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이야기 역대 기생계에는 시가에 능한 기녀가 있고, 해학을 잘 하는 기녀가 있고, 얼굴이 뛰어난 기녀가 있고, 절의를 지킨 기녀가 있고, 효행이 가상한 기녀가 있으나 서화를 잘 하는 기생은 드물었다. 오산홍(吳山紅)은 서울 출신으로서 호를 홍월(虹月)이라 했으며 서화에 능하며 전람회에 입선되어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홍월이 기업(妓業)을 생업으로 하고 있었지만 시속의 잡가를 부르지 않고 오직 서화, 거문고, 문학 등에만 전심해서 선비와 함께 담소하고 놀기를 좋아했다. 홍월의 뜻이 고상해서인지 문장과 박식으로 명식이 높았던 우당(于堂) 윤희구(尹喜求)는 홍월에게 시를 보냈는데 내용을 보면 「천생의 아름다운 자질 용모 꾸며 남의 애 태우길 부끄러워 하네, 그대 머리 희어진 것 섭섭해 마오.버들강아지동풍따라 흰 것을 면케 된다오.」 했으니 홍월의 인물됨과 그의 생각을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정조 때 임연당 이호연은 난초를 보고 감회에 젖어 시 한 수를 읊었으니 「동쪽 땅에는 참 난초 없어 오직 난초 비슷한 것만 있네, 세상 사람은 잘못 알고 사랑해서 수풀 아래 늙음을 얻지 못하네.」 했다. 이능화(李能和)는 임연당(臨淵堂)의 운자(韻字)를 빌려 그 뜻과 상반되는 시를 지었는데 「동쪽 땅에 참 난초 있건만 골짜기 깊으니 아는 자 없네, 세상 사람들 어쩌다 발견하면 꽃다운 이름 천하에 진동하네.」 했다. 홍월의 난초 그림이 이 시와 같다고 했다. 금사(錦史)는 어린 시절에 벌써 기적(妓籍)에 올려졌기 때문에 보통학교에 입학하려 했지만 기생이라 하여 학교에서 허락하지 않아 이름을 고쳐 당시 한성여학교에 입학했다. 시에 대한 기재가 있었으나 종적이 탄로날까 두려워 시를 짓지 못했다. 그래서 「장충단 유감」이란 시가 유일하게 전해온다. 「단위 달 밝은 밤에 정령(精靈)은 지난 날의 회포 말하네, 진작 오늘의 일 알았던들 당일의 죽음 도리어 가벼웠을 것을」 중종 때 명기로 유명했던 상림춘(上林春)은 거문고를 잘 탔다. 삼괴당(三魁堂) 신종호(申從濩)가 상림춘의 집 앞을 지나다가 시 한 수를 읊었다. 「오교 첫 머리에 버드나무 서 있고 점차 해가 비치자 날씨 맑아지네. 발 가리고 앉은 옥같은 저 여인 대궐로 가는 문신 걸음 멈추네.」 어떤 화가가 이 시를 화제로 하여 그림으로 그렸고, 그 뒤 정사용(鄭士龍)은 상림춘에게 칠언율시를 지어 보냈는데 이르기를 「열세살에 시 배워서 기생 가운데서 이름 얻었네, 귀인들과 놀아서 사랑 받는데 음률에도 통하여 노래소리 맑구나, 아리따운 꾀꼬리 빗속 꽃사이 날아, 가는 빗방울 냇물에 떨어져 소리내어 흐르네. 재주는 백사마만 같지 못한데 어찌 상부의 아름다운 이름 누릴까.」 당시 영의정 홍언필(洪彦弼), 좌의정 김안국(金安國), 우의정 정순명(鄭順明) 등도 상림춘에 대해 시를 지어 주었다 한다. 천한 창기로서 일국의 재상에게서 글을 받은 것으로 보아 기예란 실로 귀중하다 아니할 수 없다고 이능화는 감탄했다. 취선은 호를 설죽이라 했는데 시기이다. 실제(失題)라는 제목아래 「화장을 빨리하고 거문고 줄튕겨 가벼운 휘장 위에 햇빛 붉게 비치네, 밤 안개 자욱하니 아침 노을 침침하나 해당화는 담 동쪽에 벌써 피었네. 선경(仙境)은 물처럼, 달빛도 밝아 나뭇잎 우수수 서리 내리네. 나 홀로 넓은 방에 잠을 이루니, 옥제개의 원앙새 부럽기만 하네」 이름을 알 수 없는 경기도 광주 기생의 남한산성에 대한 시를 보면 「하늘을 찌를듯한 저 남한산성에도 꼭대기엔 새 다니는 길이 있지요, 온조의 천년도읍 추억으로 사라지고 오늘에는 성조(聖朝)의 병영(兵營)이 있지요. 우뚝 솟은 대장기에 장군들 있고 흰 몽둥이 붉은 옷 수어병 있지요, 금양을 이나라 보배라 하지마오, 병자호란 남은 한 가슴 아파요.」 관홍장(冠紅粧)은 중종(中宗) 때 장안의 명기였다. 사인한주(舍人韓澍)는 그를 첩으로 맞이하여 딸 하나를 낳았다.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한주(韓澍)는 남해로 귀양을 가고 관홍장이 혼자 살았다. 당시 부호가와 조정 대신들이 구애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긴 세월이 지났는데도 조정에서는 여전히 한주를 공격했다. 관홍장은 노모를 봉양하고 있었는데 생활이 매우 곤궁하여 괴로움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이때 이천군(伊川君) (성종의 자)이 매파를 시켜 구혼해 왔다. 관홍장이 말하기를 「 내 비록 창가의 여자이긴 하나 이미 한사인(韓舍人)에게 몸을 허락했으니 재가할 수 없읍니다. 그러나 노모의 기아를 볼 수 없어 우선 공자의 말에 따르겠읍니다. 다만 한사인이 풀려서 돌아온다면 비록 나으리의 댁에서 아홉 아들을 낳았다 하더라도 구속받지 않겠읍니다. 이 약속이 이루어 진 뒤에야 나으리의 말에 따르겠읍니다.」 했다. 이천군이 약속을 하자 관홍장은 20여년 동안 이천군의 집에 살면서 많은 자녀를 낳았다. 그 뒤에 한주가 귀양에서 풀려났다. 관홍장은 이천군과 결별하고 그 사이에 낳은 자녀들도 버리고 한주의 집으로 돌아갔다. 관홍장은 먼저 그 딸을 시켜 길 위에서 한주를 맞이하게 했는데 딸은 아버지를 위하여 옷과 버선을 만들어 가지고 갔으며, 또 어미가 이천군을 버리고 돌아왔음을 말하자 한수는 「네 어미가 늙어서 망녕 들었단 말이냐? 내 어찌 감히 공자의 부실(副室)을 차지한단 말이냐. 다시 말하지 말라」 했다. 딸이 한주의 말을 어미에게 전했다. 관홍장은 목을 놓아 크게 울었다. 이천군은 관홍장을 나무라지 못했다. 뒤에 한수의 딸이 참판 홍인경(洪仁鏡)의 부실(副室)이 되었는데 이천군은 혼수를 마련하여 자기 딸과 다름없이 했다. 이천군의 아들은 모두 수(종실에게 주는 벼슬)가 되고 자손이 현달했다. 경기(京妓) 소춘풍(笑春風)도 당대의 미기로 이름이 높았는데 사인 이수봉(李秀**)의 사랑을 받다가 중년에 최국광(崔國光)의 첩이 되었다. 하루는 병으로 누워있는 소춘풍에게 「이제 네 병이 위독하니 소회를 말해 보라」 했다. 소춘풍은 「수봉이가 보고싶습니다.」 했다. 최국광은 묵묵히 앉아 대답이 없었다. 죽은 뒤에 최국광은 선영 아래 묻었으며, 종실 흥원군이 소춘풍을 사랑하여 일찍이 언약한 바를 지켜 묘전(墓前)에 제수를 차려놓고 사별을 아쉬워 하면서 전(奠)을 드렸다. 고려 조선을 거쳐 일제 때까지도 기생은 천인 계급에 속했다. 또 작희(作戱)의 대상물로 상식화되어 왔다. 그러나 그들에 의하여우리의 전통문화는 계승되었고 그들로 하여 발전되어 왔다. 특히 전통무용은 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해도 과장된 말은 아니다. 궁중대나(宮中大儺)에서부터 창우잡기(倡優雜伎)에 이르기까지 많은 공헌을 남겼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기가 나왔으며 일제치하에서는 항일기생으로 활약했다. 그들의 시문은 우리 문학사에 기여한 바 크고 정절과 효심은 후세 사람들에게 많은 교훈이 되고 있다. 국제적 외교 연석이나 국내 정계요인의 연석에 없어서는 아니되었다. 조선 시대에서는 역대 군왕과 대부분의 상신들이 기생 혁파를 주장했지만 관철되지 않았다. 만약 혁파를 시키면 사회에 더 큰 나쁜 영향이 미칠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귀빈의 말을 재치있게 알아듣고 재치있게 답을 했기 때문에 기생을 해어화(解語花)라 했는지 모른다
[출처] 기생이야기 (고시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