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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
<영적 감각의 회복을 위하여...>
나병이 지닌 특징이 몇 가지 있습니다.
오랜 잠복기를 거쳐 서서히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병이 깊어지면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증세 중에 하나가 감각을 상실한다는 것인데,
피부가 촉각, 통각, 온도 감각을 상실하게 되면서 화상을 자주 입게 됩니다.
뜨거운 것을 만졌는데도 불구하고 뜨거움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여기저기 상처가 많아지게 됩니다.
따지고 보니 감각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미각을 지니고 있기에 적정량의 소금이나 설탕을 섭취하게 되어 건강을 유지합니다.
통각을 지니고 있기에 미리 미리 큰 병을 예방할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뱃속 어딘가에서 마치 할퀴는 듯한 통증이 느껴진다는 것은 위장이나 소장, 대장 어딘가에 큰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통증으로 인해 우리는 몸의 현재 상태를 예측하고 대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 증상에 대해 무감각하다는 것은 미련한 것을 넘어 아주 위험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영성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우리의 영혼도 나병에 감염될 때가 있습니다.
영적 무감각 상태에 빠져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큰 죄 속에, 엄청난 신앙의 오류 속에 빠져 들어있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말해서 영혼의 나병이 들렸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죄의식 없이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영적 무감각 상태에서 드러나는 전형적인 증세가 있습니다.
자신의 내면은 돌아볼 줄 모릅니다.
모든 것을 이웃의 탓, 환경의 탓, 세상 탓으로 돌립니다.
입만 열면 불평불만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영적 무감각 상태에서 체험했던 것처럼
해야 할 바는 하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바를 행하고 있습니다.
도무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죄의 상태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상태는 우리가 하느님과 분리된 상태에 놓여있음을 의미합니다.
영적 나병 상태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할 일은
하느님의 적극적인 개입을 간절히 청하는 것입니다.
은혜롭게도 치유의 은총을 입은 온 몸에 나병이 걸린 나병환자처럼 말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루카5장 12절)
주님을 향한 절박함, 간절함, 주님을 향한 돌아섬,
결국 회개를 통해 우리는 영적 치유는 물론 육적 치유의 길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치유를 통한 구원의 길로 접어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 감각의 회복입니다.
진심으로 가슴을 치는 일입니다.
지난 죄와 과오에 대해 마음 아파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통각의 회복입니다.
모르는 사이에 나병 균이 사람의 신경계에 침투해서 육체적인 감각을 소멸시키는 것처럼
하느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악령은 인간의 마음 안에 스며들어 영적 감각이나 자기 성찰의 능력을 마비시킵니다.
영적 감각의 마비 상태는 결국 영혼이 작동을 멈춘 상태, 결국 하느님 은총과 단절된 상태입니다.
영적 감각의 마비 상태에서 인간은 너무나 쉽게 분별력을 상실하고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영적인 감각은 어떤 상태인지 한번 확인해보면 좋겠습니다.
심각한 영적 나병에 걸려 아무런 죄의식 없이, 지난 삶에 대한 반성이나 성찰에 대한 아무런 개념도 없이
그저 동물적인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장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참된 안식(安息)>
도원에 있을 때는 물론이고, 안식년을 맞이하여 잠시 수도원을 떠난 지금도
'말씀의 낙(樂)'으로 살아가는 '가난한 영혼'입니다.
도대체 '말씀의 낙없이 무슨 낙으로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말씀의 은총을 통한 자아 초월(self-transcendence)의 가난이요, '가난한 영혼'에게 선사되는 참된 안식입니다.
새벽 창밖이 환해서 순간 눈이 떠졌습니다.
주님이 등불을 환히 켜들고 저를 깨우셨던 것입니다.
보름 후 며칠 지나지 않았기에 밤 하늘에 달린 둥근 달, '주님의 등불'이 온누리를 환히 비추고 있었습니다.
주님 안에 머물 때 비로소 참된 안식에 평화요, 참된 위로에 치유입니다.
안식년을 맞아 언제 어디서든 주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고 있는 제 삶입니다.
문득 떠오른 다음 성경 말씀이 안식의 의미를 분명히 깨닫게 했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마태 11,28)
역시 제가 고백성사 때 보속의 처방전 말씀으로 많이 써드린 구절입니다.
공동번역의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보다 훨씬 마음에 와 닿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새삼 '안식' 역시 주님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내가 만드는 안식이 아니라 주님의 선물인 안식입니다.
주님이 참된 안식을 주셔야 안식년을 잘 지낼 수 있습니다.
곧 이어지는 다음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마태 11,29)
참된 안식의 정체를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학원인 삶의 현장에서 주님의 복된 멍에를 메고
온유와 겸손의 예수성심(聖心)의 사랑을 배워 나갈 때 비로소 안식의 선물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바 후반부 구절입니다.
공동번역은 '너희' 대신에 '너희의 영혼'으로 되어 있고, 이 단어 선택이 더 적절하고 분명합니다.
바로 '나'는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참 나'의 전인적 존재가 되는 것은 영혼이 주님 안에서 안식을 누릴 때입니다.
영혼을 잊고, 영혼을 잃고, '영혼 없는 사람들'처럼 사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나 마음 깊이에는 누구나 영혼의 안식을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렵고 힘들 때 고향이나 성당 또는 수도원, 성당 묘지나 수도원 묘지를 찾는 마음, 역시 영혼의 움직임이요,
궁극의 본향(本鄕)인 하느님을 찾는 영혼들임을 상징합니다.
얼마 전 방문했던 미국 성당 곁에 넓고 평화롭게 자리잡은 성당 묘지를 보면서도
삶과 죽음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하느님의 집, 영혼의 고향같은 성전임을 깨달았습니다.
모교(母校), 모원(母院), 모태(母胎), 모원(母鄕)이란 단어들을 통해서
역시 우리의 시원(始原)인 하느님의 모성을 찾는 영혼들의 갈망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어제 하루도 참된 안식에 대해 많이 생각했던 날입니다.
10여년 이상 매일 요셉수도원 홈페이지에 올리던 강론을 홈페이지 수리차 올리지 못하니 온종일 심란(心亂)하고 불편했습니다.
바로 영혼의 고향을 상징하는 요셉수도원의 홈페이지였던 것입니다.
얼마 후 완전히 새롭게 단장된 홈페이지에 강론을 올림으로 비로소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참 고향은, 본향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 안에 머무를 때 참된 안식에 영원한 생명의 체험입니다.
진정 살아있는 삶이 됩니다.
어제 홈페이지에 가입할 때의 순간적 선택도 재미있었습니다.
비밀번호를 잊었을 경우를 대비한 '최고의 보물은 무엇인가?'묻는 물음에, 즉시 '하느님'이라 써 넣었습니다.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중요한, 결코 잊을 수 없는 명칭, '하느님'에 아주 만족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고,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있지 않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의 영원한 화두는 '사랑'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아드님을 통한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인 영원한 생명의 사랑이
바로 영혼을 살게 하며 참 안식과 평화를, 참된 위로와 치유를 줍니다.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의 치유가 이를 입증합니다.
천형(天刑)이라 일컫는 나병의 치유는 천주(天主)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나병이 상징하는 바 우리의 고질적 영적, 육적, 정신적 질환입니다.
사실 내적 깊은 상처의 아픔과 열등감으로 많은 이들이 영적, 육적, 정신적 천형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복음의 나병환자의 영적 후각(嗅覺)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온 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은 예수님을 보자 본능적으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청합니다.
완전히 자신을 비운 겸손의 극치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자신을 낮춰 비웠을 때 주님을 만납니다.
참 간절하고 절실한 기도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에 응답한 주님의 자비로운 치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즉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나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습니다.
나병환자의 간절하고 절실한 믿음에 예수님의 '연민의 마음', '사랑의 터치', '능력의 말씀'의 삼박자 응답으로 일어난 기적입니다.
주님을 만나 전인적 치유로 영육의 참된 안식을 선물 받은 나병환자입니다.
복음의 마지막 대목이 참된 안식의 비밀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외딴 곳이 상징하는 바 우리의 은밀한 기도처이자 주님을 만나는 참된 안식의 자리입니다.
영혼이 살기 위해, 참된 안식을 위해 외딴 곳의 장소와 시간은 필수입니다.
평생, 매일, 규칙적으로 이렇게 우리의 기도처이자 안식처인 주님의 집, 성전에서 간절한 미사전례를 통해 주님을 만날 때,
선사 받는 참된 안식과 평화, 위로와 치유입니다.
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어떤 책에서 본 내용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자전거 일주에서 겪은 일을 이야기합니다.
자전거 일주를 하다가 자기와 마찬가지로 부산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는 세 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20시간 안에 가겠다고 새벽 일찍 출발한 팀이었지요.
혼자 자전거 타는 것이 힘들어서 함께 해도 되겠느냐고 묻자,
자기네들은 기록을 갱신해야 하기 때문에 자기들 일행에서 뒤쳐져도 기다려 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 함께 자전거를 타던 중, 그만 그 일행의 맨 후미를 담당했던 사람이 자그마한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지는 사고가 났습니다.
그는 크게 넘어졌는지 일어서지를 못합니다.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일행의 남은 두 명은 다친 동료를 내버려두고 기록 갱신을 위해 자전거를 타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답니다.
그 동료에게 “우리를 이해하지?”라고 말하고 말입니다.
기록 갱신. 물론 중요하지요.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이 없고서는 기록 자체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며칠 전 새벽에 제 휴대전화가 울립니다.
발신 표시를 보니 처음 보는 낯선 번호였습니다.
‘이 새벽에 누구야? 잘못 걸은 전화 같은데 받지 말까?’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또한 새벽에 이것저것 할 것이 많아서 전화 받는 것이 귀찮다는 생각도 들었지요.
하지만 쉼 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결국 전화를 받았습니다.
받자마자 흐느껴 우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신부님, 저 ***에요. 신부님, 제 아들이 교통사고가 났어요. 지금 신부님이 필요해요.”
저는 병원을 확인하고 곧바로 출발했습니다.
병원 응급실에 도착하니 그 아들은 이미 주님 곁으로 갔더군요.
유족들과 함께 기도를 바쳤습니다.
유족들을 위로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서 만약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할 일이 많다는 생각에 그리고 잘못 걸린 전화일 것이라는 생각에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계속해서 후회했을 것입니다.
그날 새벽에 있어서 제게 중요한 것은 새벽에 하는 일이 아닌, 바로 전화를 받는 것이었지요.
덜 중요한 것을 가장 중요한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은 아니었을까요?
이를 이천 년 전 예수님께서는 꼭 집어서 보여주십니다.
예수님 앞에 한 나병환자가 나타나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의 말처럼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로 분명히 나병이라는 병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대시지요.
이는 당시 율법에서 강조하는 정결 규정을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댔기 때문에 몸이 더럽혀졌을 것이라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몸이 더러운 사람이 과연 치유의 기적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이 나병환자는 치유의 은총을 얻습니다.
이는 곧 율법을 통해서 치유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은총을 통해서 치유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리고 중요한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닌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시는 것이지요.
내 삶에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떠올려봅시다.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세상의 물질과 명예가 아닌 사람 자체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또한 내가 내세우는 기준이 아닌 주님께서 내세우시는 기준이 더 중요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기준인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삶 안에서 주님의 커다란 은총들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
<'치유자'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참 좋았던' 원래 상태로(창세 1,31)
이 세상과 사람들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치유자'로 오신 분입니다.
1월 9일의 복음 말씀인 '나병 환자를 고치시다(루카 5,12-16).'는
"예수님은 치유자이신 분"이라는 것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어떤 나병 환자가 자기를 고쳐 달라고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그의 병을 고쳐 주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를 원문대로 번역하면, "나는 원한다."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루카 5,12)이라는 병자의 간청에 대한 응답으로 하신 말씀이지만,
사람들을 고쳐 주는 일은 원래 예수님께서 원하신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깨끗하게 되어라."는 "원래대로 건강하게 되어라."인데,
여기서 '깨끗하게 되다.'는 병자의 인생이 원상 복구되는 것도 뜻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가정과 사회로 복귀하는 것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하느님 앞에 나서는 것까지 포함하는 말입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나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게 되면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같았고,
나병에 걸린 병자들은 죽은 사람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고쳐 주셔서 원래의 생활로 복귀시킨 것은
죽은 사람을 살리신 것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병자를 깨끗하게 만들어 주신 일을
몸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깨끗하게 만들어 주신 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은 죄에서 벗어나서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물론 '병'이 곧 '죄' 라는 것은 아니고, 모든 병자가 죄인이라는 것도 아니고, 죄 때문에 병에 걸린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죄'는 곧 '병'이라고 말할 수 있고, 죄인은 영혼의 건강을 잃은 사람, 즉 아픈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해성사를 '치유의 성사'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마태오복음서 저자는 '치유자'로 오신 예수님을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는" 분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마태 12,20).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는다는 말은
이미 부러져서 죽은 갈대도 다시 건강하게 살리신다는 뜻입니다.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는다는 말은
이미 꺼진 심지에 다시 불을 붙이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들은 모두 "예수님은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시는 분"이라는 뜻이 됩니다.
'부러진 갈대와 연기 나는 심지'는 인류 전체의 상황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까지 인류의 상황은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는 길을, 또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전부 다 부러진 갈대였고, 연기 나는 심지였습니다.
그랬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생명의 길을 알려 주셨고,
사람들을 그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6)
이 말에 대해서 "나는 부러진 갈대도 아니고, 연기 나는 심지도 아니다."라고 주장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또는 "나는 메시아가 필요 없다. 나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다른 길을 알고 있다."라고 주장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메시아를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메시아의 구원을 안 받겠다는 것이고, 그런 경우에는 자기가 안 받아서 못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이 아닌 다른 길은 '구원의 길'이 아닙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는 예수님 말씀은
"다른 길은 없다."는 뜻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구원을 주시는데도 안 받겠다고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자기들이 의인이라고 생각했고, 또 자기들은 틀림없이 구원을 받는다고 자신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메시아의 구원을 애타게 갈망하지는 않았고, 사실상 메시아를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요한 7,37)라고 말씀하셨는데,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물'을 마실 수 있지만,
실제로 마시는 사람은 "나는 목마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목마르지 않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생명의 물을 주어도 마시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요한 8,24)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은 부러진 갈대를 다시 살리시는 분이지만, 갈대 쪽에서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끝까지 예수님 안에서 살면서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요한 15,3-4)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요한 15,6ㄱ)
신앙인은 '이미 깨끗해진' 사람이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 계속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만일에 노력하지 않고 자기는 이미 깨끗해졌다는 자만심에 빠지면
전보다 더 더러운(더 나쁜) 상태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 전주교구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세상을 이기는 힘, 피>
우리가 살아가면서 지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배고픈 이유와 같을 것입니다.
바로 세상을 살자면 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식사를 매번 해야 하는 이유는 그 에너지가 어디론가 사라지기 때문인 것처럼
세상 삶도 끊임없이 에너지가 보충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은 밥이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미국에 톰슨이라는 초등학교 여교사가 있었습니다.
개학 날 담임을 맡은 5학년 반 아이들 앞에 선 그녀는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아이들을 둘러보고 모두를 똑같이 사랑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첫 줄에 구부정하니 앉아 있는 작은 남자 아이 테디가 있는 이상 그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톰슨 선생은 그 전부터 테디를 지켜보며 테디가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옷도 단정치 못하며 잘 씻지도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테디를 보면 기분이 불쾌할 때도 있었습니다.
끝내는 테디가 낸 시험답안지에 큰 X표시를 하고 위에 커다란 F자를 써넣는 것이 즐겁기까지 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톰슨 선생님이 있던 학교에서는, 담임선생님이 아이들의 지난 생활기록부를 다 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테디것을 마지막으로 미뤄두었습니다.
그러다 테디의 생활기록부를 보고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테디의 1학년 담임선생님은 이렇게 썼습니다.
“잘 웃고 밝은 아이임. 일을 깔끔하게 잘 마무리하고 예절이 바름. 함께 있으면 즐거운 아이임.”
2학년 담임선생님은 이렇게 썼습니다.
“반 친구들이 좋아하는 훌륭한 학생임. 어머니가 불치병을 앓고 있음. 가정생활이 어려울 것으로 보임.”
3학년 담임선생님은 이렇게 썼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마음고생을 많이 함. 최선을 다하지만 아버지가 별로 관심이 없음.
어떤 조치가 없으면 곧 가정생활이 학교생활에 까지 영향을 미칠 것임.”
테디의 4학년 담임선생님은 이렇게 썼습니다.
“내성적이고 학교에 관심이 없음. 친구가 많지 않고 수업시간에 잠을 자기도 함.”
여기까지 읽은 선생은 비로소 문제를 깨달았고 한없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반 아이들이 화려한 종이와 예쁜 리본으로 포장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가져왔는데,
테디의 선물만 식료품 봉투의 두꺼운 갈색 종이로 어설프게 포장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더욱 부끄러워졌습니다.
선생은 애써 다른 선물을 제쳐두고 테디의 선물부터 포장을 뜯었습니다.
알이 몇 개 빠진 가짜 다이아몬드 팔찌와 사분의 일만 차 있는 향수병이 나오자, 아이들 몇이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팔찌를 차면서 정말 예쁘다며 감탄하고, 향수를 손목에 조금 뿌리자 아이들의 웃음이 잦아들었습니다.
테디 스토다드는 그날 방과 후에 남아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오늘 꼭 우리 엄마에게서 나던 향기가 났어요.”
그녀는 아이들이 돌아간 후 한 시간을 울었습니다.
그녀는 그날부터 태디를 특벽히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테디에게 공부를 가르쳐줄 때면 테디의 눈빛이 살아나는 듯했습니다.
그녀가 격려하면 할수록 더 빨리 반응했습니다.
그 해 말이 되자 테디는 반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되었고
모두를 똑같이 사랑하겠다는 거짓말에도 불구하고 가장 귀여워하는 학생이 되었습니다.
1년 후에 그녀는 교무실 문 아래에서 테디가 쓴 쪽지를 발견 했습니다.
거기에는 그녀가 자기 평생 최고의 교사였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6년이 흘러 그녀는 테디에게서 또 쪽지를 받았습니다.
고교를 반2등으로 졸업했다고 쓰여 있었고, 아직도 그녀가 자기 평생 최고의 선생님인 것은 변함이 없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4년이 더 흘러 또 한 통의 편지가 왔습니다.
이번에는 대학 졸업 후에 공부를 더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그녀가 평생 최고의 선생님이었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선생님이라 쓰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름이 조금 더 길었습니다.
편지에는 ‘Dr. 테디 스토다드 박사’라고 사인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해 봄에 또 한 통의 편지가 왔습니다.
테디는 여자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으며, 톰슨선생님에게 신랑의 어머니가 앉는 자리에 앉아줄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녀는 기꺼이 좋다고 화답했습니다.
그런 다음 어찌 되었을까요?
그녀는 가짜 다이아몬드가 몇 개 빠진 그 팔찌를 차고, 어머니와 함께 보낸 마지막 크리스마스에 어머니가 뿌렸었다는 그 향수를 뿌렸습니다.
이들이 서로 포옹하고 난 뒤 이제 어엿한 의사가 된 테디 스토다드는 톰슨 선생에게 귓속말로 속삭였습니다.
“선생님, 절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해주셔서, 그리고 제가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톰슨 선생은 또 눈물을 흘리며 속삭였습니다.
“테디 너는 완전히 잘못 알고 있구나.
내가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바로 너란다.
널 만나기전 까지는 가르치는 법을 전혀 몰랐거든.”
테디 스토다드 박사는 미국 아이오아주 데스 모이네스라는 도시에 있는 감리교 병원 암 연구 센터의 원장이라고 합니다.
퍼온 글이고 스티븐 W 배노이의 『우리 아이에게 주는 가장 귀한 선물 10가지』에 나오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선생님이 학생을 사랑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저 돈을 위해 일을 하는 메마른 직장인이 되어 가르치는 것이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학생을 사랑하게 되면 학생들이 보고 싶어서 빨리 학교로 달려가고 싶어집니다.
더 부지런해지고 더 노력하고 더 희생하게 됩니다.
사랑은 사람을 가만히 쉬게 놔두지 않습니다.
학생은 이런 선생님 밑에서 사랑을 먹으며 다시 공부하고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테디는 어머니가 돌아가심으로 자신에게 사랑을 줄 사람을 아무도 갖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원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쓰러져가는 테디에게 세상을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인 사랑을 준 사람이 톰슨 선생님이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요한이 말하는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이라고 합니다.
그 믿음은 스스로의 힘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내어주는 것인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당신 옆구리에서 피와 물의 형태로 주셨습니다.
그 피와 물로 우리가 힘을 얻고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톰슨 선생님이 준 사랑이 바로 성령님이라고 한다면,
피는 테디의 보잘 것 없는 선물을 기쁘게 받아준 행동이고,
물은 학교에 남아서 테디를 따로 가르쳐 준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과 피와 물은 서로 일치하는 것입니다.
테디는 이 피와 물로 표현된 사랑의 성령을 받고 믿음의 열매를 다시 맺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지금도 당신 피와 물을 통해 믿음의 성령을 보내주시고 계십니다.
십자가만 바라보아도, 피와 물이 나오는 성체 앞에만 앉아있어도 힘이 생기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살이가 지친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무엇이 부족하고 또 그것을 얻기 위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알아야만 합니다.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으며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준다고 가르친다.
요한의 첫째 편지에서 ‘사랑’이라는 주제는 4장에서 그리고 특히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에 관한 주제와 결합될 때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저자는 이 두 번째 주제에 대해 덧붙인다.
이런 맥락에서 무엇보다도 ‘세상을 이기는 신앙’이 강조되고 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에 관하여 해주신 증언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는 것이다.”(1요한 5,11)
닷, 홀던, 마샬, 슈트렉커 등은 ‘하느님의 증언’이 성령과 물과 피의 증언들을 합친 것이라고 본다.
요한은 하느님의 삶이요 종말론적 구원인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파견되어 나타나셨으며
우리가 ‘만질’ 수 있는 아들 안에 있다고 선포한다(5,11-12).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기에(5,12)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에서는 나병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피부병을 나병이라 한다.
나병은 불결하고 전염성이 강하다고 여겼으므로, 나환자들은 다른 이들과의 접촉을 피해야 하였다.
그들은 사람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불결, 불결” 하고 소리를 질러야 했고,
예루살렘과 기타 성곽도시에는 들어가지도 못했고 다른 곳에서는 따로 살아야 했다.
나아가 종교의식이나 사회생활에 참여할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나환자들은 '산 송장' 취급을 받았다.
율법교사들의 눈에 그들은 나병이라는 형태로 자기 몸에 죄를 짊어진 이들로 보였다.
그들이 만지는 것은 즉시 불결한 것이 되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경계의 대상이었고 배척받는 죄인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한 나환자가 자신의 처참한 처지를 알고 인정하면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5,12) 겸손하게 예수님께 깨끗하게 해주실 것을 간청한다.
치유 여부는 온전히 예수께 달려있음을 알고,
나병환자는 선입견이나 자기 주장을 버리고 가장 낮은 자세로 자신을 그분의 뜻에 온전히 내맡겼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시자 곧 그에게서 나병이 떠나갔다(5,13).
나병이 떠나감은 단순한 몸 안의 치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아픔과 고통과 영혼의 어둠 상태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음을 의미한다.
그토록 "쓴맛이었던 바로 그것이 도리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한 것"(성 프란치스코 유언 3)이다.
이는 하느님의 자비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의 결과였다.
한없이 낮추는 자세가 소통과 치유와 해방을 가져온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리라!
참된 믿음이란 어떤 것일까?
참된 믿음을 지니려면 무엇보다도 신앙의 대상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히 알아야 하고 그분께 초점을 맞추고 집중해야 한다.
참 신앙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자세로" 믿는 분께 모든 것을 기꺼이 맡겨야 한다.
참 신앙에는 사랑의 동기 외에 다른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믿음은 순수해야 하고 진실해야 하며 항구해야 한다.
때와 장소에 따라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을 한다면 참 신앙이 아니다.
참 신앙을 지닌 사람은 겸손하며 차별을 없애려 오신 예수님의 마음을 받아들이며 삶으로써 실천한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동기로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나환자를 해방시켜 주셨다.
그분은 자신이 부정하게 되거나, 율법을 어겼다고 적대자들로부터 비난받는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으셨다.
그분께서 접촉이 금지된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는 것은 승리자의 위엄 있는 동작이다.
그분의 이런 행동으로 “버림받았던” 한 병자가 다시 생명을 회복하고 공동체에 되돌아 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도 모두가 멀리하고 싫어하는 '좋지 않음'의 상황에 있는 이들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어야 하지 않을까?
'영원한 생명 안에 머무시는' 그분은 몸소 인간 조건 속으로 들어오시어
우리의 나약함과 어려움을 가엾게 여기시는 연민의 정을 드러내 보이시며 우리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주신다.
그분은 우리가 당신을 탁월한 치유자로 여기고 필요할 때만 당신께 낯을 돌리는 것을 원치 않고 당신 안에 머물길 바라신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을 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이다(1요한 5,12).
우리 모두 사랑으로 오신 그분을 믿어 영원한 생명의 길, 해방의 길로 나아가자!
영원히 살기 위해 생명이신 그분께 있는 그대로의 나를 개방하고 내맡기도록 하자!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영혼의 나병이 나에게서 떠나가게 해주시라고 기도드리자!
- 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장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지혜로운 말씀과 능력은 어디서 온 것일까?
생각해 봅니다.
그 답은 외딴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시는 모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외딴 곳은 ‘광야’로 가셨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달콤한 자리를 떠나 하느님을 만나러 나가는 작은 탈출입니다.
광야는 바로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분의 뜻을 행하셨습니다.
그것이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
(마태 6,6)
기도를 통해 내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게 되고, 또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요, 영혼의 숨결이라고 합니다.
어떤 이에게 기도는 “오아시스 없는 사막을 가로질러 가는 것입니다.”
나의 갈증과 목마름을 시원하게 해줄 물만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사막을 죽기 살기로 건너는 것입니다.
또한 “기도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이며, 그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토마스 키팅 신부).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을 하더라도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기도’에서 말하듯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병에 걸린 사람이 엎드려 청한 것처럼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것은
‘모든 것은 주님께 달려 있고, 나는 오로지 주님의 처분만을 바랄 뿐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이 믿음의 자세가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자세입니다.
기도의 목적은 나의 원의를 이루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데 있는 것이고,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관계를 회복하면 모든 능력이 거기에 있습니다.
어느덧 나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는 사람으로,
내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를 확장하려는 사람으로 바뀌어있음을 감사하게 됩니다.
늘 행복하게 됩니다.
그러니 외딴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한 나병환자의 마음으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당시 나병환자는 공공장소에 나올 수 없는 상황입니다.
혹 누가 가까이 오면 ‘다가오지 말라’고 소리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나병환자는 더 이상 다른 길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리는 간절한 심정으로 하소연했습니다.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청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저를 살리든지 죽이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저의 목숨은 당신께 달려있습니다.’하는 표현입니다.
또한 ‘한 말씀만 하십시오. 당신만이 저의 희망입니다.’하는 순종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분 앞에 피조물로써 경배하는 자세입니다.
‘당신만이 저의 모두입니다.’하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올 때 취할 자세는 바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자세입니다.
그 안에 치유의 능력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손을 내밀어 병자에게 대시고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며 나병을 치유하신 주님께서
우리가 앓고 있는 영적, 육적 모든 병을 치유해 주시기를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청합니다.
사랑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당신의 따뜻한 손길을.....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순례지 본당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
나병은 한번 손상된 신체가 다시 복구되지 않는 악성 피부병이다.
손가락과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거나 눈썹이 빠지며, 코와 입이 문드러져 얼굴이 변형되어 사람 형상이라 보기 힘들 정도다.
“나는 사람이 아닌 문둥이올시다.” 했던 시인 한하운의 말 그대로다.
그 가족은 제 피붙이이지만 동네로부터 격리시켜 죽음을 기다리게 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원망 말라. 하늘이 내린 병이라는데 어쩌겠느냐?’
‘하늘이 내린 병?’
나병 환자는 귀가 번쩍 뜨였다.
‘아, 길이 있다! 하늘이 내린 병이라면 하늘이 보낸 이가 낫게 할 수 있는 거다!’
벌떡 일어난 그는 단숨에 쫓아가 예수님 앞에 엎드렸다.
“하늘이 보낸 분이시여, 하고자만 하신다면 저를 깨끗이 낫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손끝에서 천상의 자비가 전해졌다.
“깨끗하게 되어라!”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 했다(마태 16,19 참조).
하늘이 내린 병은 하늘에 약이 있고,
인간의 마음에서 생긴 병은 마음을 바꿈으로써 치유한다.
욕심 부려 얻은 번뇌는 욕심을 버림으로써 풀고,
분노로 생긴 화병은 체념과 자비심으로 치료한다.
섭생이 잘못되어 얻은 병은 좋은 음식과 식습관으로 고치게 될 것이다.
부부간의 단절은 대화로 풀고….
불치병이란 본디 없다!
나병 환자는 깨어 있었기에 치유될 수 있었다.
자신이 ‘하늘이 내린’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 그러므로 치유의 길은 분명 있다는 점을 깨침으로써 그 길을 찾은 것이다.
우리 현대인들은 불행하게도 자신이 무슨 병에 걸렸는지, 어떻게 생긴 병인지를 모른다.
치유의 길을 알지 못한 채 죽어 간다.
나병 환자에게서 배우면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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