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하게 모든 기억들이 하나씩 침식되어 가도... 그것은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었
다. 각인 그것은 그렇게 불려야 할 것이다.
"나는 자네가 상당히 친근하게 느껴져. 자네도 나를 잘 알고 있는 것 같고... 자네
는 누구지?"
"굳이 알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는 자신의 정체를 이야기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하긴 그럴지도..."
풍랑은 고개를 떨구었다. 눈앞에 있는 사내와 처음 만났을 때 왠지 모를 친근감을
느꼈다. 인간이 무인도에서 인간과의 접촉을 하지 못하다가 동족을 만났을 때의 기
분이 그랬을까? 그 동질 감과 친근감의 정체는 반쪽의 인간으로서 이었을까 반쪽의
짐승으로 이었을까. 그것을 풍랑은 알 수 없었다.
"많이 지친 것 같아."
그가 그렇게 이야기했다. 풍랑은 오랜 시간 도망 다녔다. 자신을 다시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리려 하는 자를 피해서, 그리고 예외 없이 자신이 지나갔던 길은 그 자
에 의해서 파괴되었다. 풍랑의 뒤를 쫓아오는 그는 풍랑이 지나갔던 길에 피와 죽
음의 세례를 내리고 있었다. 오랜 시간 도망 다녔다. 하지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바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냥 처음 천랑의 왼쪽 눈에서 태어
났을 때 아무것에도 얽매이지도 않은 채 그저 바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었지..."
"많이 순진했었군."
풍랑의 말을 티케르가 받았다. 겉으로 보기에도 풍랑은 많이 지쳐있었다. 그리고
그를 쫓아오는 자 또한 지쳐있었다. 서로 필사적으로 쫓고 쫓기고 있었다. 쫓는 쪽
이나 도망가는 자 둘 다 심하게 지쳐있었다.
"그래...인랑은...처음부터 이런 결말을 위해 창조된 거니깐...그걸 이제야 절실히
느끼고 있어."
"처음 태어났을 때... 아니... 그 때 라도 깨 닳았어야 하는 것인데..."
[나는 알고 있어요. 당신과 내가 만난 이 만남의 끝을 알고 있어요. 그것은 분명히
비극일 테지요. 처음부터 예견되올 미래 나는 그것을 담담히 기다려요. 나는 처음
부터 이 미래를 위해서 태어난 것일지도 몰라요. 우리는 어째서 이렇게 태어난 걸
까요? 나도... 그리고 당신도...]
머릿속에서 과거의 상념이 떠돌았다. 잊어야 한다. 혈랑은 그렇게 자신을 타일렀다
. 기억이라는 건 과거라는 건 그에게는 베어지지 않는 적이었다. 눈앞의 적은 검으
로 벨 수 있었다. 하지만 기억은 벨 수가 없었다. 그의 반쪽은 인간이었다. 그 반
쪽의 인간이 자꾸 발목을 잡고 있었다. 언제나 이상한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소용
없는 것들이었다. 허망한 짓일 터였다.
"미래가 바뀔 리가 없잖아."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봄의 바람이 천천히 불어오고 있었다.
한에는 달력이 없었다. 봄의 바람이 즈음에 자신은 피어나는 꽃 위로 피를 뿌려야
할 터였다. 풍랑을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려 놓아야만 했다. 천천히 모든 것
은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인랑 또한 그래야 할 것이다.
파신(破神)을 위해서 천랑은 자신의 왼쪽 눈을 뽑아 풍랑을 만들고 오른쪽 눈을 뽑
아서 혈랑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사지를 쪼개어서 각기 다른 인랑들을 만들어
내었다. 신을 죽이고 남은 인랑 들은 모두 천랑에게로 돌아갔다. 이제 남은 것은
풍랑과 혈랑 둘뿐이었다. 이제는 그 남은 모두 역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야 할 터였다.
혈랑은 천랑이 만들어 내는 공간을 생각했다. 무한정한 파괴와 멸망만이 존재하는
곳, 끝없는 적막과 공허가 존재하는 곳. 그런 곳을 만들어낼수 있는 건 천랑이 유
일했다. 모든 것을 아무리 파괴해도 존재들은 잔존한다. 그 존재들을 완벽하게 천
랑은 없애 버렸다. 순수한 파멸... 그것은 천랑의 주위를 돌고 있었고 주변에 그
세례를 내렸다.
천랑의 오른쪽 눈이 뽑히며 자신이 탄생했을 때 이미 미래는 정해졌을 터였다. 천
랑이 자신의 몸을 뜯어내 인랑을 만들었을 때부터 모든 인랑의 미래는 정해져 있었
다. 바뀌지 않는 미래... 풍랑도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정하지는 못
할 것이었다. 그래서 그다지도 비참하게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풍랑과 혈랑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영원히 자신들은
비참한 도망자일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운명과 맞서 싸울 수가 없었다.
2. 동화(童話)
"옛날에 설묘(雪猫) 라는 이름을 가진 아름다운 아가씨가 살았어요. 그 아가씨는
너무 아름다워서 모든 사람들이 그 아가씨를 부러워했어요. 하지만 그 아가씨에게
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비밀이 있었어요."
동화(童話)는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동화를 말하는 자의 목소리 또한 아름다웠다.
너무 아름다워 그 아름다움은 괴기스럽기 까지 했다. 부조리한 아름다움... 그것
은 현실에 존재할 것이 아니었다.
"이야기...계속 해줄 수 있나요?"
파리한 안색의 소녀가 동화책을 읽어 주는 어둠속 상대에게 물었다. 그는 언제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둠이 스며들 즈음에 어느새 그는 그곳에서 동화를 읽어
주었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읽히는 아름다운 동화는 그녀의 마음 깊숙이 파문을 일
으켰다. 욕심이 났다. 설묘의 이야기는 이번으로 몇 번째인지 기억 못할 정도로 많
이 들었다. 언제나 그 이야기의 처음은 같았다.
옛날이라고 칭해지는 모호하게 흐려진 시간대에 존재했다는 설묘라는 언제나 똑같
은 이름의 아름다운 아가씨...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깨지기 위해서 존재했다. 그
녀의 슬픈 운명을 다룬 아름다운 동화는 그의 입에서 계속되어 이야기되어 졌다.
그녀는 좀더 사내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이제 그만하지. 시간은 우리에게 충분하니깐."
그는 여유롭게 말했다.
"아니요...저는 곧 죽을거에요."
그녀는 침울하게 말했다. 누구나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너는 스물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부모는 왕에게 부탁해 어의까지도 데려와 봤지만 누구도 그녀를 고쳐주
지 못했다. 그녀는 햇빛을 보지 못했다. 햇빛을 보는 순간 그녀는 죽어 버리면 괴
이한 병을 앓고 있었다. 하지만 사내만은 달랐다. 그가 들려주는 동화는 동시에 희
망이었다.
"아니. 절대로 넌 죽지 않아."
사내의 대답은 확고했다.
봄바람이 퀴퀴한 벽의 미세한 구멍을 뚫고 들어왔다. 아무리 사방을 둘러막아도 봄
은 그곳으로 여지없이 침투해 들어왔다. 풍랑은 이 봄바람과 함께 다가올 추격자와
또 운명에 파괴되었던 한 여자를 생각했다. 봄과 함께 그녀는 다시 태어났을 터였
다. 하지만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설묘를 한 존재가 두 번 만날 수는 없었을 터
이니. 그녀를 만나고 풍랑은 그녀에게로 끝없이 도망쳤다. 그리고 어느 맑은 날
아침 그녀는 말했다.
[저를 베어주세요...]
진실로 그녀는 베어짐을 원하고 있었다. 운명에 파괴되기 보다 풍랑에게 파괴되기
를 원했을 것일까. 하지만 풍랑은 그녀를 벨 수 없었다. 그녀는 다른 자에게 베어
졌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목을 꿰뚫은 차디찬 살인병기... 몸으로 흘러내리는 붉
은 선혈, 새하얗게 식어 가는 몸. 죽는 순간 그녀는 더욱더 찬란하게 빛났다. 그의
시선은 그녀에게 못 박혀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피도, 그녀도 사라졌다.
언제 이 곳에 존재한 적이라도 있었냐는 듯 사라졌다. 그녀는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으로 조금 일찍 돌아갔다. 파괴되어서...
다음날에도 사내는 찾아와 동화를 읽어 주었다. 그녀는 설묘라는 아가씨에게 이야
기 해주고 싶었다.
[지금 당신의 행복은 깨어지기 위한 행복이에요. 유리처럼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행복이에요.]
그렇게 말한다면 조금이라도 다가올 불행에 좀더 담담히 대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 언제나 동화에서 그녀의 행복은 깨어지기 위한 행복이었다. 그녀의 사랑은 언제
나 엇갈렸고 언제나 희생적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앞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