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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장 왕중양의 여인
구양봉은 온밤 내내 치주를 상대로 그 짓을 했다. 그는 몇 번이고 절정에 달해 신음을 토해냈다. 그렇게 하룻밤 보내고 나니 그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가 이렇듯 중원 무림을 찾아온 것은 비단 《구음진경》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심중에는 이 참에 이 백타산군 서독의 악명을 천하 무림에 톡톡히 드높여 놓아야겠다는 의도가 확고히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야만 설사 《구음진경》을 손에 못 넣는다 하더라도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을 터였다. 그는 누구라도 자
기 손에 걸려들기만 하면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는데 치주가 그 첫번째였던 것이다. 그는 중원 무림 호객들이 치주와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핍박을 당하며 손이야 발이야 빌 것을 생각하니 절로 흥이 나서 연신 징그럽게 웃음을 흘리며 요란하게 떠들었다.
"좋아, 훌륭해! 꼬마 미인, 넌 날 무척 즐겁게 해 주었어. 난 네가 한평생 만족하고 살게 해 주겠다."
치주는 치가 떨렸다. 그녀는 머리를 푹 숙인 채 그를 외면하고 있었다.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워 장막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자기 몸이야 어찌 되든 그럼으로써 단지흥을 살릴 수 있다는 일념으로 이를 악물고 참아 냈다.
구양봉은 날이 밝아서야 치주를 놓아주었다.
"참 좋았어. 좋았단 말이야……."
대환희 보살은 장막 밖에서 기색을 살피다가 구양봉의 그 한마디가 떨어지자 잠시 뜸을 들인 후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들어서자마자 치주 쪽을 힐끔거렸다. 치주는 되는 대로 옷을 걸치고 있었는 데 아랫도리가 벌겋게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래 장주님께선 이 한 밤 기분 좋게 보내셨는지 모르겠군요?"
그러지 않아도 구양봉은 묘한 여운이 남아 입을 벙싯거리다가 보살을 바라보며 요란히 웃어댔다.
"훌륭해, 정말 훌륭해! 보살은 참말로 내 맘을 잘 알아준단 말이야, 흐흐흐……."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입맛 좋게 비위를 맞추었다.
"구양 장주님, 어제 저 애와 잘 보내셨다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잘됐어요. 이제 장주님께서 내 말을 들으실 차례군요. 내가 저 애를 상납했으니 이번엔 장주님이 내 요구를 들어주셔야지요. 그래 어떻소, 내 보기엔 이번 화산의 무예 시합에는 무림 고수란 고수들은 다 모여들었으니, 당신이 그 기서를 빼앗긴 쉽진 않을 텐데……."
대환희 보살은 구양봉이 기분이 좋은 김에 얼른 매듭을 짓자는 심산에서 대뜸 말을 꺼냈다. 구양봉은 그 말이 거슬렸으나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그래 보살 생각엔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이렇게 합시다. 장주님께선 시름을 놓으세요. 당신은 위로 왕중양 한 사람만 대적하면 돼요. 제가 밑에서 화산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을 막아내겠어요. 그러면 당신은 왕중양하고만 싸우면 될 거 아니에요? 장주님께서 왕중양 한 사람만 이긴다면야 그 《구음진경》은 장주님 호주머니 속에 든 물건이 아니냔 말예요?"
대환희 보살의 말에 구양봉은 한껏 구미가 당겼다.
"훌륭하군, 대환희 보살. 당신은 참 수완이 좋군그래. 그렇게 하도록 하지. 일이 성사되면 내 당신한테 단단히 보답하지."
"기실 저도 그 《구음진경》을 손에 넣고 싶지만 재간이 못 미치니 장주님께서 꼭 그걸 얻기를 원해요. 다만 그 경서에 있는 무공 초수를 저한테 두서너 가지는 반드시 전수해 주어야 해요. 그 조건으로 난 장주님을 도와드리겠어요."
구양봉은 대환희 보살이 이처럼 겸손의 말을 하자 우쭐해져서 흔쾌히 대답했다.
"좋아, 내 그대 요구대로 해 주지."
"한데……."
대환희 보살은 일순 웬지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며 말을 맺지 못했다.
"한데 어쨌단 말이냐? 어서 말을 해라, 말을!"
"아무리 그런다고 해도 과연 구양 장주님이 단지흥의 일양지공, 홍칠공의 강룡십팔장, 왕중양의 선천신공을 다 이겨 낼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이 고수들을 다 이겨 내기란……."
구양봉은 대환희 보살이 한껏 추어올렸다가 다시금 그를 얕잡아 보며 종작없이 굴자 화가 머리 끝까지 솟구쳤다. 이 뚱뚱보가 그까짓 계집 하나 안겨 놓고 자기를 갖고 놀자는 수작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는 대로하여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이봐 뚱뚱보! 무슨 믿는 구석이 있어서 큰소릴 치는 모양인데 내 사장 맛을 보기 전에 냉큼 말하지 못할까! 무슨 좋은 계책이 있으면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하라구!"
그러나 대환희 보살은 선뜻 대답을 못하고 계속 아리송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그 순간 보살의 머리 속에 기가 막힌 계책 하나가 번개같이 스쳐 갔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손뼉을 탁 치며 환성을 올렸다.
"구양 장주님, 기실 당신이 그 경서를 얻자고 마음만 먹으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에요. 이리 좀 가까이 와 봐요!"
대환희 보살은 겉보기엔 미련해도 속에 꾀가 가득 들어찬 여인이었다. 구양봉이 다가가자 보살은 그의 귀에 대고 한참 동안이나 뭐라고 속닥거렸다. 이윽고 구양봉은 삽시에 얼굴이 환해졌다.
'나 이 백타산군은 한다면 하는 성미다. 천하의 기서를 왕중양 손에 두고서야 내 어찌 참을쏘냐. 난 기어이 그 책을 수중에 넣고 말 테다. 그러지 않고서야 내 어찌 편히 잠을 잘 수 있단 말인가?'
"좋소. 당신 계책대로 하지."
왕중양은 화산 꼭대기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한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다. 활사인묘 앞에서 그 여제자가 하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히 울리는 듯했다. 그 처녀는 그에게 먼저 올라가라고 하면서 임조영도 뒤미처 화산으로 갈 것이라고 말했었다. 왕중양은 은은히 미소를 지었다. 그는 무엇보다 짙어 가는 그녀의 병색이 여간 근심되지 않았었다. 하나 《구음진경》에 힘입어 독을 해독하자고 그토록 권고해도 듣지를 않고 왜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하나 이번에는 꼭 온다고 했으니 병세가 다소 나아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임조영은 승부심이 대단한 여인이다. 왕중앙과는 이미 십여 년이나 승부를 다투어 오고 있었다. 그녀가 화산 무예 시합을 놓쳐 버릴 리는 없다. 그녀가 오기만 하면 그는 기꺼이 그녀에게 져 주리라고 마음먹었다.
아니, 사정을 두지 않고 싸워도 임조영은 능히 그를 이겨 낼지도 모른다. 임조영은 그때 큰 바위에다 손가락으로 글자를 새겨 넣지 않았던가. 왕중양은 진심으로 탄복하여 그녀에게 활사인묘를 내주고 말았던 것이다. 임조영은 실로 천하에 드문 기녀(奇女)였다. 그녀가 자기에게 질 리 만무였다. 자기가 임조영에게 져서 《구음진경》을 내어준 뒤 훗날 그 활사인묘를 찾아가 함께 배우자고 하면 그녀는 응낙해 줄 것인가……. 뱀 독도 말끔히 해독하고……. 그는 씁쓰레
하니 미소를 지었다.
한 순간, 산 저쪽에서 홀연 긴 외침 소리가 들려 왔다. 실로 어마어마한 내력이었다.
'저 사람이 임조영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임조영이 아니라면 절대로 방심할 수 없지!'
그는 며칠 전 서독 구양봉에게 불의의 기습을 당한 후 한층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 그는 구양봉 같은 악인한테 지게 된다면 차라리 이 일전에서 《구음진경》과 함께 자신의 육신을 깨끗이 없애 버리리라고 마음을 굳혔었다.
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동해 도화도 도주 황약사였다. 그는 그의 아내 아형을 데리고 화산 아래에 당도했다. 그는 마침내 화산 아래에 이르러 아내에게 말했다.
"아형, 당신은 무공을 닦지 못했으니 먼저 이 옥석 두 개로 귀를 틀어막아. 왕중양도 이미 화산 아래 객점에 와 묵고 있다고 했으니 내가 당도했다는 걸 그에게 소리쳐 알려야겠어."
아형은 황약사가 시키는 대로 옥석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황약사가 머리를 뒤로 제치고 소리를 지르자 화산에 빽빽히 들어찬 수목들이 일제히 으스스 울어댔다. 옥석으로 귀를 틀어막고 있는 아형마저도 낯색이 창백하게 질리면서 겁이 나는 것이었다.
'저이의 공력이 이다지도 고강한데 누가 감히 이겨 낼 수 있겠는가? 그러니 저이는 반드시 《구음진경》을 얻고야 말 거야.'
왕중양은 산 저쪽에서 울려 오는 외침 소리를 듣고 중천에 떠오른 달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저 사람은 아마도 동해 도화도주 황약사일 게다. 저 소린 좀 무례한 듯하나 음충스럽지는 않아. 저 사람이 《구음진경》을 차지하게 된다면 최소한 무림에 해는 입히지 않을 게야."
그때 산 뒤쪽에서 또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린 적이 가라앉아 있었으나 길게 여운을 남겼다. 아마도 숨 가쁘게 밤길을 다그치는 듯싶었다. 왕중양은 곰곰 생각을 굴렸다.
'저 사람의 공력은 나보다 못하지 않겠군. 일전 나를 기습하던 구양봉일지도 모르지.'
뒤미처 산 쪽에서 또 소리가 들려 왔다. 이번엔 낭랑히 불경을 외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자못 평온했다. 하지만 한 글자, 한 구절 힘껏 외우는 그 목소리는 아주 박력이 있었다.
왕중양은 그 목소리를 듣고 다소 근심이 되었다.
'이 사람의 공력은 아마도 나보다 나은 것 같구나. 저 사람이 외우는 불경은 아주 평온하고 살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황약사나 구양봉의 외침과는 달리 공력을 아주 깊이 닦은 게 분명하구나.'
왕중양은 이 목소리의 주인이 대리 황제 단지흥일 거라고 생각하였다.
왕중양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모두들 화산의 무예 시합을 고대하고 있다. 몇 년 간이나 벼르고 별렀던 그 기다림이 이제야 결실을 맺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 그가 기다리는 사람은 과연 올 것인가. 임조영도 필시 찾아올 테지만 일찌감치 모습을 나타내지는 않을 터였다. 그는 지난날 임조영을 오랫동안이나 기다리게 했었다. 이제는 그가 임조영을 기다릴 차례였다. 언제까지든 임조영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리라. 그는 조용히 침잠하면서 마음의 온갖 사심을 털어
내려고 정신을 한곳에 집중시켰다.
밤은 점점 깊어 가고 있었다.
왕중양이 무엇 때문에 밤에 무예 시합을 벌이려고 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구음진경》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만 추측하고 있었다. 《구음진경》은 기경(奇經)이라 꼭 밤에 얻어야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중양 진인이 하필 한밤중에 화산으로 오라고 했겠는가…….
그러나 왕중양의 의중은 딴 데 있었다. 그는 이번 쟁탈전에서 그 여인과 마지막으로 승부를 가르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녀와 승부를 가려 지난날 뜻하지 않게 두 사람 사이를 얽어맸던 그 비정한 운명의 끈을 끊으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화산의 어둠 속에 지난날의 원망을 깨끗이 묻어두리라고 그는 거듭거듭 다지고 있는 것이었다.
종남산 뒤쪽으로 자그마한 돌비탈이 있고 그 돌비탈 위에는 수풀이 우거졌다. 그 수풀은 매우 울창하여 가을이 되었는데도 아주 푸근한 느낌을 주었다. 바로 거기에 임조영의 활사인묘가 있다.
그 석굴 어귀로 언뜻 사람 그림자가 희끗하더니 휘파람 소리가 길게 꼬리를 끌었다. 그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몇 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구양봉과 대환희 보살 무리들이었다. 이들은 지금 보살의 계책으로 왕중양의 여인 임조영을 사로 잡아 왕중양을 협박해 번거롭게 화산 무예 시합 따위는 치르지도 않고 그녀의 목숨과 《구음진경》을 맞바꾸자고 할 심산으로 내처 이 종남산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뚱뚱보 여인 하나가 소리를 쳤다.
"석실 안 사람은 들으시오! 서역 백타산군 구양봉이 좀 뵙기를 청하오!"
그러나 석굴 안은 잠잠하니 오래도록 기척이 없었다. 구양봉은 이내 대꾸가 없자 발싸심이 나서 더 큰소리로 외쳐댔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이냐? 손님 대하는 법이 이다지도 무례하냐? 문을 부수고 들어갈 테다!"
그러자 대환희 보살이 구양봉의 옷소매를 잡아 끌며 짐짓 질책을 했다.
"구양 장주님, 좀 고분고분하세요. 임조영이란 여인은 예사 여인이 아니에요. 듣건대는 이 여인은 왕중양을 이겨 이 석굴을 차지했대요. 이 석굴 이름이 활사인묘인 것을 봐도 그녀가 속세를 얼마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아요. 당신이 그 여인 손에 잘못 되면 강호에서 비웃음만 사는 꼴이 아닌가요?"
그 말에 구양봉은 시뜻해서 냉소를 쳤다.
"보살은 이 구양봉을 너무 업신여기는구먼. 나도 임조영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래 내가 계집 하나 제압하지 못한단 말인가?"
구양봉은 임조영을 조금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는 한평생 사내만을 대단하게 여기고 여인은 늘 하잘것없는 것들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임조영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결국 계집이 아니란 말인가. 그저 왕중양의 여인이란 것 때문에 여기까지 이렇게 친히 온 것이지, 그렇지만 않다면 직접 찾아 나선다는 건 그로서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아무리 해도 석굴 안에서 찍소리도 없자 이제는 대환희 보살이 나서서 큰소리로 열을 올렸다.
"구양 장주님, 길게 고함을 치세요. 아무려면 이렇게 끈질긴데 안 나오겠어요? 어서요!"
"그런데 아까는 뭐가 어쩌고 어째? 고분고분하라구?"
구양봉이 의기양양하게 한마디 내쏘자 대환희 보살은 무색해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구양봉은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짓고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수림의 나무들이 정정 울리고 메아리가 오래도록 그치지 않았다.
임조영은 석실 안에서 천년 동안 얼어붙은 석상(石狀) 위에 올라앉아 기를 모으고 있었다. 밖에서는 연해 떠들썩하니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그녀는 점점 신경이 곤두섰다.
'목소리를 들으니 심보가 고약한 놈이로군. 혹시 왕중양에게 무슨 일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녀는 황급히 일어나 제자를 불렀다.
"굴 밖에 누가 왔느냐?"
"사부님, 복색을 보아하니 서역 오랑캐 같은데 아주 흉악해 보이는 녀석이 하나 와서 뵙기를 청하옵니다. 또 여인들도 여럿 되는데 모두 다 어찌나 뚱뚱한지 보기조차 역겨웠어요."
"뚱뚱하다구? 그렇담 그 여인들은 운남 대환희 보살네 무리들이군. 그런데 그 사내는 누구지?"
임조영은 석실 밖으로는 추호도 나가지 않겠다 맹세했으나 혹 왕중양 신변에 위험이 닥쳤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도저히 그냥 버티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구양봉은 임조영이 쉬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조갈이 날 지경이었다. 한 순간 돌 문이 쩌그덩거리더니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임조영이었다. 그녀는 조금도 저어하는 기색이 없이 당당한 걸음걸이로 구양봉의 코앞까지 바투 다가왔다.
"당신은 누구요? 대관절 누군데 여기 와서 고함을 지르며 이 난리를 부리는 게요?"
언젠가 먼발치에서 한 번 보았지만 가까이서 보니 더 더욱 천하 절색이라 구양봉은 일순 얼빠진 사람마냥 넋을 놓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가 쌀쌀맞게 다그치자 언뜻 정신을 차리고 대뜸 주워섬겼다.
"그대가 임조영인가?"
마음은 사뭇 설ㄹ으나 구양봉은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짐짓 거만한 기색으로 고개를 까딱거리며 여인을 쏘아보았다. 임조영은 아무 대꾸 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자 구양봉은 잠시 바라보다가 정신을 바짝 가다듬고 큰소리로 말했다.
"그럼 좋아. 난 왕중양과 화산에서 한판 붙어 볼 생각인데, 듣자니 당신이 왕중양을 이긴 적이 있다기에 당신과 먼저 한번 재미를 보려고 이렇게 온 것이다. 자, 어서 한판 붙어 보자구!"
임조영은 자못 멸시하는 듯한 눈빛으로 구양봉을 노려보았다.
"흥, 보아하니 왕중양한테도 질 것 같은데 감히 내게 이기겠다구?"
"듣던 대로 방자한 계집이로군!"
구양봉은 짓씹듯이 내뱉었다.
"그래, 어디서 굴러먹던 녀석인데 감히 나와 싸우겠다는 거냐? 왕중양이 내 손에 패했다는 사실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모양이군? 왕중양도 내 적수가 못 되는데 네 녀석은 죽으러 예까지 온 게야?"
"아직 내 명성도 듣지 못했다니 우물 안 개구리로군. 난 서독 구양봉이다! 왕중양은 네 년한테 진짜로 진 게 아니라 일부러 져준 게야, 일부러! 허장성세는 집어치우라구!"
임조영은 가느다랗게 눈살을 찌푸리며 구양봉을 건너다보았다.
'왕중양이 일부러 나한테 져 줬다구? 그럴지도 모르지. 하나 그가 참말 나보다 못할까? 그렇다면 그이는 왜 남한테는 다 이기면서 나한테는 늘 져주는 것일까? 내가 지난번에 비석에 글을 새길 때…… 이건 나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다. 왕중양, 당신은 나한테 일부러 양보할 필요가 없노라. 이 임조영이 참말로 당신을 이길 수 없는 줄 아는가?'
구양봉은 유심히 임조영의 기색을 살폈다. 방금 나오는 대로 그저 아무렇게나 허튼소리를 지껄였을 따름인데 임조영이 이처럼 반응을 보이다니……. 그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이럴 때 손을 쓰면 이 여인을 사로잡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만 되면 왕중양이 나한테 굽히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지…….'
그때 갑자기 대환희 보살이 입을 열었다.
"임조영, 듣자니 당신이 천하 제일인자라고 하여 구양 장주님이 당신과 무예를 비겨 보려고 온 거예요."
임조영은 대환희 보살을 싸늘히 쳐다보더니 홱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똑바로 구양봉을 겨누었다. 구양봉은 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좋아, 신난다! 한바탕 해 보자. 내가 너한테 진다면 사내대장부가 아니다.'
구양봉은 독사장을 홱 들이댔다. 그의 독사장은 워낙 그의 형인 구양적이 쓰던 병장기로서 거기에 그의 무공이 실리자 아주 지독한 것이 되었다.
"어디 독사장 맛을 보아랏!"
임조영은 아무 대답도 없이 구양봉의 손목을 노리며 검을 휘둘렀다. 그녀가 검을 휘두른 순간, 구양봉은 그만 흠칫 놀라고 말았다.
'이 여인이 대뜸 공격을 들이대는 걸 보면 무학이 뛰어나긴 뛰어나구나. 뿐더러 검세에 한치도 빈틈이 없다. 실로 무학대가다운 기백이다!'
구양봉은 임조영의 검을 피하면서 바짝 정신을 집중해 사장을 휘둘렀다. 채 십여 합도 싸우지 못해 구양봉은 벌써 조급해졌다. 임조영의 검술에는 실로 공격과 방어가 엄밀하게 맞물려 있었다. 두 사람은 수십 합을 싸웠지만 승부를 가르지 못했다. 구양봉은 임조영을 인질로 잡겠다는 계략이 수포로 돌아가는 듯하자 조급하면서도 화가 머리 끝까지 솟구쳐 마구 고함을 지르며 독사장을 휘둘러댔다.
"쥐새끼 같은 녀석이 함부로 종남산에 발을 들여놔? 죽고 싶은 게로군. 목숨 하나는 여기 두고 가도 내 개의하지 않으마."
임조영이 한껏 이죽거리자 구양봉도 질세라 임조영의 화를 돋웠다.
"뭐라구, 이 여우 같은 것이? 네 년은 왕중양의 노리개지? 놈과 물론 통정했을 테고! 내가 네 년을 붙잡아 왕중양의 《구음진경》과 맞바꿔야겠으니 어서 순순히 사장을 받으라!"
임조영은 그간 석실에서 오래도록 지내며 왕중양에 대한 화가 점차 가라앉자 뱀 독에 중독되어 있는 중에도 마음을 침잠하고 새로운 검법 한 가지를 익혔다. 이 검법은 내공심법(內功心法)이기도 했는데 그녀는 이를 옥녀심경(玉女心經)이라고 이름했다. 그녀는 이젠 웬만해서는 그 어떤 감정의 충동을 받지 않았으나 구양봉이 무례하게 욕설까지 퍼붓자 불같이 화가 나 전력을 다해 중독된 몸을 추스르면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좋아, 어디 내 검 맛이나 보아라!"
그녀는 초수를 바꾸어 옥녀심경 초수를 쓰기 시작했다. 한켠에 서 있던 그녀의 제자도 사부가 이 초수를 쓰는 것은 처음 보았다. 임조영이 옥녀심경 초수를 펼쳐 내자마자 구양봉은 연신 피하기만
하면서 쩔쩔맸다. 제자는 저도 모르게 퐁퐁 뛰며 소리쳤다.
"멋지다! 사부님, 저 놈에게 단단히 버릇을 가르쳐 줘요!"
임조영은 기세를 올려 구양봉에게 더욱 바싹 공격을 들이댔다. 그러나 그 순간 비명 소리가 날카롭게 등짝을 때렸다. 얼른 머리를 돌려 보니 대환희 보살이 그녀의 제자를 틀어쥐고 징그럽게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 제자를 놓아주지 못할까!"
임조영은 분기탱천하여 구양봉에게 한층 가열차게 검을 휘두르면서 호통을 쳤다. 그 제자는 임조영과 보통 사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 처녀가 갓난쟁이 아기였을 때 들판에서 주워 와 이만큼 크도록 함께 동고동락해 왔다. 그러니 이 두 여인들 사이의 사제의 정이란 더없이 깊은 것이었다. 그런 터에 눈앞의 광경을 보고는 그녀는 도저히 태연할 수가 없었다.
구양봉이 득의양양하여 껄껄 웃어댔다.
"잘했어, 대환희 보살! 난 이 년을 쉽사리 이길 수도 있어. 하지만 당신이 이 년의 제자를 붙잡고 있으면 일이 한층 쉬워지지. 임조영, 어서 검을 내려놓아. 내가 네 년의 혈도를 눌러 왕중양한테 끌고 가야겠다."
임조영은 제자와 대환희 보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보살의 얼굴은 징그럽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보살은 분명 자기 제자한테 독약을 쓰고 있는 것이리라. 일순 제자는 또다시 비명을 질러댔다. 임조영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그때 임조영의 제자가 갈라진 목소리로 외쳐대기 시작했다.
"이 나쁜 년, 나를 놓아라! 사부님, 이 년 말을 듣지 말고 그 더러운 놈을 어서 죽여 버리세요. 절 위해 복수를 해 주세요, 사부님!"
임조영은 화가 치밀어 올라 단칼에 구양봉을 쓰러눕히고 싶었지만 마음이 조급하여 손끝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검을 급히 휘두를수록 옥녀심경 초수를 제대로 쓸 수가 없었고 그 위력은 점점 못해 갔다. 그러자 역으로 구양봉은 마음을 다잡고 독사장을 더욱 힘있게 휘둘러댔다. 이렇게 되자 두 사람은 서로 어슷비슷하게 검과 사장을 주고받게 되었다.
'사부님께서 힘들어 하시는구나. 사부님께서 검을 쓰시는 초수가 좀전보다 퍽 못하다. 이러다간 사부님께서 지게 될지도 모른다. 사부님께서 지게 된다면 난 하등 세상에 살아 있을 가치가 없는 계집이다. 사부님께선 한평생 남한테 져본 일이라고는 없지 않은가. 천하에 이름을 날린 대협 왕중 양마저 사부님의 손에 패하지 않았던가. 사부님께서 수치를 당하시게 할 수는 없다…….'
처녀는 머리 속으로 슬한 사념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언뜻 자기가 죽게 되면 사부님은 반드시 노기충천해 자기를 위해 복수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부님, 이 제자는 사부님께 더는 효성을 드리지 못하옵니다. 사부님께서는 자중하시옵소서!"
그녀는 큰소리로 외치고는 급히 혀를 깨물어 자살하려 하였다.
바로 그때였다. 그녀는 갑자기 등허리가 마비되는 듯해 몸을 움찔 떨었다. 혀의 감각도 점점 없어지는 듯했다. 그리고 이어서 적이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살아가자면 고통을 당하게 마련인데 무엇 때문에 그처럼 쉽사리 생명을 버리려 하는가?"
임조영도 그 목소리를 들었다. 어느 사이엔가 왕중양이 대환희 보살 뒤에 서 있었다. 왕중양은 화산 밑에서 그녀를 기다리다가 아무래도 그녀의 병환이 걱정되어 그대로 있을 수 없어 다시 한 번 권해 보고자 재우쳐 종남산으로 달려온 터였다.
"대환희 보살, 공연히 힘 빼지 말게!"
대환희 보살은 왕중양을 보더니 질겁을 하여 창백하게 질려서는 살살거렸다.
"백타산군이 화산 무예 시합을 하기 전에 임 여협과 놀아 보느라고 저래요."
왕중양은 태연한 기색으로 구양봉을 건너다보았다.
"구양봉, 자네가 임 시주님과 싸우는 건 난 참섭하지 않겠어. 하지만 대환희 보살이 남의 제자를 인질로 삼아 위협하는 건 나쁜 짓이야."
왕중양은 지극히 평온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지만 대환희 보살의 귀엔 마치 작탄이 터지는 것처럼 들렸다. 보살은 극구 발뺌을 했다.
"중양 진인, 그렇게 날 나무라지 마세요. 임 시주님의 제자가 나를 능멸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만……. 이제 놓아주면 되잖아요."
대환희 보살은 연신 왕중양에게 굽실거리며 임조영의 제자를 탁 놓았다.
"자 가라, 가!"
왕중양은 임조영의 성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자기 일에 끼여드는 걸 좋아하지 않을 터였다. 구양봉이 아니라 천하 무림 호걸들이 다 온다고 하여도 그녀는 왕중양이 자기 일에 관계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왕중양은 한켠에 물러나 앉아 눈을 감고 양신(養神)을 했다.
임조영은 자못 못마땅한 기색으로 퉁명스레 내뱉었다.
"전진교 사람이 예서 뭘 하려고 가지 않고 그러고 있어요?"
임조영의 어조에 호의라고는 조금도 없자 왕중양은 괜히 성을 돋우게 될까 저어되어 얼른 말했다.
"임 시주, 난 당신과 구양 장주가 싸우는 걸 구경하려고 그러오. 구양 장주의 독사장 초수가 천하에 다시 없고 그대의 검술도 세상에 다시 없으니 좀 보자고 그러는 것일 뿐이오."
그러자 임조영은 대뜸 쓴웃음을 지으며 빈정거렸다.
"왕중양, 사공이 뱃머리 돌려 대듯 말을 잘도 둘러대시는군요. 내 일에 털끝만큼도 참견 말아요. 당신은 천하를 정정 울리는 대협이니 당신은 당신 할 대로 대협 노릇이나 하고 난 나대로 활사인 노릇이나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 내 일에 상관 마세요!"
왕중양은 어색하니 웃으며 입맛만 다셨다.
구양봉은 경난을 많이 겪어 본지라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것을 보고 대번에 그것이 사랑 싸움인 것을 알아챘다.
'보아하니 저 미련퉁이 대환희 보살이 보기는 바로 보았군. 이 왕중양은 임조영을 사랑하고 있는 게 분명해. 내가 만약 참말로 이 임조영을 사로잡기만 한다면 왕중양은 고분고분 내 말을 듣지 않을 수 없겠다!'
하지만 왕중양이 이곳에 와 있는 한 구양봉이 임조영을 사로잡는다는 건 한갓 망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익히 알고 있는지라 입맛이 몹시도 씁쓰레했다.
"구양봉 네 이 놈, 네 놈은 이 활사인묘로 죽으러 왔느냐?"
임조영은 왕중양이 들으라는 듯이 더욱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자 구양봉은 바싹 약이 올랐다.
'네 년이 왕중양의 계집이든 어떻든 내 오늘 단단히 버르장머리를 고쳐 놔야겠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꼭 그 격이 아니냐! 감히 이 구양봉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모르고 한갓 계집이 날뛰다니…….'
구양봉은 무서운 소리를 내지르면서 독사장을 치켜 들고 임조영을 향해 똑바로 찔러 갔다. 임조영은 번개같이 피했다.
그러나 임조영은 이번에는 있는 재간을 다 부리려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가 워낙 그 자체로 검법이기도 하고 내공심법이기도 한 옥녀심경을 뱀 독에 중독된 중에도 일심으로 연마한 것은 왕중양한테 뒤지지 않기 위함이었다. 왕중양이 다만 금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대송 강산을 되찾을 생각에만 불타고 자기를 성심으로 대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그녀는 결코 자기도 왕중양한테 뒤져서는 안 된다고 오래 전부터 다짐하고 또 다짐해 왔다. 그리하여 무예에 있어서만
큼은 기어이 왕중양보다 우세를 점하리라고 벼르며 활사인묘로 들어간 뒤에도 병세를 아랑곳 않고 무예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아 이 옥녀심경을 창안해 낸 것이었다.
그러한지라 임조영은 결코 왕중양한테 옥녀심경 초수를 허투루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왕중양과 싸우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삼아 온 그녀가 아니었던가. 그러니 어찌 왕중양이 보는 앞에서 자기가 창안한 검법을 경솔히 써먹을 수 있겠는가. 한편으로는 일심으로 왕중양에게 대적하려 하면서도 때가 되면 그녀는 그 초수를 필히 왕중양한테 전수해 주리라고 마음먹고 있었기 때문에 좀더 극적인 순간에 그에게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 더욱이 그녀는 내심 필히 자신의
옥녀심경이 왕중양의 《구음진경》보다 훨씬 훌륭하다고 여기고 있었으므로 그 마음이 더욱 간절하였다. 그런고로 지금은 진정 때가 아닌 것이다.
그러자 구양봉은 실로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이 여인은 왜 아까의 그 괴상한 검법을 써먹지 않는 것일까……. 그는 워낙 임조영의 검법에 눌려 힘이 부쳤는데 그녀가 옥녀심경 초수를 쓰지 않자 더럭 의심이 났다. 그렇게 되니 정신을 한곳에 집중할 수가 없어 자연 그의 독사장 초수에도 예사롭지 못하게 틈이 많이 생겼다.
그러나 대환희 보살은 속으로 웃고 있었다. 그녀는 진작에 왕중양과 이 임조영 사이에 아주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간파해 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임조영이 대번에 그 검법을 걷어들일 리 없는 것이다. 대환희 보살은 음흉한 눈빛으로 왕중양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천하를 뜨르르하게 울리는 대협이라 해도 저 사내 역시 치인(痴人)에 불과하다고 보살은 속으로 마음껏 비웃어댔다.
임조영의 검법은 갈수록 속도가 느려졌으며 아주 힘겹게 검을 휘둘러대고 있었다. 워낙 임조영은 왕중양과 공력이 어슷비슷하여 이들 둘이 싸운다면 승부를 가르기 어려운 정도이다. 그리고 이 구양봉과 제대로 싸운다면 더 빨리 끝을 낼 수도 있다. 하지만 왕중양이 신경이 쓰여서 그녀 역시 정신을 한곳에 모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전력을 다해 싸우지 못했으므로 검법은 평온하기 그지없고 허점도 많았다.
왕중양은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뚫어지게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일순 임조영이 빈틈을 보인 사이 구양봉의 독사장이 그녀에게로 똑바로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바로 구양봉 독사장의 그
유명한 천외비장(天外飛杖) 초수였다.
왕중양은 급급히 몸을 날려 임조영과 구양봉 사이로 끼여들며 외쳤다.
"구양봉, 그만 하면 한 재미 톡톡히 봤으니 이젠 됐네! 그만 내려가게!"
구양봉은 이빨을 바드득 갈면서 손을 걷어들였다. 뭐라 해도 왕중양과 싸울 생각은 없었다. 그와 싸우다가는 곤욕을 치르기 십상이고 화산에는 아예 발도 못 들여놓은 채 강호에서 비웃음만 사게 될 게 뻔했다.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능글맞게 깔깔 웃으며 임조영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워낙 활사인묘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모두 참말 정이 깊구먼그래. 묘 안팎에 온통 사랑이 철철 넘친단 말이에요. 중양 진인,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으하하하……."
임조영은 매섭게 보살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두 눈에선 살기가 튀었다.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찔끔하여 뚱뚱보 여인들에게 어서 빨리 산에서 내려가자고 서둘러댔다. 그리고는 제일 먼저 앞장서서 꽁무니 빠지게 달려 내려갔다. 구양봉도 씁쓰레하니 입맛을 다시며 냉소를 머금은 채 그 뒤를 따라 어슬렁어슬렁 산 아래로 내려 갔다.
왕중양은 그윽이 임조영을 바라보았다. 둘 사이엔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왕중양이 먼저 어물어물 입을 열었다.
"조영이, 당신……. "
그가 운을 떼자마자 임조영이 그의 말허리를 똑 끊으며 찬바람이 일도록 쌀쌀맞게 내뱉었다.
"중양 진인, 당신은 존귀하신 교주님이시고 전진교는 천하 무림의 사표(師表)이옵니다. 당신은 그래, 너무나 존귀해서 저를 그렇게 부르시나요? 아까처럼 그냥 임 시주라고 부르는 게 좋겠어요."
왕중양은 흠칫하며 임조영의 눈길을 좇았다. 그러나 그녀는 애써 피하고 있었다. 그는 임조영이 지금 자기를 조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좀전에는 외간 사람들 앞이라 존중해 주어야 겠다고 생각하여 그녀를 임 시주라고 불렀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둘만 남게 되자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게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왕중양은 자기가 이렇게 한 것이 무에 잘못된 것같이 여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임조영은 왕중양이 얄미워서 그 거동을 낱낱이 걸고 넘어졌다.
왕중양은 그녀의 말에 어정쩡해져서 선뜻 말을 못 이었다.
'임조영은 아직도 나를 미워한단 말인가…….'
그는 못내 서운했다. 그는 미움도 사랑에서 연유한다는 그 도리를 알지 못하는 숙맥 같은 사내였다.
그는 다시 어물어물 입을 열었다.
"난 당신과 함께 화산에 오르려고……."
"제가 화산에 가선 뭣하겠어요? 전 그 《구음진경》이라는 걸 얻을 생각이 없고 천하에서 으뜸가는 무림 영웅이 될 생각도 없어요. 전 활사인일 따름이에요. 하필 인간세상의 허영을 쟁탈할 필요는 제겐 하나도 없어요."
임조영은 사뭇 담담하게 말했다.
"조영이, 내 말 좀 들어 보오. 내가 처음에 이 석굴을 팠을 때 난 내 스스로 활사인묘라는 이름을 지었더랬소. 그때 난 이 석굴을 당신한테 빼앗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소. 그리고 또……."
임조영이 말을 가로챘다.
"제가 당신을 이겼거든요. 당신은 그걸 인정하지 않나요? 물론 이제 와서 그걸 달가워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당신은 지금 천하 무림의 제일인자이니까요. 달가워하지 않는 것은 당연해요. 그러나 당신은 일찍이 저한테 진 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해요. 안 그런가요?"
"아오, 난 그대한테 졌었소."
"왕중양, 당신은 천하의 제일인자이긴 하지만 내게만은 패했어요. 그러니 지금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건 간에 당신은 관계치 말아요. 일단 패한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사사건건 내 일을 참섭하려 드는 건가요?"
"조영이, 답답하구려. 난 당신의 일을 간섭하려는 게 아니오. 난 다만 당신이 이 책을 보아 달라고 부탁하려는 것일 따름이오. 이 책은 천하의 기서인 《구음진경》…… 난 이 책을 읽고 나서 천하의 무학이란 바다와 같이 넓다는 걸 알게 되었소. 우리가 배운 건 참말 한줌 재에 불과하단 말이오. 더군다나 당신의 병세가……. 지난번에 왔을 때는 그리 걱정할 정도는 아니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그대의 안색을 보니 결코 소홀할 수가 없겠구려. 그러니 빨리 그 독을
해독해야 하지 않겠소?"
임조영은 선뜻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애잔한 눈길로 왕중양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왕중양, 당신은 진정으로 제가 배운 것이 한줌 재에 불과하다고 여기시나요? 당신은 끝내 저한테 탄복하지 않는군요. 그러면서 제가 뱀 독에 중독된 걸 걱정해선 무엇 하겠어요……. 뿐더러 당신은 내가 그때 당신을 꾀로 이긴 걸 알게 되면 더군다나 날 우습게 여기겠지요. 당신은 이 책에 기재된 무예가 내 것보다 훨씬 더 우수하다고 하고 싶으시겠지만 당신의 그 책이 뭐 그리 대단한가요? 제가 새로 창안해 낸 옥녀심경이야말로 고금에 없는 것이에요. 더욱이 그 책
에 이 뱀 독을 해독할 만한 그 무슨 비결이 있을 리 없어요. 그리고…… 당신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한 난 이렇게 조용히 죽음을 기다릴 뿐이이에요.'
임조영은 들릴 듯 말 듯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무거운 것이 짓누르는 듯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이들 두 사람은 모두 고금에 드문 무학기재로 두 사람은 마주앉기만 하면 평소에도 늘 무학에 대한 논쟁을 벌였고, 두 사람 다 자기 주견을 고집하는 바람에 매번 말다툼이 생겼다.
뿐더러 임조영은 왕중양이 이 활사인묘에 들어가 있지 못하게 하려고 자청해 이 석굴로 들어가 온갖 고초를 겪었으나 왕중양은 그 마음을 진정 알아주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임조영은 왕중양이 자기의 《구음진경》만 으뜸이라고 내세우면서 다만 겉치레로 자기의 병세가 어떻다고 허세를 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대한 사랑이 깊을수록 임조영은 왕중양에 대한 미움도 깊었다.
왕중양이 이런 여인의 심사를 알 리가 없었다. 그는 줄곧 임조영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으나 그 십여 년 동안 본의 아니게 그녀가 마음 고생을 한 걸 무시해 버린 것이 되어 그에 대해 속죄를 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임조영을 잘 대해 주면 줄수록 그녀는 성만 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애절하게 임조영을 바라보았다. 임조영은 그의 눈길을 슬그머니 피해 버렸다.
'당신은 절 활사인묘에 들어가게 했지요. 그래서 전 천하 무림이 다 아는 활사인이 되었어요. 당신은 이제야 비로소 나한테 인정상 빚을 졌다는 것을 느낀 것 같군요. 당신 같은 매정한 사람의 청을 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요.'
임조영은 웬일인지 마음이 더욱 외로 꼬이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서먹서먹하니 말이 없었다. 이윽고 왕중양이 먼저 어색하니 말문을 열었다.
"이 책을 좀 읽어 보오. 참말 신기하다니까."
"당신은 그것 때문에 화산으로 천하 무림 고수들을 다 불러모아 땀을 흠뻑 흘려야 할 테니 당신이나 많이 보세요. 저에게는 아무 소용 없어요. 전 그것 없이도 제 무공을 닦아 나갈 수 있어요. 그리고 제 병도 제가 알아서 할 테니 더는 괘념치 마세요."
왕중양은 그만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말았다. 그는 원래 임조영 앞에만 서면 구변이 신통치 못했다. 아마도 그래서 더욱 그녀의 부아를 돋우는 것인지도 몰랐다. 만일 사내가 구변이 좋아 가끔씩 달콤한 말도 해 줄 줄 안다면 여인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필 것이고 웬만한 분노도 얼음 녹이듯 녹일 수 있을 텐데……. 그렇게만 된다면 그들의 사랑에 이처럼 오래도록 금이 가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왕중양은 종래로 임조영만 보면 말문이 콱 막혀 버
리곤 했다.
임조영은 왕중양의 이런 꼴을 볼 때마다 더욱 성이 났다. 그가 평소에 무림 호걸들과 한자리에 모일 때면 얼마나 재미있게 얘기를 하고 열변을 토하는가. 하지만 자기 앞에 오기만 하면 무뚝뚝하니 입을 다문 채 얼빠진 사람처럼 있기가 일쑤였다. 그리하여 임조영은 더 더욱 왕중양을 미워하게 되고 그가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까지 생각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임조영은 왕중양이 자기를 어떻게 대하든 간에 왕중양을 위해 기꺼이 고초를 겪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결국
에는 왕중양을 위해 죽기를 소원해 왔다.
"조영이, 난 이 책을 가져다 당신한테 보이려고 언제부터 작정하고 있었소. 이 책엔 나도 이해하지 못할 곳이 적지 않소. 당신이 만일 나와 함께 《구음진경》을 배우기만 한다면 한 근심 덜겠는걸 당신은 한사코……."
임조영은 마음속으로 도리질을 했다.
'당신은 또 날 속이려 드는군요. 무슨 무예를 익힌다고 그래요? 두 사람이 함께 그걸 익히자고요? 왕중양, 당신은 이젠 이 땅의 신선으로 치부되는 사람인데 나하고 무슨 무예를 익히자고…….'
"중양 진인, 당신이 그 《구음진경》을 잘 보존하기란 그리 쉽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당신 혼자 그것을 간직하고 절대로 경솔하게 남에게 내보이지 마세요."
임조영이 끝내 이렇듯 뻣뻣하게 나오자 왕중양은 할말이 없어졌다. 이런 때에 왕중양이 임조영 당신은 내 사랑이고 나 때문에 활사인묘에까지 들어가 있는데 내가 이 경서를 당신한테 내준들 어떻단 말인가 하고 뜨거운 말 한마디만 했더라면 임조영의 가슴속에 서리서리 쌓인 원한도 봄볕에 눈 녹듯 사라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왕중양은 이런 생각을 심중에 품고만 있을 뿐 입 밖에 낼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왕중양은 그토록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었다. 남녀간의 일이란 본디 아차하는 사이에 금이 갈 수도 있는 터, 그가 이처럼 미욱하게 구니 임조영이 매번 쌀쌀맞게 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래, 저 사람은 맘속에 뚱딴지 같은 궁리가 있기 때문에 내가 이 활사인묘에 거처하는 걸 원치 않는 거야. 매번 이 일만 생각하면 불안해지는 모양이군.'
"당신이 자꾸 날 찾아오는 건 마음속에 승복하기 어려운 점이 있어 그러는 거 아닌가요? 나하고 다시 승부를 내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서?"
"난 당신과 그 무슨 승부를 내거나 하지는 않아."
왕중양은 딱 잘라 말했다. 그는 가슴속에 서린 감정을 뭐라고 이름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날의 내기를 두고두고 원통하게 생각해 왔다. 자기가 그 활사인묘에서 나오지 않겠다는 맹세만 하지 않았던들 임조영이 어찌 이 차디차고 음습한 활사인묘로 들어갈 생각을 했을 것인가? 그 일만 해도 정녕 후회막급인데 어찌 또 임조영과 승부를 가르려고 한단 말인가.
"중양 진인께서 딱히 그럴 마음이 아니시라면 전 이제 그만 들어가 봐야겠어요."
임조영은 쌀쌀하게 돌아섰다. 두어 걸음 떼어놓다가 그녀는 문득 발길을 멈추더니 주춤 뒤를 돌아보았다.
"그것이 그리도 대단한 경서라면 함부로 나돌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세요."
그녀의 낯빛엔 어두운 그늘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녀는 잠시 왕중양을 바라보더니 이내 발길을 돌려 내처 활사인묘로 들어가 버렸다.
왕중양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임조영이 석굴로 들어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두 사람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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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