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시 29:1-11
1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2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3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4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5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6 그 나무를 송아지 같이 뛰게 하심이여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송아지 같이 뛰게 하시도다
7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8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시키시도다
9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10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원하도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11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시 29:1-11 /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 다윗의 노래] 하나님의 자녀들아, 여호와를 찬양하여라. 영광과 권능을 우리 주님 여호와께 돌리고 높이높이 드높여라. 2) 여호와의 영광스런 이름을 찬양하여라. 주께서 거룩하신 모습으로 거둥하실 때 주님 앞에 무릎 꿇어 엎드려라. 3) 여호와의 목소리 바다 위에 쩌렁쩌렁 영광의 하나님 호통치시니 주님의 목소리 드넓은 저 바다에 울려 퍼진다. 4) 여호와의 목소리 이렇듯 힘차시다. 여호와의 그 목소리 장엄하시다. 5) 여호와께서 한번 소리 지르시자 송백도 힘없이 부러지는구나. 여호와께서 한번 소리 지르시자 아름답다는 레바논의 송백도 힘없이 부러지는구나. 6) 레바논 산맥이 송아지처럼 펄쩍 뛰는구나. 시룐 들송아지같이 펄쩍펄쩍 뛰어오르는구나. 7) 여호와께서 호령하시자 섬광이 번쩍번쩍 8) 여호와께서 호통치시자 광야가 흔들흔들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까지도 마구 뒤흔드시는구나. 9) 여호와께서 소리 지르시자 암사슴이 깜짝 놀라 산통하여 새끼를 낳고 나무마다 잎사귀가 우수수 떨어지고 주님의 전에 있는 이마다 하나같이 하나님 홀로 영광스러운 분이라고 입을 모으는구나. 10) 여호와께서 하늘 큰 바다에 앉아 계심이여, 영원토록 임금되어 다스리시도다. 11) 여호와 우리 주님 주님의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주님의 백성에 복 내리시어 평화가 깃들이게 하시도다.
다윗이 우렛소리를 듣고 만물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을 아름답게 노래합니다.
예배하라(1-2) 권능 있는 자들은 세상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게 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영적으로는 곧 우리를 가리켜서 “너는 내 아들이다!”, “너는 나의 딸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성도들이 이러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백성은 영광과 능력을 하나님께 돌리고 거룩한 옷을 입고 예배하라 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옷을 입고, 하나님이 주신 속죄의 은총을 입으라 합니다. 신약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롬 13:14),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감사함으로 예배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 길이라 했습니다.
여호와의 소리가(3-9)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올 때 요단강이 창일하면 그 소리를 다윗이 듣고서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는 우렛소리가 들리고 많은 비가 오는데도 그 물 위에서 하나님이 호령을 하시는 것처럼 듣습니다. 이런 소리를 듣고서 놀라기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위대한 일을 하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주 강한 것으로 알려진 레바논 백향목이라 해도 벼락에 꺾일 때, 나무가 송아지처럼 뛰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높은 산들도 송아지처럼 뛰게 하십니다. 번개가 치면 불도 나와서 나무가 타기도 하게 하십니다. 광야도 진동하게 하십니다. 가장 예민한 짐승 중에 암사슴도 우렛소리와 나무가 꺾일 때 암사슴이 놀라 낙태합니다. 즉 생명의 출산도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무엇보다 우리 인생도 하나님께 태어나고 죽는 것도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복을 주시는 여호와(10-11) 하나님은 홍수 때에도 자리를 만드시고 앉으셔서 다스리십니다. 심판도 하시고 구원도 하십니다. 아무리 어려움이 있어도 구원받을 자는 구원되고, 멸망 받을 자는 멸망합니다. 오히려 홍수 때에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났고, 사랑이 확실히 드러났습니다. 영원토록 왕으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홍수 가운데 찬송을 부를 수 있는 것은 홍수가 나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이 있다는 결과를 알기 때문입니다.
적용: 당신은 왕이신 하나님을 폭풍 중에서도 찬양했던 다윗처럼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까?
옛날에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개 한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개가 특별히 자랑하는 것은 자기가 아주 잘 달리는 선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개가 토끼 한 마리를 쫓아갔는데 그만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대 망신이었습니다. 다른 개들이 마구 놀렸습니다. 그러자 그 개의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자네들이 알아야 할 것은 그 토끼는 목숨을 위해서 뛰었고, 나는 그냥 저녁 식사거리를 위해서 뛰었다는 점일세!”
< 설 교 >
여호와의 영광
시편 29:1-11 / 메튜 헨리 주석
이 시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엿볼 수 있다.
Ⅰ. 세상의 훌륭한 왕들도 위대하신 하나님께 경의를 표하라는 요구. 우뢰 소리를 다윗은 그 자신과 다른 왕들로 하여금 위대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라는 부르심으로 풀이했다. 여기에서 다음을 주목하라.
1. 이러한 의무를 행하도록 요구받는 자들은 누구인가? "너희 권능있는 자들아(1절). 권능을 갖고 있으며 상속과 산업으로써 그 권능을 이어받게 되었고 왕실의 피가 그 혈관 속으로 흐르고 있는 너희 유력한 자들아!" 이 세상의 훌륭한 자들이 하나님께 경의를 표해야 하는 것은 주로 위대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들보다 무한히 위에 계시므로 그들이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절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권능을 그로부터 얻고 있고 그것을 그를 위해 써야 하며, 그들이 그것에 대해 그로부터 입고 있는 은혜에 보답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2. 이러한 요구가 얼마나 자주 반복되어 있는가?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가 세 번씩이나 반복되어 있다. 이것은 권능 있는 자들이 이러한 의무를 태만히 하며 그 일을 하도록 설득되기는 어려운 일이라는 점과, 동시에 왕들이 그것을 진심으로 지지한다면 그것은 인간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 나라의 세력을 크게 돕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예루살렘은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올"때에 융성하게 되는 것이다(계 21:24).
3. 그들이 요청받고 있는 것은 "여호와께 돌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어떤 것을 필요로 하신다든가, 우리의 어떤 선물로 혜택을 입으실 수 있다든가, 또는 그가 갖고 있지 않는 어떤 것을 우리가 그에게 드릴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누가 처음으로 여호와께 드렸겠는가?), 그의 영광과 우리에 대한 그의 다스리심을 인식하는 것을 그는 그에게 드리는 선물로서 기쁘게 간주하시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너희 자신을, 그리고 나서 너희 봉사를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무한하신 위엄과 항거할 수 없는 권능을 지니신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정하고 그에게 찬미를 돌릴지어다. 그리고 그의 섭리에 의해 어떠한 영광이나 능력을 너희에게 맡기셨든지 간에 그것을 그의 봉사에 바쳐 그의 영광을 위해 쓰여질 수 있도록 하라. 그에게 너희 면류관을 드리고, 그것을 그의 발아래 놓으라. 그에게 너희 왕홀, 너희 칼, 너희 열쇠를 드려라. 너희가 그 모든 것을 사용함에 있어서 그의 이름과 찬미를 위한 것이 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그의 손에 드려라." 왕들은 그들의 영광과 능력에 의해 그들 자신을 평가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보다 더욱 무한한 영광과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그것을 돌려야 한다. 권능 있는 자들에게 이러한 경의를 요구하는 것은 다윗 나라의 고관들, 그 지역의 귀족들, 그 지파의 방백들에게 지시된 것이거나(그리고 그것은 그들을 촉구하여 하나님의 제단에서 더욱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일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이 이 일에 매우 태만한 사실을 관찰했기 때문이다.), 또는 그가 칼로써 이스라엘의 조공국이 되도록 만든 이웃 나라들에게 이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조공국이 되도록 설득하기 위해 지시 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면류관을 쓴 머리도 왕 중의 왕이신 자 앞에 숙여져야 한다. 여기에서 권능있는 자들에 대한 말은 모든 사람에게도 적용된다-"하나님께 경배할지어다"그것은 영원한 복음의 개요이며 핵심이다(계 14:6, 7).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1) 종교적 경배의 본질. 그것은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것이다(2절).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알게 하신 곳에 있으며, 거기에는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이 있다. 우리가 그의 이름에 합당한 모든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의 영화를 위해 가장 훌륭하게 말하고 행한다. 할지라도 그 합당한 과제에는 무한히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합당한 감정과 겸양심을 갖고 그가 그 자신에 대해 나타내신 그 계시에 응답할 때, 그때에 우리는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어느 정도 돌릴 수 있다. 만일 듣고 기도함으로써, 그리고 그 밖에 다른 믿음의 행위로써 하나님으로부터의 은혜를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우리의 일로 삼아야 한다.
(2) 종교적 행사를 이행하는 것에 대한 규정.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1] 우리가 경배하는 대상.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위엄은 "거룩한 예복"("거룩함의 아름다움")이라 일컬어지고 있다(대하 20:21). 하나님을 경배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의 아름다움을 주시해야 하며 그를 숭배해야 한다. 그는 무한히 두려우시므로 그 무엇보다도 경외해야 하며, 뿐만 아니라 무한히 아리따우시므로 그 모든 것보다도 사랑해야 한다. 특히 우리는 그의 거룩함의 미를 주목해야 한다. 천사들은 이것에 대해 항상 찬미하는 것이다(계 4:8).
[2] 경배하는 장소, 성소는 그 당시 "거룩한 산"("거룩함의 아름다움") 이었다. (48:1, 2; 렘 17:12). 성소의 아름다움은 거기서 거룩한 지시에 의해 행해지는 경배와 즉 산에 있는 모형과 정확하게 부합되고 있다. 이제 복음 아래서, 그리스도인들의(청결함이 그들의 아름다움이다)엄숙한 집회가 하나님께서 경배받으셔야 할 장소가 되고 있다.
[3] 경배의 태도, 우리는 모든 종교적 행사에서 거룩해야 하며, 하나님과 그의 뜻과 영광을 위해 자신을 바쳐야 한다.
이와 같이 거룩함 속에는 아름다움이 있으며, 그것은 모든 경배의 행위 위에 훌륭한 아름다움을 부여한다.
Ⅱ. 이 요구에 대한 타당한 이유. 다음과 같은 면을 깊이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할 의무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1. 하나님은 스스로 충족하시며 이것은 "여호와" -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그의 이름 속에 암시되어 있다. 그 이름은 이 짧은 시편 안에 열여덟 번이나 반복되어 있다. 즉 세 구절을 제외한 각 구절에 두 번씩, 그리고 이 세 구절 중 두 구절에 한 번씩 나와 있다. 나는 이 모든 시편들 중에서 이처럼 많이 그의 이름이 나와있는 것을 본적이 없다. 세상의 권능 있는 자들로 하여금 이 이름에 의해 그를 알고 그것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도록 하자.
2. 만유에 대한 그의 주권. 사람들을 다스리는 자들은 그들 위에 그들을 다스리는,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시편 기자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설명하고 있다.
(1) 자연의 왕국에 대한 그의 주권. 자연의 원인에 대한 놀라운 결과와 자연의 능력에 의한 작용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깨달아야 하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근원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즉 우리는 우뢰와 번개와 비속에서 그의 영광과 능력을 볼 수 있다.
[1] 그의 영광. 뇌성을 발하는 것은 영광의 하나님이시다(3절). 뇌성을 발하는 것은 하나님이시며(우뢰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이다." 욥 37:2)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할 정도로 그 우뢰소리가 무서울 뿐만 아니라, 거기에 수반되는 빛, 즉 번개는 매우 찬란하다. 청각과 시각을 이보다 더욱 자극하는 것이 없으며,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이 두가지의 숙련된 감각에 의해 사람들의 마음속에 어리석은 자들도 변명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영광을 증명하시려는 것과 같이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우뢰가 "여호와의 소리"로 불리워져야 하는 여러 가지 특별한 이유를 들고 있는데, 그것은 그것이 위로부터 온다거나 어떤 사람의 지시나 통찰 아래 있지 않으며 그 소리가 크고 멀리까지 미치기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주 특히 시내 산에서 우뢰로 말씀하셨고 우뢰로써 이스라엘대적들을 패주시키셨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영광의 하나님의 소리가 여기에서는"물 위에" "많은 물 위에" 있다고 일컬어지고 있다(3절). 그것은 광대한 대양. 창공 아래 있는 물에까지 미친다. 또한 그것은 짙은 구름, 창공위에 있는 물까지도 움직인다. 우뢰 소리를 듣는 각 사람들은(그 귀가 우뢰 소리에 울리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므로"(4절) 가장 높이 있는 자들을 겸손케하고(그 누구도 "하나님과 같은 뇌성을 말할"수 없기 때문이다) 가장 교만한 자들을 떨게 만들기에-그의 소리가 그처럼 무서운 것이라면 그의 무기는 어떠하겠는가?-충분하다는 것을 시인할 것이다. 뇌성이 말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경건한 능력을 그처럼 많이 갖고 계시는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숭배심 속에서 우리 마음을 그에 대한 위대하고 높으며 존경스런 생각으로 가득 채우도록 하자. "주 하나님이여! 주는 매우 위대하시나이다."
[2] 그의 능력(4절). "여호와의 소리가" 그 결과로 나타나듯이, "힘 있도다." 즉 그것은 가사를 행한다. 자연의 역사를 기록하는 자들은 우리와 번개의 경이적인 결과를 심지어 자연의 원인에서 일반적인 과정으로 나온 경이적인 결과라고까지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자연의 하나님이 가지신 전능함의 결과로 보아야만 한다.
첫째, 벼락에 의해 나무들이 꺽어지고 쪼개져 왔다(5,6절). 우뢰속에 있는 "여호와의 소리가"자주 "백향목을 꺽으셨으며," 가장 강하고 가장 장중한 레바논의 백향목들까지도 꺽으셨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백향목을 흔들고 때로는 솟아오르는 꼭대기 가지를 꺽었던 거센 바람을 말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지진도 또한 나무가 뿌리박고 있는 땅 자체를 흔들었고 "레바논과 시혼"을 뛰게 만들었다. "가데스 광야"도 그처럼 진동했으며(8절). 나무는 바람에 의해 땅은 지진에 의해 흔들렸으며 나는 이 모든 것이 오히려 우뢰에 의해 흔들렸다고 풀이하고 싶다. 하몬드 박사는 이것을 이스라엘에게 도전하고 다윗에게 대항했던 이웃 나라들, 즉 레바논 숲 근처에 자리잡고 있었던 아람 사람들이나 헬몬 산에 접하고 있었던 아모리 사람들, 그리고 가데스 광야 주변에 있었던 모압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같은 이웃 나라 사람들의 간담이 서늘게 되고 그들이 정복된 것을 언급하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둘째, 번개에 의해 불이 붙여졌고 그것에 의해 짐과 교회가 불살라져 왔다. 우리는 뜨거운 번갯불에 대해 읽을 수 있다(78:48). 따라서 우뢰 속에 있는 여호와의 소리는 여기에서 "화염을 가르시도다"라고(7절), 즉 하나님께서 화염에게 지시하여 어떤 일을 수행하시기에 합당하다고 여기실 때는 그것을 땅 위에 흩어지게 하시리라고 언급되어 있다.
셋째, 우뢰의 무서움은 암사슴을 낙태케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무엇보다도 당연히 생각한다. 암사슴은 소심한 짐승이어서 우뢰소리에 매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때로 용감하고 강한 자들까지도 우뢰에 떨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시인 호레이스는 우뢰와 번개의 두려움으로 인해 무신론에게 개심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다윗의 이 시편의 내용과 어느 정도 비슷한 것을 묘사하고 있다(lib 1, ode 34).
우뢰는 여기에서 "삼림을 말갛게 벗긴다"고 적혀 있다. 즉 그것은 숲의 짐승들을 매우 두렵게 하므로 그들은 숨었던 굴 속이나 덤불에서 떠나 결국 발각되게 된다. 그것은 나무들을 쓰러뜨리므로 그것들에 의해 가리워져 있던 땅을 드러나게 된다. 우뢰가 칠 때마다 우리는 이 시편을 생각하도록 하자. 그리고 우리가 이 시편을 노래할 때마다 우리가 때로 들었던 무서운 우뢰 소리에 대해 생각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알을 함께 결부시키자. 그리하여 우리가 그에게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촉구하도록 하자. 그리고 이처럼 무서운 소리 이외에 또 다른 그의 음성이 있는 그를 찬미하도록 하자. 그 또 다른 음성으로, 그의 복음에서 나오는 조용하고 작은 소리로,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므로 그 소리의 공포가 우리를 두렵게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2) 섭리의 왕국에 대한 그의 주권(10절). 하나님은 인간 세상을 다스리시는 자로서 찬미 받으셔야 한다.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시며,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그는 앉아서 휴식하시며 스스로를 즐기실 뿐만 아니라, 그가 "하늘에 세우신" 그 보좌에(103:19) 왕으로서 앉으시어 그곳에서 인생들의 모든 일들을 인지하시고 그것에 대해 명하시며, 또한 그의 의지대로, 그의 의지의 뜻대로 모든 것을 행하신다. 이에 대해 다음을 주시하라.
[1] 그의 나라의 권능. 그가 "홍수 때에 좌정하시도다." 땅위에 그의 터를 세우신 것과 같이 강들 위에도 그의 보좌를 세우셨다(24:2). 이 아래 세상의 밀물과 썰물, 그리고 그 속에서의 일들의 동요와 변혁, 이러한 것들은 영구하신 하나님의 평정이나 계획을 조금도 흔들지 못한다. 그의 대적들 의도전이 큰 물에 비유되고 있다(93:3, 4). 그러나 여호와는 그 위에 좌정하시어 그것을 짓이기고 정복하시며 사람들이 품은 온갖 계획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신다. 여기에 "홍수"로 번역되어 있는 단어는 노아의 홍수를 언급하는 경우 외에는 결코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언급되어 있는 것을 바로 그 일에 관한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은 불경건한 자들의 세상을 심판하시고 처형하시는 재판장으로서 그들을 쓸어 버리셨던 그 홍수 위에 좌정하셨었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쓸어 버리셨던 그 홍수 위에 좌정하셨었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그 홍수 위에 좌정하시면서 "땅을 침몰하는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창 9:11; 사 54:9)는 그의 약속대로 그것이 다시 땅을 덮지 않도록 노아의 물들을 제재하고 계신다.
[2] 그의 나라의 영존성.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그의 통치에는 종지부가 있을 수 없으며, 또 있지 아니할 것이다. 그의 나라의 행정은 영원에서 나온 그의 뜻과 일치하며 영원을 위한 그의 계획에 의거한다.
(3) 은혜의 왕국에 대한 그의 주권.
[1] 여기에서 그의 영광은 그 왕국의 신하들로부터 받는 숭배 속에서 매우 찬란히 빛난다(9절). 그의 백성들이 그 자신과 그의 마음을 발견하고 그들의 찬미로 그를 섬기는 "그 전에서 모두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모든 사람들이 세상에서 그것을 보거나 또는 적어도 "먼 데서 볼 수"있을 것이다. (욥 36:25). 그러나 그의 영광이 언급되어 지는 곳은 오직 교회뿐이다. "주의 지으신 모든 것이 주께 감사하며"(145:10)(즉 그것은 감사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며), 그의 성도들은 그를 송축하고 그의 지으신 것 속에 나타난 그의 영광에 대해서 말한다(145:10).
[2] 그의 영광은 그가 그 왕국의 신하들에게 하사하시는 은총 속에서 매우 찬란히 빛난다(11절).
첫째, 그는 그들에게 그의 봉사를 위한 자격을 부여하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시리로다." 모든 악한 일에 대적할 수 있도록 그들을 강하게 하시고, 모든 선한 일을 위하여 힘을 공급해 주신다. 따라서 그들은 연약함에서 벗어나 강해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연약함 속에서 힘을 완전케 하실 것이다.
둘째, 그는 그의 봉사를 하는 자들을 격려하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평강은 측정할 수 없을 만큼 귀한 축복으로서,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백성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다."의의 일은 평강(주의 율법을 사랑하는 자들이 얻는 큰 평강) 이다." 또한 의의 면류관은 더욱 큰 평강이다. 의인의 목적은 평강이며, 그것은 끝없는 평강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우뢰가 죄인들을 떨게 만들 때, 성도들은 기뻐하며 그들의 머리를 들 것이다.
합당한 예배
시 29편 / 이명규목사
깊고 호소력 있는 설교가 였던 [웨렌 위어스비]목사님이 노년에 은퇴한 후에 쓴 책이 있습니다. [참된 예배를 회복하라] 그는 이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그동안 설교하기 위해 강단에 섰지, 예배하기 위해서 서지 않았다. 다시 내가 목회한다면 설교자가 되기보다 먼저 예배자가 되겠다.”
그가 또 이런 말을 합니다.
“교회에서 하는 모든 사역, 즉 선교라든지 봉사라든지 가르치는 일이라든지 모든 사역은 예배의 결과로 나타나는 사역일 경우에만 비로소 의미 있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영적 예배와 상관없이 그런 사역을 하게 되면 오히려 더 큰 문제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조지 맥도널드]는 “하나님 없이 인간 스스로 무엇을 하게 되면 비참하게 실패하든지, 혹 성공하더라도 결국에는 참혹한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교회는 예배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야 합니다. 건강한 예배를 통하여 은혜의 강이 넘쳐 흘려야 합니다. 예배는 교회의 심장과도 같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힘 있게 일어나야만 교회의 각 부분에 새로운 피가 전달되어 생명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성도 개개인의 가정과 삶 속에까지 그 생명력이 흘러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모든 프로그램이 열매를 가져올 수 있고 모든 봉사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가 병들면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을 요란하게 늘어놓는다 해도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 합니다. 은혜를 못 받는 것은 두 말 할 나위도 없습니다. 예배가 살아서 끊임없이 맥박 치며, 하늘의 생명력을 얻게 될 때 나의 삶의 문제가 해결되고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 신앙의 총체적인 표현이고, 고백입니다.
어떤 분이 우리 인생을 70년으로 놓고 재미있는 계산을 한 것을 보았습니다.
인생을 70년으로 볼 때 20년은 직장에서 일하면서 보내고, 20년은 잠자면서 보내고, 6년은 먹고 마시면서 보내고, 7년은 쉬면서 즐기면서 보내고, 3년은 다른 사람을 기다리다가 보내고, 또 1년은 전화통 붙들고 보낸다는 것입니다.
참 그럴 듯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데 보내는 시간을 1년 반 정도로 잡았습니다. 70년 중에서 1년 반이라고 하니까 별거 아닌 것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년 반을 채우기 위해서는 굉장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의 계산에 따르면, 1년 반을 채우기 위해서는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적어도 5분 이상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만나고, 경배해야 하고, 하루 일과를 마친 후 적어도 5분 이상 하루를 잘 보내게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매 주일 예배와 수요 예배에 나와 적어도 3시간 정도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만 70년 중에 1년 반이나마 예배하는 시간으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어떻습니까? 조금만 마음을 다른 데로 돌려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간을 하루에 10분조차 못 갖는 것이 우리의 현실 아닙니까? 그리고 이러 저러한 이유 때문에 1주일에 3 시간조차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리는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면 우리는 70평생 동안 1년 반조차 제대로 예배드리지 못한 채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아니 천국에 잘 들어갈 수나 있을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1년 반을 채우려고 해도 예배를 위해 지극 정성을 쏟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은 세상의 어떤 일보다도 예배의 성공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배의 성공이 신앙생활의 성공을 가져오고 모든 삶의 성공의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배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습니까? 다같이 한 번 따라 하겠습니다.
“예배는 최상의 가치를 최고의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최상의 행위이다.”
이렇게 우리가 예배드린다면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의 응답이 있고, 하나님의 역사가 있고,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 경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려면 그 이름을 알아야 한다(1-2)
토저(A. W. Tozer)라고 하는 유명한 목회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최고로 알지 아니하는 한 아무도 그를 경배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최고로 아는 사람만이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1절에 그 이름을 [여호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원래 히브리어 ‘야웨’로,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스스로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온 우주 만물을 다 만드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편기자는 하나님이 “여호와”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분밖에 없으신, 창조주,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1절 말씀입니다.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찌어다.”
권능 있는 자란 천사들로 해석하기도 하고, 세상의 권세를 잡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권능 있는 자가 여호와를 찬양 한다”는 말은 세상의 모든 신들이 여호와를 찬양하고, 세상의 모든 권세자들이 찬양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호와가 신들 중에 으뜸의 신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호와만이 전지전능한 신이기 때문에 모든 권세자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전지전능한 유일한 신임을 믿습니까?
그러면 그 이름에 합당한 예배를 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직 하나님께 영광과 능력을 돌려야 합니다.
당신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영광과 능력을 드리고 예배를 드립니까?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 1483∼1546)는 “인생 종국의 목적은 구원이 아니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구원받고 축복받은 후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칼빈은 [웨스트 민스트 소요리 문답] 제 1장에서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사야 48장 11절에도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부자에게도, 독재자에게도, 왕에게도, 어느 누구에게도 그 영광을 빼앗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면 그 이름에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말씀하신 구절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1장 4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위해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만 하면 죽을 사람도 살아나고, 죽었던 사람도 살아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만 하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영광과 능력을 드리는 진정한 예배가 이루어지면 예배 속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문제가 해결되고,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 삶으로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하나님께서는 그 영광의 그릇을 다시 축복으로 채워 주십니다. 바꿔 말해서 영광 돌릴 줄 아는 사람에게 축복이 임하지, 영광 돌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축복이 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마음을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우리의 마음이 따라가는 예배입니다. 쉽게 말해 마음을 담은 예배라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잠언서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달라"(잠23:26).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어떤 순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찬양이 아닙니다. 기도가 아닙니다. 돈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예배하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담긴 찬양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담긴 기도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담긴 헌금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요구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성품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요구하실 때 거기에 우리의 마음, 우리의 전 인격이 담겨 있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십니 다. 세상에서 자기 속을 들여다보는 사람만큼 부담스러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깊은 곳을 모두 통찰 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할 때 마음을 드리지 못하면 하나님이 얼굴을 돌려버리시는 것입니다. 마음을 들여다보니 마음이 온통 엉뚱한 곳에 가있 는데 그 예배를 어떻게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 16:9)
세계 최고의 3대 성악가 하면,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래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호세 카레라스는 신앙의 사람으로도 유명합니다.
1987년 7월 오페라 [라보엠]의 주인공을 맡아서 촬영하던 도중, 그는 쓰러져서 병원으로 실려 갔습니다. 백혈병이라는 진단 결과가 나왔습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신을 차리고 말씀을 생각하며 히스기야 왕처럼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면 오직 주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노래하겠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살려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치료를 받으며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백혈병에서 완전히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 후 그는 백혈병 재단을 세우고 자신의 공연비의 50%를 떼어 백혈병 환자들에게 투자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주는 전도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어느 신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그냥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가수로서, 사업가로서, 정치가로서, 각자 서 있는 위치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면 그 인생이야말로 빛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될 것입니다.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참된 예배자가 되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축복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려면 말씀의 능력을 알아야 한다.(3-9절)
본문에서 "여호와의 소리"라는 말이 7회 등장하고 있다(3-9절). 이것은 "여호와의 소리"가 본 시의 중심 주제 중 하나임을 가리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고대 가나안에서 가나안 神 바알의 소리는 천둥, 번개, 폭풍을 지칭하는 말이다. 우가리트 조각품(彫像)에 보면 바알은 그 손에 번개를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3절의 "여호와의 소리가 물위에 있다"는 말은 여호와께서 많은 신들 중 으뜸의 신이라는 의미가 내포된 말로서, 1절의 "권능 있는 자(神)"들에서처럼, 으뜸의 神임을 재차 말하는 것이다. 또한 여호와의 소리가 힘이 있고 위엄이 있다는 것(4절)은 이와 같은 여호와의 권능을 다시 한번 강조한 것이다.
6절의 시룐은 신 3:9에 의하면 헬몬산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5-6절에서 여호와의 소리에 의하여 레바논의 유명한 백향목이 꺾어지고, 거대한 헬몬산까지도 놀란 송아지처럼 날뛰게 된다는 말과,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불꽃)을 내고 광야와 가데스까지 진동시키고, 암사슴을 낙태시키고, 삼림을 벗긴다는 표현은 여호와의 권능이 자연만상의 곳곳에 미침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이 어느 정도입니까?
그 말씀의 능력이 온 세상에 미쳐서 말씀 앞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려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앞에 순종해야 합니다.
당신은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태도로 듣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리라고 믿는 믿음으로 말씀을 받고 그 말씀에 순종하십니까?
예레미야 51:16에는 “그가 목소리를 발하신즉 하늘에 많은 물이 생기나니 그는 땅 끝에서 구름이 오르게 하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하게 하시며 그 곳간에서 바람을 내시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흔들릴 것 같지 않은 헬몬산까지 기뻐하며 뛰게 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받으시는 합당한 예배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가 된다면 우리의 삶은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구원 받은지 1년도 채 안됐지만 믿음의 소문이 나고 믿음의 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온전한 예배자였기 때문입니다.
살전2:13절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을 때 말씀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면 우리의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는 삶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사람은 예배하는 신을 닮게 됩니다.
시편115:6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
천로역정의 저자인 [존 번연]이 교회 다니면서 무신론자였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교회에 출석하였지만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살던 이 사람이 어느 날 성경을 대하면서 이런 의문이 생겼습니다.
“나는 교회에 이렇게 오랫동안 출석했는데 나는 이렇게 익숙하게 종교적 환경에 접했었는데 나는 설교를 수없이 들어 왔는데 어쩌면 내 마음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없으며 여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로 이 자리에 앉아 있을까?”
그러던 존 번연이 마태복음 13장의 말씀을 읽다가 어느 날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의 마음속에 떨어지는 “말씀의 씨”를 빼앗아가는 것이 사단이라는 사실 앞에 그는 놀라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사단이 내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아가는 것이라면 그래서 이 말씀을 대할 수 있는 안목이 없어져서 나의 삶이 변화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면 분명 자신이 사단에게 속고 있다는 사실이 존 번연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그 날부터 존 번연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진진하게 말씀 앞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그래서 마침내 말씀이 역사하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고, 그는 참된 믿음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입니까?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려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3.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10-11)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예배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고 순종으로 받는 예배가 될 때 하나님이 받으시는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면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임재의 축복이 있다. (10절)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
노아의 홍수 때 온 세상이 물로 심판을 당하여 죽었을 때 하나님이 함께하는 노아는 안전하게 보호를 받았듯이 예배하는 자에게 영원토록 함께하여 하나님이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돌보시는 축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두렵게 하는 문제가 있습니까? 어려움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십시오, 하나님이 함께하여 노아를 홍수가운데서 지켜 주었듯이 예배하는 자를 두려움으로부터 문제로부터 지켜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축복이 있다는 것은 두려움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의 임재의 축복이 있을 뿐아니라.
둘째, 힘과 평강의 복을 얻게 된다. (11절)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면 하나님께서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가는 것 같은 새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사야서 40:29 -31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의 말씀의 권능과 은혜
시 29:1-11 / 김종택목사
하나님께서는 왕의 왕이십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 머리를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드립니다. 다윗처럼 능력있고 위엄있고 많은 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왕이 하나님을 그렇게 경배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과연 세상의 모든 왕들로부터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모든 자들이 영광과 능력을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능력있는 자들이 많습니다. 체력, 지력, 재력이 출중한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한 개인에게 고유한 것, 한 개인이 취득하여 가지고 있는 것이라 말하면 능력을 하나님께 돌리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능력을 주시어 맡은 바 직무를 잘 수행하며 살고 있다고 해야 하나님께 능력을 돌리는 것입니다. 자연의 힘은 참으로 큽니다. 천둥소리가 얼마나 큽니까? 천둥소리에 들짐승이 놀라 낙태하기도 합니다. 큰 나무가 벼락에 맞아 그 굵고 튼튼한 가지가 잘려나가기도 합니다. 삼림에 불이 나면 그 웅장한 나무들이 다 시커먼 재로 변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게 지어놓은 인간의 건물이라도 불이 나면 쓸모없게 되고, 흉한 모습이 됩니다. 이렇게 위대한 자연의 능력보다 더 크고 위대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라 인정하는 자가 바로 능력을 하나님께 돌리는 자입니다. 만물의 창조와 만물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 바로 능력 많으신 하나님이라고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있는 모든 능력을 하나님께 받았다고 고백하는 자가 바로 능력을 하나님께 돌리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능력을 당신께 돌리는 자들에게 큰 능력을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능력이 부족한 자들이 능력을 달라 기도드릴 때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믿음을 보시고 그들에게 필요한 능력을 채워주십니다. 양식을 구할 능력이 없는 자들은 하나님께 능력을 구하시오. 건강의 능력이 없는 자는 건강의 능력을 달라고 기도드리시오. 사랑의 능력이 부족한 자는 사랑의 능력을 달라고 기도드리시오. 지혜의 능력, 인내의 능력, 사교(社交)의 능력, 거룩함의 능력이 없는 자들은 기도드리시오.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시며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여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 교만한 마음을 가진 자들은 조심하시오. 아름다운 산을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어버리시고, 천둥소리로 들짐승을 놀라게 하시어 낙태케 하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업적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리시고 여러분의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실 수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감사드리고, 오늘과 내일 필요한 능력을 하나님께 기도드려 얻는 자들은 한평생 살며 절대 능력없어 실패했다는 푸념을 늘어놓지 않을 것입니다. 겸손히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만 안다면 우리의 무능력은 절대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지 못합니다. 오늘의 나의 무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움받는 그릇입니다. 그러나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자신의 무능력의 그릇에다 거짓과 착각으로 가득 채워 놓고 있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능력을 담을 수 없습니다.
왕은 영광스런 직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왕이시므로 그분께서는 영원히 영광 가운데 계십니다. 영광은 선함과 능력과 명예가 다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악을 싫어하시는 선하신 분이시고, 그분께서는 의로운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고 악인들에게 영벌을 내리시는 능력있는 분이시고, 그분께서는 천지를 지으시고 오직 홀로 전지전능한 신이 되시는 영예(榮譽)로우신 분이십니다. 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입니까? 그분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자가 바로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자는 절대 그분을 배반하지 않으며, 그분의 높은 품성과 은혜를 기리고, 그분을 위해 열심히 활동을 하고, 그분께 적대적인 세력에 대항하며, 그분의 말씀에 절대 복종합니다. 나라의 아름다움은 왕의 영광이고, 나라의 부강함은 왕의 영광이고, 나라의 찬란한 문화는 왕의 영광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는 아름다운 삶, 능력있는 삶, 거룩한 삶을 삽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해야 합니다(2).”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무한히 높으신 신(神)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분께 합당한 영광은 바로 내 자신을 포함한 나의 모든 것을 바쳐 그분께 경배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거룩한 옷을 입고 그분께 경배드려야 합니다. 죄와 악에 물든 채 그분을 경배하면 이는 그분께 합당한 경배가 아니므로 그분께서 그 경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자신을 드려 하나님을 경배하면 우리는 그분께 거룩한 제물이 되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지극히 거룩하게 됩니다. 우리가 깨끗한 제물이 되어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면 그분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를 거룩케 하십니다.
세상의 포악한 왕은 힘 좀 있으면 무자비하게 공포정치를 행합니다. 무자비하게 백성을 착취하고 숨도 제대로 못쉬게 만들고 학살을 자행합니다. 그런 왕을 둔 백성은 힘이 쭉 빠지고 평안할 날이 없을 겁니다. 그러나 영원히 옥좌에 좌정해 계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선하시고 능력있으신 왕이십니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11절).” 선한 왕은 백성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알고 백성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압니다.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왕이시고, 여러분은 그분의 백성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에게 선한 왕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이 고통당하거나 괴로움으로 눈물을 흘리며 생을 한탄하며 사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이 웃고, 행복해하며, 평화 가운데 살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여러분에게 힘을 주시고 여러분에게 평강의 복을 주십니다.
여러분, 다윗은 본문 시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목소리가 천둥(뇌성)과 같다고 합니다(3절). 세상에는 천둥소리가 진동해도 듣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귀가 먹은 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혹은 정신을 다른데 두로 다니는 자들은 아무리 큰 소리를 질러대도 들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언제 하나님의 말씀이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립니까? 나의 죄를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천둥소리와 같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설교를 들을 때, 혹은 마음속 깊은 양심의 소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내 죄를 책망하실 때 정상적인 신앙인이라면 그 음성이 천둥보다 더 큰 소리로 들립니다. 그 소리 앞에 절로 무릎을 꿇습니다. 그 소리 앞에 나를 굴복시킵니다. 그 음성을 못들은 척 했다가는 즉시 벼락에 맞을 것 같은 위협을 느낍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책망의 소리를 천둥소리로 알아들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사라지고 여러분의 영이 시들어 죽어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여러분의 마음에까지 다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셔서 큰 일이나 작은 일에 언제나 철저히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이 힘이 있다고 합니다(4절). 사람들은 헛소리, 허풍, 거짓말, 빈말을 많이 해댑니다. 그런 말은 아무리 크게, 많이, 그럴 듯하게 해도 힘이 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니 세상이 무에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면 병자가 낫고, 죽은 자가 일어나고, 사막의 바위에서 샘이 솟고, 하늘에서 양식(만나)이 내리고,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에 힘이 있고, 의로우신 성품에서 나온 말씀이기 때문에 힘이 있고, 전능하신 분의 말씀이기 때문에 힘이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말은 그분의 말씀을 만날 때 겨와 같이 바람에 다 날아가 버립니다. 모든 인간들이 그분의 말씀을 대할 때 불타 없어지듯 맥을 못춥니다. 감히 대항할 엄두도 못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분께서 ‘Yes’라 하시면 반드시 성취되고 ‘No’라 하시면 절대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렇게 힘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같잖게 여기는 자는 망하고 그 힘을 인정하고 순종하여 사는 자는 흥하고 하나님께서 지어놓으신 땅을 차지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이 위엄에 차 있다고 말합니다(4절). 위엄에 찬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상을 받습니다. 위엄에 찬 말에 불순종하는 자는 벌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에게 “회개하라!”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나(하나님)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땅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인간들에게 최후의 심판을 단행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므로 그분의 모든 말씀은 위엄이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곧 법입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하나님의 법의 일점 일획도 폐하여지지 않습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니 평신도는 물론이고 성직자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천둥소리처럼 듣지 않고, 그분의 말씀을 무능한 말씀으로 보며, 그분의 말씀의 위엄을 전혀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몇몇 탐욕에 눈이 멀고 덕분에 양심의 귀까지 먹은 일부 성직자들이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과 다른 성직자들의 권고와 성도들의 원성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고집을 부리고 살아서 악한 본을 보여 이런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한국교회가 요사이 평양 대부흥 100주년 기념식을 거창하게 거행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한국 교회가 부흥합니까?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어버리듯(5절) 일부 탐욕스런 목회자의 교만을 꺾고, 그 탐욕스런 목회자가 세운 자신의 왕국을 가루가 되도록 부숴야만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불이 되어 탐욕스런 목회자의 죄와 악을 불살라버려야 합니다. 평신도들이야 죄지었으면 회개하면 되지요. 대한민국의 평신도들처럼 착한 신도들이 어디 있습니까? 제가 볼 때 평신도들은 그렇게 크게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악한 목회자라도 하나님의 종으로 알고 저렇게 정성스레 섬기는 평신도들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문제는 일부 목회자들입니다. 저렇게 탐욕스럽고 고집이 센 악한 목회자들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침을 받을 때 한국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건강한 들소처럼(6절) 힘있게 뛰어다니게 됩니다.
다윗은 세미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천둥소리처럼 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힘과 위엄이 있음을 인정하고 철저히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남들이 받지 못한 힘을 하나님께 받았으며, 그리하여 그는 한 나라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수많은 역경과 외부의 도전 가운데에서도 하나님 안에서 평강의 복을 누렸습니다. 여러분, 왕처럼 살며 평강의 복을 누리시기 원하십니까? 다윗이 하나님 말씀을 대하듯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십시오. 하나님은 왕이십니다. 그분께서는 그분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르는 자를 세상의 왕으로 삼으십니다. 다윗이 하나님 말씀을 듣기 좋아하여 왕이 되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여러 형식으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교회에서 사회에서 지도자가 될 것입니다. 변치 않으시고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다윗과 같이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의 귀가 열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순종하여 다윗처럼 존귀해지는 복과 평강의 복을 풍성히 받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크게 찬양할 하나님의 영광
시 29:1-11 / 이삼규목사
오늘 함께 살펴볼 시편의 저자는 ‘다윗’입니다. 23편부터 ‘다윗의 시’라고 표제가 되어 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시편 중의 하나인 오늘 본문은 자연에 계시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이 진정한 믿음으로 반응한다면 손에 넣을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다루고 있습니다. 시편 저자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크게는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강조하는데 무엇을 통해서 시편 저자는 위대하심을 발견했을까요? 그것은 폭풍우에 나타난 여호와의 권능과 엄위하심을 발견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데 그분이 자기 백성에게 힘과 평강을 주신다는 선언에서 발견됩니다.
찬양하라는 명령(1-2절)
시 29:1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시 29:2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여기 있는 "권능 있는 자들"(베네 엘림)이란 말은,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거룩한 천사를 가리킨다고 하는 해석합니다. 그러나 칼빈 같은 주석가는 그보다도 인간 사회의 권세 잡은 자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합니다.
그들에게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라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세상의 통치권(주권)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통치권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왕들에게 일시적으로 빌려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왕들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이런 통치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북한에서 제 7차 노동당대회가 열렸습니다. 이번 당 대회를 계기로 김정은은 최고의 지도자 노동당 위원장에 올랐습니다. 김일성 할아버지가 ‘영원한 주석’이란 칭호를 가졌고, 아버지는 ‘영원한 총비서’라는 칭호가 주어졌기때문에 자신은 그와는 다른 최고의 반열인 ‘위원장’에 오른 것입니다. 물론 추대형식이지만 자기가 자기 자리를 스스로 차지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리시면 그 자리에 계속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권세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광과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재능(talent)과 그것을 잘 활용하여 얻게 되는 칭송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이 가진 최선의 것을 하나님께 바쳐 당신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돌리고 돌릴지어다’라는 말은 강조법으로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권능 있는 자들을 향한 외침은 지금 우리들의 삶속에서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목표임을 깨달아 ‘수고는 내가 하고 영광은 하나님께’돌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이란 ‘그의 이름의 영광’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극히 높은 이름에 맞는 최고의 영광을 돌려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또한 제3계명과 연관이 있습니다.
출 20:7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오늘날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장사치들의 떠드는 소리가 가득한 이때 우리에게 좋은 경고가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고 계십니까?
둘째, 거룩한 옷을 입고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
거룩한 옷은 “거룩함의 아름다움”(the beauty of holiness)으로 제사장의 옷을 가리킵니다.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예배드릴 때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셔서 만든 성의를 입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윌리엄스는 거룩한 옷을 입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①진실한 마음 ②회개하는 마음 ③은혜 받은 준비가 되어 있는 마음 ④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마음으로 예배드릴 때 거룩한 옷을 입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 드리는 예배 자체보다 예배드리는 자의 마음을 더 중요하게 보시기 때문입니다.
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우리가 거룩한 옷을 입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예배와 찬양을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찬양의 이유(3-9절)
이제 시편 저자 다윗은 찬양해야 할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가 그분의 말씀으로 자연을 전능하게 주관하시는 것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묘사하는 것은 땅을 휩쓸고 지나가는 엄
청난 폭풍우입니다. 시편저자는 그 길과 전개 과정을 추적하며,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이것을 여호와의 소리로 돌립니다. ‘여호와의 소리’는 ‘콜 야웨’인데 오늘 본문에 일곱 번 등장합니다.
계 10:3 사자가 부르짖는 것 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그가 외칠 때에 일곱 우레가 그 소리를 내어 말하더라
다윗은 하나님의 소리를 여러 가지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물 위의 뇌성 소리입니다.
시 29:3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하나님은 그분의 엄위하신 말씀으로 폭풍우를 불러 오십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성경의 신관(神觀)은, 하나님을 영계에만 국한된 분으로 말하지 않고 역시 자연계도 주관하시는 대주재(大主宰)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시인은 하나님을 폭풍우의 원인자로 여깁니다. 이러한 참된 신관으로 사는 자는, 자연 현상의 움직임을 보고도 하나님의 소리 없는 음성을 깨달으려 합니다. 그는 어디서나 대 주재 하나님을 모시고 삽니다.
두 번째는 힘차게 쏟아지는 빗소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시 29:4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온 세상이 가뭄으로 말라 죽어가고 있는데 비가 아주 세차게 내릴 때, 온 산천초목은 춤을 추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물 때 사람들이 아무리 물을 주고 난리를 쳐도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는 다릅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놀라운 양분이 포함된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농사를 직접 지어 보셔서 잘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비를 돈으로 환산하기 어렵습니다.
여호와의 소리가 힘이 있고 위엄차다는 것은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시라는 의미이며 그렇기 때문에 위엄이 넘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호와의 소리’가 가지고 있는 속성을 하나님의 속성과 동일시 할 수 있습니다. 진정 하나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며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며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시 29:5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시 29:6 그 나무를 송아지 같이 뛰게 하심이여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송아지 같이 뛰게 하시도다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나뭇가지들도 모두 바싹 말라 있습니다. 그런 중에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니까 나뭇가지가 비의 힘을 견디지 못해서 여기 저기 부러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랫동안 가물다가 비가 쏟아질 때 다윗은 왕으로서 ‘비가 다시 오는구나.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하는 식으로 그냥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쏟아
지는 비 가운데서 오래 혼자 숲 속을 거닐면서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깊은 묵상을 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의 소리가 레바논의 백향목을 꺾으신다고 했는데 레바논의 백향목은 성전과 궁궐을 짓는데 사용되는 고급 목재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백향목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가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시80:10; 민 24:6), 그리스도의 영광(겔 17:22-23), 의인의 번영(시92:12), 강대한 나라(암 2:9), 교만한 자(사 2:13) 등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거나 거만한 사람이나 나라를 풍유적으로 지칭한 것입니다.
사 2:13 또 레바논의 높고 높은 모든 백향목과 바산의 모든 상수리나무와
암 2:9 내가 아모리 사람을 그들 앞에서 멸하였나니 그 키는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 같으나 내가 그 위의 열매와 그 아래의 뿌리를 진멸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레바논의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듯 쳐서 그 교만을 꺾으십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잠 19:29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니라
사 13:11 내가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며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출 것이며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우리 속에 남아 있는 ‘교만’과 ‘거만’한 부분을 철저히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세 번째는 벼락 치는 것을 통해서 여호와의 소리를 듣습니다.
시 29:7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시 29:8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시키시도다
이것은 일종의 시적인 표현으로 갈리지는 벼락 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실제적인 사실에 대한 묘사에 주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크시다는 사실을 묘사하는데 주안점을 둔 것입니다. 성경에 화염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시 104:4 바람을 자기 사신으로 삼으시고 불꽃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사 30:30 여호와께서 그의 장엄한 목소리를 듣게 하시며 혁혁한 진노로 그의 팔의 치심을 보이시되 맹렬한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으로 하시리니
이스라엘 지역에서 우기가 아닐 때 폭풍우를 구경하기는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시편기자는 폭풍이 레바논과 시리아를 가로질러 북쪽으로 가나안 영토까지 이동하는 것을 추적합니다. 폭풍의 위치와 시편기자의 몇 가지 말은 그것이 가나안 종교의 믿음에 대한 반대 논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북부 지역에서 폭풍신은 바로 바알신(하닷)이었습니다. 하지만 시편기자에게 그것은 폭풍을 유발하는 바알의 소리가 아니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였습니다.
뇌성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시 29:9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첫째, 이것이 암사슴들에게 산통을 느끼게 해서 새끼를 조산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중동지역의 목자들은 뇌성이 날 때에는 양들을 한 자리로 몰고 와서 머리를 같은 방향으로 두어 그들에게 안도감을 주도록 한다고 합니다. 암사슴을 낙태시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랜 가뭄 가운데 천둥소리와 함께 쏟아지는 빗소리는 온 세상을 살리는 강력한 생명을 공급해 준다는 것입니다. 암사슴이 낙태한다는 것은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그만큼 강력한 생명력이며 한 번은 낙태를 하더라도 다른 많은 암사슴들이 살게 되기 때문에 한 마리의 낙태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 삼림을 말갛게 벗기신다는 것입니다.
벼락이 치면 불이 나서 온 산을 불태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벌거숭이산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 캐나다 앨버터주에서 대형 산불이 일어나서 엄청난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피해 면적이 40만 에이커로 1,618㎢에 해당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끄기 어려운 산불입니다. 비가 오지 아니하면 쉽게 진압하기 어려운 산불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하나님의 공의로 인한 징계의 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실행되는 것을 보고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고 합니다. 다윗이 의도하는 바는 자연 만물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을 찬양하는 존재는 오직 하나님의 전에 있는 당신의 자녀들뿐임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영적인 의미에서 보면 오늘날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드릴 존재들은 바로 당신의 영적 이스라엘 백성인 성도들입니다. 따라서 찬양은 곧 성도의 특권인 동시에 의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힘과 평강의 복을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기 백성들에게 무한한 힘을 주시고 평강의 복을 주십니다.
시 29:10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원하도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여기에서 ‘홍수’는 창세기 6-8장에 나오는 노아홍수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마불’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악인에 대한 심판과 의인에 대한 자비를 동시에 나타내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노아 홍수의 주관자이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는 노아 홍수 이후 현재와 영원토록 그의 보좌에 좌정하셔서, 왕으로 세상을 지배하시며, 또 심판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시는데 그냥 조금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홍수가 나게 하십니다. 즉 팔레스타인에는 평소에는 물이 흐리지 않는 강이 많습니다. 그런 강을 ‘와디’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비를 한 번 주시니까 그 ‘와디’가 모두 온통 물바다로 넘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다윗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은 왕이시며 자기는 하나님의 신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가뭄이라는 시련을 통하여 단지 비만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부분에 이르기까지 복을 내리십니다.
시 29:11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신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며 살기가 어렵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힘을 주십니까?
사 40: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사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셔서 승리하게 해 주실 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십니다.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이들은 아프면서 더 성장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이렇게 시련을 통하여 더 성숙하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그분을 왕으로 모실 때 힘을 주시고 평강의 복을 더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그분을 크게 찬양하십시오.
여호와의 소리 한 번 발하시면
시편 29:1-11 / 이종철목사
자연을 주제로 하나님을 찬양한 시편은 8편과 19편, 29편이 대표적이다. 시편 8편은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하며 주의 오묘하신 솜씨를 찬양하는 ‘밤의 찬양’이다. 시편 19편은 뜨거운 태양을 마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처럼, 그 길을 달리길 기뻐하는 장사처럼 묘사함으로써 여호와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태양의 찬양’이다. 반면에 시편 29편은 온 우주만물을 뒤흔드는 하나님의 권능을 찬양하는 ‘천둥과 폭풍의 찬양’이다.
폭풍우와 뇌성과 지진이 만들어내는 자연의 위력 앞에 모든 만물이 두려워하며 그 입을 막고 숨을 죽인다. 이런 하나님의 위엄 앞에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엎드려 오직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뿐이다.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1). 아무리 과학문명이 발달하고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 주장한다 할지라도 인간은 인간일 뿐이다. 밝은 대낮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 깜깜한 밤처럼 되고 바로 곁에서 하늘을 찢을 듯한 엄청난 굉음과 함께 번개가 강타할 때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영광의 하나님이 뇌성을 발하시니”(2) 시인이 듣는 하나님의 소리는 바로 이 두려운 뇌성이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으니 모든 인간은 잠잠할지어다!(전5:2) 하나님 앞에 필요한 것은 변론이 아니라 예배이다.
인간은 연약할 뿐만 아니라 어리석기도 하다. 고대 사회에서는 이런 자연의 위력 앞에 신의 이름을 하나하나 붙여가며 신을 만들어냈다. 그 신의 노여움을 피하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등장하고, 폭풍의 신 바알이 등장하고, 번개는 제우스의 무기가 되었다. 시편 기자는 이런 자연신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며 오직 여호와 한 분만이 온 우주만물을 다스리는 분이심을 선포한다. 특히 하나님은 물을 다스리는 신이시다.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뇌성을 발하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3) 농경사회에서는 물을 다스리는 신이 최고신이었다. 가나안의 우상 바알이나, 바벨론의 신 마르둑은 물을 다스리는 우상이었다. 그러나 성서 기자는 여호와가 진짜 물을 다스리는 신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고 말씀하시니 혼돈의 물이 하늘 위의 물과 아래 물로 갈라지고, 아래 물은 다시 육지와 바다로 구분되어 질서가 회복된다(창1:6,9). 출애굽 시에는 하나님의 소리에 홍해의 물이 말라버리고 만다. “이에 홍해를 꾸짖으시니 곧 마르매 저희를 인도하여 바다 지나기를 광야를 지남 같게 하사”(시106:9)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도 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셨다. 그가 한번 소리를 발하시니 광풍이 몰아치던 바다가 잠잠하여 졌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막4:39)
여호와의 소리에 백향목들도 꺾인다.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5) 백향목은 성전의 목재로 쓰일 정도로 크고 우람한 아름드리나무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소리에 백향목도 부러지고 만다. 숲이 출렁이고, 심지어 레바논 산지와 시룐, 곧 중동에서 가장 높은 헐몬 산까지 들썩인다. 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견고하고 존귀한 것들로 생각되었지만 여호와의 소리에 그만 깜짝 놀라 들 송아지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뛴다. “그 나무를 송아지같이 뛰게 하심이여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송아지 같이 뛰게 하시도다”(6) 여호와의 천둥소리에 불이 일어나고 남쪽의 가데스 광야까지 흔들린다(8). 암사슴은 그 소리에 놀라 낙태를 하고, 울창한 숲이 폐허가 된다(9). 시인은 ‘여호와의 소리’란 단어를 7번이나 반복하며 주의 권능을 찬양한다.
이 여호와의 소리는 인간의 영혼 위에도 천둥처럼 들려온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 하나님의 소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이 여호와의 소리는 백향목을 꺾으시듯 다메섹 도상을 걸어가던 사도 바울을 꺾으셨다.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 9:3-4).
이 소리는 또한 어거스틴을 쓰러뜨린 말씀이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3-14) 어거스틴은 자신의 『고백록』에서 “집어들고 읽어라. 집어들고 읽어라.”는 귀에 쟁쟁히 들리는 소리를 듣고 성경을 펼쳐 들었다고 한다. 어거스틴은 성경에서 울리는 이 벽력같은 소리에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였다. 일상적 삶에 빠져 있던 루터를 깨웠던 것도 천둥같이 울리는 하나님의 소리였다. 실제 루터는 함께 가던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두려워 그 자리에 엎드려 벌벌 떨며 신부의 길을 가기로 결단하였다고 한다. 파스칼에게는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처럼 임했다. 그는 평생 ‘불의 하나님’을 간직하며 살았다. 파스칼의 『팡세』에는 그때의 감동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654년(31살) 11월 23일 밤 10시 반부터 12시 반까지. ‘불’(큰 글자로) 이었다. 철학자와 식자의 하나님이 아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확신, 확신, 느낌, 기쁨, 평화”
우리가 기도하는 분은 우리의 자상한 아버지이시기도 하지만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그분은 하늘에 계신 두려운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자연과학이 발달하면서 우리는 초월의 세계나 영적인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생겼다. 그래서 이제는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고 죄악을 저지르는 데도 담대하다. 단지 신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자들만이 문제가 아니다. 믿는 자들 중에도 무신론자들이 있다. 이들은 윤리적 무신론자들이다. 하나님을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분으로 믿었다면 죄를 저지르고도 그렇게 태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신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신의 뜻을 따라 살지 않는다면 그 또한 무신론자와 다름없다. 번개와 폭풍우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자연현상이다. 그러나 이 천둥소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들도 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오늘도 자연 현상을 이용하여 자신의 위엄과 뜻을 드러내신다. 그런데 요즘은 벼락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은 언제까지 저들을 두고 보고 계실 것인가?
이런 위엄과 두려움의 하나님이지만 그가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한없이 자애로우시다. 마치 타인을 향해서는 철권을 휘두르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온화한 아버지로 바뀌는 분과 같다. 일국의 왕일지라도 어린 아이 앞에서는 꼼짝을 못한다. 아무리 힘센 거인일지라도 어린 아이에게는 여하한 힘도 쓸 수 없다. 사랑하는 자식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그렇다. 천둥소리로 산천초목을 벌벌 떨게 하시던 여호와의 소리도 사랑하는 자녀 앞에서는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11) 여호와의 음성은 부드럽고 우리에게 위로와 힘을 준다. 그 소리는 사랑의 음성으로 우리 마음에 평화를 준다. 이런 권능의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기에 그의 보호하심은 그 무엇보다 안전하다. 폭풍우와 같은 시련 속에서도 우리가 든든한 까닭은 이 권능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교회
시편 29:1-11 / 양인국목사
1. 올해 수양회 주제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교회”다. 이것을 주제로 정한 것은 우리의 마음에 서신을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교회로 세우기 원하는 거룩한 소원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이와 같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교회로 세울 수 있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은 우리가 어떻게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교회를 세울 수 있는지에 대하여 주시는 말씀을 듣고자 한다.
2.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29;1,2)”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일에 “권능 있는 자들”과 “거룩한 옷을 입은 자들”을 초청했다. 여기 “권능 있는 자들”은 “통치자들”을 말하지만, 성경에서는 “천사들”을 말하기도 한다(시82:6, 89:7). 물론 “거룩한 옷”은 제사장들이 입고 있는 옷을 가리키므로 그 옷을 입은 자들이란 제사장들을 말한다. 그러므로 다윗은 초청한 권능 있는 자들과 거룩한 옷을 입은 자들은 하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은 천사들과 지상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은 제사장들이다. 이들은 하늘과 지상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대표성을 지닌 자들이므로 다윗의 초청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모든 사람에 대한 초청이라 할 수 있다. 다윗이 모든 사람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에 초청한 것은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가 어떻게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교회를 세울 수 있는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된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창조된 자”라는 것을 알고 창조의 목적에 따라 사는 것이다. 즉 한 교회 안에 창조의 목적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더해 갈수록 그 교회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교회로 보다 더 온전하게 세워져간다는 의미다. 여기 우리가 창조의 목적에 따라 산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로 인하여 창조의 목적을 상실한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윗의 초청에 응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산다면 이것이야말로 죄로 인하여 상실되었거나 왜곡된 창조의 목적을 회복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여기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또는 찬양하는 것을 예배라는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 예배로의 초청은 지상에서 가장 은혜로운 초청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도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 실제로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로 세워질수록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자로 보다 더 온전하게 회복되어 간다.
3절의 말씀이다.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다윗은 하늘과 지상에서 예배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천사들과 모든 사람에게 “여호와의 소리”로 인하여 그를 경배할 것을 말하고 있다. 3절로부터 9절까지 “여호와의 소리(הוהי לוק)”라는 말이 일곱 번 반복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의 소리”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여호와의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한다. 여기 “여호와의 소리”와 “여호와 하나님”은 동격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요한이 말씀과 하나님을 동격으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경우라고 말할 수 있다(요1:1). 그러므로 “여호와의 소리”가 지니고 있는 속성은 바로 하나님께서 지니신 속성이다.
다윗은 여호와의 소리를 “우렛소리(雷聲)”에 비유하였다. 여기 우렛소리는 천둥이 칠 때 나는 소리로서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하고 범접(犯接)할 수 없게 한다(시29:4). 그러므로 다윗이 여호와의 소리를 우렛소리에 비유한 것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말해 주고자 함이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우렛소리는 언제나 들을 수 있는 소리로서 그 소리가 얼마나 자신들을 압도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폭풍은 지중해로부터 시작한다. 폭풍우의 구름은 지중해 위에 몰려, 그것이 동쪽으로 이동하여 레바논 산과 헬몬산 위에서 찬 공기와 만나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무서운 힘의 폭풍우로 변한다. 그리고 이 폭풍우는 다시 블레셋 지방을 휩쓸고 아라비아 사막까지 이르러 모래를 휘몰아 광야를 어지럽힌다. 그러므로 다윗이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29:3)”라고 말한 것은 모든 능력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말해 주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능력은 레바논의 백향목을 꺽어 부수시고(시29:5,) 땅을 진동 시켰키고(시29:6), 화염을 가르고(시29:7), 암 사슴을 낙태시킨다(시29:9). 어떤 것도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다. 바울도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
그러면 여호와의 소리로부터 나오는 능력은 어떤 것들인가? 4절의 말씀이다.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29:4)” 이 말씀은 여호와의 소리로부터 나오는 능력이 “위엄”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여기 “위엄”이라는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장엄(Majstic)”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엄 또는 장엄이라는 두 언어는 우리를 압도하는 힘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하셨을 때 빛이 있었던 것처럼 “무엇이 있으라”고 하실 때마다 그것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하는 일에만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심판에도 동일하게 능력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애굽을 향하여 심판의 소리를 발하셨을 때 애굽의 모든 집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 짐승으로부터 사람에 이르기까지 첫 새끼가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향하여 “무덤에서 나오라”고 했을 때, 죽은 자는 무덤의 문을 열고 나왔다. 이처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소리가 축복의 소리든지 심판의 소리든지 그 소리는 반드시 능력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 이와 같은 일보다 우리를 압도하는 것이 더 있겠는가?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29:4)” 여호와의 소리로부터 나오는 능력들 가운데 다른 하나는 만물에 대하여 갖는 절대적 주권이다.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원하도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시29:10)” 우리가 성경에서 “홍수”라는 말을 대할 때 무엇보다 먼저 노아의 때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기 위하여 사용하신 바로 그 홍수를 연상할 것이다. 우리가 그때의 홍수를 생각하면 “홍수”는 인간이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삶의 여정에서 때로는 홍수와 같은 불가항력적인 일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즉 삶의 여정에서 직면하는 불가항력 적인 일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절대적인 주권자가 되신다는 의미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홍수를 있게도 하셨고 또한 그것을 거두어 가시기도 하신다. 선지자 이사야는 홍수 가운데 좌정하시는 하나님을 또 다른 언어로 표현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사43:1-3)” 하나님은 만유에 대하여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기 위하여 말씀하실 때 물도, 강도 그리고 불도 우리를 해할 수 없는 것이다.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바로 “서신을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교회”로 세우는 길이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통하여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해 주시고, 이로 인하여 허락해 주신 교회를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교회”로 세워가게 해 주옵소서. 아멘!
복음에 합당한 삶
시편 29:1-3, 빌립보서 1:27-28 / 이성희목사
서론
‘인과응보’(因果應報)란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 그에 합당한 보상이 꼭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어느 학교의 한문시간에 ‘인과응보’ 사자성어를 설명하면서 선생님은 “개를 죽이면 다음 세상에 개로 태어나고, 개미를 죽이면 개미로 태어난다는 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학생이 질문하였습니다. “선생님, 그럼 사람을 죽이면 사람으로 태어납니까?” 그 학생은 그 날 선생님에게 호되게 얻어맞았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일이나 사실에 대하여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직장인은 월급만큼은 일해야 하고, 신분이 있는 사람은 신분만큼 처신해야 하고, 혜택을 많이 본 사람은 혜택만큼 책임을 수행해야 하고,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은 권리만큼 의무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합당한 삶입니다.
‘합당하다’란 말은 헬라어 부사 ‘아크시오스’이란 단어인데 성경에는 다섯 곳에만 기록된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찬양받으실 수 있도록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가치와 영광스러운 성품에 알맞게 행동하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골로새서 1:10에는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라고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2에는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합당하다는 말은 하나님과 그 말씀, 복음에 알맞은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바울의 삶은 복음에 알맞은 삶이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래야 합니다.
우리시대는 양극화가 뚜렷한 시대입니다. 영성적 양극화로 알맹이는 없고 이름만 가지고 있는 ‘명목상 그리스도인’(nominal Christian)이 점점 많아진다고 합니다. 캐나다의 종교사회학자인 레지널드 비비는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영성가 로널드 롤하이저는 “현대인은 교회에 관해서는 휴가 중이다. 하나님 나라는 원하지만 교회는 원치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삶은 그리스도인 다운 합당한 삶은 아닙니다.
성경에도 보면 말세적 현상이 이미 나타났습니다. 로마서 1장, 디모데후서 3장에 보면 요즘 우리가 사는 삶의 모습과 다른 것이 없는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수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구분이 안 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가 복음에 알맞은 삶을 살지 않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2:21에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고 합니다. 그릇에 관한 말씀을 하면서 귀하고 천한 그릇이 아니라 깨끗한 그릇이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다고 합니다. 귀하고 천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따질 일이 아닙니다. 단지 깨끗하게 자신을 준비하면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의 본문에서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권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생각, 합당한 삶을 살아야 복음에 합당한 삶입니다. 우리 모두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생활입니다.
빌립보서 1:27 하반절에는 “너희가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라고 합니다. 복음에 알맞게 살려면 신앙을 위하여 협력해야 합니다. 복음으로 사는 사람은 복음에 협력해야 알맞게 사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란 말의 “생활하라”는 단어는 ‘폴리튜에스데’라는 말로서 ‘시민답게 살아라’는 의미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당시에 로마시민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빌립보서 3:20에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라고 합니다. 바울의 이 말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하늘의 시민답게 살아라’고 권하는 말입니다.
하늘의 시민답게 사는 삶의 기준은 ‘복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특권과 책임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특권과 책임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 교회에 나와 예배하는 것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예수를 믿고 싶어도 마음대로 믿지 못하고, 교회에 나오고 싶어도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책임을 잘 감당하고 협력해야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에 협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배하고, 전도하고, 교제하고, 봉사하고, 헌금하는 이 모든 일에 협력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이 부족한지, 무엇에 협력하고 있지 못한지 한 번 생각보세요. 그리고 그 일에 협력해야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편에 있어야 합당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올라가 십계명을 받고 있는 동안 산 아래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춤을 추고 놀고 있었습니다. 산 아래에 내려온 모세는 화가 나서 두 돌비를 깨트렸습니다. 그리고 출애급기 32:26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모세가 진 문에 서서 이르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가는지라”. 하나님 편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 편에 있어야 하나님께 합당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님 편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최근 리더십의 원리에 보면 리더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추종자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팔로워십’ 즉 따르는 자의 자세도 중요하다고 합니다. 좋은 따르는 자가 좋은 리더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좋은 추종자 없이는 좋은 리더가 있을 수 없습니다. 좋은 리더는 좋은 협력자들이 만드는 것입니다. 협력의 중요성을 가리킵니다. 흔히 말하는 협업(協業)이란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요즘 ‘인기’(人氣)란 말을 많이 합니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을 말합니다. 중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제왕이 되려면 ‘천기’(天氣), ‘지기’(地氣) 그리고 ‘인기’(人氣)를 얻어야 한다고 합니다. ‘인기’란 인간을 끌어당기는 힘을 말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인기로 협력자들을 만들어갑니다. 그런데 인기의 비결은 단 하나입니다. 바로 인간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인기는 사람을 협력자로 만들고, 내 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는 ‘인기’보다 ‘영기’(靈氣)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성도를 하나님의 편으로, 교회의 협력자로 만들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교회는 성도들을 하나님 편의 사람으로 잘 만드는 교회입니다.
빌립보서 4:3에는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고 합니다. 동역자는 바울에게 큰 힘이었고, 교회의 힘이었습니다. 바울은 동역자라고 할 때에 남녀의 구분 없이 그렇게 불렀습니다. 복음에 협력하고, 복음에 알맞게 사는 사람들을 동역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복음의 동역자들을 많이 가진 사람이 좋은 리더이고, 동역자들을 많이 가진 교회가 힘 있는 교회입니다.
요즘에 ‘콜라보’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연주하거나 일을 하는 것을 일컫습니다. 힘든 것에 도전을 할 때 팀 동료 간에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협력(collaboration)입니다. 협력은 협동(cooperation) 이상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협동은 동의하에 일하는 것이고, 협력은 적극적 자발적으로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교회에 출석하고 예배하는 것은 협동입니다. 그러나 주일에 교회에 와서 봉사하고, 평일에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은 협력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협력이지 협동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협동하는 자가 아니라 협력하는 자가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들 각자는 서로를 위해 빈틈을 메우려고 이 세상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남편과 아내만 돕는 배필이 아니라 우리는 각자가 서로의 도우미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의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일에 협력하는 자를 요청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협력하는 자가 많아져야 합니다.
복음을 받은 사람들은 복음의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들 곁에는 제2선의 인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바나바, 누가, 마가, 디모데 등의 일꾼들입니다. 이런 협력자들, 동역자들이 없이는 사도들의 사역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복음에 합당한 복음의 협력자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복음을 위하여 필요하다면 어디에나 쓰임 받을 수 있는 일꾼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 생활입니다.
빌립보서 1:28에는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고 합니다. ‘대적하는 자들’이란 유대인을 포함한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자들을 말합니다. 어느 시대나 복음에 대적하는 자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복음에 대적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가장 복음을 위해 일해야 할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지 못하고 대적자가 되었습니다. 바울도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자신이 겪은 고난을 말하면서 “동족의 위험”이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당시의 거짓 교사 그리고 영지주의를 비롯한 이단 사설들, 로마의 권력자들, 권력에 대해 아부하는 자들 등이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주변의 대적자들을 두려워하거나 도망하거나 피하지 말고, 담대하게 맞서서 영적 싸움을 전개하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담대하게 맞서서 싸우는 것이 복음을 수호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복음에도 공격이 최선의 방어입니다.
복음을 믿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을 믿는 사람은 전하는 사람이고 복음의 진리를 잘 지켜야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복음을 대적하는 자가 있고, 동시에 복음 때문에 순교하는 자가 있습니다. 순교는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도 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리 주변의 이야기입니다. 복음을 믿는 것은 어느 시대나 위험부담이 있게 마련입니다.
전 세계인구 4명 중 3명이 종교 활동에 심각한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 지구상에는 기독교를 억압하는 국가가 110곳으로 다른 종교보다 더 많습니다. 세계 인구 75%가 높은 수준으로 종교 활동을 제약 받고 있습니다. 불교국인 스리랑카나 이슬람 국가들의 기독교 박해는 심각한 수준입니다.
미국의 허드슨 연구소의 보고에 의하면 박해 받는 그리스도인의 숫자는 이전에 박해 받았던 유대인의 숫자에 버금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해마다 전 세계에서 15만 9천명의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순교 당하고 있습니다. 2억 5천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육체적 정치적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4억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마음 놓고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실정에 있습니다. 지금도 복음의 박해자, 복음에 대적하는 자가 많습니다.
복음에는 기쁨이 있고, 소망이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찬송합니다.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복음의 결론은 죽음 후의 부활입니다. 새 생명이 결론이기에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은 부활의 삶이며 최후의 승리의 삶이므로 대적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두려워말라”는 말은 구약에 107회, 신약에 42회 언급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두려운 대상입니다. 우리가 경외해야 할 대상입니다. 사람은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진정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소교리문답’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세상이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두려움의 대상인 대적하는 무리들을 이길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힘을 주십니다.
바인(W. F. Vine)은 생명을 주시는 경외의 대상을 “건전한 두려움”으로 정의하였습니다. 쓸데없는 두려움은 두려움의 대상인 하나님께 대한 모독입니다. 왜냐하면 첫째는 두려움의 대상을 잘못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두렵지 않게 힘을 주시는 분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신론철학자였던 버트란트 러셀은 종교란 ‘공포의 산물’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내 생각에 종교란 주로 두려움에 기초한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인간이란 두려워하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두려움에 대한 처방을 제시한다는 말입니다. 자신은 철학적 논리로 세상에서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지만 이런 자들이 가장 두려움이 많고 알고 보면 어리석은 삶을 삽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대적들에 대하여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주위의 대적하는 자들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자신을 포로로 잡아간 대적하는 자들에 대하여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복음의 대적자는 마귀입니다.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맙시다. 야고보서 4:7에는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합니다. 베드로전서 5:9에는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고 합니다. 대적하는 마귀를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을 의지하라. 그리하면 두렵지 않을 것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습니다. 근대 미국의 가장 걸출한 영성가이며 목회자이며 신학자인 그는 복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세상이 두렵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세상이 두렵지 않은 법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사람이 복음의 사람입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사람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나 복음 하나만 가지고도 위풍당당해야 합니다. 복음의 사람들이 그렇게 당당하고 올곧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세상이 두렵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 론
항우와 유방이 중국천하를 두고 싸움을 벌였습니다. 이 둘의 싸움에서 결국 항우가 패배하여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항우가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사마천의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내가 패한 것은 능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싸움을 잘못한 것도 아니다. 내가 패한 것은 오직 하늘이 나를 버린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 능력이나, 스펙이나, 건강이나, 물질 때문에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늘이 버리지 말아야 이것이 성공입니다. 하늘이 버리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버리면 잠시도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아야 성공이며,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의 성공적인 삶을 살게 하는 힘입니다.
다윗에 대하여 사도행전 13:22에는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고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딱 알맞게 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사람답게 하나님의 마음에 알맞게 삽시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것은 복음에 합당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복음에 합당한 그리스도인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들을 줄 아는 귀
시 29:3-9 / 이규왕목사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들을 보면 그 크기, 모양, 색깔, 소리가 제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것은 그 모양이나 색깔로, 어떤 것은 그 소리로, 어떤 것은 냄새로, 어떤 것은 맛으로, 어떤 것은 촉감으로 사물을 구별하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감각기관을 통해서 그 존재하심과, 역사하심을 알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은 그와 같은 우리의 한계를 아시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하시는가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위해 여러 가지 모양으로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귀로 들음으로 믿음이 유발되어지고 또한 그 믿음이 지속적으로 자라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는 일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기에 항상 힘써야만 하는 것입니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눅 11:28)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는 것이 중요하지만 똑같이 듣고서도 어떤 사람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반면, 어떤 사람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깨달아지고 믿어지는 사람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성경 여러 곳에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 11: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계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매주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들을 때에 과연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며 잘 깨달아 지는가, 귀를 가지고 말씀을 듣는가 살펴 보아야 할 것입니다.
1.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소리
창조주 하나님은 그 지으신 피조물들을 눈으로 보고 그 소리를 귀로 들음으로 인해 그것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얼마나 지혜롭고 능력이 많으신 분인가를 사람들이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시편 기자의 고백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을 눈으로 보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고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큰물이 일렁이는 바다에서 일어나는 거센 파도소리, 하늘에서 내리는 벼락에 맞아 큰 백향목이 힘없이 꺾이고, 천지를 진동하는 천둥소리에 짐승들이 이리 저리 날뛰고 사슴이 놀래어 낙태하는 자연계의 현상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예민한 영성의 사람이었습니다.
(시 29:3)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뇌성을 발하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시 29:4) 여호와의 소리가 힘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시 29:5)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시 29:9)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으로 낙태케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 전에서 모든 것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그와 같은 뇌성이나 천둥 번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아니고 자연 현상이며 시편 기자가 그 소리를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라고 한 것을 조롱하며 비웃을 것입니다.
물론 과학적으로 뇌성이나 천둥이 생기는 원리를 분석해보면 전기를 띤 거대한 구름 사이에 일어나는 전기적인 방전 현상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자연 현상은 우연이나 저절로 나타나는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창조주 하나님이 그것들을 통해서 당신의 위엄을 나타내시는 도구로 사용하신다고 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규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좋은 예 중에 하나가 바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내 산 아래 모이게 하신 후 여호와 하나님이 시내 산에 임재하셔서 모세를 부르실 때의 광경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출 19:16) 제 삼 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하나님은 천둥소리가 온 천하에 울려 퍼져 먼 곳에까지 들리고, 번쩍하는 번개 빛이 땅 끝까지 퍼져나가면서 뒤 따라 울리는 천둥소리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시내 산에 임재하셨음을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방편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물론 과학이란 힘으로도 번개나 천둥을 만들 수 있으나 하나님이 만드신 것과 같이 수억 볼트의 전압과 수만 암페어에 달하는 벼락을 만들 수는 없으며 설령 만들 수 있다고 해도 하나님처럼 빈손으로 할 수 없고 엄청난 돈과 시간과 장비가 투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과학은 그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모방하고 흉내를 내는 정도에 불과함을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자연을 신으로 알고 두려워하며 우상화 하고 거기에 복을 달라고 비는 것을 수능입시를 앞둔 요즈음에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당신이 지으신 자연계를 통해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 장면은 오늘 시편에만이 아니라 욥기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욥 38:1)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욥 38:25) 누가 폭우를 위하여 길을 내었으며 우뢰의 번개 길을 내었으며 (욥 38:26)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고 (욥 38:27) 황무하고 공허한 토지를 축축하게 하고 연한 풀이 나게 하였느냐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고 깨면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계를 늘 접하게 되는데 그 자연계를 통해서 시편 기자나 욥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주말이나 휴일이면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을 관광하기를 즐기면서 왜 그 자연계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일까요?
교향악단의 연주자들이 갖가지 악기를 동원하여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 낼 때 그 소리는 악기에서 나오지만 그 소리를 만드는 사람은 연주자인 것처럼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의 배후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이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믿는 사람은 자연을 보면 그 자연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소리를 듣게 되며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찬40장 1절)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 볼때 하늘의 별 울려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40장 2절) 숲 속이나 험한 산골짝에서 지저귀는 저 새소리들과 고요하게 흐르는 시냇물은 주님의 솜시 노래하도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마치 악기가 소리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천둥번개가 단순한 자연 현상으로만 보여 지고 들려질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뇌성벽력이 자연계에서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지 무슨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인가라고 비웃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불신앙으로 가득 차 있을지라도 우리는 오늘 시편 기자와 같이 자연계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복된 귀를 가진 성도들이 되어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그것이 잘 유지되도록 섭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배하는 일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시 29:1,2)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2.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소리
시편 기자는 자연계를 통해서만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영성의 소유자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 세계에 사는 동안 시간과 공간이라는 역사 속에서 둘 중에 하나의 일을 벌이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한 일과 또 하나는 하나님을 근심스럽게 하는 악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창조하시기만 하신 분이 아니라 일정한 자연 법칙을 부여하셔서 그것이 잘 유지 되도록 보존하시고 그 법칙을 가지고 세상 역사를 통치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지난날의 역사를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역사의 통치 원리가 바로 하나님의 공의라는 잣대입니다.
그 공의의 잣대가 바로 율법이며 계명이며 그것을 지키지 않는 것을 죄라고 정의하시고 그 죄에 대해서는 상응하는 징벌을 내리심으로 죄에서 돌이키게 하셨습니다. 만일 그와 같은 하나님의 공의의 채찍이 없다면 인류는 벌써 자멸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죄가 결과적으로 인간을 파멸의 길로 몰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죄에 대해서 징계와 형벌이라는 채찍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유능할지라도 한 시대만을 살다가 가야하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역사를 만들어갈 수 는 있어도 역사의 주권자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의 주권자는 오로지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 중에 하나가 바로 노아시대의 홍수심판입니다. 홍수심판은 우연이나, 자연 발생적인 사건이 아니라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부패한 역사를 정화시키시고 새 역사를 건설하시려는 하나님의 소리였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홍수를 단순한 자연사건으로 보지 않고 그 홍수가 역사의 주권자가 되시는 만왕의 왕되신 하나님이 배후에서 조정하신 사건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 29:10)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이처럼 역사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얼마나 정의로우신 분인가 하는 것은 오로지 노아 한 가정만 남길 정도로 모든 악을 척결하시고자 하시는 단호한 의지에서 잘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악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는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매번 심판을 하신다면 세상은 남아나지 않고 벌써 다 멸망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마치 정화조를 청소하는 것처럼 세상의 죄악이 관영하기 직전 중간 중간에 징계와 심판을 통해서 세상을 정화시켜 나가셨음을 지난날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시각으로 오늘의 역사를 보고 세계의 돌아가는 역사를 지켜보며 그 역사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복된 귀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때는 세상이 너무나 악하여 마치 하나님이 외면하시고 공의로운 심판이 부재하는 것처럼 생각되어지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역사를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좀더 길이 참으시고 심판을 지연시켜 단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역사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원칙은 한 마디로 심는 대로 거두게 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악을 씨 뿌리며 살던 시대는 그 악이 자라서 고통의 열매를 맺게 하시고, 정의를 씨 뿌리며 사는 시대는 그 의가 자라서 평강의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하시는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오늘의 시대의 역사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며, 좋은 씨를 뿌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갈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머지않아 오늘의 역사도 지난날처럼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고 역사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들으며 매일 매일 사랑과 정의와 진실을 씨 뿌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간다면 아무리 역사의 심판이 임한다고 할지라도 조금도 두렵지 않게 되며 심판의 날은 두려움이 아니라 평강의 날이 될 것입니다.
(벧후 3: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벧후 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3. 성경과 하나님의 소리
오늘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할 또 하나의 소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자연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소리와 역사를 통해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소리만으로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소리는 자연만물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우상을 숭배하던 사람이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는 새 사람이 되게 합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정의로우신 세계 역사를 보면서도 죄를 깨닫지 못하던 사람도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서 회개하고 돌이켜 정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피조물과 역사를 통해서 들려주셨던 하나님의 소리도 성경이라는 성문화된 계시안에 다 담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며 공의로우신 심판주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자에게 하나님은 누구이며, 무엇을 하셨으며, 또 무엇을 하실 것인가를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또한 누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며, 그 미래가 어떻게 되는지를 성경에 기록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최종 소리인 성경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믿고, 순종하는 사람을 자기 백성이라고 일컬으시며 새 힘과 평강의 복을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시 29:11)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여기서 `힘'은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기를 힘들여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힘이며, 환난과 핍박을 능히 극복할 수 있는 하늘의 능력입니다(Calvin, Rawlinson).
또한 ‘평강의 복’은 홍수 이후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는 노아의 가족들에게 하나님이 무지개를 통해서 보여주신 것과 같은 심판이 없는 평화의 축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같은 축복을 받지 못하고 이방인들보다 더 혹독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을까요?
하나님께서 친히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 모양으로 들려준 일관된 하나님의 소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항상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듣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기만 하면 지은 죄도 사해주시고, 새 힘도 주시고, 평강도 주시지만, 청종하지 않고 불순종하면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일지라도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거듭하신 말씀입니다.
(출 15: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애굽에서 구원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듣지 않고 불순종한 결과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신 11:13)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 (신 11:14)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광야에서 태어난 새로운 세대들에게도 똑같은 말씀이 주어졌으나 그들 역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사는 동안 하나님의 소리에 청종하지 않고 불순종하는 동안 이방백성들에게 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즉각 심판하지 않으시고 여러 선지자들을 세워 동일한 말씀을 거듭하여 강조하셨습니다.
(슥 1:4)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실을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않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듣지 않고 불순종하다가 결국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큰 죄는 바로 하나님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듣지 않는 죄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그와 같은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과연 무엇이 복이며, 누가 그 복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복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복이고,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복입니다. 신구약 성경 마지막 계시인 요한 계시록에 복에 대해서 결론을 맺어 놓으셨습니다.
(계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그러므로 다른 사람은 어떠하든지 오늘 나부터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인 성경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말세가 되면 사람들은 들어야 할 소리에는 귀를 막고, 오히려 듣지 말아야 할 허탄한 소리에만 혹한다고 한 경고의 말씀이 오늘 교회 안에서 그대로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딤후 4: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딤후 4: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오늘 내가 정말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친 백성임을 믿습니까? 그렇게 된 것은 내가 성품이 고와서가 아니며, 착한 행실 때문이 더더욱 아니며, 다만 아무런 조건 없이 나를 택하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때문임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그 하나님께서 과거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동일하게 말씀하셨던 것과 같은 일관된 말씀이 있습니다.
(사 55: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입술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실제의 삶은 신앙을 뒷전으로 하고 세상에서 분주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향해 안타깝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 민족이 좌초된 배와 같이 기울어져 가고 있으며, ‘사면초가’라는 말처럼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종교 어느 면을 보아도 난감하고 답답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이대로 침몰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고, 회복되어질 수 있고, 전화위복이 되어질 수 있는 최선의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민족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역사의 주권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청종하고 죄악에서 돌이키는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사 55: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렘 26:13) 그런즉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고하신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리라
이 일을 위해 특별새벽기도회와 부흥회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 다 나아와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잘못된 죄악을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이 주시는 새 힘과 평강의 축복을 받는 절호의 기회가 되도록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복된 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시 29:11)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힘있는 여호와의 소리를 듣는 사람
>성경본문|
시29장 03절 ~ 9절
……………………………………………………………………………………………………………………………………………
>주 제|
말씀.은혜
……………………………………………………………………………………………………………………………………………
>출 처|
고일성목사
>비 고|
>첨부파일|
XXX
……………………………………………………………………………………………………………………………………………
※글씨확대- ctrl + 마우스휠
시편29:3-9절
신라 문무왕 때에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는 대나무로 만든 피리가 있었다. 그 피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았으며, 가물 때는 비가 내리고 비가 많이 올때 그 피리를 불면 개이고, 바람이 자고 파도가 가라앉았다고 합니다. 이웃 나라 왕이 군사를 일으켜 치려다‘만파식적’이 두려워 중지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이 피리가 낮에는 둘로 갈라졌다가 밤에는 하나로 합치는 한줄기 대나무로 만든 것으로 대나무가 갈리고 합치는 이유를 묻는 신문왕에게 대답한 용(龍)의 말이 있습니다“이는 한 손바닥을 치면 소리가 나지 않지만 두 손바닥을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대나무가 합쳐져야만 소리가 나니 성왕(聖王)께서 소리로 천하를 다스릴 징조입니다. 피리로 만들어 불면 태평할 것입니다”.
동양의 무속신앙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자연을 신으로 생각하고 숭배합니다. 고목이라든지, 큰 돌, 풍랑이는 바다등 그 속에 혼령이 있다고 믿는 정령사상(精靈思想)을 신앙의 근거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들은 자연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섬김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번개가 친다거나, 풍랑이 인다거나, 천둥 소리가 들리면 자연이 성낸 소리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성도들에게는 자연은 결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입니다. 자연은 오히려 인간의 삶의 터전인 동시에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거룩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자연이 발하는 소리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발견하게 되고 오히려 기쁨으로 찬양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소리는 두려움의 소리가 아니라 위엄있는 소리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농아들도 얼마든지 여행할 수 있고, 일상생활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농아들은 귀로는 비록 듣지 못하더라도. 상대편의 몸짓이나 얼굴표정이나 말하는 입술의 모양을 보면서 눈으로 보고 든는 일까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사는 수화로, 글로서, 아니면 손짓 발짓으로 자신의 생각을 상대에게 전달하기도 합니다. 짐승들도 자기들끼리의 의사 소통의 방법이 있다고 말하는데 하물며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어떤 사람은 소설로, 수필로, 시로서 나타내기도 하고,음악, 미술, 춤, 연극, 드라마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어떤 상징물로 자기의 뜻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케릭터’산업이 곽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자치단체마다 독특한 케릭터를 만듬).
과학의 발달로 인공위성을 통하여 순식간에 세계의 소식들을 소리로 들으며, 화면으로 볼 수 있는 시대입니다.
요즈음 헨드폰의 소리도 16화음에서 40화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헨드폰 하나로 다양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여러 소리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러나라, 조사하라, 녹음이 되어있다 아니다. 서로 물고 뜯는 정치가들의 소리. 얼마있지 않으면 한표 달라는 소리도 들어야 합니다. 자신만이 옳고 남은 다 나쁘다는 소리도 들립니다.
자동차의 소음에다가 . 바가지 끊는 아낙의 소리까지. 가정불화의 소리, 죽은자의 슬픔을 달래는 통곡의 소리와 흐느끼는 소리. 거짓과, 아첨과, 남을 비난하는 소리는 들려도, 옛날의 아름답게 들리던 새의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새 박사 윤무부 교수의 새소리를 녹음한 테잎을 친구로부터 선물로 받았는데 답답할 때 들으면 마음이 가라않기도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소리, 사람의 소리는 우리의 삶에 참고는 될 수 있어도 우리에게 닥쳐오는 모든 삶의 근본적인 문제는 결코 해결 할 수 없습니다. 음악의 소리가, 악기의 소리가 아무리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용기와 희망을 안겨다 준다고 할지라도 사람의 소리는 세상의 소리로는 인간의 근본문제인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습니다. 죽음의 문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있을 심판의 문제도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사람의 소리로는 그 어느것 하나 해결하지 못합니다.
고통과 시련, 아픔과 환란, 미움과 질투, 거짓과 허세, 온갖 부정과 부패 속에서 허우적 거리는 인생들의 모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위엄있는, 힘있는 소리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 소리가 바로“여호와의 소리”입니다.
힘있는 여호와의 소리를 듣는 사람마다 변화됩니다.
어떤 문제라도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참된 평안과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가장 값지고 보람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힘있는 여호와의 소리'를 듣을 수 있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행복한 사람입니다. 가장 귀한 사람입니다,.
세상의 소리는 들으면 들을 수록 짜증나고, 기분이 나쁘지만, 여호와의 소리는 들으면 들을 수록 힘이 납니다. 우리 몸에 양약이 됩니다. 나의 삶을 아름답게 하고 기름지게 만듭니다. 새롭게 합니다. 희망이 솟아나게 합니다.
다윗은 우리에게“여호와의 소리를 들으라”는 말을 무려 일곱 번이나 거듭하고 있습니다(3-9절). 우리가 기도할 때도 여호와의 소리를 듣기 위하여 귀를 기울이며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도 여호와의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우려 들어야 은혜가 됩니다. 칭찬의 말 보다 권면의 말은 귀담아 들어야 내가 삽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도 기도를 통하여 여호와의 소리를 듣도록 귀를 기울려야 합니다.
1. 자연을 통한 여호와의 소리가 있습니다.
다윗은 폭풍이 불고 있는 자연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만물을 통치하고 계심을 보게되며 자연이 발하는 소리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발견하여 찬양을 돌리고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폭풍우를 비록한 자연 현상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설명하면서,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위엄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주관하에 움직이는 자연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어떠한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까?
1) 하나님의 모습을 계시하는 소리이다.
자연은 분명히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으므로 땅의 깊은 곳과 산들의 높은 곳, 바다 육지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창조하신 자연을 보면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권능과 선하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악인을 두렵게 하는 소리이다.
죄를 지으면 벼락을 맞는다는 옛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과학적으로는 증명할 수는 없지만, 심리적인 면에서는 수긍이 갑니다. 보통 벼락이 치고 천둥이 울리면 죄를 지은 사람들은 혹시나 벌을 받게 되지나 않을까 두려워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소리는 힘있고 위엄이 있기에 우리들 마음에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때로는 자신이 죄인임을 돌아보게도 합니다.
칼빈은 본문을 주석하기를“여호와의 소리가 교만한 마음의 소유자들을 공포로 후려치며 부드러운 책망으로 후려친다”고 해석했습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소리는 악인을 두렵게 하는 소리입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소리이다.
하나님은 홀로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하시 분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소리는 여호와를 위한 찬양의 소리입니다. 자연의 모든 소리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찬미하는 소리와 같이 우리들도 온 몸과 입술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과 인간이 하나되어 한 마음으로 우렁차게 드리는 찬송을 기쁘게 받으실 것이며, 여호와는 위엄있고 힘있는 소리로 우리에게 화답할 것입니다. 오늘도 지친 영혼을 향하여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기도의 응답으로 들려주는 소리가 있다.
기도를 열심히 드리는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날 새벽기도에 나와서 다른날 보다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때 은말한 중에“내 아들아, 네 소원이 무엇이냐? 네 문제가 무엇이냐”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듣게 된 그는 깜짝 놀라서 그만 기절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날마다 남보다 더 열심히 기도에 힘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절해 버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그는 습관적으로 기도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평소에 기도를 드리면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여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기도를 다 들으십니다. 그리고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기도하십시요. 여호와의 소리에 귀를 기울려 보십시요. 그러면 우리를 부르시는 응답의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3. 말씀의 은혜로 들려주는 소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배울때 그리고 설교를 들을 때 성령께서 들려주시는“여호와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인격체요, 하나님 자신입니다(요1:1) 따라서 성도는 그 말씀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따라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의 소리는
1) 교만하자를 꺾으십니다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라고 하였습니다. 교만한 자는 어떤 자입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굽힐 줄 모르고 꼿꼿이 서 있는 자 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혼자 서 있을 수 있다는 당당한 자입니다.
교만하자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위하고 사람을 위하나 속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이웃을 멸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을 말씀으로 꺾어버리십니다. 벼락으로 백향목을 꺾어버리듯이 꺾어버립니다.
교만은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죄악입니다.
모든 악은 교만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그냥 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들을 꺾으시되 말씀을 통하여 꺾으십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바울입니다.
2) 새 생명을 주십니다.
‘그 나무를 송아지같이 뛰게 하심이요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송아지같이 뛰게 하시도다’ 이는 모든 인생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나무가 송아지같이 뛸수 없고 레바논 산과 헬몬 산이 들송아지같이 뛸 수 없는 것처럼 죄짐에 눌려있는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뛰게 하십니다. 영적 침체에 빠져 헤어날 줄 모르는 자들에게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말씀으로 생명을 불어넣으십니다. 말씀으로 눈먼 자는 보게하시고, 앉은뱅이는 일어서게 하시고, 귀머거리는 듣게 하십니다.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마11:5) 그 분은 이 땅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지금도 말씀을 통하여 새 생명을 불어넣고 계십니다.
3) 말씀의 소리로 회개케 합니다.
‘삼림을 말갛게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자기의 죄와 허물을 가리려는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본능을 여지없이 깨뜨려버리십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찾아오는 분이십니다.
찾아오셔서 말씀으로 인간의 허물을 덮고 있는 가식의 옷을 벗기시고 새로운 옷을 입혀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있는 그 모습 그대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돌아온 탕자의 아버지처럼 우리에게 새 옷과 새 신을 신기실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말씀의 소리는 교만을 꺾으시고, 새 생명을 주시며, 회개케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 속에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행하면 사는 길이 열립니다.
능력을 받습니다. 말씀의 소리를 귀담아 듣고 행함으로 축복된 생애를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3절에“여호와의 소리가 바다 위에서 들린다 영광의 하나님이 천둥을 치시니 그 음성이 망망한 바다 위에 메아리 치는 구나”(현대인 성경)라고 번역했습니다. 천둥번개와함께 폭풍이 몰아칠 때. 파도가 높아지면서 거대한 힘을 과시하게 되는데 그때에 누가 그 광풍과 성난 물결을 잠재울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마가복음6:45-52절에-예수님께서 생선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천명의 군중을 먹이셨습니다. 이적의 떡을 얻어 먹은 군중들은 열광적으로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려 하였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고생하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기대했던 메시야로 생각하고 왕으로 세워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하려 하였습니다. 아마 예수님의 제자들도 군중의 요구에 동조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군중들과 제자들을 재촉해서 건너편으로 보내시고 자신은 홀로 산으로 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날이 저물어서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이 탄 배가 갈릴리바다 가운데에 있었고 갑자기 일어난 바람 때문에 배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제자들은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배는 계속해서 심하게 흔들리고 거센 물결은 뱃전을 강타 하면서 배 안으로 물이 들어왔습니다. 이제는 저들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포기할 수 밖에 없다고 여겼습니다. 아예 체념해 버렸습니다. 이때 풍랑 사이로 저들을 부르시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험난한 인생 길에는 예기치 못했던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종종 환난의 광풍. 시련의 풍랑이 몰아쳐 올 때가 있습니다. 갑자기 하던 일이 꼬이기 시작하더니 위기로 변하고, 불안과 공포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듭니다. 불안과 공포로 몰아갑니다. 결국 더큰 문제는 우리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문제입니다.
오늘도 혹시 가슴을 치며 통곡할 수밖에 없는 고통스러운 일이 있습니까?. 그 일로 혈압이 오르고 분통이 터지는 비통한 일이 있습니까?. 그래서 분한 마음으로 마음이 괴롭습니까? 여호와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나다 두려워 말라”
너의 가정은 잘 지내고 있느냐? 네 자녀들은 잘 지내고 있느냐? 네가 하는 일들이 힘드느냐?. 너의 건강이 나빠졌느냐? 마음에 상처가 있느냐? 고민이 있느냐? 주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고생하는 인생의 배에 오르셔서 바람과 성난 물결을 잔잔케 하십니다. 이와같이 그의 위엄과 힘있는 소리 앞에서는 모든 것들이 순종합니다.
이 시간 성경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여호와의 소리를 귀담아 듣고, 설교를 통하여 들려주시는 여호와의 위로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온갖 방법으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여호와의 생명력 있는 소리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희망의 소리, 축복의 소리, 은혜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진심으로 마음의 풍랑이 잠잠해지고 참된 평화와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사시기를 원하십니까? 여호와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모세가 떨기나무에 불이 타는데 나무는 타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 두려워할 때“나다”하였습니다. “스스로 있는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냈다 하라”분명히 가르쳐 주었고. 하나님의 소리를 들은 후 그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9장에 보면.
사울이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해서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홀연히 하늘에서 강한 빛이 그를 두루 비칠 때 사울은 그 자리에서 거꾸러지면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 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다메섹 도상에서 여호와의 소리를 들은 사울은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핍박자 ‘사울’이 변하여 복음 전도자 ‘바울’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모르고 살던 강퍅한 사람들도 여호와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교만한 사람도 여호와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마음이 굳은 사람도. 마음의 문이 닫혀진 사람도,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여호와의 소리를 들으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만 여호와의 소리를 듣지 말고 하나님을 멀리하고 있는 교만한 사람도 여호와의 소리를 듣게 해야 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과시하는 거만한 사람도 여호와의 소리를 듣게 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소리를 듣는 사람마다‘사울’로 살던 삶이 변하여‘바울’의 삶과같이 살게 될 것입니다.
본문6절에는 마음과 생활이 얽매여 있는 사람도 여호와의 소리를 들어야 할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나무를 송아지 같이 뛰게 하심이여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 송아지같이 뛰게 하시도다”
여기서‘그 나무’는 백향목을 말하는데,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나무는 돌아다닐 수 없습니다. 송아지같이 뛸 수 없습니다. 자유스럽지 못한 모습으로 항상 매여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소리를 들을 때 그 백향목나무가 송아지 같이 뛰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말라기4:2절에“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치료하는 광선은 곧 여호와의 소리,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4:12)라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곧 치료하는 광선입니다.
여호와의 소리는 진리입니다. 치료하는 광선입니다.
우리를 얽매고 있는 모든 죄의 사슬을 끊어버리는 능력이요 권세입니다. 여호와의 소리를 듣는 사람은 가뭄으로 시들었던 초목이 생기가 나듯이 생동감이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이 공허합니까?. 허무합니까? 텅빈 느낌입니까? 허전 합니까? 외롭고 쓸쓸합니까? 여호와의 소리를 들으십시요.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텅빈 가슴을 다 채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소리만이 심령의 창고를 가득 채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소리를 듣는 사람만이 가슴에 가득 차는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음의 부요함도 얻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소리를 들읍시다.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여호와의 소리를 들읍시다
우리의 마음에 참된 평화와 기쁨을 주는 여호와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여호와의 소리는 우리로 하여금 힘있는 자 되게 하십니다. 능력자로 만듭니다. 사명을 능히 감당하게 합니다.
앞으로 전진하는 자 되게 합니다. 승리자가 되게 합니다.
여호와의 소리를 들으십시오.
시간시간 주 앞에 나와서 기도를 통하여 들으시고, 말씀을 통하여 여호와의 소리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만사를 제쳐놓고 우선적으로 여호와의 소리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소리를 듣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한 주간도 여호와의 소리를 들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시 29:10-11, 고린도후서 13:11-12 / 안효관목사
신앙생활은 혼자서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모든 사람과 단절하고 홀로 살아갈 수 없듯이, 신앙생활도 모든 사람과 단절하고 혼자 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장로회신학대학 상담학 교수인 오성춘 교수님의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 상담을 요청해 왔습니다.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해온 43세의 그 직장인은 직장일 때문에 자주 교회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에 대해서도, 또 목사님에 대해서도 자꾸만 비판적이 되어가고, 좋지 않은 소문들 때문에 설교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한 교회에 가서 신앙생활하려다가도 좋은 교회, 좋은 목사님을 찾으려다 보니까 계속 교회를 옮기게 되었고, 지금 남아 있는 신앙이라는 것은 차디차게 식어버린 것뿐입니다.
이분을 상담하면서 오성춘 교수님은 이렇게 이야기해 줍니다.
"형제는 먼저 어디에서부터 신앙이 떨어지기 시작했는지를 뒤돌아보아야 합니다. 열심 있던 신앙,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던 그 신앙이 어디론가 빠져나가 버렸습니다. 형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직장일로 여기 저기 교회를 옮겨다녔다고 했는데, 거기에 일차적인 구멍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화로에서 달아오르는 숯불과 같아서, 다른 숯덩이와 함께 있을 때에는 활활 타오르지만, 숯덩이 하나만 따로 옮겨 놓으면 아무리 산소 공급이 충분하다 하더라도 타오르기 힘듭니다. 과거에 열심히 신앙생활 할 때에는 많은 믿음의 이웃들에게 둘러싸여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격려하며, 서로 감싸주고 돌보아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직장을 따라 교회를 자주 옮기면서 이런 친밀한 믿음의 이웃들을 만들 시간적 여유가 없어졌고, 그런 믿음의 이웃들이 없어짐으로 해서 신앙의 불은 차츰 꺼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형제는 이 한 가지부터 시작하세요. 그것은 믿음의 이웃들을 만드는 일입니다. 교회의 남선교회나 기독실업인회 같은 주변 단체들, 그리고 믿을 수 있는 믿음의 친구들이나 믿음을 나눌 수 있는 이웃들을 만나도록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정기적으로 만남을 통해서 기도하고, 믿음의 순례 길을 다시 시작하세요. 하나님은 갈망하는 자에게 길을 열어 주십니다."(오성춘 교수 저 『우리 시대의 아픔과 사랑이야기』 중에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앙이 좋다고 장담한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믿음의 사람들과 교제하지 않으면 결국 그 신앙은 사그라지고 맙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믿음의 이웃이 몇 명이나 됩니까? 어려울 때에 기도해 달라고 부탁할 수 있고, 어떤 문제 앞에서 믿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믿음의 이웃이 몇 명이나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의 이웃이 5명이 되지 않는다면, 지금 우리는 위태로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믿음의 이웃이 5명이 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언젠가 교회를 떠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믿음의 이웃을 계속 만들지 못한다면 결국 신앙을 버릴 수도 있다.'
주일 낮에 예배 한번 드린다고 해서 우리의 신앙이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에서 예배드리는 것만큼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성도의 교제'입니다.
성도의 교제가 식어버린 교회는 교회의 기능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성도의 교제가 식어버린 교회는 더 이상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초대교회가 놀랍게 부흥했던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세상 사람들이 다 부러워 할만한 '아름다운 교제' 때문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46-47절에서 이렇게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초대교회 교인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두 가지 일을 힘썼습니다. 첫 번째는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예배드리는 일에 힘썼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습니다. 성도의 교제를 쉬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예배드림과 성도의 교제를 힘써왔던 초대교회에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성도의 교제는 그렇게 중요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 마지막으로 권면하는 말씀이 "열심히 신앙생활 해라. 전도 많이 해라. 예배드리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라"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를 나누라는 말씀을 마지막 권면으로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6가지 요소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그 6가지 가운데서 지난주에 3가지를 먼저 생각해 보았습니다.
1> 기쁨으로 교제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2> 서로가 부족함을 인정하고 함께 온전함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서로가 위로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도의 교제는 세상에서 상처받은 마음들을 위로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나머지 3가지를 함께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4> 네 번째로 거룩한 입맞춤으로 나누는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는 마음을 같이 할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같은 마음을 품지 않으면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초대교회 교인들도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고 했습니다. 함께 한다는 것은 먼저 마음이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도둑질을 함께 해도 마음이 맞아야 합니다. '도둑질을 하자'는 데 마음이 하나되어야 손발을 맞춰서 도둑질도 하게 됩니다. 하물며 거룩한 신앙을 추구하는 성도들이 마음이 하나되지 않고서야 어떻게 성도의 교제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마음을 같이 한다"는 것은 동일한 생각과 사상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음을 같이 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릅니다. 서로 자라난 배경이 다르고, 배움의 정도가 다르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방식과 습관이 다 다릅니다.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20년, 30년, 아니 50년 60년 이상을 같이 산 부부도 같을 수가 없습니다. 똑같은 사건 앞에서 우리 모두는 각각 다른 생각을 합니다. 엄밀하게 따지면 우리가 서로 같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게 모두가 다른 우리가 어떻게 같은 마음을 가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우리는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서는 마음을 같이 하고, 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러면 서로 다른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같이 하고 한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바로 이어서 이렇게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때에만 우리는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때에만 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때에만 우리는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품어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그건 겸손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셨지만, 하나님의 자리를 비우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죽음의 자리에까지 자기를 낮추신 바로 그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을 때, 우리는 한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한 마음이 되지 못합니까? 왜 부부 사이에 마음이 맞지 않고, 왜 사도회 회원들 사이에 한 마음이 되지 못합니까? 왜 같은 교회를 섬기며 주님을 위해서 일한다고 하면서 서로 같은 마음을 품지 못합니까? 우리가 예수님처럼 마음을 낮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죽음에까지 내려간 겸손이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겸손의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내 자존심을 죽이는 겸손이어야 한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내 욕망과 이익을 십자가에 못박는 겸손이어야 한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영광을 얻고 싶고, 내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싶어하는 그 인간적인 마음이 죽어질 때에만 우리는 한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내 생각이 아무리 옳은 것 같아도 화평을 위해서 그 생각을 포기하고 죽어질 때에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성도의 교제는 바로 그런 자신을 죽이는 겸손의 마음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내가 죽어지면 모든 문제가 풀려집니다. 나를 십자가에 못박으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풀어갈 수 있습니다.
내 자존심을 내세우고, 내 생각만이 옳다고 우기고, 내가 영광을 받아야 한다고 욕심을 부르는 자리에는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 욕심과 자존심으로 가득차 있는 우리의 마음을 죽이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읍시다. 내가 먼저 내 자존심을 버리고, 내가 먼저 내 생각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내가 죽어지면, 그 자리가 아름다워집니다.
5> 다섯 번째로 그리스도 안에서 나누는 성도의 교제는 평강을 추구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음을 같이 하며 평안할지어다." 여기에서 '평안'이라는 말은 구약성경의 언어로 하면 "살롬"(shalom)입니다. 이 살롬이라는 말은 히브리 사람들의 인사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마 샬롬카"(mah shalomkha, 평안합니까, 어떻게 지내십니까)라는 인사를 한다고 합니다.
이 살롬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말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건 그 뜻이 대단히 넓기 때문입니다. 살롬이라는 말에는 평강, 평화라는 뜻뿐만이 아니라 건강, 행복, 온전함, 부유함이라는 뜻도 포함됩니다. 인간이 추구하고 싶은 모든 아름답고 행복한 것들이 이 '살롬'이라는 한 마디 말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살롬'이라고 인사를 하면, 그 말 속에는 '행복하세요' '마음에 평강이 넘치시길 빕니다' 하는 뜻뿐만 아니라, '건강하세요' '부자가 되세요' 라는 뜻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 세상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사는 낙원과 같은 삶을 누리는 것이 살롬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평강을 누리길 소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교제 속에서 우리가 그 평강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살롬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서로 살롬을 누리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살롬은 나눔이면서 동시에 섬김입니다. 나를 나눔과 나의 섬김을 통해서 내 형제와 이웃이 하나님의 살롬을 누리도록 해야 합니다.
나를 통해서 형제가 행복하고, 나와의 사귐을 통해서 형제가 기뻐야 합니다. 그게 살롬을 추구하는 성도의 거룩한 교제입니다.
-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다른 사람의 마음에 평화를 주어야 합니다.
-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주어야 합니다.
-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형제의 약함을 나누어 지면서 형제를 강건하게 해야 합니다.
- 뿐만 아니라 성도의 교제는 형제가 가난하고 힘들어할 때에 나의 것을 나눔으로 형제의 고통을 나누어 지는 것입니다.
- 형제가 육체의 질병으로 인해서 힘들어할 때에 병이 빨리 나을 수 있도록 도와줄 뿐만 아니라, 그 질병으로 인한 마음의 약함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 성도의 교제는 믿음이 약한 자를 도와 믿음이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한마디로 성도의 교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교제'라는 말을 신약성경의 언어로 하면 '코이노니아'(koinonia)입니다. 코이노니아라는 말은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은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나눈다는 것은 그렇습니다. 나의 가장 소중한 것까지 주는 것입니다. 나의 소중한 것을 줌으로 해서 그가 행복하다면 주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형제에게 줌으로 해서 그가 온전해진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부유함을 위해서 기꺼이 가난하게 되셨습니다.(고후 8:9) 사망에 매여 종노릇하던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당신은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기꺼이 내놓으셨습니다.
성도의 교제가 그래야 합니다. 살롬을 추구하는 성도의 교제는 형제의 아픔을 내가 대신 지고, 성도의 약함을 내가 짊어지고, 성도의 모자람을 내가 채워 가는 것입니다.
6> 여섯 번째로 성도의 거룩한 교제는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거룩한 교제가 가져야 할 5가지 요소를 말씀한 후에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입니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는 성도의 교제는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교제 속에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심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만남 속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러 모인 이 자리에만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인 모든 모임 속에 언제나 하나님께서 임재하십니다.
우리의 대화 가운데도 예수님은 곁에 와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대화를 듣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하나님이 지금 우리 사이에 와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식사를 할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식탁에 함께 앉아 계십니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손님(불청객)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주인으로 우리와 함께 앉아 계십니다.
우리의 모든 교제 속에 보이지 않게 임재하신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교제가 얼마나 아름다워지는지 모릅니다. 가끔 언성이 높아지고 불쾌해지려는 자리에 목사가 나타나면 높아지려던 언성이 낮아지고, 불쾌하게 내뱉으려던 말을 참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목사가 있다는 것 때문에 많이 참는 것입니다.
목사만 나타나도 그렇게 참는데,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 가운데 와 계신다고 생각하면 어찌 서로에게 화를 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이 자리에 오셔서 다 보고 계신다고 생각하면 어찌 언성을 높이며 얼굴을 붉힐 수가 있습니까?
성도의 교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여기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동화같은 소설이 있습니다. '조반니노 과레스키'(Giovannino Guareschi)가 쓴 "돈 카밀로와 패포네"라는 소설입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공산당 우두머리인 패포네가 자기의 갓난 아이에게 영세를 받게 하기 위해서 신부인 돈 카밀로를 찾아옵니다. 공산당 우두머리의 아이에게 영세를 베푼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영세를 베풀라고 하시니까 하는 수 없이 영세를 베풀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아이의 이름이었습니다. 공산당원이었던 패포네는 소련식 이름으로 영세를 받기를 원했고, 신부인 돈 카밀로는 그 이름으로는 영세를 베풀 수 없다고 맞섰습니다. 그러다가 고성이 오가며 흥분을 하다가 싸움을 하게 되었습니다. 돈 카밀로 신부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 제가 지금 이 못된 놈을 한 대 때려주고 싶은데 어떻게 할까요?"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그래 한 대 쥐어박아 주거라." "그런데요 예수님, 왼손으로 때릴까요, 오른손으로 때릴까요?" "오른 손으로 힘껏 때리거라." 그래서 돈 카밀로 신부는 패포네를 오른손 주먹으로 힘껏 갈겨주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싸움이 약 20분 정도 계속되었습니다. 그때 제단 위에서 이런 주님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힘을 내라, 돈 카밀로. 아래턱에다 한 방 먹여라." 그 말을 들은 돈 카밀로는 패포네의 아래턱을 주먹으로 힘껏 한 방 먹였습니다. 패포네는 성당 바닥에 나뒹그러졌고, 돈 카밀로 신부가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물론 소설의 내용입니다만, 때론 과격하기도 한 돈 카밀로 신부에게서 우리는 늘 주님과 대화하며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싸움의 순간에도 그 장면을 지켜보고 계신 주님과 상의를 합니다. 돈 카밀로 신부는 언제나 주님이 자신의 삶에 임재해 삶을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돈 카밀로 신부처럼 싸우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늘 임재하시는 주님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성도의 교제 속에 임하시는 주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모임에, 우리의 만남에 임하셔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말씨가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이 조심스러워질 것입니다. 화가 나도 참을 것입니다. 내 욕심대로 하고 싶어도 참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모습 속에 참된 성도의 교제가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도의 교제 속에 살아갑니다.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신앙이 자라가고,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온전함을 이루어갑니다. 거룩한 입맞춤으로서의 성도의 교제는 깊은 영성을 추구하는 교제를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교제하는 성도의 교제는 주님의 마음으로 하나된 마음이 되어 교제해야 한다고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의 살롬을 추구하는 성도의 교제는 나의 소중한 것까지 나누는 '코이노니아'여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늘 우리 가운에 임재하신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을 인식하며, 그 하나님 안에서 교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든 믿음의 식구들이 이런 거룩한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모두가 아름다운 신앙에로 자라가고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기를 축원드립니다.
홍수때 좌정하신 하나님
시 29:10-11 / 조용기목사
"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사람들은 사물을 보는 관점에 따라서 희망적이고 긍정적일 수도 있고 절망적이고 부정적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부자(父子)가 사막을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태양은 내리쬐고 목이 말라서 입술이 터져 피가 흐릅니다. 지치고 피곤하여 절망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를 보고 “아버지, 이제는 포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도저히 더 걸어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고달프고 괴로울 때 참고 이기는 것이 인생이다. 낙심하지 말고 가자.” 아버지의 격려에 아들은 사막길을 걸어갔습니다. 한참 가다보니 많은 사람이 죽은 무덤이 나왔습니다. 아들은 무덤을 보고 그대로 주저앉아 통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앉아서 너털웃음을 웃고 박수를 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 무덤을 보니 이젠 살았다. 사람들이 파묻지 않았으면 어떻게 무덤이 있겠는가. 틀림없이 이 근처에 오아시스가 있고 사람들이 살고 있다”며 아들을 일으켰습니다. 진짜 얼마가지 않아 오아시스를 발견하고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똑같은 사건에 대한 아들과 아버지의 관점이 달랐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크고 작은 삶의 홍수를 당하게 됩니다. 그 홍수를 부정적, 절망적으로 볼 수도 있고 희망적이고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똑같은 홍수를 부정적으로 혹은 절망적으로 바라보면 홍수에 의해 해와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러나 그 홍수를 긍정적·희망적으로 바라보면 오히려 홍수를 만난 것이 유익되고 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1. 홍수 위에 좌정하신 왕
홍수 위에 왕으로 좌정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홍수를 정복하시고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통하여 죄악의 홍수를 다스리십니다. 어떠한 죄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게 됩니다. 죄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정복되고 다스리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악의 홍수도 하나님께서 다스립니다.
또 세상과 마귀의 홍수를 다스리십니다. 세상과 마귀가 온 인류를 삼키려고 하면 주님은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호령하시며 이 세상을 정복하시고 마귀를 이기시고 왕으로 좌정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세상과 마귀도 대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심신의 병의 홍수도 하나님께서 다스리십니다. 우리가 어떠한 심신의 병에 걸려 있어도 하나님은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병을 다 정복하셨습니다.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고 병을 짊어지셨습니다.
저주와 가난의 홍수도 다스리십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 무시무시한 경제적인 위기도 실상은 하나님이 이미 이겨 놓은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저주를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습니다. 가난도 다 청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저주와 가난을 정복하고 그 위에 앉아 계십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면 이 모든 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홍수도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사망을 정복하고 음부를 철폐했습니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당하는 모든 시련과 의 홍수를 하나님께서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하늘이나 땅, 땅 밑 그 어느 곳에서 닥치는 홍수나 풍랑도 이미 하나님께서 다 정복하시고 그 위에 왕으로 좌정하신 것입니다.
홍수는 속히 흐르는 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홍수 위에 앉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홍수를 수레 삼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왕으로 앉아 계신 홍수는 침체되고 가만히 있는 물이 아닙니다. 힘차게 흐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홍수를 타시고 우리에게 힘차게 달려오실 것입니다. 홍수는 하나님이 타고 오시는 수레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홍수, 즉 여러 종류의 수레를 타고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개인, 가정, 사회, 생활, 인간관계의 문제, 고통과 괴로움과 낭패와 실망이라는 여러가지 종류의 홍수가 다가오는데 실제는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종류의 홍수를 타고 오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땅에서 여러가지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에게 다가올 때 여러 가지 홍수를 타고 오십니다. 한가지 종류의 홍수가 아닙니다. 시편 34편 19절에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난의 홍수는 우리를 깨뜨리고 회개하고 변화시켜서 새로운 삶을 열어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홍수를 바라보고 부정적이 되면 안됩니다. 홍수 위에 좌정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뻐하며 환영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홍수만 바라보고 피하려만 하지말고 홍수 위에 좌정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러가지 시험과 환난을 원수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고통스럽고 괴롭지만 하나님께서 타고오시는 홍수의 수레이기에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 7절에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손해될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유익을 주시고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해서 시험과 환난, 고난의 수레를 타고 와서 우리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변화받고 새롭게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개시키고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깨져야 합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다가 실패하면 깨뜨려 다시 그릇을 만드는 것처럼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회개시키고 변화시켜서 새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깨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친 광야를 통하게 한 것은 낮아지고 깨어지고 변화받고 새사람이 되어서 마침내 하나님께서 주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복을 받고 누릴 수 있는 자격을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환난은 하나님의 수레입니다. 수레를 거부하면 그위에 좌정하신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수레와 하나님을 동시에 환영해야 합니다.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여러가지 고난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회개하고 깨뜨리고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기위한 하나님의 수레로 생각하고 하나님과 더불어서 우리가 환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30편 4절로 5절에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우리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 저녁에 울게도 하시고 고통도 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레를 타고 오신 하나님께서 수레에서 내려오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수레에서 내려오면 홍수는 이제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수레에서 내려오지 않으시면 언제나 그 수레는 요란한 소리를 내고 우리 위를 지나갈 것입니다. 고통속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수레에서 언제 내려오십니까?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에 박우석 전도사님이 오셔서 간증을 하셨습니다. 이분은 고아였지만 예수님을 열심히 믿었고 일본에서 유학까지 하고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6. 25전쟁 때 부산국제시장에서 사업에 성공해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사회에서 힘있는 인사들을 만난다며 주일도 어겼습니다. 새벽기도 종소리에 찔려하던 양심도 무뎌졌습니다. 그러자 순식간에 홍수가 다가왔습니다. 하청업체들의 연쇄부도에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집에 수저 하나까지 경매딱지가 붙을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그는 이 홍수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죽을 결심을 했습니다. 산 중턱으로 올라가 쥐약을 먹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릅니다. 갑자기 정신이 희미하게 드는데 뒤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우석아, 우석아” 이제는 죽어 지옥에 왔나 싶어 고개를 드니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서서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우석아, 죄인의 길을 버리고 불의를 버리고 내게로 돌아오라.” 그 자리에 엎어진 박 전도사님은 이전의 죄를 낱낱이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뒹굴었던지 산 중턱에서 밑에까지 내려와 있었습니다. 간신히 기어 나온 그분은 마침 보이는 순복음교회로 들어가 통회하고 자복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로 헌신하여 부여에 있는 지교회 전도사로 파견되었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헐벗은 생활을 합니다. 다 떨어진 구두를 신고 열심히 전도하고 복음을 증거합니다. 그래도 그는 새로운 삶을 찾아 더 이상 홍수 속에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깨어져야 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니느웨의 반대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을 쳤습니다. 거기서 큰 풍랑을 만났지만 여전히 깨어지지 않아 물에 빠졌습니다. 물고기 배 속에서 깨어지고 회개하니까 물고기가 그를 토해냈습니다. 깨어져야 홍수가 지나갑니다. 회개시키고 깨어지게 하려고 홍수가 다가오기 때문에 그 목적을 달성하기 전에는 홍수가 지나가지 않습니다.
믿고 순종하면 홍수는 멈춥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좌정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좌정하셔서 우리 삶의 중심이 된다면 홍수가 다가오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우리가 주인이 되어서 주인 행세 하기 때문에 우리를 회개시키고 깨뜨리고 믿고 순종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홍수를 타고 오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주인의 위치로 오시기 위해 홍수를 타고 오시는 것입니다. 그 홍수가 우리들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회개시키시는 것입니다. 믿고 순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2.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
시련은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시편 29편 11절에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운동선수는 견디기 힘들 정도의 체력단련을 합니다. 그것은 힘과 능력과 인내력을 기르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야 올림픽에 나가서 여러 선수들과 경쟁해서 이길 수 있습니다. 학생들이 시험에 시달리는 것은 지적인 힘, 즉 실력을 길러야 진학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군인이 훈련소에서 고달픈 훈련을 하는 것은 전쟁에 나갔을 때 죽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살아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 어려운 훈련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러면 실전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위대한 종들은 모두다 많은 삶의 홍수를 경험하고 힘을 얻은 분들입니다. 아브라함은 25년간 삶의 홍수를 경험했습니다. 회개하고 깨어지고 믿고 순종하는 홍수를 겪었습니다. 그결과 100세가 되어서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
이삭은 모리아 산에서 죽음의 체험을 했습니다. 죽음이란 홍수를 맞았습니다. 이를 통해서 그는 한평생 하나님 앞에 깨어진 사람으로 순종하고 복을 받았습니다. 야곱도 20년동안 머슴살이를 하고 결국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을 하고 환도뼈가 어그러지는 억센 홍수를 맞았습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깨어지고 온전히 믿고 순종하는 능력있는 주의 종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13년간 종살이와 감옥살이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깨어지고 순종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그는 애굽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는 위대한 국무총리가 되는 힘을 얻었습니다.
모세도 40년간 광야라는 홍수를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없이 가나안 땅을 주지 않으십니다. 복을 누리기 위한 힘은 환난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해서 시험과 환난과 고통을 통하여 우리들이 회개하고 깨어지고 변화받고 순종과 믿음의 힘을 얻게 만들어 주십니다. 오직 시련과 환난의 홍수를 통하여 회개시키고 깨어지게 하고 믿음과 순종의 힘을 얻게 하시고 난 다음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3. 자기 백성에게 평강을 주심
인간은 없어질 세상 것을 의지하여 피난처로 삼기 때문에 한시도 마음에 평강이 없습니다. 돈이나 지위, 권력, 청춘, 인간적인 지혜 등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끊임없이 변화되고 유동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시련 가운데 인간은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은 의지할 것이 못됩니다. 이 세상에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피난처로 삼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삶의 여러가지 홍수를 통하여 이 모든 것을 순식간에 쓸어가 버리십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24절로 25절에서도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 부귀, 영화, 공명이라고 하는 것은 풀과 같습니다. 바람이 불고 햇빛이 비치면 시들어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의지할 수 없는 것은 버리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을 의지하도록 홍수를 통해 쓸 데 없는 것을 싹 쓸어가시는 것입니다. 홍수가 오면 별 도리 없습니다. 사업도, 집도, 권력도, 친구나 형제들도, 의지하던 물질도 다 없어져 버립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만을 피난처로 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5절로 37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 외에는 의지할 것이 없습니다. 다른 것을 의지하면 그만큼 상처가 깊어지고 파멸도 더 고통스럽습니다. 홍수로 인해 의지할 세상 것이 없어지게 되면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는 사람은 물질이 있어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권력이 있어도 그것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능력이 있어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살아갈 동안 잠시 잠깐 우리에게 맡겨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수 없습니다. 사망의 절망은 참으로 깊습니다. 그러나 사망의 절망도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사랑을 막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품고 죽었다가 부활하셨기 때문에 사망의 가장 깊은 곳도 하나님의 사랑이 미치지 못할 곳이 없습니다. 생명은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인 유혹이 됩니다. 그러나 그 생명의 유혹도 하나님의 사랑과는 견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망도 뛰어 넘고 생명도 뛰어 넘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천사들이나 권세자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막지 못합니다. 사단과 그 무리가 아무리 막으려 해도 사단과 그 악의 천사를 십자가에 멸하여 버리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권세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막으려고 정치적인 권력으로 훼방을 했지만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오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현재 일이나 장래 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수 없습니다. 현재에 다가오는 수많은 고난과 장래에 다가오는 불확실한 불안들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오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고 장래도 하나님 손에 있으니 그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높음이나 깊음도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높아도 보좌보다 더 높을 수 있으며 아무리 깊어도 지옥보다 더 깊을 수 있습니까? 어떠한 높음도 보좌에 계신 그 하나님을 막을 수 없고 지옥을 다 정복하신 우리 하나님의 능력을 어떠한 힘도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의 궁극적인 마음의 평강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다가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엄마의 사랑의 품에서 평안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안길 때만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3장 5절로 6절에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홍수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혜를 얻으면 다가오는 홍수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결국 홍수도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수레입니다. 홍수를 타고 오시는 하나님을 회개와 깨어짐과 믿음과 순종으로 받아들이면 하나님은 그 홍수를 통하여 오히려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우리에게 평강을 주셔서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게 해주십니다.
홍수가 밀려올 때
시 29:10-11 / 이용효목사
세계 과학자 2500명이 6년간 연구해 내놓은 '정부간 기후변화위원회(IPCC)'의 4차 평가보고서 내용이 지난 8월 6일 오후 1시에 발표되었습니다. 원래 오전 10시 발표될 예정이던 이 보고서는 미국, 중국 등 일부 국가의 반발로 발표시간이 3시간 지연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과 중국은 세계 1, 2위의 온실가스 배출국이기 때문입니다. 미국과 중국은 전 세계 온실가스의 40%를 배출 하지만 미국은 교토의정서에 가입하지 않았고, 중국은 개발도상국이라 아직 감축의무국이 아닙니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2020년엔 인구 4억~17억 명이 물 부족에 시달리고, 2050년엔 생물의 20~30%가 사라지면서, 2080년엔 인류를 제외한 생물의 대부분이 멸종하므로 인류도 최후를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뉴스를 보니 우리나라 해안에 지구 온난화로 12년만의 최악의 적조가 발생하여 물고기들이 때 죽음을 당하고 있다고 하였고, 동해안 해수면 온도가 몇 년 전에 비해 4도나 상승하였다고 합니다. 심각한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북한에 큰 홍수가 나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방글라데시에도 큰 홍수가 나서 많은 인명과 재산을 잃었습니다.홍수가 나면 인간의 힘으로 막기 어렵습니다. 순식간에 물이 불어나 가옥과 전답과 도로를 휩쓸고 지나가면서 막대한 피해를 줍니다. 불이나면 불 탄 흔적이 남지만 홍수가 나면 흔적도 없이 다 앗아가 버리고 맙니다.
그렇다면 이런한 홍수가 밀려올 때 우리들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1. 죄악의 홍수가 밀려올 때
이 시대는 죄악이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습니다. 음란의 물이 가정에 밀려들어와 많은 가정들이 타락하고 있고, 술 취함과 방탕의 물이 온 세상을 휩쓸고 있으며, 향락과 자기 쾌락의 물에 잠겨 있고, 그 어느 때 보다 우상숭배와 탐욕이 가득한 세상이 되었지만 이 멸망의 홍수에서 벗어날 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인함도 이와 같으리라”(마24:38-39)고 하셨습니다.
개미들은 큰 비가 오기 전 거처를 옮긴다고 합니다. 그래서 옛날 군인들은 개미들의 이동을 보고 전술 전략을 짰다고 합니다. 몇 년 전 인도네시아와 태국 일대에 몰아닥친 쓰나미 해일로 인하여 35만 명이 휩쓸려 목숨을 잃었지만 사람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의 해일이 몰려 올 때 수영하고 보트를 타고 놀았지만 코끼리나 원숭이, 들쥐들은 모두 피신하여 살았다고 하였습니다. 철새들은 겨울이 오기 전에 이동을 하지만 만물의 영장인 인간들은 죄악의 홍수에 밀려 심판과 멸망으로 들어가는 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 죄악의 홍수에 멸망하지 않으려면 십자가로 죄의 권세를 철폐하시고 승리하신 주님 안에 있어야만 합니다. 창 6장에는 죄악으로 인하여 홍수 심판을 받을 때 모두 멸망을 당하였지만 방주 안에 들어간 노아의 8가족은 살았습니다. 여기서 방주는 곧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세상에 유혹하는 죄악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령 충만으로 죄를 이기고 승리하여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미국 서부 켈리포니아 해안에서 펠리컨이 물고기 사냥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늘 높이 날다가 바다 속에 물고기를 확인하고는 쏜살같이 수직으로 낙하하여 물속에 들어가 물고기를 입에 물고 하늘로 날아갑니다. 어떻게 새가 물속에 들어가고 다시 하늘로 솟구쳐 날아갈 수 있나요 평소에 입에서 나오는 기름을 깃털에 묻혀 물이 털에 묻지 않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배는 물위에 떠 있을 때 많은 사람과 화물을 싣고 운반할 수 있지만 배 안에 물이 들어오면 배는 침몰되고 인명과 재산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죄악이 범람하는 말세를 살아가는 여러분이 죄의 홍수에 침몰하지 않기 위해 성령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2. 환란의 홍수가 밀려올 때
살다보면 때로는 죽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삶에 지치고 곤하여 쓰러져서 정말 더 이상 살아갈 여력이 없는 어려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위기를 만났지만 어느 한 곳 의지할 데가 없고 누구에게 도움을 호소할 데도 없이 버림받았다는 아득한 절망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주님은 당신이 두려워하는 그 환란의 홍수를 밟고 당신을 돕기 위해 다가오십니다. 본문에는 홍수위에 좌정하여 계신 주님이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인생의 크고 작은 모든 문제를 주님이 통제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새 한 마리도 주님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주의 주권자이신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환란 가운데서도 두려워하지 말아야합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담대 하라 볼 찌어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마귀는 별 것 아닌 것을 가지고도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고 절망하게 만들지만 주님은 어떤 경우에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시 27:1에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 하리요”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365번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두려움을 제거해야 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 안에 있는 자들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유익한 일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전주 예수병원에 식물인간으로 6년간 누워 지내던 전용기 씨가 깨어 일어났습니다. 당시 주취의사였던 신경외과 과장인 정남 씨의 말에 의하면 이런 일은 의학적으로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전용기 씨의 부인이 남편이 식물인간이 된 후 예수님을 믿고 매일 새벽기도회에 나가 남편의 소생을 위해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절망적인 환란을 만났지만 식물인간이란 홍수위에 좌정하신 주 예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였더니 홍수를 몰아내시고 깨어나게 하셨습니다.
고전 10:13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폭풍 속에 바다를 향해하던 범선의 돛대 위에 닻줄을 끊기 위해 선원이 올라갔습니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던 중 거센 파도를 보고 현기증을 느끼고 떨어지려는 순간 선장이 소리쳤습니다. “아래를 보지 말고 위를 보아라!” 위를 바라본 순간 위기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지금 위기를 만났다면 위기 그 자체를 바라보지 마시고 홍수 위에 계신 전능자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노아의 방주에 유일한 창문 하나를 위를 향하여 만들게 하신 것도 홍수를 바라보지 말고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라 하심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힘들고 어렵습니까? 흔들리고 있습니까? 환경이 소용돌이 치고 있습니까?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주시는 전능하신 주님! 홍수위에 좌정하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막 6:45 이하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괴로이 노를 젓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죽음의 위기를 만나 고통하고 있었습니다. 저들의 힘으로 도저히 풍랑을 극복할 수 없었고 물결로 인하여 심히 두려워하였습니다. 그 때 주님이 바다 위로 걸어 오셨습니다. 그들을 고통하게 하고 두렵게 하는 그 실체인 풍랑을 밟으며 주님은 제자들을 구하기 위해 다가 오셨습니다. 또한 시편 29편 본문의 말씀을 이루려고 주님은 물결 위를 걸어오신 것입니다. 당신의 위기는 무엇입니까? 당신을 고통하게 하는 그 풍랑은 무엇입니까? 분명한 것은 우리 주님은 그것을 밟고 당신을 향하여 다가오신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려고 다가오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3. 실패의 홍수가 밀려올 때
기자가 링컨 대통령에게 질문하였습니다. “대통령께서 만인에게 존경을 받는 비결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하였을 때 그는 “간단합니다. 제가 너무 많이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실패할 때마다 마귀는 ‘너는 이제 끝장이다. 포기하라고 말했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나에게 다시 일어나라! 더 큰 일에 도전하라! 기회는 아직 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주님의 말씀을 따랐지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아무리 어려운 시련을 만났을 지라도 “하나님은 날 사랑 하신다. 나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은 날 도와주신다. 하나님은 홍수 때에 왕이시다”라고 선포하시고 다시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시면 주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미국 오하이오주 웨슬리안 대학의 로널드 워커 박사는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한 교수였습니다. 그는 교수가 되기 전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어느 날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 이런 사표를 썼습니다. “우주사령관 귀하, 세상에 너무 어려운 일 많고 인간 계획대로 안 됩니다. 내가 가진 계획, 내 생각을 돌려드리니 빈 그릇 된 나를 마음대로 사용하여주십시오.” 주님께 맡기고 난 그 다음부터 마음의 평안과 함께 주님이 일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고 주님이 주신 승리를 노래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홍수가 일어나 밀려올 때 내 힘으로 도저히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당신이 과거에 실패하였고 현제 실패한 자리에 주저 앉아 있을지라도 홍수 위에 좌정하신 주님을 바라보시고 그 분에게 당신의 인생을 맡겨 버리십시오. 그리하시면 당신이 주님과 함께 홍수위에 올라 서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파도타기를 즐기는 사람들은 오히려 높은 파도가 올 때 더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파고가 높으면 높을수록 스릴이 있고 파도타는 즐거움을 더해주기 때문입니다.
4. 죽음의 홍수가 밀려올 때
2003년 가이드 포스트지에는 미 우주 왕복선 컬럼비아호 폭발사고로 7명의 우주인이 목숨을 잃을 때 남편 릭을 떠나보낸 아내 에블린의 이야기가 커버스토리로 실려 있었습니다. “지난 1월 16일 이제 2주간이 지나면 남편이 우주에서 돌아와 나를 꼭 안아 주며 내 귀에 다정하게 속삭여 줄 것을 생각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우주 왕복선의 이륙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2월 1일, 컬럼비아호는 지구 대기권에 진입하던 중 텍사스 상공에서 폭발했다. 내 삶이 하늘에서 송두리째 산산 조각나는 순간이었다. “엄마, 내 수학 숙제는 누가 도와주나요? 내가 결혼할 때 누가 날 데리고 입장하는 거지요?”하며 울부짖는 딸아이에게 난 아무 대답하지 못하고 끌어안고 있었다. 난 지금까지 남편이 없는 미래를 한 번도 상상할 수 없었다. 처음 경험하는 큰 충격과 절망감, 그런데 그때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인생의 어려운 시절마다 한결같이 위안을 주던 음성이었다. 주님의 음성이었다. “넌, 헤쳐 나갈 수 있다”고 그분은 말씀하셨다. 그렇다. 우리 결혼 생활의 중심에는 우리의 사랑보다 더 큰사랑이 함께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난 그 큰사랑을 언제나 의지해 오지 않았던가, 그 조건 없는 사랑을. 그리고 그 사랑은 내가 울부짖는 순간에도 여전히 나와 함께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분의 사랑이 내 남편과 나를 그리고 내 예쁜 두 아이를 묶어 주시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분이 함께 하신다면 우리는 그의 사랑 안에서 여전히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분의 사랑이 끝이 없는 것이기에(That love is never-ending)...”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가족의 이별이라는 슬픔의 홍수를 만났지만 죽음 너머 영원한 세계에 대한 믿음과 주님의 사랑을 통해 슬픔을 극복한 간증이었습니다.
전도폭발 창시자인 미국의 제임스 케네디 목사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코랄릿지 장로교회를 개척하여 48년간 담임하며 목회하셨고, 낙스 신학대학원을 세워 많은 주의 종들을 훈련시킨 훌륭한 목회자였습니다. 그 분이 어제 돌아가시면서 남긴 마지막 말입니다. “하나의 인생은 사라져 버릴 것이지만 그리스도를 위해 산 인생은 영원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챨스 스펄전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죽음의 때가 당신에게 다가 올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죽음조차도 당신을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떼어낼 수 없다.”
그렇습니다. 롬 8:35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라고 하셨고, 본문 11절에도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엘로힘’ - 전능 자, 강한 자 - 이 분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은 무너질 수 있습니다. 건강의 마지노선도 무너질 수 있습니다. 물질의 마지노선도 무너질 수 있습니다. 살다보면 그런 사건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렇게 튼튼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날아가고 마는 것을 봅니다. 그렇지만 영원하신 주님을 의지하는 자는 홍수 때에도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고 승리할 줄 믿습니다.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
시 29:11 / 김우영목사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큰 문제다, 정말 큰 문제인데..."라는 말입니다. 문제란 ‘잘못된 상태' ‘처리하기 어려운 난처한 일'로서 해결 또는 해답이 요구되는 걱정거리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근심, 불안, 고통, 고민, 공포가 따르게 되고, 이로 인하여 불면증, 우울증등 각종 신경성 질환이 유발하며, 더 나아가 육체적 질병도 동반하게 됩니다. 인생사에 있어서 문제는 불신앙인이든지 신앙인이든지 모두에게 다 있습니다. 허나 문제를 대함에 있어서 기독교인은 비 기독교인과는 달라야 합니다. 까닭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문제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개미 집 입구를 누가 자갈로 막았습니다. 개미들에게 어마어마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지요. 거대한 바위가 자기 집을 막았으니 개미의 힘으로는 도저히 처리할 수가 없는 사건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그 돌을 치워줌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마찬가지원리입니다. 인간들에게는 크고 심각한 문제가 자연계, 인간세계, 온 우주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는 아무 것도 아니십니다.
Ⅰ. 자연을 지배하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10절)". ‘홍수'라는 히브리어 ‘마불'은 일반적인 홍수가 아닌, 노아시대의 대홍수 사건(창6∼8장)을 말합니다. 이에 대해 성서학자들간에 이의가 없습니다. ‘홍수에 좌정하셨다'란 홍수에 임재하시어 섭리하심, 즉 친히 현현하셨다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준엄한 권능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는 악인들에게는 형벌, 의인들에게는 구원이 임함을 표현함입니다. 대홍수는 악인들에게는 진노의 심판이 었으나 노아에게는 오히려 생의 안전보장이었습니다. 홍수에 좌정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자연계와 인간계에 동일하게 미치며, 악인에게는 두렵고 무서운심판, 의인에게는 구원의 사랑이십니다. 홍수에 좌정하신 하나님의 섭리는 지나간 날의 한 사건이 아닙니다. 지금도 작용하고 있는 현재적인 사실이며, 동시에 미래를 향해 진행되고 있는 실제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시103:19)" 우리나라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사계절의 순환, 6개월은 거의 낮, 6개월은 거의 밤인 북극, 사계절 더운 적도...이를 인간 누가 바꿀 수 있고, 막을 수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좌지우지하실 수 있습니다. 홍해가 갈라졌다 합쳐지고, 반석에서 생수가 터져 나오며, 요단강이 끊어지고...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 싹이 난 아론의 지팡이, 광야의 만나와 메추라기... 바다 위를 육지 같이 걸으신 예수 그리스도, 주님의 명령에 잔잔해진 풍랑...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온 우주 만물을 지배하심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언제인가 지구 시간에서 24시간이 모자람과 우주개발 관계과학자들이 성경에서 답을 찾음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좀더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미국 메릴랜드 우주 항공사에서 인공위성의 궤도를 작성하기 위하여 컴퓨터로 10만년전 까지 소급, 달의 궤도와 태양의 궤도를 조사하더중 10만년 동안 24시간, 꼭 하루가 없어졌음을 발견,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를 규명치 못하면 인공위성의 끔찍한 충돌 사고를 막을 수 없기에 우주 과학자들은 고뇌에 빠졌습니다. 이를 옆에서 보고 있던 타이피스트가 말했습니다. “소장님, 제가 어릴 때 주일 학교에서 들었는데 여호수아가 기도하여 태양이 멈추었다고 했어요" 이에 소장은 코웃음을 쳤습니다. 그러나 그의 뇌리에서 타이피스트 말이 지워지질 않았지요 소장은 자기 연구실로 돌아와 혹시나 하고 여호수아서를 읽었고,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수10:13)'라는 말씀을 찾았으며, 당시의 시간을 컴퓨터로 살펴보다가 소스라치게 깜짝 놀랐습니다. 거기서 23시간 20분이 없어졌음을 발견 했던것입니다. 그는 흥분, 어쩌면 나머지 40분도 성경속에서 나올지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성경을 샅샅이 읽어 내려갔으며, 열왕기하 20장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유다왕 히스기야가 죽을병에 걸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 15년의 생명을 연장받았고, 그 증표로 해 그림자를 십도 물러가게 하셨다라는 말씀에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해 시계는 24시간을 360도 원을 중심으로 만든 것으로서 10도는 정확히 40분이었던 것입니다. 연구 소장은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고백했답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정확 무오한 섭리에 할 말을 잃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영광을 돌립니다." 과학을 하나님 말씀보다 좋아하고 믿으려하는 현대인들이시여! 하나님은 자연, 과학, 온 우주의 주인이시요, 지배자이시며, 주권자이십니다.
Ⅱ.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10절)". 하나님께선 하늘에 보좌를 정하고 계시나 지상 모든 인생들의 일들을 인지하고 계시며, 인간들에게 품은 온갖 계획이 있어도 하나님의 의지대로 명하시고, 목적대로 주장하시며, 행하시고, 성취해 나가십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과 인생을 절대 주권으로 통치하시는 왕이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침범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왕권은 정치적 투쟁이나 쿠데타로 빼앗거나 끌어내릴 수가 없습니다. 물론 도덕적으로도 획득이 안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지상의 통치권 같은 종지부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철두철미 오직 하나님만의 일이시며,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주권을 갖고 영영토록 왕권을 행사하십니다. 세상은 사악하나 하나님의 통치는 언제나 공평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통치권 안에서 하나님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믿는다면 문제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문제 보다 크신 하나님의 지배를 수용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창조자, 섭리자, 구원자, 심판자, 복의 근원자라고 말은 잘 하면서 하나님의 재창조, 공평한 섭리, 구원, 축복을 믿지 못하고 문제만 끌어안고 신음하는 일이 허다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문제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함입니다. 하나님께선 사울을 폐위시키시고 보잘 것 없는 목동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고, 간악한 헤롯왕을 충이 먹어 죽게 하셨으며... 이 땅에 오신 주님께선 나다니엘의 영적 갈등, 가나 혼인집의 곤경, 사마리아여인의 목마름, 니고데모의 사후문제를 해결해 주셨고, 38년된 환자 치유, 간음한 여인의 해방, 죽은지 나흘 되는 나사로를 살리셨으며... 한도 끝도 없이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Ⅲ. 힘과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도다." 하나님의 통치, 지배는 징벌의 심판이 목적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시고 복되게 하시려는 사랑의 다스림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사랑의 다스림은 실현되고 있으며, 지금은 은혜의 시간입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시인하고, 역사 하심을 믿으면 큰 은총을 입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 하사품입니다. 억울하고 괴롭고 상처가 났을지라도 내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에 문제를 맡기십시오 사필귀정의 결론을 내려주시고 덤으로 보상까지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선 자기 백성들에게 힘을 주시고 평강의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사하시는 힘과 평강의 복을 받고자 하면 나와 나의 삶을 하나님의 통치권 속으로 과감히, 가차없이, 끌고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힘과 평강의 복을 받은 자는 용기가 생기고, 담대해 지며, 소망이 와집니다. 불안이 사라지고, 번민이 없어지며, 마음에 안정이 깃듭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 하리로다(사40:31)"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4:2)"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평강은 형편, 처지, 환경, 여건, 상황, 사람과의 타협이나 문제가 없는 데서 오는 평안이 아닙니다. 난리, 질병, 기근, 지진, 경제적 불황, 각종 사고, 사기, 폭력이 일어나는 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평강 자체, 곧 하나님의 실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평강은 고난, 환란, 역경을 이겨내는 놀랍고도 신비한 능력입니다. 어느 고3 여학생이 단백질이 빠져나가는 신증후군이라는 불치병에 걸려 한 팔을 절단해야 했답니다. 이 여학생은 한동안 예수님을 떠나 있었다가 병상에서 다시 예수님을 영접, 수술을 했다고 합니다. 헌데 오른팔을 잘린 사람답지 않게, 그것도 한참 꿈많은 여학생이, 마음이 갈기갈기 찢겨질 터인데 너무나도 평안한 모습이더랍니다. 그 여학생이 밝게 웃으며 한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기에 팔을 자르러 들어갈 때도, 절단하고 나와서도 담담하고 평안했어요" 페암말기인 이주일씨가 요즈음 금연캠페인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모델로 하여 담배의 해로움을 깨닫게 하는 것, 참으로 귀합니다. 아쉬운 것은 그가 내가 갖고 있는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 힘과 평강의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모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평강은 일시적 방패막, 또는 모면의 것이 아닌, 완전한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느 순간에, 어떤 문제와 부딪칠런지 모르는 불안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통치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내 생각, 내 삶을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서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무디(D. L. Moody) 목사의 완전한 구원입니다.
첫째, 죄 빼기.
둘째, 은혜 더하기.
셋째, 사랑 나누기.
넷째, 평안 곱하기.
참 그리스도인은 (-), (+), (÷), (×)의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