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여행도 못 갔지요. 휴가는 있었지만 학기중에 한 결혼이라 아이들 수업 걱정 때문에 갈 수가 없었어요. 일요일에 결혼식을 하고 다음날 바로 출근했죠. 아내는 신혼여행도 못 가고 모진 세월을 잘 참아주었어요. 그래서 퇴임식 다음날 제주도로 여행을 갔습니다. 그때 가지 못한 신혼여행 대신 말이죠(웃음).”
그가 전교조 활동을 하면서 탄압을 받았을 때도 마음 졸이며 묵묵히 지켜봐 주었던 아내와 식구들이 그에게는 가장 큰 지지자였다. 이씨가 파면이나 구속을 당하면 당장 생계가 끊기는 절박한 상황을 자주 접하다보니 마음고생이 심했던 아내의 건강이 무척 좋지 않았다고 한다.
“보안사로부터 감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안한 날들이었어요. 학교에서, 바깥에서 그런 감시의 눈초리를 받으며 살았기 때문에 아내가 무척 힘들었을 겁니다. 그래도 이제는 건강을 많이 회복한 상태라 다행입니다.”
자녀들을 단 한번도 학원에 보내거나 과외를 시켜본 적이 없다는 그는 1남2녀의 자녀들이 비록 지방대학을 나왔지만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자신들이 원하는 길을 갔기 때문이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자녀를 걱정하는 이씨는 영락없이 걱정 많은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을‘늦된 교사’라고 했다. 30년 넘게 국가의 지시에 따라 교직생활을 하던 그는 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거리에서 만난 대학생들이 “학교에서 거짓을 가르친 선생님들을 존경할 수 없다. 왜 유신헌법을 훌륭한 법이라고 가르쳤느냐?”라는 힐난에 충격을 받았다. 그이후부터 교사로서 ‘제2의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의식 있는 다른 교사들과 의기투합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전신인 경기교사협의회 회장을 맡으며 전교조 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밤마다 공부를 하면서 깨우치게 됐어요. 우리 교육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하나하나 알게 되면서 교육운동을 시작해야겠다고 다짐했죠. 그러던 중 89년, 초등학교 2학년을 가르칠 때였어요. 그때는 전두환 전(前)대통령에 대한 내용이 교과서에 실려있었는데 이미 역사의 진실을 안 이후라 교과서에 있는 그대로 가르칠 수가 없었어요. 그렇다고 나쁜 대통령이라고 말해줄 수도 없었죠. 그래서 그냥 그 부분을 슬쩍 넘어갔더니만 한 녀석이 왜 안 가르쳐주냐고 질문을 하지 않겠어요? 얼마나 답답하던지요. 정말 떨리는 마음으로 훌륭한 대통령이라 말할 수 없다고 했어요. 그리고 광주항쟁을 진실 그대로 알려주었죠. 아이들은 모르던 사실이었기에 깜짝 놀라더군요. 그 이야기를 해주고 나서 10여일 동안 악몽에 시달렸어요. ‘이제 영락없이 붙잡혀 가겠구나, 고문당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두렵더군요. 그런데 아무 일이 없는 겁니다. 그 당시 학부모님들도 나를 이해해주었던 것 같아요. 그 일을 겪고 나서 교사는 ‘아이들에게 진리와 진실을 양심에 따라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게 됐죠.”
이후 옳고 그름을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교사여야 한다는 그의 소신은 굽혀진 적이 없었다. 경기도 포천군 지현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학교 운영위원회(이하 운영위)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애를 쓰면서 그의 남다른 행적은 시작되었다. 학부모들에게 운영위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회의 방식을 일일이 교육시켜가며 학교의 주인으로서 행사해야 할 권리를 알렸다. 그리고 농사를 짓느라 바쁜 학부모들을 위해 회의를 밤에 진행하며 보다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보람을 느낀 일은 학부모 모임에서 걷던 기부금을 없앤 겁니다. 대개 학부모 모임에서 모금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더라구요. 그래서 학교 재정과 예산을 공개하면서 학부모들의 돈은 필요 없다고 말했지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학교 재정을 공개하는 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학부모들은 알 권리를 잃고 있었던 거예요. 학부모들이 학교가 돈을 어떻게 쓰고, 우리의 세금이 어떻게 운영되는지를 알게 되면서 참여율도 높아지고 신뢰도 얻게 됐어요.”
이후 성남 은행초등학교장으로 가자마자 그는 한달간 급식실과 행정실에서 다과회를 베풀며 공개토론의 장을 만들어 학부모와 학생, 교사들의 의견을 듣고 학교운영 계획서를 발표했다. 의견을 취합한 결과 무려 1백16개의 학교운영 개선안이 나왔다.
그는 일의 경중을 따져 민주적으로 투명하게 일처리를 하기 시작했다. 학교급식업체 선정은 학부모와 교사가 참여하는 급식위원회로 이관해 견적 입찰로 바꾸었다. 그렇지 않아도 잡무에 시달리는 교사들을 아침저녁마다 길거리로 내몰던 교통정리 업무를 중지시키고 대신 수업준비에 전념토록 했다. 매주 월요일마다 열리던 애국조회와 주번제도를 폐지하고, 어린이신문 구독을 정지시켰으며, 소풍이나 체육대회 때의 의례적인 접대 향응을 일절 없애는 등 그의 공적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평교사 때부터 어린이신문 구독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아무리 교육적 가치가 있다하더라도 신문은 특정 상품인데 공공기관인 학교에서 구매, 알선행위를 할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획일성입니다. 전국의 모든 초등학생들이 아침 자습을 위해 같은 신문을 이용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어요. 신문의 내용면에서도 전문성이 떨어져 교재로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하기 때문에 여러가지를 검토하고 학부모 회의를 거쳐 신문구독을 중단했지요.”
전국 최초로 어린이신문 구독을 거부한 이교장의 사례는 초등학교에서 벌어지는 바람직하지 못한 관행을 타파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실현한 것이었다. (3에서계속)
첫댓글 금강초롱님. 3편이 기대됩니다. 근데, 나눠서 올리는 의도가 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