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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
<별이 총총한 첩첩산중에서>
어젯밤 저희 수도회 수련소에서는 새로운 수련자 4명의 수련소 입소식이 있었습니다.
이제 헌 수련자가 된 5명의 수련자들의 도움을 받아 4명의 신 수련자들이 별이 총총한 이 첩첩산중에서 입회식을 했습니다.
아무도 봐주는 사람들도 없는데 빳빳하게 검정 양복을 갖춰 입고 엄숙하게 입회식에 임하는 하는 모습,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하며 제단을 중심으로 사진을 찍어댑니다.
이제 수련소에 입소한 수련자들을 그야말로 무일푼입니다.
뒤져봐야 동전 한 푼 없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필수인 스마트폰은 엄두도 못 냅니다.
집에 전화 한통 하려해도 윗사람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도 얼굴들은 좋아죽겠는 얼굴들입니다.
마치 천국에라도 와있는 얼굴들입니다.
워낙 시골이어서 치킨 배달도 안 되는 지역이라 전자렌지에 데운 치킨이랑 맥주 한잔 하는데 다들 얼굴에 화색이 돌았습니다.
이 특별한 젊은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기적이 따로 없다!’였습니다.
수많은 유혹거리들, 세상의 그 좋은 것들 다 뿌리치고 좁은 길로 들어서겠다고 기를 쓰고 산골까지 찾아온 형제들이 너무나도 고맙고 대견스러웠습니다.
그들의 특별한 선택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때 잘나가던 유럽 교회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져가고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성소자의 급감입니다.
유럽의 수많은 교구와 수도회가 안고 있는 가장 우선적인 과제는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교회나 수도회 문을 닫을까 하는 것입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기까지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사제나 수도자들, 그리스도인들이 증거의 삶을 살지 못한 데 큰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시대가 가고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군중들을 향해 외치신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예수님께서는 말씀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 말씀이 살아있고 힘이 있음을 행동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과 중풍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또 다시 은총의 선물로 주신 이 한해,
우리 역시 말로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과 생활로서, 우리들의 존재 자체로 이웃들에게 하늘나라를 보여줘야겠습니다.
선교 체험중인 한 신부님의 말씀이 마음에 크게 와 닿았습니다.
“한국 교회는 무수한 순교자들을 지닌 위대한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에 순교자들은 충분합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들은 증거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자들, 복음의 증거자들!”
증거의 삶,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리 어렵지도 않습니다.
갖가지 고통 속에서도 환하게 웃으며 살아간다면 바로 증거하는 삶입니다.
지금 나도 힘겹지만 나보다 더 힘겨운 사람에게 잠깐 손내밀어준다면 바로 그가 증거자입니다.
한번 더 참아주고 한번 더 용서해주면 그가 곧 증거자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장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회개와 사랑>
강론 제목을 '사랑의 학교'로 했다가 '회개와 사랑의 연대'로, 마침내 '회개와 사랑'으로 바꿨습니다.
강조점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은 사랑에서 일치합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바로 회개는 하느님 사랑에의 초대입니다.
어제의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사랑의 엘리트, 지혜의 엘리트들이 모인 수도공동체가 아니라 이런저런 다양한 부족한 이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공동체 역시 그러했습니다.
'아, 수도원은 하느님 자비의 시험장, 인내의 시험장이구나!'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꼭 하느님이 어렸을 적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던 어머니처럼 생각되었습니다.
한없이 참고 기다리시는 인내의 사랑입니다.
하여 수도원은 평생 하느님의 자비를 배워가는 '사랑의 학교'입니다.
수도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사랑의 학교'에 몸담고 살아가는 학생들입니다.
평생 하느님의 사랑을 배워가야 하는, 평생 졸업이 없는 하느님의 영원한 학생인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은 저 멀리 밖에, 저 하늘 높이 위에 계신 분도 아니라, 바로 우리 내면의 중심 깊이에 계십니다.
바로 평생 내적 순례 여정이, 회개의 여정이 목표하는 바도 바로 이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우리 내면의 중심 깊이에 '가장 가까이 계시면서 동시에 가장 멀리 계신' 하느님께 이르는 죽어야 끝나는 평생 여정입니다.
평탄대로 첩경의 지름길도 없고 비약이나 도약도 없는 길입니다.
우보천리, 하루하루 회개와 사랑의 실천을 통한 길뿐입니다.
회개와 사랑은 영적 삶의 리듬입니다.
바로 이런 우리의 평생 내적 여정의 가이드이자 동반자로 오신 생명의 빛, 사랑의 빛, 희망의 빛이신 예수님이십니다.
다음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고맙습니다.
'즈불룬 땅과 납달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그대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어둔 현실을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죽음의 어둠 중에 이런 '큰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비로소 살 희망의 생겼습니다.
살맛 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의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길은, 답은 이 말씀 하나뿐입니다.
예나 이제나 언제나 현실감있게 다가오는 절박한 주님의 호소입니다.
온전히 하느님께 돌아가는 방향 전환이 회개입니다.
빛이자 사랑이신 하느님께 돌아가 예수님 당신처럼 '사랑의 빛'으로 살라는 말씀이며,
바로 이때 실현되는 하늘 나라입니다.
궁극으로 돌아 갈 곳은 하느님뿐입니다.
집으로, 성당으로, 식당으로 돌아가는 것 역시 궁극으로 상징하는 바 하느님입니다.
잘 들여다 보면 이들 또한 하느님께 돌아 가는 회개의 계기이자 수련입니다.
돌아갈 집이, 돌아갈 방이, 돌아갈 성당이, 돌아갈 식당이, 그리고 돌아갈 하느님이 없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를 정말 실감하는 것이 수도원입니다.
이런 면에서 하느님을 향한 '여정(journey)'보다는 하느님께 '돌아감(return)'이 적절하다는 어느 수도승의 말도 생각이 납니다.
세상을 떠나 죽은 이들을 일컫는 '(하느님께) 돌아갔다.'라는 말마디 역시 적절합니다.
며칠 전 읽었던 글(전순란)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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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 역시 어둔 밤을 걸어가면서 시련을 겪고,
“당신이 진짜 하느님이시라면 어떻게 좀 해보시지요!”라면서 하소연하게 되는데,
보스코의 말에 의하면 이럴 때일수록 되레 하느님이 우리 귀에다 대고 속삭이신단다.
“네가 나 좀 놀래케 해 볼래?”-
주님을 기분 좋게, 반가움에 놀랍게 하는 일이 바로 당신께 돌아가는 우리의 회개입니다.
회개한 이를 애타게 찾고 기다리시는 주님이십니다.
회개에 응답할 때 주님 역시 치유의 축복을 주십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당신의 회개에 응답한 온갖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주셨습니다.
한 번으로 끝나는 회개가 아니라 평생 끊임없는 회개입니다.
회개를 통한 사랑의 회복, 사랑의 연대입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을 살라고 '회개의 시스템'처럼 되어 있는 수도원 일과표입니다.
매일 일과표에 따라 규칙적으로 이뤄지는 미사와 성무일도의 공동전례기도 시간은
그대로 '회개의 시간', '주님을 만나 사랑을 공부하는 시간', '사랑을 회복하여 사랑의 연대를 이루는 시간'입니다.
요한 사도 역시 사랑의 계명을 강조합니다.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께서 명령하신 대로,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사랑의 계명 실천을 통한 주님과의 일치입니다.
사랑할 때는 '소통의 열린 중심'이 되지만 사랑하지 않을 때는 '불통의 닫힌 감옥'이 됩니다.
회개와 사랑뿐이 살 길이 없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의 초대에 회개로 응답한 우리 모두를 치유해 주시고
당신 생명과 사랑, 희망의 빛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우연히 달력을 보니 내일이 소한(小寒)입니다.
24절기 중에서 작은 추위라고 하는 소한이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항상 이 무렵이 제일 추웠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겨울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요즘에 그리운 것은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는 따뜻한 봄이 아닐까 싶네요.
저는 특히 4~5월에 피는 진달래나 철쭉과 비슷한 영산홍을 무척 좋아합니다.
영산홍의 꽃말이 ‘첫사랑’인 것도 마음에 들지만, 무엇보다도 군락을 이루어 피어 있는 영산홍을 보면 너무나 아름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영산홍이 좋아서 예전에 갑곶성지에 있을 때 화원에 가서 영산홍 스무 그루를 사가지고 와서 성지 곳곳에 한 그루씩 심었지요.
그런데 힘들게 심은 영산홍은 그리 예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하면서 의문을 가졌는데, 영산홍이 한 가득 피어있었던 인천신학교에 가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한 그루 가지고서는 전혀 예쁘지도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한 무리를 지어 군락을 이루어 필 때 진정으로 예쁘고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딱 하나의 꽃이 예쁜 것이 아니라, 다른 꽃들과 함께 어울렸을 때 진정한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는 것이지요.
꽃이 아름다운 것은 비교나 우월의식 없이 다른 꽃들과 잘 어울리기 때문에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뽐내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혼자서는 전혀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혼자 있는 사람은 아무리 멋지고 아름다워도 긍정적인 소리를 듣기 힘듭니다.
대신 비교나 우월의식 없이 함께 하는 사람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의 외모나 재능에 상관없이 사람들은 그를 반기고 환영합니다.
결국 함께 한다는 것은 더 큰 의미의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게 됨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도 함께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주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하시면서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그런데 그 공생활을 잘 보면 항상 사람들과 함께 계셨음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외아드님으로 당신의 전지전능하신 힘을 가지고 사람을 지배하고 필요한 것을 하라고 일방적인 명령을 내릴 수도 있었을 텐데 전혀 그러시지 않습니다.
그분이 하신 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복음 선포하고,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과 중풍 병자들을 고쳐 주십니다.
전혀 당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자신을 치유해줬다고 엄청난 헌금을 낸 것도 아니었지요.
그저 도움만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이들과 철저히 함께 하셨기에
우리는 주님을 아름다운 분으로, 정말로 큰 존경과 사랑을 드려야 할 분으로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도 함께 해야 합니다.
하지만 내게 이익이 되는 사람들만 골라서 함께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오히려 도움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 지금 어렵고 힘들어 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 역시 주님과 언제나 함께 할 수 있으며, 진정으로 아름다운 나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
<철저하게, 끝까지>
예수님은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빛'으로 오신 분입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마태 4,16)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따라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은 인류 전체를 가리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은 인간 세상 전체를 가리킵니다.
'빛'은 구원과 생명을 뜻하고, '어둠'은 죄와 죽음을 뜻합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요한 1,4)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요한 1,9)
마태오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시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마태 4,25).
어둠 속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빛을 보고 몰려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서 저자는 정반대가 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요한 1,5)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요한 1,11)
마태오복음서와 요한복음서의 내용이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복음서의 기록이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를 대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실제로 그랬음을 나타냅니다.
사람들은 '어둠'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하면서 예수님께로 몰려들었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빛을 안 받았고, 예수님을 떠나버렸습니다.
사람들은 굶주림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하면서 예수님께로 몰려들었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안 받았고, 예수님을 떠나버렸습니다.
요한복음에 있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요한 6,66)라는 구절이 그것을 나타냅니다.
사람들의 그런 모습을 "노예생활을 싫어하지만, 자유인의 생활도 싫어하는" 모습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또는 "어둠을 싫어하지만, 너무 밝은 빛도 싫어하는" 모습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너무 더럽고 지저분한 것은 싫지만, 너무 깨끗한 것도 부담스러워서 싫고,
적당히 깨끗한(또는 적당히 지저분한) 것을 편하게 생각하는 심리 같은 것.
구원 받기를 바라면서도, 구원을 받기 위해서 회개하는 것과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불편해 하고,
그냥 적당히 사는 것을 더 편안하게 여기는 것.
실제로 옛날에 노비 제도가 폐지되었을 때,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된 것에 대해서는 기뻐하면서도
주인을 떠나서 자유인으로 살지 않고, 그냥 계속 노비로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유인이 되어서 혼자 힘으로 사는 것은 부담스러웠고,
주인이 착하기만 하다면 노비로 사는 것은 그런대로 적당히 편안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경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버리겠다."
(묵시 3,15-16)
이 말씀은 둘 중 하나를 확실하게 선택하라는 뜻이 아니라,
뜨거운 것이 아닌 것은 모두 차가운 것이라는 뜻입니다.
미지근한 것은 뜨거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차가운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안'이 아니면 모두 '밖'입니다.
확실하게 '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면 '밖'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밖'에 있다는 것은 지옥에 있는 것이거나, 멸망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자기는 하느님 나라의 근처까지 갔다고 주장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주장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적당히' 라는 말은 신앙생활에서 아주 위험한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항상 '철저하게' 해야 합니다.
앞에서 말한 "어둠을 싫어하지만, 너무 밝은 빛도 싫어하는" 것은 사실상 어둠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요한 3,19)
'빛'이 아니면 '어둠'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적당히 밝은 빛'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활동을 시작하실 때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회개'는 '적당히' 해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끝까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끝까지' 따라가야 합니다.
자기가 가고 싶은 만큼만 가다가 멈추면, 처음부터 따라가지 않은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처음에 예수님께로 몰려들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끝까지 남아 있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새해를 맞이해서 새롭게 회개를 하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심했다면,
그 결심이 올해의 마지막 날까지 지속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만일에 중간에 멈춘다면, 처음부터 결심하지 않은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전혀 안 한 사람보다는 그래도 조금이라도 노력했으니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예수님께 우기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 전주교구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성령을 통한 친교>
우리에게는 각자 우선되는 모임이 있습니다.
저는 사제이고 특히 교구청에 있기 때문에 수원교구 사제단 모임이 다른 모임보다 우선입니다.
약속이 늦게 잡히더라도 이전 약속을 취소하고 사제단 모임에 참석해야 하는 때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솔직한 심정으로 사제단 모임이 다른 모임이나 만남보다 더 행복해서 모이는 것은 아닙니다.
모여야 한다고 강요되어지는 점이 없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런 면에서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지 않나 싶습니다.
자주 모이고 긴 시간을 함께 가져야만 친교가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우리 가족은 어떻습니까?
혹시 가족끼리 한 집에서 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로움을 느끼지는 않습니까?
저는 참다운 친교가 만남의 횟수나 만나는 시간의 양에 달려있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1954년 <노인과 바다>라는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국의 문호 헤밍웨이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유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나는 전류의 흐름이 그치고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처럼 고독하다.”
이는 어쩌면 겉으로는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고 만나고 친교를 이루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단 한 명과도 충만한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 우리들의 모습과 비슷하지는 않을까요?
그래서 항상 사람들과 함께 있는 연예인들이 더 외로울 수도 있습니다.
영국의 작가인 부르크가 미국 여행을 떠날 때였습니다.
그는 부두에서 놀고 있는 한 소년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6실링의 돈을 쥐어주며 “내가 저 배를 타고 떠날 때 나를 보고 손을 흔들어 줄 수 있겠니?”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약속대로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부르크는 그때 아이의 손 흔드는 모습을 본 자신의 느낌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돈 받고 흔드는 손을 보고 나는 더욱 고독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습니다.
우리 또한 어쩌면 주위의 시선 때문에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서 외롭지 않음을 보여주려 하지만
속으로는 더 큰 고독감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독서에서 요한은 ‘세상에 속한 영’과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영’을 구분합니다.
세상에 속한 영을 지닌 이들은 하느님의 사람이 하는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알아듣기를 거부합니다.
오직 하느님의 영을 받은 이들만이 하느님의 영으로 하는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라옵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영께서 당신의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먼저 상대를 준비시켜 주신다는 말입니다.
이는 바로 참다운 만남이란 ‘영’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세상의 영을 지닌 사람과 하느님의 영을 지닌 사람은 백날 만나도 서로를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을 가진 두 사람이 만난다면 평생 단 한 번을 만나도 잊히지 않는 만남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께서 서로의 성령을 통하여 친교를 이루시는 것처럼,
참다운 친교는 우리 안에 주어진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코르넬리우스라는 로마 백인대장에게 당신의 천사를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를 준비시킵니다.
또한 하느님은 베드로를 준비시킵니다.
그가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고 있으니 이방인들에게도 다가가라고 가르치십니다.
유다인들은 이방인들과 접촉하기만 해도 부정해진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코르넬리우스에게 욥빠라고 하는 곳에 가면 베드로라는 사람이 있으니 그를 데려와 세례를 받으라고 일러주십니다.
베드로는 코르넬리우스가 보낸 사람들을 따라가 이방인들 중 로마 백인대장에게 처음으로 세례를 베풉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당신 성령을 보내시어 쌍방을 준비시킵니다.
이 성령의 충만함을 지니지 않고서는 참다운 친교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셨을 때도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찼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그 성령의 힘으로 성모님이 하느님의 어머니이심을 알아봅니다.
참다운 친교는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만남인 것입니다.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주님의 영(靈)과 육(肉)의 영>
요한은 자신의 첫째 편지에서 하느님은 빛이라고 선포하고 있다(1요한 1,5).
빛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그런 하느님을 거절하는 사람들을 선명하게 갈라놓는다.
하느님의 빛이 내리는 심판은 너무나도 근본적인 것으로서
그 심판 앞에서 각 개인과 단체와 사회 및 국가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빛의 자녀답게 산다는 것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서로 사랑하며” (1요한 1,23)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빛’이란 ‘어둠’과 대등한 실재가 아니며, 단순히 ‘어둠’의 반대도 아니다.
곧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악행을 저지르지 않고 남에게 해코지만 않고 살면 그만인 그런 소아적(小雅的)인 삶이 아니다.
‘빛’은 온누리, 온 존재를 향하고 있고 어디에나 있는 것이나,
빛을 받는 사람이나 대상이 그것을 가려버리는 상태가 ‘어둠’이다.
이 ‘어둠’은 근원적으로 계명을 지키지 않아 하느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지 않기 때문에 찾아드는 것이다.
계명을 지키고 그분 안에 머묾으로서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물게 되는 분(3,24)이 바로 ‘하느님의 영’이다.
우리 존재의 저 깊은 ‘영’이 있지만 아무 영이나 다 믿어서는 안 된다(4,1).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고, 그분을 믿는 영은 ‘하느님의 영’이다(4,2).
“주님의 영은 육이 혹독한 단련과 모욕을 당하기를 원하며,
천한 것으로 여겨지고 멸시받고 수치당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겸손과 인내, 그리고 순수하고 단순하고 참된, 영의 평화를 얻도록 힘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항상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성한 두려움과 신성한 지혜와 신성한 사랑을 얻기를 갈망한다.”
(성 프란치스코, 비인준칙 17,14-16)
이와 반대로 예수님께서 육으로 오셨음을 고백하지도 믿지도 않는 영은
‘그리스도의 적의 영’ 곧 악마이며(4,3) ‘사람을 속이는 영’(4,6)이다.
‘하느님의 영’은 하느님께 속한 우리 안에 이미 살아계신다.
그러나 하느님께 속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 적의 영’에 휘둘려 세상에 속한 것을 말하고 세상은 또 그들의 말을 듣는다(4,5).
그렇게 사는 이들은 이미 ‘빛’이 오셔서 가까이 계시고 늘 비추어주시지만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자신이 주인이 되어 ‘육의 영’에 갇혀 살아간다.
“육의 영(靈)은 말마디만을 소유하기를 무척 원하고 애를 쓰지만, 실천을 하는 데에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영의 내적인 신앙심과 성덕(聖德)을 추구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겉으로 드러나는 신앙심과 성덕을 원하고 열망한다.”
(성 프란치스코, 비인준칙 17,11-12)
각자 자신의 삶을 돌아보자!
나는 그리스도의 강생을 인정하고 믿는가?
강생에 대한 믿음이 나의 삶에서 드러나고 있는가?
강생을 지금, 여기서 살아낸다는 것은
육신을 취하시어 오신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통하여
한없는 사랑과 영원한 생명을 보여주신 그 삶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것을 말한다.
나는 오늘도 무엇인가를 하고 누군가를 만나고
미래의 일을 계획하고 말씀 묵상과 봉사활동 등 많은 것을 생각하고 행하였다.
그러나 좀 더 깊은 내 마음 속을 들여다보자.
정녕 나는 어떤 영(靈)을 지니고 생각하고 행하였는가?
의식하면서 고의적으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거부하고 하느님 뜻을 거슬러 행동한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그러나 무엇인가를 행하였지만 그저 해왔기 때문에, 또는 교회에서 그렇게 하라고 하니까, 누군가가 그렇게 하면 좋을 것이라고 하니까
‘생각 없이’ ‘하느님 앞에서 숙고하고 기도하지 않고’ 갈대처럼 움직인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나는 오늘도 ‘주님의 영’에 따라 제정신을 차려 생각하고 움직일 것인가,
아니면 기도 없이 무의식적인 습관에 따라서 ‘육의 영’에 따라 ‘정신없이’ 움직일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회개란 ‘육의 영’에서 벗어나 ‘주님의 영’에 따라 살아가는 것임을 회상하자!
- 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장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예수님께서 공적인 일을 시작하신 곳은 갈릴래아, 사람들이 육지 속의 섬이라 부르는 변두리, 소외된 땅입니다.
그러나 이 지역은 물이 풍부하여 풍요롭고 아름다우며 살기 좋은 지역이었으나 가장 착취를 받던 곳이 또 갈릴래아지 방입니다.
대부분의 땅은 부유한 사람들의 소유였고 많은 사람들은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희생과 억압을 강요 당해야 했습니다.
고통스럽게 착취 받는 땅이 갈릴래아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지역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첫 말씀은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였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착취한 부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부자들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주변에는 부자들은 멀리 사라지고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이 몰려왔습니다.
뒷전으로 밀려나 하느님밖에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가르치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은 가르치는 일을 하는 교육기관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병원을 운영하고 사회복지시설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배려입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부유한 사람, 힘 있는 사람, 잘나가는 사람, 멋진 사람, 편안한 사람에게 더 쏠립니다.
이러한 우리의 태도에 주님께서는 무어라 하실까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우리에게 아무것도 보답할 수 없는 이들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회개란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바꾸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도둑질하는 사람이 회개했다면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길 원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십니다.
우리 삶의 자리가 어디든 어렵고 힘든 사람은 항상 있습니다.
힘겨워 지친 사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나의 눈길,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는 광고를 하지 않아도 온갖 살아있는 것들이 모여들게 마련입니다.
향기가 있으면 벌 나비가 모여드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든 것은
그분에게 넘치는 사랑이 있었고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있다면 사람들이 모여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 5,16)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할 소명을 일깨우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순례지 본당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이스라엘 예언자의 전통을 계승하신다.
저항의 시대에는 외치는 이가 먼저 죽고, 싸우는 이가 뒤따라 죽는다.
그리고 관망하는 자가 열매를 따 먹게 된다.
세례자 요한이 잡히자 예수님께서 곧바로 하느님 나라의 건설 운동에 뛰어드셨다.
요한의 회개 운동이 좌절과 박탈, 절망감에 잠든 의식을 깨워 각성시켰다면,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드러낸 것이다.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긴 모습인지를 보여 주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마귀 들린 자가 제 모습을 찾는다.
간질과 중풍과 온갖 고통과 번뇌에 시달리는 이들의 몸이 치유되고 영혼이 정화된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창조성이 온전히 회복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은 요한의 회개 운동과는 다른 고유성이 있다.
‘빛이 생겨라!’는 말씀이 곧 창조로 나타났듯이
‘깨끗해져라!’ ‘썩 물러가라!’는 말씀이 즉시 실현된다.
‘사랑의 현실화’,
이것이 예수님 운동의 고유성이다.
신자 노릇을 제대로 하려면 예수님의 고유성에 주목해야 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였던 예수님의 ‘일체성’처럼 스승과의 ‘동시성’으로 사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결국 요한과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의 열매만 따 먹는 신앙인이 되고 만다.
이것이 우리 시대 신앙 행태의 문제다.
스승의 유업이 실천되는 신앙으로 세상은 하느님과 복음을 믿게 된다.
가난한 이가 왜 행복할 수 있는지,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왜 하느님의 아들로 여겨지는지를 믿게 하는 데는 다른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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