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기자의현문우답] 겨자씨 속에 수미산을 넣는다?
중앙일보
입력 2007.06.07 05:14
업데이트 2007.06.07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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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1: 중국에 마조 선사의 법통을 이은 귀종(歸宗) 선사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만권(李萬券)이란 사람이 귀종 선사를 찾아왔죠. 이만권은 책도 많이 읽고, 아는 것도 많았습니다. "스님, 불경을 읽다가 궁금한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수미산에 겨자씨를 넣는다'란 말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겨자씨 속에 수미산을 넣는다'는 구절은 도저히 이해가 안 가네요. 이건 터무니없는 거짓말이 아닙니까?"
귀종 선사가 말했죠. "사람들은 당신이 1만 권의 책을 읽어 출세했다고 하는데 사실이오?" 이만권이 답했죠.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자 귀종 선사가 일갈했습니다. "당신의 몸뚱이를 보니 어디에 1만 권의 책이 들어갈 수 있겠소?"
무슨 뜻일까요. 선문답 일화나 스님들 게송에서 '수미산'은 단골로 등장하는 용어죠. '한량없이 큰 산'이란 뜻입니다. 그 반대말로 '좁쌀' 혹은 '겨자씨'가 쓰이죠. 그럼 어떻게 하면 수미산을 겨자씨에 넣을 수 있을까요. 우선 겨자씨(좁쌀)의 크기부터 알아야겠네요.
#풍경2: 한 제자가 설봉(雪峰) 선사에게 물었죠. "스님, 우주의 크기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이 말을 들은 설봉 선사가 되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좁쌀의 크기는 알고 있느냐?" 제자는 아주 의기양양하게 대답했습니다. "예!" 그러자 설봉 선사가 혀를 차며 말했죠. "이놈아 좁쌀의 크기는 잘도 안다고 하면서, 어찌하여 우주의 크기는 모른다고 하느냐."
좁쌀과 수미산, 그리고 우주. 이들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요. 이 세상의 모든 형상은 수명이 있습니다. 풀도, 나무도, 바위도, 사람도, 지구도, 숱한 별들도 마찬가지죠. 매 순간 '사라짐'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삶이 허무하다"고들 합니다. 사라질 운명을 알기 때문이죠.
귀종 선사와 설봉 선사는 그 '사라짐'의 바닥을 보라고 하는 겁니다. 물질의 바닥에 무엇이 있나, 형상의 너머에 무엇이 있나, 삼라만상이 몸을 여읜 자리에 과연 무엇이 있나. 거길 보라고 외치는 겁니다.
왜냐고요? 그곳에 '본질'이 있기 때문이죠. 거기선 좁쌀도, 수미산도, 거대한 우주도 몸을 비웁니다. 그럼 '공(空)' 밖에 없지 않느냐고요? 아닙니다. 모두를 비운 곳에, 모두가 차는 법이죠. 거기선 좁쌀 안에 우주가 녹아있고, 우주 안에 좁쌀이 녹아있습니다. 수만, 아니 수억 개의 수미산이라도 좁쌀 안에 들어설 수 있는 거죠. 좁쌀과 우주가 둘이면서, 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로 유명한 성철 스님은 "산은 물이요, 물은 산이다"라고도 했습니다. 산은 물이고, 물은 산인 곳.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곳. 바로 거기서 삶도 허무를 여의겠죠.
백성호 기자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752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