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문장을 읽고 나니 아흔 살이 됐어요
목젖에서 쉰 소리만 흔들다가 목적 없이 임종을 맞을지도 모르겠어요. 환한 얼굴과 화난 얼굴을 분별하느라 이야기나눌 친구 하나 없어요. 죽음은 정말 나의 적인가요. 그것은 튼튼한 요새를 구축하고 치밀한 작전 하에 갑자기 내 턱밑에 총구를 들이밀까요. 그렇다고 삶이 내편도 아니죠. 죽은 줄 알았던 떡갈나무 밑동에서 연초록 잎이 나왔어요. 죽음이 보낸 스파이라면 믿겠어요? 아름다운 것은 온 힘을 다해 그것들 붙들게 만들죠. 마지막 순간까지 손을 놓지못하고 버둥거리다 처참히 굴복하고 마는 함정 같은 거죠. 그러니 오늘 하루만이라도 노을을 보지 말아요. 들꽃도 버들강아지도 만지지 말아요. 책 한 권을 아무 데나 펼쳐서 누가 글밥이 많은 쪽을 가졌는지 겨루는 게임을 해요. 이긴 사람이 진 사람의 수명을 조금씩 뺏기로 해요. 그러다 한 사람의 수명이 다하면 책을 덮고 완독한 책의 명단에 죽은 사람의 이름을 적어요. 만수무강이 축복인가요. 긴 문장을 읽고 나니 아흔 살이 됐어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괄호 안에 들어갈 시간이 아직 무성해요.
뜨개질을 해요
당신의 목소리는 코바늘 8호가 적당해요
가볍게 날리는 분홍의 기억 한 뭉치를 골랐어요
보풀처럼 번지는 무심함을 당겨 한 코에 한 번씩 입김을 불어 넣어요
일정한 텐션을 유지하려고 수시로 미간의 주름을 살피죠
오늘 본 영화처럼 촘촘했다가 느슨해지는 건 좋은 결말이 안 나요
뒤꿈치를 들던 첫 입맞춤처럼 한 단 한 단 키가 늘어나요
짧은뜨기는 기둥코 하나를 세워서 더디지만 튼튼하고
한길긴뜨기는 기둥코가 두 개라서 빠르지만 힘이 없어요
여러 길목에서 서성거리는 마음을 정하는 일은 정말 어려워요
몇 번의 이별을 겪고 나면 어느새 겨울에 당도하죠
실밥처럼 눈이 내리면 자꾸 옆을 보게 돼요
여름에는 얇은 꿈으로 성글게 잠을 떠서 뒤척이는 세상을 덮어줘요
낮에 꺼내지 못한 색색의 이야기들로 여러 개의 별을 뜨며 밤을 견디죠
별들을 이어붙이며 멀리서 혼자 깜박거리는 당신을 생각해요
한 단을 마무리하는 빼뜨기는 문장의 마침표예요
숨을 몇 번 쉬었는지 강약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게 뱉어버린 고백 같아요
마음이 식으면 미련 없이 줄을 풀지요
나는 처음과 달리 꼬불꼬불 엉켜 있어요
다시 시작해야 하지만 괜찮아요
사슬뜨기의 콧수를 세다 보면 다른 생각이 안 나요
비구름 속에 숨은 하늘색 실을 뽑아 네트가방을 떠요
숭숭 뚫린 구멍들 속으로 팔딱거리는 물고기들을 잡았다가 놓아준다고 상상해요
빠져나가는 물고기 지느러미에 당신의 기억을 달아놓아요
가방 손잡이는 웃고 있는 나의 입을 닮았죠
고난 주간
가끔씩 봐야 좋은 사람을 이틀 간격으로 보았다
시골집 단비는 낯선 이를 보아도 꼬리를 흔들었다
늙은 엄마가 개를 보고 저런 비영~시인~ 했다
벨 소리를 아픈 새소리로 설정했다
친구의 웃는 얼굴에 '좋아요'를 누르니
하루가 부각처럼 바사삭 흩어졌다
말이 헤펐던 날은
몸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들을 쓸어 모아
체에 거르고 싶었다
벗은 신발 위로 나머지 한쪽이 반쯤 걸쳐진 밤에는
꿈에서 노란 표식을 따라 산티아고 길을 걸었다
떨어지는 벚꽃 잎을 '아'하고 받아 '멘'하고 뱉었다
죽은 무화과나무에 자꾸 물을 주었다
썪고 무른 뼈들이 흘러내렸다
보이는 것만 믿어지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시집 『긴 문장을 읽고 나니 아흔 살이 됐어요 』 걷는사람, 20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