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형 펑크(funk) 밴드는 흑인 음악이 전 방위적 인기를 구가하던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리듬의 선구자로 추앙받으며 여러 후배들에 의해 애정과 존경의 대상이 된 대가족 팀입니다. 실제로 이들이 들려준 16비트 리듬과 그 위를 자연스럽게 흐르는 멜로디 그리고 리더 모리스 화이트(Maurice White)의 테너 보이스와 타악기 주자 필립 베일리(Philip Bailey)의 가성은 어스 윈드 & 파이어의 음악을 단순한 댄스 음악이 아닌 아프리카 흑인들의 진정성을 표현한 자기 발견이기도 합니다. 자, 이들의 대표곡들을 하나씩 알아보죠.
September
매년 8월 말만 되면 신청이 쇄도하는 이 곡은 많은 사람들이 8월이나 9월에 발표됐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1978년 11월에 공개됐습니다. 어스 윈드 & 파이어는 'September'의 히트 가능성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 있게 9월이 지난 11월에 싱글을 풀었던 거죠. 9월의 화창한 휴일을 연상시키는 이 곡은 무한 행복을 전이시키는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답니다. 기분이 우울해도 이 노래를 들으면 모든 근심, 걱정을 잊게 만드니까요. 1990년대에 이승환이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노래를 선곡한 적이 있습니다. 바로 그때 이 노래를 틀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이후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어스 윈드 & 파이어의 애청곡 순위가 'After the love has gone'에서 이 곡으로 서서히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건 이승환의 무게감도 작용을 했겠지만 그와 함께 1990년대 이후 전 세계 대중음악을 도배하고 이끈 흑인음악에 대한 이해도가 우리나라에서도 높아졌기 때문이기도 하겠죠.
After the love has gone
지난 1980, 1990년대 우리나라에서 어스 윈드 & 파이어 최고의 레퍼토리는 이 아름다운 발라드입니다. 1990년대에 발매된 수많은 컴필레이션 앨범에 거의 빠지지 않고 수록될 정도로 이 곡의 인지도는 확실했죠. 명 프로듀서이자 작곡가인 데이비드 포스터(David Foster)와 제이 그레이든(Jay Graydon) 그리고 재즈 록 밴드 시카고(Chicago)의 멤버인 빌 챔플린(Bill Champlin)이 만든 이 노래는 1979년에 인기차트 2위까지 올라 이들의 두 번째로 큰 히트를 기록했고 그래미 올해의 레코드에 후보로 올랐답니다. 물론 그래미 최우수 리듬 앤 블루스 그룹 상은 수상했구요.
음악 스타일을 뜻하는 '부기'와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에 등장하는 원더랜드를 합성해 춤의 이상향을 그린 이 노래는 기존의 어스 윈드 & 파이어 곡들과는 조금 차이를 보입니다. 그건 이들이 직접 만들지 않고 알리 윌리스(Allee Willis)와 존 린드(Jon Lind)라는 전문 작곡가가 함께 만들었기 때문인데요. 그래서일까요? 댄스곡이긴 하지만 리듬보다는 멜로디가 더 잘 들리죠. 여기서는 여성 보컬 그룹 이모션스(Emotions)가 참여해 풍성한 코러스를 선사하는데요. 그건 이모션스가 1977년에 발표해서 5주 동안 싱글차트 정상을 차지한 'Best of my love'를 작곡한 사람이 바로 모리스 화이트이기 때문입니다. 이모션스는 보은 차원에서 이 노래에 기꺼이 참여해 조력을 보탠 겁니다.
Let's groove
미국과 영국에서 3위를 차지한 이 펑키(funky) 넘버 역시 'September'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빛을 발하는 싱글입니다. 1981년에 공개된 'Let's groove'는 흑인 음악 차트 정상에서 무려 8주 동안이나 장기집권에 성공했고 그래미 리듬 앤 블루스 그룹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죠. 시대의 요구를 받아들여 신시사이저를 활용한 이 노래는 우리나라에선 1995년 호주의 보컬 그룹 CDB의 리메이크 버전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어스 윈드 & 파이어의 원곡도 재조명을 받았죠.
Fantasy
1977년, 모리스 화이트와 친동생이자 베이시스트인 버딘 화이트(Verdine White)가 합작한 이 노래는 국내에선 1990년에 이탈리아의 일렉트로닉 댄스 그룹 블랙 박스(Black Box)가 커버해 인기를 얻었고 2000년대에는 퍼프 대디(Puff Daddy), 나스(Nas), 98 디그리스(98 Degrees), 제이-지(Jay-Z) 그리고 최근에 라틴 힙합 그룹 데이(D.E.Y.)까지 여러 후배들이 'Fantasy'를 샘플링하면서 뒤늦게 대중화됐죠. 모리스 화이트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한 걸작 SF 영화 < 클로스 인카운터 - 미지와의 조우 >에서 영감을 받아 이 곡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가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어스 윈드 & 파이어의 골든 레퍼토리가 아닐까 합니다. 이제부터는 이들 외에 곁가지로 알고 있어야 할 노래들을 간단히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975년에 공개된 'Shining star'는 어스 윈드 & 파이어의 유일한 넘버원인데요. 이 곡으로 이제 흑인의 펑크(funk) 음악은 백인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장르로 스며들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맨하탄스(Manhattans)의 'Shining star'와 혼동하고 있지만 스타일이 완연히 다른 동명이곡이랍니다.
모리스 화이트와 알 맥케이가 합작한 'Sing a song'은 'September' 만큼이나 흥겹고 댄서블한 곡입니다. 1975년에 싱글차트 5위와 R&B 차트 정상을 차지한 이 노래는 이들의 그 어떤 곡들보다 혼섹션이 돋보이는데요. 필 콜린스가 1985년에 1위에 랭크시킨 펑크(funk) 넘버 'Sussudio'의 브라스 연주는 바로 이 'Sing a song'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습니다.
흑인음악 차트 넘버원과 싱글차트 12위를 기록한'Getaway'는 이들의 노래 중에서 가장 부르기 힘든 곡 중 하나입니다. 필립 베일리의 가성은 물론이고 전체적으로 키가 높아 노래방에서 섣불리 도전했다가는 큰 낭패를 보기 쉬운 노래죠. 아, 다행히 노래방 책자에 이 곡은 거의 없습니다.
역사상 최악의 영화 목록을 뽑을 때 빠지지 않는 작품 중에 하나가 바로 비틀스의 1967년도 앨범에 바탕을 둔 뮤지컬 영화 <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입니다. 1978년에 제작된 이 무비는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비지스(Bee Gees)와 꽃미남 싱어 송라이터 피터 프램튼(Peter Frampton)이 주연을 맡았고 그 외에도 에어로스미스(Aerosmith), 빌리 프레스톤(Billy Preston), 앨리스 쿠퍼(Alice Cooper), 도노반(Donovan), 커티스 메이필드(Curtis Mayfield), 이본느 엘리만(Yvonne Elliman), 티나 터너(Tina Turner) 등 엄청난 가수들이 출연했지만 영화에 대한 평가는 이 화려한 출연진과 비례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출연하지 말았어야 할 어스 윈드 & 파이어는 비틀스의 'Got to get you into my life'를 리메이크해 인기순위 9위를 인쇄했습니다.
이상 어스 윈드 & 파이어의 대표곡들을 간략하게 살펴봤는데요. 이들은 단순한 펑크(funk), 디스코 그룹이 아닙니다. 흥겹고 즐거운 음악을 들려주지만 원류 탐구의 시도를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죠. 백인들이 거북해할 수 있는 민감한 인종문제를 부담 없는 멜로디와 세련된 리듬으로 거부감을 줄여 만인이 즐길 수 있는 밝고 긍정적인 음악으로 스며들게 한 이 대형 펑크(funk) 패밀리는 자신들의 이념을 노래로 설득하는 영리함을 소유했습니다. 이제 음악뿐만이 아니라 어스 윈드 & 파이어가 하고 싶었던 말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