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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력 설 명절
** 음력 설에 대한 것 일부 발췌해 본다(나무위키)
설날, 구정(舊正, 음력 설) 또는 정일(正日)은 한민족의 전통적인 명절로, 음력 한 해의 시작인 음력 1월 1일을 가리킨다. 설날 하루 전과 다음 날을 포함한 '설날 연휴'는 '추석 연휴'와 함께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에 따른 법정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부여가 시헌력 기준 음력 12월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을 통해 한국사에서도 이미 원삼국시대부터 설날을 기리는 풍습이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후 《수서》에 의하면 6세기 신라인들은 새해 첫날에 서로 문안을 드렸고, 왕은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군신들을 차례로 격려하며 일월신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백제 고이왕이 정월에 천지신명에 제사를 지냈고 책계왕 때 시조 동명왕에게 정월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설에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는 전통도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도 주요 명절로 설날은 빠지지 않았는데 이는 설날이 이미 오래 전부터 중요한 명절로 여겨졌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전통적으로는 설날부터 정월 대보름까지는 쭉 이어지는 축제 기간으로 이 기간 중에는 빚독촉도 하지 않았다는 말이 전해진다.
음력설이 공휴일로 지정된 국가는 한국, 북한, 중국, 대만, 홍콩, 마카오, 몽골, 베트남,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필리핀 총 12개국이다. 이 국가들 중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은 음력설 딱 하루만 공휴일이며 비중있게 기념하지는 않고 오히려 양력설인 새해 첫날이나 부활절 등 기독교 및 이슬람 축제일인 다른 국가 명절을 더 중요하게 기념한다. 북한은 음력설보다 양력설을 진정한 설날로 생각해 훨씬 중요하게 기념하고, 음력설은 그저 민속 전통의 일환으로 여긴다. 음력설이 공휴일이지만 비중있는 날이 아닌 인도네시아, 필리핀, 북한을 제외한 8개 국가들은 양력설인 양력 1월 1일을 새해 첫날로 기념하지만, 가족이 모이는 명절로써의 비중은 음력설이 더 크다. 즉 양력 1월 1일은 한 해의 첫 날로 기념하고, 음력 1월 1일은 전통 명절로써 기념한다. 또한,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는 음력설이 공휴일인 동시에 힌두교력 새해나 이슬람력 새해도 지낸다. 또한 말레이시아는 무려 새해, 음력설, 인도설, 이슬람설을 모두 쉰다.
** 지난 해는 계묘년(癸卯年), 올해는 갑진년(甲辰年), 지난 해는 토끼 띠 올해는 용 띠인데 청용이란다.
이번 명절에는 2월 9일부터 12일까지 나흘간이 연휴인데 직장에서의 나의 근무는 10일과 12일이 내 근무이고 9일과 11일이 휴식일이다.
* 명절에 내가 해야할 일은 지금은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지 않기에 고향산소를 찾아보는 일과(성묘) 집안의 웃 어른들에게 인사를 드리는 일이다, 물론 자식들이나 아우들이 찾아오면 그들을 맞이하고 대접해 보내는 일도 해야 할 일이지만 내가 근무를 하게되면 아내가 손님맞이를 대신한다.
* 이번에는 까치 설날이 9일이고 그 날이 내 휴식일이기에 그날 아들식구들이 집에와서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딸 내외는 시가가 전남 순천이라서 그곳으로 차례를 지내러 내려가야 하기에 지난 7일 날 미리 우리집에 와서 인사를 한 후 다음 날 순천 시가댁으로 내려갔다.
* 동생들은 둘째아우와 셋째아우가 우리 집을 방문했고 다른 아우들은 전화로 인사를 했다.
둘째 아우는(지돈이) 아내와 자신의 손녀인 연우까지 인사차 들려서 함께 점심을 해 먹어 보냈고, 셋째는 얼굴에 점을 뺏다고 흉한 얼굴 보여주기 싫다고 해 집에 잠시 들려서 인사만을 한 후 돌아갔다.
나도 얼마 전에 얼굴에 점을 빼서 흉한얼굴 남에게 보여주고싶지 않았는데 오늘 아우의 얼굴을 보니 나보다 더욱 흉한 모습이 내가 보기에도 좋지않았으니 본인 마음이야 더하겠지.
* 병고에 시달리는 다섯째 아우는 이동이 시원찮으니 전화로 안부를 묻고, 시골에서 고향을 지키고 있는 넷째는 내가 고향에 내려오기만을 기다리다 나타나지 않으니 전화로 안부를 물어온다.
참고로 이번 명절에는 오는 19일 날에 청주병원에 계신 누님면회와 고향을 다녀올 예정이다.
* 이제는 우리 집안의 명절이 옛날만 못하지만 그래도 명절이 되면 서로간에 찾아보기도 하고 전화를 하면서 가족으로서의 애정은 계속 이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그래도 내 머릿속에서 그 옛날의 영광(?)이 떠나지 않는 것은 지난 추억이지만 그 시절이 매우 좋았고 가족간에 지금보다는 더욱 행복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 동네 떡 방앗간에서는 명절이면 우리집이 떡을 만드는 양이 제일 많다는 소리부터 시골 고향마을에서는 그 많은 형제들이 어쩜 그리 우애가 좋으냐? 는 등의 미담은 그냥 듣기좋은 말 만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우리가족들이 즐겁고 행복했고 그러기 위해 서로간에 많은 노력도 뒤 따랐을 것이다.
* 기제사때에는 3~40명씩 가족들이 모이고 명절때도 30여명 안팎이 함께 모여서 조상께 제사를 올린 후 어른께 세배를 드린 후 함께 모여서 식사를 하면서 미담과 덕담을 나누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이젠 다시는 올 수없는 추억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아름다운 추억은 더욱 더 그리운 것같다.
* 남들은 아직도 귀성이니 귀경이니 하면서 바쁜 명절모습들을 매스컴에서 전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족들은 이제 흘러간 영광으로 다신 재현할 수없음에 안타깝고 내 마음속에서는 통탄을 하고있다.
문화가 바뀐다고 애정이 바뀌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가족간의 애정마져 바뀌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역시 눈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것은 어쩔 수없는 사람들의 심리인 것이다.
** 8일날 근무를 마치고 9일 아침에 퇴근을 한다.
오늘 점심 경에 둘째아우가 방문을 한다고 하니 그 전에 두 숙모님께 인사를 드리고와야 할 것같아서 서두른다.
전에는 명절 당일에 어른들을 찾아보았지만 이번에는 명절날이 근무일이기에 미리 다녀올 계획을 한 것.
* 식사를 마치고 일찍 서둔다고 했어도 9시가 되어서야 집을 나선다.
집을 출발하면서 4촌 여제 지홍이에게 어머님 위치를 정확히 알기위해서 전화를 하니 강릉 시댁으로 향하는 중이라면서 지난 추석명절 때와 마찬가지로 부천 요양원에 계신다고 한다.
* 둘째숙모님보다 막내숙모님을 먼저 찾아뵙는 것은 미세한 차이지만 그분에게 애정도 더 있고, 연세도 더 들었지만 현재의 건강상태가 둘째숙모님은 집안생활을 하지만 막내숙모님은 요양원 생활을 한다는 차이 때문이다.
참고로 새해들어 숙모님들 나이는 막내숙모님은 89세, 둘째숙모님은 84세.
** 이미지사진
* 외곽순환도로를 달려나가 부천 중동IC에서 도로를 내려 부평시내로 들어선다.
정확한 요양원의 위치는 "인천시 부평구 길주남로 158(부개동 부개프라자 빌딩 5층과 7층, T. 032-527-9923)"
우리집에서 9시 5분에 출발했는데 이곳에 도착한 시간은 9시 50분 경이다(라온실버케어 요양원)
명절 전날이지만 그리 정체되거나 혼잡하진 않았다.
* 지난번 면회 시에는 코로나 19로 인해서 실내면회가 허락되지않아 맞은편의 별도 응접실로 숙모님이 나오셔서 만날 수 있었는데 오늘은 요양원 안으로 들어가서 잠시 대기하니 숙모님이 휄체어를 타고 나타난다.
* 연세 89세, 궁금해서 정확한 나이를 물으니 대답하신다.
삼촌이 떠난지 3년(2021년 2월 13일) 엊그제 같은데 벌써 3년이 지났다.
지난 해 추석명절에는 삼촌이 그리워서 고향산소에 무리를 해서 다녀온 후로 컨디션 난조로 다른병원(부평세림병원)에 입원까지 하셨었는데 그 때와 지금보니 더 좋아지신 느낌으로 다가와 내 기분도 매우 좋았다.
* 89세의 나이임에도 정신력은 또렷해서 지난날의 기억도 많이 하시고 또 그런 기억력이나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틈틈이 뜨개질도 하시고 운동도 열심히 해 조금씩은 걷기도 하신단다.
비록 밖으로 나갈 수는 없지만 좁은 공간에서 자신이 할 수있는 최선의 생활을 하는 것이다.
* 위 물건도(행주등) 틈틈이 시간이 나는대로 뜨개질을 해서 만든 것으로 우리와 헤어질 시간이 되어 잠시 기다리라 하시더니 안으로 들어가서 가져오신 물건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에 고맙고 감사드리고 꼭 다시 찾아야 한다는 사명감도 더 생긴다.
** 숙모님과 2~30여분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10시 30분 경에 그곳을 떠나서 둘째숙모님이 계시는 시흥 목감으로 향한다.
* 둘째 숙모님은 원래 부천에서 살았는데 둘째삼촌과 사별한 후(2020년 9월) 그 해 가을 경에 자식들이 시흥에 위치한 아파트(시흥시 목감둘레로 229-15, 목감 엘에치 13단지 1301동 209호)로 이사를 했다.
홀로살기에는 충분하고 또 낮에는 심심하지 말고 다른 노인들과 어울리면서 즐기라고 자식들이(주로 딸인 수미가 진행) "목감 효 재가복지센터"에 등록시켜서 그곳에서 다른 노인들과 함께 지내신다.
* 명절연휴라서 집에 계실줄 알고 아파트로 찾아갔으나 아무리 초인종을 누르고 전화를 걸어도 받지않아 4촌여제 수미에게 전화하니 오늘도 복지센터에 가셨다고 말한다.
집에서 아내가 만들어온 김치등의 반찬을 아파트 문앞에 두고 복지센터로 향한다.
* 목감시티프라자빌딩 406호와 407호(시흥시 목감우회로 39)를 사용하는 복지센터를 찾아간다.
예전에도 찾았던 곳으로 집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이었고, 또 아침 저녁으로 센터에서 차량으로 이동해 주기 때문에 이동과 안전에는 문제가 없었다.
* 마침 식사시간이었는지 여럿이 식사를 하던 중에 우리가 면회를 신청하니 직원들이 친절하게 응대, 식사를 마쳤다는 숙모님을 모시고 나와서 잠시 면회를 한다.
* 84세의 숙모님은 겉으로는 멀쩡하신데 기억력이 많이 쇠한듯하다.
지난 날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찡~ 하다, 근래에 다른 형제들은 찾지도 않아서 그런지 그렇게 가까이 지냈던 우리 형제들의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 이곳에서 약 20여 분 정도 머문 후 그곳을 나와서 집으로 향한다(12시 경)
점심식사는 서울 노원구에 살고있는 지돈이 아우(둘째로 나와 연년생으로 한국나이 73세) 부부가 집을 방문한다고 해 함께 식사를 하기로 사전에 약속했다.
* 목감을 출발해서 30여분 후에 집에 도착, 조금 후에 아우가 그의 처와 손녀인 연우와 함께 들어온다.
방문한다고 해서 오자마자 미리 준비해 둔 식사를 상차림해서 함께 식사를 한다.
둘째아우 지돈이 부부와 손녀 연우
* 연우가 벌써 13살이라고 한다.
첫 돐이던 해에(생일이 음력 3월3일) 돌 잔치를 명동의 호화찬란한 어느 식당에서 하던 생각이 또렷이 난다.
* 당시의 사진 몇 장을 올려본다(네이버 할배 블로그 메모에서 발췌)
(명동성당 맞은 편에 목적지인 "로얄호텔"이 나오고... 맨 윗층인 21층에서 첫 돌 행사를 하는구나...)
당시의 사진을 보면서 지금보다 훨씬 젊었던 시절이 한편 그립기도 하지만 모두가 너무많이 변한 세월에 인생이 무상함을 다시한번 깨닫게 된다.
* 첫돐을 맞는 연우모습도 너무 귀엽고 깜찍하지만 당시의 우리들 모습도 늙은 지금의 모습보다 훨씬 젊은 모습으로 아내에게 말했더니 앞으로 10년후에 지금을 보면 또 지금이 가장 젊은모습일거라고... ㅎ ㅎ ㅎ
당시의 내 자식이나 조카들도 거의 시집 장가를 가서 자기들 살림을 차리고 한 세상 살고있지만 세월이란 어찌보면 참으로 매정한 것이다, 지난시간은 다시는 올 수가 없으니...
2013년 3월 3일, 연우의 첫돐잔치를 한 명동의 당시모습
* 돌 잔치가 끝이난 후 우리 부부 둘은 모처럼 만에 명동거리를 거닐면서 데이트를 즐겼는데...
**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지금은 제법 의젓해진 연우와 우리부부, 또 동생부부와 함께 모처럼만에 한 상을 놓고 식사를 하는 행복한 시간을 가져본다.
* 함께 먹자면서 제수씨가 자신의 집에서 만들어온 전도 상에 올려지고 고기와 과일도 떡국과 함께 올렸다.
* 식사 후에는 후식으로 커피와 과일을 들면서 가족끼리의 화기애애한 대화로 시간을 보낸다.
잠시지만 아우들이 이렇게 찾아와 주는 것이 정말 고맙다, 예전에는 수시로 만날 수 있었지만 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한 후에는 정말 가족이 만난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 그래서 제사란 것이 조상을 위한다는 구실로 살아있는 가족들이 만나서 고인의 넋도 기리고 즐거운 대화와 만남으로 마음이 가까워지도록 배려를 한다는 차원의 생각인데 개중에는 오고가는 불편함이나 상차림 비용, 종교의식등의 이유로 꺼리거나 아예 없애는 우를 범하고 있는데 깊은 속내를 모르니 참으로 답답할 뿐이다.
** 아우네는 우리집에서 약 2시간 여 정도 함께 있으면서 대화를 나누다 오후 3시경에 집을 나선다.
아들내외가 온다해서 보고갈 참이었으나 다른약속이 시간을 재촉하니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 그 후 4시가 지나서 아들 내외와 손자가 집으로 온다.
* 엄마는 산달이 4월 초라고 해 배가 남산만하고 불편해 하는데 철부지 손자는 가끔 만나보는 할배 할매가 낯이 설은건지 맘이 불편한 것인지 엄마에게 응석이나 부리고...
* 이럴 때는 아동프로그램 TV를 틀어주는게 장땡이다.
오로지 눈이 TV화면속으로 빨려들어가고 다른 것은 전혀 안중에도 없으니...
* 저녁식사를 하면서도 손자의 눈은 오로지 TV화면에 고정되다시피한다.
그런데 요즘 애들의 부모들은 자식교육애 미숙한 것인지 잘못된 습관이나 행동으로 물들 것 같아도 전혀 추궁하거나 제지하지 않는다, 오로지 세상물정 제대로 알지못하는 아기의 편에서 응원을 할 뿐이다.
* 할매 할배는 그저 귀여워할 뿐이지 힐난이나 힐책은 금물이라고... 설령 맞는 행동을 할지라도 애기의 부모인 자식들이 알아서 제 자식 제가 바르게 가르치기를 바랄 뿐이다, 올바른 소리나 행동일지라도 제 1의 책임자들인 그들에게 밉보이기 십상인 것을... 이래서 부모자식간 사랑은 내리사랑인 것을 또 다시 느껴본다.
* 그런 눈치를 안본다해도 할매 할배는 손주를 보면 그저 귀여울 뿐이니 어찌 혼을 내킬 수가 있으랴.
투정도 짜증도 그저 귀여울 뿐이다, 시간지나면 역시 낯설었던 것이 친해지는 것을...
* 그래도 많이 성숙한 모습을 보면 대견스러울 뿐이다, 아직까지 기저귀를 차고있을지언정.
아기의 아빠인 내 아들이 태어나고 성장할 때와는 너무도 다른 육아환경이 걱정스러우면서도 너무 출산율이 떨어지는 요즘의 한국사회 현실을 생각하노라면 보물단지나 다름없는 아기들에게 어찌할 수가 있으랴.
** 말이 나왔으니 손자의 애비인 내 아들의 성장과정을 잠시 언급해 보자.
지금 나이 43세지만 태생은 1982년도 3월이다(8일)
태어난 후로 부모 애간장을 태우는 일도 별로없이 순탄하게 성장을 했고, 출생 9개월 만에 홀로서기를 하더니 만 1년쯤 되어서는 걸어다녔고, 기저귀도 몸에서 떨궈냈다.
* 그 당시에(수원 우만동 거주) 우리부부는 항시 바빴으니(직장, 사업등) 아기보는 할매가 한 분을 모셨는데 워낙 노쇠하셔서 큰 기대도 하지않았지만 그래도 두 자매는 성장을 순탄하게 했다.
당시에 3째 아우도 내집 2층에서 거주했고, 이웃도 아기를 돌봐주고 또 지금의 육아환경과는 좀 달랐다.
* 그러나 우리 부부가 워낙 아기를 돌볼 시간적 여유가 없으니 그냥 잘 크겠지?(실상 탈없이 잘 크고 있었으니) 하는 생각만을 할 뿐이었다.
그리고 아들은 4살부터 유치원에 입학을 했다, 집에서 그냥 크는 것보다 유치원에 맡기는 것이 여러 모로 도움이 될 것 같은 생각에서였다.
* 어느날(아들이 한국나이로 4살 즈음) 내가 일을 하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연무중학교 옆의 4거리에서 신호대기를 하고있는데 어느 꼬마가 가방을 어깨에 메고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어깨에 멘 가방끈이 길었던 탓도 있겠지만 작은 키가 걸림돌이라 가방이 땅에 질질 끌려가는 것을 본다.
* "뉘집 자식인지 어린 놈이 참 불쌍도 하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무심코 바라보고 있노라니 점점 윤곽이 또렷해지면서 나타나는 그 어린이는 바로 내 아들 영호였다.,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 일을 하면서도 곰곰히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저녁에 집으로 들어와서 아내와 말 싸움을 한다.
* 저 애들을 제대로 키울려면 당신이나 나 둘 중 하나는 일에서 손을 떼고 살림을 하자 라고 담판을 짓게되는데 당시에 곰곰히 생각한 후에 나오는 아내의 말은 자신의 뚜렷한 직업관과 인생관을 말하면서 도저히 직장을 그만둘 수가 없다고 말한다.
* 아내가 당시에 내게 말한 자신의 꿈과 소원은 자신이 다니던 직장(농협)에서 성공(?)하는 것과 그 시대에 짓눌려있던 한국여성들 인권해방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희망한다는 여성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것.
* 결국 결론부터 말하면 아내는 그 후 피나는 노력으로 직장에서도, 여지껏의 인생에서 중,하류층 여성으로서는, 성공한 케이스 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작은 꿈을 조금이라도 이루었다고 봐야한다.
* 자신의 직장에서는 꿈에 그리던 임원도 되었고, 경기도 최초로 여성 농협지점장이라는 직위에도 올랐고,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또 정치적(?)으로도 그 옛날에는 상상도 하지못할 위치와 영광을 누렸다고 봐야지.
* 이제 우리 가는 길이 노년의 길일지라도 여지껏 살아온 인생 그리 흠잡히거나 후회할 것없이 지내왔고, 지금의 삶도 우리부부 서로간에 만족하면서 살고있으니 이 이상 더 바랄 것이 무엇이뇨?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하고 주변들과 원만히 소통하면서 살다 가는 것이 최선이리라.
* 세상이란 살고보니 별 것 아니더라.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가 그저 순간에 지나지 않으니 그 찰라의 시간에 채워지는 공간의 미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도 역시 나일 뿐이고, 내게 주어진 주변과의 인연을 잘 만들어 가다보면 인생 잘 살았다고 자신이 만족해 할 때 그 인생인 잘 살은 인생 아니던고?
* 누구나 장. 단점이 있을것이고, 못나고 잘난 구석 한 두점은 누구에게도 있을터, 서로 보듬고 안으면서 이웃하면서 살다보면 끝나는 것을 왜 그리 아옹다옹 지지고 볶으면서 살아왔는지, 이제라도 빈 마음 무심으로 남은 생 살다가길 원하노라, 끔찍이도 사랑하는 내 아내 이쁜이와 함께...
** 아들네와 우리가 한창 신나게 가족애를 발휘할 때 마침 인천에 살고있는 3째아우 지균이가 들린다.
현관문에 서서 신도 벗지않고 과일상자 하나 전해주고 떠날 참.
* 잡아들여 따뜻한 형제의 애정이라도 표현하고 싶은데 얼굴에 흉이많이 잡혀있다.
얼굴 점을 뺐다는데 얼마 전에 나도 점을 뺏지만 나보다 더 얼굴에 흑점이 많고 보기가 좀 그렇다.
그러나 본인이야 더하겠지.
그냥 보내는 것이 맞는 것 같아 식구들 안부 몇마디 물어보고 보낸다.
* 아들네 식구들도 시간지나 제 품으로 돌아간다는데 허탈을 참으면서 안그런 척 돌려보내고...
다시 이쁜 아내와 둘만 남은 공간에서 우리들의 삶을 만들어 간다.
** 다음날인 명절날(10일)에는 내가 근무에 들어가니 아내는 홀로 집을 지키고...
다행히 설날에는 내 근무가 저녁에 일찍 들어오는 날.
그러나 술 몇잔 마시고 tv앞에서 잠들어 버린다, 쓸쓸한 명절날이다.
* 설 다음날(11일)에는 다시 휴무일이니 집에만 죽치고 있을 수는 없는 일, 궁리끝에 친구 사범이에게 등산이나 가자고 하니 몸 컨디션 난조로 no, 그럼 모처럼 만에 병고를 치루고있는 친구들이나 찾아보자고 하니 ok,
약속을 하고 9시가 지나서 시흥 친구네 집으로 올라가기로 한다.
나중에 사범이가 다른멤버들에게 연락해 함께할 친구들을 찾았으나 사전약속으로 인해 함께하지 못한다.
* 아내는 주일이니 교회에 가야하는데 내가 떼(?)를 써서 자식도없이 홀로사는 사범이에게 명절음식 조금나누자고 말하니 아내도 ok, 작은 성의를 보인다(거의 모두 들어온 것이었지만).
전에 집에서 제사를 지낼 적에는 바리바리 실었다지만 지금은 이 작은 것도 나눔의 의미가 더 클 뿐이지.
** 오늘은 아내의 식사당번이라 해서 그 준비물을 차에싣고 아내가 다니는 교회(의왕 명성교회)까지 배웅을 해 주고 난 후 나는 곧바로 시흥 친구네 집을 향한다.
* 친구네 집에 들려서 차 한잔 마신 후 둘이 이상만 친구네 집을 먼저 찾기로 한다.
주소를 몰라서 상만이 주소를 알고있는 래설이친구에게 연락해서 주소를 알고, 네비게이션이 입력한 후 상만이가 살고있는 곳으로 향한다(주소 서울시 강서구 마곡서 1로 81(엠벨리 8단지 805동 105호)
전에는 상도동에 살았었는데 이사를 갔단다.
* 상만이 친구네로 향하는 하늘이 티없이 맑고 파랗다.
명절 다음 날 오전중이라 그런지 아직 차량도 많지않았다.
* 남부순환도로를 타고가다 김포에 이르러서 방화동 방향으로 흐르더니 어김없이 네비는 상만이친구네 아파트단지에 안착시킨다.
* 8단지로 들어서면서 친구집을 방문하면서 손에 들린 것이 없어서 입구에 있는 CU 편의점 옆에 주차를 한 후 편의점으로 들어가서 마땅한 물건을 찾으나 없다, 제일 만만하고 마음에 드는 것은 화장지 뿐이네.
화장지를 사서들고 동과 호수를 찾아 들어간다.
* 그러나 조금 후 낯모르는 전화가 와 받으니 이 아파트단지의 경비실인지 CU 뒤에 주차한 차량을 지하주차장으로 옮겨달라는 멘트가 나온다.
새롭게 탄생된 아파트단지라서 지상에는 주차차량이 한대도 없는데 내 차가 지상에 있으니 옮겨달라는 것이다.
* 방안에 들어가서 친구와 그 딸, 그리고 손주와 인사를 나눈 후였는데 다시 CU 건물이 있는 단지입구로 가서 내 승용차를 지하주차장으로 옮겨 주차한다.
* 상만이친구집에서 10시 30분부터 11시 50분까지 약 100여분 동안을 머물면서 지금까지 궁금했던 안부나 근황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다과를 소화시킨 후 그곳을 떠나 다음 행선지인 유만종친구에게 향한다.
* 만종이친구는 인천 남동구청 근처에 살고있는데 이 친구는 상만이친구보다 더 심하게 노병을 앓고있는 중이라 통화도 제대로 않된다고 총무인 사범이가 아침에 만났을 때 말했는데 상만이친구로 향하면서 내가 통화를 시도하니 통화가 되어서(그 친구의 아내와) 찾아간다고 말하고 그쪽으로 향하는 것이다.
* 그러나 결국 오늘 만종이친구는 만나지 못했다.
남동구청으로 향하다 인천으로 들어서서 다시 통화를 시도, 그의 아내와 통화를 해 지금 그곳으로 향하는 중이니 정확한 주소를 알려달라고 하니 주소는 알려주지않고 오히려 지금 손님맞을 준비도 안됐는데 오면 안된다고 하면서 우리가 실례를 한다는 말까지 하니 발걸음이 그쪽으로 향하지 못한다.
* 추측컨대 친구의 상태가 너무 좋지않아서 만종이 친구와는 전혀 통화를 할 수가 없고, 또 남편의 그런모습을 아내인 입장에서는 친구들에게 보여준다는 것이 싫어서 핑계를 대는 듯한 인상을 받게된 것이고, 그 느낌에 충실하게 우리는 발길을 돌린 것이다.
* 2년 여 전에(2021년 10월) 만종이 친구댁을 방문해서 함께 소래포구로 나와 식사를 하던 모습의 사진을 올려본다(아래사진, 당시에는 이동희, 강사범, 나, 셋이 방문했다)
* 상만이친구나 만종이친구나 모두 한 때는 남부산악회 소속의 절친들이었다.
고향인 진천중학교 제 16회 동기동창으로 학교 졸업후 각자의 인생살이로 세상을 살아가다 1998년도 초에 서울 남쪽방향(한강이남의 서울지역과 안양등의 남쪽)에 거주하는 친구들이 만나서 남부산악회를 결성해 친목과 체력을 다져왔는데, 초창기에 15명 안팎이었던 멤버들이 이젠 4명으로 줄었다.
* 타지로 이사를 가서 만나지 못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하늘나라로 떠난 친구들도 있고, 오늘 찾는 친구들처럼 병고에 시달려서 기동이 어려워 참여하지 못하는 친구들도 많다.
나이를 들고 세월이 흐른다는 것이 친구와의 친함도 멀리 떨구는 것이 인생사의 한 부분이다.
* 인천 남동구청으로 향하던 길을 다시 시흥방향으로 틀어서 내려온다.
총무네 집인 박미를 오기 전에 배거고파 식사걱정을 하고, 식당을 물색해 내려오다 결국 안양 삼막사 입구로...
그곳에 남원 추어탕 전문식당인"추오정"을 찾아 점심식사를 한다(오후 1시 20분 경)
많은손님들이 찾았다.
* 명절연휴 뒤끝이라 문을 열지않은 식당들도 많아서 문을 연 식당들로 몰린 손님들이 식당마다 만원이다.
제일 값이 헐한 추어탕이 한그릇에 12.000원, 맛은 좋았고 서비스도 만족.
* 식사 후 사범이친구를 다시 서울로 올라가 그의 집에 하차한 후 집으로 내려오니 시간은 3시가 다된다.
** 아침부터 저녁까지 거의 하루시간을 만나고 싶은 친구를 찾아보냈지만 내 마음은 만족한다.
내가 움직여야 만날 수 있는 그런 친구들을 위해 나의 작은시간들을 할애한다는 것에 뿌듯한 마음과 내게 밀려드는 행복감이 보상으로 채워주니 좋다.
앞으로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내게 많은 추억을 선사해준 이런 친구들을 위해 주어진 시간들을 할애하면서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아가길 나 자신에게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