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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사랑이 역사가 되고, 역사가 사랑이 되었다
“역사를 움직이는 진정한 원동력은 오직 사랑이다”
인간 세상에서 남녀의 사랑은 언제나 뜨거운 관심사다. 그래서 사랑은 가장 은밀한 개인사 같지만, 알고 보면 가장 궁금한 세상사다. 사랑은 권력을 넘보기도 한다. 신라 문명왕후의 대담한 애정 공세는 오빠 김유신과 남편 김춘추를 운명 공동체로 만들어 삼국통일의 초석을 이루게 했다. 반면 권력은 사랑을 짓밟기도 한다. 고구려 대무신왕은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를 혼인시키고 그들을 제물로 삼아 낙랑국을 멸망시켰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는 찬란한 슬픔이 흐른다. 신여성 윤심덕은 자유연애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편견에 시달리다가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사랑은 역사를 움직이는 톱니바퀴로 작동했다.
한국사에서 남녀의 사랑이 갖는 가치는 단순한 관심사를 뛰어넘는 무게감이 있다. 역사를 사랑이라는 거울에 비춰보면 의외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백제 무왕인 서동은 무용담이 아닌 연애담, 즉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정을 통하고, 서동 서방을 밤마다 안는다네’라는 외설적인 동요를 퍼뜨려 왕의 자리에 올랐다. 반면 낙랑공주는 낙랑국의 무기고에 들어가 자명고각을 망가뜨려 호동왕자와의 사랑을 한국사에서 가장 비정하고 서글픈 사랑 이야기로 만든 주인공이다. 결국 낙랑공주는 아버지의 손에 죽는다. 이성계와 이방원에게 신덕왕후와 원경왕후가 없었다면, 조선을 건국하거나 왕권 강화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즉, 이성계가 신덕왕후의 보좌를 받아 대업을 이루었듯이, 이방원도 원경왕후의 활약에 힘입어 왕좌를 차지했다.
권경률의 『사랑은 어떻게 역사를 움직이는가』에는 한국사에서 가장 아름답지만 가장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 15편이 수록되어 있다. 가장 멀게는 소서노와 주몽의 사랑 이야기부터 가장 가깝게는 윤심덕과 김우진의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다. 사랑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힘을 주기도 하지만, 가장 많은 슬픔과 아픔을 주기도 한다. 또한 사랑의 배신과 배반은 사람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기도 한다. 서동은 ‘연애담’으로 나라를 얻었지만, 소서노는 사랑의 배신으로 나라를 잃었다. 윤심덕과 김우진은 사랑 때문에 동반 자살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사랑은 역사를 움직이고 역사는 사랑 때문에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 저자 소개
권경률
역사 칼럼니스트, 작가. 서강대학교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인생의 정답이 아니라 좋은 질문을 구하기 위해 역사를 읽고 생각하고 쓴다. 『월간중앙』에 ‘사랑으로 재해석한 한국사’에 이어 현재 ‘노래하는 한국사’를 연재하고 있다. 『모함의 나라』,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 『조선을 새롭게 하라』,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 등을 썼다. 페이스북, 유튜브, 팟캐스트에 ‘역사채널 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 목차
머리말 ㆍ 4
제1장 사랑은 힘이 세다
서동은 왜 공주를 사랑했을까? : 서동과 선화공주
서자를 왕으로 만들려면? ㆍ 15 공주를 얻은 서동의 연애담 ㆍ 18 ‘백제 첩자’가 서라벌에 잠입한 까닭 ㆍ 21 미륵의 이름으로 보낸 선화의 ‘효도 선물’ ㆍ 25 ‘즉위담’이 된 ‘연애담’ ㆍ 28
사랑의 힘 : 김유신과 문명왕후
사랑의 도피극 ㆍ 31 천관녀의 진짜 정체는 무엇일까? ㆍ 34 진지왕 혈육과 가야의 신흥 진골 ㆍ 38 춘추공의 외교전 ㆍ 43 가락국 김씨, 주류가 되다 ㆍ 45 외교관의 미소 속에 대장군의 칼을 감추고 ㆍ 47
이방인의 사랑법 : 처용과 아내
불륜남은 역병을 퍼뜨리는 귀신 ㆍ 50 처용은 어디서 온 누구인가? ㆍ 53 이 집 저 집 다니며 연회를 즐기다 ㆍ 56 도깨비들을 탄압하다 ㆍ 59 아내의 불륜은 큰 문제가 아니다 ㆍ 61 화끈한 ‘복수의 노래’ ㆍ 64
사랑은 동맹이다 : 왕건과 아내들
삼한을 통합할 임금 ㆍ 67 왕건과 궁예의 동상이몽 ㆍ 71 잇달아 부부의 연을 맺다 ㆍ 73 충성스러운 후원자들을 장인으로 삼다 ㆍ 76 결혼동맹 혹은 인질납비 ㆍ 79 삼한의 사위, 왕서방 ㆍ 82 결혼동맹의 후유증 ㆍ 84
노예가 된 아내를 찾아서 : 정생과 홍도
홍도의 행방을 수소문하다 ㆍ 88 조명연합군과 왜군의 남원전투 ㆍ 91 ‘해적 상인’에게 노예로 팔려가다 ㆍ 94 오랑캐에게 잡혀가느냐, 목숨을 끊느냐 ㆍ 97 부부는 인륜의 시작이다 ㆍ 101
제2장 사랑을 배반하다
사랑의 배신 : 소서노와 주몽
동부여에서 쫓겨오다 ㆍ 107 토착세력과 신흥세력의 결혼동맹 ㆍ 110 고조선의 영광을 되찾다 ㆍ 112 천하의 중심이자 신성한 나라 ㆍ 115 나쁜 남자의 사랑 ㆍ 118 역사에서 어머니를 지우다 ㆍ 122
정치의 제물이 된 사랑 :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대무신왕의 소국 병합이 부른 비극 ㆍ 125 부여를 무너뜨리고 후한의 침입을 물리치다 ㆍ 128 호동왕자의 야심 ㆍ 131 아내의 목숨값과 남편의 자살 ㆍ 134 치명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ㆍ 138 아버지를 살리고, 아버지의 손에 죽다 ㆍ 140
사랑, 나라를 뒤흔들다 : 연산군과 장녹수
광기 어린 사랑 ㆍ 143 “신하의 도는 임금을 따르는 게 아니다” ㆍ 145 사림을 공포로 몰아넣다 ㆍ 149 왕을 능멸하는 폐단을 고치지 않을 수 없다 ㆍ 151 성균관에 기생을 모아놓고 흥청망청 놀다 ㆍ 154
궁녀의 사랑을 배신하다 : 숙종과 장희빈
궁녀를 품에 안다 ㆍ 158 궁녀는 ‘왕의 여자’ ㆍ 161 ‘기사환국’으로 ‘기사회생’하다 ㆍ 164 “미나리는 사철, 장다리는 한철” ㆍ 168 인현왕후의 복위와 장희빈의 죽음 ㆍ 171
잔인한 사랑 : 혜경궁 홍씨와 사도세자
세자빈에 간택되다 ㆍ 173 영조의 닦달과 편벽 ㆍ 176 66세에 15세의 계비를 맞다 ㆍ 179 내관을 죽여 그 머리를 나인들에게 보이다 ㆍ 182 정적들에게 먹잇감이 되다 ㆍ 184 가슴을 치며 슬픔을 삭이다 ㆍ 186
제3장 사랑의 슬픔
불귀신의 짝사랑 : 선덕여왕과 지귀
품어서는 안 될 연심 ㆍ 191 여왕, 앞일을 내다보다 ㆍ 193 성스러운 혈통의 할머니 임금 ㆍ 197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ㆍ 200 불귀신을 푸른 바다 밖으로 내치다 ㆍ 204
사랑의 보상 : 이성계와 신덕왕후
어린 신부를 경처로 맞이하다 ㆍ 207 이성계를 후원한 권문세족 상속녀 ㆍ 210 이방원과 함께 역성혁명을 돕다 ㆍ 214 집안을 일으켜 나라를 세우다 ㆍ 217 원통함을 씻어주다 ㆍ 220
전쟁 같은 사랑 : 이방원과 원경왕후
나라를 안정시키려고 악역을 자처하다 ㆍ 222 명문 재상가와 신흥 무인 집안의 혼사 ㆍ 224 남편의 대업을 위해 ㆍ 226 무기를 빼돌리고 정보를 캐내다 ㆍ 230 죽거나 죽이거나 ㆍ 232 정략결혼의 슬픈 종말 ㆍ 234
사랑을 극형으로 다스리다 : 어우동과 남자들
기생에게 빠져 아내를 버리다 ㆍ 238 그녀의 치마 속에서는 모두 평등하다 ㆍ 241 “어우동을 극형에 처함이 옳다” ㆍ 245 폐비 윤씨 방지법 ㆍ 247 어우동은 정절의 희생양이었다 ㆍ 251
인습에 희생되다 : 윤심덕과 김우진
“이 유언서를 부쳐주시오” ㆍ 253 조혼남이 신여성을 만났을 때 ㆍ 256 새롭고 낯선 스타에 대한 삐뚤어진 관심 ㆍ 261 스캔들에 상처 입고 연극배우에 도전하다 ㆍ 265 광막한 황야를 달리는 인생 ㆍ 268
주 ㆍ 271
📖 책 속으로
서라벌에 도착한 그는 서동이 되어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정을 통하고, 서동 서방을 밤마다 안는다네.” 노래에 제 암호명을 넣음으로써 선화의 짝이자 화친의 사자로 서동이 서라벌에 와 있음을 알린 것이다. 여기에는 결혼 상대가 정해졌으니 신라 왕은 약속을 이행하라는 숨은 뜻이 담겨 있었다. 합의한 대로 진지왕은 선화를 궁에서 내보냈다. 부여장은 인질 신부를 맞이하고 알야산성을 접수했다. 이로써 화친은 이루어졌다. 큰 공을 세운 그는 익산과 알야산성을 근거지 삼아 정치적 야심을 키워나갔다. 이윽고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왔다. 위덕왕과 혜왕이 연달아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 법왕마저 병석에 누우면서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던 백제의 왕위가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서동은 왜 공주를 사랑했을까? : 서동과 선화공주」(본문 24~25쪽)
결혼동맹과 호족 연합으로 왕건은 ‘삼한의 사위 왕서방’이 되어갔다. 태조는 신라의 항복을 받아 삼한통합의 마침표를 찍기로 했다.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이 천년 고도 경주를 약탈했을 때 신라는 사실상 끝장났다(927년). 견훤은 경애왕(景哀王)을 핍박해 자살하게 하고, 왕비는 강제로 욕보였다. 그리고 헌강왕의 외손자인 김부(金傅, 경순왕)를 왕위에 앉히고 포로와 병장기와 보물들을 다 거두어 돌아갔다. 신라를 구원하러 간 왕건은 공산전투(대구)에서 견훤에게 참패를 당했으나, 고창전투(안동)에서는 지방 세력의 도움을 받아 설욕했다(930년). 호족들은 큰 전투의 승패에 따라 고려냐 후백제냐, 왔다 갔다 했다. 왕건은 신라의 항복이 대세를 판가름할 것이라고 보았다. 망해가는 나라지만 천년 왕국의 정통성은 강력한 명분이자 힘이었다. 「사랑은 동맹이다 : 왕건과 아내들」(본문 82~83쪽)
주몽은 ‘나쁜 남자’였다. 그는 졸본의 소서노가 가진 재산과 토착세력이 필요했을 뿐이다. 이제 고구려가 자리를 잡은 이상 얼마든지 버릴 수 있었다. 소서노는 철저히 기만당했다.……자식들의 뜻을 알아차린 소서노는 비장한 결심을 굳혔다. 주몽과 부부의 연을 끊고 고구려를 떠나기로 한 것이다. 제 갈 길을 가겠다는 것이었다. 단, 정산은 분명히 했다. 그녀는 주몽에게 요청해 금은보화를 나누어 가진 뒤 분연히 남쪽으로 향했다. 미지의 세계로 총총 발걸음을 내디뎠다. 소서노의 뒤를 비류와 온조, 10여 명의 신하가 따랐다. 행렬을 이룬 백성도 많았다. 오랜 세월 신뢰를 쌓은 졸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낙랑을 지나 마한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마한의 왕에게 재물을 주고 그 땅의 서북 100여 리를 얻었다. 소서노는 하북위례성(서울 강북)을 도읍으로 삼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국호는 ‘백제’라고 했다. 「사랑의 배신 : 소서노와 주몽」(본문 121~122쪽)
1694년 4월 12일, 숙종은 인현왕후를 서궁 경복당으로 맞아들이고 장옥정은 희빈으로 강등시켰다. 인현왕후는 저간의 마음고생 때문인지 종기로 고생하다가 1701년 세상을 떠났다. 장희빈이 복위할 것이라는 소문이 궁에 돌았다. 이때 숙빈 최씨의 고변이 나왔다. 장희빈이 저주굿을 벌여 인현왕후를 해쳤다는 것이다. 장희빈이 받은 것은 오매불망 기다리던 복위 교서가 아니라 한때 사랑한 남자가 보낸 사약이었다. “첩의 본분을 망각하고 왕비에게 방자했다.” 숙종이 장희빈에게 붙인 죄목이다. 왕은 한때 사랑한 여자를 희생양 삼아 본부인과 첩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자 했다. 후궁의 왕비 책봉도 금지했다. 궁녀의 사랑은 그렇게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권력은 늘 사랑을 배반하고 아프게 했다. 「궁녀의 사랑을 배신하다 : 숙종과 장희빈」(본문 172쪽)
1392년 7월, 왕위에 오른 이성계는 곧바로 누구를 세자로 삼을지 신하들과 의논했다. 배극렴(裵克廉), 조준, 정도전 등은 아들들 가운데 나이와 공로를 살펴서 정할 것을 권했다. 많은 신하가 건국에 공이 큰 이방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태조는 강씨의 맏이 방번을 세자로 삼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동안 그녀가 후원하고 보필한 공을 어여삐 여기고 보상하려는 것이었다. 태조의 의중을 헤아린 신하들은 그렇다면 성격이 경솔한 이방번(李芳蕃)보다 차라리 막내 방석이 낫겠다고 했다. 결국 강씨 소생인 이방석(李芳碩)이 10세의 어린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태조가 얼마나 강씨를 존중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강씨는 개국과 함께 현비(顯妃)로 봉해졌다. 조선 최초의 왕비였다. 태조의 총애와 신임이 두터웠기에 현비 강씨의 영향력은 상당히 컸다. 세자 책봉에도 깊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랑의 보상 : 이성계와 신덕왕후」(본문 217쪽)
어우동은 곧 감옥에 갇혔다. 그녀의 입에서 정을 통한 간부(姦夫)들의 이름이 술술 나왔다. 장안의 호색한들이 굴비 엮듯이 끌려왔다. 무려 수십 명이었다. 그녀는 지체 높은 종친의 아내였지만 남자의 신분을 가리지 않았다. 왕족·대신·유생·서리·양인·노비가 그녀의 치마 속에서는 모두 평등했다. ‘동등하게 어울린다’고 해서 ‘어우동’인가? 어우동의 남자들은 의금부·형조·한성부로 나뉘어 심문을 당했다. 종친 수산수(守山守) 이기(李驥)는 단옷날 그네뛰기 구경하는 박씨에게 접근해 정을 통했다. 종친의 사위 이승언(李承彦)은 길을 지나가는 어우동을 보고 집까지 따라가 동침했다. 옆집 살던 내금위 구전(具詮)은 박씨가 정원에 나오자 담을 뛰어넘어 간통했다. 어우동을 탐내 구애한 남자들이다. 「사랑을 극형으로 다스리다 : 어우동과 남자들」(본문 243~244쪽)
🖋 출판사 서평
사랑, 권력을 얻다
고려를 세운 왕건은 결혼을 담보로 호족들과 연합했다. 결혼은 난세에 협력과 보답을 약속하는 보증수표와 같았다. 삼한을 통합하고 고려를 건국하고 새 시대를 열기까지 왕건은 6명의 왕후와 23명의 아내를 얻었다. 제1비 신혜왕후는 유천궁의 딸이자, 왕건의 적처(嫡妻)가 되었다. 정주 유씨(柳氏) 가문은 군대를 먹이고 재울 만큼 재력이 풍부해 왕건의 최대 후원자가 되었다. 제2비 장화왕후의 집안은 군사력, 경제력, 신분 등 내세울 게 없었지만, 호족들의 협력을 이끌어내 왕건이 후백제와 결전을 치르게 했다. 제3비 신명순성왕태후는 유긍달의 딸, 제4비 신정왕태후는 패서 호족인 황보제공의 딸이었다. 제5비 신성왕태후는 사촌 누이였고, 제6비 정덕왕후는 또다른 정주 유씨(柳氏) 가문의 딸이었다. 이렇듯 왕건은 결혼동맹과 호족 연합으로 ‘삼한의 사위’ 왕서방이 되었고, 충성스러운 후원자들을 장인으로 삼았다.
문명왕후는 김유신의 누이동생이자 김춘추의 아내이며 문무왕의 어머니다. 문명왕후는 김유신과 김춘추가 삼국통일에 힘을 모으게 하고, 그 임무를 완성할 문무왕을 낳았다. 김유신은 낭도들과 함께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삼국통일이라는 시대정신을 부각했다. 하지만 문명왕후는 삼국통일을 하기 위해서는 국력을 일으킬 인재들을 모으고 나라에 충성할 세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신라 최고의 귀공자였던 김춘추와 결혼한 명성왕후는 얼마 후 법민(문무왕)을 낳는데, 이는 삼국통일의 포부가 빚은 사랑의 결실이었다. 김유신과 김춘추는 명재상과 대장군으로서 신라의 국익을 위해 호흡을 맞추었다. 한 손은 외교술을 펼치고, 한 손은 칼을 휘두르며 일심동체가 되었다. 661년 왕위에 오른 문무왕은 패수(대동강) 이남에서 신라·백제·고구려·가야를 아우르면서 김유신과 김춘추의 오랜 숙원인 삼국통일을 이룩했다.
사랑보다 잔인한 것은 없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는 한국사에서 가장 비정하고 서글픈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호동왕자는 낙랑공주에게 “그대가 나라의 무기고에 들어가 북을 찢고 나팔을 부순다면 내가 예를 갖춰 맞이하리다. 안 그러면 맞이하지 않을 것이오”라며 북과 나팔을 못 쓰게 만들라고 시켰다. 북과 나팔은 적병이 오면 저절로 울렸다. 낙랑공주는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몰래 무기고에 들어갔다. 북의 가죽과 나팔의 입을 베어버리자 호동왕자는 아버지 대무신왕에게 권해 낙랑국을 급습했다. 낙랑국의 왕 최리는 원통한 나머지 낙랑공주를 죽이고 성에서 나와 항복했다. 낙랑공주는 왜 호동왕자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자명고각을 망가뜨려 아버지의 손에 죽었을까? 사랑이었을까? 호동왕자도 그해 겨울 자살했다. 아버지의 명에 따라 아내에게 못할 짓까지 했건만 돌아온 것은 어머니를 농락했다는 파렴치한 낙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비정한 어리석음이 부끄러워 몸부림치다가 스스로 칼에 엎어져 목숨을 끊었다. 어쩌면 호동왕자와 낙락공주의 사랑이 정치의 제물이 된 것은 아니었을까?
사도세자는 영조가 맏아들 효장세자(진종)를 잃고 나이 마흔에 다시 얻은 아들이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성군의 재목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학문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자 영조의 엄한 책망이 이어졌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고 직성이 풀릴 때까지 야단쳤다. 사도세자의 마음은 알게 모르게 병들어갔다. 혜경궁 홍씨는 영조의 닦달과 편벽이 심하다고 여겼다. 혜경궁 홍씨는 남편이 말도 못하고 가슴앓이하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다. 결국 영조는 정성왕후의 혼전(魂殿)에서 세자를 폐하고 뒤주에 가두었다. 폐세자는 한여름에 숨 막히는 뒤주에서 8일간 버티다가 2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혜경궁 홍씨는 가슴을 치며 슬픔을 삭여야 했다. 영조는 총명하고 효심이 지극한 세손(정조)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올리고 ‘역적 죄인의 자식’이라는 낙인이 찍히지 않도록 했다. 남편의 죽음을 묵인하고, 자식을 품에서 놓아준 끝에 혜경궁 홍씨는 이들 부자가 국왕 반열에 올라서는 데 일조했다. 버림의 미학이요, 애틋한 모정이다.
사랑만 한 슬픔이 어디 있으랴
원경왕후는 지혜롭고 담대했다. 현명한 조언과 과감한 행동으로 이방원의 입지를 180도 바꿔놓았다. 정도전이 왕자들이 거느린 시위패를 폐지했는데, 이는 정적들의 사병을 빼앗기 위해서였다. 사실상 무장해제를 당한 것이다. 그 긴박한 순간에 원경왕후는 병장기를 빼돌려 숨겨놓았다. 또한 정도전이 왕자들을 척살하려는 계획을 입수해 대책을 의논하기도 했다. 결국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또한 이방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방원을 설득해 초반의 열세를 극복하고 난을 진압하게 했다. 그러나 이방원은 조선을 안정시키려면 왕권을 강화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방원은 왕권에 위협이 되는 세력을 추호도 용납하지 않았다. 피를 가장 많이 본 것은 왕비의 혈육, 외척이었다. 특히 원경왕후의 남동생 4형제가 매형에게 목숨을 잃었고, 맏아들 양녕대군도 폐세자가 되었다. 결국 원경왕후와 민씨 일족은 이방원이 왕좌를 차지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으나 잔인하게 척결되었다.
“대단히 미안하나 이 유언서를 본적지에 부쳐주시오.” 1926년 8월 4일 새벽 4시, 일본 시모노세키항을 출발해 현해탄을 건너 부산으로 향하는 부관연락선 도쿠주마루 3호실 선객이 남겨놓은 메모였다. 배를 멈추고 안팎을 수색했으나 선객의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바다에 몸을 던진 것 같은데 몇 시에, 어느 지점에서 그랬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남자는 목포 대부호 김성규의 맏아들이며 극작가·연극평론가로 알려진 김우진이었고, 여자는 평양 출신으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나온 조선 최고의 소프라노 윤심덕이었다. 김우진은 유부남이었다. 김우진과 윤심덕의 현해탄 정사 사건은 곧 세상에 알려졌다. 부관연락선에서 조선 사람이 사랑 때문에 자살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들은 예술적 동반자로서 신뢰와 정을 쌓아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비아냥댔다. 그러나 윤심덕과 김우진은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그들을 죽음으로 이끈 것은 예술적 동병상련이었다. 윤심덕은 유서를 남기는 심정으로 〈사의 찬미〉를 불렀다. “광막한 황야를 달리는 인생아 / 너는 무엇을 찾으려 왔느냐 /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평생 /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