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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역사정의실천연대 원문보기 글쓴이: KimINDRA
그네 스타일(박근혜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 모음집) 무한 펌질 강추
◉ 박근혜 연보
1952년 출생
1970년 성심여고 졸업
1974년 서강대 전자공학과 졸업/프랑스 유학
1974~1979년 퍼스트레이디 대행
1974~현재 육영수여사기념사업회 이사장
1980년 영남대 이사장
1980~1988년 영남대 이사
1982년~1990년 육영재단 이사장
1993~현재 한국문화재단 이사장
1995~2005년 정수장학회 이사장
1998~현재 국회의원(15·16·17·18·19대)
1998~2002 한나라당 부총재
2002.5~11 한국미래연합 대표
2004.3~2006 한나라당 대표
2007 한나라당 17대 대통령 경선후보
2011.12~2012.5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
◉ 박근혜 발언
■ “한 야당 의원이 회식 자리에서 아버지를 심하게 욕한 사실이 알려져, 기관에 불려가 취조를 받았다고 합니다. 신병 처리를 하기 위해 이 일을 아버지께 보고하자 ‘그 사람들 보통 욕하는 것이 직업인데 왜 문초까지 하느냐. 모두 풀어주라’고 지시하신 일이 있습니다. 이 예를 보더라도 아버지 본뜻에 반해서 일어난 일들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식으로서 이런 일들로 인해 고생하신 분들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1988년 <여성동아> 12월호 인터뷰
■ 북한체제와 우리 체제를 비교해 보면 북쪽은 지령 하나로 일사분란하게 전국을 움직일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있는 반면, 남쪽은 사사건건에 국론이 엇갈려 혼미한 상태였습니다. ... 그리고 예비군의 무조건 폐지, 민방위제도까지도 정치적 시비거리가 되었고 대학가에서는 교련 반대 데모가 연달아 있었고 평양 방송에서는 이를 선동하고…과연 이런 상황하에서 3천만 국민의 생명을 책임진 지도자로서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 여성동아 1989년 1월호 인터뷰 <‘유신에 앞장섰던 사람들 배신에 가슴아파요’>
■ (독재자가 권력을 스스로 포기하고 나온 일이 과연 있었는지. 또 나온 후에 어떤 말년을 보냈는지. 누구든 후계자로 지명하고 물러나셨을 것을 결심했을까 하는 의문에 대해) 아! 그거는 분명해요. 아버지는 물러나셔서 좀 평화롭게 지내고 싶다고 굉장히 소망하셨어요. / 아버지가 물러나셨는데 국민이 저항을 한다구요? 왜 국민이…/ 나라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쳐서 일하고 나오신 부모님께 아! 그 때 어머님은 안계셨으니까. 아버님께 우리 국민이 악인이에요? 왜 그렇게 저항을 하고 그래요?
- MBC TV 「박경재의 시사토론」 인터뷰 (1989.5.19.)
■ (5.16에 대해) 저는 5·16이 말하자면 구국의 혁명이었다고 믿고 있어요.… 그 때 시국을 보는 분들의 의견은 5·16이 먼저나느냐, 공산당이 먼저 쳐들어 오느냐 그런 시점에서 5·16이 다행이 먼저 나서 파멸 직전의 국가가 구출됐다, 그렇게 보고 있어요. 나라가 없어지면 그 다음엔 민주주의를 못하는건 둘째치고, 다 죽는 판 아니예요? 그래서 5·16혁명이 국민의 지지를 받았죠. 지금은 국민의 지지를 받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때 국민의 지지를 받았어요.
-MBC TV 「박경재의 시사토론」 인터뷰 (1989.5.19.)
■ (3선개헌에 대해) 아버지가 3선 개헌을 하시면서 3번 대통령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고 해서 반드시 대통령이 된다는 보장은 아니죠. 그런 기회를 한번 더 원하신거고 판단은 국민이 하는거죠. 아버지가 벌여 놓으신 일을, 말하자면 1차 임기 때 계획을 세우시고, 2차 임기는 반도 하지 못하고, 다음 정권에 넘겨주기 위해서 준비하고 사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이라든가 웬만큼 살만한 나라였다면 그냥 임기 채우고 나가고 임기 채우고 나가고 하면 다 좋은데, 아버지로서는 목숨 걸고서 이 나라에, 일은 벌여 놓았는데 임기는 다가오고 그러니까 국민에게 한번 더 할 수 있는 기회, 이것을 마무리해서 아버지가 마음 속에 갖고 계셨던 설계랄까, 그것까지는 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청하신거지. 그렇게 개헌을 했다고 해도 국민이 싫으면 아, 그분은 대통령을 해선 안되겠다고 하면 안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 MBC TV 「박경재의 시사토론」 인터뷰 (1989.5.19.)
■ 오늘날 우리가 이런 혼란과 무질서를 겪고 있는데 오늘날 우리사회가 이렇게 되기까지는 여러자기 원인이 많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한가지 손꼽을 수 있는 중요한 이유는 그동안의 역사의 왜곡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간 세대가 전부 다 잘못됐다는데 후배가 어떻게 선배를 존경할 수 있겠어요? 나라를 위해서 실컷 일하고서 지금은 오히려 젊은 세대에게 반발과 멸시를 당하는 것이 그동안의 사회분위기로 인해서 자초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 MBC TV 「박경재의 시사토론」 인터뷰 (1989.5.19.)
■ (김형욱 납치 사살 관련 질문에 대해) 그건 아버지를 너무 모르고 하는 얘기예요. 아버지가 얼마나 인명을 중시 하셨는데요. 저는 5·16도 무혈혁명이라는 것을 항상 다행이면서도 아버지다운 그걸로 생각하는데, 아버지가 그런 식으로 인명을 가볍게 보시고 할 분은 절대 아니예요.
- MBC TV 「박경재의 시사토론」 인터뷰 (1989.5.19.)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해) 이것은 아버지가 시키지 않으셨으니까 감히 어떻게 했을 것은 상상도 안되고 북한에서 그렇게 조작을 해서 한국정부를 궁지에 몰려고 이런식으로 한게 아니겠느냐. (진상조사 및 처벌이 없었다는 질문에) 제 짐작엔 이게 일본이 관련이 돼 있어가지고 그걸 공개적으로 말을 하면 국가간의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 때문에 냉가슴 앓듯이 그렇게 된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됩니다
- MBC TV 「박경재의 시사토론」 인터뷰 (1989.5.19.)
■(지역감정에 대해) 어느나라 대통령이건 집권자간에, 일단 대통령이 되어서 일을 할땐 혼자 일을 할 수 없으니까 주위에 많은 분들이 돕게 돼죠. 그럴 때, 대통령도 인간이니까 우선 아는 사람들을 처음에는 쓰게 되겠죠. … 아버지도 군 출신이시기 때문에 그때부터 알았던 분을 처음에는 가까이 하셨지만 그것을 의도적으로 딱 여기는 아니고, 여기는 내 사람으로 쓰고, 그런 분은 아니에요.
- MBC TV 「박경재의 시사토론」 인터뷰 (1989.5.19.)
■ (7·4공동성명 후 유신을 통해 직권연장에 이용했다는 질문에)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정말 욕을 먹고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한 결정을 직권을 연장하기 위해서 안보를 이용했다, 그렇게 말을 갖다 붙여서 자라나는 세대도 전부 그렇게 알아듣도록 한다는 것, 이건 얼마나 큰 왜곡이에요? 그렇게 해서 우리나라 역사가 왜곡이 된다는건 남에 의해 왜곡되는것보다 더 슬픈일이라고 생각해요.
- MBC TV 「박경재의 시사토론」 인터뷰 (1989.5.19.)
■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일어난 5·16혁명도 그런 의미에서 4·19의 뜻을 계승하고 있다. 또 5·16이 있었기 때문에 4·19때 희생된 분들의 희행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목숨까지 버렸는데 4·19후 그 혼란의 와중에서 만약 우리나라가 공산당의 밥이 됐다면 그 희생이 무슨 가치가 있어요. …아버지는 유신을 통해 북한보다 10년이나 뒤진 우리나라의 병기생산을 자체적으로, 독자적으로 생산해서 자주국방을 달성하려고 하셨던 것이고, 그런 계획을 차질없이 수행되려면 사회적으로 안정이 유지되어야 하고, 사회적인 안정이 유지되려면 강력한 지도체제가 불가피했기 때문에 유신을 통해 그것을 이루려고 하셨던 것으로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 MBC TV 「박경재의 시사토론」 인터뷰 (1989.5.19.)
■ 유신체제는 장기집권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그 당시 북의 위협과 미국철수 시사가 겹친 상황에서 통치권을 극대화하여 단기간에 국력을 다지고자 하는 체제였습니다. 몇 사람의 권력강화나 부귀영화를 위한 체제는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The Korea Post/1989.12월호 인터뷰
■ (정치입문 가능성에 대해)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남은 생을 바쳐서 아버지, 어머니 기념사업회 일을 열심히 하겠습니다. 처음에 계획했던 기념관 건립은 뒤로 미루었고, 아버지 시대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발전을 총괄하는 출판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를 바로 알리는 일에 온 힘을 쏟겠습니다. 정치가 이 사업에 개입되지 않도록 할 생각입니다.
-The Korea Post/1989.12월호 인터뷰
■ “자나 깨나 꿈과 희망이 있다면 오직 왜곡을 바로 잡아서 역사 속에서 (아버지가) 바른 평가를 받으시게 하는 것, 오매불망 그것만이 하고 싶은 일이었고, 또 해야 할 일이었다.”
-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 (p87. 박근혜 저. 남송. 1993년)
■ 권력의 남용, 판단의 착오로 인해 빚어진 한 인간의 끊임없는 고통을 나는 보고 있다. 권력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정말 두려운 것이다. 아무 죄없는 사람의 가슴에, 그 가족의 가슴에 영원히 지우기 힘든 상처를 남길 수도 있고 생사람을 잡을 수도 있는 것이다.
-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 (p26 박근혜 저. 남송 / 1993년)
■ 어떤 사람은 다른 것이야 어찌 됐든 무조건 높은 자리에만 오르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국회의원 되는 것만이 지상 목표이다…많은 사람들이 권세와 명예와 돈을 좇아 우왕좌와, 미치 생에 있어 그것이 모든 것인 양 난리를 치는 세상이다. 그러나 내기 보기에 위의 모든 것이 아무리 좋은 것들이라해도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가치요, 목표는 될 수 없다.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일뿐. 그러나 이 부수적인 것들을 절대적인 목표로 착각하는 데에서 엄청나게 많은 잘못들이 빚어지고 있다.(1991년 8월 7일)/ 근본적으로 명예와 부(富), 공적 등은 탐낼 필요도 없고, 가치도 없는 것이다. … 위대한 일을 할 사람은 그 사람대로, 평범한 생을 살 사람은 그 사람대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남는다면 그것은 평생을 얼마나 올바르고 슬기롭고 진실되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는가 하는 그 행적, 그 자취일 뿐이다(1991년 8월 23일)
-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 (박근혜 저. 남송 / 1993년)
■ 아무리 넓은 제국을 건설한 징기스칸이라도 내 사전에서는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없고 진시황의 중국 통일이 중국사에 아무리 큰 의미를 가져왔다 하더라도 나는 위대하다고 평가하지 않는다. 우선 한가지만 꼽는다면 한 사람이 그 넓은 영토의 왕이 되어보겠다는 꿈을 채우려고, 그것이 도대체 백성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기에, 그리도 많은 사람을 죽이고 그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어야 했는가 하는 점을 기가 막히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 (p212 박근혜 저. 남송 / 1993년)
■ “타인이 이렇게 음모를 꾸미고, 이렇게 나를 해코지 하고 이렇게 무례하게, 이토록 못되게 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인생의 코스를 잘못 선택하여 잘못 가고 있는 그들의 문제일 뿐이다. 그들은 그들의 길을 가고, 나는 나의 길을 갈 뿐이다. 그들은 내 인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선 결코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으며 해롭게 할 수도 없다. 그들로 인해 나는 내 생의 핵을 잃지 않았고, 바른 길을 이탈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1992년 2월 22일)
-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 (p73. 박근혜 저. 남송 / 1993년)
■ 오랫동안 큰 힘 또는 권력의 비호 아래 지내왔거나, 뭐든지 다 들어주는 부모의 보호 아래 금지옥엽(金枝玉葉)으로 자란 사람들은, 그 권내를 벗어나면 참으로 비참한 지경이 되기 쉽다. 무엇보다도 먼저 분노를 다스릴 줄 모른다. 자신의 뜻대로 되었던 세상과는 달리 이제 사사건건 방해와 반대에 부딪히게 되면 그 안에서 조화롭게 문제를 해결할 인내심을 잃어버리고 극도의 분노에 달하기 쉽다. 그리하여 약간 구부려도 될 일도 꺾어 버리고 제동기를 밟아야 할 때 가속기를 밟고…. 이런 경험을 하다 지치면 완전히 자포자기가 되거나 비굴해지기까지 한다. - 『박근혜 심경 고백 에세이- 내 마음의 여정』(p30. 한솔미디어. 1995)
■ 지난 수십 년간의 우리 나라의 발전 역사 한국민의 고통과 한의 소산이다. 그 시절 돌아가신 아버님은 자신의 한을 민족의 한으로 승화시켜 당신의 한을 푸는 데 그치지 않고 민족의 한을 풀고 가신 분이다.
- 『박근혜 심경 고백 에세이- 내 마음의 여정』(p94. 한솔미디어. 1995)
■ “아버지가 못다 한 뜻을 펼치는 데 조그만 힘을 바치겠다”
- 1998년 대구 달성 보궐선거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 "과거에 부정적인 면이 있었고 잘못됐으며 당시 피해 입은 분들에게 미안하다고 이미 사과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25주년이 되는데 20년 이상 사과했습니다"
- 2004년 7월25일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 체제 2기 출범 당시
■ “정수장학회는 공익법인이기 때문에 개인이 흔들 수 있는 게 전혀 아니다. 그때 역사를 보면 당시 상황에서 헌납이 된 것이며, 정권이 몇 번 바뀌었는데도 하자가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존속됐다”
-2004.7.27. <한겨레21>인터뷰
■ "역사를 정치적으로 다루려고 하면 자신의 잣대로 편리하게 평가하려는 유혹들이 많지 않겠습니까"
- 2005년 1월18일 한나라당 운영위원회
■ (한나라당 의원들이 제기한 '과거사' 부담에) “제 솔직한 심정은 한나라당이 박 대통령과 저로 인해 (한나라당이) 부담되고 상당히 짐스럽다고 생각하다면 대표직에 연연한 생각이 없다”
2005년 2월 4일 한나라당 국회의원 연찬회
■ ‘남편이 부정을 저지르는 책임의 태반은 아내가 져야 한다.’ 청와대 안주인으로서 어머니의 사명감은 무척 높았다.
-『박근혜 자서전-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 p50. 위즈덤하우스. 2007)
■ "지난 번에도 법에 따라 한 것이고, 이번에도 법에 따라 한 것인데 그러면 법 중 하나가 잘못된 것 아니겠습니까. 앞으로 역사와 국민이 평가할 것입니다. 정부가 지금 이렇게 하는 것도 역사가 평가할 것입니다."
-2007년 1월31일 기자간담회(2007년 1월23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 무죄 선고 관련)
■ "5·16은 구국(救國) 혁명이었습니다. 나라가 혼란스러웠고, 자칫 북한에 흡수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유신 체제는 역사에 판단을 맡겨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다만 그때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희생하셨던 분들께는 진심으로 죄송하고 사과드립니다."
"(정수장학회 환원 문제는) 공익 재단이라서 제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정수장학회 이사회가 결정할 사항입니다."
- 2007년 7월19일 한나라당 대선 후보 청문회
■ “청소년들이 왜곡된 역사 평가를 배우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걱정을 덜었다”
- 2008년 5월 26일 뉴라이트 ‘대안교과서’ 출판기념회 축사
■ "산업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피해를 본 분들께 저는 항상 죄송한 마음을 가져왔습니다. 그분들께 제가 사과를 드립니다."
- 2012년 3월13일 9개 지역민방 공동 초청토론회
■ "그 당시로 돌아가 볼 때 우리 국민들이 초근목피로 보릿고개를 넘기면서 세계에서 끝에서 두 번째로 할 정도로 가난한 나라로서 힘들게 살았고, 그 당시에 안보적으로 굉장히 위험한 위기 상황에서 돌아가신 어버지로서는 최선의 선택을 하신 게 아닌가 합니다. 그 후에 나라 발전이라든가 오늘의 한국이 있기까지를 돌아봤을 때 5.16이 그 어떤 초석을 만들었다는 것을 볼 때 바른 판단을 내렸다고 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여기에 대해 다른 생각, 반대 의견을 가진 분도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가지고 이게 옳으니 저게 옳으니 하는 것보다 역시 이것도 국민의 판단,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2012년 7월16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
■ “(5.16이) 그것이 어떤 정상적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에서 아버지 스스로도 ‘불행한 군인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 2012년 8월7일 새누리당 대선경선 주자 뉴미디어 토론회
■ (김문수 후보의 “5·16 자체를 쿠데타로 인정하는가”라고 물음에) “아니요”, “그 때 국가적 상황이 어땠나. 그걸 시작으로 어떤 역사가 이뤄졌는가 그걸 가지고 얘기해야 하기 때문에 간단하지 않다”, "당시 국가 상황이 국민들이 거의 굶주리고, 이대로 놔두면 나라 전체가 공산화돼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 없어질 수 있어서 불가피한 선택을 한 것“, “당시 5·16을 지지한 국민도 굉장히 많다”
“(5·16을) 쿠데타로 부르든, 혁명으로 부르든 그 일이 있었다는 걸 아무도 부인할 수는 없지 않으냐”, “쿠데타냐 혁명이냐 싸우는 것 자체가 정치인이 할 일은 아니라 생각한다”
-2012년 8월 8일 청주 CJB청주방송 주최 새누리당 대선경선 후보 토론회
■ “(5.16과 관련해) “현 정치권도 곧 이어서 후대들에게 역사의 심판에 오르게 될 것이다. 우리들이 할 일이 산더미처럼 눈 앞에 놓여 있는데 과거를 두고 논쟁할 여유가 있는가. 건설적이고 미래 지향적으로 현재 국민의 삶을 잘 챙기고 희망을 주는 것이 막중한 임무다. 과거로 가면 한도 끝도 없다.”
(교과서에 5·16이 군사쿠데타라고 표기 돼 있다는 질문에) “5·16에 대해 몇 년간 혁명으로 교과서에 명시된 적도 있고 쿠데타라고 표기되기도 했다. 정치권에서 이 문제를 갖고 국민들의 생각이 다양하게 있는데 옳다 그르다를 논하는 것은 끝없는 싸움이 된다. 이렇게 생각해라는 식으로 몰아간다면 국민을 분열시키는 것이다.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정치권에서 그 문제를 놓고 옳다 그르다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고 장준하 선생 타살 의혹 등과 관련 입장 요구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 시절 청와대 직속으로 진상조사위를 설치해서 몇년간 조사를 했다. 그 전 정권인 김대중 정권에서도 조사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조사할 것이 있다면 조사를 해야 한다. 그러나 정치권이 미래로 나갔으면 좋겠다. 너무 과거만 얘기하고 있다. 과연 그렇게 할 여유가 정치권에 있는가. 국민의 삶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고 너무 힘들게 살아가는 분들이 많은데 우리 할 일은 언제 할 것인가. 건설적으로 했으면 좋겠다.”
- 2012년 8월20일 새누리당 전당대회 후보 수락 일문일답
■ “유신에 대해서도 이제 많은 평가가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당시 이제 아버지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그렇게까지 하시면서 나라를 위해서 노심초사하셨습니다. 그 말 속에 모든 것이 다 함축돼 있다…
“(5.16과 관련해) 다양한 평가가 있기 때문에 이제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이고요. 다만 그 당시에 피해를 입으신 분들, 또 고초를 겪으신 분들에 대해서는 딸로서 제가 이렇게 사과를 드리고, 또 이렇게 우리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노력, 제가 해나가야 된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된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또 5.16 같은 경우도 이제 그 당시 상황을 봤을 때 내가 만약에, 이제 각 개인이요. 내가 그때에 지도자였다면, 또 이런 입장에 있었다면 어떤 선택이나 판단을 했을까, 이런 것을 생각하면서 객관적으로 봐야 되지 않나, 그러니까 그게 몇 십년 전의 역사이기 때문에 지금도 논란이 있고 또 다양한 생각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대해서 좀 앞으로 역사가 객관적으로 판단을 해나가지 않겠는가, 그건 역사의 몫이고 또 국민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에 피해자에게 사과할 의향이 있냐는 물음에)그 부분에 대해선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서도 또 어떤 앞으로의 판단에 맡겨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 답을 제가 한번 한 적이 있습니다.”
-2012년 9월10일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 인터뷰
■ “정수장학회가 저의 소유물이라든가 저를 위한 정치활동 한다는 야당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정수장학회는 부일장학회의 승계가 아니라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김지태씨가 헌납한 재산이 포함돼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국내에 복지가들 뿐 아니라 해외 동포들까지 많은 분들의 성금과 뜻을 더해 새롭게 만든 재단이었다. 안타깝게 당시 김지태씨는 부정부패로 많은 지탄을 받은 분이다. 4ㆍ19부터 부정부패 명단에 올랐고, 분노한 시민들이 집 앞에서 시위를 할 정도였다. 그 후 5ㆍ16때 부패로 징역 7년형을 구형 받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처벌을 받지 않기 위해 먼저 재산 헌납의 뜻을 밝혔고, 부산일보와 문화방송을 헌납했다.”
(정수장학회 강탈 여부에 대한 질문에) “법원에서 강탈이 아니라고 원고 패소했다”(회견 직후 정정)
10월 22일 정수장학회 입장발표 기자회견
■ (제일 좋아하는 과목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공계통을 했지만 역사를 좋아했다. 많은 교훈을 주니까”
“역사를 잊어버리는 사람이 역사의 보복을 받는다는 말이 있다.”
-10월 24일 EBS 방문, 강사 및 제작진과의 오찬간담회에서
◉ 박근혜 말바꾸기 발언
△“세금을 거두어 국가가 해결할 수 있는 복지에는 한계가 있다.”(2005. 4. 8) “과감하게 세금을 낮추어야”(2004. 10. 27)
△ “노무현 정부에서 공기업 민영화 방침도 거의 백지화됐는데, 우리가 집권하면 민영화를 추진할 것이다.”(2005. 11. 7)
-> 이명박 정부 들어서 공기업 민영화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면서, 박근혜 후보는 인천공항과 KTX 민영화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밝히지 않는다. 여론이 공기업 민영화에 비판적인 쪽으로 돌아서자, 박 후보의 ‘민영화 소신’도 더 이상 듣기가 힘들어진 셈이다.
△ “국가가 공공자금으로 기업을 지배하려는 연기금 사회주의”(2004. 10. 27)
-> 2012년, 박근혜 후보의 최측근인 김재원 의원은 연기금이 보유한 주식의 의결권 행사를 강화하는 법안을 냈다. 친박계 인사들은 이를 ‘경제민주화’의 핵심 법안으로 언급하곤 했다. 박 후보는 올해 8월16일자 <조선일보> 설문조사에서도 연기금 주주권 행사 문제에 ‘중립’으로 답변해 모호한 태도를 유지했다.
△ “아버지는 매달 기자들과 오찬을 할 정도로 언론에 문을 열었다. 내용이 잘못 알려지면 설명해야지 취재를 막아서는 안 된다.”(2007. 6. 2)
-> 새누리당의 ‘원톱’이 된 2012년의 박근혜는 언론관이 완전히 달라지다시피 했다. 2007년 대선 경선 이후 박 후보는 개별 언론사 인터뷰를 전폐했다. 종편이 개국한 2011년 11월에 4개 종편과 개별 인터뷰를 한 것이 ‘사건’으로 기사화될 정도였다. 이후 다시 언론 접촉을 극도로 줄였다. 박 후보의 언론기피증은 취재진 사이에서는 새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가 됐다.
새누리당 대선 후보 경선 기간에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박근혜 캠프는 경선 기간 30일 동안 미디어데이를 세 번만 갖겠다고 통보했다. 그나마 대상은 통신사와 종합 일간지로 한정해 주간지·월간지, 온라인 언론 등은 배제했다. “하루에 세 팀씩 몰아서 진행하자”라고 제안해 격한 반발을 샀고, 결국 없던 일이 됐다. 언론을 접촉해야 할 절박함이 없는 ‘원톱’이 되자, 언론관 자체가 달라졌다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는 변화다.
△“사조직과 금권선거 등을 안 하겠다고 약속을 드렸고 그것을 지켰다.”(2007. 5. 19)
-> 2012년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박 후보의 ‘사조직’이 일으킨 사건만 모아 봐도 상당하다. 박 후보가 직면한 최대 위기인 공천 뇌물 사건은, 부산 지역 친박 외곽조직인 ‘포럼부산비전’에서 터져나왔다. 뇌물을 준 것으로 지목되는 현영희 의원과 받았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현기환 전 의원이 모두 포럼부산비전에 속했다. 박근혜 후보는 거의 매년 포럼부산비전을 찾아 축사를 했다.
회원 수 30만명으로 알려진 ‘국민희망포럼’은 박근혜 후보의 조직책인 홍문종 의원과 이성헌 전 의원 등이 핵심으로 활동한다.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의 ‘선진국민연대’와 유사한 핵심 외곽조직이라는 평이 많다.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는 서울희망포럼에서 박근혜 후보 관련 책자를 대회장 주변에서 판매하다가 선관위가 선거법 위반에 대한 조사에 들어갔다. 세종시에서는 세종희망포럼 관계자들이 지역 대학생들을 룸살롱에 데려가 술을 샀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당론을 수정하려면 의원총회를 거쳐야 하고, 당론 변경 전에 개인 의견을 이야기하면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2005. 3. 29)
->이 발언은 국가보안법·과거사법·사학법 등 이른바 ‘3대 쟁점 법안(4대 법안에서 언론법 제외)’을 전향적으로 처리하자는 당내 소장파의 주장을 진압하면서 나왔다. 5년 후에는 “세종시 수정안이 당론으로 확정되더라도 반대한다.” MB가 세종시 수정안을 들고 나와 공세를 펴던 2010년 1월7일, 박근혜는 소속 의원 3분의 2가 찬성해 당론이 바뀐다 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반대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당시 한나라당은 친이계와 친박계가 대략 2대1로 갈라져 있었다. 세종시 수정안은 모든 야당과 여당 내 친박계의 반대에 부딪혀 본회의 통과는 불가능했다. 그 때문에 당 주류였던 친이계는 세종시 수정안을 당론으로 확정해 친박계에게 당론에 따를 것을 요구한다는 전략이었다. 이에 박근혜가 미리 ‘저지선’을 치고 나선 것이 “당론이라도 반대” 발언이다.
△ “17대 국회 무정쟁 선언”(2004. 4. 29) “4대 입법을 힘으로 밀어붙인다면 실력 저지라도 할 수밖에 없다.”(2004. 12. 1)
-> 박 후보가 ‘민생’이라는 키워드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는 주목할 만하다. 박 후보는 노무현 정부의 4대 입법을 “먹고사는 문제와 아무 상관도 없는” 이슈라고 규정한다(2004년 10월27일 교섭단체 대표연설). 이때는 4대 입법이 민생 이슈가 아니다.
하지만 ‘무정쟁 선언’까지 해놓고 “먹고사는 문제와 아무 상관도 없는” 4대 입법으로 정쟁을 지속한다는 비판에 직면하자, 4대 입법은 돌연 민생 이슈가 된다. 박 후보는 그해 11월28일에 4대 입법과 ‘민생’을 이어 붙였다. “4대 법안이 안보와 민주주의, 민생경제에 얼마나 해악을 끼치는지 알려야 한다.”
△“물갈이를 한다는데, 밀실정치와 사당화가 있거나 공천에 사심이 개입돼서는 안 된다.”(2008. 1. 10)
-> 박근혜 후보는 4년 전인 2008년 18대 총선에서, 당시 당 주류였던 친이계의 공천 물갈이 방침을 ‘밀실정치’ ‘사당화’ ‘사심 공천’으로 규정했다. 4년 후인 2012년, 상황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당을 장악한 박근혜 후보의 공천 대표상품은 이른바 ‘25% 룰’이었다. 물갈이를 ‘밀실정치’ ‘사당화’ ‘사심 공천’으로 규정했던 박 후보는, 4년 만에 물갈이의 ‘커트라인’까지 제시하며 한 발 더 나갔다. 박근혜 비대위는 또 비리 연루자는 애초에 공천에서 배제한다는, 4년 전 “적용 기준 자체가 모호하다”라고 했던 원칙을 고스란히 되살렸다.
△“내가 질문받기 전에 먼저 아버지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느냐.”(2004. 7. 20)
-> 박근혜 후보는 자신이 아버지의 후광을 이용한 적이 없다고 되풀이해 주장한다. 과거를 자꾸 물어보기 때문에 답할 뿐 먼저 언급한 적은 없다는 것이다. 5·16 쿠데타 관련 발언 등이 논란이 된 최근에는 “언제까지 과거만 말할 것이냐. 미래를 이야기하자”라는 반론을 즐겨 사용한다.
“제가 누구의 딸입니까? 저는 어릴 때부터 대통령이 어떻게 해야 경제를 살릴 수 있는지 직접 보며 자랐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아버지 못지않게 제2의 한강의 기적을 만들겠습니다.” 이명박 후보와 경선이 한창이던 2007년 8월6일 경남 창원 합동연설회 발언이다. 후보 연설이니만큼, 따로 질문한 사람은 없었다.
△“대통령이 헌법에 대해 도발하고 체제를 부정한다면 나라는 근본부터 흔들리고 말 것.”(2004. 10. 27)
-> 2004년 국회 대표연설에서 나온,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정면 비판이다. 당시는 노 대통령이 수도 이전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에 불만을 내비칠 때다. 박 후보는 헌법을 존중할 것을 강하게 주문했다.
8년 뒤 박근혜 후보는 정확히 같은 요구에 직면했다. ‘5·16 혁명’이라는 표현을 전문에서 삭제한 1987년 헌법정신을 존중하느냐는 질문을 수차례 받았다. 하지만 박 후보의 대답은 “과거에 머물지 말고 미래를 이야기하자” 정도가 고작이었다. 헌법정신에 대한 제대로 된 대답은 없었다. 박근혜식으로 말하면, “대통령 후보가 헌법정신을 존중하지 않아 나라가 근본부터 흔들릴 일”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상황이다.
=>> ‘박근혜식 말바꾸기’는 일반적 정치인의 말바꾸기와는 성격이 판이하다. 보통의 말바꾸기가 메시지 관리 실패의 산물이라면, 박근혜식 말바꾸기는 메시지 전략 성공의 결과물이다.
그녀 특유의 말바꾸기 패턴은 이렇다. 첫째, 단기간의 메시지는 매우 일관성이 높지만, 장기간을 놓고 보면 메시지가 자주 모순되고 충돌한다. 이는 정치적 국면에 따라 늘 ‘최적의 위치’를 찾아가는 그녀의 성공적인 정치 감각 때문인데, 그 결과 서로 다른 정치적 국면을 비교해 보면 거의 필연적으로 말바꾸기가 발생한다. ‘성공의 역설’이다.
둘째, 그녀는 이런 ‘변신’의 이유를 절대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일정 시점에서 자신의 달라진 포지션을 이미 기정사실로 간주해버린다. 말바꾸기 이전의 기존 지지층을 설득해야 한다는 부담과 말바꾸기에 따른 정치적 부담을 정면으로 감당하기보다는 성공적으로 회피한다. 그녀는 자신의 ‘변신’이 지적·정치적 각성이나 숙성의 산물이라고 볼 근거를 한 번도 제시한 적이 없는 셈이다. 이는 ‘원칙과 신뢰’라는 박근혜 브랜드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셋째, 포지션은 정반대여도 포장하는 메시지는 같다. 그녀가 다수파일 때 말하는 ‘원칙’과 소수파일 때 말하는 ‘원칙’은 전혀 다른 의미를 담는다. 하지만 어쨌거나 드러나는 메시지 자체는 달라지지 않는다. 세종시 당론에 대한 그녀의 ‘원칙’이 2004년과 2010년에 어떻게 바뀌는지를 보면 이는 단적으로 드러난다. 2008년과 2012년을 비교하면, ‘공천의 원칙’도 의미가 정반대로 바뀌었다. 덕분에 박 후보는 내용상 완전히 반대되는 주장을 하고도 일관성을 유지한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시사in <박근혜식 말바꾸기, 패턴 분석 해보니>(259호) 발췌
△ (박지만에 관해) “본인이 (신삼길 삼화저축은행 명예회장과) 아무 사이가 아니라고 밝혔다면, 그걸로 다 끝난거 아니냐”->(정두언 의원에 관해) “평소 신념답게[ 실천으로 자신이 앞장 서 해결하는 모습이 필요하다. 평소 말하는대로 하겠다면 하면 방법이야 있다”
△ (18대 총선 지역구 출마 여부 관련) “(지역구 출마는) 우리 지역구민들과 제가 한 소중한 약속이다. 마땅히 지켜야 한다”(2011년 12월 언론인터뷰)-> 4.11총선 비례대표 10번으로 출마
△ (선거지원 활동 관련) “선거는 당 지도부 위주로 치르는게 맞다고 여러번 답을 드렸다”(2010년 5월, 6.2 지방선거 지원 관련해) -> 2011년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시 나경원 후보와 동반 선거 지원 유세
<한겨레> 2012.7.16. 기사 <‘박근혜의 원칙’ 그때그때 달라~> 발췌
◉ 전여옥의 박근혜 관련 발언
△ “보좌관이 박근혜 위원장이 쓰는 샴푸를 사야 하는데 단종이 돼 못찾았다. 왜 최근 나온 제품들을 안쓰고 옛 제품을 쓰는지 모르겠다”, “박근혜 위원장은 일반 햄버거를 손으로 잡고 먹지 않는다. 보좌관이 포크와 나이프 들고 오니까 먹더라”
△ (2005년 대구행사 관련해)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앞에 있었는데 옆에 있던 의원이 우비를 씌워주라고 말했다. … “(내가 박근혜 비대위원장에게) 충성심과 굴복을 보여줘야 직성이 풀리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박 위원장이 피눈물 나는 심정을 같은 여성으로서 느끼길 바랐는데 가만히 있더라”, “도대체 손이 없나, 발이 없나”
△ “정치란 미운 사람과 함께 밥 먹고 일하는 것이다. 박근혜 위원장은 그런 것이 없다”, “박근혜 위원장과 일한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박근혜라는 사람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심기가 거슬리면 절대 용서를 하지 않는다. 다만 박근혜가 용서하는 사람은 딱 한 사람 자기 자신 뿐이다’고 말한다”
△ (박정희에 대해) “(유신정권 당시) 재능 있는 친구들이 공장이나 농촌에서 민주화 투쟁과 노동운동을 했다. 그런 우수한 인재들을 재능을 못 쓰게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훌륭한 독재자다. 우수한 인재가 능력을 쓰지 못하게 한 것은 큰 그림자다”, “영등포에 손가락이 잘린 분들이 많은데 그 시절 공장에서 각성제를 먹고 졸면서 일하다가 사고를 당한 사람들이다. 산업화의 영웅은 그들인데 꽃다발도 없고 명예도 없다”
2012.3.14. 위키트리 소셜방송 출연
△ “박근혜는 늘 짧게 답한다. ‘대전은요?’ ‘참 나쁜 대통령’…. 국민들은 처음에 무슨 심오한 뜻이 있겠거니 했다. 그런데 거기에서 그쳤다. 어찌 보면 말 배우는 어린이들이 흔히 쓰는 ‘베이비 토크’와 다른 점이 없어 보인다.”
△ "박 위원장은 인문학적인 콘텐츠는 부족했다. 신문기사를 보고 분석하는 능력이나 해석하는 깊이 같은 것은 참으로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저렇게까지 대통령이 되고 싶을까 싶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권력이란 매우 자연스럽고 몸에 맞는 ‘맞춤옷’ 같은 것”, "박근혜에게 한나라당은 '나의 당'(My way)이었다, 대한민국은 우리 아버지가 만든 '나의 나라(My country)'이었다. 이 나라 국민은 아버지가 긍휼이 여긴 '나의 국민(My people)'이었다. 물론 청와대는 '나의 집(My house)'이었다. 그리고 대통령은 바로 '가업', 즉 '마이 패밀리스 잡(My family's job)'이었다"
△ “박근혜의 스킨십은 독특하다. 당 사람들이 대변인은 대표와 늘 차를 함께 타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당연히 그런가 보다 하면서 박 대표의 승용차에 탔다. 그런데 그날로 비서관이 내게 말했다. ‘딴 차 타고 따라오시라’고. 나는 그때 알았다. 그녀가 불편해한다는 것을”
△ (박근혜 소통방식에 대해) "친박 의원들 사이에는 박 전 대표의 뜻을 헤아리느라 우왕좌왕하는 것이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러면 박 전 대표는 '제가 꼭 말을 해야 아시나요'라고 단 한 마디 한다", "선문답하듯 한마디씩 던지는 것은 정치가 아니다. 더구나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라'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비민주적이다"
△ “2005년 대구 행사에서 박 대표 바로 뒷줄에 앉아 있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의원들이 내게 말했다. ‘전 대변인, 뭐하고 있나? 대표님 머리에 (우비 모자를) 씌워드려야지.’ 순간 나는 당황했다. 자기 우비 모자는 자기가 쓰면 되는 것 아닌가? 나는 (모자를 씌우기 위해) 천천히 일어났다. 그러자 카메라 플래시가 미친 듯이 터졌다. 박근혜 대표는 한마디도, 미동도 없었다”
△ “박근혜는 늘 짧게 답한다. '대전은요?' '참 나쁜 대통령' 국민들은 처음에 무슨 심오한 뜻이 있겠거니 했지만 거기에서 그쳤다. 어찌 보면 말 배우는 어린이들이 흔히 쓰는 '베이비 토크'와 다른 점이 없어 보인다”
△ (3년 동안 박근혜를 봐 왔다며) “대통령감은 아니라는 것을 잘안다”, “나라를 위해서 그녀가 과연 대통령 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나의 답은 이미 정해졌다. '아니다. NO'였다”
- 『전여옥의 私(사), 생활을 말하다』 . 2012
△ (박 위원장에 대해) “정체성이 없어요. 대통령 병 환자”, “대통령직을 퍼스트레이디일하고 착각하는 것이 더 큰 문제”
-전여옥, 2012년 3월 8일 제주 해군기지 건설과 관련된 트위터 글
△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면 안된다면서) 저는 사람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몇 가지가 있는데, 지적 능력을 저는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런데 굿 리더(good leader)는 굿 리더(good reader)다. 그러니까 좋은 지도자는 누구나 다 좋은 독서가다. 그것도 저는 참 바라는 바이고,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었지요.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자기가 책을 많이 읽지 않더라도 지적 능력을 가지고 어느 것이 옳은 것이고 어느 것이 가야되는 것인가, 하는 것을 분별하는 지적 인식 능력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좀 만족하지 못했고.…
(박근혜가 책을 잘 안읽으냐는 질문에) 음,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요. … 서재에 들어가 봤을 때 책이 일단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여기가 서재인가, 책이 별로 없었고 통일성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저희는 가끔 책을 많이 받잖아요. 그런 책들이 있더라고요. (증정받은 책들?이라는 질문에) 예. 저도 가지고 있는 책.
- 2012년 3월 15일 CBS 라디오 프로그램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 출연
◉ 정혜신 정신과전문의 박근혜 분석
△ 박근혜에 대해 “영원한 소녀의 부성콤플렉스", "박근혜는 아버지 박정희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신화적 부성원형으로서의 박정희를 기억하고 있다"
(꼿꼿함, 단정함 등의 수사로 표현되는 박 대표 특유의 자기절제력에 대해) "아버지로부터 '특별한 부름'을 받았다고 느끼며 이에 부응하기 위해 극단의 의지를 발휘한다", “특수요원 훈련받듯 사는 삶을 산다”
(부성컴플렉스를 가진 여성들이) "개인적 여성적 삶을 포기하고 외부 세상의 일에 투신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들에게 외부의 세계는 "아버지의 세계이며 유일한 지향점"이기 때문.
(아버지 부음 소식에 '삼팔선은 무사한가'라고 답했다거나, IMF 외환위기 당시 '이 나라가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망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에 울음을 쏟았다는 등 박 대표의 끔찍한 나라사랑에 대해) “그녀에게 조국애란 거의 모태신앙과 흡사하다”
△ "박근혜에게 있어 조국은 아버지 박정희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박 대표가 한 기자의 '아버지의 업적 중 가장 의미 있는 것은?'이란 질문에 "근면한 국민성 배양"이라고 답했던 점에 대해)"국민을 자신과 똑같이 아버지의 훈육을 받아야 하는 자식의 입장으로 보기 때문에 가능한 대답"
△ "박근혜는 자신의 신화적 부성상을 사람들이 공유해주기를 원한다"(1989년 10·26 후 처음으로 언론에 나와 "아버지가 매도당하는 세상에서 제가 개인적으로 무엇을 얻더라도 저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던 말을 인용)
△ "유권자는 박근혜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박정희 신화의 살아있는 이미지로 박근혜를 선택하는 것", "박근혜는 언제나 박근혜의 타자". 박정희라는 상징적 존재가 아닌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답게 자기 '직업'을 통해 정당한 평가를 받길 바란다"
- 정혜신 심리평전 <사람 vs 사람>(개마고원. 2005)
◉ 조선일보의 박근혜 분석
"아버지 후광, 알맹이 없는 연예인식 인기"
③지지율 2위 박근혜…'이미지 정치'의 약점들
박근혜 대표는 한나라당의 ‘구세주’나 다름이 없었다. ‘차떼기당’으로 전락한 한나라당이 2004년 4·15 총선에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박 대표의 대중적 인기 덕이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박 대표는 지난 4·30 재보선에서도 한나라당에 29대0의 압승을 안기며 야당의 유력 대선후보로 자리를 잡고 있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과의 청와대 회동에선 자신의 새로운 이미지를 선보이면서 박 대표는 차기 대선후보를 묻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2위권을 달리고 있다. 이런 박 대표이지만, 정치지도자로서 그녀의 약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들도 적지 않다.
◆ “컨텐츠가 없다”
박 대표는 “내용은 별로 없으면서 ‘이미지 정치’만 한다”는 비판을 자주 받는다. ‘민생정치’의 전도사로 그는 자처하고 있으나, 대선 예비후보로서 민생의 기초인 경제 등에 대한 식견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 대표는 최근 방송기자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정부의 8.31 부동산 대책을 비판하려다 경제 관련 수치를 잘못 인용하는 일도 있었다. 이 때문에 박 대표는 여권으로부터 공격을 당했고 박 대표의 ‘자질론’까지 등장했다.
열린우리당 유시민 의원은 지난 8월 박 대표에게 “박 대표가 경제 살리는 방법을 알면 직접 와서 총리를 하라…(총리)할 배짱도 없겠지만 총리가 되면 지금처럼 무책임한 발언은 못 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당 쪽에서는 박 대표는 ‘공포의 수첩’이 없으면 ‘말도 못한다’는 비판까지 한다.
한나라당 내에서도 “이미지는 좋은데 알맹이가 없다”는 비판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노 대통령과의 청와대 회동에서 ‘선전’한 이후 이런 비판은 다소 줄어들었다는 평가도 있다.
◆ ‘박정희 후광’, ‘유신공주’란 비판
박정희 대통령의 후광은 박 대표에게 대중적 인기를 안겨준 반면 ‘유신공주’라는 비판도 함께 받게 했다. 물론 박 전 대통령은 몇몇 여론조사에서 역대 대통령들 중 가장 영향력이 크고, 성공한 지도자로 평가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지닌 그룹으로부터는 박 전 대통령의 유신독재 및 친일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란 변수가 딸의 대선가도에 어떤 변수로 작용할 지 아무도 알 수 없다.
2004년 8월 이후 포털사이트 네이버에는 “박근혜는 대통령이 될 수 없는 건가요?”란 질문이 올라와 있고, 여기에 “될 수 없다”고 답한 네티즌들은 “박 대표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가장 큰 이유로 꼽았다.
“전우회 같은 곳에 나가서 늘 ‘아버님 시절…’로 시작하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과연 유신의 향수를 지우지 못한 게 아닌가 한다”(youngrak9201), “박정희에 대한 옹호적인 발언은 역사인식의 부재로 평가할 수 있으며 정치 지도자의 첫 시험대에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과연 스스로의 철학이 있는가’란 의문이 든다”(ywind71)는 반응이 나온다.
한나라당 내에서도 이런 비판은 나온다. 이재오 의원은 한 인터뷰에서 “군부 쿠데타와 유신독재 핵심세력의 딸이 야당의 대표가 되는 모습은 적절치 않다”며 “부친의 공과는 역사가 평가하겠지만 유신독재에 대해서는 딸이 사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정치지도자 보다는 연예인 같은 인기
지난 4·30 재보선 때 경북 영천에서 박 대표가 지나가자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던 아줌마, 귀가길 학생 할 것 없이 박 대표 얼굴을 보려고 몰려들었다는 일화가 화제가 됐다. 박 대표에게 사인을 받은 학생들에게 ‘박 대표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열린우리당 의원 아니냐”고 답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이런 것이 박 대표 인기의 한 특성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한나라당 대선후보로서 가장 유력한 인물’을 물으면 박 대표가 압도적 1위로 나타나지만, ‘대통령 감으로 누가 적합하다고 보느냐’는 질문에선 이명박 서울시장에게 뒤지는 것으로 나타날 때가 더 많다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박 대표의 인기는 연예인과 비슷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느 순간 거품이 꺼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 한나라당 내 ‘박근혜 전위대’가 부족하다
“박 대표 혼자 치마폭에 얼굴을 파묻고 심청이처럼 뛰어내려 달라는 것이냐.” 지난 2월 박 대표에 대한 당내 공격이 거세지자 전여옥 대변인이 혼자 맞서며 했던 말이다. 실제로 박 대표 곁에는 전 대변인과 유승민 비서실장 등 외에는 이렇다 할 ‘전위대’가 없다고 일부 한나라당 의원들도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정도다.
계보 정치가 사라졌다고 하지만 대통령 선거든, 당내 경선이든 선거에서 이기려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주는 ‘동지’가 있어야 한다. 과거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는 이런 열혈 지지세력이 있었다.
“계보정치 하지 않겠다”는 것이 박 대표의 소신이라고 하지만 박 대표가 흔들릴 경우 위기를 함께 넘겨줄 당내 동지는 별로 없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가 활발히 활동하는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다.
이처럼 확실한 자기 세력이 없는 탓에 한나라당에서는 수시로 박 대표 리더십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심지어 퇴진론까지 터져 나온다. 한나라당 안상수 의원은 지난 14일 “박 대표와 현재 한나라당 틀로는 (대선에서)패배할 수 밖에 없다”며 박 대표의 퇴진을 촉구했다. 그런데도 박 대표 진영의 야무진 대응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정수장학회 등 재산 의혹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물려받은 정수장학회와 스위스은행 비자금 조성 의혹 등도 박 대표에게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 박 대표는 지난 2000년 자신이 이사장을 맡고 있던 정수장학회와 관련해 탈세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다. 박 대표가 1998~1999년에 정수장학회로부터 섭외비 명목으로 각각 1억원, 1억5천만원을 받아 쓰고 세금을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박 대표 측은 세금을 납부했다고 해명했다.
박 대표는 2005년 2월 정수장학회 이사장직을 사임하기 전까지 이런 금전 시비에 때론 시달렸다. 2004년 8월에는 독립유공자유족협회·민가협·박정희기념관반대국민연대 등 14개 시민사회단체가 “MBC주식의 30%, 부산일보 주식의 100%를 소유하고 있는 정수장학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권력을 이용해 취득한 장물이므로 즉각 내놔야 한다”고 공격하기도 했다.
이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스위스 은행 비자금 조성 의혹도 제기했다. “박정희와 박근혜가 스위스로 건너가 60억불을 은행에 예치했고, 여기에 보안사령부가 개입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뚜렷한 증거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박 대표가 이회창 전 대선후보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설도 있다. 당시 한나라당을 탈당해 미래연합을 창당했던 박근혜 대표가 다시 복당하는 과정에서 ‘거액’을 받았다는 의혹도 제기돼 있다. 박 대표는 당시 그 돈을 유세활동비로 쓴 것으로 돼 있지만 액수와 용도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 스킨십이 부족하다
스킨십 부족을 얘기하는 의원들이 많다. 박 대표는 선거 등 특별한 일이 없을 경우 ‘2차’는 거의 없다. 밤에는 혼자 집에서 주로 네티즌들과 온라인 대화를 하며 보낸다. 이것이 ‘박근혜식 정치’의 한 특성이다.
자연 ‘협상과 타협’으로 대표되는 과거의 정치와 박 대표는 다소 거리가 있다. 소속의원들에게 당 대표로서 협조를 구하기는 하지만 가슴을 털어놓고 동지를 만드는 스타일은 아니다. 이 때문에 “박 대표가 정치를 하는 것인지 시민단체식의 자원봉사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의원들도 있다.
“가끔 회식은 있지만 여성대표라 술잔을 주고받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힘들다”고 불평하는 의원들도 있다. 아주 간혹 폭탄주를 돌릴 때도 박 대표는 입만 살짝 대고 나머지는 ‘흑기사’가 마시곤 한다. 이런 박 대표의 특성을 “공주 스타일 때문”이라고 비판하는 소리도 나온다.
◆ 물러서지 않는 고집
박 대표는 자신이 설정해 둔 로드맵과 다른 얘기를 하면 좀처럼 수용하지 않는다는 비판이다. “다음 대통령은 대학 나온 사람이 돼야 한다”는 발언으로 전여옥 대변인에 대한 경질 여론이 거셌지만 박 대표는 눈도 깜짝 하지 않은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한나라당 안상수 의원은 “사람 쓰는 것도 그렇고 운영의 폭도 틀도 좁지 않느냐”며 박 대표의 당 운영 스타일을 독단적이라고 비판했다.
박 대표가 MBC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했을 때의 일이다. 공격적인 질문을 연달아 받았을 때 박 대표는 “지금 저랑 싸우자는 겁니까”라며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당시 많은 네티즌들은 “어디 무서워서 이야기나 제대로 하겠느냐”며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베일 가린 사생활, 시한폭탄 될 가능성도
박 대표는 아주 간혹 자신이 혼자 사는 집을 기자나 정치인들에게 공개하는 ‘오픈 하우스’를 하기도 했지만 박 대표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 있다는 얘기가 많다.
박 대표가 당무를 마치고 귀가한 후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수행비서도 현관문 밖에서 수행을 시작한다. 옷은 어디서 사 입고 밥은 어떻게 해 먹는지 모든 것이 장막에 가려있는 것이 박 대표이다.
이회창 한나라당 전 후보도 자신의 사생활이 공개되는 것을 싫어했다. 그러나 ‘빌라 게이트’가 터지면서 이 전 후보는 한 순간에 주저 앉았다. 특히 깨끗한 이미지, 서민들을 위하는 이미지를 트레이드 마크로 하는 정치인일수록 작은 흠집에도 큰 충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정치권 분석이다.
어쩌면 베일에 가려져있는 박 대표의 사생활 역시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변수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 ‘부드러운 리더십’의 한계
‘박근혜 리더십’에 대한 한계론도 만만치 않다. 한나라당 김문수 의원은 16일 “박 대표의 리더십은 온유하고 어머니 같고 화합형이라는 점에서 장점이 있으나, 지금과 같은 위기상황에서 국가 비전을 제시하고 위기돌파를 위한 전략전술을 구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 의원은 “박 대표가 기존의 정치지도자들과는 다른, 조용조용한 민생정치를 실천하고 계파를 만들지 않겠다는 실험적인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어려운 국정을 이끌어가는 야당 지도자로서는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비바람을 맨 앞에서 견뎌내야 하는 대통령에는 맞지 않는 리더십이라는 주장이다.
◆정상적인 성장과정을 겪지 않았다
박 대표가 10살 무렵인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미 5·16군사혁명을 주도해 국가 최고의 권력을 거머쥐었다. 이후 1979년 10월 김재규에게 피격당하기 전까지 20년 세월을 박 대표는 최고권력의 장막 속에 살았다.
육영수 여사 피격 이후 5년간은 사실상의 퍼스트레이디 생활을 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망과 그 이후의 은둔생활 등 박 대표의 인생은 일반인들의 그것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
물론 이런 개인 성장사는 박 대표가 선택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런 박 대표의 인생이 과연 국가 지도자로서 적합하겠느냐는 점은 논란이 되고 있다. 박 대표가 결혼을 하지 않았고, 자녀를 낳아 길러본 적이 없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비판하는 이들이 있다. 박 대표는 지난 6월 한 대학 강연에서 ‘화를 내지 않는 비결’을 묻는 질문에 “부모님이 돌아간 뒤 배신과 어려움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조선닷컴 2005.9.21.
◉ 기타 평가
2004년 말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이 이른바 4대 법안을 두고 극한대치를 이어가던 때 당시 당대표였던 박 후보를 비롯해 김덕룡 원내대표, 열린우리당의 이부영 당 의장과 천정배 원내대표는 ‘4자 회담’을 열고 쟁점 법안의 타협점을 찾기 위해 협상을 벌였다. 당시 여당 측 인사들은 회담 후 “박 대표가 수첩에 할 말을 적어와 그 말만 반복한다. 협상이 아니다.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기분”
◉ 박근혜 관련 분석기사
[2012 대선후보 심층분석] 박근혜 쟁점행적(상)
박 후보와 정수장학회 간 법적 관계는 2005년 2월 이사장직을 물러나며 끊어졌다. 하지만 박 후보의 도덕성 논란을 낳은 것 중 상당수가 정수장학회와 관련이 있으며, 정수장학회의 원죄인 ‘장물 논란’에 대해서는 법적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때문에 캠프에서도 정수장학회만큼은 털고 가야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정수장학회는 1995년부터 10년간 박 후보에게 자금원이었다. 이 기간 박 후보는 섭외비와 급여 등으로 11억여원을 받았다. 1998년부터는 국회의원과 이사장직을 겸직했다. 이 과정에서 소득세와 건강보험료 중 일부를 내지 않았다가 추후에 납부했다. 2002년엔 ‘탈세 논란’이 제기되자 소득세 1억 2000만원을 자진 납부하기도 했다. 박 후보는 2007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후보 검증 청문회에서 “(세금 미납부에 대해) 실무진의 착오였다.”고 해명했다.
●2002년 정수장학회 ‘탈세 논란’도
박홍근 민주통합당 의원은 지난 4일 박 후보가 받은 이 돈의 성격을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정수장학회와 같은 공익재단의 경우 보수 지급 대상을 상근 임직원으로 한정하고 있어, 비상근 이사장이었던 박 후보가 돈을 받은 것은 불법이라는 의미다. 이에 대해 조윤선 새누리당 대변인은 “박 후보는 비상근으로 근무할 때 판공비(섭외비) 이외의 보수를 받은 사실이 없다.”고 일축했다. 같은 당 김세연 의원도 “박 후보가 정수장학회 이사장으로 재직한 7년 기간 중 섭외비·인건비로 지급받은 금액은 총 11억 3700만원으로, 비상근 이사장으로 재직한 1998년부터 1999년까지는 2억 3500만원의 섭외비 이외에 별도의 급여를 수령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박 후보의 해명은 다르다. 박 후보는 2007년 검증 청문회에서 ‘섭외비를 받다가 급여로 바뀐 이유’에 대해 “법이 바뀌어 섭외비를 지급할 수 없는 상황이라 급여로 옮긴 것”이라고 말했다. 비상근이었던 1998~1999년 2년간 받은 섭외비가 사실상 급여였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다. 연간 섭외비와 급여 수준이 비슷해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한다. ‘국회의원 윤리실천 규범’은 의원이 개인·단체나 기관으로부터 통상·관례적 기준을 넘는 사례금을 받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박 후보의 도덕적 논란은 ‘고액 연봉’으로 이어진다. 박 후보는 검증 청문회에서 “(정수장학회의) 목적 사업비와 운영비의 비율이 8대2인데 (내 보수는) 운영비(8대2 중에) 2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나온 돈”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2002~2004년 박 후보가 받은 보수는 전체 직원 보수액의 절반 수준이다. 2002년 전체 직원 보수는 2억 6042만원이었는데, 이가운데 박 후보의 보수는 1억 4880만원(57.1%)이었다. 2003년에는 2억 5916만원 가운데 1억 2900만원(49.8%), 2004년에는 2억 6398만원 중 1억 3200만원(50%)이었다. 당시 정수장학회는 외환위기 이후 재정 사정이 어려워져 정리해고 등의 인력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박 후보의 공보비서관 출신인 최필립 현 이사장은 최근까지 자신 및 가족 명의 등으로 박 후보에 후원금을 제공해왔다.
정수장학회의 장물 논란도 박 후보에게는 부담이다. 2005년 7월 국가정보원 과거사진실위원회가 ‘공권력을 동원한 헌납’으로 규정했고, 민주통합당은 장물로 비판해왔다.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이 부산지역 기업가인 고 김지태씨가 설립한 부일장학회를 1962년 헌납받은 후 5·16 장학회로 개명했다. 1982년에는 그 명칭이 정수장학회로 바뀌었다. 김지태씨 유족이 장학회 주식 반환 소송을 진행하고 있으며,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2월 1심 선고에서 강압으로 재산이 넘어간 사실을 인정했지만 시효가 지나 반환 청구를 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박 후보는 1979년 10·26 사건 직후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부터 6억원을 받았다. 그는 검증 청문회에서 “경황이 없을 때 전 전 대통령 측의 심부름하던 분이 만나자고 해 청와대에 갔더니 ‘박 전 대통령이 쓰다 남은 돈이다. 법적인 문제가 없으니 생계비로 쓰라.’고 해 감사하게 받고 나왔다.”고 답했다.
일각에서는 국고에서 비정상적으로 나간 만큼 환수 조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당시 6억원은 소비자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현재 가치로는 38억원 정도다. 한 보수 논객은 “대통령의 집무실 금고에 든 돈은 그 과다에 관계없이 국가소유가 됐어야 했다.”고 꼬집었다.
박 전 대통령이 쓰다 남았다는 돈의 출처는 청와대 비밀 금고다. ‘5공 비리’ 검찰 수사에서 10·26 당시 전두환 합수본부장이 대통령 비서실 금고에서 9억 5000만원을 발견해 6억원은 박 후보에게, 2억원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게 전달했고, 1억원은 수사비로 쓴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 시절의 청와대 금고는 두 개가 있었다. 대통령 집무실에는 통치자금을 보관하는 ‘금고1’이, 비서실장실에 ‘금고2’가 존재했다. 박 후보에게 전달된 6억원은 금고2에서 나온 돈이었다. 월간조선은 1990년 3월호에서 “박 전 대통령이 받은 정치자금은 한 해 60억~100억원 규모로 추정된다. 달러 현찰도 상당량 보관됐으며 김계원 비서실장이 돈을 받으면 집무실 금고에 넣어 금고2에는 늘 1억~2억원의 잔고가 유지됐다.”고 보도했다. 10·26 직후 금고2에 9억 5000만원이 있었던 것은 추석이 겹쳐 있던 서거 며칠 전 박 전 대통령이 현금을 추가로 보관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제기된다. 당시 청와대 인사는 “매년 재벌로부터 추석과 연말에 정기적으로 모금했고, 연간 총액도 나중에는 50억~60억원에 달했다.(중앙일보 1991년 5월31일)”고 말했다. 그러나 금고1에 남은 비자금의 행방은 묘연하다. 1979년 11월 14일 대통령 집무실 공식 조사에 참여한 이광형 부속실 부관은 “금고1를 열었을 때 돈은 한 푼도 없었다.”고 말했다.
●1982년 성북동 주택 매매형식 띤 증여
언론 보도로는 10·26 당일 박 전 대통령의 양복주머니에서 나온 집무실 금고 열쇠는 퍼스트 레이디였던 박 후보에게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최광수 전 최규하 전 대통령 권한대행 비서실장은 1990년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금고1의 자금 행방은) 박근혜씨에게 알아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2007년 한나라당 경선 과정에서 이명박 캠프의 진수희 대변인은 “집무실 금고에 든 돈을 박 후보가 챙겼다는 얘기가 있다. 그 돈도 생계비로 썼나.”라고 질의했다. 이에 박 후보 측은 “집무실 금고 안에는 서류와 편지만 있고, 귀중품이나 액수는 많지 않았다.”고 말했다.
박 후보가 1982년 옮긴 서울 성북동 주택은 매매 형식을 띤 증여로 받은 것이다. 당시 신기수 경남기업 회장이 전 전 대통령의 지시로 마련했다. 박 후보는 검증 청문회에서 “신당동 집이 좁아서 꼼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신 회장이 제안했고, 법적인 세금 관계 등 모든 걸 알아서 하겠다고 해 믿고 맡겼다.”고 해명했다. 박 후보는 성북동 주택을 팔아 1984년 장충동으로 갔다가 현재 시가 19억 4000만원에 달하는 삼성동 단독 주택으로 1990년 이사했다. 박 후보와 신 회장의 인연은 깊다. 신 회장은 호국봉사단을 비롯해 영남대, 육영재단, 정수장학회 등에서 운영위원과 이사를 지냈다.
서울신문 12.10.9 5면
[2012 대선후보 심층분석] 박근혜 쟁점행적(하)
‘새마음운동’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새마음운동은 충효 정신을 바탕으로 물질적·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사회를 건설하자는 것으로 유신체제의 국민정신개조 운동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박 후보는 1975~79년 청와대 외부 단독일정 보도 137건 가운데 64건이 새마음운동과 관련된 것일 정도로 공을 들였다. 1978년 구국여성봉사단 총재와 새마음봉사단 총재가 된 박 후보는 자선 구호모임 중심의 활동을 한 육영수 여사와 달리 시도별·직능별·연령별 지부를 만드는 등 조직 운동을 벌였다. 1979년에는 77~78년 각종 새마음갖기운동대회에서 한 박 후보의 격려사를 묶은 ‘새마음의 길’ 영문판까지 나왔다.
●“새마음운동, 유신체제 국민개조”
이번 대선 후보군 가운데 한 명이었던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은 “박 후보는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 아니라, 육영수 여사가 서거하고 난 뒤에 청와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지 않느냐. 유신 한가운데 그 기간 동안 청와대 안주인은 박근혜였다.”면서 “임명장도 주고 정치적 행위를 했다. 나이가 어리지도 않아 20살 훨씬 넘었다. 유신통치의 장본인이었고 그건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새마음운동 이후 10년이 지나 박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기념사업회 활동으로 다시 공식 석상에 등장하기 시작한 1989년에도 박 후보의 역사관은 일관성을 유지했다. 박 후보는 당시 MBC 인터뷰에서 “5·16이 말하자면 구국의 혁명이었다고 믿고 있다. 나라가 없어지는 판에 민주주의를 중단시켰다 하는 얘기가 어떻게 나올 수 있는가, 이해가 안 된다. 나라가 있어야 민주주의도 있는 거니까.”라고 밝혔다. 유신체제에 대해서도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 후보 청문회에서 “역사에 판단을 맡겨야 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80개가 훨씬 넘는 나라들이 독립을 하거나 새로 탄생을 했다. 그 많은 나라들이 이른바 군사독재 정치를 겪었다. 그 나라 중에서 유일하게 한국만이 개발에 성공을 한 나라”라고 말했다. “두 개의 대법원 판결이 있다.”는 인혁당 사건 관련 발언은 이전에도 등장한다. 2007년 한나라당 경선토론회, 미국 방문 시 교포언론 간담회 등을 통해 “(인혁당 판결은) 두 개의 판결이 차이가 나니까 둘 중에 하나는 잘못된 것이다. 내가 사과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라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지난달 24일 박 후보는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5·16과 유신, 인혁당 등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박 후보의 과거사 첫 사과였지만 진짜 역사관이 바뀌었는지, 대통령 후보로서 정치공학적인 셈법인지는 아직도 알 길이 없다.
퍼스트레이디 활동은 최태민씨 논란으로도 이어진다. 최씨는 1974년 육영수 여사 사망 직후 박 후보에게 면담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고 1975년 3월 6일 청와대에서 박 후보를 만나 여러 조언을 한 뒤 측근이 됐다. 최씨는 그해 ‘대한구국선교단’을 만들고 스스로 총재에 취임했다. 구국선교단이 이듬해 구국봉사단으로, 1978년에는 새마음봉사단으로 이름을 바꿨다.
2007년 한나라당 경선 당시 공개된 중앙정보부의 ‘최태민 수사자료’에 따르면 그는 박 후보를 등에 업고 여러 분야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각종 이권에 개입했고 권력형 비리를 저지른 것으로 돼 있다. 수사자료에는 최씨가 44건의 비리 혐의를 받고 있다면서 “형식상 모든 업무는 박근혜가 관장하였으나 실질적으로 비공식 고문 격인 최태민이 전권을 위임받아 행정부, 정계, 경제계, 언론계 등 각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했다.”고도 언급돼 있다. 김재규도 10·26 항소이유서에서 자신이 최씨 문제를 대통령에게 보고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게 10·26을 일으킨 한 요인이 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980년대 육영재단·영남재단·정수장학회를 맡으면서 대외적으로는 침묵하던 시절에도 최씨가 등장한다. 박 후보는 83년 1월 육영재단 이사장에 취임하는데 이때 최씨도 육영재단에 다시 합류했다. 이후 박 후보는 1990년 11월 15일 육영재단 이사장직을 동생인 근령(서영으로 개명)씨에게 넘겼다. 이 과정에도 최씨가 연관돼 있다. 1986년부터 육영재단에서는 최씨와 딸 순실씨의 전횡에 대한 지적들이 나왔다. 최씨는 94년 사망했지만 최씨의 가족들이 구설에 올랐다. 순실씨의 남편 정윤회씨는 1998년 정치에 입문한 박 후보의 입법보조원을 맡았으며, 2004년에는 비서실장 역할을 하기도 했다.
박 후보는 이런 의혹에 대해 2007년 당내 후보 검증위 청문회에서 “(최씨와 관련한) 의혹은 많이 제기됐지만 제가 아는 한 실체가 없지 않나 생각한다.”면서 “최씨가 이런 비리가 있다고 공격하고 저와 연결해 ‘주변 사람이 나쁘니까 (제가) 뭘 잘못했다’는 식으로 공격하는데 이는 음해성 네거티브”라고 일축했다.
●‘최태민 수사자료’ 44건 비리혐의
박 후보의 친인척 관리도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기 때문에 박 후보의 친인척은 다른 대선 후보들보다 많은 편이다. 4촌 이내 친인척만 40명이 넘는다.
박 후보의 가장 가까운 핏줄인 여동생 근령씨와 남동생 지만씨도 부담이다. 육영재단 문제로 갈등을 빚은 근령씨는 박 후보와 의절한 상태다. 근령씨도 2008년 부실운영 등으로 인해 육영재단 이사장에서 물러났다. 이때 지만씨와 근령씨가 소송을 벌이며 대립하기도 했다. 근령씨의 남편인 신동욱씨는 자신에 대한 청부살해 미수와 5촌 살해사건의 배후가 지만씨라고 주장해 허위 사실 유포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지만씨와 부인 서향희 변호사는 2004년 결혼했다. 박 후보는 지만씨가 결혼하자 미니홈피에 “(서 변호사는) 동생과 아주 잘 어울리는 좋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라고 글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을 중심으로 올 들어 ‘만사올통’(만사가 올케로 통한다)이라는 논란이 야기됐다. 서 변호사가 박 후보의 영향력을 이용해 법률 자문을 맺었고 특히 2009년부터 3년간 영업정지된 삼화저축은행 고문변호사를 지냈으며, 지만씨가 친구인 신삼길 삼화저축은행 명예회장이 검찰에 연행되기 두 시간 전에 함께 식사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박 후보가 올 6월에는 “(지만씨) 본인이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했으니 그걸로 끝난 것”이라고 직접 반박에 나서기도 했다. 서 변호사 건에 대해서는 “법적으로나 어떤 면으로든 잘못된 것이 있다면 벌써 문제가 됐을 것이다. 알아보니 검찰에서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한다.”고 주장했다. 또 사촌 오빠인 박준홍 전 대한축구협회장은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친박연합’이라는 정당을 만들어 3500만원을 받고 시의원 공천을 준 혐의로 구속됐다.
서울신문 12.10.10 5면
첫댓글 이거 읽으면 투표하기 전에 멘붕으로 병원 실려 갈 수 있으니.. 읽는데 극도의 정신집중이 필요함
투표하구 당선됀 후로 읽었는데 너무 길어서 중간 건너띄우고 머리에 쥐 내릴라 하네요 홍보가 너무길어서 험이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