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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국가정보
동유럽, 러시아 북서부 발트해 연안
동경 24° 00', 북위 56° 00'
65300㎢
90㎞
EET(UTC+2) Summer: EEST (UTC+3)
빌뉴스
리투아니아인(82%), 러시아인(8%), 폴란드인(5.6%), 기타(4.4%)
리투아니아어
로마가톨릭교(79%), 러시아정교(4.1%), 개신교(1.9%)
1990년 03월 11일
달리아 그리바우스카이테(Dalia Grybauskaite) 대통령(2009. 7.12 취임)
+370
공화제
리타스(litas)
리투아니아 지도
정식명칭은 리투아니아 공화국(Republic of Lithuania)이다. 동쪽으로 벨라루스, 북쪽으로 라트비아, 남쪽으로 벨라루스와 폴란드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러시아령인 칼리닌그라드와 발트해에 면한다. 발트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중 가장 낙후되었으며, 농업의 비중이 크다. 1991년 국제연합(UN)에, 1992년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에, 1993년 유럽평의회에, 1994년 구소련 국가들 중 처음으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2004년 유럽연합(EU)에 가입하였다. 행정구역은 10개 주(apskritis)로 이루어져 있다.
리투아니아 주민
리투아니아의 민족구성은 리투아니아계가 83.4%, 폴란드계가 6.7%, 러시아계가 6.3%, 기타 민족 3.6%로서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에 비하여 자국 민족의 구성비가 높다. 폴란드계는 남부지방에 집중되어 있다. 1991년 독립 이후 러시아계와 폴란드계의 지위와 권리문제가 주요 인권문제로 대두되었다.
공용어인 리투아니아어(語)는 인도유럽어족의 발트어에 속하는데 라틴 알파벳을 사용한다. 1988년 11월 리투아니아어가 공식언어로 채택되었고, 국가공무원은 수년 내 리투아니아어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규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소수민족이 주로 거주하는 지방에서는 리투아니아어와 함께 그 민족의 언어 사용도 허용되었다. 1989년 채택된 시민권법에 의하면, 소련에 병합되기 전인 1940년 당시 시민이었거나 그들의 후손에게는 모두 시민권을 부여하도록 하였다. 그 외에도 현재 영구거주자들은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났거나 그들의 부모 혹은 조부모가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난 경우에 시민권을 부여한다. 다른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리투아니아 시민이 아니며, 그러한 사람들은 2년 내에 리투아니아 시민권을 원하는지 결정하도록 정하고 있다. 러시아어도 공용어로 사용된다.
종교는 대부분의 리투아니아인이 믿는 로마가톨릭교가 79%로 가장 지배적인데, 민족 귀속의식의 중심이 되고 있다. 로마가톨릭은 668개의 교회와 이를 관할하는 4개 주교 교구, 그 위에 카우나스와 빌뉴스 등 2개의 대주교 교구로 이루어져 있다. 그 외 소수 종교는 슬라브족이 신봉하는 러시아정교회 4.1%, 프로테스탄트 분파의 교회 1.9%, 유대교와 타타르인들이 신봉하는 이슬람교도 존재한다. 문맹률은 0.4%에 불과하다.
리투아니아 자연
리투아니아는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와 함께 발틱해 국가 중 하나로 이들 중 면적이 65,200㎢로 가장 넓고 인구가 많다. 북쪽으로는 라트비아, 남쪽으로는 벨라루스공화국과 폴란드에 접하고 있다. 발틱해 연안선을 따라 99km의 긴 모래 해안이 전개되는 연안국가인데 758개의 강과 2,833개의 크고 작은 호수가 국토의 중요한 특징이다. 전체 국토 면적 중 44.8%만이 경작이 가능한 땅이고 나머지는 22.2%를 차지하는 목초지와 16.3%의 산림지로 구성되어 있다.
리투아니아는 해양성기후와 대륙성기후의 특징을 가지고 있고 대체로 온화한 기후를 보인다. 1월과 7월의 평균기온은 각각 -5℃와 17℃이다. 정부는 몇 곳의 국립공원과 자연보호구역을 지정하여 환경보전에 힘쓰고 있지만 환경오염에 취약하며 특히 환경적으로 불안전한 산업인 원자력발전소로 인한 환경문제를 여전히 안고 있다. 환경전문가에 의하면 리투아니아의 1/3에 해당하는 지역이 대기오염에 노출되어있다고 한다. 특히 수도인 빌뉴스를 포함한 대도시에 비료공장과 화학공장이 집중되어 있어 대기오염이 심하다. 인구 40만 명인 카우나스에는 아직도 정수시설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 음용수를 구하기 쉽지 않으며, 화학공장이나 정유공장이 있는 도시의 주변에서 산성비에 오염된 산림지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리투아니아 역사
리투아니아인들은 발트해 연안에 거주하면서 중세에는 한때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13세기 민다우가스(Mindaugas) 공작이 리투아니아인 거주지역을 통일하고 리투아니아 대공령(大公領)을 형성하면서 리투아니아 왕국(Kingdom of Lithuania)을 세우고 국왕이 되었다. 14세기 전반에 게디미나스(Gediminas) 대공은 1572년까지 리투아니아를 통치한 왕조를 건립하였고, 그의 아들 알기다스(Algirdas) 대공의 통치기간인 14세기 중엽에 리투아니아의 영토는 동쪽으로 확대되었다. 요가일라(Jogaila) 대공은 계속되는 독일기사단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하여 폴란드 여왕과 결혼하여 폴란드와 동맹관계를 수립하였다. 동맹 조건의 하나로 리투아니아는 로마 가톨릭교를 도입하게 되었고, 현재까지 널리 신봉되고 있다. 요가일라의 후계자인 비타우타스는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그리고 러시아 일부까지 영토를 확대하여 발트해에서 흑해까지를 리투아니아의 영역으로 만들어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16세기 들어 러시아가 강성해지면서 동쪽에서의 위협이 커지기 시작하였다. 폴란드와 연방을 형성하여 러시아에 대항하였으나, 1795년 제정러시아, 프로이센 및 오스트리아 3국에 의해 분할되어 제정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 이후 러시아화 정책이 실시되어 리투아니아어로 된 출판이 금지되기도 하였다. 19세기 말 강력한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나 수차례 반(反)러시아 봉기가 일어났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리투아니아는 독일에 점령당하였으나, 1918년 제정러시아의 붕괴 및 독일의 패전으로 독립에 성공하였다. 1920년 폴란드가 빌뉴스 지역을 병합하였으나 카우나스를 수도로 하여 독립국가를 형성하고 폴란드와 러시아의 승인을 받았다. 1922년 최초의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민주주의를 선언하였으나, 안타나스 스메트나(Antanas Smetona)가 쿠데타를 통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권위주의 통치를 1940년까지 행하였다. 이 시기에 포괄적인 교육제도의 도입과 농지개혁에 기반한 농업부문의 성공으로 중요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1940년 히틀러와 스탈린의 조약에 의하여 사실상 리투아니아는 소련에 병합되었다.
스탈린은 리투아니아 정부를 억누르고 사회주의화 정책을 강압적으로 시행하여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출범시키고 소연방의 일원으로 만들었다. 한편 빌뉴스는 다시 리투아니아로 반환되었다. 소련 치하에 많은 리투아니아 민족주의자들이 체포되고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기 때문에 1941년 소련을 침공한 독일군은 처음에는 환영받았다. 그러나 독일 치하에서 16만 명의 유대인을 포함한 21만 명이 희생되었다. 1944년 돌아온 소련군은 사회주의정책을 다시 시행하여 농업의 집단화, 급속한 공업화, 그리고 가톨릭 교회에 대한 탄압이 행해졌다. 권력은 리투아니아 공산당에 독점되었으며, 중공업화 과정에서 러시아인의 유입이 이루어졌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종교적·정치적 자유를 요구하는 시위운동이 나타났다. 1980년대 중반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은 리투아니아 민족주의운동의 부활을 촉진하였다. 이들의 요구는 처음 환경과 리투아니아 언어·문화 보전운동으로 시작되었다. 민족주의운동에 대한 경찰의 탄압과 느린 개혁에 대한 지식층의 실망은 1988년 지식인과 작가들이 중심이 된 ‘리투아니아개혁운동(사유지스)’ 결성으로 나타났다. ‘사유지스(Sajudis)’는 환경오염과 민족문화 억압, 러시아화 정책에 항의하고, 다른 발트 국가와 연대하여 1940년 독·소불가침조약의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비밀의정서 무효화를 주장하는 대중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리투아니아 공산당에 독립을 선언하고 국어로서 리투아니아어를 인정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국어의 채택·전통적 리투아니아 국장의 회복 등은 최고소비에트에서 받아들여졌다. 1989년 실시된 인민대표자회의 선거에서 사유지스가 압승을 거두었다. 그러자 여전히 공산당이 지배하는 최고소비에트는 인민의 지지를 유지하기 위하여 리투아니아법이 연방법 위에 있다는 리투아니아 주권과 1941년 소비에트 권력 수립이 헌법을 위배한 것임을 선언하였다.
독·소 밀약 조인 50주년 기념일에는 에스토니아의 탈린에서 라트비아를 지나 빌뉴스에 이르는 총길이 620km에 걸쳐 100만 명 이상의 발트3국 인민이 참여한 ‘인간의 사슬’ 시위가 이루어졌다. 소연방의 발트 민족주의에 대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1989년 12월 리투아니아 공산당은 종교의 자유·다당제 합법화 등 개혁조치를 시행하였고 마침내 라투아니아 공산당은 소련공산당으로부터 독립된 정당임을 선언하였다. 1990년 2월 리투아니아 최고소비에트선거에서 공산당의 개혁조치에도 불구하고 사유지스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였다.
최고소비에트를 의회로 개칭하고 이 새 의회는 1990년 3월 리투아니아 독립회복을 선언하였다. 소련정부는 리투아니아의 독립 움직임을 비난하고, 빌뉴스에 군대를 투입하고 연료공급을 중지하는 경제봉쇄를 실시하였다. 소련과 독립협상을 위하여 독립선언을 6개월간 유예하였으나, 1991년 1월 의회 의장 란스베르기스는 독립선언을 중단하는 기간이 끝났음을 선언하였다. 긴장이 고조되어 소련 내무성 부대가 빌뉴스에 투입되고 친소쿠데타가 발생하였으나, 리투아니아 국민들은 바리케이드를 쌓아 저항하였다.
소련의 무력개입은 독립 열망을 더욱 촉진하여 1991년 2월 독립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국민의 84%가 참여하여 90%가 독립을 지지하였으나, 러시아계와 폴란드계가 주로 거주하는 지역의 비공식적 투표에서는 50만 명이 투표하여 99%가 소연방의 유지를 지지하였다. 독립으로 인한 소련의 무력개입 확대 우려는 1991년 8월 소련 쿠데타의 실패로 사라지고, 그 직후 리투아니아 정부는 소련군의 철수를 요구하고 친소적 리투아니아 공산당의 활동을 금지했다.
리투아니아 정치
1992년 10월 25일 대통령제 도입을 규정한 신헌법 채택으로 1993년 민주 노동당 당수 브라자우스카스가 제1대 대통령으로, 1998
년 발다스 아담쿠스가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2004년 롤란다스 팍사스가 대통령에, 2006년 게디미나스 키르킬라스가 수상에 취임하였다. 리투아니아의 단원제 의회인 최고회의는 141명으로 이루어진 최고 국가기구로서 입법활동, 총리를 비롯한 국무위원과 최고법원을 선출하고 국가 중요사를 처리한다. 71명은 직접선거에 의해서, 70명은 비례대표제에 의하여 선출된다. 행정부는 총리에 의하여 영도되며 부총리와 장관들이 집행권력을 가지고 있다.
정치단체로는 1988년 결성된 ‘사유지스’가 공산당 권력 독점 종식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 분파이며, 공산당으로부터 분열한 민주노동당 등 수많은 정당이 있다. 헌법 제5조와 정당법에 따라 정당의 활동이 규정되고, 모든 정당 활동의 자유와 독립성을 가진다. 정당의 조직구성은 오로지 지역구에 의존한다. 리투아니아는 러시아와 같은 다른 국가 정당의 활동과 조직을 법에 의해 금지하고 있으며, 모든 정당이 사법부에 등록해야 하고 모든 후보자가 정당에 가입하여야 한다. 2004년 선거에서 노동당 29석, 조국연맹 26석, 사회민주당 23석, 시민민주당(노동당에서 분리) 11석, 자유운동(구자유정치그룹) 11석, 민족농민연합 (구농민과 신민주연맹) 11석,사회자유당 10석, 자유민주당 9석, 자유와 중앙연맹 8석, 독립당 3석을 획득하였다.
1990년 3월 11일 선언된 리투아니아 독립은 이후 40개국 이상의 승인을 받고 외교관계가 수립되어 대외적으로 확고해졌다. 리투아니아 외교정책의 첫번째 목적은 발트 3국간의 협력 관계 수립에 있다. 이들 국가는 발트회의와 같은 협력조직으로 묶이게 되었다. 외교의 두번째 목표는 북유럽 및 폴란드와 밀접한 관계를 수립하고, 나아가 서방국가의 보다 많은 협조를 끌어내는 일이다. 이를 위하여 2004년 1월 EU에 가입하였다. 독립 이래 현안이던 리투아니아 주둔 러시아군 철수가 1993년 8월 31일 완전히 실현되어, 다른 발트 국가에 비해 러시아군 철수가 가장 빨리 이루어졌다. 소련군의 전면철수에 따라 리투아니아 자체의 군대창설의 필요성을 가지게 되었고 이에 1991년 9월에 UN, 1994년 1월에 구소련 국가들 중 최초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였다.
세번째 핵심적 외교정책은 다국간 기구, 특히 국제금융기구인 IBRD(국제부흥개발은행 또는 세계은행)·IMF(국제통화기금)·개발을 위한 유럽은행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그래서 1992년 IMF와 IBRD, 1993년 유럽평의회, 2001년 WTO(World Trade Organization:세계무역기구)에 가맹하였다.
군은 징병제이며 복무기간은 12개월, 18세부터 지원할 수 있다. 2005년 GDP 대비 군사비 지출은 1.9%이다.
리투아니아 경제
2006년 현재 리투아니아의 산업 구조는 농업이 국내총생산의 5.5%, 공업이 33.3%, 서비스업 61.2%를 차지하고 있다. 농업에서는 가축사육이 전체 농업 생산의 66%를 차지하며, 주요 작물은 곡물, 사탕무, 감자 등이다. 소련 체제 아래에서 공업화가 급속히 추진되면서 러시아 의존도가 심화되었지만 독립 이후 러시아 의존에서 탈피하고 오늘날은 유럽연합 의존도가 더 높아졌다. 광물자원은 석탄과 약간의 석유 외에는 매우 제한적이다. 특기할 만한 자원은 호박(琥珀)으로 이는 금빛깔의 반투명 화석수지인데 목걸이나 반지와 같은 장식품으로 활용된다. 나머지 에너지 자원은 수입에 의존하고 이그날리아에 원자력발전소가 있다.
식료품·기계류·목재 가공품을 서구에 수출하고 금속, 기계부품, 그리고 원유와 천연가스를 러시아 및 주변국가로부터 수입하는데, 대외무역의 60% 정도를 여전히 이들 국가에 의존한다. 1990년대 초 심한 가뭄으로 이전까지 대표적 수출품이던 농산물을 서구로부터 수입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유럽연합 가입 이후 농지사유화와 외국인 투자유치 등을 포함한 시장경제로의 이행이 광범위하게 추진되고 있다. 국영소유 재산의 50% 이상이 사유화되었다. 교역국도 구소련에서 서방세계로 점차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그러나 준비가 충분하지 못하여 에너지 및 원료자원의 부족과 격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실질생활수준의 하락이라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1993년 하반기부터 리투아니아 통화인 리타스(litas)를 도입하였다.
2006년 현재 국내총생산 성장률은 7.2%이고 물가상승률은 3.6%를 기록하고 있다. 2006년 수출액 총액은 14억 6400만 달러이고 수출품목은 섬유, 광물, 원유, 천연가스, 기계제품 등이다. 2005년 주요 수출국은 러시아 10.4%, 라트비아 10.2%, 독일9.4%, 프랑스 7.1%, 에스토니아 5.9%, 폴란드 5.5%, 스웨덴 5%, 미국 4.7%, 영국 4.7%, 덴마크 4.3%이다. 수입총액 18억 2500만 달러로서 기계제품, 광물, 화학제품, 자동차 등을 수입하고 있다. 주요 수입국은 러시아 27.9%, 독일 15.1%, 폴란드 8.3% 이다.
리투아니아 교통
리투아니아는 2005년 현재 총 연장 1,771km의 철도망(광궤 1,749Km, 표준궤 22km)을 보유하고 있다. 주 노선은 빌뉴스와 라트비아의 리가, 벨라루스의 민스크, 러시아연방의 칼리닌그라드, 그리고 벨라루스의 그로드노를 경유하여 폴란드의 바르샤바를 연결하는 선이다. 도로의 총 연장은 2005년 현재 7만 9,497km이며, 7만 549km가 포장도로이다. 리투아니아는 발트해에 면하는 부분이 작기 때문에 항만의 의존성은 낮은 편이며 주요 항구는 클라이페다이다. 수로는 총 연장 425km이다. 에너자 자원의 수송을 위한 가스파이프라인이 1,696 km, 석유파이프라인이 228 km이다.
항공교통망은 주로 구소련 여러 국가와 연결되어 있으며 몇몇 서구국가와의 항공로도 개설되었다. 국제공항이 빌뉴스와 시아울리아이 두 곳에 있고 국영인 리투아니안 항공이 암스테르담, 런던, 파리, 코펜하겐, 베를린 등으로 운항된다. 공항은 2006년 현재 91개가 있다.
관광자원은 역사적 도시 빌뉴스와 발트해의 휴양지인 팔랑가와 네린가가 대표적이다. 특히 빌뉴스에서 서남쪽으로 약 28km 지점에 있는 트라카이성(城)은 14세기 리투아니아 대공이 축조한 중세의 성으로 호수 가운데 있어서 호수와 삼림이 어우러져 있는 아름다운 관광지로 유명하다. 농촌의 전원풍경도 아름답다.
리투아니아 사회
리투아니아는 1940년 이전부터 발전된 교육체계를 갖추어, 1938년에 이미 전국에 2,600여 개의 초등학교와 98개의 김나지움이 있었다. 1991년 기준으로 중학과정을 포함하는 일반교육학교(의무교육기관)가 297개 학생수 51만 8727명이며, 2차적 특수교육기관은 66개 학생수 5만 1717명, 대학을 포함한 고등교육기관이 13개 학생수 6만 9547명이 이다. 리투아니아인들은 교육수준이 높다. 2005년 인구 1,000명당 67.3명의 학생이 대학이나 고등 교육기관에 다니고 있으며 이러한 수치는 에스토니아의 25.9명, 라트비아의 49.0명보다 높은 교육수준을 나타낸다. 그리고 인구 1,000명당 46.4명의 학생이 직업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이 역시 에스토니아의 18.6명과 라트비아의 36.1명보다 높다.
리투아니아의 교육체계는 세계대전을 거치는 동안에 더욱 발전하였다. 구소련은 기존의 교육체계에다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인 교육과 교육방침을 더했다. 1991년 독립한 리투아니아는 여전히 구 소련식의 조직체계를 유지하였지만 리투아니아식의 교육체계로 바꾸어 갔다. 1978부터 중등교육이 의무교육으로 되었다. 모든 교육행정은 교육문화부에서 담당하고 있다. 리투아니아의 연구소는 각각의 목적이 분리되어 설립되었다. 1990년에 46개의 연구소는 15,400명의 과학자를 고용하였다. 발틱어에 대한 연구는 세계적으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심장관련 의학분야와 농업분야에서도 다른 나라보다 앞선 연구를 하고 있다.
여성의 사회적 권위가 소련 지배시보다 낮아졌으며 여초현상으로 미혼여성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 핵가족이 많으며 최근 이혼율이 높아지고 있다. 주사기, 마취제, 항생제를 포함한 기본의약품과 의료시설이 부족하다. 사회복지를 담당하는 정부부처는 노동안전부와 사회복지부, 그리고 보건부 등이다. 《리투아니아스 모닝》(23만 5000부), 《리퍼블릭》(23만 부), 《리투아니아 에코》(11만 부) 등 신문이 발행되며 라디오방송국 3국, TV방송국 27국이 있다. 2005년 인터넷 가입자수는 122만여명, 호스트수는 148,675개(2006)이다.
리투아니아 문화
이웃 발틱 국가인 에스토니아나 라트비아와는 달리 리투아니아의 문화는 독일보다는 폴란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제정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던 1795년부터 1915년까지는 러시아의 영향을, 1940년부터 1991년까지는 구소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6세기의 서유럽과의 직접적인 접촉 또한 리투아니아의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리투아니아 귀족과 20세기 초의 리투아니아 지식인들은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등에서 사상과 경험을 리투아니아로 가지고 왔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치르는 동안 서유럽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통하여 교육, 종교제도, 미술, 문학, 건축, 사상 등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리투아니아의 목각과 직조 같은 민속예술은 리투아니아인의 예술적 발전의 성장에 공헌하였다. 전통적으로 리투아니아의 민속예술가들은 주로 십자가, 슬픈 모습의 예수상을 조각하였다. 오늘날 리투아니아의 도로와 정원에서 목조 십자가와 다른 조각품을 발견할 수 있다. 리투아니아의 민속음악은 대규모의 음악축제에서 정기적으로 불리는 성가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여전히 인기가 높다.
리투아니아의 작곡가들은 성가뿐만 아니라 교향곡, 발레곡, 실내악, 오페라 음악 등을 작곡하였다. 1933년에 설립된 음악학교는 뮤지컬 음악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리투아니아는 음악학교의 설립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학교를 지원하고 있다. 많은 연주자들이 국제적인 상들을 휩쓴다. 오페라와 발레는 리투아니아 문화의 중요한 요소이다. 예술가로는 작곡가 겸 추상화의 창시자인 미켈로우스 시울리오니스(1875~1911)가 있다.
문학에서는 18세기 농노의 생활을 묘사한 크리스티요나스 도넬라이티스(Kristijonas Donelaitis)의 《메타이 Metai》라는 시가 유명하며, 요나스 마치우리스(Jonas Maciulis)는 현대 리투아니아 문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리투아니아는 1980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체슬라브 밀로즈(Czeslaw Milosz) 등 폴란드작가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리투아니아의 영화산업은 1940년대 말부터 시작하여 1989년에는 4편의 장편 영화가 만들어졌고 1990년에는 28편의 단편영화와 24편의 뉴스영화, 4편의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었다.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농구이며 몇 명의 프로농구선수 미국과 유럽리그에서 뛰고 있다.
리투아니아 과학기술
1997년 말 현재 리투아니아 제일의 통신회사는 사기업화 중인 국영기업 리투아니안 텔레콤이다. 90만 명의 고객을 확보하고 있고, 일본 수출입은행(Exim Bank)으로부터 4200만 달러와 EBRD(European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유럽부흥개발은행)의 2500만 달러의 지원을 받아 통신환경을 개선하고 있다. 1991년에 제정된 리투아니아의 통신법은 개인 네트워크의 설립을 허용하고 있지만 외국인의 지분 참여율은 49%를 넘을 수 없다. 특급국제항공우편은 1~3일이면 서유럽에 전달된다. 2005년 기준 리투아니아 전화 본회선은 80만 1100회선, 휴대전화는 435만여 대가 보급되어 있다.
주요 대도시에서는 DHL, UPS 등 특급배송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중앙 우체국에서는 전보와 텔렉스,팩스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으며 국제전화도 가능하다.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체는 32개(2001)이고, 인터넷 이용자수는 약 122만명이다. 1966년 11월에 설립된 생화학연구소는 효소구조 연구, 인공촉진제 합성에 대한 연구 등을 통하여 축산업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고 있다. 신장질환에 관련된 의학기술은 다른 나라에 비해 높은 수준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리투아니아와 한국과의 관계
리투아니아는 남북 동시 수교국으로 한국과는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직후인 1991년 10월 14일 수교하였다. 1993년 양국 간의 투자의 상호 증진 및 보호에 관한 협정이, 2002년 사증면제협정이 체결되었다. 현재 한국의 전자제품 제조 회사가 리투아니아 현지에 진출해 있다. 2006년 현재 대한(對韓) 수출은 870만 달러, 대한 수입은 9245만 달러에 이르고 있으며 주요 수출품은 철강, 농산물이며 수입품은 기계류, 전자제품이 주를 이룬다. 약 30여명의 교민이 거주하고 있다.
리투아니아(Lithuania) |
가수 프랭크 잡파(Frank Zappa)의 기념조각상이 있다는 긍지를 지닌 나라를 방문한다는 것은 가치가 있다. 리투아니아는 반체제 조각상뿐만 아니라 1990-1991년의 독립을 향한 용감하고도 격정적인 운동으로 잘 알려졌듯이 발틱 국가 중에서 가장 활기에 찬 나라이다. 리투아니아는 한때 이웃나라 폴란드와 함께 발틱 해에서 거의 흑해에 이르는 제국을 건설하였듯이 중부유럽의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리투아니아인들은 이웃 에스토니아나 라트비아인들 보다 훨씬 외향적이고 덜 조직적이라고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발틱 이웃나라와 다르게 여전히 로만카톨릭을 따르고 있다. 비록 나라가 작고 장엄한 풍광은 없지만 리투아니아는 흥미로운 큐로니안 모래톱(Curonian Spit)과 흔치 않은 십자가언덕(Hill of Crosses)과 함께, 유서 깊고 활기찬 수도 빌니우스(Vilnius)가 지닌 도시의 즐거움 등 다양한 볼거리를 자랑하고 있다. |
리투아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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