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 노마드의 지구 한 바퀴
/김숙
자전적인 이야기로 시작한 저의 삶은 이제 두 발로 직접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걷고, 묻고. 생각하며 세계를 돌았습니다. 인간은 문명을 어떻게 일구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동양에서 공자의 정신을 입고 자란 나는, 서양의 호메로스와 소크라테스의 옷도 기꺼이 입어보고 싶었습니다. (..) 원고를 다시 매만지는 동안 나는 길 위에 선 사람처럼 다시 설레었고, 때로는 비장했으며. 때로는 농담 같은 진실을 마주 했습니다
ㅡ국화리 <길 위 글자 한 줌>
2026년 5월 5일. 국화리 작가의 여행에세이 <길 위 글자 한 줌> 문출판국에서 출간되었다. '여행의 길, 인문의 길'이라는 부제처럼 작가가 계획하고 떠난 여행에서 보고 듣고 느낀 인문학적 사유와 해석이 눈길을 끈다.
그의 여정旅程은 노마드(nomade)의 길이라 할 수 있다. 질 들뢰즈가 철학적 의미를 부여한 노마드라는 말은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바꾸어 나가며 창조적으로 이끄는 인간형을 말한다. 그 중에서도 국화리는 "여러 학문과 지식의 분야를 넘나들며 새로운 앎을 모색하는" 귀족적 또는 상층 노마드인 노블레스 노마드(noblesse nomade)에 속한다.
국화리의 본명은 Monica Jung Sook Lee Kim이다. 황해도에서 태어나 1.4 후퇴 때 월남하였다. 그 후 서울에서 생활하였고 숙명여자고등학교와 서울교육대학교를 졸업한 뒤 교편을 잡았다. 198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 2006년 미주 <문학세계>로 등단하고, 2010년 <한국산문>으로 재등단한 열정의 수필가다. <한국산문> 평론반에서 온라인으로 문학과 인문학을 수강한다.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에서 활동한다. 그런 점에서 국화리는 디지털 노마드 작가이기도 하다.
국화리 여행의 길은 민족의 영산 백두산에서 시작한다. 영봉에 올라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본다.'라는 천지. 그 묵은 푸른 눈빛을 마주한다.
소형버스는 덜킹대며 굽이진 산길을 돌았다. 9월 초의 바람은 싸늘했고 냉기가 잠바 속으로 스며들었다. 마침내 정상에 올랐다. 바람은 몸을 날려 보낼 듯 거셌다. 회색 구름 아래, 거대한 돌그릇 같은 칼데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짙푸른 물이 고요하게 담겨 있었고, 그곳엔 신령한 침묵이 감돌았다.
ㅡ위의 책 <백두산 순례길> 24쪽
오매불망 그리던 금강산에 이르러서는 <그리운 금강산> 을 목이 메어 부르며 실향민의 한을 달랜다. 자신의 정체성과도 같은 백두산과 금강산에 이어, 문명의 요람 그리스로 향한다. 이어 이탈리아와 프랑스, 독일과 프라하 스페인과 멕시코를 탐방한다. 미국과 캐나다, 로키산맥과 중국 실크로드와 일본에 이르기까지 시선은 쉼 없이 세계를 가로지른다 장장 지구 한 바퀴를 도는 여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서 세계 사적인 서사와 문화적 사유. 철학과 예술의 시공간을 넘나든다.특히. 독일 편에서 <성찰과 지성, 그 깊은 뿌리를 찾아서>를 필두로 괴테와 실러,니체와 루 살로메,히틀러의 다하우 수용소 .튀빙겐에서 헤르만 헤세와 프리드리히 휠덜린의 재취를 그린다.
헤세를 처음 만난 것은 「데미안」을 통해서였다. 1970년데, 유럽 문화 열풍 속에서 그 책은 내게도 커다란 충격이었다. 나 역시 싱클레이처럼 '알을 깨고 나오는'게 심정으로 나 자신과 세상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자아를 찾고 삶의 의미를 묻는 긴 여정이 그때 시작되었다. 내 안에 깃든 싱크레어의 영혼과 함께 어둠을 뚫고 빛을 향해 걸어가고 싶었다. - 위의 책, 튀빙겐에서 만난 두 영혼 121~122쪽.
그는 지구 한 바퀴에 이르는 방대한 여정과 인문학적 사유를 최소한의 붓질로 압축해 낸다. 몇 개의 굵은 선만으로 형상을 세우는 간필簡筆처럼 속도감 있게 풀어내, 많은 독자가 쉽고 재미있는 인문학적 세계 여행을 즐길 수 있게 한다. 특히 이 책의 백미는 여성주의자가 아니어도 걸음을 멈출 만한 역사적 인물들의 사랑 이야기다. <그리스의 연인, 아스파시아> 클레오파트라의 사랑, 로밍과 카미유 클로델, 니체와 루 살로메, <푸른 집의 여인, 프리다 칼로>, 누란의 미녀 등 이미 세상에 알려진 서사일지라도 작가 특유의 사유와 해석이 돋보인다. <코요아칸의 불안한 연인>은 프리다의 남편과 트로츠키의 아내 나탈리아를 모르게 한 레온 트로츠키와 프리다 칼로의 사랑 이야기다.
당시 서른일곱이었던 트로츠키는 지적이고 강렬한 스물아홉의 프리다 칼로에게 매혹되어 버렸다. 프리다 역시 그 감정을 거부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밀어붙였고. 새파란 불꽃을 피워 올렸다 나탈리아가 알아듣지 못하도록 영어로 속삭였고. 책 사이에 연애편지를 끼워 은밀한 사랑을 주고받았다. 프리다는 자신의 생일이자 혁명 기념일에 트로츠키에게 자화상을 선물했다.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그림 속에서 "모든 사랑을 담아 레온 트로츠키에게 바칩니다."라는 문구를 품고 있다. 그들의 불꽃은 어느새 핏빛으로 타올라, 집 안의 공기를 태우고 있었다. ㅡ위의 책, <코요아칸의 불안한 연인>. 180쪽.
돌아오지 못하고 이민지에서 생을 마감한 주인공들도 있다. '태극 문양 대문'의 주인 제원 오빠. '한국인 멕시코 이민자 애니깽' 이야기는 애도와 함께 오래도록 가슴이 먹먹하다. 연어의 고향 발데즈 항에서는 먹이사슬을 통한 자연의 순환을 깨닫는다. 우루무치와 칸얼정, 명사산과 월아천을 두루 거친다. <애정과 껄끄러움 사이>라는 일본 편에서 글을 맺는다.
추천사를 쓴 유성호 문학평론가는 <길 위의 한 줌>을 "길 위의 순간이 글로 되살아나는 경이로움"이라고 평했다. 재미 시인이자 극작가인 장소현은 "공간과 시간의 어우러짐" 이라고 말했다. 이렇듯 국화리의 여행길은 외롭지 않다. 든든한 추천인들이 주변에 있다. 그는 친구와 단둘이 떠나기도 하고 딸과 함께 떠나기도 한다. 오랜 벗들 또는 동문과 함께이기도 하다. 에필로그에게 작가는 <길 위 글자 한 줌>을 펴내고도 아쉬움이 남지만 더 넓고 깊게 응시하는 여행자"가 되어 독자와 만날 것을 기대하며 여전히 노블 레스 노마드의 길 위에 선다.
김숙kol1443@hanmail.net 제18회 한국산문문학상 수상 수필집 <초록 불빛 등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