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284 '카타이 지방 전역에 걸친 산지의 광맥에서 캐낸 검은 돌의 일종이 장작처럼 탄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 돌은 나무보다도 더 잘 탄다. 더구나 여러분에게 말하건대 저녁에 불을 잘 붙여놓으면 이 불은 밤새도록 계속되고 더러는 아침까지 가기도 한다. 장작과 같은 나무도 충분히 있지만, 카타이 전역에서는 이 돌들이 태워지고 있다. 그들이 이 돌을 때는 이유는 비용이 적게 들고 나무를 많이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장작처럼 잘 타는, 산지의 광맥에서 캐낸 검은 돌은 석탄이다. 문명의 대 수수께끼가 이 구절을 보는 순간 풀어졌다. 앞에서 서경(현 쿠차-고조선의 평양이고, 주나라의 호경이고, 고구려의 평양이고, 신라와 고려의 서경, 조선의 평양)의 호수가 70만호가 된다는 집사의 이야기를 인용한 적이 있는데, 평균 5인 가족으로 본다면, 좀 들쑥날쑥도 하겠지만 350만명의 인구가 한 지역에서 반만년을 살아왔다는 것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식량과 땔감만 계산한다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식량은 다른 지역에서 운송해 올 수 있다고 하겠지만, 장작을 1년 내내 공급한다면, 타지방에서의 공급은 만만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인근 100리의 산은 100년 안에 동이 나서 벌거숭이가 될 수밖에 없다. 바로 사막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도시가 즉 황제의 수도가 100년 이상은 존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 존재를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이 검은 돌 즉 석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댓가로 황제의 수도는 항상 검은 석탄가루와 그 재로 인해 항상 검은 먼지로 가득 찰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연행록에서 늘 보게 되는 연경(북경, 한양-트루판)의 특징으로 등장하는 검은 먼지가 다름아닌 이 석탄가루인 것이다. 너무나 꼼꼼하고 정밀하게 연구하시고 정확한 자료의 전거를 늘 올려 주시는, 그 에너지와 혜안과 성실성에 늘 감동할 수밖에 없는 천상희 선생님의 '청나라의 북경은 어디에 있었나'/다음까페 ;대륙조선사연구회, 천상희칼럼 5호에서 인용한다.
'압록강을 건넌 뒤부터 비로소 서남쪽으로 향해 가고, 구련성을 지나가서는 서쪽 혹은 북쪽으로 갔다. 요동에서 심양까지는 축방(丑方)으로, 심양에서는 술방(戌方)으로, 고가자(孤家子) 이후부터는 모두 미방(未方)으로 향해 갔다.
압록강을 건너서부터 북경까지의 땅은 모두 모래였다. 요동 벌판을 들어선 뒤부터 오가는 거마(車馬)가 더욱 많고 모래가 먼지처럼 가늘어, 바람이 살짝 불어도 곧 휘날려 흡사 연기나 안개 같고, 이따금 눈앞에 있는 사람을 분별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런데 산해관 안은 더욱 심하여, 수레바퀴가 닿는 곳에는 마치 잿가루를 키로 부친 듯 자욱하고, 사람의 의복ㆍ모자ㆍ얼굴에 붙으면 털어도 떨어지지 않으며, 입안에서 와삭와삭 소리가 났다. 그래서 비록 열 벌 바른 상자일지라도 모두 스며든다. 또 시장 점포나 인가에 둔 기물과 수레 안의 자리는 닭꼬리비[鷄尾箒]로 끊임없이 털어 버려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잠깐 사이에 한 치 남짓 쌓인다. 도성의 큰 거리는 매양 물을 뿌려 적셔 주고 있다.
---(계산기정(薊山紀程) 제5권 부록(附錄) 도리(道里))
영평부(永平府)-서쪽으로 연경이 500리 떨어져 있다.(중략)
사하역(沙河驛)-이곳에서는 길이 모래돌 가운데로 나 있는데 모래가 말 배까지 묻힌다. 만약에 바람을 만나게 되면 먼지가 하늘을 덮어 사람은 길을 가지 못한다. 연(燕) 땅의 길 중에서 가장 괴로운 곳인데, 모래 길이 수십 리나 된다. 역 마을에는 역시 무너진 성이 있다.
찬바람 눈을 불고 들판 길 평평한데 / 寒風吹雪野途平
바다 넓어 하늘 같고 해는 멀리에 가로놓여 있다 / 海闊如天日遠橫
말을 묻어 버리는 황사 삼십 리 / 沒馬黃沙三十里
넓은 수레바퀴 느려서 소리 없이 구른다 / 廣輪遲轉不成聲
---(계산기정(薊山紀程) 제2권)
압록강을 건너서 북경에 이르기까지는 땅이 모두 모래이고, 요동 들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왕래하는 거마가 더욱 많고 모래는 더욱 미세해서 바람만 불면 휘날려서 마치 연기나 안개가 낀 것과 같다. 관내(關內)로 들어가면서 더욱 심해서 비록 바람이 없는 날이라도 수레바퀴, 말발굽이 지나간 뒤에 일어나는 것이 마치 횟가루가 날듯 해서 사람의 옷과 모자에 붙는다. 교자(轎子) 안에서는 사(紗)를 내려서 막지만 워낙 미세하기 때문에 새어 들어오기가 더욱 쉬워서 잠깐 사이에도 언덕처럼 쌓인다.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북경(北京)은 아무리 추워도 땅이 몇 치[寸] 밖에 얼지 않는다. 하루 종일 큰 눈이 와도 밤이 지나고 나면 눈 덩어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남쪽 지방 기후와 비슷하다.
인구가 조밀하여 내뿜는 입김이 따뜻한 기운을 퍼뜨려서 그런 것이 아닐까?(중략)
무릇 이 지방 토질은 요동에서 북경까지가 모두 곱고 부드러우면서도 찰져서 해동(解凍) 때나 장마 때는 바퀴에 붙어 지나가기 어렵고, 또 집 벽에다 바르면 빗물이 스며들 걱정이 없다. 그런데 곱고 부드러운 이 흙은 다 모래여서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마치 연무(煙霧)처럼 먼지가 인다. 그래서 아무리 큰 눈이 쏟아져도 이 먼지와 뒤범벅이 되어 버리면 이내 눈발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되는데 그중에도 사하역(沙河驛)이 제일 심하다. 산해관 안쪽은 왕래하는 거마(車馬)가 더욱 많아서 밤낮으로 먼지를 일으키어 아주 바람이 없는 때라도 꼭 잿가루가 날리는 것같이 분분하다. 이것이 사람의 의복이나 모자에 붙으면 잠깐 사이에 모습을 변화시켜서 동행자끼리도 언뜻 보면 누가 누군지 분간하지 못할 지경이 된다. 머리카락이나 수염에 붙으면 닦아도 떨어지지 않고, 입속으로 들어간 것을 씹으면 사각사각 소리가 나기도 한다.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 보면, 이 먼지가 종이 창문을 뚫고 들어와 이불 위에 쌓여 있다. 심지어는 겹겹으로 된 장롱이나, 두세 겹씩 봉해 놓은 병 속에까지 뚫고 들어가니 참으로 괴상한 일이다. 저자 가게나 인가에 벌여 놓은 기물들은 닭털로 된 털이개를 가지고 끊임없이 털어 내는데, 잠시라도 멈추면 또다시 쌓이곤 한다. 바람이 불면 길 가는 사람은 눈을 뜨지 못한다. 그중에서도 북경이 가장 심한데, 이곳은 석탄(石炭) 앙금으로 된 지방으로서 가루가 쌓여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옛날 문자의 ‘치진(緇塵 세상 풍진 속에 분주하여 의복이 더럽혀짐)’이란 것이 곧 이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연원직지(燕轅直指) 제6권)
"북경의 토질은 검고 부푼 데다 수레와 말이 갈고 다니는 통에, 바람이 불 때면 먼지가 하늘을 덮어 바로 앞에 있는 사람마저 보이지 않는다. 시장의 점포들이 모두 닭털 총채를 들고 손 놀릴 새 없이 물건에 쌓인 먼지를 턴다.
몹시 추운 계절에도 땅이 한 치 남짓 얼 뿐, 하루 종일 눈이 와도 밤만 지나면 흰 점 하나 없어, 남방의 기후와 같아진다. 아마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면서 불때고 숨쉬는 훈훈한 기운이 따뜻한 기운을 펼치는 것인가 보다."
---(담헌서(湛軒書) 외집 8권(外集 卷八) 연기(燕記) 경성기략(京城記略) '
- 계산기정에서 '그런데 산해관 안은 더욱 심하여, 수레바퀴가 닿는 곳에는 마치 잿가루를 키로 부친듯 자욱하여....'
연원직지에서 '그 중에서도 북경이 가장 심한데, 이곳은 석탄 앙금으로 된 지방으로서 가루가 쌓여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담헌서에서 '북경의 토질은 검고 부푼 데다 수레와 말이 갈고 다니는 통에....'등의 어구는 마르코 폴로가 묘사하는 카타이지방의 '불에 타는 검은 돌'(석탄 )과 그 재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청나라의 북경이라는 것은 조작이고 트루판과 우루무치 사이의 종남산(지금도 그 쪽 천산의 주산 이름이 총난산[宗南山] 혹은 바그달산[박달산, 백두산, 배달산]그 주변의 산을 난산[南山]이라고 부른다.)을 사이에 두고 남북 양성을 가지고 있는 조선의 한양을 연경(트루판 주변지역이 옛 연나라 땅이니, 연경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혹은 북경이라고 부른 것이 확실하다. - 지금도 우름치 혹은 오름치라고 부르고 한자로는 오로목재(烏魯木齋)로 표기한다. 두 지명이 다 앞부분은 우리말 훈 뒷부분은 한자 음으로 그것도 훈민정음식의 발음으로 되어 있다. (오름峙, 오르목岾[고개 재]) 오르목이 있으면, 그 아래 들판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바로 그 아래 드ㄹ판(트루판)이 있다. 여기서 3만리도 더 떨어져 있는 거기에 어떻게 선명하게도 훈민정음의 발음으로 지명과 산명이 박혀 있을까? 그 청나라 북경은 조선말 훈민정음을 썼단 말인가? 아니다. 현 북경이 사막 지대란 말인가? 아니다. 그곳(소위 청나라 북경)이 바로 조선의 센타요, 천하의 센타이기 때문이다. 바로 세종대황제께서 천하의 온 제후국들의 語音(나랏말씀)이 중국(중원, 중앙의 황제직할지)과 달라서 그 뜻을 不相流通하매, 훈민정음을 창제 반포하셔서 쉽게 익혀 날마다 편하게 쓰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들판과 오르목재와 종남산과 박달산과 남산의 이름이 아직도 지도에 박혀 있는 것이다. 감숙성 이동 지역에서 중앙조정으로 가는 사신들의 연행록에는, 옥문관을 나서서 소륵하(압록강이라고 조작 - 아니면, 원래 압록강이라고 불렀는지는 알 수 없다)를 건너면, 바로 고비사막(옥문관과 트루판 사이의 사막)으로 들어가게 되니, 반드시 사막이 등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고비사막을 서북방으로 건너는 중간기점이 하미다. (계산기정에서는 영평부로 나와 있다.) 이 하미에서 서쪽 트루판 방향으로 60킬로정도 가면, 지금은 沙湖(지금은 하미분지 가운데이지만, 그 명칭으로 보아서는 옛날에는 호수였던 듯)라는 지명이 있다. 계산기정에서 이야기하는 沙河일 수밖에 없다. 거기에 역참이 있어서 사하역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연원직지에서 '북경(北京)은 아무리 추워도 땅이 몇 치[寸] 밖에 얼지 않는다. 하루 종일 큰 눈이 와도 밤이 지나고 나면 눈 덩어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남쪽 지방 기후와 비슷하다.'고 나와 있다.
담헌서에서 '몹시 추운 계절에도 땅이 한 치 남짓 얼 뿐, 하루 종일 눈이 와도 밤만 지나면 흰 점 하나 없어, 남방의 기후와 같아진다. 아마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면서 불때고 숨쉬는 훈훈한 기운이 따뜻한 기운을 펼치는 것인가 보다.'고 나와 있다.
이 글들을 보면, 북경은 한겨울에도 사막지대의 영향을 받아 남방의 기후와 비슷하다는 묘사를 하고 있다. 이 묘사들이 현재의 북경의 기후라는 말인가? 또한 이 글들은 남방에 대해서 북방의 기후가 남방의 기후와 같아진다고 말하고 있지, 서방의 기후가 남방의 기후와 같아진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이 연행록의 사신들이 현장이나 마르코 폴로같이 태산북두의 고산을 넘어 서방으로 가지도 않았다. 현재의 중앙아시아의 사막을 건너간 것은 결코 아니다. 고비사막(옥문관과 트루판 사이의 사막)을 건너간 것일 뿐이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도 뜨거운 '고비사막의 아득한 大河'를 건너 가서 정조를 만나고 돌아온 영남(경상도- 경주[돈황지역] 상주[장액과 란주사이의 지역으로 추정됨] 방면의 지방, 현재의 감숙성, 마르코 폴로의 탕구트 지방) 사림의 연행록일 뿐이다. 수백종의 연행록이 대부분 이 '뜨거운 고비사막의 아득한 大河'를 건너 간 기록이다. 연행록을 읽을 때 명심해야 할 포인트이다.
첫댓글 압록강을 지나면서부터 사막인데, 우루무치 지역이 북경이라면, 압록강은 어디가 되는 것일까요?...
가령 란주에서 트루판을 가는 (영남 사림의)사신의 연행기를 반도사의 연행기로 조작할 때, 란주-과주는 반도의 서울-의주로 조작하고, 과주의 옥문관에서 건너가는 소륵하를 압록강으로 조작합니다. 소륵하를 건너서부터는 마치 현 만주를 지나 영평부를 거쳐 현 북경으로 가는 것처럼 조작했지만, 실제 사신단은 과주에서 하미(영평부로 조작)를 거쳐 트루판으로 가는 것입니다. 조작서들의 대부분은 과주-트루판은 조금의 지명의 조작과 언어의 조작을 하고(조선말 하는 사신이 중국어 하는 현지인과 필담 등등) 지형과 기후는 그대로 놔 둡니다. 그 사이를 요동이라고 부르지요.
북경에서 고비사막을 거쳐 우루무치를 갔다는 이야기 인데요... 그 당시 길이 있었던 것인지요?... 보통 역사에서 길은 시안을 중심으로 실크로드의 길을 따라서 진행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요?.. 뭔가 좀 시원하게 해석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연행기는 대부분 돈황의 동쪽의 제후국에서 오지만 멀든 가깝든 반도에 남아 있는 연행기는 서울에서 신의주로 맞추어 버립니다. 물론 서안보다 훨씬 동쪽이나 남쪽에서 출발할 수도 있지만요. 소위 실크로드(황제가도)의 북로가 바로 이 길이 됩니다. 물론 카라샤르(얜치)에서 남로로 내려 갈 수도 있읍니다.
역사에 따르면, 청은 수도를 3번 이동하였습니다.. 그것도 조작으로 보시는 것인지?.. 아니면, 마지막으로 이동한 지역이 '우루무치'지역이 되는 것인지?...
역사에 청은 존재한 적이 없읍니다. 그 역사조작에 우리가 헷갈리고 있을 뿐입니다. '마지막 황제' 후이의 아버지 광서제가 고종이고 광서제의 아버지 순친왕이 대원군입니다.
청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서구인들이 기억하고 있는 여진족의 '타타르'의 영토는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는지?... 조선후기, 그 영토의 광범위함에 저 조차도 놀라고 있습니다만...
키타이는 고려를 나타내고, 청은 여진을 나타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분명히 세력이 다릅니다... 고려시대의 지명과, 조선시대의 지명을 한번에 해석하시는 것은 아닌지요?...
조선을 세운 이성계가 여진 출신이라고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분명히 같은 세력이 맞겠읍니다. 그러나 이런 논리계열은 조작된 개념들의 논리계열입니다. 실상은 고조선 땅에 고구려와 신라와 고려와 조선이 이어져 왔읍니다. 모든 지리지는 가령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조선의 평양이 고려의 서경이고 신라의 서경이고 고구려의 평양이고 주나라의 호경이라고 모든 지명을 한번에 해석합니다. 달리 해석하는 법이 있다면 좀 일러 주십시요.
제가 아는 상식으론 예를 들어 평양은 하나입니다. 다른 평양은 황제국의 지명을 가져다 쓴것이져... 현 미국의 많은 지명이 그렇죠... 지명을 가져다 쓴다고 그 곳이 월래 평양이 아닙니다 .또한 현재 일본에 동경이 있는 이치가 그러 한것입니다 두 번째는 차이나 타운, 코리아 타운 개념일 수 있습니다
그것을 구별하는 능력이 우린 아직 미약합니다.. 조선부터 이어온 역사조작을 겨우 십수년 연구로 구별 하긴 어렵습니다
신동국여지 승람에, 평양/서경/호경등이 동일하다는 내용이 나온다면, 해당 내용은 고려할 필요가 있되, 그 지역이 어디이었는 가는 다시한번 여러 각도의 접근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몹시 추운 계절에도 땅이 한 치 남짓 얼 뿐, 하루 종일 눈이 와도 밤만 지나면 흰 점 하나 없어, 남방의 기후와 같아진다.-> 이 부분은 전형적인 사막의 기후로 알고 있는데, 우루무치 지역도 역시 같은 사막의 기후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우루무치는 티클라마칸 사막에서 330km, 고비 사막에서는 더 멉니다...
'송도(대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 1'의 고비사막 부분을 다시 한번 읽어 주십시요. 타클라마칸 사막과 붙어 있고 소위 서역 북로와 남로가 감싸고 있는 롭사막이 고비사막입니다. 즉 트루판은 현재는 고비사막 안에 있는 것입니다. 100여년 전까지는 물논의 벼농삭가 끝이 보이지 않는 들판(트루판-졸본)이었읍니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 고비사막 안에 있는 대 오아시스일 뿐이었지요. 현재의 고비사막은 정말 조작일 뿐입니다. 공부에 많은 성취 있으시길 빕니다.
고비사막이 현재의 위치가 아니라는 말씀이시군요...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은 산악초원지대로, 사막이 들어설 공간이 없어 보입니다. 유일한 사막존재의 가능성 지역은 '우루무치'를 넘어선 더 북쪽의 사막 유사지역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타클라마칸 사막과 연결된 사막의 위치는 현재의 돈황이 있는 지역정도 눈에 띕니다만....롭사막의 위치가 정확하게 어떻게 되는지?...
김규형님, 구려가 진나라에 대해서, 신라가 구려에 대해서, 고려가 신라에 대해서, 조선시대에 고려에 관해서 포폄을 하거나 왜곡을 시키거나 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역사조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역사무대를 옮기거나 축소하거나 그 주체를 알아 볼 수 없게 변모시키거나 유물 유적 서물을 훼절하거나 새롭게 만들거나 해야 조작이지요. 조작은 단 한번 1920~30년대에 있었읍니다. 그 조작되기 전의 본 무대와 역사 사건과 그 흐름과 그 주체들에 대해서 아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러면 단번에 누가 무엇을 어디로 어떻게 왜 조작했는지가 명확해집니다. 그것을 알아 보는 데,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선택과 집중의 문제입니다. 역사연구를 어디로 집중해야 하는가 하면, 본 무대의 쎈타, 즉 중원, 중국의 이동조작과 그 주체의 변모조작과 그 유물 유적 서물의 훼절과 모조의 과정에 대한 해명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반도사거나 중국사거나 인도사에 집중하면 그 조작된 결과물에 의해서 세뇌되고 주입되고 조작된 의식에서 벗어날 수가 없읍니다. 그 의식에 의해 끊임없이 방해 혼란 교란당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쎈타의 조 작 과 정 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나온 결정판이 동방견문록, 집사, 대당서역기입니다. 그렇게 짜릿하게 재미가 없다하더라도, 그 본체의 실상을 알아가는 재미도 제법 솔솔합니다.
너무 사서의 조작에 많은 촛점을 두시는 것은 아닌지요?...
청과 조선의 역사를 모두 조작으로 간주한다면, 역사의 촛점을 맞추어야 되는 근거가 사라지게 됩니다.
개인적인 소견은 이렇습니다... 현재 우리들에게 지명으로 파악되는 도시는 가장 최근에 까지 우리와 관계된 조상들이 살았다는 근거가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한반도'입니다. 가장 정확한 지명들이 남북한에 골고루 분표하며, 역사적 사건들이 대입되어 있습니다. 이와 아주 유사한 보다 큰 역사의 장이 China대륙입니다. 그것은 한반도로 오기전에는 바로 그 지역이었다는 반증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중앙아시아도 역시 그렇습니다. 고조선과, 고구려의 중심무대가 그 곳이라기 보다는, 그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근세에 까지 그곳에 살았던 것이 아닌지 생각이 됩니다.
선생님의 접근도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기 위한 뛰어난 해석과 식견이시며, 마땅이 후학들의 공부가 이어져야 하는 내용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입니다... 이와함께, 추가적으로 있을 수 있는 가능성도 함께 고려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김재만선생님 송도(대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2 '반치음의 비밀'을 한번 더 보아 주십시요. 여진은 요인, 스키타이, 고려인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 타타르가 바로 고려이고, 조선입니다. 그 중앙조정이 카라샤르와 트루판에 있는 천하의 중국입니다. 여진의 금나라 천하와 거란의 요나라 천하라는 말은 어불성설이고, 단지 우리를 헷갈리게 만드는 조작일 뿐입니다. 구글어쓰를 찾으셔서 트루판과 하미근처를 확인해 보십시요. 분명히 사막이 확실합니다. 연행기의 영평부와 북경(연경)의 사막이 바로 여기입니다. 법현의 서역기를 한번 읽어 보시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돈황을 떠나 하미로 가면서 고비사막 이라고 합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따르면, 제가 올린 아래의 지도에서 1780년대의 타타르의 영토는 모두 '고려'가 됩니다만...ㅎㅎㅎ... 강력한 도움의 말씀을 주십니다...
영토개념의 국가는 아시아사에서는 19세기 후반에나 나오는 개념입니다. 제가 영토라고 하지 않았읍니다. 중앙아시아를 중주로 삼고 있는, 트루판(북경, 연경, 한양)에 앉아 계신 정조의 KOREA(고려)의 천하였읍니다. 그 사방 5천리가 황제 직할의 제후국들이 있고, 더 이상의 지역들은 손님으로 대접받는 조선천지임이 분명합니다. 김선생님이 자부심을 가지셔도 무방합니다. 제가 동방견문록의 탐색 연재를 시작한 것은 그것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니, 앞으로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부분 다시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히 역사연구는 사서를 통해서 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유물 유적은 보조적이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유물 유적은 너무나 노골적으로 목적의식적으로 조작되는 것이 그 존재이유이니까요. 사서는 조작을 하되 완벽을 기하기가 쉽지 않은 너무나 많은 자료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모순점을 틈타서 그 실상을 찾아가야 합니다. 정작 제가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한반도사나 중국사가 아니라 중앙아시아사의 조작과 지명이동과 주체의 변모 조작의 해명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읍니다. 선생님이 마치 청과 조선의 역사가 조작이 아니란 듯이 말씀하시는 것은 듣기가 조금 민망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은, '역사의 축소'와 '역사의 조작'은 분명이 다른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고려시대 거란의 고려침입, 조선시대, 청의 조선 침입이, 축소된 역사라면, 확대해석으로 해당의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지만, 그 것자체가 조작이라면, 역사의 해석은 다른 방향으로 접근 해야 한다는 것이죠...
제가 생각하는 사서와 유물유적의 접근은 선생님의 생각과 다릅니다. 사서는 인간이 붓으로 쓴 기록물이지만, 유적은 도자기 또는 공예품등으로, 그들을 상징하는 문양과 문화가 직접적으로 반영되며, 그들의 무덤에서 출토된다는 면에서 당시 해당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을 나타내준다는 면에서, 더욱 신빙성을 갖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붓으로 쓸 수 있는 것은 조작이 쉽습니다. 그러나, 예술품들은 쉽게 따라서 조작하기 어렵습니다..
맞습니다. 조작하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게 되어 있지요. 그래서 조작세력은 바로 그 점을 이용합니다. 제 글에서 유물 유적의 발굴에 대한 언급이 무수히 많을 것입니다. 중조의 유물은 단일 박물관으로는 반도의 중앙박물관에 가장 많이 옮겨져 있읍니다. 혹은 아예 신조품을 만들기도 하고 많이 파묻기도 합니다. 선택적으로 파괴하기도 합니다. 아예 발굴을 하지 않거나 변조를 해서 발표도 합니다. 자 누가 그 일을 합니까? 누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보호합니까? 누가 21세기에 창덕궁을 떠억하니 새로 만들어 세웁니까? 역사 진실을 추구하는 우리입니까? 이 세계질서를 만들어 나가는 저 조작세력입니까?
역시 김선생님이십니다. 선생님의 남다른 통찰력과 천재가 빛나게 느껴집니다. '역사의 해석은 다른 방향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감이 잡히셔서, 그렇게 매진한다면 저는 평생 선생님을 존경하고 위해서 모든 일을 다할 각오가 되어 있읍니다. '숨겨놓은 실상'의 본문을 찾아내기 위해서, 그 본문을 숨기기 위해 흩뜨려 놓은 조작사는 각주(FOOTNOTE)로 읽어 낼 수 있다면 선생님의 그릇의 크기는 기량무한이기 때문입니다. 그 '타타르' 전체를 홍익인간하는 조선인의 그릇의 크기를 배우고 따라 가서 드디어 그런 그릇이 되어버리는 것이 '다른 방향'의 핵심이라 할 수 있겠지요. 단순히 역사적 사실찾기와 역사 퍼즐맞추기의 달인
이 되는 것이 목적이 될 수 없지요. 이 불행한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구도의 길을 떠나 내가 진실이 되어버리는 것, 나의 정체가, 나의 가능성이, 나의 잠재력이, 나의 천재가, 나의 장점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 그래서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문사철의 궁극 목적이 아니겠읍니까? 역사를 알아야 나를 알 수 있읍니다. 틀린 지도로 내 삶의 기준점을 잡으면, 내 에너지와 능력과 마음을 그 지도 조작자에게 빼앗겨 버리는 것입니다. 나의 성장만큼 지도가 바로 보이고 역사가 바로 보일 것입니다. 또한 역사가 바로 보이는 만큼 내가 성장할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방향의 바른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문제제기 감사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