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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신우신(日新又新)
날로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진다는 뜻으로, 매일 새로운 마음가짐과 새로운 각오로 새출발을 하라는 말이다.
日 : 날 일(日/0)
新 : 새 신(斤/9)
又 : 또 우(又/0)
新 : 새 신(斤/9)
(유의어)
일신월성(日新月盛)
일신월이(日新月異)
일일신 우일신(日日新 又日新)
출전 : 대학(大學)
새로운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새 옷, 새 신발, 새 집에 새 가구 등 생각만 해도 신이 난다. 일상에서 흔히 쓰는 '새 술은 새 부대(負袋)에'라는 말이 있다. 우리 속담이 아니고 성서에서 유래한 영국 격언이다. 새 술이라서 새 가죽 자루에 넣는다는 것이 아니고 낡은 부대에 넣으면 솔과 같이 못 쓰게 된다는 이야기다.
공자(孔子)도 옛것만 많이 익혀서는 쓸모가 없고 그것에 바탕을 두고 새로운 것을 익혀야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고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나날이 새로워지고(日新) 또 새로워진다(又新)는 잘 알려진 이 성어는 일일신 우일신(日日新 又日新)의 준말이다.
중국 고대의 하(夏)나라 폭군 걸왕(桀王)은 현신의 간언을 듣지 않고 사치를 일삼고 포악한 정치를 펼쳤다. 이를 보다 못한 제후들은 걸왕을 내쫓고 신망이 높았던 탕(湯)을 천자로 추대하니 상(商)나라다. 성탕(成湯)이라고도 하는 탕왕(湯王)은 걸왕의 학정을 반면교사로 생각하며 제도와 전례를 정비하는 등 백성들을 잘 다스려 역대 성군(聖君) 중의 하나로 추앙받는다.
덕치주의의 이상을 보인 탕왕도 매일 사용하는 세숫대야에 자신을 경계하기 위한 글을 새겨놓았다. 예기(禮記)에 포함되어 있던 것을 사서(四書)로 독립시킨 대학(大學)에 나오는 부분을 보자.
湯之盤銘曰 :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탕왕의 대야에 새긴 경계의 말에 이르길, "진실로 새로워질 수 있다면 날마다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고 했다.
탕왕이 새긴 9자의 글자는 탕반명(湯盤銘), 탕명(湯銘)이라 말하기도 한다. 탕왕이 추구한 새로운 것은 하늘로부터 받은 착한 본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갈고 닦는 것을 가리킨다.
나쁜 것에 휘둘리지 않고 착한 바탕을 그대로 지켜 나가는 것이 새로운 것이 된다. 새로운 것을 강조한다고 지나간 것을 모조리 폐기한다면 그 또한 지나가면 새로운 것이 될 수 없다. 이럴 때는 경험이 많거나 익숙한 사람이 더 잘 할 수 있다는 '구관이 명관이다'는 속담이나, 구약성서에 나오는 '하늘 아래 새 것이 있을 리 없다'란 구절을 되살필 필요가 있다.
■ CEO부터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하라
사서삼경의 하나인 대학(大學)은 어른(大人)의 학문이다. 여기서 어른이란 말 그대로 성인(成人)을 일컫기도 하지만 지위가 높은 사람, 혹은 덕이 높은 사람 등 사회의 지도층을 주로 말하고 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가 대학(大學)의 가장 핵심적인 문장인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안하게 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수양하고 집안부터 바르게 다스려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자신을 수양하는 것이 모든 일의 근본이라는 것인데, 이를 두고 대학(大學)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천자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수신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근본이 어지러우면서 말단이 다스려지는 일이 없다.”
수신은 나라의 통치자인 천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지만, 정작 천하를 평안하게 하려면 아래로 백성들까지 자신을 바르게 닦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大學)에서 이와 함께 잘 알려진 구절은 '구일신 일일신 우일신(苟日新 日日新 又日新)'이 있다. "진실로 하루를 새롭게 하고, 날마다 새롭게 하고, 또 새롭게 한다"는 뜻으로 흔히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으로 줄여서 쓴다.
이 말은 고대 중국의 탕 임금이 자신의 세숫대야에 새겨놓은 글이다. 탕 임금은 하나라의 폭군 걸을 물리치고 상나라를 세운 시조로, 요리사 출신의 명재상 이윤과 함께 나라를 잘 다스려 성군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대야에 스스로 새겨놓은 이 글을 날마다 마주하며 훌륭한 군주가 될 수 있었다.
대학(大學)에는 이 구절 다음에 이렇게 실려 있다. "서경 강고에서는 백성을 진작시켜 새롭게 하라"고 했다. 시경에서는 "주나라는 비록 오래된 나라였으나 천명을 받아 새롭게 됐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극진함을 다하지 않은 바가 없다"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몇가지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먼저 변화는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번 크게 결심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한번 변화한다고 해서 다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어쩌다 한번이 아니라 날마다 혁신을 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변화, 돌이키지 않을 수 있는 변화를 얻을 수 있다.
또 한가지는 가장 먼저 변하는 사람이 지도자 자신이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도 변화하고 나라도 변할 수 있다. 자신은 변하지 않으면서 아무리 변화를 외치고 개혁을 강조해도 사람들은 따르지 않는다.
논어에서 공자가 멋지게 비유한 말이 있다. "군자의 도는 바람이고 소인의 도는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기 마련이다." 공자가 노나라의 실권자 계강자에게 정치를 가르친 말인데, 지도자의 솔선수범만이 나라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변화는 반드시 새것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시경에서는, 비록 주나라는 오래 된 나라이지만 천명을 받아서 새롭게 될 수 있었다고 했다. 여기서 천명이란 ‘하늘의 뜻’으로 스스로 바르고 정의로울 때 하늘의 뜻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난 것은 모두 낡아서 바꿔야 하거나, 새것이라고 해서 모두 정의는 아니다. 스스로 돌이켜봐 올바를 때 모두가 공감하는 변화를 이룰 수 있다.
오늘날은 모든 것이 급격하게 변하는 시대이다. 이런 때 일수록 진정한 변화의 의미를 새겨보아야 한다. 근사록에는 “날마다 진보하지 않으면 날마다 퇴보한다”라고 실려 있다. 진정한 변화는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을 날마다 만드는 것이다.
■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을 이성적 동물로 정의했다. 이 정의에 따르면 사람이 기본적으로 동물의 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이성을 발휘해 동물과 다른 사람다움을 실현할 수 있다.
몸집, 감각능력, 신체구조의 측면에서 인간은 동물에 비해 객관적으로 뒤떨어진다. 하지만 이성을 발휘해 정의와 나눔의 도덕을 추구하고 인공지능과 가상현실의 과학기술을 실현할 수 있다.
후자가 바로 이성으로 일궈낼 수 있는 인간의 빛나는 성취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에 접속해 필요한 정보를 검색하면서 이성의 혜택을 나날이 확인하고 있다.
인간에게는 동물성과 이성 이외에 또 하나의 중요한 특성이 있다. 바로 후천적 학습을 통해 획득하게 되는 제2의 천성, 즉 습관이다. 습관은 사람이 환경과 사회의 대응 관계에서 성공을 거둬 안정적인 방식으로 굳어진 측면을 가리킨다.
야구에서 투수는 투구하기 전에 늘 하던 동작을 되풀이하고, 노동에서 기술자는 이미 검증된 방식으로 작업을 되풀이하고, 정치인은 지지층의 결속을 위해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는 구태의 매뉴얼을 반복한다.
습관은 하나의 대응 방식으로 수립될 때 분명 유효성과 효과가 검증됐다. 그 덕분에 습관의 매뉴얼이 교과서로 쓰여서 사회 각 분야의 신입은 연수 과정에서 그것을 배우게 된다.
자연과 사회의 조건은 시간의 변화와 더불어 바뀌기 마련이다. 과거에 유효했던 습관의 매뉴얼이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난 뒤에도 그대로 통용되지 않을 수 있다. 이때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타이밍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습관의 힘은 너무나도 강고해서 새로운 현상을 일시적인 사례로 치부하고 옛날에 했던 방식에 안주하려고 한다. 특히 과거에 일궈낸 성공의 신화에 도취되면 변화의 필요성을 더더욱 인정하지 않게 된다.
대학은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했던 상나라 탕(湯) 임금의 사례를 제시하며 사람이 관습에 안주하려는 타성을 넘어서 나날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영구 혁신과 평생 학습의 가치를 일깨우고 있다.
상나라 때 사람이 목욕을 하거나 세수를 할 수 있는 큰 그릇으로 반(盤)이 있었다. 오늘날 세숫대야나 욕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목욕은 몸의 묵은 때를 벗겨 내는 일로 시간이 꽤 걸린다.
탕은 몸의 때를 벗겨 내는 긴 시간을 그냥 흘러 보내지 않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반에다 글귀를 새겼다. “진실로 하루라도 새로워지려면 날마다 새로워지고 또 날로 새로워져야 한다(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탕은 세숫대야에 아홉 글자를 새겨 관성에 안주하려는 자신을 일깨우려고 했다. 이렇게 새로워지려는 의지는 목욕을 통해 그 의미가 크게 증폭됐다. 몸이 목욕해 깨끗해지고 마음도 관행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워지는 결의를 다지게 되는 말이다.
성경에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포도주가 발효되는 과정을 견뎌내서 좋은 술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탕이 세숫대야에 새긴 글을 반명(盤銘)이라고 한다. 그 뒤로 사람이 생활하던 주위 장소나 주위에 있는 물건을 글귀를 새겨서 스스로 다짐을 하는 경우 좌우명(座右銘)이라고 불렀다.
흔히 시험 철이 되면 책상 앞에 시험 일자나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는 말도 일종의 좌우명이라고 할 수 있다.
변화와 혁신이라고 하면 조직 개편과 구조 개선처럼 거창하며 외부에서 강요하는 운동성 정책을 떠올리기 쉽다. 그리해 사람들은 변화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보다 기존의 관행에 묻어 안주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우리가 건강을 유지하려면 신진대사(新陳代謝)가 원활하게 일어나야 하듯이 자연과 사회의 환경을 맞이해 슬기롭게 대처하려면 달라짐을 피할 수만은 없다. 달라짐은 인간이 이성을 발휘해 새로운 습관을 창출하는 과정이다.
대학은 일신우일신하던 탕 임금의 자세를 통해 삶의 크고 작은 다양한 분야에서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맞이하는 지혜를 제안하고 있다. 이를 위해 짧게는 한 해 길게는 평생 동안 자신을 이끌어가는 좌우명을 되새겨보면 좋겠다.
옛날이나 지금까지도 많은 지도자급 인사들은 이 말을 좌우명(座右銘)으로 삼아 자기계발(自己啓發)에 힘쓰며 덕(德)을 닦기에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지도층 인사들은 매사에 솔선수범(率先垂範)하고 부단한 자기 성찰(省察)을 통하여 수신(修身)에 힘써 수기치인(修己治人)해야 한다.
윗물이 흐린데 어찌 아랫물이 맑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탕왕(湯王)의 전철을 밟지는 못할망정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민초(民草)들에게 삶의 의욕을 꺾고 허탈감을 안겨주지 않도록 매사에 밝고 희망찬 사회 기풍을 진작하는데 앞장서자.
■ 끊임없이 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 갑시다
일일신 우일신(日日新 又日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 가자’는 뜻입니다.
이 구절은 대학(大學)의 제2장에 탕(湯) 임금의 이야기와 함께 등장합니다. 탕 임금은 고대국가인 상(商)나라를 세웠습니다. 은(殷)이 상나라의 수도이기도 해서 은나라로 불리고도 하지요.
중국역사에서 군주를 몰아내고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이룬 첫 인물로도 기록된 탕 임금은 폭군이었던 하(夏)나라의 걸왕(桀王)을 무력으로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신하가 무력으로 왕을 몰아냈다는 정당성은 논란거리입니다. 하지만 유가(儒家)에서는 이상적인 군주로도 불립니다. 탕왕이 평시에 평소 자주 쓰는 물건에 이 ‘일일신 우일신’이라는 글귀를 새기고 좌우명(座右銘)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탕 임금은 대야에 이런 글귀를 새겨두고 얼굴을 씻을 때마다 마음에 새겼습니다. ‘진실로 하루라도 새롭고자 한다면 날마다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
이 얼마나 멋진 좌우명인가요? 우리는 안일함과 나태함에 몸을 맡기지 말고, 매일 자신을 다잡아 갈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의 익숙함과 구습에 매여 새로워지기를 포기하는 순간, 성장은 멈추고 진정한 소통도 중단됩니다.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나아지고 조금 더 새로워졌는가? 우리는 매일 자문해 봐야 합니다. 끊임없이 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 가는 것, 여기에 인생의 진정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보다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끊임없이 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아닐 런지요? 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은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편하고 쉽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부처님께서는 “갖가지 악한 행위, 즉 불행의 원인이 되는 온갖 악한 행위는 쉽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유익하고 훌륭한 것은 노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톨스토이는 보다 나은 사람은 “우리의 진정한 힘은 자기 자신을 지배할 수 있다는 사실에만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끊임없이 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 이것이 우리가 지향해야할 인생의 모습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날로 새로운 인간다운 삶의 자세는 어떻게 만들어 가면 좋을까요?
첫째, 인간다운 삶의 자세입니다. 인간다운 삶, 가치 있는 삶은 ‘바람직한 목표를 추구하는 삶,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 이타적(利他的)인 삶’을 살아가겠다는 다짐입니다.
둘째, 삶에 대한 반성과 평가가 필요합니다. ‘과연 내 인생의 목표가 올바른가?, 나는 정신적인 것을 얼마나 추구하고 있는가?, 나는 이기적인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이타적인 삶을 살고 있는가?’ 하고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셋째, 인간답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인간다운 삶의 자세를 실천으로 옮길 때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의 모습이 실현됩니다. 물질적인 것만을 생각하지 않고 이웃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가급적이면 남을 도와주는 것을 삶의 목표로 하는 삶이 인간답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넷째,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소중한 이유는 세상의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번 잃어버리면 다시 찾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자기의 생명은 물론 일체생령(一切生靈)을 모두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자기 존중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먼저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자기 존중이 곧 생명 존중의 출발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존중하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을 하면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여섯째,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상 사회의 모습은 모든 것이 풍족한 사회, 질서가 유지되는 사회, 사랑이 있는 사회입니다. 사랑의 의미는 타인에 대한 따뜻한 느낌, 타인에 대한 배려, 타인과 사회에 대한 관심입니다. 그 사랑의 실천은 남의 선행을 칭찬하는 것, 남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 남에게 선행과 봉사를 행하는 것이 아닐 런지요.
일곱째, 관용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관용을 실천하는 방법은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고, 타인을 나와 똑같은 사람으로 인정하고, 너그럽고 부드럽게 덕을 펴는 것입니다.
여덟째, 감사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모두가 은혜의 덩치입니다. 세상은 서로 돕고 사는 고마움을 아는 사회, 협동으로 이루어지는 사회,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망조차도 감사로 돌리는 것입니다. 잘 된 것은 ‘네 덕’ 잘못 된 것은 ‘내 탓’인 것이지요.
어떻습니까? 나날이 새로워지는 우리의 모습이 잘 보이시는지요? 일신우일신에서 나아진다는 ‘신(新)’의 의도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 말의 깊은 뜻은 매일매일 한결같이 열심히 노력하는 성실성(誠實性)일 것입니다.
누구나 기분이 내키면 결심을 하고 며칠은 노력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고 하듯이, 그것을 지속적으로 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의지가 강한 사람일지라도 작심삼일의 법칙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결심에 따라서, 단지 삼일이 될 수도 있고, 석 달이 될 수도 있고, 삼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초심(初心)을 끝까지 유지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이런 본성을 다시 다그쳐 주는 것이 바로 일신우일신의 마음일 것입니다.
■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탕왕이 대야에 쓴 글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구일신, 일일신, 우일신)'은 새로워짐의 세 단계를 담고 있다. 참으로 어느 날 새로워진다는 뜻의 구일신(苟日新)은 공부의 효과가 처음 나타났을 때를 가리킨다.
논어 학이(學而)편에서 공자가 '배우고 그것을 때맞게 익히면, 이야말로 기쁘지 아니하냐(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고 한 말에도 이런 뜻이 담겨 있다.
배운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듣거나 보았다는 뜻이지, 곧바로 옳은지 그른지까지 다 안다는 뜻은 아니다. 설령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제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제대로 알고 제 것이 되도록 하려면, 배운 것을 일상에서 실천해야 한다. 과학에서는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실험을 하는데, 정치학을 비롯한 인간학에서는 실천을 한다.
실천함으로써 비로소 배운 것의 참뜻을 알게 되고, 나아가 이치를 깊이 느끼고 터득하게 된다. 그것을 두고 '이야말로 기쁘지 아니하냐!'라고 말한 것이다.
그 기쁨을 느낄 때, 그 느낌이 바로 새로워짐이다. 배운 것을 몰랐을 때와 다른, 이전보다 더 새로워진 자신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새로움은 한 차례 광풍처럼 찾아올 뿐, 저절로 더 이어지지는 않는다.
한 번 느낀 새로움을 다시 느끼거나 이어가려면, 배우고 실천하는 일을 쉬지 않고 해야 한다. 한 차례 새로움을 느꼈다고 해서 대단한 성취를 한 것은 아니다. 고작 맛을 보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전에 이런 경험이 없었던 사람이라면 스스로 대단한 도약이라도 한 듯이 여길 수도 있다. 그것은 착각이다. 그런 착각에 빠지지 않고 성큼 도약하고 싶다면, 공부를 거듭해야 한다.
그래서 '날마다 더욱 새롭게 하라'는 일일신(日日新)을 말한 것이다. 이렇게 날마다 새롭게 하려고 애쓰는 일이 바로 수신하는 공부다.
날마다 자신을 새롭게 하는 공부라야 덕(德)을 갖출 수 있다. 덕은 공부한 보람이고 효과다. 그 덕이 곧 제가와 치국, 평천하의 밑천이고 방편이다.
덕이 없이 제가나 치국, 평천하를 하려 들면, 도리어 집안이나 나라, 천하를 어지럽히게 된다.
관자의 심술 하에 나온다. '뜻과 기운이 안정된 뒤에야 행동이 올바름으로 돌아간다. 기운이란 몸에 가득한 것이고, 행동이란 올바름이 드러난 것이다. 몸을 채운 것이 아름답지 않으면 마음이 사물과 맞지 않고, 행동이 올바르지 않으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는다. 이러하므로 성인은 하늘처럼 되어서 사사로이 덮는 일이 없고, 땅처럼 되어서 사사로이 싣는 일이 없다. 사사로움은 천하를 어지럽히는 것이다.'
▶️ 日(날 일)은 ❶상형문자로 해를 본뜬 글자이다. 단단한 재료에 칼로 새겼기 때문에 네모꼴로 보이지만 본디는 둥글게 쓰려던 것인 듯하다. ❷상형문자로 日자는 태양을 그린 것으로 ‘날’이나 ‘해’, ‘낮’이라는 뜻이 있다. 갑골문은 딱딱한 거북의 껍데기에 글자를 새기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둥근 모양을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日자가 비록 네모난 형태로 그려져 있지만, 본래는 둥근 태양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갑골문에 나온 日자를 보면 사각형에 점이 찍혀있는 모습이었다. 이것을 두고 태양의 흑점을 표시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먼 옛날 맨눈으로 태양의 흑점을 식별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니 日자는 태양과 주위로 퍼져나가는 빛을 함께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듯하다. 태양은 시간에 따라 일출과 일몰을 반복했기 때문에 日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시간’이나 ‘날짜’ 또는 ‘밝기’나 ‘날씨’와 같은 뜻을 전달하게 된다. 그래서 日(일)은 (1)일요일(日曜日) (2)하루를 뜻하는 말. 일부 명사(名詞) 앞에서만 쓰임 (3)일부 명사(名詞)에 붙이어, 그 명사가 뜻하는 날의 뜻을 나타내는 말 (4)날짜나 날수를 셀 때 쓰는 말 (5)일본(日本) (6)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날 ②해, 태양(太陽) ③낮 ④날수 ⑤기한(期限) ⑥낮의 길이 ⑦달력 ⑧햇볕, 햇살, 햇빛, 일광(日光: 햇빛) ⑨십이장(十二章)의 하나 ⑩나날이, 매일(每日) ⑪접때(오래지 아니한 과거의 어느 때), 앞서, 이왕에 ⑫뒷날에, 다른 날에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달 월(月)이다. 용례로는 그 날에 할 일을 일정(日程), 날마다를 일상(日常), 날과 때를 일시(日時), 하루 동안을 일간(日間), 해가 짐을 일몰(日沒), 해가 돋음을 일출(日出), 그 날 그 날의 당직을 일직(日直), 직무 상의 기록을 적은 책을 일지(日誌), 하루하루의 모든 날을 매일(每日), 날마다 또는 여러 날을 계속하여를 연일(連日), 세상에 태어난 날을 생일(生日), 일을 쉬고 노는 날을 휴일(休日), 오늘의 바로 다음날을 내일(來日), 축하할 만한 기쁜 일이 있는 날을 가일(佳日), 일본과 친근함을 친일(親日), 일본에 반대하여 싸우는 일을 항일(抗日), 일이 생겼던 바로 그 날을 당일(當日), 일정하게 정해진 때까지 앞으로 남은 날을 여일(餘日), 날마다 내는 신문을 일간지(日間紙), 일상으로 하는 일을 일상사(日常事), 날마다 늘 있는 일이 되게 함을 일상화(日常化), 날마다 달마다 성장하고 발전한다는 뜻으로 학업이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진보함을 이르는 말을 일취월장(日就月將), 날은 저물었는데 갈 길은 멀다는 뜻으로 이미 늙어 앞으로 목적한 것을 쉽게 달성하기 어렵다는 말을 일모도원(日暮途遠),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막힌다는 뜻으로 늙고 병약하여 앞날이 얼마 남지 않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일모도궁(日暮途窮),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무언가 바라는 마음이 세월이 갈수록 더해짐을 이르는 말을 일구월심(日久月深), 한낮에 그림자를 피한다는 뜻으로 불가능한 일이나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일중도영(日中逃影), 해가 서산에 가깝다는 뜻으로 나이가 들어 죽음이 다가옴을 이르는 말을 일박서산(日薄西山), 같은 날의 두 번의 만조 또는 간조의 높이가 서로 같지 않은 현상을 일컫는 말을 일조부등(日照不等), 날로 달로 끊임없이 진보 발전함을 일컫는 말을 일진월보(日進月步),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달도 차면 점차 이지러짐을 일컫는 말을 일월영측(日月盈昃), 날마다의 생활을 이르는 말을 일상생활(日常生活), 해와 달과 별을 일컫는 말을 일월성신(日月星辰), 아침 해가 높이 떴음을 일컫는 말을 일고삼장(日高三丈), 항상 있는 일을 일컫는 말을 일상다반(日常茶飯), 날마다 달마다 성장하고 발전한다는 말을 일취월장(日就月將),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말을 일구월심(日久月深) 등에 쓰인다.
▶️ 新(새 신)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날 근(斤; 도끼)部와 木(목)과, 음(音)을 나타내는 辛(신)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辛(신; 바늘)과 木(목; 나무)으로 이루어진 진(榛; 개암나무, 잡목숲)의 옛 글자에 斤(근; 나무를 베는 도끼)을 더한 글자이다. 나무를 베어 땔나무를 하는 일을 말한다. 나중에 나무를 하다가 되었다. 땔나무의 뜻은 초목(草木)을 나타내는 초두머리(艹=艸; 풀, 풀의 싹)部를 더하여 薪(신)이라 쓰고, 新(신)은 베다, 새롭다, 새롭게 하다의 뜻으로 쓴다. ❷회의문자로 新자는 ‘새로운’이나 ‘새롭게’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新자는 辛(매울 신)자와 木(나무 목)자, 斤(도끼 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런데 갑골문에 나온 新자를 보면 辛자와 斤자만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나무를 잘라 땔감으로 만든다는 뜻이었다. 여기서 辛자는 발음요소이고 斤자가 ‘자르다’라는 뜻을 전달하고 있다. 금문에서는 여기에 木자가 더해지게 되면서 지금의 新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新자는 본래 나무를 잘라 ‘땔감’을 만든다는 뜻이었지만 후에 나무를 자르고 다듬어 ‘새로운 물건을 만든다.’라는 뜻이 확대되면서 ‘새로운’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新자가 ‘새롭다’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면서 소전에서는 여기에 艹(풀 초)자를 더한 薪(섶나무 신)자가 ‘땔감’이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新(신)은 (1)어떠한 명사(名詞) 뒤에 붙이어 새로운의 뜻을 나타내는 말 (2)중국(中國) 나라 이름의 하나. 왕 망(王莽)이 전한(前漢)을 쓰러뜨리고 세운 나라. 주례(周禮)에 따라 복고적인 개혁(改革)을 했으나, 적미(赤眉)의 난으로 망(亡)하여 광무제(光武帝)의 후한(後漢)으로 바뀜 (3)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새, 새로운 ②새로, 새롭게, 새롭게 다시 ③처음, 처음으로 ④새로움, 새것, 새로운 일 ⑤새해, 신년 ⑥새롭개 안 사람 ⑦새로 개간(開墾)한 땅 ⑧나라의 이름 ⑨새로워지다, 개선되다 ⑩새롭게 하다, 새롭게 고치다 ⑪친하다, 친하게 지내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옛 고(古), 옛 구(舊)이다. 용례로는 새로운 세계를 신세계(新世界), 예술계나 체육계나 어떤 사회에 새로 등장한 신진의 사람을 신인(新人), 관직 같은 데에 새로 임명됨을 신임(新任), 새로 지어 만듦을 신작(新作), 새로 들어옴을 신입(新入), 출판물을 새로 인쇄하여 내놓음을 신간(新刊), 새로운 물품을 신품(新品), 새로운 형을 신형(新型), 새롭고 기이함을 신기(新奇), 새로운 소식이나 비판을 신속하게 보도하는 정기간행물을 신문(新聞), 완전히 새롭게 어떤 일을 하는 일을 신규(新規), 새롭고 산뜻함 또는 채소나 생선 따위가 싱싱함을 신선(新鮮), 새로 설치함을 신설(新設), 새로 건축함을 신축(新築), 늦은 봄이나 초여름의 초목에 돋은 새 잎의 푸른 빛을 신록(新綠), 갓 결혼한 남자 또는 결혼하여 새서방이 될 남자를 신랑(新郞), 갓 결혼한 색시 또는 결혼하여 새색시가 될 여자를 신부(新婦), 일체의 묵은 제도나 방식을 고쳐서 새롭게 함을 혁신(革新), 묵은 것을 없애고 새롭게 함을 쇄신(刷新), 모든 것이 개혁되어 새롭게 됨 또는 묵은 제도를 아주 새롭게 고침을 유신(維新), 취향이 매우 새로움을 참신(斬新), 옛 것을 고쳐 새롭게 함 또는 종전의 기록을 깨뜨림을 경신(更新), 가장 새로움을 최신(最新), 묵은 것을 새롭게 고침을 개신(改新), 새로운 것을 앎을 지신(知新), 새로운 것을 맞아 들임을 영신(迎新), 아주 새로워짐을 일신(一新), 묵은 것이 없어지고 새것이 대신 생기거나 들어서는 일을 이르는 말을 신진대사(新陳代謝), 새로 정이 들어 얼마 되지 아니할 때를 이르는 말을 신정지초(新情之初), 새 것과 헌 것이 교대한다는 말을 신구교대(新舊交代), 새 것이 들어오고 묵은 것이 나간다는 말을 신입구출(新入舊出), 새로 두각을 나타낸 신인으로서 의기가 날카롭다는 말을 신진기예(新進氣銳), 땔감을 동나서 불이 꺼진다는 말을 신진화멸(新盡火滅), 새봄 좋은 명절이라는 말을 신춘가절(新春佳節) 등에 쓰인다.
▶️ 又(또 우)는 ❶상형문자로 오른손을 본뜬 글자이다. 본디는 오른쪽, 가지다, 돕다, 권(勸)하다를 뜻하였으나 뜻으로 빌어 썼다. 한자(漢字)의 부수(部首)로서는 손의 거동(擧動)에 관한 뜻을 나타내며 음부(音部)가 될 때에는 돕다, 풍부(豐富)하다의 뜻으로 쓰인다. ❷상형문자로 又자는 ‘또’나 ‘다시’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又자는 사람의 오른손을 그린 것으로 이전에는 ‘손’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중국에서는 오른쪽이 옳고 바름을 상징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이가 어릴 때부터 오른손잡이가 되도록 가르쳤다. 그래서 又자는 ‘손’을 뜻하다가 후에 ‘또’나 ‘자주’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자주 쓰는 손이라는 뜻인 것이다. 특히 금문에서부터는 손과 관련된 여러 글자가 파생되면서 又자는 손이 아닌 ‘자주 사용한다.’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하지만 又자가 다른 글자와 결합할 때는 여전히 ‘손’과 관련된 뜻을 전달한다. 그래서 又(우)는 ①또 ②다시 ③또한, 동시에 ④더욱 ⑤오른손, 오른쪽 ⑥거듭하다, 두 번 하다 ⑦용서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하물며를 이르는 말을 우황(又況), 또 말하기를 또는 다시 이르되를 이르는 말을 우왈(又曰), 의뢰받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의뢰함을 우뢰(又賴), 한두 번을 이르는 말을 일우(一又), 더욱이 또는 뿐만 아니라를 이르는 말을 우중지(又重之), 대청 빌면 안방 빌자 한다는 뜻으로 체면없이 이것저것 요구함을 이르는 말을 기차당우차방(旣借堂又借房), 제곱한 수를 또 제곱하여 몇 번이든지 곱한다는 말을 자승우승(自乘又乘), 몇 가지를 겸한 위에 또 더욱 겸한다는 말을 겸지우겸(兼之又兼), 오묘하고 또 오묘하다는 뜻으로 도의 광대 무변함을 찬탄한 말을 현지우현(玄之又玄)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