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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장 음녀들의 궤계
구양봉은 품에 치주를 안고 있으니 벌써부터 황홀경에 빠져 들어 갔다.
'내가 백타산장에서 장주 노릇을 해 온 지 이미 오래인데 어디 한 번이나 이런 재미를 본 적이 있었던가? 중원에 오니 이거 일거양득이로구먼. 천하의 보배를 빼앗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렇게 미인도 얻게 되니, 흐흐흐…….'
그는 자신의 백타산장을 생각해 보았다. 백타산장에는 천지인(天地人) 삼층집이 있고 저마다 미색이 빼어난 여인들이 그 집 가득 살고 있다. 하지만 구양봉은 백타산장을 떠나온 지 오래인데다 중원에 온 후로는 여인과 즐기는 것도 피했었다. 더욱이 그 여인이 죽은 이후로는……. 그러나 일단 치주를 품에 안자 그간 잊고 지냈던 남녀간의 그 일이 미쳐 버릴 듯이 그의 온몸을 사로잡아 그는 마치 야수가 포획물을 삼켜 버리듯이 치주에게 달라붙었다.
대환희 보살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뚱뚱보 여인들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뚱뚱보 여인들은 지체 않고 구양봉과 치주를 한 장막으로 데려갔다.
구양봉은 치주와 단둘이서만 장막 안으로 들었다. 그는 치주를 덥석 안아다가 짐승 가죽 위에 내려놓고 징그럽게 웃음을 흘리며 치주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몇 살인고?"
그러더니 미처 대답할 새도 없이 몸을 마구 주무르면서 황홀경에 빠져 소리를 질러댔다.
"훌륭하군, 훌륭해. 참말 훌륭해."
그는 눈빛마저 희멀게져서는 조바심이 나서 헛손질을 해 가며 그녀의 옷을 벗겼다. 드디어 눈부시도록 매혹적인 나체가 다 드러났다. 그는 음미하듯 자세히 그녀의 나체를 바라보다가는 봉곳 솟아 오른 젖무덤을 주무르면서 연신 소라를 내질렀다.
"훌륭하군, 훌륭해. 참말 얻기 힘든 보배야."
구양봉은 침을 질질 흘리며 치주한테 넙죽 엎드렸다. 그리고는 성마르게 그 일을 치르려고 허둥대다가 언뜻 치주의 볼에서 반짝이는 눈물을 보았다. 구양봉은 한참 몸이 달아 있는데 여인의 눈물을 대하자 버럭 성이 나서 소리쳤다.
"사내와 처음 자 보나?"
그 소리에 치주는 그만 참았던 눈물이 한꺼번에 터지며 눈물을 함씬 쏟아 냈다.
"전 워낙 이렇게 작은 여인이 아니었어요. 전 본래 보살님 수하 여인이었는데 용모가 괜찮다 하여 보살님이 나를 운남 대리의 황궁에 궁녀로 들여 보냈지요. 황제를 유혹하라고……. 다행히 단황 나으리는 저에게 반해 저를 총애하게 되었지요. 얼마간 재미있는 나날을 보냈으나 일이 잘못되어 그만 납치를 당하고 이후 또다시 보살님 신변으로 끌려 왔어요. 그후부터 저는…… 저는……."
치주는 한번 입을 떼자 그간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들이 줄줄이 엮어져 나왔다. 그녀는 자기와 일속 사이에 있었던 일까지 이야기하려 했으나 부끄러워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말았다.
이 여인은 일속에게 몸을 더럽힌 후로는 걷잡을 수 없이 허탈해지고 자기 운명이 비관되어 마음을 앓았으며 그럴수록 더 더욱 일심으로 단지흥을 그리게 되었다.
'황제 폐하는 내가 대환희 보살님 수하 사람이라는 걸 모르고 계셔. 그분은 아마도 내가 도망하여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 줄로 아실 거야, 내가 이처럼 억지로 끌려 와서 다시 돌아가지 못하게 된 것을 그분께서 어찌 알 수 있으리? 그분은 나를 음란한 여인으로 여기실지도 몰라. 내가 그분을 떠나 딴 사내의 품으로 도망쳤다고. 아, 그분을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내가 여전히 그분을 사랑하여 그분의 총애를 받고 싶어한다는 걸 알려 드릴 수만 있
다면…… 아,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렇게 마음을 졸이며 단지흥을 생각하다 보니 치주는 식음마저 전폐하게 되었다. 뚱뚱보 여인들은 치주가 병에 걸린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언뜻 혼자 중얼거리는 걸 들으니 치주는 줄곧 단지흥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뚱뚱보 여인들은 치주를 비웃으면서 망령된 생각을 하고 있다고 치주를 못살게 굴기 시작했다.
"얘, 너는 황비이니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없겠지? 귀하신 몸이 어찌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있겠니?"
"황비님, 제가 부채를 부쳐 드릴깝쇼!"
여인들은 모두 치주를 조소했다. 아무리 그래도 치주는 귓전으로 흘려 버리며 일심으로 단지흥만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무리 비웃고 놀려대고 쥐고 흔들어도 치주가 꿈쩍도 하지 않자 뚱뚱보 여인들은 종당에는 화가 머리 끝까지 솟구쳐 호통을 내질렀다.
"네 년은 이제 황비가 아니야! 이젠 자기가 황비라는 허튼 생각은 버리란 말야. 네 황제 폐한지 뭔지는 조만간 대환희 보살님 손에 죽고 말 거야!"
치주는 그 말에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그분을 죽여선 안 돼요! 그분을 죽여선 안 된단 말이에요!"
뚱뚱보 여인들은 그렇지 않아도 시샘이 나서 치주가 얄밉기 그지없던 참인데 그녀가 단지흥을 감싸고 나서자 저마다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어 치주를 밀어 넘어뜨려 놓고는 깔고 앉아 마구 짓눌러댔다. 치주는 몸부림을 치며 비명을 질렀다.
"이것들 봐요, 제발 좀 비켜요! 깔려 죽어요. 깔려 죽는단 말예요!"
"그래, 황제 밑에 깔린 건 견딜 수 있고 우리한테 깔리면 안 된단 말이냐? 왜 이렇게 고함을 지르고 이 난리야, 난리가? 입다물고 있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치주가 소리를 지를수록 여인들은 더욱 기세를 올려댔다. 치주는 말을 해 봤자 통할 사람들이 아니란 걸 새삼 깨닫고는 다만 가쁜 숨을 몰아 쉴 뿐이었다. 여인들은 이 기회에 그때껏 참았던 분풀이를 하느라고 한결같이 미친년처럼 날뛰었다. 결국 치주는 견디다 못해 그예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렇게 되자 뚱뚱보 여인들은 파랗게 질려 버렸다. 대환희 보살은 아직도 치주를 보배로 여기고 있는데, 그런 차에 자기들이 저지른 짓을 알게 되면 보살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터였다. 여인들은 겁먹은 얼굴로 서로 마주볼 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이윽고 한 여인이 나섰다.
"내 보기엔 저 애를 아예 죽여 버려야 해. 그래야 절대 우릴 일러바치지 못하지."
그러자 다른 여인들도 대번에 얼굴이 환해지며 쌍수를 들고 맞장구를 쳤다.
"맞아, 그 수밖에 없어? 보살님한테 들키기만 하면 우린 살아남지 못해."
"아니, 아니야. 내 보기엔 이 애한테 미약을 먹이는 게 좋을 것 같아. 이 애가 우리보다 더 뚱뚱해져 버리면 보살님도 귀히 여기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렇게만 되면 황제도 더는 이 애를 거들떠보지 않을 거 아니니? 그 뚱뚱한 꼴을 보기만 해도 왈칵 구역질을 할거란 말야. 그렇게 되면 꿩 먹고 알 먹고 아니니? 저것이 매우 상심하게 될 테니 이 얼마나 묘안이냔 말야?"
그러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게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그때 다른 한 여인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셋이 첫 며칠 동안 미약을 먹였었어. 그런데……."
다른 여인들은 그 내막을 모르는지라 깜짝 놀랐다.
"미약을 먹였다구? 그럴 리가. 미약을 먹였는데 왜 몸매가 더 날씬해졌지?"
세 여인은 서로 흘금흘금 바라보았다. 그들 세 여인은 치주가 너무나 얄미워 견디다 못해 미약을 먹였던 것인데 몸이 뚱뚱해지기는 커녕 되레 더욱 날씬해지는 게 아니겠는가. 세 여인 중 하나가 기가 죽어 다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왜 그런지 우리도 모르겠어. 너무나 이상해. 보통 먹이는 대로 똑같이 했는데……. 그러니 내 보기엔 독약을 먹여 죽여 버리는 게 제일 묘수야. 만일 보살님께서 캐물으시면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고 하면 그만 아니야? 이 년이 자나깨나 단지흥 생각만 하고 있더라고 아뢰면 보살님도 우릴 의심하지 않을 거야."
여인들은 잠시 잠잠히 말이 없더니 미약이 효과가 없다면 그게 더 낫겠다고 결론을 냈다. 한 여인이 부스럭거리며 독약을 꺼냈다. 여인들은 누구나 비상시를 대비해 이런 독약을 몸에 지니고 다녔는데 이것으로 사람을 해친 여인도 있었다. 바로 그 독약을 써야할 때가 온 것이었다. 한 여인이 치주를 안고 다른 한 여인이 독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치주는 가물가물 정신이 돌아오다가 누군가 목에다 무엇을 쏟아 붓는 것을 어슴푸레 느끼면서 그대로 받아 먹었다. 이 독약은 일단 먹기만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이 조그맣게 졸아 붙다가 급기야는 뼈만 남고 그마저도 아예 흔적조차 없어지는 열성(熱性) 독약이었다.
한 순간 치주가 힘없이 눈꺼풀을 치켜 올리고 뚱뚱보 여인들을 바라보면서 울먹였다.
"사저(師姐)님들, 절 양해해 줘요. 전 결코 당신들과 맞서려고 그런 게 아니었어요. 전 그저 한 분만 생각하다 보니……."
"보살님께선 우리더러 제자가 되면 다시는 딴 사내 생각을 해선 안 된다고 하셨다. 넌 우리 문파의 금기를 어겼으니 죽어 마땅해!"
한 여인이 소리쳤다.
치주는 희멀건한 눈으로 여인들을 바라보았다. 여인들의 눈에선 한결같이 살기가 번뜩였다.
'그렇구나. 이 여인들은 날 놓아줄 생각이 없는 거다. 내가 아무리 말해 봤자 이 여인들은 들으려 하지 않을 거다. 이 여인들은 종래로 한 사내를 사랑해 본 적이 없으니 사내한테 마음을 둔 여인의 애타는 심정을 결코 헤아릴 수 없겠지.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여인들에게 한 사내를 향한 이 절절한 사랑을 토로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저 여인들은 나의 사정을 이해할 수 없는 거다. 그러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
치주는 마음속으로 장탄식을 하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요. 차라리 날 죽여 주세요! 다만 단황 나으리를 만나게 되거든 한마디만 전해 줘요. 이 치주가 황궁을 떠난 건 본의가 아니었다고."
"좋아, 그 정도야 뭐 우리가 그 사람한테 알려 주지."
한 여인이 시답잖다는 듯 건성으로 내뱉었다. 그러자 치주는 혼신의 힘을 다해 기를 쓰고 말했다.
"안 돼요. 하늘에 대고 맹세를 해야 해요. 이 약속을 어기면 벼락을 맞아 죽겠다고!"
그러자 한 여인이 버럭 화를 내며 고함을 쳐댔다.
"야 이것아, 네 년이 대체 뭐란 말이냐? 네 년이 뭐 진짜 황비라도 된다더냐? 진짜 황비들처럼 선반(仙班)에 서고 하늘에서 성위(星位)를 가질 수 있느냐 말이다? 네 년은 천민이야, 천민! 개똥 같은 천민 주제에 뭐가 그리 대단해서 잘난 체야, 잘난 체는?"
곁에 있던 여인도 콧김을 킁킁 내뿜으며 소리소리 질러댔다.
"네 년은 좀 날씬하다고 해서 뭐 아주 아름다운 줄 아는 모양인데,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도 이전에는 이처럼 뚱뚱하지 않았어! 아주 날씬했다구! 보살님께서 뚱뚱해지라고 하시니까 미약을 먹고 이렇게 뚱뚱해진 거란 말이다. 네 년만 날씬하니까 기가 살아서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거들먹거리는데, 어디 언제까지 그렇게 콧대 세우고 있나 한번 두고 보자! 네 년도 우리처럼 뚱뚱보를 만들어 놓으랴, 엉? 대답을 해 봐, 대답을!"
그 여인은 이미 독약을 먹였으면서도 강박을 하느라고 치주를 윽박질렀다. 그러나 치주는 가늘기는 하나 단호한 목소리로 딱 잘라 말했다.
"나는 싫어요."
그러자 그 여인은 경멸 어린 눈길로 치주를 쏘아보면서 징그럽게 웃었다.
"건방진 계집! 네 년이 원하든 원치 않든 네 년은 죽어 줘야겠다. 죽더라도 우릴 원망하지는 마라!"
그 말이 끝나자마자 뚱뚱보 여인들은 요란하게 웃어댔다.
"치주야, 네 년은 이미 독약을 먹었느니라. 그건 우리 대환희 보살님께서 만드신 독특한 독약이지! 이제 곧 네 년은 몸이 졸아 붙어 죽게 돼 있어!"
치주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불현듯 살고 싶은 생각이 불끈 솟구쳤다. 반드시 살아 남아서 황제를 만나 오해를 풀어야 한다! 그녀는 급히 품속을 더듬어 해독약을 찾았다. 그러나 해독약이 있을 리 만무였다. 약을 넣어 둔 자그마한 주머니는 이미 여인들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다. 치주는 목멘 소리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사저님들은 참말로 절 죽일 참이군요……."
그러나 뚱뚱보 여인들은 비웃기만 하면서 서로 쳐다보며 입을 삐쭉거릴 뿐이었다.
'그만두자, 다 그만둬! 난 단황을 모시면서부터 남녀간의 일이 뭔지 알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이 한 생, 후회할 것도 미련 둘 것도 없다. 날 죽이겠다면 죽으면 그뿐, 산다 한들 다시 폐하를 만나 볼 면목도 없는 것을…….'
치주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그녀는 차분히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여인들에게 인사를 했다.
"좋아요. 여러 사저님들께 감사를 드려요. 나를 이렇게 고해(苦海)에서 벗어나게 해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막상 치주가 이렇게 나오자 여인들은 할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자기들 손에 달갑게 죽겠다는데야 더 무슨 말을 하겠는가, 여인들은 서로 흘끔흘끔 눈치만 살필 따름이었다.
치주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다소곳이 앉았다. 마음 같아서는 이 여인들더러 나가라고 소리치고 혼자서 조용히 죽고 싶었지만 어차피 죽을 몸, 이 여인들과 이러니저러니 언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윽고 치주는 오한인 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몸을 덜덜 떨면서 신음을 토해냈다. 견디기가 몹시도 어려웠다. 여인들은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이나 지켜 보았다. 일순 한 여인이 차마 더는 볼 수 없던지 다가앉으며 물었다.
"치주야, 내가 좀 도와줄까?"
그 여인은 돌연 치주에 대한 연민이 일어 검으로 찌르거나 장을 내쳐 그녀의 고통을 덜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치주는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는 비록 육체는 고통스러웠으나 마음으로는 그럴 수 없이 평온을 느끼고 있었다. 죽을 생각을 하니 세상의 모든 은원도 사라져 가는 듯했다.
'이렇게 죽으면 단황 나으리께서는 내가 도망간 것으로 아실 게야. 어떤 사내와 함께……. 하나 기왕 죽을 바에야 황제께서 날 어떻게 생각하실지 맘에 두어 뭣하랴?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린 법, 순순히 하늘의 뜻을 좇으면 그뿐, 그분 생각은 이제 하지 말자.'
이윽고 치주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마침내 온몸이 졸아 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꼼짝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으려고 이를 앙 다물며 신음을 속으로 삼켰다.
뚱뚱보 여인들은 치주를 지켜 보고 있자니 은근히 겁이 났다. 늘 이 약을 지니고 다녔지만 종래로 이 약에 중독되어 사람이 죽어 가는 모양은 본 적이 없는 터라 이렇듯 두 눈 뻔히 뜨고 지켜 보고 있자니 그녀들은 하나같이 하얗게 질리는 것이었다.
'이 약이 이다지도 독하단 말인가?'
그때 문득 인기척이 들리며 누군가 장막 안으로 들어섰다. 대환희 보살이었다. 보살은 치주가 중독되었다는 것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이게 무슨 짓들이냐? 누가 저 애한테 독약을 먹였느냐? 어서 빨리 대지 못하느냐?"
대환희 보살은 눈앞의 광경에 노기충천하여 온몸을 부들부들 떨어 가며 소리소리 질러댔다.
여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채 감히 보살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꺽꺽거리며 대답을 못했다. 그녀들은 대환희 보살의 심보가 지독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독약을 먹인 사람이 발각되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보전치 못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치주가 죽기만 하면 스스로 자결했다고 발뺌을 할 수도 있지만 죽지 않는다면 큰일이 벌어질 판이었다.
한 여인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보살님, 저…… 저 앤 자, 자살하려고……."
대환희 보살은 이 여인들을 냉랭히 쏘아보며 벽력같이 호통을 쳤다.
"허튼소리! 나의 이 독약은 천하에 기이한 약이다! 스스로 먹었다면 저 모양일 수 없어. 누가 독약을 먹였느냐? 어서 말해!"
여인들은 머리를 더욱 깊이 처박으며 누구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징글맞게 웃음을 흘렸다.
"참말로 누구도 한 짓이 아니란 말이지?"
대환희 보살이 그렇게 나오자 여인들은 더욱 떨어댔다. 오늘 일이 사뭇 상서롭지 못하다는 징조였다. 먼저 나섰던 여인이 머리를 조아렸다.
"보살님 제, 제가 먹였어요…… 요, 용서해 주세요!"
"그래 네가 했느냐? 잘했구나. 네가 저 애를 죽이려 들었다면 이제 조만간 나도 죽이지 않겠느냐?"
보살의 목소리는 사뭇 온화했다. 그러자 그 여인은 당황해서 더욱 허둥댔다.
"아니에요. 보살님, 아니에요. 제 어찌 보살님을…….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시옵니다. 보, 보살님께서 그렇게 뚱……."
여인은 사색이 돼서는 횡설수설 주워섬기다가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라며 숨을 훅 들이켰다.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이 튀어나오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미 늦고 말았다. 대환희 보살은 벌써 그 말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보살은 대번에 낯색이 바뀌며 눈에 독기가 서렸다.
"그래, 내가 뚱뚱보란 말이지?"
"아닙니다, 아닙니다. 제가 언제…… 보살님께선 뚱뚱하시지 않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여인은 거푸 머리를 조아리며 울먹거렸다.
"발칙한 것! 내가 엄연히 네 년들보다 뚱뚱한데도 뚱뚱하지 않다구? 그래 넌 두 눈 뻔히 뜨고 날 놀릴 셈이냐?"
뚱뚱보 여인은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푹 떨궜다. 아무리 변명해야 쏟아진 물을 주워담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는 죽이든지 살리든지 보살의 처분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넌 날 보고 뚱뚱하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게야. 날 보려무나, 조각달처럼 여위지 않았느냐?"
그러자 뚱뚱보 여인은 더욱 기겁을 했다. 얼굴에서 땀이 철철 흘러내렸다. 여인은 다급히 애원했다.
"보살님,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목숨만!"
"나도 널 용서해 주고 싶구나. 하나 이미 늦은 일! 넌 그래 치주가 나한테 얼마나 쓸모가 많은지 모른단 말이더냐?"
"보살님, 저 애를 대관절 어디다 쓰시려고 그러시옵니까? 제가 대신하겠으니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그 말에 대환희 보살은 별안간 푸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좋은 생각이군. 그럼 한번 그 몸뚱이로 단지흥 앞에 나서 보아라! 네 년이 치주라고 하면서. 한데 그때 가서 단지흥이 네가 치주라는 걸 믿지 않는다면 넌 어떻게 할 셈이냐, 응? 어떻게 그를 믿게 하지?"
여인은 대답을 못하고 그저 넙죽 엎드릴 뿐이었다.
"네 스스로 죽음을 택하거라."
보살은 단호히 내뱉었다. 그 한마디가 떨어지자 여인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꺽꺽거리면서 울기 시작했다.
"보살님, 아이고 보살님…… 제발 절 살려 주십시오! 하, 한 번만 사, 살려……."
그러나 대환희 보살은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인의 정수리를 향해 팍 하고 장을 날렸다. 빠지직하니 두개골 으깨지는 듯한 소리가 장막 안을 뒤흔들었다. 여인들은 몸서리를 치며 더욱 고개를 처박았다. 여인은 두 눈을 홉뜨고 대환희 보살을 쏘아보면서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퉤, 네 년은 살찐 돼지야! 돼지! 돼지!"
대환희 보살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발을 쾅 굴렀다.
"돼지라구? 지독한 년! 끝까지 발악을 하는구나."
그리고는 보살은 다른 여인들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여인들은 일순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아 얼른 심호흡을 하고는 일제히 소리를 내질렀다.
"우린 뚱뚱한 여인을 좋아해요? 여인들은 뚱뚱한 게 좋아요. 보살님이 뚱뚱한 게 우린 보기 좋아요!"
대환희 보살은 쓴웃음을 지었다.
"네 년들도 다 죽어 마땅하다. 하나 치주만 살려내면 목숨은 구해 주지!"
하지만 그 여인들에게 그런 재간이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치주는 이미 너무나도 심하게 중독되었는지라 신선이 내려온다고 해도 살릴 수 없을 것이었다.
대환희 보살은 여인들을 쏘아보다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 여인들에게도 장을 내치려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보, 보살님, 제발……."
모두들 깜짝 놀라 머리를 돌렸다. 열두어 살 먹은 어린애같이 졸아 든 치주가 힘없이 두 눈을 치켜 뜨고는 보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냉큼 내달았다.
"치주야, 네가 소생했구나! 네가 소생했어!"
대환희 보살은 탄성을 내지르며 치주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원래 뚱뚱보 여인들이 당황해서 독약을 조금만 쓴 덕분에 치주는 천만 요행으로 살아난 것이었다. 그러나 살아났지만 그녀는 너무나 작아서 사뭇 기이해 보였다. 대환희 보살은 치주를 바라보다가 번개같이 스치는 생각 하나를 붙잡았다.
'보아하니 정녕 나쁘지 않군.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생겼어. 이 계집애가 희한한 물건이 되었으니 써먹을 데가 많겠다! 이 깜찍한 계집애를 좋아하는 사내들이 한둘이 아니겠지? 흐흐흐흐, 이 애는 이제 천하에서 가장 기이한 여인이다.'
대환희 보살은 만면에 웃음을 짓고 치주를 안아 올렸다.
"꼬마야, 날 따라가자."
치주는 예까지 말하고는 눈물을 담뿍 쏟아 냈다. 그녀는 한동안 어깨를 들먹이더니 이내 목멘 소리로 말을 이었다.
"모두들 백타산장의 장주님은 영웅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나같이 조그만 계집을 어디다 쓰시겠어요. 전 정말 하잘것없는 계집에 불과하옵니다……. 제발 저를 단황 나으리와 만나게만 해 주십시오. 진정코 부탁드리옵니다. 전 그분한테 꼭 말씀드려야 해요, 전 결코 그분을 배반하지 않았다고……."
"넌 아직도 단지흥을 마음에 두고 있구나?"
구양봉은 치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치주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는 하소연을 했다.
"장주님, 그런 말씀 마세요. 제가 이런 꼴을 해 가지고 어찌 단황 나으리를 모실 꿈이라도 꾸겠나요? 다만 단황 나으리께서 제 마음만 알아주신다면 전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구양봉은 말없이 웃음을 지었다.
'난 백타산장의 장주이니 부귀를 누리고 있다 할 수도 있다. 백타산장의 천지인 삼층집에는 미인들이 수두룩하고 내 명이라면 누구든 죽는 시늉이라도 하지만 내가 없을 때 그 여인들도 이 꼬마 여인이 단지흥을 생각하듯 나를 생각할까? 아마 그런 여인은 하나도 없을 게다…….'
"얘야, 세상엔 사내들이 얼마든지 있다. 단지흥이 널 그렇게 잘 대해 주었다 하나 나도 그 사람 못지않게 널 살갑게 대해 줄 수 있어. 그러니 날 달리 대하지 말아라."
치주는 구양봉 앞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장주님, 불쌍히 여겨 주시와요."
그러나 구양봉은 연해 음심이 꿈틀거렸다. 모용쟁과 그 낡은 절에서 영별한 뒤로 그는 더는 여인에게 진정으로 정을 두지 않았었다. 그는 치주를 빤히 바라보았다.
"난 이전에 아내, 아니 형수 한 분이 계셨는데……."
치주는 당황한 눈길로 구양봉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구양봉이 형수를 아내로 삼기까지 허다한 곡절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기에 그가 음심이 동해 저리도 횡설수설하는 것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구양봉이 그 사연을 단 몇 마디로 다 말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죽었어. 네 마음이 움직인다면 날 따라와. 난 너를 잘 대해 줄 거야."
치주는 구양봉 같은 사람은 일대 무학종사(武學宗師)로서 일 처리가 보통사람들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구양봉은 남녀간에 쉽게 할 수 없는 이런 말을 빙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불쑥 꺼냈다. 그러나 그만큼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치주가 그것을 이해할 수는 없는 터였다.
'보아하니 이 사내도 음란한 사람인 것 같구나. 저 사람은 나를 차지하고 노리개로 삼고 싶어한다. 만일 내가 순순히 따르지 않는다면 대로할 거야.'
하지만 치주는 이젠 죽고 사는 건 대수롭지 않았다. 그녀는 구양봉의 위풍에 눌리지 않고 당당히 말했다.
"저는 이미 단황 나으리한테 속한 몸이옵니다. 장주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그러나 구양봉은 그런 말에 머리를 숙일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껄껄 웃더니 큰소리로 말했다.
"네가 단지흥의 사람이라구? 좋아, 난 단지흥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사람이다. 내가 그 사람을 죽여 버릴 게야. 너는 나와 함께 화산에 가자. 단지흥이 내 손에 죽는 걸 너한테 직접 보여 주리라!"
치주는 그 말이 차마 믿기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흥의 일양지공이 천하 무림에서 유일무이한 초수라고 알고 있었다. 한데 구양봉이 무슨 수로 단지흥을 죽이겠다고 큰소리를 친단 말인가.
구양봉은 치주의 속심을 눈치채고는 코방귀를 뀌었다.
"흥, 믿지 않는군. 너네 단지흥이 그렇게 대단하냐? 좋다. 내가 너한테 내 재간을 보여 주리라."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좌정하고 앉아 꼼짝 않고 정신을 집중했다. 이윽고 그의 배가 불룩하니 솟아오르며 단전에서 기가 꿈틀거리는 것이 다 드러나 보였다. 치주는 그가 그저 허장성세를 부리는 것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구양봉이 갑자기 나직이 말했다.
"좀 보라구!"
구양봉은 즉시 두 손을 위로 쳐들었다. 그러자 장막 천장이 불룩하니 바깥쪽으로 밀려났다. 이 장막은 원래 질긴 돛 천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구양봉의 장풍에 밀려 종이짝같이 얇아지며 마치 바람에 불린 돛 같은 형상이 되었다. 구양봉은 손만 쓸 뿐 몸을 까딱하지도 않고 오로지 기만 가지고 장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의 장력은 실로 대단했다.
치주는 몸을 부르르 떨며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참말…… 참말로 단황 나으리를…… 죽이실 건가요?"
구양봉은 그녀가 대경실색하는 것을 보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난 애시당초 너와 단지흥 간에 이런 인연이 있는 줄은 몰랐었다. 이제 오늘 알게 됐으니 잘됐다. 네가 날 따라가고 싶지 않으면 그만둬. 난 화산에 가서 대리에서 온 그 단씨란 자를 죽여 천하에 더는 무공을 갖춘 황제가 없도록 할 셈이니까!"
구양봉은 치주가 질겁을 할수록 한층 더 큰소리를 쳤다. 대리 단씨의 일양지공은 그가 그리 소홀히 대할 수 없는 것이었으나 치주는 강호의 내막을 전혀 모르는지라 그 말을 어김없는 사실로 받아들이고는 급히 그의 옷자락을 틀어쥐며 매달렸다.
"장주님, 단황 나으리를 해치지 마세요. 당신은 왜 하필 그를 해치려 하시나요, 네? 왜 하필이면 그를……."
"하면 넌 나를 따라갈 테냐?"
구양봉은 징그럽게 웃으며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지주는 온 얼굴이 눈물 범벅이 돼서는 정신없이 울먹였다.
"따르지요, 따르겠어요! 제가 장주님 말만 들으면 되죠? 그럼 황제 폐하를 해하시지 않으시겠지요?"
그제야 구양봉은 속이 확 뚫리는 것 같았다.
"내 백타산장에는 여인들이 허다하고 그 여인들은 저마다 많은 재간을 갖고 있어. 하지만 너처럼 아름답고 깜찍한 여인은 참말로 천하에도 없을 거다. 네가 내 시중을 잘 들기만 하면 난 너를 천(天)자 방의 첫번째 부인으로 삼겠다."
워낙 백타산장에 있는 천지인 삼층집에는 숱한 미인들이 있었는데 인(人)자 방에는 인간세상에서 보기 드문 절세의 여인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 여인들은 지(地)자 방에 있는 여인들보다는 덜 요염했다. 가장 훌륭한 미녀는 천자 방에 있는 미인들이었는데 그 여인들은 모두가 경국지색의 미모를 갖추고 있었다. 구양봉은 치주를 그 천자 방에, 그것도 첫째 부인으로 두겠다는 것이었다.
치주는 마음속으로 피울음을 토해냈다.
'황제 폐하, 전 또 능욕당하는 걸 피할 수 없게 됐어요. 전 워낙 한마음으로 폐하만을 섬기려고 했지만 저의 운명은 그것을 허락치 않는군요. 이제 와서 그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터……. 전 폐하께서 남의 해를 받지 않게만 된다면 목숨을 잃는다 하더라도 아깝지 않아요.'
밤이 꽤 깊어 있었다. 이따금씩 밤새 울음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사내와 계집이 한데 엉겨 수작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밤이었다. 구양봉이 옷을 벗으면서 치주에게 말했다.
"넌 성숙한 여인이다. 그러니 내 일일이 말하지 않겠다."
치주는 천천히 일어나 구양봉의 목에 살며시 매달렸다. 치주의 몸뚱이는 너무나 깜찍하여 쥐면 꺼질 것만 같았다. 무수한 여인들을 숱하게 겪은 구양봉이지만 치주처럼 깜찍하고 사랑스러운 여인은 진정 처음이었다.
"좋아, 좋다니까."
구양봉은 치주를 안고 적이 흡족하여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리고는 멀찌가니 떨어져 있는 등잔불을 대번에 훅 불어 껐다. 그는 어둠 속에서 치주를 힘껏 껴안았다.
한 순간 여인의 비명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피를 토하며 죽어가고 있는 듯한 처참한 소리였다. 뚱뚱보 여인들은 그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나 몸을 뒤척였다. 처음에는 그저 누군가 죽어 가는가 보다 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치기는커녕 점점 더 처절하게 울려 퍼지자 너나없이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벌떡 일어났다. 처음에는 고소하게 여겼으나 계속 듣고 있노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단 한 사람, 대환희 보살만이 아직도 단잠에 빠져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다.
잠시 후 한 여인이 대환희 보살의 장막으로 찾아 들어 보살을 깨웠다.
"보살님, 보살님!"
연해 불러도 일어날 기미가 없자 여인은 보살의 몸을 세차게 흔들었다. 이윽고 보살이 가까스로 눈을 떴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이냐?"
"치…… 치주, 치주가 죽어 가고 있어요. 그 애가 목숨이 꺼져 간단 말이에요."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시뜻해서 듣고 있더니 단박에 성을 버럭 냈다.
"저 애가 한창 좋아서 그러는 걸 모르느냐? 저 앤 좋아서 저러는 것이니 작작 상관하란 말이야!"
그 순간에도 여인의 비명 소리는 계속 들려 오고 있었다. 여인은 그렇게 온밤을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화산의 나무 숲이 고요히 설렌다. 비명 소리는 점점 미약해지다가 드디어는 뚝 그치고 말았다.
등아는 황홀한 표정으로 단지흥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매몰차기 그지없었다.
"전 이 세상의 사내란 사내들은 몽땅 죽여 버리고 싶어요. 사내들이란 모두 여인을 지배하려고 하거든요. 그들은 여인만 보면 침을 질질 흘리며 덮치려고만 하는데, 그나마도 한두 여인으로 족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얻어 들이려 한단 말이에요. 그런 사내들은 정말 사정을 두지 않고 죽여 버리고 싶어요. 사랑이오? 진심이오? 사내들은 그런 건 몰라요. 그런 걸 아는 사내란 하나도 없어요. 연약한 여인의 심사는 조금만치도 생각지 않아요. 그런 사내들은 이 세상에서 하
나도 남기지 않고 내 손으로 깡그리 죽일 작정이에요. 난 나의 향녀들더러 이런 사내들을 데려다 하나하나 시중들게 해서는 사내들이 시달리다 시달리다 못해 취생몽사하게 만들겠어요. 이전에도 숱한 사내들이 향녀들의 품에서 저 세상으로 갔지요. 어떤 사내들은 원한을 품고, 어떤 사내들은 여인의 품에 안겨 비웃으면서 죽어 갔어요. 그자들을 보면서 전 정말 다짐했어요, 이 세상에서 그런 사내들은 하나도 남겨 두지 않겠다고!"
단지흥은 처연히 등아를 바라보았다. 진정한 사랑을 모르는 이 여인……. 그는 그녀에 대하여 연민의 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전 세상 사내들의 기를 다 빼놓고 그들을 색에 굶주린 바보로 만들어 죽여 버린 후 십팔층 지옥에 처넣겠어요. 당신들이 화산에서 무예 시합을 한다지만 난 그것을 여지없이 망쳐 놓을 거예요.
천하에서 오로지 이 향녀 등아만이 우쭐거릴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겠다구요!"
단지흥은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가만히 웃었다.
"등아, 그대가 화산에 가면 그 고수들을 다 이길 자신이 있소?"
"제가 그들과 왜 싸워요? 그저 웃어 보이기만 해도 이길 수 있는걸요."
단지흥은 내심 장탄식을 했다. 칼과 창 같은 병장기는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천하 영웅이라도 자고로 여인의 수작에는 견뎌 내지 못하지 않는가.
"등아, 내 그대한테 할말이 있노라."
등아는 놀란 눈길로 단지흥을 바라보았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어서 하세요, 주저하지 말고!"
등아는 적이 매정하게 내쏘았다. 하지만 단지흥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등아, 세상에는 종래로 사내가 있으면 여인이 있어야 하고, 음양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거요. 그래야 세상에 인간이란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오. 그대가 일심으로 사내를 없애 버리려 하는 건 천리(天理)에 어긋나는 것이오."
그러자 등아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다 듣기 싫어요. 전 사내들을 미워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전 사내들을 반드시 죽여 버리겠어요."
"사랑이 있어야 미움도 있는 법, 미워하는 것도 다 사랑하기 때문인 거요. 그렇지 않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에요. 당신이 만일 진정으로 우리 향녀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건 한평생 불행을 자초하는 것이나 진배없어요. 나나 우리 향녀들이란 원래 진정으로 인간을 사랑하지 않아요."
사내의 품에 안긴 여인이 사내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느 사내가 기분이 좋겠는가. 하지만 단지흥은 그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등아, 사내들의 해골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는다는 건 그대가 그만큼 그들을 미워한다는 걸 말해 주지만 반면 그걸 매달아 놓게 되면 그대는 그들을 정녕 잊을 수 없게 되는 거요. 그대가 그들을 잊지 못하게 되면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미워하게도 되지만 사랑하게도 되어 끝내 정을 끊지 못하게 되는 게지. 이런 심정은 그대도 똑똑히 말할 수 없는……."
그러자 등아는 그의 말허리를 똑 자르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만 해요. 그만 하시란 말이에요!"
단지흥은 씁쓰레한 남빛으로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등아는 낯색이 자못 험상스러웠다. 기실 그녀 역시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다. 단지흥의 그 한마디는 정곡을 찔렀을 뿐 아니라 그녀의 가슴을 날카롭게 후벼팠다. 그녀는 들릴락말락 뭐라고 속살거리더니 끝내 말꼬리를 감추고 말았다.
단지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여인이 지독하기 이를 데 없으나 가슴 한구석에는 여리디여린 여인의 순정이 강고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익히 알고 있는 터였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등아는 일순 몸을 꿈틀거리더니 갑자기 생각난 것마냥 불쑥 물었다.
"단황 나으리, 절 도와주실 수 있죠?"
"무엇을? 무엇을 도와 달라는 게요?"
"전 그 《구음진경》을 꼭 손에 넣어야겠어요."
단지흥은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 픽 웃고 말았다.
"내가 보기엔 그댄 결코 《구음진경》을 얻지 못하게 될 거요. 왕중양이 천하 무림에 내놓고 공표를 한 바에야 그 경서를 얻으려면 실로 뛰어난 재간이 필요한 거요. 무슨 교묘한 꾀를 쓰거나, 무예를 겨뤄 차지하거나 둘 중 하난데…… 내 보기엔 그대가 그걸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오."
그러자 등아는 눈에 불꽃이 튀며 단지흥을 쏘아보았다.
"그러니 이렇게 부탁드리는 거 아니에요! 그래 당신은 절 도와 주시겠나요, 안 도와주시겠나요? 그 말씀만 하세요. 난 원래 당신을 화산 무예 시합에 가지 않게 하는 조건으로 선비를 데려왔으나 이젠 생각이 바뀌었어요. 꼭 당신을 화산으로 데리고 가 그 《구음진경》을 앗아 내도록 하겠다는 말이에요!"
여인은 의외로 단호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단지흥은 같은 말밖에 할말이 없었다.
"어렵소. 어려운 일이오."
"왕중양은 그 책을 얻은 뒤 밤이나 낮이나 한탄만 하고 있다더군요. 그 경서가 나쁜 놈 손에 들어가기만 하면 세상 사람들한테 무궁한 우환을 남기게 될 거라고 말이에요. 보아하니 그 책은 기필코 무학밀서이므로 나한테는 큰 이득이 될 거예요. 난 그 책을 얻어 천하의 사내들이 모두 나한테 숙이고 들게 만들겠어요."
등아는 《구음진경》에 대한 강렬한 욕구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단지흥은 이 여인의 부질없는 한갓 일장춘몽에 더욱 깊게 연민만 느낄 따름이었다.
홍사와 두 여인이 선비를 둘러싸고 애교를 떨며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 여인들이 거의 나체나 다름없는지라 선비는 그 여인들을 마주볼 엄두도 못 내고 그저 책만 들여다보며 곁눈 한 번 파는 법이 없었다. 선비가 손에 들고 있는 책은 《좌전(左傳)》이었다.
"그 책이 무슨 책이에요? 선비께서 책을 읽으실 바에야 《구음진경》을 읽으셔야죠. 그래야 선비님 무예가 천하에 다시 없는 것이 되지 않겠어요?"
홍사는 한껏 아양을 떨며 선비에게 다가들었다. 선비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머리를 저었다.
"그게 아니오. 당신들은 천하에 《구음진경》만 있는 줄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오! 몇 십 년, 몇 백 년이 지나가면, 아니 십 년만 흘러가도 아마 사람들은 이 《좌전》은 읽어도 《구음진경》같은 건 읽지 않을 것이오."
홍사는 입을 삐죽이 내밀며 자기들끼리 히히덕거렸다. 그러자 선비는 사람 좋게 웃었다.
"내 말을 잘 들어 보오. 천하 사람들은 다 《구음진경》을 서로 빼앗으려 하면서 모두들 그걸 보물로 여기고 있소. 하나 그걸 얻은 자는 극구 그것을 남에게 보여 주려 하지 않을 것이고, 그걸 잃은 자는 몹시 가슴 아파하며 그 경서 얘기는 입 밖에 꺼내려 하지 않을 것이오. 이렇게 되면 이 책은 자연 인간세상에 전해지지 않게 돼 버린단 말이오. 하지만 이 《좌전》이 잊혀져 유전되지 않았다는 얘긴 못 들었소."
"당신은 승상이시라더니 말재간이 대단하군요.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니 우리 같은 소인에 비하겠나요? 당신 말씀이 맞아요. 당신이 하시는 말씀을 우린 모두 믿어요. 그러니 만일 당신께서 《구음진경》을 얻게 되면 우리한테 주세요. 그럼 우리가 상아에다 새겨 넣은 《좌전》을 드리겠어요. 어때요?"
세 여인은 자신들의 제안이 퍽 그럴싸하다는 듯 깔깔 웃어댔다.
그러나 선비는 그 말에 아무 대꾸도 않고 불쑥 물었다. 겉으로는 자못 태연자약했지만 속으로는 한시 바삐 황제를 구해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는 애가 닳았다.
"당신네의 등아와 우리 황제 폐하는 지금 어디에 있소? 내가 찾아뵐 수 없겠소?"
그러자 홍사는 선비를 붙잡고 안타까운 듯 말했다.
"선비님, 당신은 참말 책벌레가 아니면 바보로군요. 한창 재미를 보고 있는데 왜 끼여들려 하시나요? 더욱이 당신은 즐기지 않고 이곳에서 멍청하니 기다리고만 있을 건가요? 인생은 짧고 고달픈 거예요. 당신은 정녕 그걸 모르세요?"
"알고 있소. 하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오. 조금 전에 한 여인이 폐하에게 벌을 주겠다고 데려갔으나 그건 걱정 안 해도 되지. 폐하는 그리 호락호락 넘어가실 분이 아니니까. 그러나 나는 어서 빨리 폐하를 모시고 이곳을 나가야겠소!"
선비는 지금의 이 형세가 몹시도 답답하여 무뚝뚝하게 말했다.
"당신들이 가고 안 가고는 우리 손에 달린 일이에요. 당신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원래 등아 향녀님께서는 황제 폐하를 화산으로 가지 못하게 하겠다는 조건으로 당신을 이곳으로 데리고 왔지만 이제는 달라졌어요. 폐하가 우리 향녀들을 위해 《구음진경》을 빼앗아 주겠다는 걸 약정해야만 당신들은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 당신이 진정으로 인생이 짧고 고달프며 한 번 지나가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아신다면 그 일은 폐하께 맡기고 이곳
에서 우리와 재미를 보아요. 그런 다음 폐하와 그 무슨 화산의 무예 시합인가 하는 델 가시란 말예요. 그때 가도 늦지 않으니……."
선비는 이 여인들이 무슨 수작을 꾸며 댈지 알 수가 없었다. 간신히 황제를 찾아내긴 했으되 그저 무사하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 지금 이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으니 실로 난감할 따름이었다. 선비는 몹시 안타까웠지만 그렇다고 뾰족한 수도 없었다. 그는 다만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기회를 엿보고 있을 뿐이었다.
세 향녀가 아무리 아양을 떨어도 선비는 웃기만 할 뿐 조금도 반응이 없었다.
'보아하니 이 사람은 참말 바보로구나. 이 사람이 참말로 우리에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 이러는 걸까? 만일 참말 그렇다면 이 사람은 의지가 굳센 사람이 아니야. 그러나 어디, 우리를 당해 내나 두고 보자.'
그녀들 셋은 마음속으로 생각을 굴리다가 서로 눈길을 주고받더니 일제히 선비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선비는 눈 하나 까딱 않고 큰소리로 《좌전》만 읽어 내려갔다.
선비는 점점 더 큰소리로 책을 읽었다. 그러나 그는 차츰 흔들리고 있었다. 여인의 향긋한 체취만은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눈은 책에 가 있지만 책장에는 글자가 아니라 여인들의 요염한 모습이 어리는 것이었다. 그의 마음은 이제 심하게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그는 자칫 여인들을 겁탈하게 될까 저어되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당신은 그래 여인이란 쟁기를 쓰지 않고고 살인을 할 수 있다는 걸 모르시나요?"
홍사가 사뭇 정겹게 속살거렸다. 선비는 머리를 숙인 채 들릴 듯 말 듯 나직이 대꾸했다.
"알고 있소. 옛날 서시라는 여인은 오나라와 월나라의 정예 군사 팔만보다 강했소. 그 여인은 일거에 오나라를 멸망으로 몰아넣었단 말이오. 또 귀비 양옥환은 나라를 망치고 임금을 사경에 몰아넣었지……."
"선비님께선 굳이 말씀을 안 하시려고 자꾸만 피하셔서 그렇지 일단 입을 열었다 하면 그런 학식으로 온종일을 이야기해도 끝이 없을 거예요."
"아니오. 그렇지 않소. 여인이 얽혀 들어 빚어진 그런 지나간 일을 다시 들춰 내긴 몹시 겁이 나니까……."
그는 향녀들의 유혹을 받아 죄과를 범하게 될까 봐 몹시 두려웠다.
"선비님, 당신은 일국의 승상이시니 여색에 빠지면 나라를 망칠 수도 있지요. 하지만 반대로 여인이 나라를 구할 수도 있는 거예요. 선비님도 그건 알고 계시죠? 만일 당신이 단황 나으리를 도와 우리들이 《구음진경》을 얻으려 하는 것에 일조해 주시기만 한다면 우린 꼭 당신들 군신에게 훌륭히 보답할 거예요."
그러자 선비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그대들이 우리 황제 폐하에게 미향을 뿌려 이곳까지 데리고 와 아직까지도 폐하가 저처럼 혼미해져 있도록 해 놓고는 아까부터 도시 그게 무슨 말이오? 이건 모두 그대들이 우리 대리국의 황제와 신하를 깔보았기 때문 아니오? 그런데 이제 와서 우리더러 《구음진경》을 빼앗는 일을 도와 달라니 실로 어불성설이구먼. 그건 망상이오, 망상!"
"흥, 아무리 그래도 별수없을걸요? 단황 나으리와 선비님이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언약해 주시지 않는다면 절대 이곳을 벗어날 수 없으니까요. 달이 점차 차고 있어요. 중양절 날 밤에 당신들은 서로 참살해야 해요. 그때 누가 그 《구음진경》을 얻게 되고 천하 무림의 제일인자가 되겠나요? 과연 누가?"
"난 모르오. 하지만 우린 아니오. 우린 그것을 얻을 생각이 없소."
그러자 홍사는 신비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참말 그걸 보게 되더라도 얻으려 하지 않으리란 말씀인가요?"
선비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소. 우린 그걸 바라지 않소."
"됐어요, 아주 훌륭해요. 한데 우린 참말로 당신들 군신들의 도움을 바래요. 당신들처럼 이 《구음진경》을 대수롭지 않게 대하는 사람들이 세상엔 많지 않아요. 그러니 우리를 도와 그 《구음진경》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주세요!"
홍사는 정색을 했다. 선비는 그 말에는 더 이상 대꾸를 않고 말머리를 돌렸다.
"그거야 어찌 됐든 어서 폐하를 만나게 해 주오. 어쨌든 우린 화산으로 가야겠으니."
"그렇게 서두를 게 뭐예요? 어차피 우리도 갈 테니 함께 가면 더욱 좋지 않나요?"
선비는 앙천대소를 했다. 그는 정말 철없는 아이들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대들이 화산에 가선 뭣하오? 그대들은 참말로 그깟 재간으로 화산에 가 싸우려 하는 게요?"
"비웃는 거군요. 우리 향녀를 비웃으면 안 돼요. 잘못 생각하셨어요. 그럼 선비님 신변이 위태롭게 된다구요."
선비는 뭐라 말하려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렸다. 홍사가 그의 등에 있는 비구(脾樞) 대혈을 찌른 것이었다. 그러자 두 여인도 일제히 손을 써서 순식간에 선비의 대혈 열세 곳을 찔러 놓았다.
"선비님, 당신은 스스로 재간이 대단하다고 믿고 계시는군요."
선비는 태연자약하나 웃음을 지었다.
"내가 그대들한테 알릴 일을 잊었구먼그래. 화산 무예 시합 때 그대들과 마주앉으려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게요."
그것은 화산의 무예 시합 때 향녀들한테는 근본적으로 남을 제압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선비님, 당신은 승상 노릇은 할 수 있지만 여인들한테는 안 되겠군요. 두고 보기나 하세요."
홍사는 생글생글 웃어 보였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감
즐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