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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암중원 (漢巖重遠, 1876~1951)】경허스님 법맥 이은 ‘한국불교 나침반’
맑고 깨끗한 계행과 넓고 깊은 학문 그리고 일행삼매(一行三昧)의 정진으로 수행 승가의 참 모습을 보여 준 한암중원(漢巖重遠, 1876~1951)스님. 한암문도회(회장 현해스님)와 오대산 월정사(주지 정념스님)는 어른스님의 선양사업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다. 한국불교의 방향을 제시한 한암스님의 가르침은 지금도 유효한 출가사문의 나침반이다. 내장사 조실 동성스님과 조계종 원로의원 현해스님의 증언과 <한암일발록> 을 통해 한암스님의 수행을 살펴보았다.
선교능통 / 한학조예
경허스님 법맥 이은 ‘한국불교 나침반’
<사진> 1951년 상원사에서 좌탈입망한 한암스님을 김현기 대위가 촬영한 사진 원본. 책상 위에 놓인 죽비와 경전이 소박한 삶과 정진에 몰두했던 스님의 삶을 대변하는 듯하다. 사진제공=현해스님
○…스님은 수행자가 반드시 지켜야할 다섯 가지 덕목으로 참선, 염불, 간경, 예식, 가람수호 등 승가오칙(僧伽五則)을 제시했다. 어느 것 하나 소홀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걍參釉� 잘 하려면 부처님 탁자 밑에서 살아야 한다.” 경허스님 법맥을 잇고 한학에 조예가 깊었지만 참선만을 유일한 공부로 삼지 않았다. “경(經)은 노정기(路程記)요, 선(禪)은 행(行)함이다.”
○…혼자 공부하는 ‘독(獨)살이’의 병폐를 경계하고 “절집을 떠나지 말라”며 대중처소에서 정진할 것을 당부했다. 대중과 떨어져 정진하면 아무래도 공부에 소홀해지고, 생활이 방만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이 ‘나의 공부’를 격려하고 나태함을 경계하는 좋은 벗이 된다는 것이다.
○…상원사로 주석처를 옮긴 뒤 스님 문하에서 정진하려는 수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건봉사.신흥사.유점사 등 강원지역 3본사가 공동으로 수련원을 개설하면서 대중이 100여명에 이르렀다. 산간 오지의 작은 암자에 불과했던 상원사(당시는 상원암)가 수행의 중심도량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풍족하지 않은 상원사 살림으로 ‘먹고 사는 일’이 숙제였다. 큰절에서 보내오는 1년 치 식량은 쌀 4섬에 불과했다. 비록 생사를 넘나드는 공부를 하지만 무조건 굶을 수는 없었다. 식량을 마련하는 일은 큰 문제였다.
더욱 심각한 것은 병자(病者)가 생겼을 경우였다. 사중에서 치료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한겨울이 되어 오솔길까지 막히면 더욱 난감해졌다. 이처럼 ‘비상 상황’이 발생하면 조실 방에 있는 꿀단지의 뚜껑이 열렸다. 쾌유를 기원하는 스님의 따뜻한 정과 함께 꿀 한 그릇이 전해졌다. 그러나 스님은 당신을 위해서는 한 번도 꿀단지를 열지 않았다. “벌 수백 마리가 열심히 일해 만든 공을 함부로 할 수 없다.” 결국 조실 방의 꿀단지는 대중들의 비상약 이었다.
○…한국전쟁 이전부터 빨치산이 오대산에 나타나면서 국군이 주둔했다. 간혹 군인들이 상원사 계곡에서 밥을 지어 먹는 일이 있었다. 군인들이 밥을 먹고 난 뒤 계곡 곳곳에는 생쌀과 밥풀이 흩어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우연히 이 모습을 본 스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이 버린 밥알을 모두 주워 씻어 먹었다.
“쌀 한 톨이 썩어 나가면 그만큼 복(福)도 따라 나간다”며 평소 근검절약을 강조했던 스님이다. 음식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 준 것이다. 제자들이 가끔 상추잎 등을 버리면 “먹을 수 있는데 왜 버렸냐. 이 보다 못한 풀도 먹는다”는 경책을 들어야 했다. 치약은 고사하고 소금으로 양치하는 일도 상상 못했다. 버드나무 가지를 다듬어 양치를 대신했다.
“참선 염불 간경 예식 가람수호는 승려의 덕목”
“허욕은 망신이고 고집불통은 패가” 화합 강조
○…1943년 여름 만공(滿空)스님이 적멸보궁을 참배하기 위해 오대산에 왔다. 만공스님이 일주일간 기도를 마치고 돌아갈 때 한암스님은 동피골 외나무다리까지 배웅을 나왔다. 만공스님이 “한암스님!” 이라고 부른 뒤 작은 돌 하나를 집어 던졌다. 그 돌을 주워든 한암스님은 아무 말 없이 개울로 던졌다. 깨달음의 경지에 있는 두 어른의 법거량이었다. 그 뒤로 만공스님과 한암스님은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경허스님 법맥을 이어 덕숭산과 오대산에서 회상을 이룬 두 어른의 만남은 그 자체로 의미가 깊다.
○…일제 강점기말(末) 이른바 ‘대동아 전쟁’을 벌이고 있던 일본은 패색이 짙어지면서 초조해 졌다. 일왕(日王)은 명사들에게 사자를 보내 승전을 기원하도록 했다. 조선총독이 스님을 경성으로 초대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총독은 실권자인 정무총감을 상원사에 보냈다. 스님 앞에 앉은 정무총감이 말문을 열었다.
“일본과 미국이 전쟁을 하는데, 어느 나라가 이기겠습니까?” 미국이 이긴다면 총독부에서 가만있지 않을 것이고, 일본이 이긴다면 민족 앞에 죄를 짓는 순간이었다. 모두 마음을 졸였다. 스님은 조용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덕(德)이 있는 나라가 이깁니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 오른 정무총감은 오대산을 내려와야 했다.
○…스님은 “바랑 지고 밥도 얻어먹고 인심도 살피면서 고행하는 것이 공부에 도움 된다”며 만행을 통한 정진을 후학들에게 당부했다. 다음은 만행할 때 예절에 대한 스님 육성이다.
“객으로 절에 가면 먼저 ‘객문안입니다’라고 소리하여 주인을 찾은 후 인도하는 방에 가서 행장을 놓고 발을 씻는다. 장삼을 입고 가사를 수한 뒤 법당으로 가서 부처님 전에 참배하고 나와 종무소 안내를 받아 조실 또는 주지스님에게 인사한다. 반드시 ‘아무 산중에서 왔으며, 누구의 권속이라는 것’을 밝히며, 각방에 노스님이 계시면 인사를 드린다. 일일이 본사와 은사스님을 알리고 정중하게 법(法)을 문답한다.
기회 되는대로 큰방에 들어가 전면에 절하고, 상판과 하판에 절 한 후 본사와 은사스님을 소개한다. 만일 속가에 가면 어느 집으로 갈지 결정해 주인을 찾은 후 정중하게 언담(言談)을 하고 출가자 신분에 손상이 없도록 행동해야 한다.”
○…스님은 제자들을 엄격하게 지도했다. 잘못하면 눈물이 쏙 나올 만큼 야단을 쳤다. 안거 기간에 잠시 마을에 내려갔던 한 수좌가 스님에게 들키고 말았다. “이보게. 어디 갔다 오나.” “잠시…” 더 이상 말을 못하자, 스님은 조용하게 말했다. “이리 들어오게” 시자에게 싸리나무로 만든 회초리 한 다발을 갖고 오게 했다. 수좌는 어른의 회초리를 묵묵히 받아들였다. 회초리가 모두 부러질 때까지 맞은 수좌의 종아리에 피가 날 정도였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게. 다른데 신경 쓸 시간이 어디 있나 … 세월은 잡을 수 없으니 정진하게.” 스님의 따끔한 경책에 수좌는 한눈 팔지 않고 공부에 집중했다.
○…재가불자는 자상하고 따뜻하게 맞이했다. 아무리 신분이 낮은 사람이 와도 스님은 온화한 음성으로 바르게 살아가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 절을 하며 인사드리면 스님은 어김없이 맞절을 했다. 돌아갈 때면 마당까지 나와 배웅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졌던 스님이다.
<사진> 한암스님.
○…“점심은 잘 먹어도 되는데, 장은 먹지 말아라.” 오대산을 찾아온 학생들 점심공양을 할 때 한암스님이 건넨 말이다. 식사를 잘하라는 뜻으로 이해한 학생들은 고추장과 된장에는 젓가락을 대지 않았다. 하지만 스님의 뜻은 다른데 있었다. 점심은 ‘정심(正心)’이며, 장은 고추장과 된장이 아닌 장애(障碍)를 나타낸 ‘장’을 표현한 것이었다. 비록 해방은 됐지만 남북이 갈라진 상황에서 자칫 전쟁이 일어나면 젊은이들이 희생양이 될 수 있는 시절이었다. “마음을 바르게 갖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앞길에 장애가 없기를 기원”한 스님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진다.
이성수 기자
■ 행장 ■
27년간 오대산서 ‘不出’
종정ㆍ교정 3차례 역임
서릿발 같은 수행과 인자한 성품으로 부처님 향기를 전한 한암스님은 1876년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방기순 선생, 모친은 선산 길씨였다. 속명은 중원(重遠). 서당에서 <사략>을 배우다 “천황씨(天皇氏)와 반고씨(盤古氏) 이전에는 누가 있었는가”라는 의문을 품었지만 답을 찾지 못했다.
22세 되던 해 금강산 장안사에서 행름(行凜)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으며, 신계사 보운암에서 열린 강회(講會) 도중 <보조국사 수심결>을 읽고 눈이 열렸다.
이 무렵 장안사 해은암이 불탔다는 소식을 듣고 일체무상을 느낀 뒤 도반 함해(含海)스님과 남쪽으로 향했다. 합천 해인사에서 경허스님에게 “원선화(遠禪和)의 공부가 개심(開心)의 경지에 올랐다”는 인가를 받고 법제자가 됐다.
1904년 봄. 통도사 선원 조실로 추대된 후 6년간 수좌들을 지도하고 석담(石潭)스님의 지도를 받았다. 묘향산 내원암, 금선대, 평북 맹산군 우두암, 금강산 장안사에서 수행하고 건봉사 조실로 추대됐다. 47세 되던 1923년 서울 봉은사 조실이 됐다. 일제의 조선불교 말살정책과 식민지 현실에 가슴 아파하며 오대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춘삼월에 말 잘하는 앵무새는 되지 않겠다”는 말을 남긴 스님은 27년간 산문 밖으로 나서지 않았다.
1934년 12월 조선불교선리참구원 부이사장으로, 1935년 3월 조선불교 선종의 종정으로 선출됐다. 1941년 조선불교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됐다. 해방 후 종정에서 물러났지만 1948년 석전스님의 입적으로 교정(敎正)에 추대됐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지만 상원사를 떠나지 않았다. 위법망구의 정신으로 국군의 상원사 소각을 막았다.
1951년 3월21일(음력 2월14일) 오전에 좌탈입망했다. 법납 54세. 세수 75세. 희찬스님, 희섭스님, 범룡스님, 평등성 보살 등이 스님의 다비를 치렀다. 같은 해 49재일을 맞아 부산 묘각사에서 봉도법회를 봉행했다. 가르침을 받은 제자로 효봉.탄옹.보문.고암.탄허.난암.서옹.월하.자운.동성.영암.석주.고송.지월.보산.범룡.희찬.희섭.비룡.도원.보경.보광스님(無順) 등이 있다.
■ 오도송 ■
부엌에서 불 지피다 홀연히 눈 밝으니
이로부터 옛길이 인연 따라 분명하네
만일 누가 달마스님이 서쪽에서 오신 뜻을 나에게 묻는다면
바위 밑 샘물소리 젖는 일 없다 하리
"머리에 불 붙은 듯 정진하라"
헛되이 生死에 유랑함이 실로 통탄하고도 아깝도다역임
한암스님이 세존응화 2956년 남긴 ‘불영사 수선사 방함록서’는 한시도 공부의 고삐를 놓지 말아야 함을 간절하게 기원하고 있다. 원문은 한문으로 되어있는 것을 우리말로 옮긴다.
“… 모두들 그럭저럭 광음을 보내다가 모르는 결에 공부 짓는데 친절하고도 간곡한 경책을 모르고 도 닦음에 장구한 판단이 서지 않아 정신자세가 흐트러지고 게을러져서 그만두어 버리니 이미 헛되이 생사(生死)에 유랑함이라 실로 통탄하고도 아깝도다”
“슬프다, 인생의 한 세상이 아침이슬과 백년 광음이 일찰나 사이에 문득 지나가나니 원컨댄 모든 참선하는 고사(高士)들은 생각을 여기에 두고 부지런히 정진하기를 머리에 불이 붙은 듯이 하여 큰일을 속히 이루기를 지극히 빌고 지극히 비노라…”
스님이 1932년 〈불교〉 100호에 ‘참선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게재한 내용 가운데 일부를 소개한다. 역시 흐트러진 마음을 바르게 수습하는 구도자의 길을 밝히고 있다.
“선(禪)을 알지 못할때에는 불불조조가 입을 벽위에 걸고 눈을 이마 뒤에 두거니와 선을 잘 아는 때에는 말이 천하에 가득하더라도 말의 허물이 없으니 이제 말의 허물이 없는 소식을 가지고 한줄기 도를 통하려 한다 …
이 심성을 깨달으면 일반적으로 모든 부처와 평등하고 이 심성을 미하면 만겁에 생사를 수순하나니 삼세 보살이 한가지로 배움이 이 마음을 배움이요. 삼세 제불이 한가지로 증득함이 이 마음을 증득함이요, 일대장교에 나타냄이 이 마음을 나타냄이요”
“그러나 한 생각의 기미를 돌이키면 대지광명(大智光明)이 사람마다 본래 스스로 구족하여 불조로 더불어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아서 상근기의 큰지혜는 한번 들으면 천번 깨달아서 대총지(大總持)를 얻나니 얻고 나서는 노단하면 잠이나 자는 것만큼 쉽다.”
[불교신문 [152호] 2008.0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