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명절
최형렬
음력으로 새해를 맞는 ‘설’은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반기는 우리의 고유
의 명절이다. 이날을 앞두고 사람들의 마음은 설레기 시작한다. 재래시장은 온통 제수
용품 준비하려는 사람들로 붐비고, 거리는 차량의 물결로 활기찬 모습을 볼 수 있다.
옛부터 전해오는 ‘설’은 ‘추석’과 더불어 우리의 명절 중 가장 큰 명절이다. 멀리
떨어져 있던 자손들이 '고향' 부모님 찾아 인사를 하고 차례도 지내고 조상님 산소도
찾아 성묘를 하는 날이다. 객지에 흩어져 살던 형제자매와 친척을 만나 덕담도 나누고,
어린 시절 이웃마을 아이들과 자랄 때 있었던 아련한 추억담을 나눌 수 있는 좋은 날이
다. ‘설’은 해가 바뀌고 새해 들어 어른들을 찾아뵙고 세배라는 신년 인사를 드리며
세뱃돈을 주고받는 것이 추석명절과는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추석'에는 차
례 상에 송편을 올리지만, ‘설’에는 떡국으로 차례를 지내는 것도 다르다. 그 외 산소
를 찾아 성묘하는 세시 풍습은 '추석'명절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또 한복을 차려 입
는 것도 같다. ‘고향’이 있고 부모님이 생존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즐겁고 신바람
나는 명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고향이 있어도 찾아가지 못하는 사람과 세배를 드릴
부모님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도리어 부담이 되는 우울한 명절이라 할 수 있다.
귀성객 차량의 정체로 교통 체증은 짜증나는 일이나 그래도 즐거운 표정들이 역력하
다. 기차 좌석 표도 구하지 못해 입석으로 가야 할 귀성객들도 장거리를 서서가야 할 우
려보다는 어린아이 앞세우고 손에는 선물 꾸러미를 잔뜩 들고 즐거워하는 표정은 정말
아름답게 느껴진다.
또한 명절이란 '고향’을 찾아 차례를 지내고 부모님을 섬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문안드리지 못했던 웃어른을 찾아뵙고 인사도 하고, 또 신세를 졌거나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는 보은 할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정이 돈독했던 사람
들과 선물을 나누며 덕담을 주고받기도 한다.
그러한 미풍양속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 자신이 몇 해
동안 조상님 산소 한번 제대로 성묘하지 못했다. 존경하는 어른 찾아 인사도 드리지 못
했을 뿐 아니라 신세를 진 사람들에게도 조그마한 정표마저도 표시할 수 없는 자신이 마
냥 원망스럽기만 하다. 그런 풍습의 禮를 누구 보다 철저하게 챙기던 내가 최소한의 인
간의 도리라 할 수 있는 그나마도 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나 자신의 恥部를 드러
낸 거나 다를 바 없다. 인간만사 塞翁之馬라 하지만, 그다지 남에게 뒤지는 삶은 살지
않았던 나로서는 그토록 수치스러운 삶의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야 할 것인지, 자문을
구하게 되는 생각에 머물게 되면, 울분이 치밀어 금방이라도 생의 마침표를 찍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고통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일이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보편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기이한 사연이 숨어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항상 어두
운 그림자가 쫓아다니며 괴롭혔지만, 나는 근심걱정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웃으며 살
았다. 나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서도 역경을 딛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그들을 보고 용기
도 얻었고, 저런 사람도 살고 있다는 것에 위안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무의미한 생명의
연장이라는 삶에는 동의 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사람의 도리를 다하고 살 수는 없지
만, 어쨌든 나로서는 최소한의 도리는 지키고 살아야겠다는 것이 나의 신조나 다름없기
에,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구차하게 살 바에야 차라리 남을 위해 희생을 하고 삶
을 마무리 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바 없는 고귀한 삶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머물게 된다.
2003/23집
첫댓글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구차하게 살 바에야 차라리 남을 위해 희생을 하고 삶
을 마무리 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바 없는 고귀한 삶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머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