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llow card
전영순
강의를 마치고 슬금슬금 기어 나오는 어둠과 함께 집에 도착하니 까만 눈을
말똥거리며 두 아이가 엄마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가슴에서 찡한 진동이 울린다.
편리한 시간에 자유로이 일할 수 있는 프리랜서를 택했고 별 대수롭지 않게 시작한 일
이 어린 막내에게 아픔은 되지 않을는지.
아이들에게 엄마의 손길이 한참 필요한 시기인데, 문득 거울 앞에 서면 작아 보이는
자신이 싫어서 결심한 일이다.
집에 도착했을 때 애들 아빠한테서 엄마 들어 왔냐고 전화가 온 것 같다. 순간 “엄마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고 수화(手話)로 아들에게 전하니 알았다는 듯이 빙그레 웃는
다.
술을 사양 못하는 인심 후한 남편이기에 모임이 있는 날엔 신경이 쓰이는 건 옆에서
지켜보는 내 쪽이다.
엄마가 집에 아직 들어오지 않았으니 애들 생각해서라도 일찍 들어오겠지 하는 마음
에 핸드폰도 받지 않았다.
12시가 넘었어도 아무 연락이 없어 메시지를 주었건만 역시 무반응, 무응답이다.
전화를 걸어도 핸드폰이 꺼져있다. 분위기가 한참 무르익어 가고 있나 보다!
2시에 다시 전화를 걸었건만 마찬가지다. 무슨 일일까?
멀리서 가로등 불빛이 어렴풋이 창으로 스며들어 천정에 나의 시선을 고정시켰고 이
생각, 저 생각 알 수 없는 사색이 미궁의 늪으로 끌고 간다.
깊은 야심 3차 갔을까? 아니 4차?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한담?
신경 쓰지 말아야지 하며 잠을 청하지만 두 눈에 들어오는 사물들이 더욱 선명하게 다
가온다.
새벽 4시 초인종이 울린다.
열어줄까? 말까? 한참 뜸을 들이다가 이 시간 열어주지 않으면 주위사람들이 욕하겠
지? 그래도 사회적으로 체면이 있는 집인데………. 문을 열자!
남편은 생각보다 많이 취하지 않았지만 양주 냄새가 어느 여인의 역겨운 향수마냥 풍
긴다. 동료들이랑 모임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어도 그들뿐이었을까! 밉다.
조용히 문을 열어주고 자리에 눕는다. 그도 잠시 후 침묵을 지킨 채 등 뒤에 눕는다.
잠이 왜 이렇게 오지 않는 것일까?
다음날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아침을 열었다.
오늘도 모임이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네 시에 들어왔다.
어제만큼 서운하지 않는 것은 서서히 무관심해 지는 것일까? 멀리하고 싶다.
다음날 아침에도 침묵은 깨어지지 않았다.
남편은 출근길에 배웅 나오기를 기다리며 서 있다. “나, 다녀올게.” 반복하지만 못
들은 체 설거지만 한다.
출근 전에 현관 문 앞에서 포옹과 뽀뽀는 관습처럼 자리 잡은 우리 부부의 정표이기에
기다리다 못한 남편은 오늘 출근 안 한다 하며 버티고 서 있다.
“가든 말든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이젠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한참 서 있더니 슬그머니 사라진다.
떠난 다음 현관문을 잠그려 하는데 남편 신발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이 못난 사람'
힘껏 내 던지며 화풀이 해 보지만 아무 말이 없다.
세탁을 한 후 빨래를 널 때의 일이다. 세탁기안에 노란 카드 하나가 나의 시선을 잡아
당긴다. 노란 명암에 상호가 Yellow card다.
사람 이름이 없는 yellow card 그 자체가 나를 슬프게 한다. 많고 많은 이름 중에 왜
하필 yellow card인가.
의심 안하려야 안 할 수 없게 되었다. 미안한지 남편은 일찍 퇴근했다.
잠시 후 Yellow card 얘기는 숨긴 채 "당신 겨우 그것 밖에 안돼. 어찌 수준이 그 정
도냐!” “왜~” “어디 놀 때 없어 Yellow card가서 노냐.” “어떻게 알았어?” “앞으
로 조심해. 청주는 손바닥만 해서 누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다 알아. 당신은 특히 한
눈에 다 들어와. 나, 이래봬도 청주시내 아는 사람 짜~악 깔렸거든. 조심해!”
남편은 절대 의심갈만한 일은 하지 않는다고 완강히 결백함을 주장한다.
난 믿고 싶다. 40 하고도 중반에 들어선 남편이 그런 것 하나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라면 난 그에게 인생의 진짜 Yellow card를 던질 것이다. 이렇게 당신 한 장, 앞으로 한
장 더 던지는 날에는………….
내가 모르는 남자의 세계가 또 있으리라 생각 들지만 내 남편만큼은 믿고 싶다.
만약,
내가 새벽 네 시에 들어온다면 남편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2005/23집
첫댓글 난 믿고 싶다. 40 하고도 중반에 들어선 남편이 그런 것 하나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라면 난 그에게 인생의 진짜 Yellow card를 던질 것이다. 이렇게 당신 한 장, 앞으로 한
장 더 던지는 날에는………….
내가 모르는 남자의 세계가 또 있으리라 생각 들지만 내 남편만큼은 믿고 싶다.
만약,
내가 새벽 네 시에 들어온다면 남편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