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오전에 먹는 약 / 정희연
월요일 오전이면 먹는 약이 있다.
울산으로 현장을 옮긴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그토록 무더웠던 긴 여름이 끝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한걸음에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영하권 날씨도 눈이 오는 것도 고드름이 맺히는 것도 아닌데 출근길 사람들은 두툼한 외투를 걸치고 있다. 공문이 내려왔다. 한 해가 가기 전에 건강검진을 끝내라는 지침이다. 제휴 병원과 검진 항목이 보인다. 갑자기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해마다 돌아오는 건강 검진이지만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두려움이다. 회사에서 복지를 늘렸는 지 여느 때와 다르게 기본 항목도 많아지고 직원 혜택도 늘었다.
위내시경, 복부 초음파, 갑상선 초음파, 골밀도, 동맥경화 및 혈관 노화도 검사, 질 초음파, 전립선 초음파, 종양암 표지자 검사, 갑상선 호르몬 검사, 부인과 검사, 심전도 검사, 신체 계측, 흉부촬영, 체지방 검사, 안과 정밀 검사, 혈액 종합 검사 61종, 소변 11종이 기본 항목이고 간 씨티(CT), 뇌 씨티(CT), 폐 씨티(CT), 요추 씨티(CT), 경추 씨티(CT), 경동맥 초음파, 유방 초음파, 심장 초음파, 수면 대장 내시경, 디엔에이(DNA) 유전자 검사, 뇌 엠알에이(MRA) 중 두 개를 선택할 수 있다. 이 많은 지뢰를 잘 피해갈 수 있을까?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면 어쩌나.”하는 걱정이 앞선다. 평소에는 관심 밖의 일이 이때가 되면 신경이 한쪽으로 쏠린다. 내 몸은 좋은 상태도 나쁜 상태 아닌 그 어딘가에 있다.
우리 몸은 스스로 균형을 찾아가는 자생력을 갖고 있다. 잠 잘 자고, 좋은 음식을 먹고, 마음의 안정을 유지하면 많은 문제는 자연스레 해결된다. 몸의 신호를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몸의 신호가 약물 또는 수술을 요구하는 외침이 아닐 것이다. 쉬어야 한다는 권유일 수도 경고일 수도 있다. 첨단 기술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지만, 그 모든 것을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로 바라보는 병원의 시선이 무섭게 다가온다. 검진을 앞두고, 생각은 자연스레 그동안 내 자신에게 얼마나 무심했는지 돌아보게 된다.
일정이 잡혔다. 11월 00일 8시로 예약했다. 20여 일 남았다. 일순간에 몸을 좋게 할 수는 없지만 극한 상황을 피하고 싶어 술도 줄이고 잠도 더 자본다. 물도 더 마시고 커피도 조금 줄었다. 무리한 운동은 하지 않고, 스트레스를 줄이려 문제점을 묻혀두지 않고 풀어 나갔다. 일주일은 더 몸을 정갈히 해야 한다, 술도 줄이고 규칙적인 식사를 하고 과한 운동도 하지 않았다. 좋아지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극한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고혈압과 당뇨가 걱정이다. 병원에 갈 때마다 위험 선상에 가깝게 와 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담배는 끊은 지 15년쯤 되어간다. 주말이면 하루는 농장에서 일하고 하루는 가족과 함께 휴식을 취한다. 일이라 해봤자 열 평 남짓한 땅을 일구고 나머지는 채소나 나무를 손질하는 등 작은 일이라 반은 일하고 남은 반은 논다. 운동은 별도로 하지 않는다. 간간히 다가오는 세상의 피로는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과 그것을 안주 삼아 반주로 마음을 달랬다.
손, 발, 가슴에 센서를 부착하고 심박수, 피부전도도, 혈류 등의 신체 반응을 확인해 심박 변동을 분석한다. 스트레스와 피로 상태를 확인하려는 것이다. 3분을 차분하게 숨을 고른다. 1, 2초 단위로 네모난 그래프에 점이 찍힌다. 내 스트레스 지수다. 그 작은 점들이 모여 하나의 큰 점을 이뤄간다. 한 군데로 동그라니 모인 게 예쁘다.
깨달았다. 검진 결과는 단순히 몸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는 지표다. 건강검진을 준비하며, 남은 시간 동안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그 노력이 내게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생각했다.
글쓰기도 내 일상에 깊이 스며들었다. 몸의 피로를 풀어주는 진통제는 아니지만, 불안한 마음을 달래고 복잡한 생각을 하나로 모으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단순히 생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어질 때 그것은 배가 되었다. 생활 습관이 달라지고 삶의 태도도 조금씩 변해갔다. 글을 쓰면서 내가 품었던 작은 의문, 깨닫지 못했던 감정, 혹은 외면했던 문제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그것과 마주할 용기도 얻었다. 처음에는 약을 사용할 줄 몰라 그것이 스트레스로 쌓여갔다. 책을 읽고 글쓰기를 계속하다 보니 생각이 정리되었고 나를 돌보는 일이 되었다. 그렇게 글쓰기는 내게 건강 검진이고 약으로 다가왔다. 매주 월요일 오전에 약을 받으며 내가 무슨 글을 쓸지, 그 노력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기대되었다. 그것은 내가 글쓰기라는 약을 받으며 바뀐 변화다.
건강 검진이 끝났다. 탈 벤 샤하르가 쓴 <일생에 한 번은 행복을 공부하라>에 행복의 수준을 확인하는 항목 중 하나로 “당신의 감정은 안녕하십니까?”를 묻는다. 네모난 그래프에 동그랗게 찍힌 모양처럼 내 감정도 그런 모양이었으면 좋겠다. 검질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이제 산과 친해져 볼 요량이다. 다음 주 월요일은 어떤 약이 배달 될지 궁금하다.
첫댓글 그러니까 건강검진으로 육신 건강을 체크하고
글쓰기로는 마음 건강을 체크하네요. 맞나요?
예 맞습니다. 어떻게 든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애써 보려는 마음인가 봅니다.
글쓰기가 약이 된다니 대단하시네요.
언제나 저는 그 경지에 오를까요?
이제 한창 배우는 중입니다. 선생님을 따르려면 당당 멀었습니다.
아하, 첫 문장에서 궁금증을 던지고 마지막에 답을 보여주시는 것도 글쓰기의 한 요령이군요. 읽는 사람의 마음을 묶어 두는 방법, 배웁니다.
같은 약을 받지만 그 처방은 모두가 다른 것 같습니다. 연륜에서 묻어나는 여러 선생님의 각기 다른 처방에서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고맙습니다.
세상에... 숙제를 약으로 생각하시다니... 선생님은 정말 모범생입니다. 전 글감이 무서운데요.
모범생 절대 아닙니다. 더 잘하신 분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런 맘으로 다가서고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