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토요일 오후에 사당역 부근 '막걸리 집'에서 형님을 만났다.
이번에도 형님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한달 반 동안 도보여행을 잘 마치고 돌아왔다.
얼굴이 더 시커멓게 변했지만 눈빛은 또렸했고 건강미가 넘쳤다.
좋았다.
역시 형님다웠다.
남들은 가능한 한 움직임과 고행을 피하고 싶어하는 70대 초반 나이.
그러나 형님의 시계는 자꾸만 거꾸로 흐르고 있었다.
젊어서는 죽어라 일만했고 그 덕분에 재산도 상당히 모으셨다.
그런데 '이순'이 되자 사업을 한 방에 딱 접었다.
휴대폰 번호도 바꾸셨다.
일도양단이었다.
단호했다.
본디 부지런한 성격이라 놀 수 없어 개인택시를 구입했다.
"수십 억 부자가 왠 개인택시?"
좀 쉬시라고 했더니 한두 달 쉬어보니 더 죽겠더란다.
하하.
역시 형님다운 멘트였다.
개인택시는 돈벌이가 아니라 여행경비 충당용이었다.
보통 한번 떠나면 약 두 달 정도 외국에서 머물렀다.
형님은 작은 배낭에 달랑 스틱 하나만 갖고 가신다.
그의 배낭을 보면 무척이나 단촐하고 검박하다.
역시 고수의 포스가 잘잘 흘렀다.
공항에 가보라.
엄청난 크기의 캐리어에 온갖 짐을 다 들고 떠나는 이들은 대개 가이드의 깃발을 졸졸졸 따라 다니거나 쇼핑이나 맛기행 정도까지만 시도하며 거기에 만족하는 사람들이다.
우열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여행패턴과 캐릭터를 얘기하는 것이다.
혼자서 두 발로 낯선 세상을 주유하는 이들에게 캐리어는 사치였고 장애물일 뿐이었다.
형님이 여러 장의 사진을 보여주셨다.
저번엔 영국 할머니를 만나서 친구 삼았는데, 이번엔 스페인 '대머리 영감'을 만나서 친구가 되었다고 했다.
환한 미소를 보니 넉살있고 사람 좋게 생겼다.
그 친구의 집에서 4일을 머물다 왔는데 그 친구의 와이프와도 금세 친해졌다고 했다.
작년 순례에서 만난 '영국 할머니'는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사는데 그 집에서 자그만치 12일을 머물다 왔다고 했다.
그 집을 베이스 캠프 삼아 사방 100킬로 이내는 샅샅이 뒤졌다고 했다.
영어를 잘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단어 몇 개와 바디랭귀지로 의사소통을 다 한다.
그래도 오픈 마인드와 배려의 정신이면 이 세상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다고 자신하신다.
좋다.
그 자신감, 그 도전정신, 그 실천력.
올 가을엔 '페루'와 '볼리비아', '칠레"를 계획하고 계셨다.
"기욱아우, 일을 빨리 그만 둬. 같이 다니자. 아우만 시간을 낼 수 있으면 천군만마지"
나도 간절한 마음으로 그리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허나 목표한 바가 있기에 몇 년은 더 땀을 쏟아야 한다고 했다.
형님과 대화를 나누면 시종일관 유쾌하고 즐겁다.
그의 언어는 '사랑과 간구'였고 한편으론 '참회와 기도'였다.
인생 2막, 형수님은 음악의 세계에 몰입해 지내고 자신은 세상주유에 집중하고 있어 서다.
부부지만 교집합이 별로 없다.
그러나 70대 중반을 향해 가는 나이.
이제는 서로의 세계를 존중해 주며 화끈하게 지원해 주는 친구같은 배우자가 되었다.
인정과 격려.
그 속에서 자유와 도전이 샘솟았다.
형님은 여행을 떠났다가 두 달만에 돌아오면 본인도 그 나라, 그 대륙의 풍경의 일부가 되어서 나타난다.
신선한 '대서양'의 바람, '지중해'의 갯내음이 내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무더운 여름을 지나온 바다는 금세 가을을 품고 파도친다.
한낮의 뜨거운 햇살도 추운 칼바람에 식어버릴 날이 머지 않은 것이 인생이다.
그래도 생의 마지막까지 청년같은 기상으로 '오대양 육대주'를 향한 옹골진 '오체투지'가 너무나도 멋지다.
열심히 뛰다보니 어느새 나도 '장년'이 되었음을 자각한다.
별안간 시간이 빛의 속도로 흘렀다.
아랫배가 나오려 하고 온몸이 결린다.
때로는 외롭고 아프다.
그러니까 '장년'이지만.
'장년'과 '노년'은 성찰과 깨달음을 준다.
많은 것들을 버리고 정리하지만 중요한 몇 가지는 다시 찾고 기도제목으로 삼는다.
젊어선 청춘예찬의 싱그럽고 찰랑찰랑한 선율들이 좋았지만 지금은 여유롭고 조화로운 '통섭의 앙상블'이 더 좋다.
나도 내 '버킷리스트'를 매년 다시 체크하고 일부 수정하곤 한다.
내 여명이 언제까지인지 잘 모르지만 다이나믹한 스토리텔링은 앞으로 약 20여 년 정도 엮어낼 수 있을 듯하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서두를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조금이라도 낭비하거나 허투로 흘려보내고 싶지 않다.
배움과 깨달음은 왕왕 '사람'을 통해서 온다.
그래서 만남은 매양 감사하고 감동이다.
사랑하는 형님께 진심어린 '오마주'를 보낸다.
올 가을, '남미대륙'의 어느 한 모퉁이에서 어느 누구도 필사할 수 없는, 형님만의 또 다른 '육필원고'를 많이 기록하시길 빈다.
파이팅.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첫댓글 형님은 되게 궁금해 하셨다.
그리고 산에 대해 매번 물어보신다.
한국의 산들, 티벳의 산들, 차마고도, 호도협과 샹그릴라, 몽골의 대초원과 체체궁산, 홋카이도의 다이세츠야마, 록키 캐나다(밴프/요호/재스퍼), 뚜르 드 몽블랑(프랑스/스위스/이태리), 중국의 황산/황룽/장자제/주자이거우 그리고 키르기스스탄의 텐산산맥까지.
형님은 드넓은 대지를 트레킹으로 주유하는 스타일인데 나는 고봉과 협곡 그리고 끝없이 이어진 깊은 숲을 좋아한다.
그러니 남자들 둘이서 만나면 서너 시간의 수다도 짧다.
사람은 누구나 그렇다.
자신이 걷지 않은 길을 궁금해 한다.
당연하다.
하지만 광활하고 웅대한 자연 속에서 다양한 경험과 사유 그리고 감동을 만끽하는 건 동일하다.
칠순 이후의 삶에 더욱 윤기가 흐르고 찰진 스토리텔링을 스스로 만들어 가시는 형님이 나보다 더 멋지고 향기롭다고 생각한다.
진심이다.
언젠가 내가 현업을 그만두면 유럽대륙을 함께 도보로 횡단해 보고 싶다.
그때까지 건강한 몸과 마음을 잘 유지하는 것이 둘의 소망이다.
금년 가을.
남미대륙에서의 두 달짜리 도보여행을 준비하시는 형님께 힘찬 박수를 보낸다.
브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