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 오동춘역 김인권
태어나자마자 외할머니에게 맡겨졌다. 고향 부산으로 돌아와 부모와 함께 살아본 게 겨우 5년, 소년은 다시 대구로 서울로 정처없이 떠돌았다. 서울 강남구 일원동의 반지하 단칸방, 그가 사춘기를 보낸 곳이다.그리도 보고 싶었던 어머니가 고1때 인천공항에서 쓰러졌다. 뇌종양 판정을 받고 얼마 못 가 숨졌다. 아들은 "전교 1등 하는 걸 보고 싶다"는 어머니의 소원을 고3 끝 무렵 이뤘다. 수능 전국 순위 0.8% 안에 든 것이다.
- ▲ 나비넥타이와 조끼로 한껏 멋 을 낸 김인권의 이런 모습을 스 크린에서도 볼 수 있을까.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 는“양아치 건달 연기와 달리 실제 성격은 차분하고 섬세하 다”고 말했다.
영화 '조폭마누라' '말죽거리 잔혹사' '숙명'에서의 양아치 김인권(金吝勸·31)을 기억하는가. 그게 아니라면 '해운대'의 오동춘은? 까까머리에 체육복 차림으로 1000만 관객을 웃긴 그를 신사동의 카페에서 만났다.
그런데 눈앞에 등장한 그는 양아치가 아니라 '지성인(知性人)'같은 모습이었다. 눈을 의심한 기자의 입에서 절로 "성형수술 했느냐"는 말이 나왔다. 가벼운 질문에 그는 심각하게 답했다. "병원에 가 상담한 적도 있어요."
―그래서 성형수술을 했어요?
"의사가 말렸어요. 안 해도 좋은 배우 될 수 있다고."
―왜 그런 생각을 했나요.
"좋은 역할, 큰 거 맡고 싶었어요. 권상우, 송승헌, 다니엘 헤니, 장동건처럼 되고 싶었어요. 착각이었죠."
―해운대에서 대박쳤으니 다음 작품도 정해졌겠죠.
"공교롭게도 다음 작품이 성형수술과 관련있어요. 아이돌(idol) 그룹의 멤버 한 명이 성형수술이 잘못되는 바람에 여자 쌍둥이가 대신 그룹에 들어온다는 설정입니다. 저는 이 드라마에서 매니저 역을 맡게 됐어요."
- ▲ 영화‘숙명’에서 마약중독자 건달로 나온 김인권. 그의 연기는 호평을 받았지만 실제 생활에서도 악인으로 오 해를 받아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MKDK제공
"아무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역할들이 있어요. 망가지고 이미지 깨지고 CF 안 들어오는…. 제겐 그런 역만 들어오더군요."
―'조폭마누라''말죽거리 잔혹사''숙명' 같은 작품에서 주로 건달 역을 했는데 학교 다닐 때도 그랬습니까.
"학창시절 늘 '날라리'를 동경했어요. 사고치고 싶어도 못했어요. 뒤처리를 해줄 사람이 없어서요."
―혼자 살면서 겪은 외로움이 영화 속에서 반항으로 나온 건가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찍새역(役) 하면서 볼펜으로 이렇게 확 찍어버리고 팔뚝으로 선생님 목 조르는 헤드락도 하고…. 통쾌했죠. 현실이라면 학교에서 잘렸겠죠."
―어머니가 남긴 말이 뭔가요.
"의식이 없었어요. 어머니와 그토록 함께 있고 싶었는데 누워있는 모습만 보다가 떠나보냈어요."
―어머니의 죽음으로 성격이 비뚤어진 학생들이 많은데.
"오히려 정신 차리고 공부했어요. 전교 1등 하면 어머니가 살아날 것 같았습니다. 정말 미친 듯이 공부했어요. 고3 마지막 모의수능 때 문과에서 전교 1등 했어요."
―성적표에 찍힌 등수 '1'을 보는 순간 어땠나요.
"살아 계실 때엔 옆에서 공부시켜주지 못한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옆에서 밀어주셨구나 하는 생각에 펑펑 울었어요."
해운대에서 그가 맡은 배역 '오동춘'은 대구 지하철참사에서 딸의 구두를 사러 외출했다 사망한 어머니의 이야기에서 따온 것이다. 영화에서 동춘의 어머니가 쓰나미에 휩쓸려 죽는 장면에서 그는 어머니를 떠올렸다고 한다.
수능성적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공부 잘했다는 얘기 나오면 '비호감'될까 걱정된다"고 했다. 중학교 때부터 연극 연출에 빠져있었던 그는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동국대 연극영상학부로 진학했다.
―그런데 왜 데뷔작 '송어(1999)'에는 배우로 지원한 겁니까.
"연출보다 돈을 많이 받아서요. 현장 나가 보니 배우는 개런티도 주더군요. '연출보다 낫겠다' 싶었죠."
―오디션에 단박에 붙었습니까.
"탈락하더라도 연출부 막내로라도 받아달라고 통사정했어요. 배우 3차 오디션까지 갔는데 투자가 안 들어와 영화가 중간에 멈췄죠."
―그래서 포기했나요.
"'언제 시작할지 모르니 남을 사람만 남아라'는 얘기에 캐스팅 후보에 올랐던 이들은 모두 떠났어요. 저는 입대도 연기하고 연출부 막내로 남았죠"
―배수진을 쳤군요.
"그 역을 꼭 따내고 싶었어요. 열정을 보여주려고 '태주'라는 인물에 대한 분석을 50장에 걸쳐 적어 조감독께 냈죠. 태주의 일기, 역사뿐 아니라 태주 엄마는 뭐했고 아빠는 이런 사람이고, 시나리오에 안 나오는 태주의 행적은 이랬고…. 책을 하나 썼죠."
외딴 숲에서 양어장 하는 친구를 찾아온 이들의 2박 3일을 그린 '송어'에서 김인권은 개 키우는 산골 소년 역으로 나온다. 여체(女體)를 훔쳐보며 기괴한 행태를 보이다 살해당하는 역이다. 외모가 해운대의 동춘과 흡사하다.
'해운대'에 캐스팅된 것도 '송어'에서 설경구와 공연(共演)한 것이 인연이 됐다. 당시 김인권의 연기에 강한 인상을 받았던 설경구가 윤제균 감독에게 추천했다. 1999년 개봉된 '송어'는 호평에도 흥행에서 참패했다.
―데뷔작 스코어가 어땠나요.
"2만8000명. 하지만 '송어'가 없었다면 해운대도 없었겠죠."
―'박하사탕'(1999년)'조폭마누라'(2001년) 등 이후 영화는 괜찮았죠.
"관객 500만을 넘은 '조폭마누라'찍고 나선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알아봐 주더군요."
―2002년에 비로소 영화감독을 했죠.
"그때 만든 영화 '쉬브스키'는 대학 졸업작품이에요. 그동안 벌어놓은 돈 1500만원을 다 털어서 만들었죠."
98분짜리 영화는 여자친구를 동네 양아치에 빼앗긴 어떤 소년이 '맞짱'뜨는 것을 외계인들이 퀴즈프로로 지켜본다는 줄거리다. 시나리오, 연출을 맡은 김인권은 영화 속 소년과 퀴즈 프로를 진행하는 외계인, 이 프로를 TV로 보는 외계인 가족의 가장(家長)까지 1인 3역을 해냈다.
―영화제목 '쉬브스키'는 뭡니까.
"영화 속 퀴즈프로 제목이 쉬브스키예요. 양아치와 소년이 싸우면서 퍼붓는 '쉽새끼' '시×새끼' 등의 욕이 외계인들에겐 '쉬브스키'로 들렸기 때문이죠."
―짐 캐리 주연의 영화 '트루먼쇼'가 연상됩니다.
"어릴 때 즐겨보던 TV프로그램 '동물의 왕국'에서 모티브를 따왔어요. 거기 보면 '저 말이 뛰어가고 있습니다' '짝짓기를 합니다' 같은 내레이션 나오죠."
―그게 영화 '쉬브스키'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동물의 왕국'을 비틀어 '쉬브스키'에선 인간을 동물화시킨 거죠. 저 자신을 동물화시켜서 관조적으로 바라보고 일종의 자의식 탐구였죠."
―이듬해 부천판타스틱 영화제 초청작으로 선정됐죠
"예상치도 못했는데 운좋게 감독 대우 잘 받았어요. 한계도 느꼈어요. 아직 감독을 하기엔 인생 경험도 짧고 자기 성찰도 안 됐다는."
―이 영화 만들면서 배우자를 만난 건가요?
"아내는 초등학교 동창이자 같은 과 동기예요. 영화 만들 때 아내는 대기업 다녔는데 밤늦게까지 시나리오 제본도 해주고 물심양면 도와줬어요. 믿고 밀어준 거죠."
―2003년 결혼하면서 부인은 일을 그만뒀나요?
"제가 경상도 남자라 '책임질 테니 때려치우라'고 했죠. 저지르면 다 수습하게 돼 있다고 동기부여를 했죠."
―이듬해 입대 직후 군에서 임신 소식을 들었죠?
"아이가 생기니 무모한 열정이 사라지더군요."
김인권은 2004년 11월 입대해 2006년 11월까지 대구에서 전경으로 복무했다. 훈련소에서 A4용지에 소감 적어내라는 지시에 '집에 가고 싶다'고 한 줄을 적어냈다. '한장 다 채워 다시 내라'는 요구엔 같은 문장을 가득 채워 냈다.
―전경 생활이 무척 힘들었나 보군요.
"인생의 전환기죠. 지금껏 살아온 것 중 가장 힘든 시기를 말하라면 주저없이 꼽습니다."
―두들겨 맞았나요?
"첫 2주 훈련에 10㎏이 빠졌어요. 너무 심하게 흙바닥서 굴려서 폐렴을 앓을 정도였죠. 결국 입원했죠."
―입원하면서 군 생활 편해졌겠군요.
"오기가 생기더군요. 입원 핑계로 오래 쉴 수도 있었는데 바로 돌아갔어요. 2년 동안 제 후임이 8명밖에 안 돼요.""
―내내 막내 생활했겠군요.
"위는 140명이 넘는데 아래는 없고 나이 어린 선임들한테서 조롱당하고 얻어맞기도 했어요."
―배우라는 자존심에도 상처 입었나요?
"나는 영화배우이자 연예인이라는 생각에 입대 직후에도 스스로를 특별하게 생각했어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걸 깨닫는 데 꼬박 1년이 걸리더군요."
―그 기간엔 팬레터도 안 왔나요?
"팬레터는커녕 연락해준 사람도 없어요.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어요. 이미 김인권을 다 잊은 거죠. 입대 전엔 출연제의도 오고 그랬는데 완전히 연락 끊겼죠."
―그때부터 '나는 별거 아니다'라고 생각했군요
"(배우)일은 계속 성과를 보여주지 않으면 순식간에 묻혀버려요. '제대하고 불러주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불안해졌어요."
―몸에 밴 '생존' 공포가 발동한 건가요.
"12평짜리 아파트 1층서 사는 처자식은 이제 어떡하나…. 암담했어요.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절감했죠."
김인권은 전역 후 인근 아파트 24층으로 이사했다. 햇볕없는 아파트 1층서 태어난 첫 딸이 황달로 고생한 게 마음에 걸렸다. 생존에 대한 불안감을 김인권은 '미래학'으로 벗으려 했다. "어릴 때부터 집도 절도 없이 자란 탓에 늘 뭔가 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미래학이 도움되던가요?
"수명(壽命)만 해도 그래요. 예순이나 일흔까지 살던 시대에서 100세 이상을 바라보는 세상이 됐어요. 저는 130살까지 살 거라 보고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가자'고 되뇝니다."
―연기와는 별로 상관없어 보이는데요.
"미래에 영화가 사라질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요즘 컴퓨터 그래픽으로 모든 인물을 구현하는 가상현실(VR) 영화가 선보이고 있잖아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할 겁니까?
"예술의 전당 같은 데서 '추억 속의 영화'나 해야겠죠. 저는 매체와 직업의 미래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요. 한국영화나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미래에 대해서도요."
입대 전 김인권은 영화를 찍을 때 감독에게 자기 의견을 스스럼없이 말하는 스타일이었다. 연출 전공에다 장편영화도 찍어본 경험이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해운대 첫 장면 촬영할 때엔 동춘 연기에 대한 본인 의견과 감독 연출이 달라 힘들어했죠?
"아마 예전 같으면 감독님에게 이런저런 의견을 말했겠죠. 처음엔 약간 섭섭했지만 곧 모든 것을 맡기고 따랐습니다. 군대식으로 '충성'했죠. 감독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니 열매도 좋았어요."
―작년 '숙명' 촬영 이후 1년 넘게 섭외 안 들어와서 절박했던 것이겠죠.
"정말 죽고 싶었어요. 1년 동안 섭외가 뚝 끊어졌어요. 친구들도 저를 만나는 걸 꺼렸어요."
―왜요.
"그 영화에서 배신을 밥먹듯 일삼는 비열한 조폭 역을 했어요. 최선을 다했는데 그게 오히려 해가 됐죠."
―무슨 뜻입니까.
"너무 리얼하게 한 거죠. 영화 본 모든 이들이 저를 찍었어요. 진짜 나쁜 놈이라고."
―그래서요.
"커피숍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보기 싫다고 하나둘씩 떠나 곧 텅 비었어요. 팥빙수 사먹으려고 줄을 서 있는데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저를 보고 도망치듯 사라지는 거예요."
―섭외도 안 들어오고, 순식간에 백수됐겠군요.
"죽고 싶었어요. 모두들 나를 꺼리고 집에 있기도 민망하고…. 매일 산을 오르며 이런 생각했어요. '여기서 확 뛰어내려 죽어도 장례식장에 누가 와줄까?'"
―1년 전엔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였다니 믿기지 않습니다.
"'이대로 죽으면 장례식장도 텅 비겠다'는 생각에 산을 오르며 발자국을 뗄 때마다 이렇게 기도했어요. 일하게 해주세요, 일하게 해주세요…."
―'해운대'가 김인권을 구했군요.
"찍기 전 감독님이 제게 문자를 보내주셨어요. '배우 김인권은 해운대 전과 후로 구분될 것이다'. 지금도 간직하고 있어요."
―'해운대'성공으로 CF도 많이 들어왔죠?
"아직 CF 하나도 안 들어왔어요. 드라마는 찍고 있어요."
―1000만 관객 중 김인권의 지분은 몇%라고 생각합니까.
"없어요. 저 때문에 보러 온 사람은 없어요. 보고 나니 신선했다는 것뿐이죠."
―어떤 배우가 되고 싶습니까.
"웃기기도 하고 울릴 수도 있는 '희극 배우'가 되고 싶어요. 짐 캐리, 성룡, 주성치 같은. 저는 예전부터 블록버스터 영화보단 코미디 영화를 보면서 황홀경에 빠졌어요."
―코미디 영화가 그렇게 황홀한가요?
"코미디 배우를 보면 그들의 낙천성 뒤에 있는 슬픔이 보여요. 무지 고생한 것이 느껴지거든요."
―스스로 몇점짜리 배우라고 생각합니까.
"15점요. 저는 성룡 같은 무술실력도 없고 짐 캐리처럼 성대모사나 표정모사도 못해요. 아무도 못하는 자기만의 기술이 있어야 하는데…."
―'주인공 친구 전문배우'라는 별명이 부끄럽나요?
"저는 조연을 하더라도 도와주는 역할로 끝내지 않아요. 이 인물도 살아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는 거죠."
"상도 탄 적도 있어요. 그런데 주인공을 하려면 우수한 유전자를 타고나야 하는 것 같아요. '너를 주인공으로 쓰는 감독은 똘아이야'라고 하는 PD도 있었죠."
―해운대가 성공했는데도 생존이 걱정됩니까.
"예전에 '조폭마누라'와 '말죽거리 잔혹사'가 뜰 때도 '고생 끝났다, 인권아' '남우조연상 감이야'같은 얘길 수없이 들었어요."
―그랬군요.
"그때는 들뜬 분위기에 휩쓸렸지만 이제는 달라요. 1000만 '해운대'는 제 기억 속에서 지웠습니다."
김인권이 오른손으로 머릿속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시늉을 했다. 비눗방울이 공중에 떠오르는 흉내를 내더니 '펑'하는 소리를 냈다. "완전히 지워버리는 거죠." 하지만 눈앞에는 '해운대'의 동춘이 서 있었다. 감쪽같이 어디서 나타난 걸까. 백수로 건들거리면서도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영화 속 바로 그 인물이다.
첫댓글 랄랄라~ 기분이 좋아~♡
쇼핑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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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살자!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안봐서;ㅠ
0.8%로 반에서 1등도 못했었는데..
김인권 쿡 CF는 뭐지?
난 0.2%였는데 ㅋ 반에서 6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