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갚을게요 / 조영안
요즘 들어 복이 많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매일 선물을 받는다. 그중에는 먹거리가 대부분이다. 얼마 전에는 내가 이런 복을 받고 살아도 되나 싶어 목록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많을 때는 예닐곱 가지나 된다. 그럴 때마다 '이것도 다 빚인데.'라고 혼자 중얼거린다. 아마도 전생에 기부 천사였을까? 양이 많으면 주변에 나눠 주기도 한다.
"동생아, 문고리에 오이랑 호박 걸어 놓았데이." 또 언니다. 아낌없이 주는 언니가 아니라 ‘아낌없이 받는 나’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녀는 어디서 가져오는지 거의 매일 이런다. 처음 알게 된 건 9년 전이다. 가게를 열었을 당시 돈이 부족했다. 다음 달에 적금을 타는데 중간에 해지할 수도 없고 난감했다. 지인의 소개로 신세를 졌다. 한 달 후에 갚아서 약속을 지켰다. 그녀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체구가 자그마 한데 매사에 다부지다. 경상도라는 동향도 한몫했다. 건강이 부실한 내게 언제나 힘을 준다. 바닥을 쓸고 닦기도 하고, 화장실 청소도 한다. 바쁘고 급할 때 "언니 좀 도와줘." 하면, 원더우먼처럼 나타나 해결해 준다. 걷는 것을 좋아해 하루에 십 리를 걷기도 한다. 무슨 생각을 하며 걷느냐는 내 질문에 피식 웃으며 "동생 생각 하지." 이런다. 아파트 이웃이나 지인에게 얻은 묵은 김치는 거의 내 차지다.
어제 농장에서 수확한 들깻잎 순과 지난밤에 손님이 가져다 준 쑥갓을 데치려고 아침부터 서둘렀다. 굵은 소금을 한 움큼 넣고 데치니 파르라니 색이 곱다. 쑥갓은 장날에 깊은 산속에 사는 아주머니가 들고 온 것이다. 하루 전부터 장을 보려고 장거리를 잔뜩 해 왔다. 부슬부슬 비가 뿌리기 시작한 탓인지 장이 시원찮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읍내 청년회 주최로 경로 위안 잔치가 열리기 때문이다.
장날 쓰려고 하루 전부터 준비한 쑥갓 한 자루가 그대로 있었다. 마침 그(우리집 손님)가 갔는데 많이 줄 테니 사라며 한숨을 쉬었단다. 머뭇거리는 그에게 그저 준다며 던져 주다시피 했다.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 그냥 오기 미안했다. 집에 가져가서 짐슴들 먹이라도 주지 왜 그러냐는 질문에 괜찮다고 했다. 마지못해 2만 원을 던져주고 한 자루를 들고 온 것이다. 그는 다자고짜 "조사장, 이거 처리 하시오."라고 한다. "세상에 이 많은 것을 어디서 가져왔어요?"라고 물었더니 "청정 지역에서 난 것이니 좋을 거요." 한다. 많아도 너무 많아서 어떻게 처리할지 걱정이 되었다.
일부는 손질해서 바로 데쳤다. 향이 나는 나물에는 마늘을 넣지 않기에 물기를 꽉 짜지 않고 조물조물 무쳐서 상에 내놓고, 나머지는 그에게 담아 줬다. 그래도 반 자루가 넘게 남았다. 언니랑, 혼자 사는 옥곡 아저씨 몫으로 두고도 가게에 쓸 양으로 충분했다.
언니가 들고 오는 나물의 종류는 계절마다 다르다. 봄날, 겨울을 이겨낸 봄동과 시금치를 시작으로 지금은 죽순과 머윗대가 한창이다. 머윗대를 벗기고 나면 까매지는 손톱을 보는 것도 싫지가 않다. 읍내 올 때마다 먹거리를 갖다 주는 지인들 덕택에 행복한 봄이다. 문고리에 매달거나 상자 위, 때로는 문 앞 바닥에 놓고 간다. 불쑥 내미는 오렌지 한 개에도 정이 듬뿍 담기고, 약봉지 안에서 꺼낸 드링크와 피로 회복제 한 알도 내게는 힘이 된다. 가게 단골손님 대부분은 끼니를 해결하려고 들른다. 혼자 사는 사람이 유독 많다. 나는 아낌없이 베푸는 편이다. 내가 받은 사랑만큼 돌려주고 싶다.
오늘은 밀양 산에서 귀한 부지깽이 나물이 왔다. 혼자 먹기 아까워 내일은 비빔밥을 만들 생각이다. 좋은 사람들과 나눠 먹으며 깊어 가는 봄 향기를 듬뿍 선사하고 싶다. 모두가 고마운 사람들이기에.
그리고, 많은 선물을 받으며 배운 것이 있다. 그것은 꽉 움켜쥐지 않고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때로는 턱없이 많이 받아 주체할 수 없어서 짜증이 나기도 한다. 그래도 장사를 하니까 그러려니 넘기지만 솔직히 힘들때가 많다. 이것도 행복한 비명이 아닐는지. 나는 날마다 빚지며 산다. 살아가면서 차근차근 갚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