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욤나무 / 신현식
궁상맞은 나무가 오도카니 서 있다. 산행을 끝내고 동네로 접어드는 고샅길에 들어설 때다. 키가 작달막한 고욤나무 하나가 뒤엉킨 덩굴 속에 열매를 대롱대롱 달고 길섶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칙칙한 갈색의 고욤은 어릴 적 가지고 놀았던 구슬 크기만 하다. 반가워서 하나를 따서 입에 넣어 본다. 온통 씨앗뿐이라 먹을 것은 약간의 과즙뿐이다. 그마저도 떫은 맛이어서 마저 먹을 수 없다.
옛날에는 그래도 이것들을 버리지 않았다. 따서 항아리에 묻어 두었다가 겨울이 되면 먹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밤, 곰삭아 죽처럼 된 고욤을 한 사발 더 와서는 삶은 고구마와 같이 출출한 속을 채우기도 했었다. 먹을거리가 많지 않았던 그 때는 달작지근하니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어렸을 적, 앞마당에 고욤나무가 있었다. 모양새가 감나무처럼 생겨서 감나무인줄 알았다. 하지만 웬일인지 잘 자라지 않았고, 감도 열리지 않았다. 열매 같은 것이 달렸지만 기다리던 감은 아니었고 고양이 목에 달아놓는 방울만한 고욤이었다. 누군가가 감씨를 뱉은 것이 싹을 틔운 것이었다. 어른들은 고욤나무에 좋은 종자의 감나무를 접 붙여야 감나무가 된다고 했다.
중학교 생물시간에 접목을 배웠다. 좋은 열매나 아름다운 꽃을 보기 위해서는 좋은 품종을 접목시켜야 한다고 했다. 장미도 그랬다. 찔레의 씨앗을 뿌려 찔레나무가 나오면, 그 찔레나무에 장미를 접붙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접목이 된 나무에서는 맛있고 충실한 열매가 열리고, 예쁜 꽃을 피우게 된다는 것이다.
고샅길의 고욤나무를 보며 한 동창생이 떠올랐다. 그 친구는 졸업하고 사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동창회에 나타났다. 그때서야 나오는 것을 보면 그의 삶도 지난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서리 내린 머리는 우리와 다를 바 없었지만 옷차림이나 언행이 고등학생때와 꼭 같았다. 처음엔 천진스럽고 싱그러웠으나 차츰 어딘지 모르게 가벼워 보이고 철없는 사람 같아 보였다.
물론 학창시절에는 혈기 방장하여 객기를 부리기도 했다. 철이 없어서 고약한 말이나 허튼 짓도 많이 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강산이 네다섯 번도 더 변했건만 그 친구는 정신이나 영혼이 조금도 자라지 않고 그대로였다. 세월을 잊은 그 친구의 모습이 한 동안 당혹스러웠다. 덩굴에 둘러싸인 이 고욤나무처럼 세월이 흘러도 자라지 않는 나무가 있고, 신통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도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주름이 깊어지고 머리는 반백은 되었건만 철없는 아이 같은 사람이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말을 함부로 하고 나이에 걸맞지 않게 가볍게 처신하고, 사려 깊지 않은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일 것이다.
우리는 인생의 길목에서 그런 사람들과 간혹 만나게 된다. 그런 사람 곁에는 사람이 없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자라지 않는 나무는 옹골찬 열매도 열리지 않고, 변변한 그늘도 없다. 그런 나무 아래에서 허기를 채울 수도 없고, 쉴 수도 없기 때문이리라.
그런 사람은 좋은 품종을 접붙이지 못한 나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훌륭한 선생의 가르침을 귀담아 듣지 않았고, 선인들의 길을 더듬어 보지 않았고, 가까운 사람들의 권유도 뿌리쳤고, 먼 훗날을 가늠해 보지도 않고 마냥 세월만 허송했으리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영국 왕립식물원 ‘큐 가든’에는 큰 감나무가 한 그루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져간 그 감나무는 내방객들의 눈에 잘 띄라고 식물원 광장의 가장 가운데에 심겨져 있다. 그 감나무가 그런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자태가 수려할 뿐만 아니라 잎을 다 떨어뜨린 늦가을부터 겨울동안 주홍의 감을 주렁주렁 달고 서 있는 환상적인 모습 때문이다.
입안의 덜떠름한 고욤을 뱉으며 다시 나무를 바라본다. 온갖 잡풀 속에 갇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고욤나무. 이 나무도 어릴 적 좋은 꿈을 가졌더라면 이런 처지는 되지 않았을 터이다. ‘큐 가든’의 감나무는 되지 않더라도 고즈넉한 산사의 감나무가 되어 붉은 감을 꽃처럼 달고 내방객들을 반길 것이다.
그보다 소박한 꿈을 꾸었더라도, 어느 과원의 감나무가 되어 뭇 사람들의 허기를 달래줄 단감을 달고 서 있을 것이다. 그도 아니면 어느 외딴 시골집의 감나무가 되어 외로운 촌로의 주전부리가 되어줄 홍시를 달고 서 있을 것이다. 노을 지는 들녘에서 애처롭게 서 있는 고욤나무를 오래도록 바라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