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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1)
시 27:1-14
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2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3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5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6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7 여호와여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9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11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
12 내 생명을 내 대적에게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13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14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시 27:1-14 / [여호와께 기대어; 다윗의 시] 여호와는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니 나 그 무엇을 무서워하랴. 여호와는 나 살리는 든든한 바위이시니 나 그 무엇을 두려워하랴. 2) 저 못된 것들이 나 잡아먹으려 달려들지만 저 원수, 저 대적들이 비틀비틀 고꾸라진다. 3) 저들이 군대를 이루어 진을 치고 나를 에워싼다 해도 내 마음 떨리지 않아 저들이 내게 달려든다 해도 든든히 주님을 의지하리라. 4) 이 몸 여호와께 구하는 것은 하나 주께 청하는 것은 오직 하나 이 목숨 살아 생전 여호와 우리 주님 성전에서 살며 여호와 우리 주님을 기쁨으로 삼아 주님의 전에서 명상하는 것. 5) 불행한 날 주께서 이 몸 지켜 주시고 주님의 성전 아늑한 곳에 숨겨 주시며 원수들 달려들지 못하게 안전한 바위 위에 높이 올려 놓으시리니 6) 나를 에워싸고 있는 원수들 보란듯 승리의 노래를 부르리라. 주님의 전에서 기뻐 소리치며 제물을 올리리라. 여호와 우리 주님을 노래하며 찬미하리라. 7) 여호와여, 들으소서. 이것이 부르짖나이다. 어여삐 보소서. 대답하소서. 8) `어서 내게 오너라.' 하시던 말씀 그리워 이렇듯 주님의 얼굴을 뵈오려 하오니 9) 얼굴을 돌리지 마소서. 화내어 주님의 종을 버리지 마소서. 주께서 도와주지 않으신다면 이것은 어찌할 수 없어요. 이것을 건져내시는 하나님, 이것을 내팽개치지 마소서. 이것을 버리지 마소서. 10) 설령 내 부모는 나를 버릴지라도 그래요, 여호와께서는 나를 끝끝내 붙드시리니 11) 여호와여, 주님의 길을 내게 일러주셔요. 저렇듯 원수들 노려보고 있사오니 안전한 길로 이끌어 주셔요. 12) 원수들 손에 이것을 내맡기지 마셔요. 밥 먹듯 거짓말하는 것들 금방이라도 때려 죽일 듯 나에게 달려들려 합니다. 13) 이 몸 사람 사는 이 세상에서 어지신 여호와께 의지하며 주님의 복을 누리며 살리라, 든든히 믿고 믿음이여. 14) 여호와를 애타도록 기다리어라. 기 꺾이지 말고 담대히 살아가거라. 여호와를 애타도록 기다리어라.
다윗이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하나님만을 신뢰하여 평안을 누렸던 체험을 증거합니다.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1-6)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과 아마샤의 추격으로 어려운 지경에 있지만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제사장이 법궤를 가지고 따라왔지만, 돌려보내며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진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은 빛이시고 나의 구원이시기 때문에 두렵지 않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는 다윗에게 생명의 능력이며 생명을 주신 분이기에 그냥 버려두시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한다고 아무 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도 포악한 대적들이 자신을 뜯어 먹으려고 왔고 하나님을 경험한 이후에도 원수들이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제 두렵지 않고, 오히려 태연할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명이 살아있는 한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믿고 바라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의 소망은 과거의 조상들 때로부터 받아 온 은혜를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람들을 바위 위에 두시고 보호의 은혜를 주시고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게 될 것이라고 소망합니다.
응답하소서(7-14) 다윗은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자기의 곤경을 마주 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며 들으시고 응답해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거나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 합니다. 하나님만이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분이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문제는 해결됩니다. 기도한 후에 주는 나의 도움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구원의 하나님께 자신을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말라 합니다. 부모는 자신을 먼저 세상을 떠나 버렸지만 여호와는 영접해 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려움에서 건지셨고 인도하시어 원수들로 공격당하지 않도록 평탄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연약한 자신을 진리로 보호해 주셔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니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믿으며 기다린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반드시 들으십니다. 기도 응답을 기다린다면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하시기를 바랍니다.
적용: 당신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합니까? 응답을 기다린다고 무엇을 해야 한다면 먼저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알렉산더 대제 휘하에 알렉산더라는 졸병이 있었습니다. 형편없는 그의 생활로 말미암아 알렉산더라는 이름이 마구 아무렇게나 불렸습니다. 이 소식을 안 알렉산더 대왕은 예고 없이 졸병의 막사를 방문하여 겁에 질려 경례를 하고 있는 졸병 알렉산더에게 말했다. “네가 알렉산더라지?”, “네”, “내가 두 가지를 명령한다. 네 이름을 바꾸어라. 바꾸기 싫거든 네 삶을 바꾸어라”
< 설 교 >
메튜 헨리 주석
시 27:1-24
확고한 믿음 (시편 27:1-6)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살펴볼 수 있다.
Ⅰ. 다윗은 얼마나 생동하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안에서 개가를 부르고 있으며 그이 거룩한 이름을, 그리고 그가 얻은 유익을 영화롭게 하고 있는가?
1. "여호와는 나의 빛이시니이다." 다윗의 신하는 그를 "이스라엘의 등불" 이라 불렀다(삼하 21:17). 그는 사실상 타고 있는 그리고 빛나는 등불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가 달처럼 빌어온 빛에 의해 빛났음을 인정하고 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시니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던지신 빛이 그들에게 반사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빛으로서 그들이 의혹 가운데 있을 때 길을 보여 주시고 그들이 슬픔에 잠겨 있을 때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즐겁게 해주신다. 그들은 지금 그의 빛 가운데서 그들의 길을 행하며, 그의 빛 가운데서 영원히 빛을 보리라는 소망을 갖는다.
2. "그는 나의 구원이시니 나는 그 안에서 안전하며 그에 의해 구원될 것이다."
3. "그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 위험한 생명의 보호자로서 내가 죽음을 당하지 않게 해 주실 뿐만아니라 내 연약한 생명의 힘으로서 내가 낙심하거나 위축되고 시드는 것을 막아 주신다." 믿는 자의 빛이신 하나님은 그의 생명의 빛이시므로 그는 하나님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고 움직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 자신을 강건케 하도록 하자.
Ⅱ. 얼마나 담대한 용기를 가지고 그는 그의 대적들을 이기고 있는가? 믿음에서 나온 용기만큼 견인한 것은 없다.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시면 누가 그를 대적할 수 있겠는가?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전능자께서 그의 호위자가 되신다면 그는 두려워할 까닭이 없게 된다. 만일 그가 그러하다는 것을 안다면 그는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빛이라면 그는 어두움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구원이실 때 그는 어떤 무기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패주당한 대적들 위에서 개가를 부르고 있다(2절). 그의 대적들은 "그의 살을 먹으려고" 그에게로 에 대하여 다. 그리고 그 이상의 성공을 거두리라고 확신하고 왔지만, 그들은 넘어지고 말았다. "그가 그들을 죽여 쓰러뜨린 것"이 아니라 "실족하여 넘어진 것" 이었다. 그들은 매우 당황하고 약화되었으므로 더 이상 그들의 계획을 추진시킬 수 없었다. 이처럼 한 마디 말로써 그리스도를 잡으려고 왔던 자들은 비틀거리며 땅에 엎으러졌다(요 18:6). 하나님 백성들을 대적하던 어떤 사람들의 멸망은 그 대적자들 모두가 완전히 정복되리라는 전조이다. 이들이 넘어졌으므로 따라서 그는 나머지 대적들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비록 그들이 무수하여 무리를 이루고 있을지라도 -그들이 대답하고 그들의 공격이 위협적일지라도-한 사람을 대항하여, 즉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그들이 나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일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로다. 천군의 주님이 우리를 보호하시면 어떤 군대들도 우리를 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신다는 확신 속에서 내가 안연하리로다." 그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
1. 그는 안전할 것이다. "하나님이 나의 구원이시라면 혼난 날에 나를 비밀히 지키시고 나를 위험과 그 두려움이 벗어난 곳에 두시리라." 하나님은(렘 36:26 에서 처럼) 환난의 날에 그의 백성들에게 피난처를 마련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가 친히 그들의 은신처가 되실 것이다(32:7). 그의 섭리가 그들을 안전케 할 것이며, 적어도 그의 은혜가 그들을 편케 해 줄 것이다. 그의 이름은 곧 그들이 믿음으로써 달려가는 견고한 망대이다(삼상 18:10). "여호와께서 나를, 엔게디 요새(삼상 23:29)가 아닌 장막 은밀한 곳에 숨기시로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임재, 그의 능력 그의 약속 기도를 들으시려는 그의 준비 그의 백성의 마음속에 있는 성령의 증거-이러한 것들이 그의 장막 은밀한 곳이며, 이 속에서 성도들은 그들을 편히 거하게 하는 거룩한 보호와 마음이 평정을 발견한다. 이것은 그들을 흔들리지 않는 바위에 두며 그들은 거기서 그들의 소망에 대한 튼튼한 발판을 발견한다. 즉 그것은 그들을 "바위 위에 높이"두며 거기서는 폭풍우 부는 바다의 거센 파도도 그들을 건드리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보다 높은" 바위이다(61:2).
2. 그는 승리할 것이다(6절). "이제 내 머리가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그들의 창이 그곳에 들리울 것이다. "다윗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에 의해 승리 앞에서 개가를 부르고 있다. 그리고 월계수뿐만 아니라 면류관도 이미 자기 머리 위에 씌어진 것처럼 그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
Ⅲ. 얼마나 정중하고 진지한 모습으로 그는 거룩한 규례 속에서 하나님과 꾸준히 교제하기를 간구하고 있는가?(4절) 그가 하나님의 의무를 행하고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 질 수 있는 그의 고유의 영역 속에 있었을 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신뢰를 크게 격려했다. 우리가 그 어느 피조물보다도 하나님을 더욱 기뻐했다는 사실을 우리 마음이 증거할 수 있을 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를 의지하도록 격려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것으로 여기시어 보호하시는 자들 가운데 우리가 속해 있다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을 이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즉 그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대적들로부터 안전하기 위해 여호와의 집에 거하기를 원했다. 그 자신이 위협적인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있음을 발견했을 때 그는"나의 안전을 위해,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은 내가 그러한 무리들과 겨룰 수 있는 군대를 갖고자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거나, "그러한 성읍이나, 그러한 성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나로 여호와의 집에 거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것으로 나는 만족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관찰하라.
1.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여호와의 집에 거하는 " 것이었다. 다윗은 여호와의 전 뜰에 묵었던 제사장들 가운데 속하기를 원했다. 하나님의 사역자를 매우 경시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역대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훌륭했던 왕들 가운데 한 사람 이었던 다윗은 기꺼이 그들과 함께 운명을 나누고자, 기거하고자 했다. 또한 오히려 그는 다른 충실한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매일매일 요구되는 의무에 따라 하나님의 성전 봉사를 합당하고 꾸준하게 해나가기를 원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당시에 참여하고 있던 전쟁이 끝나기를 원했다. 그것은 그 자신의 궁전에서 편히 살기 위해서가 아니었고 하나님의 전을 일정하게 섬길 수 있는 여유와 자유를 갖기 위한 것이었다. 다윗의 성실한 아들, 히스기야도 보좌 위에 오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기"위해 그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원했다(사 38:2).
하나님의 모든 자손은 하나님의 전에 거하기를 바란다. 그들이 거할 곳이 그 외에 또 어디 있겠는가? 단지 하룻밤을 위해 잠시 체류하는 나그네처럼 그곳에 거하거나, 영원히 그 집에 살지 않는 종처럼 잠시 동안만 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그들 생의 모든 날들을 그곳에 거한다. 거기에 아들(그리스도)도 영원히 거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찬미의 하나님이 우리의 영원한 축복이 되시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 생전 동안의 일로 삼아야만 한다.
2. 그는 얼마나 간절히 그것을 갈망하고 있는가? "이것이 바로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이며, 나는 그것을 구하리이다." 만일 그가 하나님께 한 가지만 부탁하기로 되어 있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이것을 청할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이것을 그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을 하나의 좋은 것으로서 청했다. 그는 여호와께 그이 선물로서 그리고 그의 은총의 표정으로서 그것을 청했다. 그리고 필요한 한 가지로서 그것에 그에 열망을 고정시켰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구했다. 그는 하나님 전에 거하기 위해 계속 기도했고 그렇게 할 자유와 기회를 얻기 위해 그의 일들을 계획했다. 진심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는 자들은 온갖 힘을 기울여 그것을 구할 것이다.
3. 그는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그가 하나님의 집에 거하려는 것은 제물로 잔치를 베푸는 그곳의 풍성한 즐거움이라든가 그곳에서 불리워지는 음악과 좋은 노래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그가 하나님의 전을 섬기고자 하는 것은 다음 두 가지를 위한 것이었다.
(1) 하나님을 묵상하기 위해서, 그는 여호와의 아름다움, 거룩한 존재와 완전함에 대한 무한하고도 초월적인 온아함을 알고 있었다. 즉 그의 거룩함이 그의 아름다움이며(110:3) 그의 선하심이 그의 아름다움이다(슥 9:17). 그의 모든 속성의 조화가 그이 성품의 아름다움이다. 우리는 믿음과 거룩한 사랑의 눈으로 즐겁게 이 아름다움을 보여 그 속에서 사랑스럽고 경탄스러운 것을 더욱 더 살펴 보아야 한다. 생각을 고정시키고 열렬한 감정에서 나온 거룩한 불꽃을 갖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탁월성을 관조하여 우리에 대한 그의 특유한 은총의 표시를 즐거워해야 한다. 다윗이 여기에서 열망하고 있는 것과 이러한 면에서의 여호와의 아름다움이며, 그것은 그의 규례 속에서 보여질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규례를 통해서 그 자신은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2) 그의 의무에 대해 가르침을 받는 만족을 위해서,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전에서" 그것을 "사모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여호와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 두 가지 일을 위해 그는 한 가지, 즉 "그의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렇게 하는 자가 복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이야기하고 그로부터 듣는 가운데 항상 주를 찬송할 것이다(84:4).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그의 발밑에 앉아 있었을 때 그리스도는 그것을 "필요한 것"이며 "좋은 편"이라고 하셨다.
4. 그는 그것으로 인한 어떤 유익을 그 자신에게 약속하고 있는가?
(1) 그가 하나님의 전에 자리 잡기만 한다면 그는 그 곳에서 평안할 것이다. 여기서는 그가 은밀한 곳에 숨겨질 것이므로 환난이 그를 찾지 못할 것이다. 그가 높은 곳에 있을 것이므로 환난이 그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다.(5절). 다윗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인 요아스는 여호와의 전에 육년 동안 숨겨져 있어서 칼로부터 보호받았을 뿐만 아니라 면류관을 보유할 수 있었다(왕하 11:3). 느헤미야는 또한 성전을 도망하기에 안전한 장소로 생각하였다(느 6:10). 그러나 믿는 자들의 안전은 성전의 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전의 하나님 안에 있으며, 그들의 위로는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 있는 것이다.
(2) 또한 그는 그곳에서 즐겁고 유쾌할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기쁨의 제물을 바칠 것이다(6절).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업이 그 품삯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그는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우리의 기쁨의 대상이 되는 것은 모두 찬미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거룩한 의식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섬길 때 우리는 매우 기뻐하고 찬미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를 찬송해야 하는 것은 곧 그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 대적들 위에 높이 드실 때마다 우리는 찬미로 그를 높여야 한다. "항상 우리를 이기에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4).
소망과 기도 (시편 27:7-14)
다윗은 이 구절들 속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표현하고 있다.
Ⅰ. 여러 가지 탄원 속에 나타난 하나님께 향한 그의 열망. 지금은 여호와의 집으로 올라갈 수 없을지라도 그는 어디에 있든지 간에 은혜의 보좌로 가는 길을 기도를 통해 발견할 수 있었다.
1. 그는 겸손히 청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은혜로운 청종을 얻으리라는 것을 확고하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여, 내가 마음으로 뿐만 아니라, 간곡히 원하는 자로서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들으소서." 그는 또한 화평의 응답을 청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기대하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의 공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나오는 응답이다. 즉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7절). 우리가 기도하고 믿는다면 하나님은 은혜롭게 들어주시고 응답하실 것이다.
2. 그는 하나님께서 이 의무를 행하도록 그에게 보내 주신 친절한 초청을 포착하고 있다(8절). 우리가 부름 받지도 않고서 왕들의 왕이신 자가 계신 곳으로 가는 것은 무례한 일이며, 그가 "우리에게 긍휼을 드시지" 않는 한 우리는 그곳에 확신을 갖고 가까이 갈 수 없다. 그러므로 다윗은 기도를 드리려 할 때 그의 생각을 하나님께서 은혜의 보좌로 그를 부르신 것에 두고, 관례대로 그에게 내밀어진 긍휼의 끝을 경건하게 만지고 있다.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또는 주에 "대해" 말하되"저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였나이다." 그는 그것에 대해 먼저 숙고한 다음 그것을 다시 자기 자신에게 가르치고 있다(그것은 가장 훌륭한 가르침이며 하나님이 한 번 말씀하시는 것을 두 번 듣는 것이 된다)즉 "주께서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시나이다"(그것을 이렇게 보충할 수도 있다). 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을 묵상하고 난 뒤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라고 경건하게 결단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을 살펴보자.
(1) 신앙적인 경배의 참된 본질. 그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율 속에 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 자신을 위해 그를 찾도록 만드실 것이고, 그의 은총을 우리의 주요 선으로 삼도록 하실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곧 성도들의 목적이며 소망이 된다.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그리고 그 외의 것은 아무 것도 따르지 아니하리이다." 주가 손을 펴 실때 모든 생물의 소원이 만족케 될 것이다(145:16). 그러나 살아 있는 영혼의 소원을 만족케 하는 것은 그의 얼굴에서나 오는 빛뿐이다.(4:6, 7)
(2) 이 의무에 대한 은혜로운 하나님의 친절하신 초청. "주께서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시나이다." 이것은 허락일 뿐만 아니라 계율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찾으라는 그의 명령은 발견하게 되리라는 약속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매우 친절하시므로 "나를 헛되어 구하라"고 말하시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에게로 전향하고 그와 더불어 대화함으로써 그의 얼굴을 찾도록 권고하신다. 그는 그의 성령이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와 더불어 속삭이도록 하심으로써 우리가 그의 얼굴을 찾도록 하신다. 즉 그는 그의 말씀으로, 그를 섬기기 위한 정해진 기회로, 그리고 인자하며 동시에 쓰라린 특별한 섭리로써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가 어리석게도 허탄하고 거짓된 것에 아첨할 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그에게서 우리 자신의 긍휼을 찾도록 부르고 계신다.
(3) 이 초청에 대한 은혜로운 영혼의 기꺼운 응락. 그 부르심은 즉시 응답된다.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그 부르심은 일반적인 것이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리이다"하고 적용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시킬 때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으며 우리는 그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그 요청은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는 것이었고 그 응답은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렘 3:22)라는 응답이 있다. 하나님의 권능의 부르심을 기꺼이 반향하는 것이다.
3. 그의 요청은 매우 독특하다.
(1)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그것에서 도외시당하지 않기 위한 것이다(9절). "여호와여, 주의 계명에 순종하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그러하오니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나로 주의 은총이 소생되는 것을 느끼지 못하게 하지 마소서. 나를 사랑하시고 주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려 주소서.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그는 그가 하나님의 역정을 받을 만하였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있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징계하시는 한이 있더라도 그를 그의 존전에서 버리지 말기를 간청하고 있다. 그에게서 버림당하는 것이 곧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2) 하나님께서 계속 그와 함께 사실 것을 구하고 있다. "주는 이전에도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그러하오니, 내가 주께로 가지 않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주의 능력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그렇게 되면 나는 힘이 없어질 것입니다. 주의 선하신 의지의 표적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그렇게 되면 나는 위로를 잃게 될 것입니다.
(3) 거룩한 길잡이의 혜택을 구하고 있다(11절). "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나로 하여금 내게 대한 주의 섭리의 의미를 깨닫게 하시고 분명히 알게 하소서. 그리고 의혹에 쌓여 있을 때는 언제나 나의 의무를 알게 하시어 내가 실수하지 않고 올바로 행할 수 있도록, 내가 주저함이 없이 확고하게 행할 수 있도록 해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우리 의무의 길을 가르치고 그것을 지키도록 해 주는 것은 수단이 아니라 솔직함(즉 매우 정직함)이다. 그는 "그의 원수로 인하여" 또는 (난외 대로) 그의 "관찰자"로 인하여"평탄한 길로"인도되기를 청하고 있다. 그의 대적들은 그를 칠 기회를 찾기 위해 그가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울은 다윗을 주목했다(삼상 18:9). 이것은 그로 하여금 이렇게 기도하도록 촉구했다. "주여 나를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그리하여 그들이 나를 책망할 만한 흠이나, 흠으로 보이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게 하소서."
(4) 거룩한 보호의 혜택을 구하고 있다(12절). "내 생명을 내 대적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여호와여, 그들이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게 하소서. 왜냐하면 그들은 내 생명을, 아닌 그보다 더한 것을 노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의 능력이 그들의 양심을 다스리지 않는 한 나는 그들을 방어할 힘이 없습니다. 위증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함이니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나의 명성이나 재산을 빼앗는 것 이상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악을 토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갈구하는 것은 피, 귀한 피 입니다."
여기에서 다윗은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왜냐하면 거짓 증인들이 일어나서 그를 쳤고 그들은 악을 토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악인의 손에는 넘겨졌을지라도 그들의 뜻에는 맡겨지지 않았다. 그들은 그의 높이 들리우심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Ⅱ.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1. 모든 도움과 구조가 끊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주시고 구조해 주시리라고 믿고 있다(10절). "내 부모는 나를 버렸을 때, 내가 이 세상에서 큰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나의 가장 가깝고 귀한 친구들이 죽거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내가 곤경에 처한 때에 도울 능력이 없거나, 또는 내게 불친절하며 관심을 두지 않고 나를 도우려 하지 않을 때, 내가 부모없는 불쌍한 고아처럼 어찌할 수 없을 때, 그때에 불쌍하게 유리하는 양이 보호받아 죽음에서 구해지는 것처럼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그는 그를 의지하는 자들에게 모든 도움이 끊어졌을 때, 그것이 주로 그의 영예와 그들의 위로를 위한 것일 때 그들을 도와주신다. 그에게서 "아비 없는 자들도"그에게서 "자비를 얻으리라." 버림받은 고아들은 거룩한 섭리의 특별하신 보호 아래 있어 왔고, 그것은 사람들이 예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들을 위로해 주고 친구가 되어 주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세상 부모들보다도, 그들이 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든든하고 좋은 친구이시다.
2. 합당한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볼 것이라고 믿고 있다(13절). 그는 "산 자의 땅에서 여호와의 은혜를 볼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고통 속에서 "쓰러졌"을 것이다. 가장 훌륭한 성도들까지도 그들의 고통이 심하고 괴로울 때는 쓰러지기 쉬울 것이며, 그들의 영은 압도되고 몸과 마음은 지쳐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는 믿음이 특효 있는 활력제가 된다. 그것은 그들이 고통 가운데에서 낙심하지 않도록 하고 위로가 끊겨 실망하는 일이 없도록 해 준다. 그리고 계속 소망을 갖고 기도하고 기다리게 해 주며, 하나님께 대해 선한 생각을 유지하고 스스로 편안한 즐거움을 갖도록 해 준다.
그러면 다윗이 쓰러지지 않도록 해 준 것은 무엇에 대한 믿음이었는가? 그것은 지금은 멀리 있는 것같이 보이는 "여호와의 은혜를 볼것"이라는 것이었다. 믿음으로 여호와의 은혜 가운데 행하는 자들은 합당한 때에 그 은혜를 보는 가운데 행하게 될 것이다. 그는 이것을 산 자의 땅에서 보기를 원하고 있다.
(1) 즉 이 세상에서 보기를 원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그는 고통을 극복하게 될 것이며, 그 속에서 파멸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산 자의 땅을 보게 되리라는 것은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리라는 것 못지 않게 그의 위로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은혜로운 영혼에 대한 육체적 쾌락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2) 가나안의 땅, 그리고 생명의 지성소가 있었던 예루살렘에서 보기를 원하고 있다. 죄 가운데 죽어 있었던 이방 나라와 비교해 볼 때 이스라엘 땅은 "산 자의 땅"으로 불리운다는 것은 매우 합당할 것이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알려지셨으며, 다윗은 그 곳에서 그의 은혜를 보기를 바라고 있다(삼하 15:25, 26 참조).
(3) 또한 천국에서 보기를 원하고 있다. 이것은 진실로 산 자의 땅이라 불리울 수 있는 유일한 땅이다. 그곳에는 더 이상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이 땅은 죽은 자의 땅이다. 우리를 이 현재의 모든 재앙에서 질식하지 않도록 지켜 주는 데에는 영생에 대한 믿음의 소망, 그 영광에 대한 통찰, 그리고 그 즐거움에 대한 예상 이상의 것은 없다.
3. 그 동안에 그가 그의 고통을 참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하게 되리라는 것을 믿고 있다(14절). 그가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말하든 아니면 그의 친구들에게 말하든지 간에 그것은 모두 마찬가지며 그것이 그를 격려해 주고 있다.-즉 그가 네 마음을 강하게 하실 것이며 그 영을 부축하실 것이다. 그러면 그 영은 연약함을 뒷받침해 줄 것이다.
(1) 그 힘으로 하나님과 너의 의무를 철저히 지키라. 믿음과 기도로, 그리고 그의 뜻을 따르려는 겸손한 마음으로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내가 말하노니,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네가 무엇을 하든, 하나님 섬기기를 게을리하지 말라.
(2) 그 힘으로 큰 환난과 곤경 가운데에서 네 영을 지키라. "담대하라." 하나님을 의지하여 네 마음을 견고케 하고 네 마음을 그에게 두라. 그리하여 이 어느 것도 너를 요동케 하지 못하게 하라. 하나님을 바라는 자들은 담대해질 수가 있는 것이다.
내 평생 여호와의 집에 살겠습니다.
시편 27:1-6 / 성흥모목사
오늘의 말씀 본문 27:4절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 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데, 우리의 소원들 중에 하나님 앞에서 꼭 한 가지만 말하라고 하면, 무엇을 이루어달라고 하겠습니까? 오늘 시27편을 쓰신 다윗왕은 “주님, 저에게는 단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오직 그 하나만 구하겠습니다. 그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주님을 사모하면서 예배하는 그것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의 한 가지 유일한 소망은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는 거하는 그것이었습니다. “내 평생에”라는 말은 예전 성경에는 “내 생전에”라는 말입니다. “내 생명의 모든 날들에”, “한 평생”이라는 말입니다. 다윗왕의 소망은 한 평생 여호와의 집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면서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려고 하였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성전에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성전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시11:4에서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성전은 여호와께서 임재하시던 예루살렘 성전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편재성을 인정합니다.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우리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은 성전에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출25:21-22에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람을 만나주시는데, 지성소의 법궤 뚜껑, 속죄소에서 만나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대제사장이 일 년에 단 한번 백성의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고 제사를 드립니다.
어린 사무엘이 성막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성막에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나님은 사무엘은 부르셨는데, 성막에서 부르셨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는 성전에 나아가서 기도하던 중에 성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이렇게 성전에 나아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들이 아기 예수님을 안고 성전에 가셨습니다. 어린 아기 예수님이십니다. 그 때 나이 많은 시므온이란 랍비가 하나님의 아들 아기 예수님을 안아보게 되었습니다. 그 시므온이란 분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에게 성령이 임하셔서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는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가 어디에서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님을 만났습니까? 성전에서 만났습니다. 그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 인류의 구세주를 기다렸습니다.
바로 그 성전에서 안나라는 나이 많은 여선지자도 아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결혼하여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었고 팔십사세가 되었습니다. 그 분도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하면서 기다렸는데 마침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우리는 단순하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 인생을 의미 있게, 보람되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 자기 자신 이외의 그 누구도, 남편이나 아내조차도 여러분에게 삶의 의미를 줄 수가 없습니다. 의미 있는 삶이다, 보람 있는 삶이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가 찾아야 하지, 남이 가져다 줄 수가 없습니다. 이제 내려놓아야 할 것들은 내려놓고, 내어버려야 하는 것들은 정리하시고, 오로지 믿음 생활에만 정진하셔야 합니다. 세상의 것들이 다 버리고 갈 것들인데, 변치않고 닳아없어지지 않는 영원을 붙잡아야 하고, 영원한 진리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결코 개나 고양이 같은 짐승이 아닙니다. 인간에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전3:11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깊이 연구해보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감각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성전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사귐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는 사귐으로의 기도여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하나님은 생명과 활력의 중심에 계십니다. 기도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게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데, 하나님과 깊은 만남과 사귐으로 성숙하게 됩니다.
베다니에 살던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머물러 앉아 말씀을 받고 있던 시간, 젖 먹이가 엄마의 품에 안겨 있는 것처럼, 우린 모든 소욕을 내려놓고 주님 한 분으로 충분하여 그냥 기뻐서 주님을 부르고 앉아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나의 전부이십니다. 주님은 나의 생명이십니다. 주님은 나의 살고 죽는 이유가 되십니다. 그렇게 기도는 사귐의 기도여야 합니다. 기도는 일방적인 독백이 아니라, 서로 주고받는 대화입니다.
새벽은 참으로 기도하기 좋은 시간입니다. 매일의 시간의 십일조를 드린다는 의미도 있지만, 새벽 시간은 가장 집중력이 높은 시간이라고 합니다.
‘사이소 히로시’는 “아침형 인간”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처음 그 책을 보고는 “아침을 다스려라, 아침을 다스리는 자는 인생을 다스린다. 인생을 스스로 리드하고 싶다면 아침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이소 히로시는 그 책에서 사람의 맥박이라는 것이 오전 5시에 가장 빨라지는데, 사람의 맥박이 가장 빨라지는 아침 5시 경은 깊은 잠을 자기에는 적합한 시간이 아니라고 합니다. 잠이 깨는 5시에서 1시간 정도 지난 오전 6시부터 8시까지는 두뇌가 가장 명석해지는 시간인데, 이때의 집중력이나 판단력은 낮 시간의 3배에 달한다고 합니다. 아침 시간은 하루의 할 일을 생각하면서 기도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아침형 정도가 아니라, 새벽형의 사람들입니다.
막1:35에서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루의 시작을 기도로 열었습니다. 그리고 하루를 정리하면서 기도로 마치셨습니다.
시46:5에는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시57:8에서 “내 영광아 깰찌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찌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시18:6절에서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성전에서 기도하여야 하고, 하나님은 성전에서 기도하는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십니다.
우리는 성전에서 생명의 양식, 빛이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지난 주간의 말씀묵상수련회에서는 아주 짧은 시간에 요1:35-42 말씀을 가지고 훈련하였습니다. 내용은 세례요한이 자기 제자들 중의 두 사람과 함께 서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제자는 한 사람은 안드레라는 제자였으며, 요한복음에서 자기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관례로 보면 제자 요한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두 제자와 함께 있었는데, 예수님이 걸어가시는 것을 보시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루 전 날에는 예수님이 세례요한 자신에게 나아오는 것을 보면서 그의 제자들에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또 다시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의 두 제자 안드레와 요한이 예수님을 좇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몸을 돌이켜 두 사람이 자기를 좇아오는 것을 보고는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그 두 사람이 말했습니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랍비라는 말은 선생님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와 보라”고 허락하셨습니다. 두 사람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머물고 있는 곳에 가서 그 날 함께 거하였는데, 오후 4시 경이 되었습니다. 세례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의 한 사람은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였습니다.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가 말합니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메시아’라는 말은 아람어이고, 헬라어-그리스어로는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안드레가 형 시몬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 시몬을 보시면서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게바’라는 말은 아람어이고 그리스어로 번역하면서 ‘베드로’ 바위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묵상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시는 말씀, 그 말씀을 가지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훈련을 하는데, 아주 간단하게 간증하였습니다. 사람마다 다른 말씀을 받았습니다. 하나 같이 은혜가 되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같은 본문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받았는데, 다 같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남자 집사님이 하시는 말씀, 두 제자 안드레와 요한이 하루 종일 아침부터 오후 4시 경까지 예수님과 함께 있었는데, 자기는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시간이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직장 일에, 세상적인 친구들과, 업무에 매이고 인간관계에 매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하셨답니다. “나와 함께 있어야 한다”이 말씀은 그 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나와 함께 있으라”는 말씀은 그 분을 변화시키고, 성숙한 신앙으로 이끌어주고, 놀라운 은혜에 거하게 하실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12살 때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 예루살렘을 다녀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나사렛으로 돌아가는 길에 함께 있을 줄 알았던 어린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찾으러 다니다가 사흘 후에 성전에서 아들을 찾았습니다. 어린 예수님은 여러 선생님들 중에 앉아 있었습니다.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몰입하고 있었습니다. 주변에 듣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지혜와 대답하는 것을 들으면서 놀랍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부모가 아들을 보고 놀라며 어머니가 한 말씀하였습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그 때에 우리 주님은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의 진리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스펄젼목사님은 “내가 참석하지 않은 집회에 성령이 임하시면 나만 손해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배해야 합니다.
시5:7에 보면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의 집, 성전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하면 주의 풍성한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전, 성전으로 불러주시는데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힙 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예배합니다. 사랑이란 말은 인자라고 하는데, 히브리어의 ‘헤세드’라고 하여 ‘언약적인 사랑’, ‘불변의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니,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경외의 대상입니다. 성전은 성소와 지성소가 있습니다. 지성소는 법궤가 안치되어 있고, 거룩한 장소, 하나님이 이 지상에 발을 내리시는 장소입니다.
지성소안에는 법궤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법궤 뚜껑은 우리의 모든 죄를 속죄하시는 속죄소가 있습니다. 성전의 가장 중요한 장소가 바로 지성소입니다. 그런데 그런 지성소가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 구원하신 하나님이 경배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하셨습니다. 경외하는 것은 예배자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뜻입니다. 경외라는 말은 ‘건전한 두려움’,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예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은총을 약속하셨습니다.
어린 손자들이 할아버지에게 와서 인사하고 신나게 놀고, 자기들 집으로 돌아가면 할아버지가 용돈을 쥐어줍니다. 손자들이 4명이 명절에 다녀가면 돈 10,000원을 주는데, 4만원이 나갑니다. 할아버지가 용돈 주면서 억지로 주고 아까워하는 할아버지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잠1:7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지식과 지혜를 주십니다.
잠19:23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당하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잘 믿으면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십니다. 만족하게 합니다.
시128:1-4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 올라가면서 기뻐서 찬송하였습니다. 시120편부터 134편까지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들입니다. 그들은 감격 속에 성전에 올라가면서 찬송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려고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찬송은 그 어떤 제사보다 귀한 제사입니다.
히13:15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하셨습니다.
시69:30-31에서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할 때에 이것은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세계적인 암전문의사가 있습니다. 김의신박사입니다. 경건한 크리스천입니다. 텍사스대학교 MD 앤더슨 암센터 종신교수요,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요, 텍사스대학교 의과대학 내과 교수요, 경의대학교 의학 전문대학원 석학교수로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의대를 나오고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교 대학원 박사이십니다.
우리 몸에는 암세포를 잡아먹는 대표적인 면역세표가 있는데 자연살해세포(NK, Natural Killer Cell)가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많으면 암 치료가 되고 암에도 잘 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러 사람을 대상으로 이 세포의 수치를 조사하였는데, 항상 웃고 즐겁게 사는 사람에게서는 수치가 높게 나타났습니다. 교회 성가대 찬양대원들은 일반인보다 그 수치가 1000배가 높게 나와 김박사도 놀랐다고 합니다. 기쁨 속에서 노래하고, 감사기도하고, 인생을 밝게 사는 사람들은 암에 대한 저항력이 높다고 합니다. 찬양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내가 먼저 기쁘지 않는데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게 할 수 있습니까? 찬양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찬송 크게 하다가 목을 버렸다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크게 부르지 않는데, 감격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감격속에 찬송이 살아넘치는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집에서 영원히 살아야 합니다.
시23:6에서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헨리 나우엔박사가 공동체란 “결코 함께 살고 싶지 않은 사람과 언제나 같이 사는 곳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싫어 버리지 않고 함께 살자고 불러주십니다. 하나님이 나와 같이 표리부동하고 배운망덕하고 형편없는 사람과 함께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싫어 버리지 않고, 불러주시고 함께 살아가자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시84:10에는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의 궁정에서의 하루가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악인의 장막에 거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성전에 문지기로 사는 것이 더 나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본문 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고 하셨습니다.
저는 지난주간에 여수에서 열린 장신대총동문회 수련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첫날 총회장의 설교도 좋았고, 주제 특강도 좋았고, 장신대 임성빈교수의 강의로 정말 귀담아 들었습니다. 그런데 호텔도 좋았습니다. 히든베이 호텔, 바닷가에 지었는데, 10층의 객실에서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바다는 환상적이었습니다. 섬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자리 잡았고, 잔잔한 바다가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방이 넓고 모든 시설이 잘 갖춰진 특급호텔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밤 자고 나올 때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왔습니다. 그곳은 내가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갈 곳은 이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본향입니다. 이 땅의 수고를 그치고 주님이 오라고 하실 때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우리 주님이 예비해놓으신 새 하늘과 새 땅,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정한 것과 같은 새 예루살렘 성에 다 들어가셔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이곳 예배당을 들어올 때면 감사와 감격으로 지금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오지만, 영원한 하늘나라, 내 아버지의 집에서 영원히 살겠다는 그런 마음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에 하나님의 성전에서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예배하겠다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5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하나님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께 찬양하는 특권을 상실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성전에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성전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전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사귐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성전에서 생명의 양식, 빛이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배해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하나님 집에서 영원히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시 27:1-6 / 김광일목사(벧엘교회)
플로이드 맥클랑(Floyd McClung)은 ‘제자도의 본질’이라는 저서에서 시몬 자오(Simon Zhao)라는 중국 그리스도인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는 ‘백 투 예루살렘’ 비전을 품고 1940년 소그룹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한 도보여행을 시작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비전에 동참한 시몬과 25명으로 구성된 팀은 중국의 변방 북서지역을 향해 출발했고 1948년 마침내 중국의 가장 서쪽 도시 카슈가르에서 여장을 풀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국경을 넘으려던 찰나에 공산주의 철권통치가 시작되었고 국경은 폐쇄 되었습니다. 자오와 그의 팀은 국경을 건너려는 반역자로 체포되어 감금되었습니다. 하지만 절망스러운 상황에도 자오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예루살렘으로 갈 수는 없지만 그 비전을 완수할 중국 성도들을 일으켜 주옵소서.” 지옥과 같은 감방생활에서 그는 사명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두려움을 극복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는 증거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다른 죄수들이 살인적 추위 속에 밖에 그를 세워두고 하나님이 도와주실지 보라며 야유를 하였습니다. 자오는 간절히 기도했고 갑자기 온 몸에 온기가 돌았습니다. 죄수들은 그의 몸에서 김이 나고 발주위에서 눈이 녹는 것을 보고 두려움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자오는 복역한지 40년이 지난 1988년에 석방되었습니다. 72세가 된 그는 작은 방을 찾아 기도하던 중에 한 성도와 접촉하게 되었고 카슈카르의 성도들 사이에 소문이 퍼졌습니다. ‘믿음 때문에 40년을 감옥에서 살다가 나온 한 형제가 있다’는 소식이 전 중국 지하교회에 전해졌습니다. 중국 지하교회 대표단이 자오를 찾아와 청년들에게 그가 겪은 이야기를 전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자오는 중국 가정교회를 방문하여 성령의 기름 부으시는 능력으로 ‘백 투 예루살렘’의 비전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은 중국의 젊은이들 가슴에 복음의 열정을 불붙게 하시고 복음의 서진에서 만날 무슬림과 힌두인과 불교인들에 관심을 집중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2001년 12월 7일 자오는 세상을 떠났지만 하나님은 눈을 감기까지 13년이라는 사역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비록 예루살렘으로 가지 못하였지만 그로 인하여 수많은 중국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가지고 타 종교인들에게 다가가는 비전에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고 감당했던 시몬 자오의 사역은 변방의 촌락 몇 개를 찾아가는 수준이 아니라 놀라운 결실을 맺는 사역이 되었습니다.
시편 27편은 ‘여호와는’의 구절로 시작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라는 1인칭 단수가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1절부터 6절까지 무려 21번씩이나 반복됩니다. 마지막 14절까지는 40번 반복됩니다. 대적에 쫓겨 신음하고 있는 나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의 초점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 이내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말 것입니다. 두려움은 마음을 약하게 하고, 평안을 빼앗아가며, 불안을 가중시키며 믿음까지도 무너뜨립니다.
본문은 다윗의 신앙고백입니다. 자신을 에워싼 걱정과 근심, 두려움의 요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도 두렵지 않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로 두렵지 않게 하였습니까? 모든 상황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기에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나의 소망이시니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존 낙스(John Knox)가 세상을 떠날 때 동지들이 물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까?” 질문의 뜻은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생에 소망이 있습니까? 교회개혁에 소망이 있습니까? 스코틀랜드의 미래에 소망이 있습니까?” 한때 통치자들의 박해 속에서도 지치지 않고 교회개혁을 단행했던 낙스였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어찌나 우렁찼던지 설교할 때는 나무둥지가 흔들리는 것 같다고 했던 존 낙스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떠날 때는 힘이 없었습니다. 한마디의 말도 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소망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낙스는 숨을 거두면서 힘이 없어 말은 못하고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습니다. 그 뜻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있다.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께서 하신다. 하나님을 의지하라.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소망은 하나님께 있다!”
본문 1절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기의 빛은 하나님이 소망이 된다는 뜻입니다. 다윗의 삶은 공포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랫동안 공포와 두려움으로 떨게 되면 절망을 하게 됩니다. 다윗도 인간인지라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다윗에게 하나님이 빛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다윗의 궁극적 소망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실망할 수밖에 없고 자포자기할 수밖에 없던 다윗의 삶에 하나님이 빛으로 다가 오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삶을 덮고 있는 어두움을 몰아내셨습니다. 다윗의 어두운 내면과 캄캄한 삶의 현장을 비춰주셨습니다. 결국 두려움이 사라진 다윗에게 소망이 생겼습니다. 절망 속에서도 살아야 할 이유를 가졌습니다. 그러한 다윗에게 무엇이 두렵습니까? 오히려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절망 중에도 하나님만 바라보면 소망이 생깁니다. 생기가 솟아오르고 밝은 빛을 향해 걸어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나의 구원이시니
19세기 미국의 부흥사 무디(D. L. Moody)가 어느 주일, 교회 입구에서 실랑이가 벌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거지 소년이 교회에 들어가겠다고 떼를 쓰고 있었고 안내를 맡은 직분자들 들어가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무디가 소년에게 다가서자 그들이 만류하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얘는 안됩니다. 예배분위기가 훼손돼요. 들여보낼 수 없어요.” 그러나 무디는 거지 소년의 어깨를 감싸 안고 교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의아해하는 성도들을 바라보며 무디는 강대상 위에까지 소년을 데리고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설교시간에 무디는 소년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이 소년은 입장불가였습니다. 그러나 저와 함께 오니까 성전안만 아니라 이 강대상 위에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죄인된 인간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남루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러한 우리들을 안고 하나님의 보좌 앞까지 가셨습니다. 소년이 입은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날 성도들은 평생 동안 잊을 수 없는 구원에 대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을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사울의 군사가 자기를 추격하고 포위해도 하나님은 항상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이 구원이심을 확실하게 체험하였습니다. 수많은 사울의 군대가 포위하고 에워싼다 해도 결코 두렵지 않다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구원이심을 믿으면 평안합니다. 안연합니다. 다윗의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언제나 구원이 되셨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선으로 역사해 주셨습니다. 절박한 상황에도 구원의 역사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걱정이 없어집니다.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오히려 담대함과 용기가 충만하여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하실 것입니다.
셋째로 나의 능력이시니
백기현(白琦鉉) 교수는 국립공주대학 음악교육과 교수입니다. 창작오페라 이순신을 작곡하여 화관문화훈장을 받았습니다. 백 교수가 어릴 적 돌을 막 지났을 때 8살 고모의 등에 업혀 놀다가 함께 넘어지면서 척추를 다쳐 그만 곱사등이 되었습니다. 앞가슴이 나오고 키도 자라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 55년이 지났습니다. 어느 날 부흥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던 가운데 하나님이 그의 귀에 대고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등을 내가 편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의 몸을 어루만져주셨습니다. 5일 동안 방에 잡아두시고는 온 몸을 구석구석 만져주시고 고쳐주셨습니다. 그래서 정상인이 되어 반듯한 모습으로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놀라운 기적을 경험한 백교수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게 되었고 치료의 옵션으로 주신 “내가 너를 치유하였다. 지금부터 나를 찬양하여라 그리고 널리 알리라”는 말씀대로 6년 동안 700회가 넘게 하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감격 속에 간증하는 그의 모습은 보는 이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전율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능력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55년 동안 힘든 고통 속에 있었으나 능력이신 하나님께서 그를 치유하시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하셨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하나님의 능력은 어떠한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능력입니다. 아무리 사탄의 진영이 견고하다고 하여도 하나님이 명령하시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어떠한 궤변, 어떠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이론도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골짜기에 흩어진 마른 뼈다귀를 보신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 뼈들이 살겠느냐?” 물으셨습니다. 머뭇거리는 에스겔을 통해 마른 뼈들에게 생기가 들어가도록 명령 하셨습니다. 그 즉시 힘줄이 생겨나고 살이 오르며 뼈들이 여기저기 모이더니 큰 군대가 되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능력을 통하여 우리도 일으켜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능력 그 자체이십니다.
4세기경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이라는 설교가가 있었습니다. 정부에 의해 지위를 박탈당하고 설교도 하지 못하는 핍박을 당했을 때 그는 스스로에게 자문자답한 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죽음일까? 그러나 그리스도가 나의 생명이고 죽음까지도 유익할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귀양 가는 것일까? 두렵기는 하다. 그러나 이 지구와 지구상의 어디에 가도 하나님은 거기 계시지 않는가? 재물을 잃는 것인가? 그러나 나는 세상에 빈손으로 왔고 갈 때도 빈손으로 가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세상에서 무섭다고 하는 것이 나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다. 또 세상의 좋은 것도 나는 그저 웃어넘길 것뿐이다. 나는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재물을 사모하지 않으며 죽음에 위축되지도 않겠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주장하시고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영원까지도 주장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신앙은 아닙니까? 무엇이든 누구든 두려워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두려움가운데 의기소침한 것은 아닙니까? 마귀는 끊임없이 두려움을 가지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틈만 있으면 마음속에 두려움을 퍼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부디 다윗처럼 하나님을 후원자로 삼고 두려움을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확실한 신앙고백입니다. 다윗처럼 나의 소망이신 하나님, 나의 구원이신 하나님, 나의 능력이신 하나님을 분명히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베푸시는 담대함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의 얼굴을 찾으라
시 27:1-9
1.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살다가 제가 처음으로 삶의 대하여, 존재에 대하여 질문을 시작한 적이 있습니다. 스무살 때 였습니다. 폐병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대학교 1학년 신입생들을 위한 결핵검진 엑스레이 촬영을 했는데 제가 결핵으로 판명이 났습니다. 믿어지지 않았지만 사실이었습니다.
손바닥 한 움큼 되는 알약을 꿀꺽 꿀꺽 삼키면서 제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는 삶의 의지를 보았습니다. 약이 얼마나 독하던지 소변 색깔이 변하는 것을 보면서 “아마 나는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느끼면서 한편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왜 살지...꼭 살아야 하나, 내가 존재함으로 이 세상이 무엇이 달라지지..나는 의미 있는 존재인가..”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일컬어 근본적인 질문이라고 부릅니다. 누구나 한번쯤은 살가면서 던지는 질문들을 저도 스므살 나이 때 했습니다.
“나는 왜 공부하지 ”
“나는 이 사업은 왜 하지, 꼭 이 사업을 해야 하는 가, 내가 이 사업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인가? ”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들은 내가 무슨 일을 하던지 곁길로 가다가도 아니면 방황하다가도 다시 돌아와 바른 길을 가도록 돕습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큰 부자라고 손꼽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잘 아시는 미국의 록펠러(John Davison Rockfeller 1839~1937) 입니다. 그는 부자였지만 미국사람들이 가장 혐오하는 부자였습니다. 그의 나이 53세 신체적인 위기를 맞이합니다. 머리칼과 눈썹까지 다 빠지는 탈모증에 걸렸고 소화장애로 하루에 우유 한 잔에 과자 몇 조각 외에는 먹을 수 없게까지 이르렀습니다.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신문기자들은 “록펠러 죽다”는 기사를 써놓고 보도할 날을 기다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새벽녘에 응접실 탁자 위에 놓인 성경책을 펼쳤습니다. 눈에 들어온 구절이 있었는데 누가복음 6장 38절이었습니다.
“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이 말씀이 록펠러의 영혼을 터치했습니다. 자신의 사업을 뒤돌아봤습니다.
“나는 왜 사업하지?”
그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으기만 하였지 주는 것을 몰랐음을 깨달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깨달았을 뿐인데 신체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에 변화가 왔습니다. 그는 ‘록펠러 재단’을 만들고 모으기만 하던 삶에서 나누고 주는 삶으로 삶의 방향이 바뀌어졌습니다. 그는 무려 98세까지 살았습니다.
록펠러는 사업의 이유를 성경에서 발견하고 자신의 사업을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시켰던 것입니다. 그 때 변화가 일어났고 그는 혐오스러운 부자에서 유명한 부자가 됐습니다.
이런 근본적인 질문들은 때때로 우리의 삶이 무기력해지고 헝클어질때 다시 한 번 방향성을 찾고 제대로 가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2. 고린도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중 가장 큰 것은 분파의 문제였습니다. 겉으로 보면 하나인데 안으로 들어가 보면 네 분파가 있었습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하필이면 그 파의 이름이 인물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서 그 파가 나누어지게 된 원인이 인물을 중심으로 한 그 어떤 것이란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분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고전1:13-14입니다.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14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그러면서 바울은 그 이후로 계속해서 세례이야기를 합니다. 이런 것은 고린도교회의 분파의 원인과 관련해서 “누가 세례가 문제를 주었는가” 가 문제가 되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아마도 고린도교회는 몇몇 당파의 지도자들이 서로 다투어 가며 자기파의 사람들을 많이 만들기 위해 세례를 베풀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원래 세례는 누구에게 받았는가를 따져서 당파를 만드는 도구가 될 수 없는데 고린도교회의 당파를 주도했던 인물들은 세례를 이용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고린도교회는 여러개의 분파로 나뉘었고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 때 바울은 근본적인 문제를 들고 나옵니다.
자신의 사명이 세례를 베푸는데 있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고린도전서1:17입니다.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맞죠. 바울은 세례의 중요하지 않다거나 필요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자신의 존재의 근본적인 목적이 세례를 베푸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존재하는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헝클어지고 복잡해 졌을 때 자신의 사명과 관련하여 근본적인 문제를 제시함으로써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냐, 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이냐....“
3. 예수님은 30세 까지는 나사렛이서 목수의 삶을 사셨습니다. 가족과 함께 오순도순 사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시기 전에 먼저 요단강으로 가셔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나가셔서 40일 금식기도를 하는 중 마귀에게 3가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말씀의 선포와 함께 예수님께서 제일먼저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제자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안드레, 베드로, 그리고 야고보의 형제들....
그리고 성경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하여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4:23입니다.
“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가르치시는 일,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는 일, 그리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시는 일, 이 세 가지는 예수님의 3대 사역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도 예수님을 증거하는 교회가 힘써야 할 3가지 사역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교회는 이런 것입니다” 가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는 교회가 무엇이냐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계속하는 교회가 되려면 교회 안에서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고, 병을 고치는 사명을 간직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어떤 프로그램을 해야할지 몰라 복잡해 졌다가도 “교회가 무엇하는 곳이지” 라고 근본적인 질문을 묻고 금방 마태복음 4:23로 달려가서 예수님의 하시던 일을 확인하고 그 일을 계속할 때 교회가 교회다워 질것입니다.
4. 우리가 살면서 어려움을 당할 때에도 이런 근본적인 질문들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시편 27편을 읽었습니다. 앞부분에 아무 설명 없이 “다윗의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1절을 보시겠습니다.
“1 여호와는 나와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 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
1절 한 부분만 보면 다윗이 승리의 담대함으로 가득차 있음을 봅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자신을 두려워하게 만들 수 없다는 확신입니다. 그런데 2절, 3절로 이어지면서 시편 27편의 배경으로 다윗은 매우 큰 위기에 처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다윗이 원수와 대적들이 다윗을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다윗은 그의 평생에 대적이 많았습니다.
그러한 대적들이 생기게 된 것은 10대 소년 다윗이 거인 장수 골리앗을 이긴 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백성들의 다윗에 대한 찬사는 잠간이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사울임금은 대적자가 되었고 10년이 넘도록 다윗의 뒤를 좇으며 다윗의 목숨을 위협했습니다. 다윗은 도망을 다니면서 여러 지역에서 위기를 넘겼지만 그곳에서 많은 대적자들을 만났고 목숨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나중에는 압살롬 아들까지 대적이 되어 아버지 다윗을 내쫓았습니다.
오늘 시편 27편이 구체적으로 어느 때 지은 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언제 지은시인가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대적들을 만났을 때 어떻게 이겼는지, 어떻게 위기들을 극복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위기를 극복하는 태도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신앙적으로 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위기를 만나죠. 그리고 그 위기로부터 두려움을 느낍니다. 두려움을 느끼면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을 잃어 버립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일에 대한 우선 순위를 잃어버리고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귀가 얇아집니다.
그러나 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먼저 4절을 보시겠습니다.
“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
다윗이 지금까지 오랫동안 바라는 한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집, 하나님의 성전에 거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다윗은 대적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하나님의 성전에 머물 수 있게 해 달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8절을 보시겠습니다.
“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다” 여러분 뜻밖이지 않습니까?
대적과 원수가 나를 향해 공격하고 삶의 위협을 느끼면 보통은 사람들로부터 위로를 구하고,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가 많습니다. 정신을 잃어버리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맥을 놓고 있을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찾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뜻밖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야 말로 위기를 넘기는 참된 비결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어른들이 말씀하시길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하십니다. 호랑이가 물어가는 어려움을 만났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 살아날 것입니다.
다윗은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상대하는 것이 근본적인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문제와 위기가 있을 때 문제와 위기,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눈을 떼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것이 문제와 위기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빛이십니다.
여러분의 오늘 문제가 무엇입니까?
자녀문제입니까? 비전의 문제입니까? 건강의 문제입니까? 노후의 문제입니까?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입니다. 이런 축복이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전히 태연한 마음의 태도와 여유
시 27:1-6 / 송기성목사(정동교회)
“아 하나님의 은혜로”
채근담에 우리 마음의 생각과 태도의 중요성에 관한 이런 글이 있습니다. “길고 짧음은 생각에서 온 것이며, 넓고 좁음은 한 치 마음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마음이 한가한 자는 하루가 천 년보다 아득하고, 뜻이 넓은 자는 좁은 방도 하늘과 땅 사이처럼 넓다.”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말이 맞습니다. 마음의 생각과 태도에 따라 불안한 상황에서도 평안할 수 있는가 하면 평안한 상황에서도 불안해 할 수 있습니다. 다윗과 사울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습니다. 다윗은 인생의 극심한 환난 가운데서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사울은 막강한 권세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불안과 불면증으로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것은 불신과 불안입니다. 경기침체와 청년실업이 심각한 때에 촛불시위와 대통령 탄핵 소추 등으로 인해 국가 안보는 물론 자유민주주의 체제마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절박한 위기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이처럼 절박한 위기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태연한 마음의 태도와 여유를 가질 수 있겠는지요? 다윗의 시편 27편 말씀을 통해서 그 해답과 해법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1.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마음의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시편을 다윗이 왕권을 받기 이전 곧 사울의 살해 위협을 당하던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고, 또 다른 학자들은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킨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다윗이 그를 대적하는 악인들과 원수들로 인하여, 그리고 군대와 전쟁으로 인하여 두려움과 무서움이 극심한 때에 이 시를 지어 기도하며 찬송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감히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빛, 나의 구원, 내 생명의 능력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여기서 ‘내 생명의 능력’ 이란 ‘내 생명의 안전한 피난처’(시18:2;28:8;31:21) 라는 뜻입니다. 대적들의 공격과 위협으로 인한 불안과 두려움이 흑암처럼 닥쳐와도 하나님께서 ‘흑암을 밝혀주는 등불’(삼하22:29)이 되어 구원해 주시고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다윗은 여전히 태연한 마음의 태도와 여유로 모든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는 이미 과거에 악인들 곧 그의 대적들과 원수들이 무서운 맹수처럼 그의 살을 먹으려고 그에게로 왔으나 실족하여 넘어진 것을 체험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앞으로도 군대가 그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그를 차려할지라도 여전히 태연할 것이라고 용기 있는 마음의 태도와 여유를 보여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혼돈하며, 불안하고 위험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며, 내 생명의 능력이시라고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며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서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고 여전히 태연한 마음의 태도와 여유를 갖게 될 줄 믿습니다.
선교사 리빙스턴(1813~1873)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아프리카의 한 지역으로 가고 있던 그는 큰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목적지를 가기 위해선 음부루마 부족의 땅을 지나야 했는데, 그 부족은 그에게 적대적이어서 공격을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밤중에 몰래 건너야 할지, 아니면 먼 길로 돌아가야 할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포기해야 할지를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결정을 내리지 못한 그는 근처에서 하루 밤을 묶기로 하고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성경을 읽었습니다. 묵상 중 마태복음 28장 18절부터 20절까지를 읽은 그는 그 날 밤 일기에 다음과 같은 글을 적었습니다. “1856년 1월 14일, 주님의 말씀으로 아주 큰 불안이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내일 당당히 음부루마 부족의 땅을 지나 선교지로 갈 것이다. 나는 지금 매우 평안하다. 주님 감사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면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분부하신 예수님께서 주신 약속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는 말씀입니다. 리빙스턴은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성경을 꺼내어 손가락으로 이 말씀을 가리키면서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반드시 그의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나의 주님은 그 약속의 말씀대로 반드시 나와 함께 하신다!” 라며 용기를 내고 두려움을 떨쳐버렸다고 합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고 모든 족속에게 가라고 명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끝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역경과 위기 상황 중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함으로써 확고부동하고 요지부동한 신앙으로 마음의 불안을 극복하고 여전히 태연한 마음의 태도와 여유를 갖게 되시기를 우리의 빛과 구원과 생명의 능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니다.
2. 평생의 소원을 구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사모해야 합니다.
시편 27편은 일반적으로 ‘비탄시’로 알려져 있지만 ‘기도시’, ‘찬송시’ 또는 ‘찬송의 기도시’(A Prayer of Praise)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다윗은 탄식할 수밖에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낙심하거나 탄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태연한 마음의 태도와 여유를 가졌습니다. 그가 감히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평생의 소원이 아주 간단했으며 오직 하나님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바라는 것이 단 한 가지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곧 그가 평생에 하나님의 집에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소원은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평생의 소원은 단 하나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성막이나 성전 안에 살기를 원한 것이라기보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소원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그토록 그런 영적인 소원을 품고 하나님께 간구한 데에는 세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사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란 하나님의 ‘거룩하심’(시111:9)과 ‘선하심’(슥9:17)과 지고한 ‘사랑’(요일4:9,10) 등을 뜻합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아 선한 양심으로(벧전3:16), 선한 말을 하며(엡4:29), 선한 일에 힘쓰는 생활을(롬12:17)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환난 날에 하나님께서 그를 하나님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실 것을 기대하며 하나님의 보호를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의 머리가 그를 둘러싼 그의 원수들 위에 들리리라는 승리를 기대하며 하나님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고 노래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환난 중에서라도 그 평생의 소원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의 집에 거하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사모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승리를 거두고 즐거운 제사와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까지 여전히 태연한 마음의 태도와 여유를 갖게 될 줄 믿습니다.
1997년부터 2006년 12월 31일까지 제7대 유엔사무총장을 지낸 코피 아타 아난(Kofi Atta Annan, 1938.4.8.~)의 이야기입니다. 1938년 가나 판티족 세습 족장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감리교 고등학교에 다닌 콥틱 기독교인으로서 스탠포드대학교, MIT대학교를 나온 가나의 정치인, 경제학자, 외교관으로서 2001년에는 유엔과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이처럼 위대한 인물이 되어 위대한 역사의 주인공이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었습니다.
그는 애틀랜타 조지아의 한 야구장 안에서 구두를 닦는 흑인 소년이었습니다. 그는 야구 선수들이 친 공이 하늘 높이 오를 때마다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야구 경기가 끝나고 사람들이 퇴장하고 있을 때 구두를 닦으러 온 야구 해설가에게 물었습니다. “아저씨, 야구공은 어떻게 저리도 시원한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을 날아가는 거예요? 너무 신기해요.” “그럼 그럴 만하지. 야구공을 자세히 살펴보렴, 온통 실로 꿰맨 상처로 가득하단다. 바로 그 상처 때문에 보통 공보다 3.5배나 더 높이 더 멀리 날아간단다. 이제 알았니?”
야구공이 밋밋한 공보다 더 높이 더 멀리 날아가는 비밀은 바로 108번의 찢어진 상처가 있고, 그 상처를 꿰매었기 때문입니다.
구두 닦기 흑인 소년, 그는 밝고 명량했지만 때때로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는 자기 또래의 아이들을 보면 마음의 상처를 달래기 힘들었습니다. “나는 왜 가난하게 태어난 거지? 언제쯤 이 가난을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나 야구 해설가의 말을 들은 후 그는 더 이상 자신의 불우한 환경을 비관하거나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자신의 상처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희망을 품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소망과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세상에 상처 입지 않은 진주조개는 없습니다. 상처는 결코 부끄러운 자국이 아니라 그 인생을 너 높고 더 멀리 날아오르게 하는 성장과 축복의 자국이 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103편에 자기 영혼을 향하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라고 하면서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103:1~5) 라며 찬송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우리의 모든 병을 고치시며, 우리의 생명을 파멸에서 건져 주시고 인자와 긍휼로 복을 주시며, 좋은 것으로 우리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독수리 같은 젊음과 튼튼함을 주시는 하나님은 마땅히 우리가 드리는 즐거운 제사와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소원 곧 하나님의 집에 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사모했던 다윗처럼 평생의 소원을 하나님께 두시고 그것을 하나님께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궁극적인 소원과 더불어 좋은 것으로 그 밖의 소원도 만족하게 해 주시는 하나님께 즐거운 제사를 드리며 헌신하고 찬송으로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인 올레 불(Ole Bull)이 파리에서 연주회를 할 때였습니다. 연주 중 갑자기 바이올린의 A현이 끊어졌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당황했지만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세 줄만으로 남은 파트를 완벽하게 연주해 냈습니다. 이후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바이올린 연주는 인생과 같습니다. 줄 하나가 끊어지면 나머지 세 줄로 끝까지 연주해야 하지요.”
놀랄 만한 일에도 침착하여 태연하게 대처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때에도 여전히 태연한 마음의 태도와 여유를 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그 인생의 연주를 결코 포기하거나 망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영향도 끼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빛과 구원과 생명의 능력이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구원의 확신을 갖고 마음의 두려움을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평생의 소원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집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며 찬송하였던 다윗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애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것
시 27:1-6 / 김광일목사
플로이드 맥클랑(Floyd McClung)의 ‘제자도의 본질 (Follow)’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시몬 자오(Simon Zhao)라는 중국 그리스도인이 1940년 ‘백 투 예루살렘’비전을 품고 예루살렘으로 향한 도보여행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동참했습니다. 25명으로 구성된 시몬과 일행은 중국의 변방 북서지역을 향해 출발했고, 1948년 중국 국경을 넘으려던 찰나에 공산주의 철권통치가 시작되었고 국경은 폐쇄되었습니다. 시몬과 일행은 국경을 건너려는 반역자로 체포되어 감옥에 감금되었습니다. 죽음의 수용소나 마찬가지였던 감옥에서 배식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악취가 나는 음식이 주어졌습니다. 하루 14시간씩 중노동에 시달렸고. 찌는 듯한 더위와 혹독한 추위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매일 고문이 가해져 6개월 안에 대다수가 사망하였습니다. 시몬의 일행도 감옥에서 죽고 시몬만 살아남았습니다. 이렇듯 낙심할만한 상황에도 시몬은 여전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예루살렘으로 갈 수는 없지만 비전을 완수할 중국의 성도들을 일으켜 주소서.” 사명을 위한 한 가지 소원으로 기도하였습니다. 한번은 죄수들이 맹추위 가운데 시몬을 밖에 세워두고 하나님이 도와주시는가 보자고 했습니다. 시몬이 기도하자 갑자기 몸에 온기가 돌았습니다. 죄수들은 그의 몸에서 김이 나고 주위의 눈이 녹는 것을 보고 두려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한번은 혹독한 매질을 당하여 두개골에 금이 갔습니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상태에서 주님이 “내 아들아.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널 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식을 되찾은 시몬이 맞은 부분을 보았더니 피는 말라 붙었고 상처들이 기적적으로 치유되어 있었습니다. 복역한 지 40년이 지나 풀려났지만 72세의 병든 노구가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하나님께 바라는 한 가지를 실천했습니다. 작은 방을 찾아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중국의 신자들을 만났습니다. 그 후 믿음 때문에 감옥에서 40년을 살다가 나온 형제가 왔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소식을 들은 중국 그리스도인들이 회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교인들이 시몬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감옥에 있는 동안 하나님은 중국에 놀라운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수 만명의 젊은이들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 세계의 추수 밭에서 중국의 역할에 대한 열정에 당신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당신이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결국 주저하던 시몬은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고, 그때부터 다니며 간증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시는 능력으로 복음화에 대한 비전을 전하였습니다. 2001년 12월 7일 시몬 자오는 세상을 떠났지만 하나님은 13년이라는 사역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비록 예루살렘으로 가지 못하였지만 중국 그리스도인들이 무슬림과 힌두교와 불교인들에게 다가서는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사역은 변방의 촌락 몇 개를 찾아가는 수준이 아니었으며 놀라운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바라며 소원하느냐가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주었습니다.
시편 27편은 다윗이 인본주의 세력과 악한 세력의 부당한 도전 가운데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함으로 위기를 극복하리라는 소원에 대하여 기록한 시입니다. 우리는 본 시를 통해 무수한 대적들과의 갈등과 대립 가운데서 다윗이 어떻게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었습니다.
본문 4절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여기의 ‘한 가지 일’의 ‘아하트’는 목적어에 해당하는 표현인데 ‘오직 한 가지만’이라는 뜻입니다. 평생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선하심, 자애, 긍휼을 가리킵니다. 결국 다윗의 한 가지 소원은 하나님과 끊임없는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바라는 소원은 무엇입니까? 대부분 당장의 유익과 관련된 재물을 소유하는 것, 명예를 얻는 것, 권력을 갖는 것, 장수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것들을 하나님께 구하면서 정작 하나님은 안중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구하는 것이 전부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소원은 하나님과의 영속적인 교제를 누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머무는 것이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다같이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를 부릅니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 부대가 되게 하여 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다윗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하나님께 바라는 소원, 그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태연하리로다
찬송가 382장 ‘너 근심 걱정 말아라’는 실비아 마틴(Civilla Durfee Martin)이 작시하고 월터 스틸맨 마틴(Walter Stillman Martin) 목사가 작곡하였습니다. 마틴 목사는 쇠약한 부인의 병상을 떠날 수 없어 약속된 교회의 설교를 거절하고자 했습니다. 전화를 걸려는데 아홉 살 난 아들이 “아빠! 하나님이 아빠가 오늘 밤 그 교회에서 설교하시길 원하신다면 아빠가 안 계시는 동안 하나님이 엄마를 돌보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이 말을 들은 마틴은 하나님께 맡기고 흔쾌히 설교를 하러 떠났습니다. 그 순간 병상에 누워있던 실비아는 어린 아들의 말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렇다! 근심, 걱정할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돌보시는데!” 영감을 얻은 그녀는 병상에 누운 채, 시를 써 내려갔습니다. 아내가 염려되어 설교를 마치고 급히 돌아온 마틴 목사는 머리맡에 시를 써 놓고 태연하게 잠들어 있는 아내를 보고 올갠으로 달려가 시를 보며 작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작곡을 마치고 그날 밤 가족들은 병상에 둘러앉아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주시리'를 부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본문 3절입니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여기의 ‘태연하리로다’의 원어는 ‘보테아흐’인데 ‘안전함을 확신하다’라는 의미입니다. 특히 ‘여전히’로 번역된 ‘빼조트’를 사용함으로 다윗은 전쟁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평안함을 주시며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도움에 대하여 강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삶의 위기가 닥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위기를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가운데 기다려야 합니다. 더 담대해야 합니다. 진정한 성도의 여부는 위기에 처하였을 때의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모름지기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위기의 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태연한 자들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해 태연한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사모하리로다
프란체스코(Francesco d’Assisi)는 수도회를 창설하여 쓰러져 가는 이탈리아의 종교를 회복시켰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운 성자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청빈한 생활방식과 사랑의 실천을 본받기 원하며 수도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프란체스코가 선한 일을 하는데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프란체스코는 온 삶을 통해 예수를 만나고 예수만 사모하였습니다. 그의 제자는 프란체스코에 대해 “걸을 때나 앉아있을 때, 집에 있을 때나 나가 있을 때, 일할 때나 쉴 때나 언제나 하나님께 마음과 몸뿐 아니라 시간까지 바치며 사모하는 것을 보았다”라고 말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하루 중 기도할 시간을 따로 정해두고 ‘하나님과의 약속’이라고 말하면서 한 번도 지키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심각한 병이 있을 때에도 기도를 거르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사모하는 일에 열심을 다한 그는 주님의 흔적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보고(Borgo) 마을을 지나 여행할 때 프란체스코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옷이라도 만져보기 위해 사방에서 모여들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프란체스코는 기도에 열중해 있던 나머지 그곳을 지나쳐왔음도 알지 못한 채 언제 도착하느냐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주님을 사모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체면이나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만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4절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여기의 ‘사모하는’은 원어로 ‘울레박케르다’인데 ‘묻다, 문의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묻는 행위속에 하나님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집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실행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그리고 묵상했습니다. 심령이 말씀으로 새롭게 되어지기를 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전에서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기를 소원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묵상의 복을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생활의 분주함에 쫓겨 하나님을 향한 묵상과 사모함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일을 더욱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말씀 듣는 일에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영혼에 불을 붙여야 합니다. 진리를 사모할 때 하나님은 커지고 나는 점점 작아지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찬송하리로다
19세기의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리었습니다. 영국에 밤이 오더라도 영국의 식민지 중 한 곳 이상은 낮이기에 이런 별명이 붙은 것입니다. 빅토리아 시대는 1837년부터 1901년까지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이 통치하던 64년의 기간이었는데 전무후무한 역사상 가장 화려한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어느 날 빅토리아 여왕이 헨델의 ‘메시아’ 연주회에 참석했습니다. 함께 수행하던 시녀가 말합니다. “폐하께서는 대영 제국의 여왕이시므로 신분을 생각하셔서 연주 중에 백성들이 일어서더라도 그대로 앉아 계셔야 합니다.” 여왕은 그 말을 기억하고 마지막 곡 "할렐루야"의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선율 속에도 앉아서 감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곡의 클라이막스인 “왕의 왕, 주의 주, 할렐루야 할렐루야” 라는 대목에 이르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왕관을 벗어 두 손으로 받들고 하나님을 찬송하였다고 합니다.
본문 6절입니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여기의 ‘찬송하리로다’는 원어로 ‘와아잠메라’인데 ‘손가락으로 튕기다’라는 뜻으로 현악기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입니다. 특히 다윗이 ‘노래하여’와 ‘찬송하리로다’의 유사한 표현을 반복한 이유는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역사를 증거하고 싶었던 열의를 분명하게 보이고자 함이었습니다. 이는 다윗이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얼마나 기뻐하고 감격하고 있는지 잘 드러내는 대목입니다.
다윗은 대적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급박한 위기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한 찬송을 소원으로 삼았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이미 구원의 기쁨을 맛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는 다윗에게 위기는 이미 위기가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숨기심과 보호 그리고 승리하게 하심을 찬송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얼마나 확고한 것인지 힘있게 찬송하고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여호와를 찬송하는 것이 여러분의 소원이 되시기 바랍니다.
헬렌 켈러(Helen Adams Keller)는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3중의 고통을 이겨낸 인물입니다. ‘3일 동안 볼 수 있다면’이라는 글은 그녀의 간절한 소원을 담고 있습니다. “만약 내가 사흘간 볼 수 있다면, 첫날에는 나를 가르쳐 준 설리번 선생을 찾아가 얼굴을 바라보겠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친구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들의 모습을 기억하겠습니다. 산에 올라 아름다운 꽃과 풀 그리고 빛나는 노을을 보고 싶습니다. 둘째 날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먼동이 터오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뉴욕 시내의 번화가에서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진열된 멋진 작품들을 감상하겠습니다. 저녁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하늘의 별들을 보겠습니다. 셋째 날엔 아침 일찍 큰길로 나가 출근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표정을 보고 싶습니다. 점심에는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 어두워지면 화려한 네온사인과 상가에 진열된 상품들을 구경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녁에 들어와서 사흘간 눈을 뜨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에게는 일상적인 생활이지만, 헬렌 켈러에게는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소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바라는 중요한 소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아니하십니다. 이 사실을 확신한다면 결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는다면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두려운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태연한 신앙을 소원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더욱 사모하는 소원을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소원으로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
시 27:1-6 / 조학환목사
1. 진정한 승리는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여러분,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큰 소리를 치며 유럽대륙과 러시아와 이집트까지 정복했던 나폴레옹은 키가 157Cm 였다고 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저는 그 보다 조금 큽니다. 그래봤자 그야말로 도토리 키재기이지만.... 그런데 여러분, 이 세기의 영웅 나폴레옹은 자신의 작은 키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 키는 땅에서부터 재면 가장 작지만 하늘에서부터 재면 제일 크다.’고 말입니다. 그는 이런 자신감과 당당함으로 큰 소리를 치며 세계 정복에 대한 꿈을 가지고 결국 유럽대륙과 러시아와 아프리카까지 정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큰소리치며 승승장구했던 나폴레옹도 별 수 없는 연약한 인간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 유명한 워털루전투에서 영국과 프러시아의 연합군에게 비참하게 패하게 되는데요, 여러분, 나폴레옹이 워털루전투에서 패한 이유가 어떻게 보면 아주 웃긴다고 합니다. 그는 만성 위궤양이 있었는데 그로 인하여 심한 변비가 생기가 되었고, 변비 때문에 치질에 걸리게 되었고, 심한 치질 때문에 말을 타기가 힘들어 전쟁에 나갈 때는 항문 주위에 마취제 주사를 맞아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워털루에서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 하필 치질이 너무 심하여 전쟁을 2시간가량 늦추게 되었는데 그 사이에 영국을 지원하는 프로이센군이 합류하여 나폴레옹은 아주 강력한 마취제를 투여하고 전쟁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국부적인 마취제였지만 너무 강력한 마취제를 맞아 정신이 좀 몽롱한 상태에서 지휘를 하다가 그만 힘도 못쓰고 패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큰소리를 쳤던 세기의 영웅 나폴레옹이 그 놈의 치질 때문에 결국 쓰디쓴 패배를 당하고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초라하게 생을 마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가 패한 다른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있었겠지만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큰 소리쳤던 나폴레옹도 치질 하나도 제대로 다스릴 수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의 것은 그것이 사람이든 권력이든 부귀영화든 아무리 크고 높고 대단해봐야 별거 아닙니다. 아무리 대단한 영웅호걸이라도 금방 늙고 병들고 결국 죽습니다. 제아무리 큰 권세라도, 제아무리 천하 없는 부귀영화라도 금방 썩어지고 없어지고 그야말로 물거품과 같이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립니다. 또 사실 그것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도 별거 없습니다. 많은 것을 가졌다고 행복에 겨워 죽을 지경인 것도 아니고, 가진 것이 별로 없다고 맨 날 슬프고 고통스럽고 비참한 것도 아닙니다. 있는 자나 없는 자 때론 웃고 울기도 하고, 때론 평안하기도 하고 근심 걱정이 있을 때도 있고 다 그렇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벧전1:24,25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육체는 풀과 같이 연약해서 금방 스러질 것이요, 그 영광도 풀의 꽃과 같이 곧 시들어 질것이지만 오직 하나님의 말씀, 그 약속 안에서 주어지는 영광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풀과 같이 시들어 버릴 세상의 것들 바라보고 의지하고 거기에 소망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별 것 아닌 것들 때문에 근심하고 걱정하고 낙심하고 절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별것 아닌 것 때문에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하찮은 것들에 얽매어 믿음 생활도 제대로 못하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안 그래요? 그거 뭐 사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뭐 좀 많이 가졌으면 어떻고 좀 적게 가졌으면 어떻습니까? 그게 뭐 인생의 행복을 좌우합니까? 아닙니다. 행복은 결코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분명코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백만원 수입으로도 행복한 사람이 있고, 천만원 수입으로도 불행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눅12:15절에서도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인생의 행복이 결코 세상의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시오 영원하고 온전한 생명의 기쁨과 능력과 은혜와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물질과 상황과 환경을 초월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총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
2. 하나님의 전을 사모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세상의 것에 얽매이지 않고 진정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온전히 누리려면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며 가까이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려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덧입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지요.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고,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자연히 세상의 사람이나 환경이나 상황이나 돈이나 명예나 혹은 죄와 마귀사탄의 유혹을 이기고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며 살게 되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빛의 은총을 누리려면 빛을 가까이 해야 하지 않습니까? 선하고 아름답고 능력 있는 사람을 가까이해야 뭔가 유익한 것을 얻지 않겠습니까? 더럽고 추하고 악하고 사납고 흉악한 사람을 가까이하면 얻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공기가 오염된 공간에 머물면 어떻게 됩니까? 오물과 썩은 것들이 잔뜩 쌓여 있는 공간에 머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선하고 아름답고 능력과 지혜가 충만해서 우리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주는 존재를 가까이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에 그런 존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밖에 무엇이 있습니까? 누가 우리에게 완전한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영원한 복을 주겠습니까? 누가 우리에 영원한 소망과 위로를 주며, 누가 우리를 영원히 온전히 지켜 줄 수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가까이함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받아 누렸던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할 만큼 믿음을 인정받고 하나님의 큰 은혜를 누렸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하나님께 인정받고 놀라운 은총을 누릴 있었던 것은 물론 저절로 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정말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전을 간절히 사모하며 가까이 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했기 때문에 틈만 나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아니 틈만 나면이 아니라 틈을 만들어서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사모했는지 그 말씀을 그리워하며 늘 묵상하였고, 그래서 말씀의 맛이 꿀과 송이 꿀보다 달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어찌 능력과 은혜를 받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여러분,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모했는지 오늘 4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참 놀랍지 않습니까? 다윗이 정말 간절히 원하는 한 가지 소망이 있었는데 그게 뭐냐, 영호와의 집 곧 성전에 살면서 여호와를 사모하며 그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집이 무엇입니까?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얼마나 하나님을 사모하는지 교회에서 사는 게 소원이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이 소망이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이 소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세상에서 건강하게 오래오래 부귀영화 누리면서 사는 것도 소원이 아니요, 자식이 잘되고 자식 자랑하며 자식 덕 좀 보며 사는 것도 소원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 오직 하나님께 나아가 경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누리는 것, 이것이 딱 한 가지 유일한 평생의 소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소망은 무엇인지요? 자식이 잘되는 것입니까? 돈을 많이 버는 것입니까?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는 것입니까? 나라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더욱 발전하여 온 국민들이 평안하게 잘 먹고 잘사는 것입니까? 서로 사랑과 은혜를 나누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입니까? 좀 더 고상하게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고 돕고 희망과 위로를 주며 사는 것이 소원입니까? 물론 당연히 그런 소망들도 가져야 합니다. 저도 그런 소망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런 소망은 결코 온전한 소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소망을 곧 사라지고 썩어지고 없어지고 결국 우리에게 실망을 안겨주는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설령 그런 것들이 이루어져도 우리에게 온전한 행복을 주는 소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영원히 온전히 생명의 기쁨을 주는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 대한 소망,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소망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고자 하는 소망만이 진정으로 영원토록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가치를 누리게 하는 복되고 고귀한 소망인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줍니까? 무엇이 우리를 끝까지 지켜줄 수 있습니까? 무엇이 정녕 우리를 영원토록 온전하게 행복하고 평안하고 자유하고 위로와 소망을 줄 수 있습니까?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돈도 명예도 지식도 과학도 권력도 우리에게 영원하고 온전한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행복과 사랑과 평화와 자유를 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하고 온전한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행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론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도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해서 기쁨과 은혜와 행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과 지식과 능력이 없어도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운데 살 수 있게 하는 소망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 아는 합3:17,18절을 보십시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셨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며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을 주시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없어도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 안에 완전한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과 기쁨과 은혜를 주십니다. 세상의 모든 죄와 유혹을 이기게 하십니다. 세상의 환경과 상황과 조건도 이기게 하십니다. 모든 마귀사탄의 권세와 사망의 권세와 지옥의 권세에서 승리케 하십니다. 그래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는 물론 지금 여기서도 분명히 어떤 상황에서도 생명의 기쁨 가운데 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공연히 우리에게 진정으로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평강과 위로와 소망을 주지 못하는 세상의 것을 바라보며 그것을 위하여 살면서 그것에 끌려 다니면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구원과 생명과 진리와 은혜와 사랑과 기쁨과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주님과 동행할 때에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모든 상황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이와 같이 철저히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았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더욱 큰 믿음과 능력과 은혜를 주셔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하나님께도 인정받고 세상 영광도 누리며 하나님의 역사도 이루어가는 위대한 신앙인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여러분, 참 대단한 신앙고백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빛이시고 구원이시고 생명의 능력이 되기 때문에 누구도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이기시는 것은 물론 우리에게도 힘과 능력과 은혜를 주셔서 모든 것을 이기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그런 하나님이 계신데, 그런 하나님을 믿는데 두려울 것이 뭐가 있겠으며, 낙심되고 한탄하고 불평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다윗이 이렇게 큰소리를 치는 것은 결코 상황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오늘 시27편 전체 말씀을 보면 다윗은 결코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하고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6절에 보면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원수 위에 들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아직은 들리지 않은 것입니다. 또 9절에서는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말아달라고 호소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뭔가 버림받은 것 같은 상황까지 몰린 것입니다. 또 12절에서는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나를 치려고 하오니 내 생명을 내 대적에게 맡기지 말아달라고 애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지금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러한 위경에서도 한탄 원망 불평 불신 근심 걱정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3절에서는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하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1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의 빛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이시고 빛이신데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고 빛을 비춰주셔서 은혜를 주실 것인데 두려워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낙심하고 근심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다윗은 이것을 분명히 믿었기 때문에 그런 위대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이렇게 큰 믿음과 능력으로 세상에서 다가오는 모든 위험과 유혹과 죄와 왜곡된 가치관과 악한 것들을 이길 수 있는 능력과 지혜는 어디 나왔습니까? 물론 하나님께부터 나왔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덧입게 되었습니까? 물론 성전에서 사는 것이 소원이라고 할 만큼 하나님 가까이 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맛이 꿀보다 더 달다고 할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그 수많은 전투와 도전과 위험 속에서도 찬양하는 생활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더욱 큰 믿음과 지혜와 능력과 은혜를 주심으로 그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 세상에서 다가오는 모든 위기와 유혹 앞에서 요동하지 아니하고 의연하게 헤쳐 나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또 시56:11절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느 때 어느 상황이라도 여전히 살아계시고 역사하십니다. 우리의 눈에 보기에는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역사를 주관하시고 계십니다.
만약 우리가 그걸 잘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의 영의 눈이 어두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영성이 뭔가 둔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영성을 풍성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집이며 주님의 몸인 교회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럴 때 능력이 임합니다. 은혜가 충만해 집니다.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지혜의 영으로 충만해 지게 됩니다. 그러면 마귀사탄 따위가 역사하지 못하게 됩니다. 세상의 유혹과 핍박이 우리를 어찌 할 수 없게 됩니다. 때론 하나님께 직접 보호하여 주심으로, 때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것을 넉넉히 이게 됩니다. 그래서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은혜의 길을 잘 달려가 세상 모든 것을 이기고 영원한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이제 이후로 더욱 교회를 가까이 함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인도와 보호 가운데 세상의 모든 시험이나 유혹이나 환난이나 핍박이나 기타 모든 어둠의 세력들을 주님의 권능으로 이기고 승리의 은총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음의 소원
시 27:1-6 / 이대성목사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마음의 소원”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마음의 소원” 여러분? 요즈음 디즈니에서 제작 절찬 상영중인 “알라딘”이란 영화를 보셨습니까? 조금 전에 보신 것은 그 영화의 OST랍니다.
어떠세요? 재미있겠죠? 지금까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무려 천백만 여명이 본 영화인데요? 만화 영화 알라딘을 리얼하게 뮤지칼 영화로 만들어서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좀도둑 알라딘이 마법 램프를 찾아 나섰다가 우연히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램프의 요정 지니를 만나면서 환상적인 모험을 겪게 되는 신나고 재미있는 뮤지칼 영화입니다.
그런데 마치 이 영화처럼 어느 날 어떤 청년이 소원을 들어주는 요술 항아리를 발견했습니다. 요정이 나타나서 청년에게 묻습니다. “주인님, 무슨 소원을 들어 드릴까요?” 그러자 청년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많은 돈과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와 행복한 결혼을 원합니다.” 그러자 요정은 난처하다는 듯이 말합니다. “꼭 세 가지를 다 원하시나요?”
청년은 단호한 표정으로 “예~ 저는 돈, 여자, 결혼 세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 청년은 얼마 후 ‘돈 여자와 결혼’했다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대개 자기 수준만큼의 소원을 갖습니다. 자기 주관이 없고 자기 철학이 없는 사람들은 단순히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겠다든지 먹고, 입고, 자는 것을 가장 큰 소원으로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높은 수준의 사람일수록 그 생각하는 것이나 소원도 함께 높아지더라는 것입니다. 태양을 본 사람은 아무리 밝은 촛불이 있다 하더라도 연연하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무엇이 더 좋은 것인지 무엇이 더 큰 것인지를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태양을 보지 못한다면 혹 촛불이 꺼지면 어떻게 할까하며 촛불 하나에도 전전긍긍하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만났다면 우리의 소원은 세상 사람들과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소원도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금식하며 작정 기도를 합니다. 일천 번제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런데 그 기도 제목을 살펴보면 말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고 기도하면서도 결국엔 자기 영광을 위한 기도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원하는 기도 제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주님의 교회를 박차고 떠나갑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 어찌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하나님 그 분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께서 내 마음의 소원을 들어 응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진정한 소원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저 이대성 목사의 소원은 무엇일까요? 큰빛광성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 교회의 비전을 이루는 건강한 성도들로 든든히 서가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예배드리고 있는 분 가운데 소원이 없는 분은 아마도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 소원이 과연 무엇이며, 무엇을 위한 소원이냐 하는 점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품고 있었던 한 가지 소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다윗이 하나님 앞에 소원할 것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가 지금 처하고 있는 상황을 보십시오. 2절에 보면 악인들이 그의 살을 먹으려고 찾아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를 지키고 보호해야 할 군대가 오히려 반역을 일으킵니다. 전쟁이 일어나서 다윗을 치려고 하는 상황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이런 상태에 직면했다면 과연 무엇을 소원해야 할까요? 마땅히 ‘하나님 나를 괴롭히고 죽이고자 하는 저 악한 대적들을 물리쳐 주세요! 저 원수들을 물리쳐 주세요! 이번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게 해 주세요!’
얼마나 구할 것이 많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이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윗이 바라는 한 가지 소원은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원어로 보면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간구했던 소원입니다.
다윗은 참으로 절박한 상황 속에 처해 있지만 자신의 안전이나 승리를 구하지 않습니다. 그의 한 가지 소원은 다름 아닌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다윗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뜻합니다. 그는 이새의 아들 중 가장 부족한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넘치는 축복으로 채워주신 하나님 사랑을 결단코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주님만을 사모하며 사는 것이 진정 소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윗 신앙생활의 중심은 왕궁이 아닌 성전이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성전을 자신의 모든 통치와 삶의 중심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그가 왕이 되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바로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다윗 성으로 모셔오는 일이었습니다. 법궤가 성으로 들어올 때 그는 왕의 체면이나 자존심까지 다 내려놓습니다. 자기 바지가 내려가는 줄도 모르고, 모든 신하와 백성들 앞에서 덩실 덩실 춤을 추고 있는 겁니다.
그만큼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소를 최고로 여겼습니다. 다윗 자신은 백향목으로 지은 궁궐에 거하면서 하나님 말씀인 법궤가 장막 안에 있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웠기에 그는 성전 세우는 것을 사모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전쟁을 통해 피를 많이 흘렸으므로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러함에도 다윗은 최선을 다해 성전 지을 준비를 합니다.
차고도 넘치도록 최고의 예물을 올려드립니다.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늘 항상 성전을 최고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시편 23편 6절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심을 고백하면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그의 평생의 소원은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을 진정 기쁘시게 하는 예배자로 살겠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다윗은 세상에서는 악인들에게 고통을 당하고, 대적들에게 목숨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 있었음에도 하나님께서 늘 항상 자기와 동행하고 계심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막아 주시고, 물리쳐 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그의 소원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하나님 영광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최고의 칭찬을 받았던 비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어떻게 하면 마음의 소원을 이룰 수 있을까요? 첫째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소원을 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선 먼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소원을 품는 것”입니다. 4절 말씀 다같이 함께 읽습니다. (시작)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그런데 여러분? 모든 소원이 하나님 앞에서 다 응답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소원을 품어야 응답받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이렇게 권면합니다.
(빌 2:12-13)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주의 말씀에 복종해야 합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여러분?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영생을 얻었습니다. 이미 천국을 유업으로 받은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성화의 삶을 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마음의 소원을 품고 사느냐 입니다. 사람은 어떤 생각, 어떤 소원을 품고 사느냐에 따라 말과 행동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음악가가 되겠다는 소원을 품으면 먼저 내가 좋아하는 음악가를 선택합니다. 그 사람을 닮기 위해 피나는 연습을 합니다. 좀더 전문적인 훈련을 받기 위해서 음악 관련 학교에 진학합니다. 그리고는 최선을 다해 성공적인 음악가가 되기 위해 달려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어떤 마음의 소원을 품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라 말씀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소원을 품고 살라 부탁합니다.
여러분? 이는 우리들이 소원을 품되 자신의 유익이나 기쁨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소원을 품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소원을 품어야 하나님이 기쁨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소원을 이루는 확실한 비결을 알았던 겁니다. 시편 37편 4절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마음에 소원을 품는다고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소원을 품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소원을 이루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리 수고하고 노력해도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시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내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소원을 품게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내 안에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면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한 소원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요나가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려고 배를 탑니다. 배 삯을 지불하고, 태연하게 배 밑에서 잠을 잡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풍랑을 통해 그를 깨우십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선원들이 ‘네가 어찌 여기서 잠을 자고 있느냐?’ 책망합니다. 그 결과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을 보내야만 하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던 것입니다.
요나가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니느웨로 가서 ‘40일이 지나면 이 성이 멸망하리라.’ 외칠 때에 왕으로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백성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방법으로 움직이면 수고하고도 얻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뜻에 순종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수고하고 애를 쓰고도 소원의 항구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자기 안에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자기 욕망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결국엔 엄청 고생만하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요나처럼 시련을 당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솔로몬을 보십시오. 역대하 1장을 보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일천 번제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천번제는 학자의 해석에 따라 다릅니다.
한 마리씩 천 날을 드렸다는 해석과, 한꺼번에 천 마리의 소를 잡아 드렸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또는 당시에 아침, 저녁으로 제사를 드린 것으로 보아 500일 동안 드리지 않았느냐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떻게 드렸느냐 하는 방법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그 제사를 드렸느냐 하는 마음 중심에 있습니다. 오늘날도 소 한 마리를 잡는 것이 얼마나 큰일입니까? 하물며 일천 마리의 소를 잡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을까요?
그렇지만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온전히 드리고 싶은 열망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아버지 다윗의 위업을 계승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 마음의 중심을 기억하시고 밤에 나타나셔서 그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그러자 그는 즉각적으로 대답합니다. ‘백성들을 바르게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듣는 마음을 주옵소서.’
그렇다면 여러분?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나타나셔서 가장 원하는 한 가지 소원을 말하라면 즉각적으로 말할 수 있는 그런 소원이 있으십니까?
이것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마음의 소원을 기쁘게 받으시고, 그가 구하지 않은 부와 재물과 영광까지도 허락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사람 다윗처럼, 지혜의 사람 솔로몬처럼 늘 항상 하나님께서 진정 기뻐하시는 소원을 품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마음의 소원을 이루려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기에 제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와도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다윗이 용맹해서가 아닙니다. 가장 강한 군대를 가졌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를 따르는 충성된 신하들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그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다같이 1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어둠을 밝히시는 빛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구원해 주심을 믿었습니다. 원수들 앞에서도 상을 베풀어 주시는 능력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누구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눈에 보이는 것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미 골리앗과의 대결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기 편이 되어주심을 똑똑히 경험했습니다.
우리의 소원을 이루는 비결은 세상 사람을 의지하거나 세상 경험이나 지식을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면 반드시 소원을 성취합니다. 하나님의 승리를 경험합니다.
사도 바울 역시 다윗과 같은 담대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했던 자입니다. 그는 이렇게 반문합니다. 로마서 8장 31-32절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우리가 아버지로 부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셨는데,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가장 귀한 목숨까지 던지신 분이 하물며 그 무엇이 아까워서 당신 자녀들을 구원하시는 것을 외면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믿음입니다.
이방인 중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최고의 칭찬을 받은 분이 있습니다. 그는 로마의 백부장입니다. 자기 하인 가운데 하나가 중풍병에 걸렸습니다. 백부장은 하인 하나쯤 무시해도 됩니다. 만약 죽어도 다른 사람으로 채우면 됩니다. 그러나 이 백부장은 자기 하인을 너무나도 사랑했습니다.
때마침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신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뵙고는 자초지종을 이야기 합니다. 백부장의 말을 들은 예수님은 마음에 감동을 받으시고 당장 가서 고쳐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백부장이 뭐라고 말합니까?
“예수님 내 수하에도 신하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옵니다. 예수님께서 어찌 우리 집까지 오시겠습니까? 주님이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할 수 없으니 주님, 그냥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내 신하가 깨끗이 나을 줄로 믿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완전 감동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백부장을 보고 놀랍게 여기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8:1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그리고는 백부장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2번) 할렐루야! 주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했던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의 믿음대로 하인의 중풍병을 깨끗이 고쳐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런 백부장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 믿음의 분량대로 역사하십니다.
지금 다윗은 악인들이 살을 먹으려고 달려들고, 군대가 대적하여 포위한다 해도, 심지어 커다란 전쟁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전혀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태연합니다. 다같이 2-3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그렇다면 어떻게 여전히 태연할 수 있을까요? 그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늘 함께하심을 믿었기에 이렇게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던 다윗처럼 늘 항상 내 잔이 넘쳐나는 기쁨을 맛보면서 마음의 소원을 온전히 이루어 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로, 마음의 소원을 이루려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다같이 5절과 6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여러분? 다윗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예배일진대 예배만큼은 결단코 놓지 않고 있습니다. 다윗은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사모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감사의 제사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진정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드리는 것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예배가 우리 인생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전에서 온 맘과 정성을 다해 예배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크신 은혜와 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어디로 가든지 형통의 복을 부어 주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간, 여러분 마음속에 품고 있는 지속적인 소원은 과연 무엇입니까? 늘 항상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기뻐하여 하나님의 성전에서 주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바라보는 은혜와 복이 넘쳐 나시기를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다윗이 평생 동안 가슴에 품고 살았던 한 가지 소원 - 하나님의 성전에 살면서 주님의 아름다움을 사모했던 그 마음의 소원이 바로 우리 모두의 소원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제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찬양 드리기를 원합니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다같이 우리의 소망을 담아 찬양 하십시다.
♬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 부대가 되게 하여 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
그렇습니다.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소원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이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어떤 삶을 의미할까요?
(마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것은 바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를 뜻하고, 하나님의 의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쁨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은 하나님 나라인 성전에서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아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것까지도 누르고 넘치도록 부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이 주신 꿈을 끝까지 잃지 않았던 꿈꾸는 자 요셉은 마침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을 간섭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나는 주님의 기쁨이 되고, 주님은 내 기쁨이 되어 이 기쁜 소식을 힘차게 증거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대장부 신앙
시편 27:1-14 / 이종철목사
다윗은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냈다. 수없는 위기를 겪어야 했으며 수많은 적들과 싸워야 했다. 적들을 대항해서 싸우는 일은 항상 두려운 일이다. 1-3절에는 다윗의 그런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1a),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1b),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3a),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3b) 이런 확신들은 역설적으로 다윗의 마음에 끝없이 두려움이 솟고 있음을 반증한다. 누구든 문제 앞에서는 두렵다. 그 어떤 용사나 그 어떤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일지라도 앞에 닥친 문제는 골리앗처럼 거대하고 난공불락같이 보인다.
그렇지만 다윗이 그 두려움을 이기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며......나의 생명의 능력이시라”(1)고 고백한다. 여호와는 다윗의 빛이 되셨다. 요즘은 사람들이 도시 생활을 주로하기 때문에 어두움에 대해서 잘 실감하지 못한다. 불 빛 한 점 없는 시골길은 정말 한 치 앞도 구분할 수 없다. 바로 코앞에 위험이 있을지라도 인식하기 어렵다. 바로 우리 인생이 그렇지 아니한가? 우리는 1분 앞도 내다 볼 수 없으며 사람의 목숨은 불과 몇 초차로 결정이 되기도 한다. 조금 먼저 빨리 가려다 불의의 사고를 당하기도 한다. 인생길에서 인간은 눈먼 장님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빛만 있으면 우리는 실족하지 않을 수 있다. 거침없이 달려갈 수도 있다.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는 그의 빛이 되셔서 다윗이 위험에 빠지지 않고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셨다.
여호와는 또한 다윗의 생명을 보호하는 능력이 되셨다. 전쟁터에서 수없는 창과 화살이 날아오며 다윗의 목숨을 위협하였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지키시고 보호하셨기 때문에 그 모든 위험들이 빗겨갔다. 그래서 다윗은 담대히 이렇게 고백한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3) 적군의 군대가 사방으로 자기를 에워싸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전쟁의 소문은 사람으로 하여금 얼마나 불안케 하는가? 그러나 다윗은 그 순간에도 동요함이 없다. 오히려 태연하다. 신앙인의 담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
다윗의 이 신앙은 하루 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다. 오랜 전투로 단련된 사람의 신앙이다. 전쟁에서 상처도 많이 생겼지만 그와 비례해서 믿음의 담대함도 커져 갔다. 하나님의 은혜를 무엇보다 가장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전쟁터이다. 생명과 죽음이 간발의 차로 결정되는 곳이 바로 전쟁터이기 때문이다. 물러서면 죽기 때문에 간절히 하나님만 바랄 수밖에 없는 곳이 바로 전쟁터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모습은 어떠한가?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작은 추위나 비바람에도 쉬 꺾이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한탄만 하고 있지는 않은가? 임마누엘 하나님의 은혜는 폭풍 속에서만이 제대로 체험할 수 있다. 성령의 역사는 무엇보다 전도 현장이나 인생의 전쟁터에서 가장 확실하게 나타난다. 성령 충만함을 경험하고 싶은가? 그러면 전쟁터로 나아가라. 신앙인은 보다 단단해져야 한다. 작은 상처로 연민에 빠지는 것이 신앙인의 본질이 아니다. 상처를 받고 또 받아 딱정이가 져서 웬만한 것들은 아픔으로 느끼지 않을 정도로 단단해져야 한다. 바울이 왕이나 황제나 그 누구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복음의 최전선에서 사단의 세력과 싸우며 믿음을 다졌기 때문이다.
우리 신앙은 대장부 신앙이 되어야 한다. 군대가 나를 둘러 치려하여도 두렵지 않은 대장부가 되어야 하지 섭섭함이나 실망 등 소소한 상처로 낙담하는 졸장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동양 고전 『맹자』편에서는 ‘대장부(大丈夫)’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하라는 넓은 거처에 살며, 천하의 올바른 자리에 서며, 천하의 큰 도리를 행하며, 지지를 얻으면 사람들과 함께 그 도리를 행하고, 지지를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리를 행한다. 부귀의 유혹도 그 마음을 더럽게 할 수 없으며, 가난의 어려움도 그의 마음을 바꾸어 놓지 못하며, 위세나 무력도 그 마음을 굽히지 못하는 사람, 이런 사람을 일컬어 대장부라고 한다.” 맹자는 하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따르는 삶이 이렇게 대장부를 만들어낸다고 하였다. 신앙인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는 대장부가 될 수밖에 없다. 위력이나 무력이나 부력이나 세력이 그 마음을 꺾지 못한다. 다윗의 삶이 그러했고 사도 바울의 삶 또한 그러했다. 현대 신앙인들은 이런 넓고 큰 마음(호연지기)을 잃고 있다. 여호와를 전심으로 의지하는 자에게, 인생이라는 전쟁터에서 연단된 자들에게 하나님은 다윗처럼 담대한 대장부 신앙을 허락하신다.
다윗의 신앙이 위대한 것은 그가 왕의 자리나 성공이나 승리나 부귀를 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소원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여호와와 함께 하는 것이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4) 처음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 때문에 하나님을 믿었다 그러나 이제는 축복보다는 하나님 자체가 좋다. 악인의 장막에 거하는 것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고 주의 궁정에서 보내는 한 날이 다른 곳에서 보내는 천 날보다 낫다. 우리 인생이 그렇지 않던가? 성공과 실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호와로 만족하는 신앙이다. 성공의 영광도 잠깐이요, 실패의 아픔도 잠깐이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내가 얼마나 더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되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얼만큼 더 자랐는가이다. 다윗이 바라는 것은 오직 주의 얼굴이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8)
우리가 영원히 의지할 수 있는 분은 여호와 한 분뿐이다. 인간은 의지할 수 없다. 심지어 부모일지라도 의지할 수 없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도 변하기 쉽지만 보다 신뢰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10) 자식을 버리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키울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지난 IMF 사태를 맞았을 때 자식을 버렸던 부모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요즘도 가정 파괴나 미혼모의 증가로 자식들을 버리는 부모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시지 않으시고 끝까지 책임져 주시는 분이시다. 우리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다.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68:5)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소망하는 자가 곧 살아있는 자다. 하나님이 없는 자는 죽은 자요, 죽어가고 있는 자다.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죽음의 그림자가 그들을 뒤덮고 있다. 그러나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영원한 생명의 빛이 그 위를 드리우고 있다.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13) 다윗이 곤고한 가운데 있고, 두려움 가운데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외치고 싶은 한 마디는 바로 이것이다.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14) 우리 소망은 오직 여호와께만 있다.
내 평생의 소원
시 27:1-6, 14 / 이대성목사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내 평생의 소원”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내 평생의 소원” 여러분! 어느 날 어떤 청년이 소원을 들어주는 요술 램프를 발견했습니다. 바로 그 때 그 램프에서 요정이 나타나서 이 청년에게 묻습니다. “주인님, 무슨 소원을 들어 드릴까요?”
그러자 그 청년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합니다. “저는 많은 돈과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와 행복한 결혼을 원합니다.” 그러자 요정은 난처하다는 듯이 말합니다.
“꼭 세 가지를 다 원하시나요?” 청년은 단호한 표정으로 “예! 저는 돈, 여자, 결혼 세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 청년은 마침내 그의 소원대로 ‘돈 여자와 결혼’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 가운데 소원이 없는 분은 아마도 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소원이 과연 무엇이며, 무엇을 위한 소원이냐 하는 점입니다.
소원이 있다 해도 잘못된 소원을 품으면 돈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마음의 소원을 품고 사는 자에게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아무런 기대나 소원이 없는 자에게는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본문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품고 있던 한 가지 소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다윗이 하나님 앞에 소원할 것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가 지금 처하고 있는 상황을 한 번 보십시다.
2절에 보면 악인들이 그의 살을 먹으려고 찾아옵니다. 그 때 그를 지키고 보호해야 할 군대가 반역을 일으킵니다. 전쟁이 벌어지는 상황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이런 상태에 직면했다면 무엇을 소원할까요?
마땅히 ‘하나님 나를 괴롭히고 죽이고자 하는 저 악한 대적들을 물리쳐 주세요! 저 원수들을 물리쳐 주세요! 이번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게 해 주세요!’ 얼마나 구할 것이 많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의 소원을 고백합니다. 여기서 다윗이 바라는 소원은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원어로 보면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간구했던 소원입니다.
참으로 절박한 상황 속에 있지만 다윗은 자신의 안전이나 승리를 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의 한 가지 소원은 다름 아닌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란 다윗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뜻합니다. 그는 이새의 아들 가운데 가장 부족한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넘치는 축복으로 채워주신 하나님의 사랑 결코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23편 6절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심을 고백하면서 다윗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그렇습니다. 그의 평생의 소원은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평생 동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자로 살겠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것이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최고의 칭찬을 받았던 비결인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도 과연 어떻게 해야 우리 마음의 소원을 온전히 이룰 수 있을까요?
첫째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소원을 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소원을 품어라.” 4절 말씀 다같이 한 목소리로 읽습니다. (시작)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그런데 여러분? 모든 소원이 하나님 앞에서 다 응답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소원을 품어야 응답받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빌립보서 2장 12절과 13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주님 말씀에 복종해야 합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여러분!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영생을 얻었습니다. 천국을 유업으로 받는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성화의 삶을 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마음의 소원을 품고 사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떤 생각, 어떤 소원을 품고 사느냐에 따라 말과 행동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음악가가 되겠다는 소원을 품으면 먼저 내가 좋아하는 음악가를 선택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을 닮기 위해서 연습하고 또 연습합니다.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줄리아드 음대와 같은 명문 학교에 진학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최선을 다해 성공적인 음악가로서의 삶을 위해 달려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어떤 마음의 소원을 품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인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바로 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소원을 품고 살라고 부탁합니다.
여러분! 이는 우리들이 소원을 품되 자신의 유익이나 기쁨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소원을 품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소원을 품어야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소원을 이루는 비결을 깨달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편 37편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내 마음에 소원을 품는다고 해서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소원을 품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소원을 이루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리 수고하고 노력해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시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내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소원을 품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내 안에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게 되면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한 소원을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요나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여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태연히 배 밑에서 잠을 청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풍랑을 통해 그를 깨우십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선원들이 ‘네가 어찌 여기서 잠을 자고 있느냐?’ 책망합니다. 그 결과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을 보내야 하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던 겁니다.
요나가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니느웨로 가서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외칠 때에 왕으로부터 모든 백성에 이르기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방법으로 움직이면 수고하고도 얻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뜻에 순종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수고하고 애를 쓰지만 참으로 안타깝게도 소원의 항구에 도달하지는 못합니다.
바로 그 이유는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없고, 자기 욕망만 앞서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결국엔 고생만 하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요나처럼 시련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릴 적 솔로몬을 보십시오. 역대하 1장을 보면 그는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일천 번제를 드리고 있습니다. 일천번제는 학자의 해석에 따라 다릅니다.
한 마리씩 천 날을 드렸다는 해석과 한꺼번에 천 마리의 소를 잡아 드렸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또는 당시에 아침, 저녁으로 제사를 드린 것으로 보아 500일 동안 드리지 않았겠느냐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떻게 드렸느냐 하는 방법이 아니라, 그 마음의 중심입니다. 오늘날에도 소 한 마리 잡는 것이 간단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일천 마리의 소를 잡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는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고 싶은 열망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에게는 어떻게 해서든지 아버지 다윗의 위업을 계승해서 하나님이 진정 기뻐하시는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마음 중심을 기억하시고, 밤에 나타나셔서 그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그러자 솔로몬은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즉각적으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게 지혜와 지식을 주사 이 백성 앞에서 출입하게 하옵소서.” 동일 본문인 열왕기상 3장을 보면 듣는 마음을 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3장 9절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듣는 마음을 주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나타나셔서 한 가지 소원을 말하라면 즉각적으로 말할 수 있는 간절한 소원이 있으십니까?
이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솔로몬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진정 기쁘게 받아 주시고, 그가 구하지 않은 부와 재물과 영광까지도 허락해 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사람 다윗처럼, 지혜의 사람 솔로몬처럼 늘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소원을 품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라.” 여러분! 다윗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그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닥쳐와도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용맹해서가 아닙니다. 가장 강한 군대를 가졌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를 따르는 충성된 신하들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그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믿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십니까?
다같이 1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그렇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어둠을 밝히시는 빛이심을 믿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구원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었습니다.
원수들 앞에서도 상을 베풀어 주시는 생명의 능력이 있음을 그는 믿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누구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눈에 보이는 것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시편 51편 11절 말씀입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제발 주의 성령만큼은 내게서 거두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했던 사람으로써 이렇게 반문합니다. 로마서 8장 31절과 32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우리가 아버지로 부르는 하나님께서 우릴 구원하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그가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시기까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셨는데,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목숨까지 던지신 분이 그 무엇이 아까워서 당신 자녀들을 구원하시는 것을 외면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믿음으로 구하지 않고 정욕으로 구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 중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최고의 칭찬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로마의 백부장입니다. 자기 하인 가운데 한 사람이 중풍병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그 당시 백부장은 하인 하나쯤 무시해도 됩니다. 만에 하나 죽어도 다른 사람으로 채우면 됩니다. 그러나 이 백부장은 하인을 너무나도 사랑했습니다.
때 마침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신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뵙고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합니다. 백부장의 말을 들은 예수님은 마음에 감동을 받으시고 당장 가서 고쳐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백부장이 뭐라고 말합니까?
“주님, 내 수하에도 신하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옵니다. 주님이 어찌 우리 집까지 오시겠습니까? 주님이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할 수 없으니까 주님, 그냥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내 신하가 나을 줄로 믿습니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완전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백부장을 보고 놀랍게 여기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8장 10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그리고 이어서 백부장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가라.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 (2번)
예수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했던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주님은 그가 믿은 대로 하인의 중풍병을 깨끗이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런 백부장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우리 믿음의 분량대로 역사하십니다.
지금 다윗은 악인들이 살을 먹으려고 달려들고, 군대가 대적하여 포위한다 해도, 심지어 커다란 전쟁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전혀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태연합니다.
여러분! 세상 살다 보면 별의 별 일이 다 있습니다. 늘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지 않았던 문제를 만나서 괴로울 때도 있습니다. 다윗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반역을 일으키고 아버지가 궁에서 쫓겨났으니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이런 상황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의 고백을 보면 마치 이미 승리한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아직 상황은 승리한 상황이 아닙니다. 오히려 쫓기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승리를 확신하고 있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그렇습니다. 믿음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이미 일어난 것처럼 확신하게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제 상이기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기에... 현실적으로는 다윗이 쫓기고 있지만, 그의 믿음의 눈은 승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느냐가 중요합니다. 결국 우리가 바라보는 것이 우리 생각을 변화시킬 것이며, 우리 생각은 믿음을 결정짓게 되고, 우리 믿음은 우리 인생을 결정짓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견고함은 환난을 당해 보면 이내 곧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고난 중에 드러난 다윗 신앙의 아름다움은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 중에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현실이 기도한 내용과 반대로 가는 것 같으면, 기도한 것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불신앙의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코 기도 응답의 축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기도 응답은 오직 믿음으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이 기도한 내용과 현실이 반대로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현실보다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더 믿었기에 당당히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절과 3절 말씀 다같이 한 목소리로 읽습니다.
(시작)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여러분! 어떻게 이토록 담대할 수 있을까요? 다윗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그는 확실히 믿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다윗처럼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요, 내 생명의 능력이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할 때에 하나님의 기적은 우리 삶 속에도 반드시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기적이 강권적으로 임함으로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여전히 태연한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되라.” 다같이 5절과 6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여러분! 다윗은 항상 예배하기를 기뻐했습니다. 주님을 향한 찬양과 감사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진정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도무지 견디기 힘든 상황 속에서도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드리는 것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예배가 우리 인생의 승패를 좌우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전에서 온 맘과 정성을 다해 예배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어디로 가든지 형통의 복을 허락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여러분 마음에 품고 있는 가장 큰 소원은 무엇입니까?
다윗이 평생 동안 가슴에 품고 살았던 한 가지 소원 - 하나님 성전에 살면서 주님의 아름다움을 사모했던 그 마음의 소원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한 가지 소원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그렇습니다. 내가 원하는 한 가지는 바로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는 바로 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을 자신의 빛이요 구원이요 생명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우리들에게 권면하는 말이 있습니다.
다같이 14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습니다. (시작)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여러분! 전혀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믿고서 끝까지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참된 성공은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는 것으로 결정되는 줄로 믿습니다. 짧은 인생이 영원한 가치를 갖게 되는 것도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바라봄으로 결정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권면 중에서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강하고 담대하며’라는 말입니다. 왜? 그는 '강하고 담대하며'라고 말했을까요?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기다리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겁니다.
사탄 마귀가 우리를 절대로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함에도 그 어떤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하나님의 행하심을 온전히 믿고서 끝까지 참고 주님만 기다리라는 말입니다.
이는 정말이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강하고 담대하라!’고 다윗은 우리에게 신신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정 기쁘게 받아 주심으로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이고, 하나님의 의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전인 교회를 뜻하고, 하나님 의 즉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주님 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한 왕 히스기야가 죽을 병에 걸렸을 때 하나님께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드린 기도 내용 중 일부입니다. 이사야 38장 16절과 17절 그리고 20절 말씀입니다.
“주여 사람이 사는 것이 이에(하나님께) 있고, 내 심령의 생명도 온전히 거기에(하나님께) 있사오니 원하건대 나를 치료하시며 나를 살려 주옵소서.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니 우리가 종신토록 여호와의 전에서 수금으로 나의 노래를 노래하리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 다윗과 선한 왕 히스기야의 공통점이 눈에 보이십니까? 그들은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최우선적으로 성전에서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그 어떤 환난과 핍박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전혀 흔들리지 말고 내 평생에 하나님의 집을 사모하면서 주의 성전에서 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나의 빛이 되시는 하나님, 나의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 내 생명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은 늘 언제나 승리의 기쁨과 감격을 맛보면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십니다.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겠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의 바로 이 소원이 우리 모두의 평생의 소원이 되어 ‘이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께서 하셨노라!’ 주의 행하심을 온 세상에 기쁘고 즐겁게 선포하는 저와 여러분의 복된 삶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시편 27:1-14 / 임춘수목사
개역개정 성경에 ‘태연하리로다.’라고 번역한 히브리어는 ‘바타흐’라는 동사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믿다, 신뢰하다, 의지하다, 확신하다.’는 뜻을 담고 있고 본문에서는 ‘안심하다, 염려 없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의 기본적인 개념은 ‘확고부동’, ‘견고함’ 과 관련 있는 것 같습니다. 히브리어에서 바타흐는 신뢰할 만한 것이나 신뢰할 만한 사람이 있다는데서 오는 행복감과 안도감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태연하다는 말의 의미는 누군가를 강하게 신뢰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어떤 어려움이나 시련이 와도 마음이 늘 평안한 사태이고 그러므로 늘 행복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잘되고 좋은 일만 있어서 기도하고 소원한대로 이루어져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현재 주어진 삶은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분명히 있지만 나를 지켜 주시는 그분이 있기 때문에 그분을 생각하면서 언제나 마음은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많은 것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초조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걱정할 것들과 염려할 것들이 널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우리가 사는 세상은 늘 걱정과 근심과 염려거리들이 넘쳐날 것입니다. 코로나가 끝나면 세상은 평안하고 행복할 것 같지만 또 다른 무엇인가가 지구촌을 힘들게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이 어떤 상황인가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전쟁을 멈추고 인류가 하나 되고 평화를 유지하는 목적으로 UN을 설립했지만 지구촌에는 계속해서 전쟁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다양한 전염병들이 등장을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긴장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들로 인해서 두려움과 염려도 있습니다. 시편 27편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다윗이 지은 찬양의 시입니다.
다윗이 위대한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오늘날로 표현하면 금수저로 태어나서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는 가운데 왕이 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오늘날로 표현하면 흙수저로 태어나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는 시절도 있었고, 많은 시련을 겪고 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시편 27편은 다윗의 삶을 전반에 걸쳐서 있었던 수많은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항상 태연하게 살아왔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초조하고 염려로 가득한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태연할 수 있는 참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옛 속담에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고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염려가 가득하면 아무 생각도 안 나고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대부분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면 머리가 멍해지고 아무 생각도 안 난다고 합니다. 아무 생각도 안 나면 문제를 해결 수 없고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마음이 태연한 상태가 될 때 다르게 표현하면 내 뒤에 항상 계신 그분을 의지하고 내 앞에 어떤 상황이 와도 능히 이길 수 있다는 담대한 믿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 앞에 어떤 어려움이 와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수많은 시련 속에서 조금도 굴하지 않고 “나는 여전히 태연히 태연하리로다.” 라고 선포한 다윗의 믿음의 선포가 오늘 우리의 선포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다윗은 어린 시절에는 혼자서 광야에서 양을 치면서 고독하고 힘든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다윗이 처음 전쟁터에 나간 상황에서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겠다고 할 때 사울 왕이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 때 다윗은 자신이 들에서 아버지의 양을 지키면서 사자와 곰을 물리치고 양을 지켰다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어릴 때부터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살아왔고 그런 과정들을 겪으면서 깨달은 것은 나는 아무것도 무섭지 않고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다르게 표현하면 나에게 무서운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라고 선포한 것에 대해서 여호와는 내 생명이 능력이시다라고 노래했습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다윗은 사무엘 하 22:29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어둠을 밝히시리이다.” 라고 노래했습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어둠은 일반적으로 다윗의 적들을 말하는 것인데 특별히 자신의 힘으로 이길 수 없는 정도의 큰 대적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어둠을 만났을 때, 지금 내 앞에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 있을 때 우리는 그곳에서 빛으로 오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다윗은 수많은 어려움들을 극복하면서 깨달은 믿음의 고백이 여호와는 나를 모든 어둠에서 이끌어 내시는 나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어둠을 만났을 때, 지금 내 앞에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 있을 때 우리는 그곳에서 빛으로 오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다윗의 일대기를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 많은 어려움들을 극복하면서 깨달은 믿음의 고백이 여호와는 나를 모든 어둠에서 이끌어 내시는 나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빛이신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이 말은 어떤 위험 속에서도 하나님은 나를 건져주신다는 고백입니다. 다윗이 겪은 수많은 위험과 위기 속에서 언제나 하나님께서 건져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생명의 능력이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내 생명의 피난처가 되셔서 언제나 그 피난처에서 내 생명을 지켜주신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어둠이 아닌 빛이시고 우리의 구원이시며 생명의 능력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내 생명의 능력이시지만 원수들은 실족하여 넘어졌습니다. 2절을 보면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다윗이 활동하던 시대에 이스라엘은 신생국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사울을 왕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왕이 되기는 했지만 이스라엘은 국가의 형태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주변의 나라들은 이스라엘을 얕잡아 보고 시도 때도 없이 공격을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다윗이 첫 번째 전투에 나간 것이 골리앗과의 전투였는데 골리앗은 하나님을 모욕하고 이스라엘을 모욕했습니다. 다윗은 전쟁터에 나가 있는 형님들을 보러 갔다가 골리앗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골리앗은 이스라엘을 집어 삼기려고 온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먹으려고 원수들이 계속해서 공격해 오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을 실족하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국가적인 상황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비슷한 경험들을 했습니다.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끈질긴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내 살을 먹으려고 즉 나를 죽이려고 왔던 모든 나의 대적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즉 전쟁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무너뜨리려고 왔던 자들이 전쟁에서 패하기 보다는 실족해서 넘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시지만 나의 원수들은 나와 싸워보기도 전에 실족하여 넘어지고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인생에서 언제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서 싸우심을 보았고 자기 앞에서 원수들이 실족하여 넘어지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살을 먹으려고 즉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다가오는 모든 악한 세력들은 실족하여 넘어지는 역사가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다윗은 계속해서 내 마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라고 선포했습니다. 3절을 보면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다윗은 언제나 이 믿음으로 살아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많은 전쟁을 경험했고 사울이 죽이려고 추격하고는 상황에서 고백하는 것은 내 앞에 나를 대적해서 군대가 진을 칠지라도 나는 결코 두렵지 않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향해서 한 두 사람의 대적이 아닌 군대가 올지라도 하나님께서 내 생명의 능력이시기 때문에 그리고 내 원수들은 실족하여 넘어질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결코 그런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나는 태연하게 모든 상황들을 극복할 수 있다고 노래 한 것입니다.
내 앞에 아무리 많은 시련과 역경이 와도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내 앞에 아무리 크고 많은 대적들이 있다고 해도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 내가 바라는 것은(소원은)
다윗은 하나님께서 빛과 구원이 되시고 생명의 능력이 되시고 나를 향해 오는 모든 원수들은 실족하여 넘어지게 되기 때문에 군대가 나를 향해 진칠지라도 나는 두렵지 않다고 노래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해서 내가 바라는 것은 즉 나의 소원은 이런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사는 것이라고 노래했습니다. 4절을 보면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다윗은 나의 간절한 소원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언제나 예배하는 자리에 머물면서 항상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경배하며 찬양하길 원한다는 고백입니다.
여기서 아름다움이란 말은 외적인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 중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곳이 아름다운 곳이 아닐지라도 예배 드릴 때 성령이 임재하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그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곧 아름다운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기독교가 주류 종교가 될 때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하고 성전을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게 장식을 하고 꾸몄습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성전이 영원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기독교의 침체가 이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성전을 좋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성전은 사람들이 만족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장소가 어떤 곳이든 하나님의 성령이 임재하시는 진정한 예배가 되길 원하시고 이것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의 성전에서 사모한다는 고백 속에서 사모한다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카르’의 원래 의미는 ‘조사하다’, ‘숙고하다’는 뜻으로 ‘여호와를 알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모한다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채워지길 원한다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성령이 임하십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배우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채워가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사모하는 신앙입니다. 마음으로 간절히 사모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 공부를 하고 하나님에 대해 깊이 알고자 하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두 번째 소원은 항상 주님의 얼굴이 비춰지는 삶을 살고 싶다는 고백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주의 얼굴을 숨기지 마옵소서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8-10절을 보면 27: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27:9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27: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다윗은 매우 마음 아프게 자신의 간절한 소원을 고백하고 있는데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라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다윗은 어린 시절 들에서 목동으로 외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목자로서 양을 치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시편23편을 비롯해서 많은 시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목동 시절을 회상하는 시들은 아름답고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하는 시이지만 그 내면에는 어린 시절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런 아픔을 표현하면서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찾겠습니다. 그러니 내게 하나님의 얼굴을 숨기지 마옵소서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윗은 나를 버리지 마시고 얼굴을 숨기지 마시고 언제나 나를 지켜봐 주시고 나를 떠나지 마옵소서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세 번째 소원은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라고 고백했습니다. 11절을 보면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
다윗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기를 원하는데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기를 원하오니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지 마시고, 그 얼굴을 돌이키지 마시고, 그리고 나를 평탄한 길로 인도해 주옵소서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험난한 인생길을 살아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마음에 하나님 나에게도 평탄한 길을 주셔서 맘 편하게 살고 즐겁고 기쁘게 살아가게 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해 달라고 간구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주의 도를 가르쳐 주시고, 이 표현은 앞에서 사모한다는 말과 연결되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도를 내게 알게 하셔서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면 평탄하게 된다는 고백입니다.
또한 내가 평탄한 삶을 살지 않으면 원수들이 나를 조롱하고 하나님을 불신하게 되니까 내 원수들 앞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평탄한 길을 간다는 것을 알게 해 달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우리가 평탄한 길을 가게 됨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발견하게 해 달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참빛 가족들의 삶이 평탄한 길로 인도함을 받는 삶이 되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고 천국 시민이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3. 나는 믿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마음이 간절한 소원을 고백한 다음에 하나님께서 나의 간절한 소원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면서 나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부르짖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7-8절을 보면 27:7 “여호와여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27: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소리 내어 부르짖고 기도하겠다고 고백하면서 내가 믿는 하나님께서 내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시옵소서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앞에 대적들이 진을 치고 늘 힘든 길을 걸어야만 했던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 내가 너무 힘들어서 부르짖을 때 내 기도를 외면하지 말고 들어주시옵소서. 라고 고백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 내가 부르짖는 기도를 외면하지 말고 들어주시고 내가 간절히 주님의 얼굴을 찾을 때 나를 향해 그 얼굴빛을 비추어 주시옵소서. 다윗은 간절한 마음으로 간구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12-13절을 보면
27:12 “내 생명을 내 대적에게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27:13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대적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끊임없이 다윗을 공격해 오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게 될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왕으로 다스릴 때에도 종종 다윗을 향해 등을 돌리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해서 죽음을 각오하고 전쟁을 하고 나라를 세웠지만 백성들은 언제든지 등을 돌릴 수 있고 언제든지 나의 대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나는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반드시 보게 될 믿습니다. 다윗과 같이 내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게 될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이렇게 고백합시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여호와를 기다리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14절을 보면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라고 마지막 선포를 하고 있는데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너희는 여호와를 기다리라고 선포한 것이기 보다 힘든 상황에서 처한 자신을 향해서 하는 선언적 선포하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 다윗아 너는 여호와를 기다리라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리라고 자신에게 선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을 기다리고 우리 하나님을 의지하며 이 시대를 살아갑시다.
오늘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태연할 수 있습니다. 우리 3절의 말씀을 같이 고백하고 마치겠습니다. 3절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내가 바라는 한가지 일
시편 27:1-6 / 배 혁목사
1933년 샌프란시스코의 명물인 금문교(Golden Gate Bridge) 건설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공사 도중에 노동자들이 발을 헛디뎌 떨어져 죽는 사고가 빈번히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정부는 낙상사고를 막기 위해 엄청난 돈을 들여, 밑에 그물을 설치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물을 설치한 이후로는 떨어지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노동자들이 떨어진 원인은, 그들이 다리에서 떨어지면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떨어져도 그물이 있어서 안전하다고 안심을 하며 작업을 하니, 발을 헛딛는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가지고 있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요즘과 같은 경우에는 경제적인 불안, 자연재해, 그리고 언제 사고를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의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두려움이 나를 사로 잡아서, 평안을 빼앗고, 정상적인 판단,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발을 헛디뎌 떨어져도 나를 받아줄 그물과 같은 존재가 있다면 우리는 두려움속에서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도리어 그러한 위험속에서도 평안을 누리겠지요.
그런데 시편 27편을 쓴 다윗은 자신을 두려움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해 줄 분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사실 그는 누구보다 두려운 환경가운데 있었던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어릴 때에는 양을 치면서 맹수들을 대면해야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청년이 되었을 때에는 사울왕에게 쫓기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한 사람에게 공격을 당해도 두려운데 한 나라의 왕이 몇 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쫓아오니 다윗이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다윗은 말합니다.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그가 생명이 위태한 상황가운데서도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두려움속에 있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그 두려움속에 휩싸이지 않고, 이를 이겨나갈 수 있을지를 함께 나누겠습니다.
1. 여러분, 두려움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제대로 알게 되면 두려움에 사로 잡히지 않게 됩니다.
다윗은 누구보다 생명의 위협을 당했던 사람입니다. 다윗은 원수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왔다고 했습니다. 다윗의 원수들은 그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맹수와도 같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사울의 군대를 피해서 도망다녀야 했고, 많은 나라들과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이럴 때에는 두려움에 사로 잡혀서 위축된 삶을 살아가기 쉽습니다.
다윗이 실제로 두려움으로 인해서 잘못된 판단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사울왕과 그의 군대로부터 쫓길 때에 두렵다고 사울이 쫓아 올 수 없는 곳을 찾다가 적국인 블레셋으로 도망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 사람들이 다윗을 보고, “저 사람은 골리앗 장군을 죽인 다윗 아니야?” 라고 수근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를 듣고 다윗은 이곳에서 잡혀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살려고 미친척을 합니다.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립니다. 그리고 이를 본 블레셋 왕이 “우리 중에 미친 사람이 없어 다윗을 데리고 왔냐” 며, 다윗을 쫓아 보냅니다.
다윗에게도 두려움에 사로 잡혀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은 말합니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고,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라” 다윗은 두려움이 엄습할 때에 믿음으로 작정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나는 두렵지 않고, 나는 태연하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태연하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 암시의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이요, 선포입니다. 그가 위태롭고 두려운 가운데서도 태연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 다윗은 하나님이 빛이심을 알기에 어둠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빛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다윗이 빛이 없는 어둠의 때를 경험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우리가 두려움에 빠지게 되면 앞이 캄캄 합니다. 어둠에 사로잡히게 되면 어디로 가야할지를 분간할 수가 없어 어둠속에서 방황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때에 하나님이 빛이심을 경험합니다. 그가 진퇴양난의 상황가운데서 하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빛이 되셔서 그를 어둠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어떠한 인생의 캄캄한 어둠도 물리쳐 주시는 강력한 빛이십니다. 빛되신 하나님께로 나올 때에 어둠이 물러가고, 광명한 빛가운데 살길을 가게 됩니다. 인생의 어둠의 때를 맞이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빛되신 주님께로 더욱 가까이 나아가십시오. 그 때에 어둠이 물러가고, 광명한 빛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2.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이 구원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람들마다 자신을 구원할 대상을 찾습니다. 돈이, 권력이, 사람이 자신을 멸망으로부터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들을 보면, 스스로 자기 자신도 구원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상황에 따라 변하고, 있다가도 없어지는 유한한 것들을 의지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의지하다가, 도리어 그것으로 인해서 위험과 멸망에 처하게도 됩니다.
다윗이 구원을 받은 것은 그가 세상 것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달려 갔기 때문입니다.
5절에서, 다윗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환난날에 나를 그의 초막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숨겨주시고, 높은 바위에 두시리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환난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며 하나님의 초막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구하시고 살펴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할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으십니다. 이를 믿을 때에 우리는 환난 중에 주님을 찾게 되고, 주님의 구원하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3.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은 내 생명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생명의 능력에서 ‘능력’은 히브리어 “마오즈” 를 쓰는데, 요새,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은 내 생명을 단단히 붙잡고 계시는 반석과 같은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강한 원수와 대적이 내 생명을 쥐고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생명을, 그리고 원수의 생명까지도 주관하시는 유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확실히 알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기에 그는 대적 앞에서 평안할 수 있었습지다.
그런데 다윗이 언제 이러한 하나님을 경험했는지 아십니까? 바로 두려울 때에, 환난가운데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환난의 때를 부정적으로만 보지 마십시오. 어둠가운데 있을 그 때에 빛되신 주님을 보게 됩니다. 멸망당하는 것 같을 때에 구원의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죽을 것 같을 때에 생명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움이 올 때에, 그 때에 하나님을 경험하여 더 알아갈 것을 기대하시고, 주눅들지 마시고 담대하게 그 두려움을 맞이 하시기 바랍니다.
2.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어떤 분들은 환난의 때에, 하나님을 만나눈 분도 계시지만, 어떤 분은 사탄의 계략에 빠지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주는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 주는 것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어서 사람들을 다스리고자 합니다.
1946년대에 남아프리카 지역에 점이 한창 유행했었다고 합니다. 어느 여름 유명한 점쟁이가 점괘를 내놓습니다. ❝올해는 대기근이 들 것이다!❞ 그의 말은 입소문을 타고 남아프리카 전역으로 일파만파 퍼졌습니다. 자연재해의 징후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지만, 소문이 자자했던 탓에 사람들은 분명 기근이 올 것이라 믿었습니다. 급기야 여름이 끝나기 전에 2만 명 넘는 농부들이 재난을 피해 짐을 챙겨서 도시로 떠나버렸습니다. 그런데 그해 기근이 될 만한 가뭄이 들지 않았습니다. 아프리카는 비도 충분히 내렸고 기후도 좋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땅에 기근이 왔습니다. 남아프리카에 닥친 기근은 가뭄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기근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농작물을 돌보지 않고 떠났기 때문입니다.
내가 두려움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사탄의 올무에 빠져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두려움으로 나를 지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을 정탐하고 왔습니다. 12명이 정탐을 하고 왔는데 10명은 겁에 질렸습니다. 10명의 정탐꾼이 보고하기를, 가나안 땅에 사는 사람들은 거인과 같이 강하고 큰 사람들이고, 그들이 사는 성들은 높고 튼튼해서 점령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속에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죽이려고 이곳까지 오게 하셨다면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사탄이 하는 일은 성도를 두려움을 주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게 합니다. 어둠에 빠져들게 하고, 우울하게 만들고 절망하게 만듭니다. 이럴 때는 하나님이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의 영인 사탄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우리의 믿음을 흔들 때에 우리는 다윗과 같이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빛이요, 구원이요, 생명의 능력입니다. 우리교회의 빛이요, 구원이요, 생명이십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주님 안에서 태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탄의 권세를 이기는 것입니다.
3.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으로 인해 태연하다고 하면서, 느닷업이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일을 간구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어떤 일을 간구하고 싶으십니까? 그런데 우리가 구할 것이 사실 한가지 일만 구하겠습니까? 구할 것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여러가지를 구합니다. “주여, 주시옵소서.” 하면서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이것저것 여러가지를 구하게 마련입니다. 건강에 문제가 있다면 건강, 어떤 분은 돈을 구하기도 합니다. 좋은 직장이나 높은 사회적인 지위를 원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자녀, 가정도 중요한 기도제목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한가지 일을 구합니다.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다윗은 정말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확실히 알고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면, 자신을 두렵게 하는 어떠한 문제도 아무것도 아님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부자 할아버지가 손자를 불렀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그 손자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자신의 집에 있는 것들 중에 원하는 것은 다 줄테니까 그 중에서 한 가지만 가지고 가라고 했습니다. 정말 할아버지 집에는 신기하고 좋은 것들이 참 많았습니다. 아이는 할아버지에게 묻습니다. “할아버지, 정말로 내가 달라는 것은 다 줄거예요?” “그럼, 네가 돈을 달라하면 돈도 주고, 장난감을 달라하면 장난감도 주고, 이 집도 달라고 하면 집도 줄거야” 뭐든 한가지만 말만 하렴…” 그런데 그 아이가 이것저것을 보면서 생각에 잠기더니 자신이 가지고 갈 것을 정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뭐냐고 묻는 할아버지에게 이 아이가 무엇이라 말했는지 아십니까? “할아버지요” 라고 말하더랍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필요한 것들이 많이 있고, 이를 구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에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을 빛이요, 구원자요, 생명이라고 여기는 자들은 당연히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구할 것은 단 한가지였습니다. 하나님과 한 집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부수적인 것을 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를 구한 것입니다.다윗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할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그의 삶에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참 지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빛이요, 구원이요, 생명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어둠이요, 멸망이요,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빛, 구원, 생명 가운데 있다고 자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밝은 빛이 있어도 그 빛에서 멀어지게 되면 어둠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지면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생명으로부터도 멀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며 기대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됩니다. 죄로 부터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베풀어주신 십자가의 아름다움을 볼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에게 천국을 마련해 놓으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것입니다. 원수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것입니다. 사람들이 외면한다고 하더라도, 나를 관심하시고 위로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요 노래가 될 것입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릴 것이고, 여호와를 노래하며 찬송하겠다.” 고 말합니다.
사무엘하 23:1 에서 다윗은 자신을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시를 지어 드리고, 찬양으로 하나님을 높여드리고 노래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늘 가까이하면서,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멀리하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는 이들은 불평과 불만의 소리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이시간 하나님을 가까이 함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의 예배, 찬양, 기도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두려움의 상황들, 통제할 수 없는 어둠의 시간을 보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에 우리는 두 존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먼저 사탄입니다. 사탄은 두려움을 통해서 우리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두려운 상황에서 사람들이 시험에 빠지도록 만듭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실 수 있냐며 불만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어둠과 절망에 빠져서 살아가도록 만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윗은 그가 두려운 상황가운데 있을 때에, 하나님께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제대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삶의 두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을 멀리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과 한집에서 살기를 구했습니다. 그럴 때에 다윗은 하나님의 빛되심, 구원자되심, 생명되심을 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무엇을 구하면서 사시겠습니까? 세상 사람들과 같이 이것저것 구하면서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삶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알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담대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삶을 살아가심으로, 우리 삶의 두려움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늘 예배와 찬양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