 시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셨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나를 위해 계속 중보기도를 해오셨다고 했다. 어머니의 눈물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기쁨의 눈물이셨을 것이다.
많은 사람에게 축하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이성미 언니였다. 지난 7년 동안 나를 위해 하루도 빼먹지 않고 중보기도를 해온 언니였다. 나에게 종교를 강요하는 것이 밉고 부담스러워서 언니의 휴대전화 번호도 지워 버리고 몇 달 동안 연락도 끊었었다.
나는 성미 언니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랜만이야. 나 혜련인데, 언니 나 오늘 교회에 등록했어. 그동안 나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줘서 고마워.' 몇 초 만에 언니에게 바로 답장이 왔다. '오 주여! 세상에 하나님! 살아 계시군요! 감사합니다. 아멘!!!' 아멘 뒤에 느낌표 수십 개가 찍혀있었다. 성미 언니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언니…" "흑흑…" 전화기 너머로 성미 언니가 흐느끼고 있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한동안 계속 울던 언니가 말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의 기도를 들어주셨군요. 세상에 네가 하나님을 믿게 됐다니 오! 세상에!" 그날 성미 언니는 '오! 세상에…'를 열 번 넘게 말했다.
"언니 고마워!" "아니 내가 훨씬 더 고마워 혜련아!" "언니가 뭐가 고마워? 내가 더 고맙지. 그 오랜 시간 날 위해 기도해줬잖아!" 전화를 끊기 전 언니가 마지막으로 해준 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혜련아! 네가 되면 다 돼!"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조혜련'이란 장벽도 허물어졌는데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또 다른 누군가도 예수님을 영접하는 날이 반드시 올 수 있다는 의미였으리라. 언니의 말을 듣자 한편으로는 책임감도 느껴졌다. '내가 성미 언니와 남편의 기도 응답으로 주님께 돌아왔듯이 나도 주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겠다'라고 다짐했다.
***[역경의 열매] 조혜련 (17) 울고 있는 내 어깨 감싸 안은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 부정하며 다른 종교 믿던 나를 지금까지 늘 지켜 주심 알고 그 사랑 "배신 하지 않겠습니다" 맹세
조혜련 집사(오른쪽)가 2015년 수서교회에서 열린 성탄기념 '사랑 나눔 콘서트'에서 이창호 목사(작은교회연합 대표)와 함께 사회를 보고 있다.
두 달 뒤 나는 연예인 연합예배에 다시 참석했다. 교회에 갔을 때 진심으로 모두 기뻐하며 어깨를 토닥여 줬다. 마치 돌아온 탕자를 맞아주는 아버지 같았다.
표인봉 오빠는 이성미 언니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내가 교회에 등록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연합예배에 참석하는 연예인들에게 성미 언니는 상기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있잖아, 혜련이가 교회에 등록하고 예수님을 믿게 됐대!" 그 순간 그곳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마치 우리나라가 월드컵 4강에 들었을 때처럼 "할렐루야 아멘!"을 외치며 얼싸안고 기뻐했다고 한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나를 위해 오랫동안 중보기도를 해왔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래서일까.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정말 고마웠다.
연예인 연합예배가 시작됐다. 강대상 왼쪽에 쓰여 있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그 예배자가 바로 당신입니다.' 문구를 읽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하나님, 그 한 사람 찾으시는 예배자가 바로 저였군요! 아직 큰소리로 아멘을 외치고 기도할 용기는 내게 없지만 저도 참된 예배자가 되고 싶습니다.'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40여년 동안 하나님이란 존재를 알지 못한 채 만신창이가 될 정도로 망가진 삶을 살다가 돌아왔다. 그런 나를 하나님은 돌아온 탕자 맞이하듯 두 팔을 벌려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하나님은 탕자를 버려뒀던 것이 아니라 잠잠히 지켜보고 계셨다. 그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말이다. 그 마음을 느끼게 된 순간 주님께 정말 감사하고 죄송했다.
그 순간 누군가 뒤에서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내가 울고 있으니 성미 언니가 감싸 주나 보다 하고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때 느낀 건 하나님의 손길이었다. 그날만 내 어깨를 잡으신 것이 아니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한 번도 놓지 않고 잡고 계셨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
태어나자마자 아들이 아니라며 엄마가 엎어 놓았을 때도, 어린 나이에 시장에서 추위를 이겨가며 쑥갓을 팔 때도, 과자 공장에서 과자를 포장할 때도, 일본에서 머리를 싸매며 울면서 죽고 싶었을 때도, 심지어 다른 종교를 믿으며 하나님을 부정했을 때도 그분의 손은 나를 단단히 잡고 계셨다.
'오! 아버지, 세상에 그동안 저와 함께 계셨군요! 저는 혼자가 아니었군요!' 이런 깨달음과 함께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하나님께 질문했다. '아버지! 저를 왜 붙들고 계셨어요? 우리 집안에는 아무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없는데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하나님은 나의 질문에 '그냥!'이라고 대답하셨다. '그냥 이유가 없어. 아브라함을 내 민족의 아들로 삼은 것이 그가 잘생겨서도 뛰어나서도 아니고 그냥 내가 정한 거야. 너도 마찬가지로 태초부터 그냥 내가 정한 거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느꼈다. 그 사랑은 너무도 든든했다. 그 사랑을 알게 된 후로 세상 적으로 부러울 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더는 말이 필요 없었다. '하나님!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성경에서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또 배신하는 것을 봤습니다. 저도 그 사람들과 똑같은 죄인이지만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살겠습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마커스의 찬양 노래가 내 울음소리를 숨겨주어 고마울 정도였다.
***[역경의 열매] 조혜련 (18) 눈물범벅에 마스카라 번져 골룸처럼 변한 채 세례
막상 세례 받으니 말할 수 없는 감격, 방송할 때보다 더 많이 떨려…주님 늦게 알게 돼 눈만 뜨면 성경 펴
조혜련 집사가 2015년 1월 서울 수서교회에서 황명환 담임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있다.
나는 2015년 1월 1일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는 날 아침부터 긴장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세례를 받기 위해 교회에서 문답 교육을 받았을 때도 아무런 감정이 없었는데 막상 세례를 받는 그날이 되자 말할 수 없는 감격이 나를 사로잡았다. 방송할 때나 많은 사람 앞에서 강연할 때보다 훨씬 더 많이 떨리고 긴장됐다.
함께 세례를 받는 10명의 사람과 함께 성전의 맨 앞줄에 앉았다. 이날따라 벽에 걸린 십자가가 더 크게 보였다. 2000년 전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우리를 위해 갈보리산에서 십자가에 못이 박힌 채 피를 흘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졌다.
세례를 받기 전부터 내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 됐다. '내가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다니!' 눈물로 마스카라는 다 번져서 눈 주위가 검게 변해 버렸다. 그야말로 골룸 분장이 따로 없었다. 긴장되고 떨리고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계속 펑펑 쏟아졌다. 드디어 내 순서가 됐다. 목사님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주로 영접한 하나님의 딸 조혜련에게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아멘."
'아!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너무도 연약하고 교만한데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은 자인데….' 내 마음은 복잡해졌다. 그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다 내려놓고 너에 대한 모든 주권을 나에게 맡기라.' 길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같은 나를 하나님이 선택하셨다. 앞으로의 인생에 있어서 고난도 있겠지만 잘 깎고 다듬어서 사용하시겠다고 하셨다.
남편과 시어머니도 같이 울면서 내가 세례받은 것을 기뻐해 줬다. 세례를 받은 뒤 나는 온종일 하나님에 관한 것만 생각했다. 늦게 알게 된 만큼 시간이 많이 없다고 생각했다. 인터넷에서 목사님들 설교 영상을 찾아보거나 찬양을 들으면서 눈만 뜨면 성경책을 펼쳤다.
어느 날이었다. 크리스천 연예인 연합예배에서 만난 김용 선교사님의 설교를 인터넷으로 보다가 나는 울면서 무작정 짐을 쌌다. 그분은 복음을 전하는 일과 선교사 양성에 열정을 쏟으며 '오직 예수'로만 삶을 사는 분이었다.
저녁 늦게 돌아온 남편은 울면서 짐을 싸고 있는 나를 보며 "뭐 하는 거냐"고 물었다. "자기야. 나는 선교지로 가야 할 것 같아. 나는 너무 이기적인 삶을 살았어. 이렇게 사는 건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이 아닌 것 같아. 거기로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해."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이 진리를 아직도 모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빨리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가족들을 전도하기에는 너무도 어려우니 우선 열방에 나가 전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방송도 다 접고 싶어졌다. 격양된 내 모습을 지켜보던 남편은 나를 다독였다.
"자기의 마음은 너무 순수하고 좋은데 자기 일을 모두 팽개치고 모두가 선교지로 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 잘 구별해야 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구하는 기도를 해 보자."
흥분돼서 무작정 짐을 쌌던 나는 다시 짐을 풀고 마음을 다스렸다. 세례를 받고 나서부터 나는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강한 열망에 빠졌다. 하나님에 대해 더욱 알고 싶어졌고 나의 신앙을 더 키워가고 싶은 마음도 점점 커졌다.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마음을 더욱 알아가고 싶습니다. 당신을 더욱 사랑하는 딸이 되고 싶습니다.'
***[역경의 열매] 조혜련 (19) 둘째 언니 "네 간증 가슴 뭉클했어, 교회에 갈게"
한 기독교 방송국 간증프로그램 출연… 방송 후 둘째 언니 매 주일 교회에 출석
조혜련 집사(오른쪽)가 남동생이자 배우로 활동 중인 조지환씨와 함께 찍은 사진.
하나님을 향한 나의 열정은 달궈진 냄비처럼 확 달아올랐다. 이 엄청난 진리를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산다는 사실이 답답해 견딜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거리로 뛰쳐나가 '예수 믿으세요!'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예수님을 전했다. 친구들, 선배 언니,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삶이 너무 좋아 어쩔 줄 모르겠다'고 말했다. 반응은 냉담했다. "믿음 생활이 그렇게 쉬운 게 아니야." "처음엔 다 그래!" "왜 기독교는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아? 왜 꼭 예수만 믿어야 한다고 해? 너무 독선적인 거 아냐?"
평소 나를 잘 따랐던 남동생에게도 예수님을 이야기했는데, 동생은 목소리를 높였다. 남동생은 라이터를 내 앞에 던지며 이렇게 말했다. "예수가 있다면 지금 당장 라이터 켜보라고 해!" 이렇게 냉정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에게 서운했다.
기독교에 관한 질문들에 대해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고 돌아온 나 자신에게도 속상했다. 그럴수록 '더 열심히 성경 읽고 공부하자. 예전의 나처럼 무지했던 그들을 위해 전심으로 기도하자'라고 다짐했다.
나는 예수님을 믿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었다. 땅과 하늘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신기하고 신비로웠다. 길가에 핀 들꽃 하나만 봐도 감탄이 절로 나왔다. 가녀린 줄기, 작은 잎사귀, 그 위로 예쁘게 달린 꽃잎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 하나까지도 소중하게 다가왔다.
2016년 9월 한 기독교 방송국 간증프로그램에서 출연 섭외가 들어왔다. 나와 같은 교회를 다니는 작가가 내가 세례를 받던 날 마스카라 범벅을 하며 우는 내 모습을 보고 꼭 섭외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했다.
그 프로그램에 나가기까지는 몇 번의 제작 회의가 필요했다. 내가 기독교인이 된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아서 확실한 검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작가님의 오랜 기도와 설득,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녹화가 결정됐다. 우리 부부는 녹화를 앞두고 작정 기도를 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런 마음을 주셨다.
'너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한 영혼을 이 세상 온 천하와 바꿀 수 없을 만큼 너무도 소중하단다. 그 한 영혼을 구하는 것을 나는 가장 기뻐한다. 녹화할 때 겸손히 너의 자랑을 내려놓고 네 목숨이 구해진 것처럼 너도 오직 한 영혼을 구하는 마음으로 해라.'
카메라 뒤에서 남편은 녹화가 끝날 때까지 두 손을 모으고 중보 기도를 했다. 녹화가 진행되고 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녹화 내내 하나님이 내 입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을 증거하는 말이 술술 나왔다. 나는 그분의 말을 내 입술을 통해 전달하면 됐다.
방송이 나간 뒤 예상하지 못한 기적도 일어났다. 나의 바람과 기도대로 한 영혼이 구원된 것이다. 그것도 우리 가족 중에서 말이다. 그 영혼은 바로 둘째 언니였다. "혜련아! 네 간증을 보고 가슴이 뭉클했어. 54년 동안 주위에서 많은 종교를 권유했지만 난 한 번도 마음을 열지 않았어. 이제 하나님의 시간표가 된 것 같다. 일요일 11시 30분 예배니? 그때 교회에 갈게!"
나는 뛸 듯이 기뻤다. 8남매 중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나 혼자였는데 둘이 되니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언니는 내가 선물한 성경책을 가슴에 안고 매 주일 교회에 나왔다. 언니가 내 옆에 앉아서 함께 예배를 드리다니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뻤다. '하나님, 제가 당신께 돌아왔을 때처럼 언니가 돌아온 것도 기쁘시죠? 주님, 감사합니다!'
***[역경의 열매] 조혜련 (20) 성경읽기에 푹 빠진 후 남 정죄하며 교만해져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신 하나님… "무릎 사이에 머리를 넣어라" 채찍질
조혜련 집사가 성경책을 펼쳐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내가 교회에 등록했을 때 성미 언니는 이렇게 조언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뛰어난 능력은 성경을 읽어내는 거야. 그러니까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해." 나는 예수님을 영접한 뒤로 성경을 열심히 읽으려고 노력했다. 처음에는 내용이 너무 어려워 읽기가 쉽지 않았다.
남편에게 "성경이 어렵다"고 말했더니 이튿날 기독교 서점에서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을 사다 줬다. 성경에 나오는 지역들을 지도로 설명해 놓은 책, 성경 내용을 만화로 구성한 책, 각종 신앙 서적 등 다양했다. 남편이 사다 준 책들을 참고하면서 성경을 읽기 시작하자 조금씩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연예인들이 모여서 함께하는 성경공부 모임에도 나갔다. 동료, 선후배 연예인들과 함께 성경도 배우고 자주 얼굴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기독교 방송 프로그램에 패널로 출연해 훌륭하신 목사님께 성경을 배우고 인터넷으로 또 세미나를 찾아다니며 성경에 대해 알고자 힘썼다. 점점 성경에 대해 눈이 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경을 읽는 것이 재미있고 즐거워졌다. 그렇게 나는 성경 읽기에 푹 빠졌다. 일독을 해보고 싶다는 오기도 생겼다. 찜질방, 커피숍 등 어디를 가든지 성경책을 손에 들고 다니며 작은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크리스천들을 만나면 초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먼저 성경에 대해 입을 떼곤 했다. 흥분해서 이야기하면 믿음 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은 대부분 이렇게 말했다. "믿은 지 얼마 안 됐지? 처음엔 다 그래!" 그 말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그럴 때면 조용히 하나님께 다짐했다. '하나님! 시간이 오래 지나더라도 성경책을 절대 놓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또 다른 죄를 짓고 있었다. 교회를 다니면서 성경을 읽지 않거나 또 신앙인으로서 언행일치가 되지 않는 권사님이나 집사님, 심지어 문제가 있는 교회들을 내 입으로 정죄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교회 다닌다는 사람들이 저렇게 행동하지? 어떻게 성경을 읽지도 않지? 진짜 이해가 안 돼!'
바리새인들처럼 교회를 다니면서도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들과 나는 다르고 구별된 특별한 존재라는 강한 자부심을 느끼며 우월감에 빠졌다. 마치 성경에 바리새인이 기도하는 세리를 쳐다보며 그 사람과 다른 것에 감사하는 간사한 모습같이 말이다.
하나님은 그런 나를 엄중히 혼내셨다. 그날도 혼자 소리를 내며 성경을 읽고 있었다. '엘리야처럼 무릎과 무릎 사이에 네 머리를 넣어라!' 갑자기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그런 말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당황스러웠다. 그 강한 이끌림에 나는 옛 선지자 엘리야처럼 머리를 무릎과 무릎 사이에 넣었다.
'네가 성경을 읽고 있다면 느낄 것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바로 자기의 목을 꼿꼿이 들고 남을 비판하는 교만이다. 너는 특히 그 마음이 강하다. 그 교만한 마음을 버려라. 오늘부터 매일 너의 교만을 없애는 것에 대해 기도해라.'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셨다. 나의 가장 약함은 교만이다. 다른 사람을 보면서 판단하고 정죄하며 스스로를 높이려는 마음이 너무 강했다. 그 후 하나님은 매일 나에게 그 기도를 하게 하셨다. 조금이라도 교만해지거나 머리를 빳빳이 들면 가차 없이 채찍질하시며 혼내셨다. 여러 가지 상황을 통해서 말이다. '하나님, 제가 교만하지 않게 해 주세요.'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렇게 기도하고 또 기도할 수밖에 없다.
***[역경의 열매] 조혜련 (21) 우연히 알게 된 열성팬 극단적 선택 직전 "언…니…"
내가 출연하는 방송 꿰뚫고 응원… 친해진 후 고단한 삶 털어놓기도
조혜련 집사가 성경책을 펼쳐놓고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있다.
2016년 여름 서류를 발급받기 위해 한 공공기관을 방문했다. 문을 열고 들어섰는데 한 여인이 나를 보더니 "언니!"라며 소리를 질렀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마치 기다리던 사람을 드디어 만난 것처럼 나를 반겼다.
그녀는 내가 출연하는 방송과 소식을 다 꿰뚫고 있었다. 그러면서 항상 응원해 오던 팬이라고 고백했다. 서류를 발급받고 헤어지기 전에 그녀가 함께 사진을 찍자고 했다. 일어서는 모습을 보니 다리가 조금 불편해 보였다. 그 순간 나를 향해 해맑게 웃어주던 그녀의 인생 뒷면에 '참 많은 고난이 있었겠다'라는 생각이 들며 애정이 갔다.
그렇게 알게 된 그녀와 나는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나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하루는 커피숍에서 만나 대화를 나눴다. '내가 그였다면 어떻게 살았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든 인생이야기를 나에게 털어놨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세 살 때 열병을 앓았다고 했다. 바쁘신 부모님이 치료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둬 결국 열병을 얻었다. 그때부터 한쪽 다리가 불편해졌다. 그 과정에서 그녀가 겪은 인생의 고난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결혼해서 아들딸도 낳았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 자존감을 잃어버리고 여러 가지 문제로 괴로운 삶을 버티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힘든 삶을 살면서도 그녀는 아직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했다.
나는 그녀에게 하나님을 알려주고 싶었다. 친정 식구나 친구들에게 전도했다가 도리어 화가 된 경험이 많았음에도 그에게는 용기를 내고 싶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게 된 이야기를 들려주자 자신도 이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자로 섬긴 적이 있다고 했다. 역시 하나님은 틀림없으신 분이다.
나는 매주 그녀와 두 자녀를 차에 태우고 교회에 갔다. 같이 예배도 드리고 식사도 하면서 교제의 시간을 가졌다. 매일 각자 소리 내서 성경을 읽고 녹음한 뒤 휴대전화 채팅방에 올리기도 했다. 몸은 불편했지만 감성적이고 현명한 그녀는 잘 이해하며 따라왔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을 때쯤, 남편과 차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남편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보라고 했다. 카톡을 보냈는데 한참 동안 확인을 안 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했다.
내가 전화를 걸면 "언니!" 하면서 반갑게 대답하던 그녀가 여러 번 전화해도 받지 않았다. 이상하기도 하고 내심 걱정도 됐다. 나는 계속 전화를 걸었다. 수차례 시도 끝에 드디어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너무나 힘이 없는 목소리로 말이다.
"여…보세요. 언…니…."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았어? 뭐해?" 내 물음에 그녀는 울먹이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목을…." "뭐라고?" "목을 매다가 핸드폰이 울려서 보니까 언니 번호가 떠서 언니 목소리가 너무 듣고 싶어서 내려왔어! 흑흑흑…." 순간 나는 말을 잃었다. '오 하나님,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죠?' 전화기 너머로 계속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화가 나서 막 퍼부어댔다. "왜 이렇게 나약해! 정말 너무 화가 난다.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니?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너를 알게 한 하나님이 너무 원망스럽다!"
***[역경의 열매] 조혜련 (22) 삶 마감하려던 열성팬 '말씀'으로 살아나기 시작
우울했던 엄마가 변하니 딸도 변해… 그 가족 계기로 '성경읽기'방 운영
조혜련 집사(오른쪽)가 개그우먼 정선희가 진행하는 C채널 힐링토크 '회복'에 출연해 간증을 나누고 있다.
"언니 정말 미안해. 나 같은 사람에게 정말 잘해줬는데 이런 모습 보여서. 난 이 세상에서 희망이 없어." 그녀는 계속 흐느꼈다. 잠깐이었지만 하나님께 힘을 달라고 기도했다.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설득했다.
하루가 지났다. 이전에는 그녀가 귀찮을 정도로 나에게 먼저 전화나 메시지를 보냈다. 이제는 내가 먼저 그녀에게 전화하고 문자를 보내며 매일 안부를 물었다. "하나님 이 친구를 저에게 보내신 이유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녀가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내게도 그녀를 돌볼 힘을 주세요. 제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어느 날 새벽 2시가 다 됐을 무렵이었다. 나는 이날 감동적인 경험을 했다. 휴대전화 채팅방에 그 친구가 성경을 읽고 녹음한 음성파일이 올라온 것이다. 늦은 시간까지 잠이 오지 않았는지 혼자 성경을 읽으며 녹음한 것이었다.
"호세아 6장… 흑흑…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흑흑." 그녀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호세아 6장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성경을 읽는 그의 목소리는 떨림과 울음으로 섞여 있었다. 죽고 싶은 현실 앞에서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치료해 주시고 안아주시며 일으키실 것을 믿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눈물이 멈출 줄 몰랐다. 그리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 회개합니다. 그동안 저는 돈 많은 사람, 지위가 높은 사람만을 가까이하고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은 나와 다르다고 평가하고 구분 지으며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는 교만한 자로 살았습니다. 그런 제가 버젓이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 같은 죄인에게 그녀를 보내 주셔서 이제라도 깨닫게 하심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녀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 친구가 살아나자 아이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늘 엄마의 우울한 모습만 보면서 눈치만 보던 열한 살짜리 딸은 엄마가 성경을 읽고 살아내는 모습을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주일날 교회 카페에서 만난 그녀의 딸에게 물어봤다. "너는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열심히 공부해서 엄마처럼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사람이요!" 나는 아이에게 진짜 하나님을 알려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네가 정말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해. 이모랑 같이 성경 읽기 할래? 네가 시편 1편을 읽으면 내가 2편을 읽을게." 그렇게 우리는 휴대전화로 시편을 서로 녹음해서 보내 주는 '시편 친구'가 됐다.
순수한 아이의 목소리로 꾸밈없이 읽어 내려가는 고백은 천사가 내 귓가에 들려주는 소리 같았다. 이것이 계기가 돼 나는 성경 읽기를 퍼트리게 됐다. 마음이 답답하고 외로워하는 주위 사람들과 카톡으로 '성경 녹음하기' 커뮤니티를 만들었다. 일대일로 두 명이 하는 방도 있고 많게는 열 명이 함께하는 단톡방도 있었다. 그렇게 총 16개의 '성경 읽기' 방을 운영했다. 그러다 보니 매일 40장 분량을 읽게 됐다.
매일 40장 분량을 읽으려면 2시간 정도 걸린다. 만만치 않은 분량이지만 성경을 읽어나가면서 '성경이 꿀보다 더 달다'라는 말을 실감하게 됐다. 불경을 외우고 성경만 안 읽던 내 인생이 이제 눈만 뜨면 성경만 읽게 되는 큰 반전의 삶으로 바뀐 것이다.
***[역경의 열매] 조혜련 (22) 삶 마감하려던 열성팬 '말씀'으로 살아나기 시작
우울했던 엄마가 변하니 딸도 변해… 그 가족 계기로 '성경읽기'방 운영
조혜련 집사(오른쪽)가 개그우먼 정선희가 진행하는 C채널 힐링토크 '회복'에 출연해 간증을 나누고 있다.
"언니 정말 미안해. 나 같은 사람에게 정말 잘해줬는데 이런 모습 보여서. 난 이 세상에서 희망이 없어." 그녀는 계속 흐느꼈다. 잠깐이었지만 하나님께 힘을 달라고 기도했다.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설득했다.
하루가 지났다. 이전에는 그녀가 귀찮을 정도로 나에게 먼저 전화나 메시지를 보냈다. 이제는 내가 먼저 그녀에게 전화하고 문자를 보내며 매일 안부를 물었다. "하나님 이 친구를 저에게 보내신 이유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녀가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내게도 그녀를 돌볼 힘을 주세요. 제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어느 날 새벽 2시가 다 됐을 무렵이었다. 나는 이날 감동적인 경험을 했다. 휴대전화 채팅방에 그 친구가 성경을 읽고 녹음한 음성파일이 올라온 것이다. 늦은 시간까지 잠이 오지 않았는지 혼자 성경을 읽으며 녹음한 것이었다.
"호세아 6장… 흑흑…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흑흑." 그녀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호세아 6장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성경을 읽는 그의 목소리는 떨림과 울음으로 섞여 있었다. 죽고 싶은 현실 앞에서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치료해 주시고 안아주시며 일으키실 것을 믿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눈물이 멈출 줄 몰랐다. 그리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 회개합니다. 그동안 저는 돈 많은 사람, 지위가 높은 사람만을 가까이하고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은 나와 다르다고 평가하고 구분 지으며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는 교만한 자로 살았습니다. 그런 제가 버젓이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 같은 죄인에게 그녀를 보내 주셔서 이제라도 깨닫게 하심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녀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 친구가 살아나자 아이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늘 엄마의 우울한 모습만 보면서 눈치만 보던 열한 살짜리 딸은 엄마가 성경을 읽고 살아내는 모습을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주일날 교회 카페에서 만난 그녀의 딸에게 물어봤다. "너는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열심히 공부해서 엄마처럼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사람이요!" 나는 아이에게 진짜 하나님을 알려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네가 정말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해. 이모랑 같이 성경 읽기 할래? 네가 시편 1편을 읽으면 내가 2편을 읽을게." 그렇게 우리는 휴대전화로 시편을 서로 녹음해서 보내 주는 '시편 친구'가 됐다.
순수한 아이의 목소리로 꾸밈없이 읽어 내려가는 고백은 천사가 내 귓가에 들려주는 소리 같았다. 이것이 계기가 돼 나는 성경 읽기를 퍼트리게 됐다. 마음이 답답하고 외로워하는 주위 사람들과 카톡으로 '성경 녹음하기' 커뮤니티를 만들었다. 일대일로 두 명이 하는 방도 있고 많게는 열 명이 함께하는 단톡방도 있었다. 그렇게 총 16개의 '성경 읽기' 방을 운영했다. 그러다 보니 매일 40장 분량을 읽게 됐다.
매일 40장 분량을 읽으려면 2시간 정도 걸린다. 만만치 않은 분량이지만 성경을 읽어나가면서 '성경이 꿀보다 더 달다'라는 말을 실감하게 됐다. 불경을 외우고 성경만 안 읽던 내 인생이 이제 눈만 뜨면 성경만 읽게 되는 큰 반전의 삶으로 바뀐 것이다.
***[역경의 열매] 조혜련 (23) 나를 '성경 바람잡이'로 간증 자리 세우신 주님
전성기처럼 방송하게 해달라 투정하자 하나님 전할 수 있는 소명 주셔… 간증할 때마다 성령 함께해
2018년 1월 서울 강남구 수서교회에서 조혜련 집사가 간증을 하고 있다.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나가게 됐다고 모든 문제가 풀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의 방송 활동은 잘 나가던 때보다 더 어려워졌다. 방송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까지 치달았다. 나는 하나님께 투정을 부리며 떼를 썼다.
'하나님, 그리스도인도 방송인으로 잘 나가야 하나님 일을 더 잘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저는 아직 감도 죽지 않았고 쌩쌩합니다. 같이 활동했던 동료들처럼 저도 더 많은 일을 하게 해 주세요.'
그때 하나님이 이런 마음을 주셨다.
'방송 잘하는 사람은 정말 많아. 근데 나를 진심으로 알고 전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 네가 나에 관해 연구하고 그것을 전하는 일 좀 하면 안 되겠니?'
내가 물었다.
'제가 어떻게 그걸 해요? 저는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고요!'
'성경 바람잡이!'
'네? 뭔 바람잡이요?'
'성경 바람잡이! 너는 어렸을 때부터 시장에서 다른 사람보다 쑥갓도 잘 팔고, 피에로처럼 웃기고 뭐든지 바람을 잘 잡잖아! 나의 말, 성경을 읽지 않고 자기가 상상한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바람 좀 잡아줘라!'
이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일까?
'네 알겠습니다. 성경의 바람잡이가 되겠습니다.'
2017년부터 교회에서 간증을 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작은 개척교회부터 대형교회, 한국뿐 아니라 미국과 일본까지 다니며 간증했다. 처음 간증을 할 때는 두서없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형편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지혜를 허락하셔서 듣는 이나 전하는 이에게 기쁨과 감동을 주셨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을까. 또 문제가 생겼다. 매번 똑같은 간증 이야기를 습관처럼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됐다. 나는 다시 하나님께 매달렸다.
'하나님 똑같은 말을 하는 게 너무 힘들어요. 이 일을 어떻게 계속할 수 있죠? 여기서 그만하면 안 될까요?'
그때 하나님은 이런 마음을 주셨다.
'너는 같은 말을 반복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너를 보러 온 사람들은 너의 이야기를 처음 듣는 거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한 영혼을 너의 간증으로 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 줄 아니? 매 순간 성령의 힘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살린다는 마음으로 전해라.'
나는 또 다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떤 것으로든 하나님을 설득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내 생각은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 뒤로 신기하게도 간증할 때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느꼈다. 같은 내용도 매번 처음 말하듯이 이야기하는 새 힘을 주셨다.
하나님을 부정했던 내가 간증을 하며 "성경을 열심히 읽자"는 메시지를 전하자 가는 곳마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간증했던 많은 교회에서 전 교인이 성경 읽기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교회에서 상처를 받아 교회를 다니지 않았던 한 자매는 내 간증을 듣고 "다시 하나님을 믿겠다"며 내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렸다. 미국의 한인교회에서 만난 83세 할머니는 "이 나이 되도록 성경을 한 번도 제대로 읽지 못했어. 내가 죽기 전까지 조혜련씨보다 더 성경을 많이 읽다 죽으려오. 이런 마음 갖게 해줘서 고마워요"라고 말씀해주셨다. 이런 고백을 들을 때면 부족한 나를 사용하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하나님은 어느 한 곳도 나를 헛걸음하게 하신 곳이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행복하고 뿌듯할 때는 간증을 하고 강대상에서 내려올 때 마음 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올 때다. '고생했다. 내 딸!' 주님이 주시는 그 마음이 너무 좋아서 요즘도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세계 방방곡곡을 다니며 예수님을 전하고 있다.
***[역경의 열매] 조혜련 (24) 일본 교회서 일본어로 간증… "저는 주님과 함께 삽니다"
다른 종교 섬기며 헤매고 다닌 7년간의 힘들었던 일본 생활 반전 위한 하나님 뜻임을 깨달아
조혜련 집사가 2009년 '조혜련의 박살 일본어'를 출간하고 서울 종로구 영풍문고에서 팬 사인회를 열고 있다.
2017년 10월 일본 오사카에 가게 됐다. 이성수 영화감독이 제작하는 기독교 다큐멘터리 '용서를 위한 여행'에 출연하기 위해서였다. 촬영이 없는 날 일본의 한 교회에서 간증하게 됐다.
44년 동안 일본 불교를 믿었던 내가 회심하고 돌아와 처음으로 일본 교회에서 일본어로 간증하게 된 것이다. 교회에 들어서자 40여 분의 성도들이 앉아 있었다. 장소가 일본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수없이 많은 간증을 해왔는데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먹먹해졌다.
"하지메마시테,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조혜련이라고 합니다. 10년 전 일본에서 방송 활동을 했는데 혹시 저를 기억하시는 분 있으신가요?" 몇몇 분은 나를 알아보는 듯했다.
"와따시와기리스도징데쓰.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세상의 것만 쫓으며 기독교를 비난했습니다. 그런 저를 하나님께서 자녀 삼아주셨고 제가 이렇게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일본에서 힘들었던 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저는 알았습니다. 제가 왜 그렇게 힘들게 버텨야 했는지 말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일본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일본어를 배웠고 고난을 경험한 것 같습니다. 사랑합니다"라며 말을 끝마쳤다.
내 얼굴은 눈물범벅이 됐다. 간증을 듣고 있던 분들도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나는 난생처음 일본 교회에서 일본어로 복음을 전했다.
2017년 11월에는 동경 온누리교회에서 간증했다. 하나님 없이 나 혼자 헤매며 돌아다녔던 힘들었던 7년간의 일본 생활이 떠올랐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막막했다. 긴장된 마음 때문이었을까. 간증 당일 새벽 3시에 눈을 떴다. 마치 하나님이 나를 깨우신 것 같았다.
하나님은 '사제불이(師弟不二)'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셨다. 내가 믿었던 일본 종교에는 '사제불이'라는 말이 있다. '스승과 제자는 둘이 아니고 하나다'라는 뜻이다. 그 종교를 믿는 많은 일본 연예인과 스포츠 선수, 정치인들은 그 종교를 이끄는 회장을 스승으로 생각하고 그분을 닮기 위해 '사제불이'의 정신으로 살아간다.
하나님은 왜 뜬금없이 그 단어를 떠올리게 하셨을까. '사제불이 정신으로 사람을 존경했는데 그 사람이 널 위해 대신 죽었니?'
'아니요. 아직 살아있다고 하던데요.'
'예수는 네 죄를 위해 죽었다. 예수와 네가 둘이 아니라는 생각은 해본 적 있니?'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 새벽에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을 남편과 나눴다. 그랬더니 남편이 "사제불이가 아니고 예아불이(耶我不二)네!"라고 말했다. 그게 뭐냐고 묻자 "예수님과 내가 둘이 아니라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그날 나는 간증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새벽에 하나님이 깨우셨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혼자 일본에서 다른 종교를 섬기며 헤매고 있을 때도 잠잠히 저를 지켜보셨고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어제 새벽에 이전에 믿었던 종교 '사제불이' 정신을 떠올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예아불이'로 바꿔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예수님과 함께 삽니다.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아갑시다."
내 입술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반전 드라마에 모두 감동해 눈물을 흘렸다. 하나님의 계획하심은 내가 다 알지 못한다. 앞으로도 나는 하나님께서 일본에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주시면 그때마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갈 것이다.
***[역경의 열매] 조혜련 (25) '아나까나~' 부르던 나, 찬양앨범 녹음하게 돼
내 간증 들은 플루티스트 송솔나무, 김사무엘 목사와 함께 찬양곡 만들어
조혜련 집사가 2017년 발매한 '성경 낭독이 있는 찬송' 2집 앨범(나는 예수의 증인) 사진.
주일 예배가 끝나고 남편과 함께 가까운 도서관을 찾았다. 남편이 책 한 권을 뽑아 들었다. '하나님의 연주자'라는 책이었다. 플루티스트 송솔나무의 자서전이었다. 남편은 그 책을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힘들었던 어린 시절이 송솔나무와 너무 비슷하다며 가슴 아파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분을 만날 것 같다고 말했다.
시간이 흐른 후 나는 한 기독교 방송에서 특집방송을 하게 됐다. 그곳에서 우리 부부는 송솔나무 집사님을 만나게 됐다. 심장도 호흡기도 좋지 않으면서 선교사로 전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보며 그분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송솔나무 집사님과 만남은 계속 이어졌다.
어느 날 송솔나무 집사님은 나의 간증 이야기를 듣고 CCM 워십팀 어노인팅 멤버였던 편곡자 김사무엘 목사님과 함께 쓴 곡이라며 찬양을 들려줬다. 두 분과 만남이 계기가 돼 '성경낭독이 있는 찬송' 앨범을 녹음하게 됐다.
예전에 나는 '아나까나까나리까니키퍼웨이~바리소올라잇!'하며 팝송을 들리는 대로 코믹하게 소리를 질러가며 불렀는데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예수 나를 위하여'라는 곡을 녹음할 때였다. 찬양을 처음 불러 보는 나는 "예수 나아를~위이하여허~"라며 온갖 감정과 바이브레이션으로 변화음을 섞어가며 불렀다.
송 집사님이 말했다. "조 집사님! 변화음을 주지 말고 악보에 있는 그대로의 음으로 불러 주세요!" "집사님 감정이 없어요. 감정 넣고 다시 할게요!" "변화음 주지 마시고 악보대로 하세요!" 찬양 한 곡을 부르는데 두 시간 이상이 걸렸다.
'일부러 딴지를 거는 건가? 뭐가 잘못됐다는 거지?' 그러다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더운 여름, 좁은 녹음실에 오디오 때문에 에어컨도 틀 수도 없었고 목소리도 안 나왔다. 너무 힘들었다. 나는 한탄하듯 주저앉아 소리쳤다.
"하나님! 저 못하겠어요! 저는 CCM 가수도 아니고 제가 무슨 노래를 해요?" 나도 베테랑 방송인인데 자존심이 상해 불쾌한 마음이 가득했다. 타협하기 싫어서 고집을 부렸던 것 같다.
그때 하나님이 이런 마음을 주셨다. '네가 부른 노래로 한 영혼을 살릴 수 있어. 너의 고집스러운 자존심을 버리고 순수한 아이같이 불러보렴!' 다시 일어섰다. '그래 나를 버리고 오직 예수님만 드러날 수 있도록 마음으로 노래하자!'
악보를 보며 변화음을 넣지 않고 순수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를 부르는데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흘리며 돌아가시는 모습이 상상돼 찢어질 듯 마음이 아팠다.
녹음을 끝내고 밖으로 나왔더니 송솔나무 집사님과 남편도 울고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예수님의 마음을 담아 노래하는 것은 어떤 기교나 감정이 아닌 나 자신을 내려놓고 그분과 하나가 되어 진심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을….
찬송 음반 CD를 가장 먼저 들려주고 싶은 사람은 엄마였다. 내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 엄마였다. 그래도 딸이 노래한 거라면 들어줄 것 같았다. 그래서 한 곡, 한 곡 녹음할 때마다 엄마가 예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도록 기도하며 불렀다. 시간이 지나고 엄마 집에 갔을 때 CD가 그대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속상하기는 했지만 엄마를 향한 하나님의 시간표를 기다리며 오늘도 잠잠히 기도한다.
***[역경의 열매] 조혜련 (26) 딸 윤아와 오랜 시간 묵혀둔 마음 속 앙금 풀어
엄마 빈자리에 조금씩 마음 닫은 윤아… 말다툼 하다 서로 자기 속마음 털어놔
조혜련 집사(오른쪽)가 지난 5월 고등학교를 졸업한 딸 김윤아 양과 함께 활짝 웃고 있다.
딸 윤아와 아들 우주를 생각하면 미안하고 안타까움에 마음이 먹먹해진다.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읽으면서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아이들과의 관계회복이다.
윤아에게 교회에 가자고 권유하면 반응은 늘 싸늘했다. "엄마, 종교 바꿨어?"라고 물으며 자신은 교회에 다니고 싶지 않다고 했다. 윤아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와 대화하고 싶어 했고 함께 시간 보내기를 원했다. 그러나 정신없이 바쁜 엄마에게 윤아는 조금씩 마음의 문을 닫기 시작했다. 뭐든지 혼자 결정하고 혼자 마음을 삭였다.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윤아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나는 윤아가 공부를 좋아하고 잘하는 것이라며 뿌듯해했다. 중학교 3학년 때까지 한 번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윤아를 보며 나는 사람들에게 자랑했다. 그것이 얼마나 외로운 길이었는지도 알지 못한 채 말이다.
명문 고교에 들어간 윤아는 결국 석 달 만에 학교를 그만뒀다. 일류 대학을 가기 위해 감옥과도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공부가 진절머리나도록 싫다고 했다. 자퇴한 후 1년 4개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칩거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윤아에게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교회에 같이 가자고 했다. 엄마와의 관계회복이 먼저 필요했던 윤아에게는 그 어떤 말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내가 집에서 성경을 읽고 찬송가 부르는 것을 듣는 것도 싫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윤아와 말다툼을 하게 됐다. 학교를 그만두고 자기 방에 틀어박혀 허송세월하는 것이 눈에 거슬렸던 나는 윤아에 대해 불만을 쏟아냈다. 서로가 예민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생채기 가득한 딱딱한 말들을 쏟아냈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지 말해!"라고 소리치자 윤아는 울면서 자기의 속마음을 털어놨다. 자신이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는지, 부모의 이혼, 공부에 대한 부담감으로 윤아는 정말 많이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일본에 있을 때 국제 전화로 엄마에게 울며 매달린 이후 처음으로 자기의 속마음을 털어놨다.
그날 저녁 나는 혼자 교회에 갔다. 평일이라 아무도 없는 조용한 예배당에 앉았다. 십자가 주위에만 빨간 조명이 켜져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십자가를 바라봤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나님은 사랑인데 우리를 위하여 자기 아들도 아낌없이 내어주신 분인데 나는 그분을 믿는다면서 여린 내 딸 하나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도 죄스러웠다. 자격 없는 엄마 때문에 아픈 딸을 치유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집에 돌아온 나는 윤아 앞에 다가가 앉았다. "윤아야! 엄마가 정말 미안하다. 너에게 너무나 큰 아픔을 줬어. 어렵겠지만 용서해줘. 미안하다." 그날 밤 윤아와 나는 오랜 시간 동안 마음에 묵혀둔 엉켜진 실타래들을 하나씩 풀어나갔다.
며칠 후 주일날 윤아가 안방 문을 두드렸다. 자신도 교회에 함께 가겠다고 했다. 왜 교회에 나갈 마음이 생겼냐고 물었더니 "내가 엄마를 아는데 엄마는 절대 바뀔 사람이 아닌데 이렇게 달라진 걸 보니 엄마가 믿는 하나님은 대단하신 분 같아. 나도 그분을 알고 싶어졌어"라고 말했다.
그 후 윤아는 성경통독을 나와 함께 두 번이나 했다. 나와 관계가 회복된 후 2017년 학교도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학교생활을 하면서도 성경을 카톡으로 녹음해 읽고 또 읽으며 하나님을 알기 위해 애썼다. 날마다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깨닫고 믿음 생활하는 딸이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역경의 열매] 조혜련 (27) 하나님 존재 부정하던 아들 우주에게도 반전이…
같은 교회 다니는 자매 좋아하게 된 후 매일 새벽기도 했으나 소식 없자 실망
딸의 고등학교 졸업식에 참석한 조혜련 집사(오른쪽)와 아들 김우주군이 함께한 모습.
아들 우주는 어렸을 때부터 SBS 예능프로그램 '붕어빵'을 시작으로 나와 함께 방송 활동을 해왔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우주도 마음 깊은 곳에 많은 아픔을 갖고 있었다. 새 아빠를 좋아하고 잘 따라서 대화는 종종 했지만 하나님에 대해선 알려고 하지 않았다.
라면을 끓여놓고 앉아서 식사 기도를 하면 이렇게 말했다. "뭐야! 라면은 라면회사가 만든 건데 누구한테 기도하는 거야! 나무아미타불!" 우주에 맞서 아빠는 이렇게 되물었다. "우주야. 라면의 원재료인 밀가루는 어디서 나왔지? 그 밀의 씨앗은 누가 만들었을까?"
농담처럼 던진 자신의 개그가 심오한 논쟁으로 커지면 우주는 말꼬리를 흐렸다. "아, 몰라요. 너무 깊게 들어가지 말아요."
우주는 드럼을 배우러 간 학원에서 신실한 크리스천 선생님을 만나 교회에 나가게 됐다. 아직 하나님의 존재에 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래도 주일이면 교회에 따라나서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쁘고 대견하다.
가족들이 다 함께 교회에 나가 예배드렸던 날을 잊을 수 없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나온 우주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도 무기가 있네!" "어떤 무기?" "은총!"
얼마 후 우주는 같은 교회에 다니는 자매를 좋아하게 됐다. 믿음이 신실한 자매는 매일 새벽기도에 나왔다. 우주도 새벽에 일어나 자전거를 끌고 교회에 나갔다. 우주는 그 자매가 잘 볼 수 있는 강대상 바로 밑에 무릎을 꿇고 큰소리로 기도했다. 마치 바리새인처럼 좋아하는 누나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도였다.
새벽기도를 다닌 지 2주쯤 됐을까. 새벽기도에서 돌아온 우주가 현관에 자전거를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아!" "왜?"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2주 동안 새벽기도를 갔는데 그 누나도 나를 좋아해 줘야 하는 거 아냐? 근데 쳐다보지도 않아! 내 기도도 하나도 안 들어주는데 하나님이란 존재가 어디 있어?"
이랬던 우주에게도 반전이 일어났다. 현재 우주는 기독학교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늘 삐딱하던 우주의 말과 행동도 달라졌다.
"엄마는 어떻게 그렇게 어려운 성경을 소리 내서 잘 읽어? 일본어 중국어도 잘하고, 영어는 언제 또 배웠어?" 엄마를 칭찬하기 시작했고 꿈꾸기 시작했다.
"우주는 앞으로 어떤 공부를 하고 싶어?"
"나는 공대를 갈 거야. 가서 VR을 개발할 거야."
"VR 만들어서 뭐 하려고?"
"몸이 아파서 가족들과 제주도를 여행 갈 수 없는 사람에게 제주도를 똑같이 보여주는 그런 VR을 만들고 싶어."
"우주야! 진짜 너무 멋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 우리의 인생에서 성공이 뭘까? 돈 많이 버는 거? 유명해지는 거? 엄마는 다 해봤는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닌 것 같아. 하나님의 존재를 알아갈수록 성경을 읽을수록 더 명확해져."
가정을 회복시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주님은 부족한 엄마로 인해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우리 아이들을 성경말씀을 통해 치유해 주셨다.
나는 우리 아이들뿐 아니라 다음세대를 위해 성경을 재미있게 설명해 주는 동영상을 만들고 싶다. 아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꿀처럼 달게 삼켜서 성경을 제대로 알기 원한다. 성경을 통해 다음세대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던 다윗, 사무엘, 다니엘과 같은 인재들이 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역경의 열매] 조혜련 (28·끝) 신앙 갖게 되면서 내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
예수 믿고 성경 읽으며 삶의 목적 변해… 주님 통해 인생의 놀라운 반전 이뤄내
조혜련 집사가 지난 18일 서울 종로구 굿씨어터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SBS '스타킹' 프로그램을 할 때였다. 동갑내기 친구였던 강호동이 이런 질문을 했다. "혜련아! 인생에는 성공과 실패가 있지. 그지?" 당연한 질문 앞에 나는 "그렇지!"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호동이가 말했다.
"틀렸다!"
"응? 틀렸다고?"
어리둥절한 내 표정을 보며 호동이가 말했다. "인생에는 성공과 과정이 있는 건데 뭐가 실패고? 다 성공을 위한 과정이다! 안 그렇나?" 멋진 말이었다. 목표를 향해 가는 길에는 시련의 과정이 있다. 그 시련을 겪는 순간을 실패라고 여기지 않고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으로 생각한다면 좌절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를 믿고 신앙을 갖게 되면서 목표와 목적의 차이를 알게 됐다. 목표는 무엇을 얼마만큼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목적은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 본질적인 이유와 의미이다.
많은 사람은 목표와 목적을 혼동하며 살아간다. 목표만 있고 목적을 모른 채 말이다. 사람들에게 '목표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 성공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본인이 하는 분야의 최고가 되는 것, 돈과 명예, 인기, 권력 등을 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과거에 나 역시 이런 것들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를 믿고 성경을 읽으면서 내 삶의 목적은 변했다. 이 땅에 태어난 목적은 잘 먹고, 잘 입고, 풍요롭게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 존재의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만드신 창조의 목적이기도 하다.
황명환 담임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듣고 '아, 이게 성공이구나!'하고 깨달았다. "진정한 성공은 다음의 세 가지를 아는 것입니다. 첫째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가를 아는 것이고, 둘째는 내가 사는 동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고, 셋째는 내가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이다. 만일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지면 살 수 없고 열매도 맺을 수 없다. 그러나 나무에 잘 붙어있는 가지는 열매를 잘 맺을 수 있다. 이것이 가지의 성공이다. 즉 우리도 예수님께 잘 붙어있는 것이 성공인 것이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쓰신 반전의 드라마가 많다. 100세 나이에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여 이삭을 낳은 아브라함,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 멋진 리더로 세우신 모세, 고난 가운데도 정직하게 행했던 욥의 반전도 기가 막힌다.
그러나 성경 속에서 가장 큰 반전은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돌아가셨다. 주님의 십자가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온 인류의 희망과 기쁨을 주는 대반전의 역사를 이루셨다.
나는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사랑의 증거로 보내주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을 기회를 주셨다. 멸망의 길에서 영생의 길로 바뀐 것이다. 이보다 더 크고 놀라운 반전이 있겠는가.
어릴 적 우리 집은 가난했다. 나는 남자로 태어나지 못해 인정받지 못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부유해지고 남들이 나를 인정해 주면 그것이 내 삶의 반전이라고 여겼다. 되돌아보면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하나님을 통해 나는 내 인생의 놀라운 반전을 경험했다. 오늘도 나는 기도한다. 내 목숨 다하는 날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명령 삼아 아직 주님을 모르는 자들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되기를 간절히 간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