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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스 1:1-11
1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2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3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4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 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 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 하였더라
5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
6 그 사면 사람들이 은 그릇과 금과 물품들과 짐승과 보물로 돕고 그 외에도 예물을 기쁘게 드렸더라
7 고레스 왕이 또 여호와의 성전 그릇을 꺼내니 옛적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신당에 두었던 것이라
8 바사 왕 고레스가 창고지기 미드르닷에게 명령하여 그 그릇들을 꺼내어 세어서 유다 총독 세스바살에게 넘겨주니
9 그 수는 금 접시가 서른 개요 은 접시가 천 개요 칼이 스물아홉 개요
10 금 대접이 서른 개요 그보다 못한 은 대접이 사백열 개요 그밖의 그릇이 천 개이니
11 금, 은 그릇이 모두 오천사백 개라 사로잡힌 자를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갈 때에 세스바살이 그 그릇들을 다 가지고 갔더라
스 1:1-11 / [고레스왕의 조서] 바사 왕 고레스가 즉위한 ㄱ) 그해에, 여호와께서 이미 예언자 예레미야를 시켜서 알려 주셨던 약속을 성취해 주셨다. 여호와께서 세계의 통치권을 잡은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시자 그가 자기의 온 제국에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그것을 문서로도 적어 공포하였다. (ㄱ. BC 538년) 2) `바사 왕 고레스가 공고한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들을 내 손에 맡기셨다. 그리고 유다 나라의 예루살렘에 자신의 성전을 짓도록 분부를 내리셨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이렇게 조서를 내린다. 3) 너희들 중에서 이 신을 섬기는 백성이 있으면 누구든지 이제 유다 땅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지어라. 그 하나님이 그들 하나하나와 함께 계셔서 그들이 돌아가는 길도 보호해 주시고 성전 짓는 일도 도우시기를 바란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예루살렘에 계시며 거기서 섬김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4) 이 포로생활 속에서 살아 남은 사람이면 누구든지, 또 그가 어느 곳에 살고 있든지, 그 이웃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금과 은도 주고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과 타고 갈 짐승도 주고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바칠 자원제물도 주어서 그들이 영광스럽게 떠나가도록 도와주어라.' 5) [귀환 준비 ] 이리하여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가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지파의 사람들, 그리고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함께 떠날 차비를 하였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짓도록 마음을 감동시켜 주셔서 떠날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6) 그러자 사방의 이웃들이 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도 짓고 그들 자신의 생활을 위해서도 쓰도록 금과 은그릇, 먼 여로에 타고 갈 짐승, 기타 귀중품과 필요한 물건들을 많이 주었다. 7) [성전 기구들을 되돌려주다] 이때에 바사 왕 고레스가 예루살렘 성전의 기구들도 돌려주었는데 그것은 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여호와의 성전에서 약탈해다가 자기 신전의 보물 창고에 보관하였던 거룩한 물건들이다. 8) 그때에 바사 왕 고레스는 그것들을 모두 자기의 재무장관인 미드르닷에게 넘겨 주고 미드르닷은 그 물건을 유다 백성의 지도자인 세스바살에게 모두 정확하게 세어서 넘겨 주었다. 9) 그 명세서에는 특별히 다음과 같은 물건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금대접 30개, 은대접 1000개, 분향 접시 29개, 10) 금잔 30개, 깨진 은잔 410개, 그밖에 다른 기물 1000개. 11) 금과 은으로 만든 물건들은 모두 5400개였다. 유다 백성의 지도자 세스바살이 석방된 동족들을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데리고 올 때에 그 모든 물건을 함께 가지고 왔다.
하나님께서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게 합니다.
여호와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1-4) 에스라를 기록한 사람은 역대기를 기록한 사람과 동일 인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스라의 시작이 역대기의 마지막 부분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남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국가 존망의 백척간두에 있을 때에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하셨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이스라엘이 70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게 될 것이며(렘 25:11), 70년 이후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렘 29:10).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어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합니다(대하 36:22). 고레스가 당시 최강의 왕일지라도 그 역시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 분명히 밝혀지는 대목입니다. 모든 나라와 왕들과 인생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에 고레스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고 고백하며,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마음의 감동을 받은 고레스는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라고 명령합니다. 이때 지어지는 성전이 예루살렘의 두 번째 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입니다. 고레스는 단순히 명령만 한 것이 아니라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필요한 실질적인 지원을 하였습니다.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5-11) 하나님은 자신이 정하신 시간이 되자 고레스뿐만 아니라 자기의 백성이 예루살렘의 성전을 건축하도록 그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여기에서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특별히 언급되는 것은 포로되었던 하나님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이 분명한 목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전을 건축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각종 예물을 기쁘게 드립니다. 심지어 고레스는 여호와의 성전에 있던 성전 그릇을 유다 총독 세스바살에게 넘겨주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출애굽 때에 있었던 일들과 유사한 사건입니다. 출애굽 당시 애굽 사람들도 성막의 부장품에 사용하도록 앞다투어 많은 보물을 내놓았습니다(출 11:2; 12:35-36).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적용: 당신이 세울 하나님의 성전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사명을 확인하며,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진정한 영성이란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크고 중요한 계명이라고 하신 한마디 말씀 속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겠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영성이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인데 그 사랑하는 방법은 세 가지 채널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마음(mind)과 성품(heart)과 힘(strenght). 이것은 정확하게 풀어서 말한다면 성령이 기름 부으신 거룩한 지성과 따뜻한 감성과 역경을 넘어가는 능력, 곧 역경 지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설 교 >
나의 추구성은 영의 것이냐, 육의 것이냐?
스 1:1-4 / 김경형 목사
고레스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동된 사람입니다. 사람이 성령으로 감동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 하고, 마귀에게 감동이 되면 ‘바벨론에서 살자’ 하며 마음을 바벨론으로 기울이게 하고 바벨론에 정을 붙이게 설득을 합니다. 그런고로 ‘내가 누구에게 감동이 되었느냐’ 하는 이게 아주 중요하지요.
3절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하고 나오는데 ‘참 신’ 할 때는 거짓 신, 가짜 신이 있다는 거지요. 참 신은 거짓말을 아니 하고 거짓 것을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참이 되기를 원하고 참만 줍니다.
이 참 신, 진짜 신은 비물질적이요 비고정적이며 무형적이며 인격적이며 자존적이고 무형적 무한적인 신이십니다. 신령계와 물질계를 창조하신 이 분이 참 신이십니다. 그러나 거짓 신, 가짜 신은 절대자 자존자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만들어서 섬기는 신입니다. 그가 가르치는 교훈은 물질을 구하게 하고 물질을 구하는 사역을 시킵니다.
고레스가 하늘의 신에 감동이 되니까 성전을 건축하라고 그럽니다. 그리고 4절에 ‘바벨론 왕을 통하여 숨겨놓았던 보배를 다 줄 것이다. 또 건축하지 않다가 빼앗겨서 바벨론에 숨기고 보관해 있던 것을 도로 다 내어준다’ 하는 이걸 우리가 가만히 보면 하나님의 구원 작업은 무계획적이 아니고, 하나님 당신의 선택에서, 이거는 존재선택이 아니고 목적선택을 말하는 건데 즉 궁극적 누림의 그 세계를 선택을 했기 때문에 그 다음에 존재선택이 됐단 말이요. 존재선택은 믿는 우리들을 말함입니다.
그 목적선택에서 존재선택을 해가지고 그 역사를 해 나가는데, 당신의 백성이 궁극적인 구원을 이루지 않을 때에는 누구를 통해서라도 다 빼앗아 가게 만들었다 그 말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화구원을 입는 일을 하지 않으니까 바벨론이 와서 다 빼앗아 가도록 했어요.
그 다음에 끌고 가서 포로로 70년 동안 노예로 살게 하고, 그 다음에 이제 고레스 왕이 하늘의 신에 감동이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성전을 지으라는 그 명령이 떨어졌단 말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귀국을 해서 성전을 짓는데 70년 전에 빼앗아 갔던 그 물건들을 성전을 짓도록 도로 다 내어주라고 한다 그 말이요.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오묘하다 그 말이요.
이 구원목적을 위해서 모든 물질계와 신령계를 창조하신 겁니다. 신령계도 수많은 종류가 있겠지만 우리가 물질계를 보더라도 우리가 알고 있는 종류보다 알지 못하는 종류가 더 많이 있을 것이니 가히 무한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물질계의 존재가 무한하리만큼 많이 있지만 하나님 당신의 대 선택의 목적물은 우리 인간밖에 없습니다. 각자 자기밖에 없다 그 말이요. 그래서 우리 인간 자기를 하나님 당신의 모형대로 지었다 그 말이요.
‘형상이라. 모형이라’ 하는 말도 하나님께서 이 성경을 기록하게 하시기 전에 ‘형상’이라고 말씀을 했으며, 또는 인간을 짓기 전에 ‘형상’이라고 말씀을 했다 그 말이요. 그런고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형상이다. 모양이다’ 하는 그 뜻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그 말이요.
형상이란 같은 속성 같은 인격성이란 의미로 하나님처럼 지성 의지 감성이 있는 인간으로 지었다는 것이고, 또한 형상이란 지혜지식성 도덕성 능력성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것을 인격성이라고도 하는데, 하나님은 원형적 인격성이고 인간은 모형적 인격성입니다. 인간은 지음을 받았으니까 원형이 아닌 모형적 인격성이니, 모형적이라는 말은 비슷하다 그 말이요. 닮았다 그 말이요.
인간을 인격성으로 지은 것은 물질계를 다스리고 느끼라고 하는 이 목적보다도 인간에게는 당신의 영적인 목적이 있기 때문에 인격성으로 지었다 그 말이요. 그런데 일반사람들은 세상에서 누릴 목적으로 살고 있지요? 인간을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으신 목적은 천국을 맡기기 위해서.
우리가 일반적 계시적으로 보면 시어머니의 호된 훈련은 나중에 집안 살림을 며느리에게 맡기려고 하는 그런 게 들어있다 그 말이요. 또 아버지의 독한 훈련은 자식에게 기업체를 맡기려는 아버지의 뜻이 들어있다 그 말이요. 그런 것처럼 그 신령천국이 너무 좋기 때문에 그 천국을 우리에게 맡겨주기 위해서 우리를 지었고, 그 세계를 다스리고 누릴 수 있는 실력을 쌓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이 땅에 살게 했고,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훈련을 시킨다 그 말이지요.
우리로부터 당신이 제사를 받아먹기 위한 목적이 아니고 맡기기 위해서 우리를 지었다 그 말이요. 우리의 예배를 받아먹기 위해서 우리를 지은 게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천국을 맡아서 통치 지배하게 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를 지었고, 이 세상은 이를 위한 실력을 준비할 수 있는 훈련장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또 한 편 이 세상은 보면 천국의 모형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는 무한한 세계가 있고, 같은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났지만 어떤 사람은 산삼을 먹고, 어떤 사람은 무를 먹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빈부의 차별이 있고, 능력에 차별도 있고, 고저의 차별도 있고, 감각의 차별도 있고, 희비의 차별도 있고, 안고의 차별도 있더라 그 말이요. 이것을 가만히 보면 자기의 자질대로 자기의 능력대로 되어지는 거더라 그 말이요. 이 세상에서도 자기 실력대로 그런 차별이 있는 것처럼 천국도 영적인 면에서 마찬가지다 그 말이요.
우리는 인격적인 존재이므로 보다 더 나은 것을 추구하기도 하고 소원하기도 합니다. 목석이나 금수는 그런 것이 없지요. 가난한 집에 심겨진 나무가 ‘부잣집에 심겨졌으면’ 하는 그런 건 없잖아요. 가난한 집에 사는 돼지가 ‘내가 부잣집에 가서 좀 살아봤으면’ 하는 그런 건 없다 그 말이요. 무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는 인격이 있기 때문에 가치 판단 평가하는 게 있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이 세상보다 더 좋은 더 나은 영적인 세계, 영적인 실력들이 있다 그 말이요. 그 면에 대해서 알라 그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천국을 주시려고 우리 인간만을 인격적인 존재로 지었습니다. 고로 우리 인간은 이 물질세계에서 70여 년간 사는 동안에 하늘나라의 성품을 입을 곳이 이 세상이라 그 말이지요. 그래서 이 세상은 훈련장이라. 실력을 닦는 곳이라. 견습장이라. 숙련공이 되는 곳이라. 또는 미장원이라. 미모를 꾸미는 곳이라. 영적 미모를 꾸미는 곳이라. 그래서 진리도 주고, 크고 작은 사건도 주고, 환경들을 동원시키는 겁니다. 우리 기독자들은 이런 세상인 줄 알아야 한다 그 말이요. 이걸 잊어버리면 안 되지요.
참은 변질이 없습니다. 영원토록 변질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나가려고 할 때에 어떤 것을 참인 줄로 알았지만 시간이 흐르다 보니 그게 거짓으로 드러나는 것이 있더라 그 말이요. 또 내가 어떤 사람의 말을 듣고 살다보니 부요가 왔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그 부요가 다 날아가 버렸다 그 말이요. 그랬을 때에 이것은 도금한 부요라 그 말이요. 입혀진 것이 벗겨져서 날아간다 그 말이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솔로몬이 노래 부르는 남녀들을 동원시켜서 아주 쾌락적으로 날을 지냈습니다. 남녀들을 불러다가 노래를 시킬 때는 즐겁고 ‘아, 이게 천국 같구나’ 했는데 지나고 보니 전도서 2장 2절에서 말하기를 ‘웃음은 미친 것이다. 그러한 세월, 그러한 즐거움의 웃음은 다 미친 것이로구나’ 그렇게 말을 했단 말이요. 말하자면 세상에는 참된 쾌락은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솔로몬은 모든 인류의 대표로서의 견본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은 모든 인류가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모든 인간이 하고 싶은 것을 다 해 본 솔로몬이라 그 말이요. 그래서 궁녀들을 그렇게 많이 불러 모았다 그 말이요. 그런데 솔로몬은 말하기를 ‘헛되고도 헛되도다. 바람을 잡으려는 것 같구나’ 그렇게 말을 했지요?
솔로몬의 이 얘기는 전 세계 각국 인류에게 하는 말이요, 또 전 세계 개인 개인마다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깨닫지 못하는 많은 인간들은 ‘솔로몬처럼 좀 살아봤으면’ 그럽니까? 먼저 경험한 솔로몬은 ‘헛되고 헛되도다’ 하는데도 ‘헛되도 좋다’ 하고 그런 경험을 하려고 그러는 겁니까? 안 된다 그 말이요. 그런 걸 누리고 누리고 누릴수록 더 허무하고 더 허무하고 그래요. 인간은 그렇게 돼 있어요.
솔로몬이 전 세계 개인에게 하는 얘기가 하나는 ‘참되다’ 하는 그걸 가르쳐 주는 게 있고, 또 하나는 ‘헛되다’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 말이요.
목적이 돈 버는 목적에, 목적이 공부에, 목적이 미녀 차는 목적에 사는 자를 향해 솔로몬은 하는 말이 ‘헛되고 헛되도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 말이요. 하나님을 제쳐놓고 바벨론의 영광을 얻기를 원하는 것은, 종교적이던 비종교적이던 성경적이던 비성경적이던 뜻을 바벨론에 두고 추구성 목적성을 바벨론에 두는 것은 다 ‘헛되고 헛되도다’ 하는 겁니다.
인간은 인격성이 있고 추구성이 있고 지향성이 있고 소원성이 있는 자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염세주의 고행주의 극복주의 극기주의 초절주의는 아닙니다. 명예 영광 권세가 필요가 없다고 하는 그런 주의도 아닙니다. 삭발주의도 아니요 남루하게 옷을 입어야 만이 되는 남루주의도 아닙니다. 양복보다 한복을 입으면 거룩해 보입니까? 걸음걸이가 아주 거룩해지는 겁니까? 예수 믿는 내가 나의 지향성이 무엇이냐? 나의 추구성이 무엇이냐? 나의 소원성이 무엇이냐 그 말이요.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 피동 될 수 있고, 피동성 동화성 영구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그런 자로 하나님께서는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으로 만들어 놓고 만물을 사용하고 지배하고 지키고 정복하라고 그랬지요? 그런데 타락 후에는 인간 속에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신령계의 추구성 지향성 욕망성 소원성이 다 없어져 버렸어요. 어찌 사람이 이렇게 되었을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이 만물 이하로 떨어져 버렸다 그 말이요. 그렇기 때문에 만물을 보고 부러워하고 그런다 그 말이요.
학을 배우는 학사가 노름을 하면 이건 타락입니다. 그의 신분이 있고 신분의 위치가 있는 건데 그건 타락이요. 가치적 타락이요 욕망적 타락이요 평가적 타락이요 추구적 타락이요 지향적 타락이 된 거지요.
아무리 인간이 타락이 되었어도 인격적인 면에서 감각적인 면에서 본능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다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영의 추구성이 따로 있고, 이성의 추구성이 따로 있고, 본능의 추구성이 따로 있습니다.
본능이 뭐냐? 본능의 추구성은 뭐냐? 본능적으로 욕구성이 있고 욕망성 지향성 추구성이 있지요? 본능은 먹고 마시고 남녀 간에 성 하는 거. 그러니까 목적이 그 목적으로 살면, 사는 위주가 그 목적으로 살면 이거는 본능으로 사는 사람이라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본능적으로 사는 사람이 상당히 많지요? 위주가 그렇고 목적이 그렇고.
그 다음에 이성의 추구성이 있고 욕망성이 있고 욕구성 지향성이 있어요. 본능에서 초월이 되면 세상지식이라든지 세상의 도덕성을 찾는다 그 말이요. 이건 조금 더 고상하지요?
여기서 이제 또 초월이 되면 영의 추구성이 있습니다. 영이 욕망성 욕구성 지향성이 있어요. 이 영의 추구성은 본질적으로 또 종별적으로 분량적으로 시간적으로 완전하고 영원하고 참된 것을 찾게 되는 겁니다. 우리 기독자들은 이 영의 추구성 영의 욕망성 영의 욕구성 영의 지향성으로 가야 된다 그 말이요.
본능성이라든지 이성이라든지 영적인 영의 추구성이라든지 이런 것이 우리에게 다 있어요. 그런데 ‘그 중에서 어느 것을 이용하고 무슨 목적으로 사느냐’ 하는 여기에서 이제 달라진다 그 말이요. 우리는 영을 추구하면서 살아야지요. 딴 것은 전부 다 영의 성장에 이용물이니까.
안 믿는 사람들을 보면 본능의 추구성이 있고 이성의 추구성이 있지요. 그런데 대부분 보면 본능적으로 많이 살고 있습니다. 바벨론의 국민은 본능으로 떨어진 사람들이고 이성으로 떨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또 가만히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 바벨론으로 떨어졌단 말이요. 그게 타락이라 그 말이요.
하나님이 고레스 왕을 감동시켜서 ‘그 백성 된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 하는 그 명령을 들을 때에 바벨론 각 구석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 그래. 맞다. 나도 이스라엘 백성이다. 나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지’ 이게 있을 거라 그 말이요.
‘그 백성 된 자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 네가 그 백성으로 느껴지거들랑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 이 말의 뜻은,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성은 추구성 지향성 욕망성 욕구성 목적성을 바벨론의 것으로 갖지 말고 신령한 영의 것, 하나님의 것으로 전부 다 바꾸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사상이 ‘이 땅에 일하는 자는 하늘의 일로 바꾸고, 남이 볼 때는 땅의 일을 하는 것 같으나 목적이 이 땅에서 일하는 자는 하늘의 일로 목적을 바꾸고, 바벨론 신앙에서 영적 신앙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그 신앙으로 바꾸라’ 그 말이요.
이것이 하나님께서 역사적으로 고레스 왕을 감동시켜서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사상입니다. 신앙사상이라 그 말이요. 진리이치라 그 말이요. 구원도리라 그 말이요.
신앙생활의 터미널
에스라 1:1-4 / 이한배목사
ㅇ 질 문 - 하루에 찬송을 몇번 대합니까 ?
I. 서 론
터미널을 아십니까 ?
터미널 하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
① 터미널 사진
80년대 우리나라를 대표하던 강남터미널 입니다.
우리는 터미널하면 이렇게 버스를 타는 곳이 떠오릅니다.
② 터미널
선진국 사람들에게 터미널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요 ?
영국 런던의 히드로우(Heathrow)공항의 터미널 입니다.
미국 사람들에게는 터미널하면 버스를 타는 곳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비행기를 타는 곳이 떠오릅니다.
앞으로 우리나라도 이렇게 되어 갑니다.
버스를 타는 터미널에는 거의 가지 않게 되고, 대신에 비행기를 타는 터미널에 더 많이 가게 됩니다.
그러면 터미널이란 무슨 뜻일까요 ?
터미널(Terminal)은 끝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영화 터미네이터(Terminator)는 “끝맺는 사람(종결자)”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terminal cancer하면 말기암을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터미널 하면
① 버스나 기차나 배나 비행기의 종점 입니다.
터니널은 이렇게 우리의 여정의 종착지 입니다.
② 버스나 기차나 배나 비행기가 떠나는 시점 입니다.
우리는 터미널에서 운송수단을 타고 새로운 곳으로 출발을 합니다.
이렇게 터미널은 끝이 되기도 하지만 새로운 출발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주란이 터미널을 “이별과 상봉의 공항 대합실”이라고 노래를 불렀읍니다.
터미널에는 끝나는 상봉도 있고, 떠나는 이별도 있읍니다.
세계에서 터미널을 가장 잘 묘사한 것으로 봅니다.
이렇게 터미널은 끝이 되기도 하지만, 새로운 시작이 되기도 합니다.
말기암을 terminal cancer라고 하는데, 말기암이 이세상의 삶의 끝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말기암이 꼭 끝만은 아닙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하루살이와 같이 이세상의 삶으로 끝나는 자들은 말기암이 인생의 종점이 될 수 있읍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말기암은 이세상의 삶의 종점만이 아니라, 천국의 생활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말기암은 슬픔과 비극이 아니라, 새로운 설레임과 기쁨입니다.
그런데 이 터미널이 오늘 본문에도 나와 있읍니다.
오늘 읽은 에스라 바로 앞에는 역대하 마지막 장이 나와 있읍니다.
그런데 이 (대하 36:22-23)을 읽어보면 재미 있는 것이 있읍니다.
그것은 (대하 36:22-23)과 (스 1:1-3)의 내용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참으로 놀랍지 않읍니까 ?
두 부분의 내용이 똑같읍니다.
성경에 똑같은 내용이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만, 그것도 앞뒤에 있는 서로 다른 책에 이렇게 똑같은 내용이 있다는 것이 더욱더 이상 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뭔가 중요한 것을 말하려고 이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똑같은 내용을 역대기의 맨 끝과 에스라의 맨 앞에 놓음으로 무엇을 이야기 할려고 했을까요 ?
① 역대기와 에스라를 동일인인 에스라가 썼다.
앞에 나오는 책의 맨 끝과 다음에 나오는 책의 맨 앞을 똑같이 해서 저자가 같다는 것을 이야기 할 수도 있읍니다.
물론 이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저자가 같다는 것을 이야기 할려고 이렇게 한 것 같지는 않읍니다.
② 역대기와 에스라는 연속적인 역사다.
이렇게 앞에 나오는 책의 끝과 뒤에 나오는 책의 처음 부분을 같게 해서 앞에 나오는 책과 뒤에 나오는 책이 연속적이라는 것을 말 할 수 있읍니다.
신약에도 보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맨 앞부분을 같게 해서, 누가복음이 사도행전으로 이어지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읍니다.
③ 역대기는 종점이며, 에스라는 새로운 시발점이라.
앞에는 역대기 즉 이스라엘의 역사가 바벨론 포로 생활까지 나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의 종점인줄 알았읍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망하는 줄로 알았읍니다.
그런데 100년이 지나고 나니,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였읍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터미널이 되고 있읍니다.
즉 하나의 삶이 끝이 나고 새로운 삶이 시작이 되고 있읍니다.
II. 본 론
오늘은 본문의 말씀을 갖고 신앙생활의 터미널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신앙인에게 끝은 시작이다.
신앙인들은 끝이 끝이 아닙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역대하는 이스라엘의 역사의 끝으로 끝나고 있읍니다.
유다 제20대 왕 시드기야 11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쳐들어 와서 성전을 불사르고, 성을 다 파괴했읍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바벨론으로 잡아갔읍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끝이 났읍니다.
이런 일을 당하면 세상 사람들은 끝났다고 생각을 합니다.
터미널 즉 종착역에 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다릅니다.
신앙인들은 그것이 새로운 시작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바벨론 70년이 이스라엘 역사의 터미널 즉 종착역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에게는 바벨론 70년은 이스라엘 역사에 새로운 시작입니다.
에스라로 이어지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입니다.
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역사의 시작입니다.
지난날의 망한 역사를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역사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학문을 마치는 대학이나 고등학교의 졸업을 commencement라고 합니다.
commencement란 학업이 끝이 났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commencement는 시작이란 뜻입니다.
이렇게 신앙이에게는 끝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끝이 시작이 될 수 있을까요 ?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읍니다.
어떻게 바사왕 고레스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라고 했을까요 ?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건축하러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 그들을 지금까지 부려먹은 주인들은 그들에 돌아갈 돈과 그리고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주라고 했을까요 ?
성경은 분명히 “여호와께서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읍니다.
하나님 때문에 끝이 시작이 될 수 있었읍니다.
하나님이 아니고서야 누가 이 끝을 시작으로 만들 수 있겠읍니까 ?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면, 더 좋은 것으로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망하면 더 좋은 것으로 시작할 수 없읍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더 좋은 것으로 시작합니다.
갈릴리 가나에 혼인 잔치가 벌어졌읍니다.
그런데 잔치의 터미널이 찾아왔읍니다.
포도주가 떨어졌읍니다.
이제 잔치를 마쳐야할 시점에 왔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잔치가 새롭게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이 잔치는 앞에 마셨던 포도주 보다 더 좋은 포도주의 잔치였읍니다.
즉 더 좋은 역사가 시작이 되었읍니다.
미국 최초의 구호단체인 “Water Street Mission”를 미국에 설립한 제리 맥컬리(Jerry McAuley)는 19살에 16년 6개월 형을 받고 싱싱교도소에 수감이 되었다. 어느날 감옥 채플에서, 제리가 감옥에 오기 전에 알았던 악명 높은 직업 권투선수이며, 모든 면에 있어서 악당인 “공포의 가디너(Awful Gardiner)”가 설교를 하는 것이였다. 가디너가 설교를 하는 동안 제리의 얼굴에는 눈물이 흘러내렸으며, 예수님의 사랑을 이야기 할 때 자기의 죄를 회개를 했다. 가디너는 성경 몇 구절을 인용을 했는데, 그것이 제리에게 큰 감명을 줬다. 집회가 끝나 자기 감방으로 간 제리는 환풍구를 뒤져서 성경을 찾았다. 먼지가 쌓여 있는 성경을 읽기 시작을 했다. 그러나 읽기가 어려웠다. 왜냐하면 전에 성경을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제리는 가디너가 인용한 성경을 찾으려고 정신없이 성경 여기 저기를 뒤졌다. 그는 그 성경 구절들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 성경을 읽게 되었고 그래서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성령님이 그에게 그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다.
제리는 “저는 예수님을 발견했읍니다. 오 주여 감사 합니다. 저는 예수님을 발견했읍니다”라고 소리쳤다. 이 이상한 소리에 간수가 오게 되었고, 제리가 고독한 감방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고 그에게 손전등을 비췄다. 그리고는 거친 말투로 “무슨 일이야 ?”하고 소리쳤다. 제리는 “저는 예수님을 발견했읍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간수는 “내일 독방에 쳐넣을 것야” 하고는 그의 죄수 번호를 뜯어갔다. 제리는 “하나님이 그로 그 사실을 잊게 하셨다. 왜냐하면 나는 독방에 들어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것이 제리 맥컬리의 회심 이다.
놀라운 부흥운동이 그 감옥에서 일어났다. 시에서 선교사들이 몰려왔고, 그럴 때마다 감옥 관계자들은 집회를 열게 했다. 제리가 이 운동의 중심이였다. 그 결과 주지사 John A. Dix가 8년의 형을 감해 줬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 우리의 끝난 역사가 더 좋은 역사로 시작이 되는줄 믿읍니다.
2. 인생의 목적은 성전 건축이다.
그러면 종점에 도착한 자들에게 새로운 시작을 주시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
즉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사는 이유가 뭘가요 ?
역대기에서 종점에 이른, 즉 모든 것이 망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새로운 시작인 에스라를 주신 이유가 뭘까요 ?
그것은 성전 건축 입니다.
오늘 성경에 그것이 분명하게 나와 있읍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무릇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우거하였든지 그곳 사람들이 마땅이 은과 금과 기타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예물을 즐거이 드릴지니라 하였더라라.”
하나님은 성전을 재건하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시작을 주셨읍니다.
그 일을 위하여 이방인 바사의 고레스 왕을 사용 하셨읍니다.
이것은 인생의 새로운 시작은 성전 건축이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또 한번의 기회를 주시는 것은 성전을 재건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전은 무엇입니까 ?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성전 재건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성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새로운 삶의 목적은 예배 입니다.
예배가 우리의 삶의 목적이요, 목표 입니다.
예배를 잘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잘 드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중요한 예배는
① 주일예배 입니다.
② 저녁예배 입니다.
먼 곳에 계시는 분들은 교회에 오시기 힘들면 밤예배는 가까운 교회에 가서 드리시기 바랍니다.
수요일에도 가까운 곳에 가서 저녁예배를 드리세요.
한국교회사를 보면 대부분의 큰 역사는 저녁예배에 일어났읍니다.
저녁예배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③ 새벽기도회 입니다.
하나님은 새벽에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의 예배의 꽃은 찬양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고 말씀하셨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이유, 우리를 택하시고 구속하신 이유는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려 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찬송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죽었나 살았나는 찬송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읍니다.
예배의 삶이 회복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성전건축의 삶을 사는 자들에게 주시는 복들
하나님은 성전을 건축하는 삶을 살러 가는 자들에게 보을 주셨읍니다.
예배 회복의 새로운 삶을 사는 자들에게도 복을 주십니다.
그러면 성전건축의 삶, 즉 예배를 드리는 자들에게 주시는 복들은 무엇일까요 ?
1)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v. 3)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올라가서 성전을 건축하라고 하는 고레스 왕은 그 이야기를 하면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했읍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러 올라가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과 함께 하시지, 놀러가는 자들과 함께 하시겠읍니까 ?
복 중의 최고의 복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예배를 회복하셔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2) 주위 모든 것이 나를 돕는 것들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라고 하면서, 고레스 왕은 자기 백성들에게 이런 명을 내립니다.
“무릇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우거하였든지 그곳 사람들이 마땅이 은과 금과 기타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예물을 즐거이 드릴지니라 하였더라라.”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려먹었던 바벨론 사람들보고 돌아갈 때 지금까지 일한 품삯을 주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 입니다.
① 성전을 건축하기 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잡아가 종으로 부려먹었읍니다.
그때에는 품삯을 하나도 주지 않았읍니다.
노예로 착취를 했읍니다.
② 그런데 성전을 건축하러 간다고하자, 그들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에게는 내 주위에 있는 모든 것과 사람들이 나를 위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기 전에는 모든 것이 나를 대적하는 것(against)이였는데, 예배하는 자가 되자 나를 위하는 것(for)이 되었읍니다.
예배를 회복하여 이런 복들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에스라 1장 1절 – 2장 70절
저는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 ‘국사’나 ‘세계사’를 아주 싫어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원래 ‘무엇을 외워야 하는 공부’라면 질색이었는데, ‘역사’가 바로 그 대표적인 과목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고등학교에서 윤종락 국사 선생님을 만나게 되면서 정반대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선생님께서는 역사란 것이 무슨 사건의 ‘명칭’과 ‘연도’를 무작정 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원인’이나 ‘의미’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학문인 것을 알게 해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역사를 보는 눈이 열리게 되자 그전까지 그렇게 싫어했던 국사나 세계사가 순식간에 가장 재미있는 과목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역사를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 할 때에 반드시 동반되는 것이 바로 ‘사관’(史觀)입니다.
똑같은 역사적 사실을 두고서도 어떤 사관을 가지고 그것을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크게 차이가 나기 마련입니다.
간단히 예를 들면, ‘6.25 전쟁’이라는 한 가지 사건에 대해서도 상식적인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당연히 ‘동족상잔의 침략전쟁’이라고 규정짓지만, 종북좌파적 사상을 가진 사람은 무슨 ‘민족 통일을 위한 전쟁’ 따위로 미화시키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른 사관’은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 요소인데, 참된 기독신자에게만 있는 아주 특별한 사관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속사적 사관’입니다.
이것은 ‘세계사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도도히 흐르고 있다.’는 영적 안목을 가지고서 역사를 해석하는 것인데, 바로 이 ‘구속사적 사관’이 있어야 ‘분벽에 쓰인 역사의 벽보’를 읽고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어제 우리는 ‘광복 70주년’을 맞이했었습니다.
‘8.15 광복’은 두말할 필요 없이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정말 기쁘고도 소중한 날이지만, 이 날을 ‘구속사적 사관’을 통해서 기억하는 기독신자에게 있어서는 더더욱 뜻깊은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저는 바벨론 땅에서 극적인 해방의 날을 맞이했던 유다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은’ 기독신자가 이 ‘8.15 광복’을 통해 반드시 깨달아야 할 두 가지 역사적 진실을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8.15 광복’은 말살 직전에 있던 대한민국의 기독교를 기적적으로 살려 주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산물이었습니다.
본문 1장 1절부터 5절에 기록하기를 “1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2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3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 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4무릇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우거하였든지 그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기타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예물을 즐거이 드릴지니라 하였더라 5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무릇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을 건축코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라고 했습니다.
에스라서는 “바사 왕 고레스”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린” 사건 즉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와 있던 유다인들을 해방시켜 준 저 유명한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시작됩니다.
그것은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실로 기적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의 조국을 멸망시켰던 바벨론 제국이 망하고 바사 제국이 근동 지방의 최강자로 새로이 등장했지만, 유다인 포로들에게 있어서는 그저 자기네들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뿐 그들의 처지에는 아무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뜻밖에 바사 제국의 첫 왕으로 등극한 고레스가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자기를 명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고 말씀하셨다고 하면서, 그 성전 재건을 추진하기 위해서 유다인들을 해방시키는 칙령을 선포한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고레스 왕은 그냥 해방만 시켜준 것이 아니라 유다인들의 귀국과 성전 재건을 위한 비용까지 조달해 주었습니다.
4절에 보면 그는 유다인들의 귀국과 성전 재건을 위하여 “은과 금과 기타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주고” 또한 새 성전에 드릴 “예물”들까지 “그곳 사람들” 즉 주변 이웃들로 하여금 유다인들에게 도와줄 것을 명했습니다.
이어지는 7절에 보면 고레스 왕 자신도 “여호와의 전 기명” 즉 옛날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킬 때 탈취해 왔던 성전의 기명들을 그 귀환하는 유다인들에게 다 돌려주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실로 유다인에게는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랍고도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벨론 제국에서 포로 생활하던 내내, 그리고 바사 제국이 들어서고 새 왕 고레스가 등극한 이후 역시 자기네들이 이처럼 ‘이방 임금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서 해방을 얻고 고국으로 돌아가게 될 줄이야 어디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조금 전까지 자기 민족 전체의 생사여탈권을 한 손에 쥐고 마음대로 주무르던 전제군주가 하루아침에 180도로 싹 바뀌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런 기적적인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1절 하반절에 나오는 대로 오직 “여호와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상 고레스로서는 나름대로 정치적인 계산이 다분히 포함된 결정이었습니다.
비록 그가 근동지방의 새로운 주인이 되기는 했지만, 자기 통치 아래에 들어온 여러 민족과 국가의 민심을 옛 주인이었던 바벨론 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돌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선 각 민족의 자치권이나 종교를 인정해 줌으로써 지지기반을 넓히려 했는데, 유다 민족의 해방령 역시 그런 정책의 일환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레스 왕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그런 일련의 판단과 결정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그렇게 감동시키셨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일 뿐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유다인들이 바로 그런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정확하게 깨달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본문 5절에 보면 그들은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민족이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에 유다인들은 고레스라는 한 인간의 결정에 대하여 감복하고 감사하면서 고국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이런 기적적인 민족 구원이 일어나게 해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성령의 감동을 통해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 결과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을 건축코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즉 민족의 해방을 단순히 정치적인 경사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민족이 ‘여호와 유일신앙’을 완전히 회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의 기회라는 사실 또한 정확하게 인식했던 것이었습니다.
‘8.15 광복’ 역시 우리 기독신자에게 있어서는 단지 ‘일제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정치적 사건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일제의 무서운 박해와 탄압에 의하여 말살 직전에 처해 있던 우리나라의 기독교를 극적으로 살려 주신 하나님의 기적적인 구원 역사였습니다.
1910년에 강제적인 한일합방이 일어난 후 한국교회는 민족이 당한 수난 현장의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교회가 바로 일제에 항거하는 민족정신과 애국운동 및 더 나아가서 독립투쟁의 주요 산실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일제는 배일사상(排日思想)이 강한 기독교 지도자들을 미리 제거하기 위하여 소위 ‘데라우치 총독 암살 시도’라는 모함을 씌워서 목사, 장로, 집사 등 500여 명을 체포한 후에 그 중 105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는데, 그것이 1911년의 ‘105인 사건’이었습니다.
1919년에 일어난 기미년독립운동 때에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33인 중에 16명이 기독교인이었고, 그 결과 저 악명 높은 ‘제암리교회 학살 사건’ 등을 위시한 대대적인 탄압이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한국 교회에 대한 가장 극심한 핍박은 바로 1930년 무렵부터 1945년까지 계속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인하여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일제는 이미 1931년부터 군국주의를 전면적으로 내걸면서 ‘천황의 신격화’와 함께 소위 ‘황국신민화’ 정책을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일환으로 강요된 ‘신사참배’는 일본의 고유 종교였던 ‘신도’에다가 ‘천황을 현인신(現人神)으로 섬기는 신앙’을 혼합한 것으로서, 비록 ‘국민의례’라는 이름으로 위장되기는 했지만 실제적으로는 일제의 자체적 정신무장을 위해 만들어진 명실상부한 ‘국교’(國敎)였습니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교회에 직접 강요할 경우 반대가 거셀 것을 예상하고서 일단 학교에서부터 서서히 시행해 나가려 했습니다.
그 결과 마포삼렬 선교사 계통의 기독교 학교는 학교가 폐쇄당하더라도 불응하겠다는 방침을 세웠고, 반면에 언더우드 선교사 계열은 학교를 살리기 위해서 신사참배에 동조하기로 합니다.
결국 교회 역시 신사참배의 압력을 받게 되었는데, 감리교에서는 1936년에 조선총독부의 초청을 받아 찾아간 양주삼 총리사가 ‘신사참배는 국민의 의무’라고 일찌감치 자진 굴복했습니다.
천주교 역시 1938년에 노기남 주교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황실 존경과 애국 용사 존경을 나타내는 신사참배는 문화인으로서 애국심의 발로’라는 칙령을 받아서 전국 천주교에 통지를 보내었습니다.
장로교는 1931년 9월의 경남노회에서 주기철 목사가 주동이 되어 신사참배를 반대하기로 결정을 내려놓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러다가 1938년 제27회 장로교 총회에서 조선총독부의 압력과 사전 공작에 의하여 결국 “신사는 종교가 아니요 기독교 진리에 위배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애국적 국가 의식임을 자각하며, 또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이행하고...”라는 ‘신사참배 결의 및 성명서 발표’의 건을 총회장 홍택기 목사가 ‘가’(可)만 묻고 ‘부’(不)는 묻지 않는 편법으로 통과시키게 됩니다.
하지만 참된 기독신자에게 있어서 신사참배란 십계명 제1계명과 제2계명을 어기는 명백한 배교행위로서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문제였고, 그 결과 평북의 이기선 목사, 평양의 주기철 목사, 경남의 한상동 목사, 전남의 손양원 목사, 만주의 한부선 선교사를 중심으로 일사각오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물론 그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무자비하고 가혹했습니다.
일제는 신사참배 반대를 ‘국체 변혁’과 ‘천황에 대한 반역’으로 단죄하면서 실로 살인마적인 박해를 가해 왔던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을 맞이하게 될 때까지 2백여 개의 교회가 문을 닫았고 2천여 명의 신자들이 투옥되었으며 그 중에서 50여 명이 순교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일제는 1945년 8월 17일 자정을 기해 신사참배를 반대한 모든 교회 지도자들과 동조자들을 모조리 몰살시키라는 지령까지 내려놓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실로 이 조국 땅에 ‘참된 기독교’의 ‘남은 그루터기’마저 문자 그대로 풍전등화에 처해 있었으며,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의 절망 상태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일제가 우리 한국교회를 말살하려고 계획해 놓았던 날 바로 이틀 전 8월 15일에 극적인 ‘해방의 날’을 맞이하게 해 주셨습니다.
정말이지 그것은 바벨론 땅에 포로로 잡혀 있던 유다인들에게 전해졌던 ‘고레스 왕의 칙령’에 버금가는 ‘놀랍고도 감격적인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8.15 광복’은 미국이 일제를 항복시키고 우리나라를 해방시켜 준 ‘정치적 사건’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살당하기 직전에 있던 조국의 교회와 성도를 살려 주신 ‘큰 구원의 역사’인 것을 깨닫고 진심으로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8.15 광복’은 자유주의 신학으로부터 정통 개혁주의 신학을 지켜 낸 ‘교회의 성별 운동’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2장 59절 이하 63절에 “59델멜라와 델하르사와 그룹과 앗단과 임멜에서 올라온 자가 있으나 그 종족과 보계가 이스라엘에 속하였는지는 증거할 수 없으니 60저희는 들라야 자손과 도비야 자손과 느고다 자손이라 도합이 육백 오십 이명이요 61제사장 중에는 하바야 자손과 학고스 자손과 바르실래 자손이니 바르실래는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의 딸 중에 하나로 아내를 삼고 바르실래의 이름으로 이름한 자라 62이 사람들이 보계 중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도 얻지 못한 고로 저희를 부정하게 여겨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 하고 63방백이 저희에게 명하여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말라 하였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고레스의 해방 칙령 이후 유다인들은 총 3차에 걸쳐서 귀국하게 되는데 이 에스라 2장에는 그 중에 스룹바벨의 인도 하에 제1차로 예루살렘에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 그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록할 수는 없었고 그 대신에 각 종족을 따라서 대표자의 이름과 그에 속한 자손들의 숫자를 소계로 기록해 두었는데, 본문 64절에서 총합계 4만2천3백6십 명이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 숫자는 당시의 관습대로 여자와 어린이들을 포함시키지 않은 것입니다.
그 귀환한 유다인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역시 제사장들이었는데 이 2장에 나오는 숫자를 다 합쳐 보면 총 4,289명으로서 전체 숫자의 약 10분의 1에 해당됩니다.
귀환한 레위인들의 총합계가 341명에 불과했던 것과 비교해 볼 때, 역시 제사장들이 조국과 예루살렘 성전재건에 가장 열심을 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고국으로 함께 돌아온 유다인들 중에서 그 종족과 보계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는데, 그것이 방금 읽은 본문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59절에 보면 그들은 “델멜라와 델하르사와 그룹과 앗단과 임멜”에서 올라온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지역은 포로로 잡혀 갔던 유다인들이 거하던 바벨론 지역의 이름들인데, 특히 이 지역 출신 유다인들의 족보가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이 바벨론에 70년을 살 동안 주변 바벨론 사람들과 통혼을 하게 됨으로써 그 혈통을 순수하게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숫자가 총 652명이 되었는데, 비록 육신적으로 혈통이 좀 섞였다 하더라도 이들이 바벨론을 떠나 예루살렘까지 함께 돌아왔다는 사실만 보아도 영적 정신적으로는 분명한 유다인이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되는 단 한 가지 예외가 있었는데 바로 61절에 기록된 사실입니다.
그 귀환한 유다인들 중에서 스스로 아론의 자손, 즉 “제사장”의 가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서 “하바야, 학고소, 바르실래 자손”들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62절에 이어지는 대로 이 사람들은 “보계 중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도 얻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보계’란 ‘문서화된 족보’를 가리킵니다.
즉 그들 스스로는 제사장 가문이라고 주장했지만 그것을 확실하게 증명해 줄 문서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조금 전에 똑같이 ‘종족과 보계를 확인할 수 없는’ “들라야 자손과 도비야 자손과 느고다 자손”에 대해서는 아무 문제도 삼지 않았던 유다인들이 이 ‘제사장 가문’에 대해서만큼은 아주 엄격하게 처리했습니다.
이어지는 62절 하반절에 나오는 대로 그들을 “부정(不淨)하게 여겨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63절에 이어지는 대로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못하게” 즉 우림과 둠밈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을 수 있는 대제사장이 임명되어서 그들의 신분을 확인해 줄 때까지는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제물을 먹지 못하게 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100퍼센트 확실한 진짜 제사장이 아닐 때에는 결코 제사장의 직분을 섬기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던 것입니다.
이처럼 유다인들은 ‘제사장직의 정통성’만큼은 철저하고 순수하게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도 조국 재건과 성전 건축에 뜻과 힘을 모으려고 돌아온 사람들이니 그런 사소한 문제는 화합의 정신으로 대충 덮어 주고 지나가자.’라는 식으로 얼렁뚱땅 넘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로 베풀어 주신 소중한 기회이니만큼 더욱 유다 백성의 ‘영적 지도자’들부터가 철두철미하게 검증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새롭게 세워질 예루살렘 성전에서 섬길 제사장 중에는 단 한 명의 ‘부정한 제사장’이라도 섞여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 귀환한 유다인들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인 원칙이었던 것입니다.
‘8.15 광복’ 이후에 한국교회 안에서도 바로 그런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조국의 ‘무너진 제단을 수축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소중한 기회를 통해 진정 ‘교회 재건’을 올바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일단 ‘부정한 제사장’을 가려내는 일이 선결되어야 마땅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사참배에 찬성하고 가담했던 목사’들의 회개와 자숙이었습니다.
신사참배에 끝까지 반대하다가 투옥된 70여 명의 교역자들 중에 주기철 목사를 위시한 50여 명은 순교를 당했고 나머지 20여 명은 광복과 함께 출옥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주기철 목사가 시무하던 산정현교회에서 약 두 달에 걸쳐 ‘한국교회 재건 기본원칙’을 마련하고 1945년 9월 20일에 이를 발표했습니다.
그것은 “신사참배를 한 목사와 장로는 권징의 길을 취하여 통과한 후에 교역에 나아갈 것”과 “권징은 자체 혹은 자숙의 방법으로 하되 목사는 최소한 2개월 간 휴직하여 강단에 서지 말고 통회 자복할 것” 등을 골자로 한 다섯 가지 원칙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출옥 성도들을 중심으로 한 교회 재건 운동에 거세게 반발한 무리가 일어났는데 바로 신사참배 가결 당시 총회장이었던 홍택기 목사와 그의 추종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해 고생한 사람이나 그 고생은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교회를 버리고 외국에서 도피 생활을 한 사람의 수고보다 일제의 강압 속에서 교회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없이 굴복한 사람들이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나섰습니다.
거기에다 김재준 목사를 위시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투옥된 자들은 그들의 출옥과 함께 그들 자신의 신성성과 양심에 충실했다는 정신성을 과시하여 출옥성자로 자천하면서, 그 보수로 정신적 특권인 자고, 자만, 독선을 선포하고 신경과민적인 부정(不淨) 공포증에 걸려 스스로 세상과 절연시켰다.”라는 혹평까지 퍼부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한국 장로교회가 분열되는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일제 탄압 하에서도 ‘신앙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내놓았던 목사들은 광복 이후에 올바른 교회 재건을 위해서 신사참배에 가담한 죄에 대한 회개가 선결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일제의 압력에 굴복하여 매국적인 어용종교인으로 전락했을 뿐 아니라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하는 ‘자유주의 신학’까지 일제의 비호 하에 버젓이 가르쳤던 목사들은 오히려 투옥성도들을 ‘부정 공포증에 걸린 독선주의자’로 몰아붙였습니다.
그러니 이 둘이 서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은 결코 ‘출옥성도’ 쪽에서 ‘장로교를 분열시킨’ 일이 아니라, 오로지 ‘순수한 신앙을 지키려는 소수의 목사’들이 ‘다수의 부정한 제사장’들에 의해 ‘쫓겨난’ 일이었습니다.
‘8.15 광복’은 이처럼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와 있던 이단’이 ‘개혁주의 정통 신앙’에 의하여 그 정체가 백일하에 드러나게 만든 ‘교회의 성별 운동’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폐허가 된 조국에 돌아온 직후 그 모든 상황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중에서도 ‘보계 중에 이름을 찾을 수 없는 제사장’을 부정하게 여겨 제사장의 직무를 행하지 못하게 했던 유다인들처럼, 오늘날 그 ‘출옥성도’들의 정통성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우리 교단과 고려신학교를 통해 이 순교자적 신앙을 끝까지 순수하게 함께 보전해 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이처럼 ‘8.15 광복’은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과 조국의 기독교를 위해 베풀어 주신 ‘기적적인 구원 역사’입니다.
실로 이스라엘의 ‘출애굽’이나 ‘바벨론 해방’에 조금도 못지않은 엄청난 구원을 우리 조국과 교회는 실제로 체험한 것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지금 이처럼 신앙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게 된 오늘날의 우리는 이런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생각할 때마다 정말 뜨겁게 감사하며 영광을 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8.15 광복’은 조국 교회 안에서 ‘알곡’과 ‘가라지’가 명백히 나누어지는 ‘성별 운동’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장로교가 분열된 것을 두고 회개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목사들이 꽤 많이 있지만 그들은 역사의 핵심을 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들입니다.
‘역사의 벽보’를 정확히 읽을 줄 아는 목사와 신자라면 장로교가 분열될 수밖에 없게 만든 ‘우상숭배 행위’와 ‘이단 신학’이야말로 진짜로 회개해야 할 죄이며 오히려 그런 배교자와 철저히 나누어지는 ‘성별 운동’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직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아’ ‘구속사적 사관’을 가지고 역사를 판단하고 이해할 줄 아는 성도만이 ‘8.15 광복’을 통해 이런 ‘진실’을 깨닫고 이런 ‘지혜’를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광복 70주년’은 동시에 ‘분단 70주년’이기도 합니다.
저 북녘 땅에도 ‘하나님의 기적적인 구원 역사’와 ‘신앙의 성별 운동’이 정말 시급하지 않습니까?
북한 동포에게는 무슨 ‘연방제 통일’이 아니라 ‘공산독재로부터의 해방’이 필요할 뿐입니다.
김일성으로부터 3대 째 이어지고 있는 ‘독재자 우상화’를 지지하는 어용 기독교와 종북좌파 기독교에 의하여 혼란을 겪고 있을 북한 동포들에게 ‘구원 얻을 수 있는 참된 신앙’이 하루빨리 전파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은’ 신앙의 눈으로 ‘8.15 광복’이라는 ‘과거’ 역사가 주는 교훈을 똑바로 깨달음으로써 조국과 민족의 ‘미래’ 역사를 더 큰 기적과 축복으로 선도해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라
스 1:1- 11 / 문기태목사(창원침례교회)
세계의 역사를 어느 관점으로 보느냐? 하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역사는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사실 역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인간의 역사를 공부하지만, 사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영웅들을 중심으로 역사를 기록하지만, 역사는 하나님에 의해서 움직이고,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사람이 계획을 할지라도, 그 계획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역사는 하나님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감동하셔서 일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일들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 과정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순종하여 역사의 중심에 서서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는 것이 됩니다.
오늘 함께 읽은 에스라 말씀의 배경은 지금부터 약 2500년 전 이야기입니다. 고레스라는 왕이 일어나 강대국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페르시아 제국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앗시리아와 바벨론의 왕들은 유대지역을 정복하고 성전, 성벽, 도시 등을 철저히 파괴하였습니다. 그리고 민족 말살정책을 펼쳤습니다. 유대민족을 아예 없애려고 강제 이주를 시켜 바벨론에 흩어버리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렇게 7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대부분의 포로 1세대는 죽었고 아직 살아남은 노인들도 하나님의 도성 시온성과 예루살렘 성전은 기억 속에 아련히 가물가물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레스 왕이 정복전쟁을 끝내자마자 온 나라에 모두가 놀랄만한 깜짝 놀랄 명령을 공포합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다. 그리고 내게 명령하기를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으니 너희 중에 하나님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고 유대인들이 돌아가 성전을 건축하도록 필요한 은 금과 여러 물건, 그리고 짐승으로 도와 주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지니라.' 고레스 왕은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놀라운 명령을 온 나라에 내렸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귀환행렬이 줄줄이 이어졌습니다. 마치 출 애굽할 때 히브리인들이 모세의 리더십 아래 긴 행렬을 이루며 가나안 땅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출 바벨론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유대인들이 꿈에도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와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고 무너진 성벽을 재건합니다. 모두가 이제는 이스라엘과 유대나라는 완전히 망해서 다시 일어설 수 없고 지구상에서 히브리인은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역사를 바꾸시고자 관여하셨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새로운 역사를 이루시는 과정에 사람들을 사용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움직이시는 것이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습니다. 그 외 마음에 감동을 받고 많은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주위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역시 마음에 감동을 받아 은 그릇과 금과 물품들과 짐승들을 예물로 기쁘게 유대인들을 통해 성전을 건축하는데 쓰도록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오늘도 온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역사를 이루십니다. 오늘도 동일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순종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감동을 받아도 소멸하고 하나님의 역사에 소외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려면 하나님께서 마음을 감동시키실 때 즉시 순종해야 합니다. 적극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는 자가 되고 하나님께 존귀하게 여김을 받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온갖 복과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1. 감동에 순종하여 역사를 시작하는 사람이 되자(1-4).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입을 통해 예언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고레스 왕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고레스 왕은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에 순종하여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유대인들로 하여금 고국으로 돌아가 성과 성전을 재건하도록 "너희 중에 하나님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고레스는 유대인도 아니었습니다. 평상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도 아닙니다. 율법이나 유대인의 역사를 잘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에게 감동을 주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가 유대인들과 유대 땅을 다스리는 큰 나라의 왕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사용하셨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라도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으십니다. 우리 생각에 '저 사람은 하나님을 잘 모르는데 하나님이 감동시키셔도 꿈쩍도 안할거야.' 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도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도 전혀 생각하지 못한 사람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우리 속담에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시작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시작을 못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과 성전의 재건의 시작은 고레스로부터였습니다. 고레스가 순종하여 성전 재건을 명령하였기에 역사가 바뀌고 굉장한 일이 완성된 것입니다. 고레스가 처음 하나님께 그 명령을 들었을 때 망설였을지 모릅니다. 신하들에게 말했을 때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강력하게 임하자 고레스는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고레스는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반드시 성전재건이 실현되도록 꼼꼼하게 여러 명령을 함께 내립니다.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시작하실 때 가장 적합한 사람을 찾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그의 마음을 감동시키십니다. 그럴 때 주위를 돌아보면 아무도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제 시작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불안해집니다.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시작하는 사람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을 하나님이 내게 가장 먼저 말씀하시고 나로 하여금 시작하라고 하시는 것은 큰 영광입니다. 나를 그만큼 신뢰한다는 사인입니다. 반드시 누군가가 시작을 해야 이루게 되고 시작을 하지 않으면 아무런 결과도 없게 됩니다. 가장 먼저 앞장을 서는 것은 외롭습니다. 위험 부담도 큽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하시고 우리 마음에 감동을 주시면 반드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이 큰 일이든지, 작은 일이든지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어려운 일이든지, 쉬운 일이든지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중요하게 보이는 일이든지, 시시하게 보이는 일이든지 시작해야 합니다.
34년 전에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창원에 침례교회를 개척하도록 감동을 주셨습니다. 당시에 창원에 침례교회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교회를 처음 시작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것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두려움도 컸습니다. 게다가 저는 당시에 서른 살 밖에 안 된 청년이었습니다. 경험도 없고 부족한 것이 참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순종하고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많은 이들을 보내주셔서 동역하게 되었습니다. 순종하니까 하나님께서 다 책임지셨습니다. 저는 나같이 부족한 사람을 하나님이 부르시고 감동을 주셔서 이렇게 멋진 교회를 시작하게 하셨다는 것이 꿈만 같습니다. 만약 그때 제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하나님이 주신 감동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 교회는 없습니다. 그리고 저도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아찔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무언가를 시작하려고 하실 때, 감동을 주실 때 망설이지 말고, 계산하지 말고 즉시 순종하는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2. 감동에 순종하여 역사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자(5).
성전 재건의 명령이 떨어지자 하나님께 마음에 감동을 받은 백성들이 다 일어났습니다. 가문의 족장들이 일어났습니다. 제사장들이 일어났습니다. 레위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그 외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다 일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 일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70년 동안 바벨론에 이주해 살면서 대부분 바벨론이 정 들었습니다. 바벨론에 집도 짓고 바벨론에서 사업도 안정이 되고 바벨론에 친구도 오랫동안 사귀어 바벨론이 살기 편하고 좋았습니다. 그리고 대다수는 바벨론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예루살렘은 말로만 들었고 낯설었습니다. 돌아간다면 집도, 사업도, 친구도 다 버리고 가야 합니다. 게다가 그곳은 다 무너져 내리고 사람도 별로 살지 않는 곳입니다. 돌아간다고 무엇 하나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떤 고생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고생과 희생과 도전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 뻔합니다.
그러니 유대인이 아닌 척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일단 다른 사람들이 돌아가서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자도 관망하는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실제 귀환한 사람들의 숫자는 사만 이천 삼백 육십 명이었습니다. 포로로 끌려간 사람에 비해 턱없이 적은 수가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일보다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고자 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안위보다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더 앞세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랬기에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의 중심에 들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중심에서 귀하게 쓰임 받게 된 것입니다. 성전을 재건하고 나라를 재건하는 귀하고 가치 있는 일에 헌신하고 하늘의 복과 상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에 사람들을 초청하십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시고 헌신하도록 초청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에 동참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뜨겁게 만드십니다. 세상에서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역사에 무관심합니다. 오로지 자신의 안위와 소아적 욕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이 그렇게 좀더 많이 갖고, 좀더 편하게 지내고, 시시한 것을 가지고 아웅다웅 하다가 끝나고 만다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좀 고생이 되어도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여 좀 희생을 하더라도 하나님이 하시는 크고 놀라운 일을 경험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귀하게 쓰임 받다가 하나님 앞에 가서 어마 무시한 상을 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마음에 감동을 받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힘든 일에 헌신하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 '하나님이 나에게 어려운 희생하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 미리 염려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감동을 주시면 참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감동을 주시지 않습니다. 감동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 인정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역사에 초대받고 있는 것입니다. 계산하지 말고 순종하기 바랍니다. 망설이지 말고 순종하기 바랍니다. 마음이 감동을 받아 뜨거워 질 때 순종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생생하게 경험합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심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능력을 행하심을 체험합니다. 어마어마한 기도 응답을 받습니다. 그리고 감동을 받은 대로 순종하면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게 되고 역사의 주인공으로 우뚝 서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감동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역사에 소외되지 않고 참여하는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을 뜨겁게 감동하실 때 즉시 순종하여 하나님이 새 역사를 만드실 때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3. 감동에 순종하여 역사에 협력하는 사람이 되자(6).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마음에 감동을 받은 수 많은 백성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주위에 있는 많은 이들이 자신들이 보물처럼 여기는 것들을 예물로 기쁘게 드렸습니다. 은 그릇도 금도 드렸습니다. 온갖 물품들과 가축도 드렸습니다. 자신들의 보물을 예물로 기쁘게 드렸습니다. 68절에 보면 어떤 족장들이 예루살렘 성전 터에 이르러 건축을 위해 예물을 기쁘게 드렸다고 말씀합니다. 수많은 이들이 감동에 순종하여 헌물을 들려 하나님의 역사에 협력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직접 헌신하여 참여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역사에 간접적으로 예물을 드려 협력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직접 헌신하여 몸으로 수고하는 이들이 더 귀하지만 물질로 간접 헌신하여 직접 수고하는 이들을 격려하고 응원하며 돕는 이들도 몹시 귀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물질로 간접 헌신하는 이들이 없으면 몸으로 직접 헌신하는 이들이 더 힘들게 일하게 됩니다. 그리고 직접 몸으로 헌신하면서 물질로 헌신하는 일을 병행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더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이들이 누구였을까요? 귀환하는 유대인들의 이웃에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이었을까요? 유대인들이었을까요? 이방인들도 많았지만 유대인들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결심하고 일어나 귀환에 동참하지는 않았지만 귀환하는 이들을 응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귀환하는 이들을 물질로 도와야 한다는 강한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꺼이 자신들이 보물로 여기는 은 금을 힘껏 드렸습니다. 물건을 나르는 가축도 드렸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사람들의 헌신을 기대하십니다. 동시에 몸의 헌신과 함께 물질의 헌신도 기대하십니다. 물질의 헌신을 하도록 마음을 뜨겁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헌신을 하도록 마음에 감동을 주실 때 주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물질을 드리고 싶은 마음을 주실 때 부담스러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질은 어차피 어떻게든 사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사용하지 않고 쌓아두면 다른 사람이 사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물질은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합니다. 낭비하지 않고 효과적으로 써야 합니다. 물질을 아껴 두었다가 꼭 필요한 일에 가장 적합하게 쓰면 빛이 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잘 쓰면 행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물질을 드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지고 확산되어가는데 사용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고귀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드리고 싶은 마음을 주시면 기쁘게 드리시기 바랍니다. 억지로는 드리지 마십시오. 인색한 마음이 들면 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 눈치 보면서 체면 때문에 마지 못해 드릴 필요는 없습니다. 처음 교회 나오는 분들은 여러분들의 마음에 하나님께 기쁘게 드리고 싶은 마음이 솟아날 때 까지 헌금을 하나도 안 해도 괜찮습니다. 그냥 부담 없이 편하게 나오시기 바랍니다.
지난 수요일 예배 전에 어느 집사님 부부가 상담을 요청해서 만났습니다. 지난 번에 세네갈 목사님들이 자체적으로 이야기 전도 세미나를 도시마다 순회하며 열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듣고 마음에 감동이 왔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제직회 때 재정보고를 들으며 130만원 밖에 아직 채워지지 않아서 나머지를 드리고 싶다고 150만원을 가져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그렇게 부유하신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부인집사님은 눈이 거의 실명이 되셔서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각막이식수수를 받으려고 천 만원을 모아 놓았는데 그 돈에서 150만원을 떼어 헌금으로 드리신다는 것입니다. 그 헌금을 받으며 제 마음에 만감이 교차하였습니다. '왜 하나님은 큰 부자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시지 않고 이렇게 꼭 필요한 돈을 헐어서 헌금하고 싶게 만드실까?' '이 분들이 믿음이 하나도 없이 우리 교회에 왔었는데 어느 사이에 믿음이 이렇게 크게 성장하고 있구나!' '이 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큰 일을 이루실 수도 있겠구나!' '세네갈에 이야기 전도세미나가 정말 필요했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렇게 피 같은 돈을 헌금하게 하여 그런 희생적인 헌신으로 미전도 종족의 영혼들을 구원하시고 싶어 하는구나!'
밝은 눈으로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는 일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열린 눈으로 보고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일이라는 확신이 들면 하나님의 역사에 열정적으로 참여합시다. 그리고 마음에 감동이 오면 주저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물질이라도 힘껏 드려서 하나님의 역사에 협력을 합시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이 이루시는 새 역사의 중심에 서는 사람이 됩시다.
고레스를 감동시킨 하나님
스 1:1-4 / 김승호목사
르네상스의 거목 미켈란젤로는 피에타 (주여 자비를 주소서)를 왕성하고 가죽으로 대리석 조각을 600만 번 문지르며 기도했다. 피에타는 베드로 성당에 소장된 작품이다. 1564년 89세로 생을 끝내며 하루도 쉬지않고 독신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위해 자신을 바친 종이다. “우리가 죽으면 저곳에서 영원히 안식할텐데 왜 이 땅에서 쉬어야 하는가” 하며 자신과 제자들을 격려하고 하나님께서도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이름을 어디에라도 안 남겼다면서 어느 작품에도 자신의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그는 30년간 작업으로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천지창조 벽화 최후의 심판을 불후의 명작으로 남겼다...
본문은 바벨론 포로귀환에 관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새번역 1절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왕위에 오른 첫 해이다 주께서는 예레미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다.. 고레스는 온 나라에 명령을 내리고 그것을 다음과 같이 조서로 써서 돌렸다..
고레스 왕의 귀한 조서는 70년 전에 예레미야가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렘25:1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넷째 해 곧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 원년에 유다의 모든 백성에 관한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11이 모든 땅이 폐허가 되어 놀랄일이 될 것이며 이 민족들은 칠십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고 예언한 말씀의 성취이다...
유다 백성이 포로로 잡혀가기 시작한 때가 유다 왕여호야김 3년 B.C. 605년이고, 첫 귀환이 고레스 2년 B.C. 537년이었다. 그 기간이 68년이다. 예레미야가 예언한 70년에 가깝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고레스의 외교 관용정책이 원이 되었다. 포로들에게 자신들의 땅에 가서 자신들의 신을 섬길 수 있게 했다.
완강한 바로의 마음도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시므로 그를 두손을 번쩍 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했습니다..
출 12:30-32 /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죽임을 당하지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30) 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에서 떠나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32) 너희가 말한 대로 너희 양과 너희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하며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됐을 때
왕상12:2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전에 솔로몬 왕의 얼굴을 피하여 애굽으로 도망하여 있었더니 이제 그 소문을 듣고 여전히 애굽에 있는 중에 3) 무리가 사람을 보내 그를 불렀더라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와서 르호보암에게 말하여 이르되 <노일들과 의논:좋은 말로 대답-영원히 왕의 종, 어린사람들과 의논:멍에를 더욱 무겁게 채찍-전갈채찍>15왕이 이같이 백성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 일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여호와께서 전에 실로 사람 아히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심이더라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하나님이 감동하시니까?
단 3:12이제 몇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워 바벨론 지방을 다스리게 하신 자이거늘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
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다니엘도 단 6:10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하나님이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켜 포로귀환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귀향 민에게 가서 성전을 건축하라고 말씀하십니다.
2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3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고레스는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성전을 건축하도록 명하셨다고 말합니다. 이 칙령의 일부는 역대하 36:23바사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본절에서는 성전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 본국 귀환 대상이 남 유다 사람들만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남 유다 보다 130년 먼저 앗수르에 의해 멸망한 야곱의 10지파로 구성된 북 왕국 이스라엘 백성들까지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성전 건축은 고레스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다윗도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말리고 아들 솔로몬에게 성전을 건축하게 하였습니다..
대상 28:2-3 / 이에 다윗 왕이 일어서서 이르되 나의 형제들 나의 백성들아 내 말을 들으라 나는 여호와의 언약궤 곧 우리 하나님의 발판을 봉헌할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어서 건축할 재료를 준비하였으나 3) 하나님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전쟁을 많이 한 사람이라 피를 많이 흘렸으니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6 내게 이르시기를네 아들 솔로몬 그가 내 성전을 건축하고 내 여러 뜰을 만들리니 이는 내가 그를 택하여 내 아들로 삼고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될 것임이라..
하나님은 성전은 감동을 입은 백성들로 하여금 성전을 짓도록 명령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귀향하는 백성에게 은혜를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4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그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 하였더라
고레스 왕은 이스라엘 백성이 귀국할 때 페르시아 사람들로 하여금 성의를 다하여 적극 도우라고 말합니다.
새번역 / 4잡혀 온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누구든지 귀국할 때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그 이웃에 사는 사람은 그를 도와주어라 은과 금과 세간과 가축을 주고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에 바칠 자원예물도 들려서 보내도록 하여라
고레스 왕이 이렇게 말한 의도는 주의 백성이 예루살렘에 가서 성전 건축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본향에 갈비용과 하나님의 성전 건축을 위해 필요한 물질을 일부 예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로를 감동시켜서 이스라엘백성들이 출애굽하면서 예배드릴 짐승과 모든 것을 함께 가져가도록 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출12:31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에서 떠나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32너희가 말한 대로 너희 양과 너희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35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36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역대상29:7하나님의 성전 공사를 위하여 금오천 달란트와 금 만 다릭 은 만 달란트와 놋 만 팔천 달란트와 철십만 달란트를 드리고 8보석을 가진 모든 사람은 게르손 사람 여히엘의 손에 맡겨 여호와의 성전 곳간에 드렸더라 9백성들은 자원하여 드렸으므로 기뻐하였으니 곧 그들이 성심으로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렸으므로 다윗왕도 심히 기뻐하니라
두로왕 히람도 성전 짓는데 협조하여 물질을 보냄
왕상 5:8이에 솔로몬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당신이 사람을 보내어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거니와 내 백향목 재목과 잣나무 재목에 대하여는 당신이 바라시는 대로 할지라 9내 종이 레바논에서 바다로 운반하겠고 내가 그것을 바다에서 뗏목으로 엮어 당신이 지정하는 곳으로 보내고 거기서 그것을 풀리니 당신은 받으시고 내 원을 이루어 나의 궁정을 위하여 음식물을 주소서 하고 10솔로몬의 모든 원대로 백향목 재목과 잣나무 재목을 주매 하나님께서는 귀향하는 백성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성전재물을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레스를 감동시키어 포로 된 자들을 귀환시켜 성전을 짓도록 하심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회복된 그릇들
스 1:1-11/ 유관지목사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다가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해방령 을 내려 고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 1절은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이렇게 시작됩니다.
바사는 페르시아를 한자로 적은 것입니다. 원래는 파사(波斯)인데 우리말로 옮겨오면서 바사가 되었습니다.
고레스는 일반 역사에서는 키루스 2세(Cyrus ⅡBC585?~BC529)라고 나옵니다.
고레스 원년은 기원전 538년입니다.
에스라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오고, 성전을 건축하고, 제사를 드리기 시작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에스라서의 주제를 두 글자로 말하면 ‘회복’입니다.
예전에 살던 곳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고향의 회복입니다.
성전을 다시 지었습니다. 성전의 회복입니다.
제사를 다시 드리게 되었습니다. 제사의 회복입니다.
율법을 다시 지키게 되었습니다. 율법의 회복입니다.
에스라는 율법에 밝은 사람입니다. 에스라서 7장 6절에 에스라를 소개하는 말이 나오는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 사람들과 결혼하는 것을 금했는데 이방 여인들과 결혼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방백들과 고관들, 지도층에서 이런 일들을 더 많이 했습니다. 에스라는 이 문제도 해결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정결의 회복, 또는 경건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스라서는 이와 같이 회복을 주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알렉산더 맥클라렌(Alexander Maclaren)이라는 성경학자는 에스라서 1장의 제목을 ‘회복의 전야’라고 붙였습니다.
고레스 왕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릇들을 돌려주었습니다.
이 그릇들은 원래 예루살렘 성전에 있었던 것들입니다. 제사 드릴 때 쓰던 것들입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그는 성전을 파괴하고 성전에 있는 그릇들을 다 약탈해서 바벨론에 있는 자기 신당에 두었습니다(왕하 24:13, 대하 36:7).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데 쓰이던 그릇들이 우상을 섬기는 신당에 있었습니다.
잘못된 자리에 있었습니다. 있어서는 안될 곳에 있었습니다.
이제 그 그릇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릇들이 있을 자리를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 창립 43주년을 감사하고 또 이웃들을 초청해서 함께 예배드리는 오늘은 이 사실을 생각하면서 ‘회복된 그릇들’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받기 원합니다.
고레스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건축하라’ 했을 때 바벨론 땅에 와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 전부가 ‘네’하고 일어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5절을 보세요.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
유대 백성의 일부, 마음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일어나 돌아왔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 땅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져서 ‘여기가 좋아요. 우리는 여기에서 계속해서 이렇게 살렵니다.’ 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곳에서 그렇게 살다가 사라졌습니다.
에스라, 느헤미야, 학개, 스가랴, 말라기, 그리고 신약성격은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있을 곳을 찾아와서, 회복된 그릇들이 되어서 예루살렘 재건에 힘쓴 사람들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초청에 응해 여기 오신 분들은 일어나 돌아온 사람들, 회복된 그릇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실 것입니다.
여러분을 통해 새 역사, 아름다운 역사가 이어지도록 할 것입니다.
에스라서 1장의 표면적인 주역은 고레스 왕입니다.
‘표면적인 주역’이라고 하는 것은 이면적인 주역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지요.
고레스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가게 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돌려보내면서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사람들 주위에 있는 주민들은 그들을 물질적으로 도와주시오’ 하는 명령을 내렸습니다.(4절)
고레스의 통치 밑에 있던 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은 그릇, 금, 물품, 짐승, 보물들을 내 주었습니다(5절).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일을 ‘제2의 출애굽’이라고 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처음 출애굽을 할 때에도 애굽 사람들에게 많은 물품을 받아가지고 나왔습니다. 출애굽기 12장 3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레스, 참 너그러운 왕입니다.
성경은 유대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지요.
유대인이 아닌 사람으로서, 다시 말하면 성경의 비주류로서 하나님께 가장 칭찬 받는 사람은 고레스입니다.
하나님은 고레스를 보고 ‘내 목자’라고 했습니다.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할 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사야서 44장 28절을 보세요. 평소에는 이럴 때 스크린을 보면 되는데 오늘은 성경을 열어보시기 바랍니다. 1023쪽입니다.
고레스에 대하여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 자니라
이어지는 45장 1절에서는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라고 했습니다.
놀라운 칭찬을 하고 있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앞과 뒤에서 야곱을 부르면서 야곱을 ‘나의 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44장 21절을 보세요.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아니하리라
45장 4절을 보세요.
내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자 이스라엘 곧 나를 위하여 네 이름을 불러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하나님은 자기가 택한 야곱, 이스라엘 백성을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나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라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울이지요. 바울 서신 곳곳에, 특히 시작부분에 ‘나는 하나님의 종이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종은 불의한 고난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이사야서 53장을 비롯해서 이사야서 여러 곳에 고난 받는 종의 노래가 나오지요.
종은 찔리고, 상하고, 징계 받고, 채찍에 맞고, 곤욕을 당하고, 심문을 당하고, 죽습니다.
종은 고요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칭호를 주셨다고 했는데 종이란 가장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칭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다가 ‘아, 김선일 형제야말로 하나님의 종이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김선일 형제의 억울하고 비극적인 죽음, 참 슬픈 일이지요.
기독교인들에게는 더 그렇습니다.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 그렇습니다.
중국에 이어 복음이 힘있게 전해질 곳은 이슬람권이고 김선일 형제는 그 선봉에 서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김선일 형제가 이슬람 선교에 얼마나 열망을 품고 있었는지 밝혀지고 있습니다.
외국어대 아랍어과를 졸업하고 통역대학원에 들어가려다가 언어와 문화를 함께 배우기 위해 이라크에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선일 형제는 가나 무역에 지원할 때 제출한 자기 소개서에 이렇게 적었다고 합니다.
약 5개월간 꾸준히 기도를 한 끝에 선교사에 대한 마음의 소원을 하나님께서 주셨고 좀 더 구체적인 비전을 위해서 계속 간구를 하고 묵상을 하던 중 중동선교에 대한 비전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구인가 생각을 하던 주에 예수 그리스도가 마음 속에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중동선교사의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스물네 살 난 이라크 자매와 결혼할 계획을 가지고 유월 초에 그 부모와 만날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자기 직업에 종사하면서 선교를 하는 사람들을 ‘전문인 선교사’라고 부르는데 감리교 신문인 「기독교 타임즈」는 이번 호에서 김선일 형제를 전문인 선교사라고 보아야 하지 않느냐고 쓰고 있습니다.
‘이런 김선일 형제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왜 데려가셨을까? 그것도 이와 같이 특별한 방법으로 데려 가셨을까?’ 참 궁금하지요.
교회 홈페이지 청년부 메뉴를 열어보면 어느 청년이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이었는데, 비전을 품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이렇게 데려가셨습니까? 저는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은 세계의 전 기독교인들의 간절한 기도를 안 들으셨나봅니다. 이런 식으로 응답하시니 말입니다.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부족한 저희들이 다 이해할 수 없지요.
이 청년은 김선일 형제가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았는데 하나님의 종은 고난을 받아야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영국의 토마스 목사가 우리 나라에 전도하려고 오고 싶어했습니다. 그는 통역의 신분으로 미국 상선 제네럴 셔먼 호를 타고 들어오다가 선원들과 평양 주민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대동강변에서 순교했습니다. 1866년 9월 3의 일이지요.
어느 교회 역사가는 토마스 목사님의 일을 적으면서 ‘토마스 목사님의 피가 흐른 대동강 물을 마시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를 믿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평양을 비롯해서 대동강 유역에 기독교가 유난히 왕성했던 일을 토마스 목사의 순교와 연결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일제 시대에 시베리아 지역에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교역자 두 분과 평신도 두 분이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하겠다고 배를 타고 가다가 그 배가 풍랑을 만나 파선을 하는 바람에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1918년의 10월 26일의 일이었고 이 네 분의 이름은 박노기(朴魯琦) 목사, 김희서(金希西) 교사, 전영태(全永泰) 총찰, 최응선(崔應善) 감로였습니다.
이들은 침례교인들인데 초기 침례교는 직분 이름이 다른 교파들과 달랐습니다. 교사는 전도사입니다.
시베리아 지역의 동포들이 이 소식을 듣고 ‘이 분들이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다가 희생을 당했다고 하는데 우리가 가만있을 수 없다. 우리 예수 열심히 믿자!’ 자발적인 전도운동이 일어나서 시베리아의 교회들이 크게 부흥했다고 합니다.
「침례교회사」는 이 일에 대해 ‘네 분 선교사가 시베리아에 왔었어도 이만큼 교회를 부흥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김선일 형제의 죽음을 통해 벌써 이슬람권 선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 뒤를 이어 이슬람권에 복음을 전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일이 우리 정부의 자세도 다르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김선일 형제는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이었기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억울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겪었습니다.
저는 김선일 형제의 희생에 대해서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 방법으로 그의 뜻을 이루며 영광을 받으시는 일이 많은 분이니까…’ 하는 선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고레스 왕에 대해 확인하려고 이사야서 44장을 열었다가 거기에서 종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고 한 걸음 더 나가는 깨달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 혹시 ‘김선일은 예수 잘 믿는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불행한 일을 당했느냐?’ 묻는 사람들이 있으면 잘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고레스 왕 이야기, 김선일 형제의 이야기가 길었습니다.
오늘은 새 홈페이지 봉헌, 포토 콘테스트 시상 순서가 있어서 설교가 좀 짧아야 합니다.
다시 그릇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있다가 바벨론 왕에 의해 바벨론으로 옮겨져 왔던 그릇들은 이제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를 그릇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 사도를 ‘나의 그릇’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을 보세요.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그릇입니다. 로마서 9장 21절에서 24절까지를 보세요.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 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우리는 그릇인데 보배를 담고 있는 그릇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을 보세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밖에 성경 여러 곳에서 우리는 그릇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릇들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까 여러 종류의 그릇이 나옵니다. 금 접시, 은 접시, 칼, -이 칼은 향로를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금 대접, 은 대접, 그 밖의 그릇, 우리는 그 가운데 하나의 그릇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20절에,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라는 말씀이 있지요.
하나님의 그릇들은 성전에 있어야 합니다.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그릇들입니다.
성전에 있는 그릇들은 디모데후서 2장 21절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그릇들이 되기 바랍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는 분들은 느부갓네살 왕이 섬기는 신들의 신당에 있는 그릇들입니다.
있지 말아야할 곳에 있는 그릇들입니다.
그런 그릇들은 하나님이 즐겨 쓰지 않습니다.
호세아서 8장 8절을 보면 ‘하나님을 배반하는 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은 이미 삼켜졌은즉 이제 여러 나라 가운데에 있는 것이 즐겨 쓰지 아니하는 그릇 같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그릇들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회복된 그릇들처럼 있을 자리를 회복하도록 도와야합니다.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서 교회가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공산정권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성전의 재산과 물품들을 모두 압수했습니다.
이때 러시아정교회 티콘 총대주교는 다른 것들은 내놓으면서도 성전의 그릇들은 내놓지 않았습니다.
성전의 그릇들이 가지고 있는 상징적인 의미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티콘 총대주교는 투옥되었고 그를 지지하던 성직자 수십 명이 처형당했습니다.
성전에 있는 그릇들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창립 43주년을 맞이한 목양교회는 그릇들을 많이 품고 있는 성전이 되기 위해 힘써야합니다.
11절을 보니까 그릇이 모두 오천사백 개라고 했습니다.
적어도 그 정도의 그릇을 품고 있는 성전이 되어야하지 않겠습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 그릇인 우리를 있을 자리에 있게 하신, 우리를 회복시켜준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더 많은 그릇들이 회복되도록 힘씁시다.
교회는 그릇들을 많이 품고 있는 성전이 되도록 힘씁시다.
이와 같은 일에 힘쓰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이 감동하시면
>성경본문|
스01장 01절 ~ 11절
……………………………………………………………………………………………………………………………………………
>주 제|
성령
……………………………………………………………………………………………………………………………………………
>출 처|
임덕순목사
>비 고|
>첨부파일|
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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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확대- ctrl + 마우스휠
고레스는 BC 539년에 천하의 대 제국인 바벨론을 정복한 페르샤의 대왕입니다. 그는 천하를 통일하자마자 옛날 바벨론이 예루살렘에서 잡아 온 이스라엘 포로들은 자기나라로 돌아가라고 해방명령을 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포로가 되기 훨씬 전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시켜서 이스라엘이 범죄 했기 때문에 바벨론에포로가 되어 끌려갈 것을 예언하게 하셨고, 그 바벨론도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70년 뒤에 다른 나라에 정복될 것이라고 예언하게 하셨습니다(렘25:11,12, 29:10). 이사야 선지자를 시켜서 예언하신 내용은 더욱 구체적이었습니다. 이사야는 BC700년경에 예언한 사람인데, 사44:28, 45:1-3에 보면, 이스라엘을 잡아간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이스라엘을 돌려보낼 사람은 고레스라고 이름까지 말씀하시면서 그 사람을 ‘나의 종’이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150년 뒤에나 있을 아직 태어나지도 아니한 사람의 이름까지 밝히면서 예언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신다는 것을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나라와 권세와 영광의 주관자이십니다. 오늘은 말씀은 여섯 마디로 되어 있습니다.
1. 감동을 받은 고레스 왕 (1-4, 7-11)
고레스는 어느 날, 내가 어떻게 이 거대한 제국의 황제가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이것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이 분명하고 거기에는 분명한 뜻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알아보니 옛날 바벨론 왕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하나님의 성전을 헐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고레스는 명령을 내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고국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재건하고 거기서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나와 나의 왕자들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명령하게 됩니다. 고레스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감동을 주어 깨닫게 하시자 그 감동에 순종하여 행동하는 장면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감동이란 마음에 부딛쳐 오는 깨달음이나 가슴을 두드리는 신령한 권면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마음이라는 것을 주셨고, 그 마음을 하나님이 움직여 당신의 뜻을 행하십니다. 사람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자기 마음을 자기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내 마음 나도 몰라’ 하는 노래도 있듯이 많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서 하지 않아야 할 일을 저질러 죄를 지으며 후회스런 길을 가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말씀을 깨닫게 하시거나 선한 생각을 넣어 주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감동하십니다. 그때 우리가 순종하여 따라가면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감동을 주실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즉시 순종합니까? 미적미적 하다가 받은 감동을 사라지게 합니까? 감동을 받지 않은 것처럼, 못들은 척, 못 느낀 척 합니까? 감동에 순종하는 사람은 생각지 않은 복을 누리고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되지만, 감동을 무시하고 소멸하는 사람은 힘든 삶을 살게 되고 멸망의 길을 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주시며 선한 길을 제시하시면, 민감하게 반응하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고레스 왕은 주시는 감동에 순종하였습니다.
2. 감동을 받은 이스라엘의 행동 (5 이하)
하나님은 고레스 왕의 마음만 감동하신 것이 아니라 포로 되어 바벨론에 끌려가서 70년을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도 감동하셨습니다.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고레스의 명령을 들은 바사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가 기쁨에 가득차서 열심으로 떠날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고국을 떠나온 지 70년이 넘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포로로 끌려왔지만 그때까지 노예나 포로로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벨론 왕은 폭넓은 정치인이어서, 포로로 끌려왔다가 총리가 된 다니엘에게서 보듯이 포로출신도 능력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6.25때 북에서 피난 온 분들 중에는 믿는 분들이 많았기 때문에 남한에 와서 자리를 잡고 성공한 사람들이 많은 것처럼, 유대인은 율법 지키려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다른 민족과는 달리 대부분 성공하였을 것이고, 이미 기반을 다 닦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닦아놓은 기반을 다 버리고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고생을 각오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들은 주시는 감동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선교의 명령은 누구나 다 받은 명령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하신 주님의 명령은 열두 제자에게만 하신 명령이 아닙니다. 주님을 구주로 믿어 구원을 받은 모든 신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 명령을 자기에게 하신 명령으로 알고 전도에 생명을 바칩니다. 오지에 선교사로 나가서 자기 평생을 터도 안 나는 일에 바칩니다. 그러나 누구는 평생을 가도 전도 한사람도 안하고 선교를 위해서 선교헌금 한 번도 힘써 하지 않고, 하는 체 하기만 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느끼는 사람과 감동을 받고도 받지 않은 체 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선교사가 된 사람들은 우리와 사람이 다른 것이 아니라 단지 반응이 다를 뿐입니다. 우리는 감동을 받고도 내 일이 아닌 것처럼 모른 체 했지만 그들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저요, 제가 가겠습니다. 제가 가서 그 사명을 감당하겠습니다.” 라고 나섰습니다. 그들이라고 그 일이 어려운 줄 모르겠습니까? 아무 연고도 없는 그 땅에 가서 사는 일이 어찌 부담스럽지 않고 두렵지 않겠으며 어찌 노후가 염려되지 않겠습니까? 어찌 자식 교육 망칠까 염려 되지 않겠습니까? 서울에 살면서도 남들 다 보내는 학원 한 두 개만 덜 보내도 자기 자식 망치는 것 같아서 강남으로 이사를 가려고 그렇게 머리를 싸매서 강남 집값 올려놓는데, 선교사라고 자기 자식 잘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없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오지로 눈물 짜는 자식들 앞세우고 간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을 모른 체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선교지는 대개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테러가 빈번합니다. 생명을 걸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 위험한 일에 누가 망설임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 일이 하나님의 일이요, 하나님이 그 마음에 감동을 주어 명하신 일이기에 순종하지 않으면 자기 생명의 주인 앞에서 도리가 아니기에 순종하여 나간 것입니다. 그게 성령의 감동에 반응하는 바른 태도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선교지에 나가지 못하면, 나 대신 나간 사람들 돕도록 선교헌금이나 좀 하자는 데도, 목사가 권면을 하고 성령이 마음에 감동을 주셔도 왜 우리는 좀처럼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주머니가 열리지 않습니까? 마음이 강퍅해서 그렇습니다. 성령이 감동을 주셔도 마음에 굳은살이 박혀서 전혀 감각이 없습니다. ‘말씀하려면 하시오, 나는 내 맘대로 살렵니다.’ 이렇게 고집 부립니다. 자기만 안하면 그래도 다행입니다. 누가 남보다 선교헌금 좀 많이 작정 하는 것 같으면 은근히 비웃으면서, “김 집사는 요즘 돈 좀 버나보지? 내년에 집 산다는 소문 있대?” 하면서 비웃는 사람이 되지는 않았습니까? 목사가 지난해보다 좀 더 낫게 하자, 작정서의 한 칸 더 올라가자고 하면, “목사님, 돈 얘기 작작하세요.” “지금 경제가 얼마나 어려운 줄이나 아세요? 목사님 돈 벌어 봤어요?” 라고 속으로 대꾸나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성령의 감동을 발로 차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바사에서 겨우 터전을 잡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터전 다 털어버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떠나려고 감동에 순종하여 일어섰습니다. 감동을 주시면 일어서야 합니다. 감동을 받을 줄 아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감동을 받은 바사의 사람들 (6)
하나님이 일찍부터 당신의 백성들을 되돌려 보내는데 쓰시려고 준비시킨 당신의 종 고레스 왕도 아니요, 당신이 선택하시고 번성케 하시고 훈련시킨 당신의 백성도 아닌 바사의 사람들도 하나님의 감동을 받았다는 말씀이 6절에 나옵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는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러 가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금 은 패물과 짐승들을 아낌없이 지원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땅을 움직여 지진이 발생하게도 하시고, 바다가 움직여 파도가 일어나게도 하시며, 바람이 움직여 태풍이 불게도 하시는 분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만드신 하나님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야 마음과 귀가 없는 땅을 움직이는 것보다 더 쉽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알고 섬긴다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늘 들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줄 모르고 감동을 받을 줄 모른다면 죽은 영혼이라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애굽 사람들이 그동안 자기의 종처럼 부려먹다가 자기들에게서 해방되어 떠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은금패물과 의복과 요구하는 것을 다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때도 이미 하나님이 그렇게 하리라고 예고하셨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일이 아닌데도,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을 지으러 간다니 그 선한 일에 나도 좀 보태야지 하는 마음에서 아마 귀한 보물들을 주었을 것입니다. 저도 시골에서 목회하면서 믿지 않는 이웃들이 교회의 일에 보태라고 돕는 것을 여러 번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감동시키시면 불신자도 움직입니다. 지금도 불신자들도 하나님이 감동을 주시면 순종합니다. 그런데 교회에는 열심히 출석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말씀에 반응하지 않는다면, 그게 과연 하나님의 백성일까요? 하나님이 과연 기뻐하실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감동을 주실 때 마음과 행동이 움직여야 합니다.
4. 우리는 어떻게 감동에 반응해야 합니까?
우리교회가 1982년도에 개척을 시작해서 오늘까지 매월 책임져 돕고 있는 도대리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에 93년도에 파송 받아 사역하던 김 명배 목사님이 70세가 되어서 금년으로 은퇴를 하게 되어서 후임자를 찾던 중에 지난 월요일에 김 목사님과 함께 지원자를 면접했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너무 반가운 사람을 만났습니다.(김성옥) 행13:22에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셨다는 말씀이 내 입에서 터져 나올 만큼, 그렇게 내 마음에 쏙 드는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도대리 교회에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분이 왜 그렇게 제 마음에 쏙 들었느냐, 그분이 저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형제와 함께 보일러장사를 하면서 교회를 섬기는데 장사가 잘 되어서 돈을 좀 벌고 있었답니다. 그때 교회에서 봉고차 운전 봉사를 하는데, 어느 날 목사님이 대형면허를 따놓아라 하시더랍니다. 그래서 왜 그러시냐 하니까 나중에 교회가 대형 버스를 살지 모르니까 미리 따두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하라시니까 자기 돈을 들여서 대형면허를 땄답니다. 어느 날 아들이 봉고차 함께 타고 가겠다고 나서더니 어젯밤에 내가 예수님 만났는데 예수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너는 나중에 커서 목사가 되라고 하셨다고 말하더랍니다. 하도 신기해서 목사님에게 가서 이야기하니까, “나는 그 애 태어날 때부터 그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니 그 아이는 목사님으로 키우세요.” 라고 하시더랍니다. 그래서 그렇게 키우려고 마음먹고 기르는데, 어느 날은 목사님이 또 말씀하기를 “집사님도 신학교에 가야겠어요, 신학교에 가세요.” 하셔서 더 묻지 않고 고등학교 졸업한지 14년 만에 다시 공부를 시작했답니다. 그리고 지금은 시골 교회에서 부목사로 유치, 유초등, 중고등, 청년, 어른 심방까지 모든 파트를 다 담당하고 있답니다. 그리고 보일러 기술이 있어서 이웃집 보일러 고쳐주는 것은 문제가 없답니다. 이분을 만나는 순간 ‘아 이분이다’ 했습니다. 이분이 왜 그렇게 제 맘에 들었을까가 궁금하지요?
이분이 훌륭한 점은 하나님의 종이 하라는 대로 순종했다는 점입니다. 그것도 재산 얼마를 바치라는 것이 아니라, 선교헌금 얼마씩 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생을 어떻게 살라는데도 생각할 것 없이, 서슴없이 순종했다는 그 점이 대단하다고 나는 보았습니다. 이 목사님의 경우 자기 교회 목사님이 시키는 일을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이라고 의심 없이 믿고 순종했다는 점이 내생각과 너무 같았습니다. 나는 과거나 지금이나 그렇게 믿는 사람입니다.
평신도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머리 싸매면서 고민 안 해도 쉽게 알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목사님께 물어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고, 찬송을 하고 설교를 듣다가 말씀에 따른 깨달음과 감동이 오는 대로 순종하고, 어떤 것은 직접 묻거나 가르치는 대로 따르는 것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거기에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밤새 머리 싸매고 고민 안 해도 하나님이 준비하고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한번 살아볼 생각 없으십니까? 그게 잘 사는 것입니다.
5. 성령의 감동은 기회가 왔다는 신호입니다.
어느 날 모세가 선 맞은편의 떨기나무에 불이 붙어서 활활 타고 있었습니다.
떨기나무란 물기하나 없는 마른 가시덤풀 뭉치입니다. 불만 닿으면 순간적으로 호르르 타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덤불에 불이 붙었으니 금새 불이 사그라지고 말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 불이 한참 동안이나 탔는데도 꺼지지 않고 계속 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희안했습니다. 모세가 보니 하도 희안해서 자세히 보려고 가까이 갔습니다. 그랬더니 그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라.” 하나님이 그를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
“40년 전에 네가 뭐랬지?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야, 나는 여기 왕궁에서 호강할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야 하는 사람이야, 나는 고난을 받더라도 저들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이야’ 그랬었지?
그런데 그때 너는 나를 의지하고 그 일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배운 학문과 무술과 왕궁에서 얻은 지위와 권력으로 해보려고 했었지, 그러다가 한번 실패하고는 포기하고 도망쳤지. 그리고 곧장 여기로 와서 지난 40년을 숨어 산거지, 그런데 그 40년이 평안 하더냐? 보람이 있었냐?”
하나님은 모세가 미디안에서 허송한 지난 40년을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시 애굽으로 가서 40년 전에 하려던 그 일을 마무리 하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나는 못합니다. 이미 실패한 것 아시지 않습니까? 나는 역부족입니다. 나 말고 다른 적임자를 찾아서 보내세요.”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 모세를 설득하며 감동을 주십니다. “너는 지난 40년처럼 계속 이렇게 살겠다는 거냐? 양심의 괴로움을 계속 놔두고 살겠다는 거냐? 계속해서 네 사명을 외면하고 이렇게 살겠다는 말이냐? 네가 할 일이 무엇인지 40년 전에 다 깨닫고도 40년 세월을 허송하고도 계속 이대로 살겠다는 것이냐? 어서 일어나서 네가 할 일을 해라” 이런 말씀입니다.
모세는 결국 일어나서 애굽으로 갔고, 결국 이스라엘을 해방시켰습니다.
성령이 감동하시는 때는 내가 다시 일어설 때가 되었다는 신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는 무엇을 하라고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다시 생각나게 하시는 사명이 무엇입니까? 여건이 안 되어서, 준비가 안 되어서, 하려고 하다가 그만 둔 일, 가슴 속에만 묻어 두고 지내온 그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 때문에 늘 마음이 괴로우면서도 그냥 덮어두고 살아온 사명이 무엇입니까? 성령이 감동하는 순간은 우리에게 다시 그것을 감당할 기회가 왔다는 뜻입니다. 감동주실 때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6. 성령의 감동에 순종하지 않으면 사단의 속삭임에 넘어갑니다.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성령에 충만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주님이시라고 설교하자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사람들이 가슴을 치면서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가정과 직장과 사회로부터 쫓겨났습니다. 교회에는 갈 데 올 데 없는 사람들이 날마다 늘어났습니다. 이것을 본 성도들의 마음에 성령의 감동이 일어났습니다. 각자 물건들을 가져와서 서로 나누어 쓰기 시작했습니다. 바나바라는 사람의 마음에 성령이 감동이 왔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자기는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아마 자기는 가족 전체가 예수를 믿게 되어서, 누구에게 쫓겨나거나 핍박을 받을 일이 없었나 봅니다. 그것만도 감사했습니다. 게다가 남들은 그동안 물질적으로 가난하게도 살고, 건강문제로 고생하는 가정도 많고, 자식문제로 고생 많이 하는 가정들도 너무 많은데 자기 가정은 그동안 너무 복을 많이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내가 너무 많은 복을 누렸구나,” 게다가 지금도 그에게는 적지 않은 재산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재산을 가지고 있어도 별것 아니지만 지금 당장 교회로 들어온 사람들은 식사를 당장 해결해야 하지 않는가? 누군가 그들에게 식사를 제공해야 저들이 목숨을 이어가고 옷을 갈아입지 않겠는가? 나에게 지금 이렇게 넉넉한 재산을 주신 것은 바로 이런 때에 저들을 도와주라고 기회를 주신 것이 아닐까?” 이런 감사한 생각이 바나바의 마음에 가득 밀려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딴 생각이 들기 전에 얼른 밭을 팔아서 교회에 바쳤습니다. 바나바는 성령의 감동을 받았을 때, 즉시 실천했습니다. 이 바나바는 나중에 바울사도를 예루살렘 교회로 인도하여 소개한 사람이고, 안디옥으로 데리고 가서 함께 교회를 개척했고, 바울과 함께 최초로 세계선교사로 기독교 역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위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바나바가 성령의 감동에 순종하여 자기의 재산을 다 팔아서 교회에 헌금하는 모습을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보았습니다. 그들도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이었습니다. 그들도 교회로 몰려드는 부양해야 하는 경제력이 없는 새 식구들의 형편을 알고 있었고 그들도 자기들이 뭔가 도와야 한다는 성령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부부가 상의를 했습니다. “여보, 우리도 밭을 팔아서 바나바처럼 신입교인들 부양하는데 쓰도록 교회에 바칩시다.” 이들 부부에게도 성령의 감동이 있었고, 성령의 감동을 받고 일단 순종하여 행동에 돌입했습니다. 그런데 밭을 팔아 손에 돈을 쥐고 나니까 마음에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단이 주는 생각이었습니다. “야, 너 그거 다 헌금하면 너희 장래 대책은 있어? 남들 생각만 하지 네 자식 생각은 안 해? 네가 그렇게 부자야?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자선 사업가였어? 분수에 맞게 살아, 바나바는 본래가 부자고 너는 그게 어떻게 모은 재산인데 그냥 한꺼번에 다 헌금을 해?” 그렇게 생각하니 일리가 있었습니다. “하긴 그래, 맞아 우리 장래 생각도 해야지, 우리 애들 몫도 조금 남겨 놓아야지, 남 도우려다 나중에 내가 남의 도움을 받게 되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 그런 생각이 마음에 꽉 차버렸습니다. 그래서 밭을 판돈의 반절을 나누어서 얼른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감추어 놓고 반만 가지고 사도들에게 갖다 바쳤습니다. 그랬더니 베드로가 단번에 알아보고 하나님의 성령을 속였다고 책망 하였고 그 책망을 받는 순간 아나니아 삽비라는 즉사하여 다른 성도들에게 경고가 되었다는 기록이 사도행전 5장에 나옵니다.
우리에게는 성령의 감동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감동이 오는 순간에 악령의 속삭임도 동시에 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이 아무리 강하게 나를 일깨운다 할지라도 즉시 순종하지 않으면 사단의 속삭임에 넘어갈 기회만 주는 것입니다. 히 4:2에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하는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고 하였고, 약 4:7-8에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을 때 즉시 순종해야 하고, 사단의 속삭임은 단호하게 거절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감동에 순종하여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인도받으며 행복한 오늘을 살고 위대한 족적을 남기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기 백성을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
스 1:1-11 / 이수영목사
<역대하>는 찬란했던 솔로몬 왕 때의 이스라엘에서부터 시작해서 솔로몬의 죽음 이후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 두 나라로 갈라진 이스라엘 민족이 점차로 쇠락의 길을 걸은 끝에 북왕국 이스라엘이 먼저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하고 한 세기 반도 못 가서 남왕국 유다도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만 역사를 유다의 역대 왕들에 대한 기록을 중심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유다 왕국의 쇠락과 멸망의 역사입니다. 이어지는 <에스라>서는 멸망했던 유다 민족을 하나님께서 다시 세우시는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이방 나라에 끌려가 살던 유다 백성을 제 땅으로 돌아가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유다 백성에게 파괴된 하나님의 성전을 새로 건축하게 하시고 잊어버렸던 예배를 회복시키시며 잃어버렸던 신앙의 순수성을 되찾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증언하는 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심판주 하나님이십니다. 죄와 불의를 결코 묵과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당신의 택하신 백성을 영원한 형벌과 고통 속에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의 슬픔과 통한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의 백성을 다시 세우고 마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에스라와 그 뒤를 잇는 <느헤미야>서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인류의 역사에는 한 시대를 주도했던 인물들이나 한 세기를 호령했던 나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과 나라는 한 시대로 끝나고 지나갈 뿐 영원히 남으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사람과 나라를 당신의 역사의 도구로 사용하셨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항상 당신의 뜻과 의를 함께 세우십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한 시대를 살고 지나가는 우리 인생이 영원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뜻과 의를 따르는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과 의를 따르도록 당신의 나라와 그 백성을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아담 이후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림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멀어져갔고 하나님은 끊임없이 당신의 백성을 당신에게로 돌이켜 데려오시는 노력을 기울이셨습니다. 그 역사의 압축본이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먼저 주전 722년 경 멸망했습니다. 역대 왕들이 줄줄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기에 하나님께서 앗수르 제국에 의해 망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앗수르 제국을 북왕국 이스라엘을 징치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셨을 뿐 앗수르 제국을 하나님께서 크게 높이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징치하시는 데 앗수르를 사용하시기 위해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던 큰 성읍 니느웨(욘1:2)를 회개하게 하시고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나게 하심으로써 내리시려던 재앙을 내리지 않으셔서 무너지지 않고(욘3:5-10) 앗수르 제국을 유지시키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1세기를 조금 넘기고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제국을 결국 바벨론에 의해 역사에서 사라지게 하셨습니다. 앗수르를 무너뜨린 바벨론을 하나님께서 그 다음에는 남왕국 유다를 징치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바벨론으로 하여금 유다를 멸망시키게 하신 것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지 135년 쯤 뒤인 주전 587년에서 586년 경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해버렸습니다. 유다 왕국은 없어졌고 많은 유다 백성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성전이 파괴되어버렸으므로 하나님께 바르게 예배드릴 처소가 없어졌습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백성에게나 남은 백성에게나 자연히 그들의 신앙을 바르게 지켜가는 일이 어려워지게 되었습니다. 선택받은 민족의 혈통을 순수하게 유지하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런 여건 속에서 오랜 세월 레위족 이나 제사장계층을 계속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여건을 누구보다도 안타까워하고 참기 힘들어 한 이는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한지 오십 년도 채 안 되는 주전 539년 페르시아의 고레스 대왕으로 하여금 바벨론을 붕괴시키게 하신 것입니다. 바벨론과 그 제국은 별다른 저항 없이 고레스의 손에 떨어졌습니다. 고레스는 사리에 밝고 관용적인 군주였습니다. 그는 바벨론을 점령하자 곧바로 바벨론의 지배하에 있던 모든 나라의 백성에게 각각 자기들 나라로 돌아가서 자기들의 성전들을 재건할 권리를 약속하는 조서를 내렸습니다. 이것은 바벨론이 추구하던 정책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고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 모든 나라드에게 최대한의 만족을 주는 현실주의 정책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벨론에 잡혀왔던 유다 백성에게도 고국 땅에 돌아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수 있는 놀라운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고레스 대왕이 내린 조서 가운데 유다 백성에 관한 내용에 해당하는 부분이라고 <에스라>서의 기자가 옮긴 것이 본문 2-4절입니다: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 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 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이미 훗날 고레스라는 자가 페르시아라는 제국의 왕이 되어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그런 조서를 내릴 것을 아시고 그보다 한 세기 전에 태어난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그 사실을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렘29:10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리고 예레미야가 전한대로 이루어졌다고 오늘 본문 1-3절은 선언하는 것입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고레스의 생각을 주장하시고 그의 마음을 움직이시며 그를 사용하신 것도 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친히 당신의 백성을 다시 돌아오게 하시고 성전을 새로 세우게 하시며 신앙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레스로 하여금 조서를 내리게 하시기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본문 5절 이하를 또 봅니다: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
그 사면 사람들이 은 그릇과 금과 물품들과 짐승과 보물로 돕고 그 외에도 예물을 기쁘게 드렸더라. 고레스 왕이 또 여호와의 성전 그릇을 꺼내니 옛적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신당에 두었던 것이라. 바사 왕 고레스가 창고지기 미드르닷에게 명령하여 그 그릇들을 꺼내어 세어서 유다 총독 세스바살에게 넘겨주니 그 수는 금 접시가 서른 개요 은 접시가 천 개요 칼이 스물아홉 개요 금 대접이 서른 개요 그보다 못한 은 대접이 사백열 개요 그밖의 그릇이 천 개이니 금, 은 그릇이 모두 오천사백 개라 사로잡힌 자를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갈 때에 세스바살이 그 그릇들을 다 가지고 갔더라.” 유다 백성으로 하여금 본국 땅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는 일을 위해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마음만 감동시키신 것이 아니라 유다 백성의 마음까지도 감동시키신 하나님을 봅니다. 또 예루살렘 성전의 회복을 위해 옛날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신당에 놔두었던 성전 그릇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돌려보내게 만드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당신의 성전의 철저한 회복을 친히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스3:8에 보면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이른 지 이 년 둘째 달에 성전 공사를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레스가 조서를 공포한지 삼 년만입니다.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 백성의 감격스러워 크게 함성을 질렀으며 나이 많은 족장들 가운데 첫 성전을 보고 기억하는 사람들은 대성통곡했습니다(스3:12). 그러나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유다 자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한다는 소식을 들은 그 땅의 대적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스4:4). 그때부터 몇 왕을 거쳐 다리오 대왕에 이르기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예루살렘 성전 재건 계획을 막았으며 아하수에로 왕이 즉위할 때는 이런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을 고발하게 했습니다(스4:5-6): “강 건너편에 있는 신하들은 왕에게 아뢰나이다: ‘당신에게서 우리에게로 올라온 유다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이 패역하고 악한 성읍을 건축하는데 이미 그 기초를 수축하고 성곽을 건축하오니 이제 왕은 아시옵소서. 만일 이 성읍을 건축하고 그 성곽을 완공하면 저 무리가 다시는 조공과 관세와 통행세를 바치지 아니하리니 결국 왕들에게 손해가 되리이다. 우리가 이제 왕궁의 소금을 먹으므로 왕이 수치 당함을 차마 보지 못하여 사람을 보내어 왕에게 아뢰오니 왕은 조상들의 사기를 살펴보시면 그 사기에서 이 성읍은 패역한 성읍이라. 예로부터 그 중에서 항상 반역하는 일을 행하여 왕들과 각 도에 손해가 된 것을 보시고 아실지라. 이 성읍이 무너짐도 이 때문이니이다. 이제 감히 왕에게 아뢰오니 이 성읍이 중건되어 성곽이 준공되면 이로 말미암아 왕의 강 건너편 영지가 없어지리이다.”(스4:11-16) 이 때문에 예루살렘의 하나님 성전 공사는 다리오 대왕 제이년까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스4:24). 사태가 반전된 것은 다리오가 조서를 내려 문서창고에서 유다 백성의 귀환과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명한 옛 고레스 대왕의 조서를 기록한 두루마리를 찾은 일이었습니다(스6:1-5). 거기서 예루살렘의 하나님 성전 재건에 대한 고레스의 상세한 지시를 확인한 다리오는 엄히 명하기를 “하나님의 성전 공사를 막지 말고 유다 총독과 장로들이 하나님의 이 성전을 제자리에 건축하게 하라.”(스6:7) 했으며 새 조서를 내려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함에 필요한 경비를 끊임없이 주어 그들로 멈추지 않게 하고 그 성전에서 제사가 날마다 온전하게 드려지기 위해 제사장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어김없이 주라 했습니다(스6:8-10). 그리고 또 명령을 내려 “누구를 막론하고 이 명령을 변조하면 그의 집에서 들보를 빼내고 그를 그 위에 매어달게 하고 그의 집은 이로 말미암아 거름더미가 되게 하라. 만일 왕들이나 백성이 이 명령을 변조하고 손을 들어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을 헐진대 그 곳에 이름을 두신 하나님이 그들을 멸하시기를 원하노라. 나 다리오가 조서를 내렸노니 신속히 행할지어다.”(스6:11-12) 했습니다. 이런 다리오의 조서가 전달되자 성전 건축을 방해하던 자들은 이제는 죽을까 두려워 그 조서를 따라 신속히 준행하여 성전을 건축하는 일을 다리오 왕 제육년에 끝내고 즐겁게 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스6:13-16).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재건하시는 것으로 당신의 백성을 다시 세우시는 일을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일, 성전을 재건하신 그 참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한 일을 위하여 에스라를 보내신 것입니다. 전 10장으로 이루어진 <에스라>서에서 7장에 와서야 비로소 에스라가 등장합니다. 7:1에 보면 “이 일 후에 바사 왕 아닥사스다가 왕위에 있을 때에 에스라라 하는 자가 있으니라.” 합니다. 거기서 에스라는 아론의 십육대 손이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스7:5). 스7:6에서는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였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일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고 바벨론에서 올라온 것입니다(스7:10). 에스라는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 다음과 같은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모든 왕의 왕 아닥사스다는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학자 겸 제사장 에스라에게 조서를 내리노니 ‘우리 나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중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뜻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너와 함께 갈지어다. 너는 네 손에 있는 네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기 위하여 왕과 일곱 자문관의 보냄을 받았으니 왕과 자문관들이 예루살렘에 거하시는 이스라엘 하나님께 성심으로 드리는 은금을 가져가고 또 네가 바벨론 온 도에서 얻을 모든 은금과 및 백성과 제사장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그들의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기쁘게 드릴 예물을 가져다가 그들의 돈으로 수송아지와 숫양과 어린 양과 그 소제와 그 전제의 물품을 신속히 사서 예루살렘 네 하나님의 성전 제단 위에 드리고 그 나머지 은금은 너와 너의 형제가 좋게 여기는 일에 너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쓸지며 네 하나님의 성전에서 섬기는 일을 위하여 네게 준 그릇은 예루살렘 하나님 앞에 드리고 그 외에도 네 하나님의 성전에 쓰일 것이 있어서 네가 드리고자 하거든 무엇이든지 궁중창고에서 내다가 드릴지니라. 나 곧 아닥사스다 왕이 유브라데 강 건너편 모든 창고지기에게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 학자 겸 제사장 에스라가 무릇 너희에게 구하는 것을 신속히 시행하되 은은 백 달란트까지, 밀은 백 고르까지, 포도주는 백 밧까지, 기름도 백 밧까지 하고 소금은 정량 없이 하라. 무릇 하늘의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하늘의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은 삼가 행하라 어찌하여 진노가 왕과 왕자의 나라에 임하게 하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제사장들이나 레위 사람들이나 노래하는 자들이나 문지기들이나 느디님 사람들이나 혹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에게 조공과 관세와 통행세를 받는 것이 옳지 않으니라 하였노라. 에스라여, 너는 네 손에 있는 네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네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를 법관과 재판관을 삼아 강 건너편 모든 백성을 재판하게 하고 그 중 알지 못하는 자는 너희가 가르치라. 무릇 네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준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속히 그 죄를 정하여 혹 죽이거나 귀양 보내거나 가산을 몰수하거나 옥에 가둘지니라.`”(12-26)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의 백성을 다시 세우시기 위하여 이방 나라 왕들을 당신의 도구로 들어 쓰시며 그들의 입을 통해 당신의 백성이 하지 못하는 말을 하게 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당신의 백성의 회복과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주권적 행위임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우리의 구원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저 놀랍기 그지없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임을 인정하며 모든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입니다.
스 7:27-28 /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그가 왕의 마음에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시고 28) 또 나로 왕과 그의 보좌관들 앞과 왕의 권세 있는 모든 방백의 앞에서 은혜를 얻게 하셨도다 내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내 위에 있으므로 내가 힘을 얻어 이스라엘 중에 우두머리들을 모아 나와 함께 올라오게 하였노라
마음을 감동시키시는 하나님
스 1:1-6 / 피영민목사
서론
유다백성들은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40년이나 90년이 아닌 70년을 포로생활 한 이유가 역대하 36장 2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6년간 토지를 쓰면 1년은 안식년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490년 동안 한 번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490년을 7로 나누면 70년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동안 지키지 않은 안식년을 한꺼번에 다 지키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지만 땅은 70년 동안 안식을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한데 대한 형벌(punishment)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유다백성이 70년 포로 생활한 것은 형벌의 의미도 있지만 하나님의 훈련(discipline)이라는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70년 포로생활을 통해 유다백성들에게 여러 가지 은혜를 주셨고 여러 가지를 훈련하셨습니다.
첫째, 우상숭배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있을 때에는 가나안 일곱 족속들이 섬기는 우상숭배에 끊임없이 미혹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라 해도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우상을 섬기니 결국은 나라가 망해 포로가 된 것을 깨닫고 더 이상 우상을 섬기면 안 되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우상의 본거지인 바벨론에 가서 우상을 보니 우상이 지겨워지고 이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돌아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배하기를 간절히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을 때는 우상을 섬겼으나 바벨론에 포로 되어가니 하나님을 그리워하게 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둘째, 하나님 말씀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와 예레미야 선지자가 외쳤을 때는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한 대로 결국 나라가 망해 포로가 되자 하나님 말씀은 일점일획도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대로 실현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떤 세력도 그들을 포로에서 해방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이 포로생활 가운데 의지할 것은 하나님의 약속뿐이었습니다. 포로생활은 70년이 될 것이고 70년 후에는 해방될 것이라는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약속뿐이었습니다. 이처럼 보통 때는 하나님 말씀의 귀중함을 모르다가 어려움에 처하니 말씀의 귀중함을 알게 된 것입니다.
셋째, 성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시편 137편 1절에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시온은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는 성전이 있고 자유스러운 예배가 있었어도 그것이 그렇게 소중한 줄 몰랐는데 이제 그것을 잃고 나니 눈물이 날 정도로 그립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일체감과 책임감을 알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열두지파로 나뉘어 서로 미워하고 싸웠으나 그들이 포로로 잡혀가 공통의 고통을 겪다보니까 미움이 사라지고 그들은 하나라는 일체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부부싸움이 해결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녀가 옆집 아이에게 맞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맞아서 얼굴에 코피라도 흘린 것을 보게 되면 부부간의 싸움은 자동적으로 멈추게 되고 옆집 부모와의 싸움을 위해 힘을 합치게 됩니다.
유다백성은 공통의 고통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일체감도 겪게 되었고 그들의 시각도 넓어졌습니다. 그동안 유다백성 대부분은 예루살렘에서 태어나서 거기서 죽는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생활을 했으나 이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바벨론 문화와 문물을 보고 세상이 넓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넓은 세계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책임감과 정체감과 일체감을 확고하게 정립하게 되었습니다. 고통이 삶 가운데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 119편 71절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고난당하면 하나님 말씀이 얼마나 귀하고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 알게 됩니다.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는 과정은 3단계로 이루어졌습니다. 끌려갈 때도 3단계로 끌려갔고 돌아올 때도 3단계로 돌아왔습니다. 주전 605년 여호야김 왕 때 1차, 주전 597년 여호야긴 왕 때에 2차, 주전 587년 시드기야 왕 때에 완전히 멸망해 3차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귀환도 3단계입니다. 1차 귀환은 주전 538년에 이루어졌습니다. 페르시아 왕인 고레스는 고레스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유다백성들은 스룹바벨의 인도를 받아서 예루살렘에 귀환했습니다. 이것이 1차 귀환입니다. 에스라 2장 64절로 65절에 “온 회중의 합계가 사만 이천 삼백 육십명이요 그 외에 노비가 칠천 삼백 삼십 칠명이요 노래하는 남녀가 이백명이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1차 귀환 때 돌아온 합이 49,897명입니다. 1차 귀환의 목적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금방 건축하지 않고 2년 동안 미적거리다 주전 536년에 성전 건축을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동안에 반대 진영 사람들도 진영을 갖추어 가지고 공격을 해 16년 동안 성전건축이 중단되어 유다백성들은 허송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학개와 스가랴 두 선지자를 일으켜 백성들을 야단치십니다. “너희는 집을 지어 잘살면서 하나님의 성전은 황무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잘하는 짓이냐? 너희들이 행하고 있는 것이 옳은 짓인지 살펴보고 산에 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빨리 지어라.”고 야단치셔서 결국 5년 만에 건축해 주전 515년에 건축된 성전이 지도자의 이름을 딴 스룹바벨 성전이 된 것입니다. 이런 스토리가 에스라서 1장으로 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백성들은 성전을 지었지만 율법을 가르쳐줄 스승이 없었으므로 예배드리는 법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전 458년에 율법에 익숙한 학사 에스라를 중심으로 1,754명이 2차로 귀환하도록 했습니다. 그 목적은 율법재건입니다. 그 내용이 에스라 7장으로 10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에스라서 전반부는 1차 귀환의 스토리요 후반부는 2차 귀환의 스토리인 것입니다. 1차 귀환은 주전 538년, 2차는 주전 458년으로 두 귀환 사이에 80년의 간격이 있습니다. 주전 444년에 느헤미야가 주도한 3차 귀환의 목적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을 지어놓고 하나님 말씀대로 예배를 드리는데 성벽이 없으니 자꾸 적들이 쳐들어와 예배를 방해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가 그 문제를 안고 기도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아 성벽을 건축했습니다. 이것이 3차 귀환입니다.
이처럼 포로 귀환은 성전건축, 율법재건, 성벽재건의 순서로 이루어졌습니다. 세계사에서도 전무후무한 놀라운 역사입니다. 만약에 대한민국이 망해 국민들이 중국에 포로로 끌려가 70년 만에 돌아와서 다시 국가를 세운다고 상상해 볼 때, 70년 만에 다시 국가를 세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유다백성에게 이런 전무후무한 역사가 가능했던 원동력은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 시키신 것”입니다.
1. 하나님은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셨습니다.
고레스 왕은 페르시아 사람입니다. 페르시아의 일곱 종족 가운데 매우 작은 종족의 지도자였으나 일곱 종족을 통일해 버리고 페르시아의 단일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전 539년에 메대와 연합해 바벨론을 멸망시켜 지배하고 전 세계 최고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고레스가 바벨론을 통치하게 되자 그는 유다백성을 향해서 두 가지 선한 일을 행했습니다. 하나는 고레스 칙령을 발표해 유다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건축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솔로몬 성전을 파괴하면서 빼앗아 온 모든 성전 기명들을 그대로 지도자인 스룹바벨에게 붙여서 가지고 가라며 돌려준 것입니다.
이방 나라 왕인 고레스가 이런 선한 일을 행한 원인은 하나님께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1절에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왕이 마음에 감동을 받으니 한 국가가 살아나는 어마어마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2절 후반으로 3절 초반에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는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저는 두 가지가 분명히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확신합니다. 하나는 그의 내적인 확신이요 다른 하나는 외적인 확신입니다. 이렇게 안팎으로 증거가 일치하면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성령께서 고레스 왕의 영혼에 직접 일대일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꿈으로 말씀하셨는지 음성으로 말씀하셨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고레스에게 내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고레스야 내가 너에게 세계 민족을 지배하는 통치권을 주었다. 그런데 그것은 네가 세계 열방을 지배하게 되면 바벨론에 포로 되어 있는 내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도록 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느브갓네살이 나를 섬기기 위해 두었던 성전 그릇들을 가지고 왔는데 그것을 하나도 건드리지 말고 다돌려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고레스 왕은 하나님의 객관적인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페르시아에는 유명한 다니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이미 성경을 읽어 고레스라는 인물이 일어날 줄 알고 있었습니다. 이 시대보다 160년 전에 예언한 이사야 선지자가 고레스의 이름을 이미 언급했습니다. 이사야 44장 28절에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고 기록되었고, 45장 1절에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다니엘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레스가 페르시아를 통일한다 할 때에도, 고레스가 바벨론을 멸망시킬 때에도 그럴 줄 알았다고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사야 선지자가 이미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고레스가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이제 유일한 지도자가 되었을 때에 그에게 나아갔을 것입니다. “폐하 하나님께서 고레스 왕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세계 모든 민족을 지배할 뿐만 아니라 내 백성인 유다백성을 해방 시키실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씀하셨으니 당신은 내 백성을 해방시키시고 성전 기물들을 돌려주셔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명입니다.”라고 고레스에게 말하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고레스는 내적인 증거와 외적인 말씀의 증거를 따라 마음의 감동을 입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성취하게 된 것입니다.
잠언 21장 1절에도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람 마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제가 대통령과 정치지도자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움직이십니다. 그러므로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나는 못해도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신다는 진리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여 나라를 잘 통치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승진이 잘 안되고 윗사람의 마음이 잘 안 움직입니까? 그것을 내가 움직이려하면 오히려 그나마 조금 열리는 것 마저 닫혀버리니 그렇게 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마음을 열어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고레스 왕의 마음을 마음대로 움직이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유다백성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습니다.
본문 5절에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무릇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을 건축코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유다백성 49,897명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에 남아있고 돌아오지 않은 사람은 약 2백만 명이 된다고 합니다. 바벨론에서 태어나 바벨론에서 교육받고 바벨론에서 생계를 유지하며 70년을 살아와 모국어인 히브리어도 다 잊어버린 유다백성들이 그들의 삶의 모든 터전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2백만 명은 돌아가지 않고 남았는데 그들이 겪은 사건이 바로 에스더서에 나타난 사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49,897명의 마음은 감동시키셨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에 이뤄놓은 모든 삶의 터전을 버리기로 결단했습니다.
시편 137편 5절로 6절에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찐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찌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찐대 내 혀가 내 입 천장에 붙을찌로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심정입니다. 그들은 이런 심정으로 돌아갔습니다. 마지못해 돌아간 것이 아니라 일제에서 해방된 한국 사람들의 심정과 같은 기쁨과 감격의 심정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시편 126편 1절로 3절에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유다백성들에게 감동이 있었습니다. 감동이 강도가 세어지면 감격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에서 해방되었을 때에 백성들이 거리에 나가 태극기를 휘날리며 감격했습니다. 유다백성들도 이런 감격을 가지고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다백성들은 예루살렘을 향한 진정한 갈망, 하나님을 향한 진지한 사랑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구약 최고의 신앙부흥이요 두 번째 출애굽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번은 애굽에서 나온 것이요 한 번은 바벨론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런 부흥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마음을 감동하심으로 일어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흥을 주세요.”라는 기도보다도 “하나님, 내 마음에 감동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감격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감탄이 일어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됩니다.
3. 하나님은 바벨론 사람들의 마음도 감동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방 불신자인 바벨론 사람들의 마음도 감동시키셨습니다. 본문 4절에 “무릇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우거하였든지 그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기타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예물을 즐거이 드릴찌니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고레스 칙령 가운데 이런 내용도 있는 것입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유다백성들에게 은과 금과 예물을 주어 돌아가서 예루살렘의 성전을 건축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왕이 주라고 해도 백성들이 마음에 감동이 없으면 소용없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사람들은 이방사람들이요 불신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감동을 입고 은, 금, 물건, 짐승과 예물을 주었습니다. 6절에 “그 사면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기타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예물을 즐거이 드렸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에도 애굽 사람에게 예물을 받았듯이 바벨론에서 나올 때에도 바벨론사람으로부터 예물을 받아 돌아와서 성전을 짓게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감동은 불신자들에게도 미칠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상사가 불신자일지라도 하나님의 감동은 미칠 수가 있다는 진리를 믿으시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결 론
하나님의 감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이 때가 되어 실현된 것입니다. 70년이 지나면 너희에게 감동을 주어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일으켜주겠다고 하는 약속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도 기도했습니다. 다니엘 9장 17절에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취시옵소서”라고 기록되었고, 예레미야 29장 12절로 14절 전반에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에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말씀을 덮어놓고 감동받을 수 없습니다. 말씀을 열어놔야 감동이 옵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성령의 감동이 오는 것입니다. 저는 아쉬운 것이 있습니다. 주일 대예배는 정해진 시간이 있으므로 설교 후 기도할 시간이 짧습니다. 그러므로 수요기도회나 금요철야기도회에 나오십시오. 나오셔서 1주일에 한 시간은 부르짖어 기도해야 성령의 감동이 우리 영혼에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참으로 감동받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점점 화인 맞은 마음처럼 뭘 봐도 감동이 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이아가라 폭포를 봐도 그랜드캐니언 협곡을 봐도 큰 감동이 없습니다. 사람은 웃으면 엔돌핀이 나온다고 합니다. 엔돌핀이 나오면 두 가지 일을 하는데암을 치료하고 통증을 약화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엔돌핀보다 4,000배 효과 있는 것이 다이돌핀입니다. 그리고 이 다이돌핀은 사람의 마음에 감동이 일어날 때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시여 우리에게 감동을 주시기 원합니다.”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영혼에 감동이 있는 사람을 쓰십니다. 인생의 목적이 없이 하루 세끼 밥 먹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 지내며, 좋은 것을 봐도 웃지 않고 슬픈 것을 봐도 울지 않고 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의 영혼에도 하나님의 감동이 오고 하나님의 교회에도 하나님의 새로운 감동의 물결이 오며 심지어는 불신자들에게도 하나님의 감동이 오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정치지도자들에게도 하나님의 감동이 와서 이 나라는 다시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일어나고 세계를 향하여 선교하는 나라가 되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여 감동을 주시고 감동이 강하여 감격이 되게 하시고 감격이 변하여 감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