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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낙원은 어디에 - 내적 혁명>
오늘 역시 이런저런 단상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수도원은 물론 어디에나 있는 외로운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머물 집이, 잘 방이, 먹을 밥이 없어 가난이 아니라 하느님을 떠나, 말씀을 떠나, 사랑을 떠나 가난입니다.
"하늘아 들으라, 나는 말하리라.
땅아, 나의 말을 들으려므나.
나의 가르침은 빗발처럼 퍼지고 이슬처럼 방울져 흐르며,
햇풀위에 이슬비처럼 내리고 시들은 풀밭 위의 소나기처럼 내리리라."
(신명 32,1-2)
일상의 사막도 하느님을 찾아 만나면 '낙원의 충만'이 되지만
하느님을 떠나면 '허무의 늪'이 되어 버립니다.
낙원을 갈망하는 마음에 한자'(樂園)'로도 써보고 영어'(paradise)'로도 써봅니다.
사람은, 수도원은 세상 바다에 떠있는 섬이 아니라, 세상 안에 존재하며 세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니 세상의 축소판입니다.
여전히 사람이 문제입니다.
공동체 삶이 얼마나 복잡다난한지 깨닫습니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란 말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법 없이 살 사람은 법 없으면 못 삽니다.
심성이 좋고 착하고 맑은 사람은 법이 지켜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법은 적을수록 좋은 세상인데 갈수록 법이 많아지는 복잡하고 험난한 세상입니다.
참 불가사의한 존재가 사람입니다.
대부분이 종교인들이라는 나라인데 도대체 미래가,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갈수록 힘들어지고 어려워지니 말입니다.
빈부의 양극화로 인해 완충 작용의 역할을 해줄 건강한 중산층들이 사라지는 현실도 안타깝습니다.
집은 있지만 가정은 보이지 않습니다.
안식년이라 수도원을 떠나 있지만 결국은 수도원에서 먹고 자고 지냅니다.
가정에 초대되어 밥을 먹은 적도, 잠을 잔 적도 없습니다.
식사 대접도 대부분 음식점에서의 외식입니다.
제 몸 하나 부지하기 힘든 각박한 세상입니다.
예전에는 잘 살든 못 살든 마을이 있었고 머물 집도 있었지만
이젠 잘 살 든 못 살든 머물 곳도 마땅치 않고 사람들 마음에 온기(溫氣)와 훈기(薰氣)도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품격있고 격조있는 인격의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세상입니다.
집, 밥, 일, 돈, 몸의 기본적 생존 조건이 위협받으니 하루하루의 삶이 위태해 보입니다.
악의 세력이, 어둠의 세력이 창궐하는 듯 한데, 딱 부러지게 잡아낼 수도 없습니다.
인터넷을 통한 세상을 보면 온통 밀밭이 아니라 가라지밭 같습니다.
어제 읽은 기사 중 한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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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는 다시 '생존의 시대'로 돌아가고 있다.
옛날에는 훨씬 더 힘들었지만 모두가 함께했고 희망이 보였지만 지금은 혼자 싸워야 하고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 대한민국은 지역 갈등과 이념 갈등의 불이 세대 갈등, 계층 갈등으로 옮겨붙는 중이다.
같은 시대를 산다고 해서 시대에 대한 기억이 같은 것은 아니다.
사람은 시대를 몸으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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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현실 진단입니다.
말 그대로 절박한 '생존의 시대'입니다.
여기서 무너지면 자살이요 견디면 암입니다.
곳곳에서 살려달라 부르짖는 보이지 않는 소리가 들립니다.
생존의 어려움들로 미국 수도원에 있어도 카톡을 통해 이런저런 기도 부탁을 받습니다.
정말 영육으로 건강한 사람, 아니 육에 앞서 영으로 건강한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적은 밖에 있는 게 아니라 안에 있습니다.
나라든 개인이든 안에서의 탐욕과 부패, 불의와 부정, 분열로 무너져 내렸지, 밖의 침공으로 무너져 내린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내적 중심과 균형을 잃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면 누구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결국은 중심의 문제입니다.
내적 중심에 따른 질서와 평화입니다.
어떤 환경에도 깨어 중심만 잃지 않으면 삽니다.
낙원은 어디에?
바로 길은 어디에?
질문과 같습니다.
낙원은, 길은 밖 어디에도 없습니다.
지금 여기가 낙원입니다.
지금 여기에 길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가 꽃자리 낙원입니다.
중심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믿고 희망할 때 깨닫는 진리입니다.
내 자신이 세상의 축소판입니다.
정말 긴요한 것이 내적 여정이요 내적 혁명입니다.
"As you are, so is the world(네 정도만큼의 세상이다)."
수십년전에 읽은 글귀와 더불어 또 생각나는 구절이 있습니다.
"The more spiritual-, the more real(영적일수록 실제적이다).“
진정 영성가가, 신비가가 되어야 살 수 있는 세상입니다.
믿는 이들은 모두 신비가로 살라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신비가에게는 지금 여기가 낙원입니다.
오늘 주님 세례 축일에 신비가가 되어 낙원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해 드립니다.
첫째, 하느님의 자녀임을 깨달으십시오.
우리 모두 이미 세례성사로 거룩함의 여정은, 신비가의 여정은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은 내 사랑이자 운명이 된 획기적인 전환점이 회개의 세례입니다.
주님께 세례 받음으로 바로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놀라운 기적입니다.
자연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존엄한 품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이 내 삶의 중심,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의미로 확고히 자리 잡았음을 뜻합니다.
오늘 날짜 1월11일과 마르꼬 복음 1장11절의 일치가 참으로 절묘하고 기막힙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딸), 내 마음에 드는 아들(딸)이다.“
(마르 1,11)
오늘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복음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우리 역시 세례성사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아들, 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하느님의 반석 위에 인생 집을 짓고,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것입니다.
이래야 내적으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깨어 낙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아담이 잃었던 낙원을 회복한 우리들입니다.
둘째, 끊임없이 회개의 삶을 사십시오.
세례성사의 결정적 회개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이지만 방심은 금물입니다.
단지 내적 여정이, 내적 혁명이 시작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내적 여정은 내적 혁명의 여정이요, 바로 회개의 여정임을 뜻합니다.
한 번의 세례의 회개로 완성된 삶이 아닙니다.
삶은 은총이자 과제입니다.
은총에 따른 부단한 깨어있는 수행의 노력이 있어 하느님의 자녀로 성장, 성숙합니다.
끊임없는 회개가 늘 깨어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게 합니다.
어제의 평범하나 강렬한 순간적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아, 이렇게 하면 은총을 받을 수 없지요."
벨라도 수사님이 친절히 유리컵에 쥬스를 따라 주려는 찰나 유리컵을 거꾸로 들고 있던 저를 발견했습니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유리컵을 바로 세운 후 따르는 쥬스를 받으며 한 말입니다.
유리창이 투명하면 새들이 부딛혀 땅에 추락하는 경우가 있듯이 저도 유리잔이 투명하여 잠시 위 아래를 착각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아무리 하느님이 은총을 주셔도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있지 않아 낭비되는, 허비되는 은총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하느님 탓이 아니라 내 탓입니다.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라 했습니다.
비상한 회개가 아니라 이렇게 제자리에서 하느님 향해 활짝 열린 바른 자세, 바른 마음으로 깨어 있는 것이 회개입니다.
이런 회개로 깨끗이 비워진 마음에 가득 차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이런 회개가 진정 내적혁명이요 주위를 서서히 밝히면서 변화로 이끕니다.
셋째, 자비롭고 겸손한 삶을 사십시오.
자비와 겸손은 한 실재의 양면이요 함께 갑니다.
회개의 진정성을 보장하는 열매입니다.
이사야서의 예언은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지만
종국에는 우리를 통해 성취되는 것이 하느님의 소원이요 기쁨입니다.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모든 이들이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이런 이가 영성가이자 신비가입니다.
자비와 겸손, 인내와 공정의 신비가입니다.
그대로 주님의 종, 예수님을 통해 실현된, 우리를 통해 실현되어야 할 이사야 예언입니다.
자비와 겸손, 인내와 공정의 하느님이요 이런 하느님을 닮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셨고,
예수님은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려는 이들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하느님께서 회개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우리 역시 자비와 겸손, 인내와 공정을 실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여기가 낙원입니다.
지금 여기에 길이 있습니다.
1.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2.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3. 하느님을 닮아 자비와 겸손, 인내와 공정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적 혁명의 여정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이렇게 당신처럼 살라고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우리의 사명을 환기시키십니다.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준다.
내가 너를 빚어 사람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이들의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어라."
(이사 42,6-7)
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지난주 6일에 인천교구 사제 서품식이 있었습니다.
사실 서품식이 끝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요.
특히 항상 하던 부천체육관을 대관할 수가 없어서 이곳저곳을 알아보다가 겨우 대관할 수 있었던 곳이 인천 아시안게임을 위해 새롭게 만든 ‘남동체육관’이었습니다.
이곳은 대관부터 이용하는 것까지 부천체육관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서품식을 준비하는 신학생들도 많이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까지 했던 서품식 매뉴얼이 전혀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어느 날 성소국 수녀님께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신부님, 신학생들이 공무원들과 대화를 제대로 나누지 못하는 것 같아요.”
신학생들은 전의 체육관과 다른 처우에 대해 항의를 했었고, 그리고 불친절해 보이는 공무원들의 태도에 공격적으로 말을 했었나 봅니다.
그렇게 대했을 때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공무원들은 원리원칙을 내세우면서 무조건 안 된다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하지만 수녀님께서 가셔서 좋은 말로 이야기하고, 그분들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말을 자주 하셨나 봅니다.
그 뒤 처음에 안 된다는 모든 일들이 다 해결되었고, 결과적으로 거의 만 여명의 많은 신자들과 함께 했던 서품식을 잘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대관료나 사용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저희가 다 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또한 다른 체육관과 비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화를 통해서 특히 그들을 존중하면서 이야기했을 때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지요.
솔직히 자신이 손해 본다고 생각하면 공격적으로 이야기하시는 분을 종종 봅니다.
물론 그 순간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공격적으로 말한 내 자신도 또 상대방 역시 기분이 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만약 나도 그리고 상대방도 기분이 좋아질 수 있다면 약간의 손해는 기쁘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왜 아무런 죄도 없는 분이, 그래서 회개할 것도 전혀 없는 분이 굳이 자신을 정화하는 예식이라 할 수 있는 세례를 받으셨을까요?
이에 대해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성인은
“당신 자신을 정화하는 예식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물을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필요 없는 세례이지만 우리가 받을 세례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 겸손되이 고개를 숙여 세례를 직접 받으셨다는 것이지요.
주님의 그 뜨거운 사랑을 봅니다.
당신에게는 필요 없을 지라도 우리들을 위해 불편한 길을 마다하지 않으시는 그 뜨거운 사랑을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과연 어떤가요?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자신의 손익만을 따지면서 절대로 손해 보지 않겠다고 행동하는 모습이 얼마나 많습니까?
손해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손해 자체를 보는 것보다는 예수님께서 직접 모범을 보여주셨던 사랑 자체를 보고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사랑받는 자녀, 마음에 드는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
<하느님의 증언>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세례를 받으신 것은,
1) 세례를 받아야 할 인간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2) 겸손과 순종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3) 물을 축성하기 위해서,
4) 유대교의 세례를 폐지하고 당신의 세례를 세우기 위해서 등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의 세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하늘에서 들려 온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뒤에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르 1,11; 마태 3,17; 루카 3,22)
라고 직접 증언(또는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하느님께서 직접 확인해 주신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말은 특별하고 유일무이한 아들이라는 뜻인데,
예수님은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시고,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고,
하느님께서 특별한 임무를 맡겨서 세상에 보내신 메시아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이 이 말씀을 복음서에 기록한 것은,
"예수님은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시며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고 하느님께서 직접 증언하시는 말씀을 우리는 들었고,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라고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이 증언은 하느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토를 달 수 없는 '하느님의 직접 계시'입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내려 주신 계시이기 때문에 당연히(무조건)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증언은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실 때에도 있었습니다.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마르 9,7; 마태 17,5; 루카 9,34-35)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신 말씀에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라는 말씀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 앞에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시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그의 말'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라는 말씀은
십자가를 향해서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가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십자가를 향해서 가는 것은 사실은 부활과 생명을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는 "너희가 부활과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십자가를 향해서 가는 그의 뒤를 따라가라."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위의 두 말씀 외에도 하느님께서 직접 예수님께 하신 말씀이 하나 더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그러자 하늘에서 '나는 이미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 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한 12,27-28)
예수님의 이 기도는 '겟세마니'에서 바치신 기도와 거의 같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실 때 하느님께서 침묵을 지키신 것으로 되어 있지만,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하느님의 이 말씀을 '겟세마니에서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영광'은 십자가 수난 후에 얻게 될 부활, 승리, 생명, 영광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하느님의 말씀들은 모두 인간들에게, 또는 인간들을 위해서 하신 말씀들입니다.
"그 소리는 내가 아니라 너희를 위하여 내린 것이다."
(요한 12,30)
인간들이 제대로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왜 천사나 예언자에게 시키시지 않고 직접 말씀하셨을까?
우리는 그 이유를 모릅니다.
그러나 어떻든 하느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만큼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렇게 직접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일은
예수님만이 유일하고 참된 메시아라고 당신의 권한으로 직접 보증해 주신 일이고,
또 인간들이 그 진리를 더욱 확실하게 믿을 수 있도록 직접 인도해 주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시고,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고,
예수님 외에는 다른 메시아가 없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 외에는 다른 구원은 없다는 '신앙의 진리'는
학자들이 신학을 연구해서 얻은 결론도 아니고, 사도들과 그들의 후계자들이 토론해서 만든 이론도 아니고,
이렇게 하늘에서 '직접' 내려 온 계시 진리입니다.
이 계시 진리를 믿는다면, 그 다음에 할 일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만 받고, 예수님의 뒤만 따라가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면 언젠가는 예수님께서 누리시는 '영광'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된다는 말은
하느님 나라의 구원과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믿음을 요한복음서 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요한 3,35-36ㄱ)
이 말은 요한복음서 저자가 자기의 개인적인 묵상을 적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또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실 때 하느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에 대한 믿음을 적은 것입니다.
이 말을 거꾸로 표현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입니다.
- 전주교구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사랑 받고 싶다면?>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내가 하느님처럼 이 세상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면 행복할까요?
아니면 아주 돈이 많은 갑부 집 자녀이면 행복할까요?
근래에 노태우 전 대통령의 외손녀이며 SK 최태현 회장의 둘째 딸 최민정이
해군 장교를 지원하여 며칠 전에 소위 임관을 하고 충무공이순시함에 배치되었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배에 타서 임무를 수행하는 이 역할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평생 놀고 먹어도 되는 재벌의 딸이 왜 굳이 이런 고생의 길을 선택한 것일까요?
그녀는 베이징대학에 다닐 때도 집에서 돈을 하나도 가져다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신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다 벌어 쓴 것입니다.
평소에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며 돈을 벌었고, 방학 때 한국에 와서도 편의점 알바를 하며 돈을 벌어 썼다고 합니다.
참으로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 Oblige)의 모범이 되는 예입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란 성경의 용어로 말한다면
“더 많이 받은 사람은 더 많이 내어놓아야 한다.”란 예수님의 말씀처럼,
더 많은 특권을 누리는 사람은 사회에 더 많은 공헌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의 유래는 로뎅의 유명한 작품, <칼레의 시민들(Les Bourgeois de Calais)>이라고 합니다.
이 작품은 프랑스 칼레라고 하는 도시의 6명의 귀족 시민들이 목에 밧줄을 걸고 죽음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 모습의 청동상입니다.
당시 영국과의 백년전쟁 중 프랑스 칼레는 영국군에 포위되어 식량이 떨어져 결국 항복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국 왕 에드워드 3세가 제안을 하나 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칼레의 지도자 중에서 6명이 스스로 목숨을 내놓게 된다면 이곳의 시민 목숨은 살려주도록 하겠다.”
가장 먼저 그 도시의 가장 부유했던 생 피에르가 나섰고 그 이어 시장을 비롯한 6명이 더 지원을 하여 총 7명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빠지라고 하여 생 피에르가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생 피에르는 이 6명이 용기를 잃을까봐 스스로 자살을 선택합니다.
이 모습에 감동하여 영국 왕은 나머지 6명도 살려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들이 참으로 행복한 이들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 것에 있는데,
이들만큼 사랑했고 이들만큼 사랑받는 사람은 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랑받는 이유는 반드시 그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번 반대 경우도 볼까요?
구속되어 고생을 하고 있는 대한항공의 부사장 조현아씨는 평소에도 직원들에게 모욕적인 욕설을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고 합니다.
땅콩 때문에 비행기를 회항하게 했던 어마어마한 힘과 부의 소유자, 조현아씨는 과연 행복할까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어도 그녀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런 모습을 사랑해주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받지 못하면 행복하지 못하고 살 힘이 없어집니다.
요즘 돈 많은 사람들의 ‘VIP 갑질’이 뉴스에 많이 나오는데 이들이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돈이 있으면 행복할 것 같지만 사실 행복은 돈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란 우리 자아를 물속에 죽이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뜻을 물속에 죽이고 하느님 뜻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가기 위한 첫 발을 내딛는 순간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계명에 불순종하여 행복을 빼앗겼던 것과는 반대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 자신을 버리고 순종을 약속하고 계신 것입니다.
당신께서 받으실 세례가 따로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새롭게 부활하시겠다는 의미였습니다.
이때, 하늘로부터 성령님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시고 열린 하늘의 문에서는 이런 음성이 들려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우리도 이 한 마디만 듣는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아마 행복감에 까무러칠 것입니다.
마지막 날 심판대에서 당신 왼 편에 선 사람들에게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너희를 모른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저희가 기적도 행하고 예언도 하고 사제직무도 행하고 미사에도 얼마나 많이 참례했는데요?”
“나는 너희를 모른다.
너희가 섬겼던 신은 금송아지였다.
금송아지를 이용해 이것 해 달라 저것 해 달라 청하면서 세상에서 부귀영화와 성공만을 바라지 않았느냐?
나는 실제로 너희를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런데 오른 편에 서 있는 우리들에게 “너희는 내가 사랑하는 자녀들이다.”라고 한다면
이 말씀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을 주는 것입니다.
지금 그리스도께서 그런 칭찬을 듣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받고 계신 것입니다.
얼마나 행복할까요?
이 행복아 바로 낮아짐에서 오는 것임을 절대 잊지 맙시다.
아버지의 사랑은 성령님입니다.
성령님께서 비둘기 보양으로 내려오시는데, 성령의 열매가 바로 사랑, 기쁨, 평화입니다.
즉, 사랑과 그로 인한 행복을 성령님을 통해 그리스도께 내려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한 인간에게 세례를 받으신 다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물과 같습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릅니다.
즉, 자신보다 높은 사람은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손바닥 위로 올라오리만큼 그분이 작아지시지 않았다면
하느님께도 우리 사랑이 흘러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위해 무릎 꿇고 발을 씻어주시고 우리 양식이 되어주셨기 때문에
우리 사랑에 그분에게 흘러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자신보다 낮아지면 그 사랑이 물처럼 그 사람에게로 흘러들어갑니다.
물론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면 말입니다.
성모님은 가장 낮은 곳에 계셨기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은 물론 인간들의 사랑도 받으셨습니다.
사람이 사랑을 잃는 유일한 이유는 교만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교만해져 하느님과 사람들의 사랑을 잃고 불행하게 살거나,
아니면 겸손해져 하느님과 이웃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 하나 순종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사랑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당장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하고 십일조를 내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웃을 위해서도 내가 커지려 하지 말고 낮아지며 이웃을 더 높이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행복해지고 싶다면 말입니다.
전에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란 프로에 21살짜리 게임폐인녀가 나왔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잠자기 전까지 게임만 하며 삽니다.
이 세상에서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일지라도 게임 안에서만은 최고의 능력을 지닌 모두가 벌벌 떠는 힘을 행사하기 때문입니다.
이 게임폐인녀는 결국 현실과 게임을 구별하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사람들을 모두 정리해버리겠다고 하며 실제로 물병을 투척하였다고 합니다.
게임 공간에서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자신이 신처럼 모든 것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다고 믿는 지경까지 이른 것입니다.
수많은 이들이 이렇게 스스로 강력해지고 부유해진다면 행복하다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세상 누구보다도 외롭고 불행하게 살아야만 합니다.
꿈을 깨야 합니다.
행복은 낮아져서 자신을 버리고 상대를 높이는 이의 것입니다.
우리도 이처럼 세례에 참여할 때마다
하느님과 이웃들의 사랑을 받고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낮추어 사랑하는 세례의 선포>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하느님의 영을 듬뿍 받으시고 나자렛에서의 생활을 마감하고 메시아로서 공생활을 시작하신다.
오늘의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받은 세례의 의미도 다시 생각해 보자.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가 오시어 활약할 것을 대비해 모든 이에게 “죄의 용서를 위한 세례” (1,4-5)를 베풀었다.
요한은 당시 선민(選民)사상에 젖어 있던(마태 3,9) 유다인들에게
진정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열매를 맺으려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마태 3,8)고 촉구하였다.
요한이 베푼 세례는 세례를 받는 이들에게 그의 회개가 하느님께 받아들여졌고, 다가올 심판에서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주었다.
그의 세례는 세례 받으려는 이들이 회개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으며,
예수님께서 행동으로 보여주실 죄의 용서의 예표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았을까?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세례 받음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그분을 메시아로 공개적으로 소개하시며 소명을 주신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그것은 예수님께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이 드는 아들”임을 확인받는 사건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는 하느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음을 확인받는 사건,
곧 하느님의 결정적인 부르심의 사건이었던 것이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었다(1,8).
“성령의 세례”란 불의한 자에게는 불로 심판하며,
회개한 자에게는 은혜로 용서하시는 세례이다(1,7-8).
이는 곧 하느님의 종말의 때가 이미 오실 예수님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실현될 것이라는 증거이다.
그러기에 요한은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고백했던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메시아적 특성을 부각시키며 그분의 길을 닦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하느님의 보내심을 받고 성령을 받았다(루카 4,16-30; 이사 61,1-2).
그분은 하느님의 나라와 더불어 죄인을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자비와, 병자를 치유하는 자유와 해방(마르 2,10)을 말씀과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우리는 어떻게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답게 살아가야 할까?
제1독서는 '주님의 종'으로 묘사된 메시아의 사명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성서 전승에 따르면, 종은 신임 받는 사람, 파견된 자, 능력 있는 자와 같은 뜻이다.
메시아는 봉사하고 희생하는 충실한 종이 될 때 그 정체가 분명해진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종이다.
주님의 종은 갈대가 부러졌다하여 잘라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고 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아니해야 하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을 살아야 한다(이사 42,3).
나아가 소경의 눈을 열어주고,
감옥에 묶여 있는 이를 풀어주는 이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소리가 소음이 아니라 진정 사람들에게 희망과 자유를 주는 복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성령의 세례를 받은 이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의 ‘신적인 낮추심’과
오시는 메시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음’을 분명히 자각하고 처신했던 세례자 요한의 겸손의 혼을 지녀야 한다.
요한의 겸손과 예수님의 신적인 낮추심.
이것이 세례 받은 우리가 살아야 할 몫이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회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자신을 비우고 낮추시는 행위를 완성시키신다.
따라서 그것은 그분의 최고의 겸손,
곧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또는 하느님의 무죄 선언을 받도록 하기 위해(갈라 3,13-14 참조)
몸소 저주받은 자, 죄지은 자가 되시는 그 십자가상의 낮추심을 예고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것이 세례 받은 이들이 걸어야 할 ‘거룩한 순례 여정’이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도
이 세상에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고 자비를 주시려고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도록 힘써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다 받아주시듯이(사도 10,34-35)
세례를 받은 이들은 모든 이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할 용기와 신념을 가져야 한다.
나아가 세례받은 이는 고통과 갈등으로 가득 찬 삶의 현실을 거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것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녹여 세상을 하느님의 뜻대로 거룩하게 바꿔나가도록 힘써야 한다.
세례는 나와 현실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다시 봉헌하며,
이웃을 위하여 완전히 봉헌할 것을 다짐하는 계기이다.
새롭게 주어진 오늘 하루 다시 한 번 세례 때의 약속을 회상하면서,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동으로 보여줌으로써’ 빛으로 오신 그분께 찬미를 드리도록 하자.
- 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장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
<세례 받은 세례자, 사랑 받는 아들>
“예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세례를 받으셨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저는 다도회 지도신부를 한 인연으로 거의 30년 가까이 차를 마십니다.
거창하게 말하면 다도를 행하는 것이지만 소박하게 말하면 그저 차를 즐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차에도 여러 맛이 있기에
마음의 맛이나 영혼의 맛과 같이 고상한 맛을 즐길 수도 있지만
우리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차로 인해 바뀌는 물맛만으로도 충분히 맛의 호사로움을 즐길 수 있습니다.
보통 차 맛이 좋으려면 물맛이 좋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맛이 안 좋은 물도 차가 들어가면 물이 차로 바뀌어 맛있습니다.
참으로 묘한 것은 물에다 차를 집어넣으면 물이 차로 바뀌는데
반대로 차에다 물을 더 붓는 경우는 차가 물로 바뀌지 않는다는 겁니다.
차가 맛을 잃지 않고, 그 맛이 깊고 진하기만 하면
차에다 물을 붓건 물에다 차를 타건 차로 바뀝니다.
왜 주님 세례축일에 차 얘기를 이렇게 길게 했냐 하면
주님께서 요르단 강에 들어가신 이유를 설명키 위해서입니다.
강가(갠지스)강은 제가 가서 봤을 때 더럽기 그지없는 물이었지만
인도 사람들은 그 강을 신성시하기 때문에 그 물에 몸을 담그거나 그 물로 몸을 씻으면 사람이 깨끗해진다고 믿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요르단 강물을 그렇게 생각하고,
시리아 장수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갔을 때 엘리사도 요르단 강에 몸을 씻어 나병이 깨끗해지게 했지요.
그런데 오늘 주님 세례 축일로 이런 생각이 이제는 바뀌어야 합니다.
요르단 강이 주님을 깨끗하게 하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 그 물에 들어가시는 순간 요르단 강이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어제 공현 마지막 독서에서 요한의 편지는 이 세상을 악마의 지배하에 놓여 있는 것으로 얘기합니다.
본래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이 하느님을 거부하는 그리스도의 적들에 의해 더럽혀졌다는 뜻입니다.
더럽혀진 이 세상을 깨끗하게 하시려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고,
주님께서 요르단 강에 들어가심은 주님께서 세상에 오심과 같은 의미입니다.
주님께서는 깨끗해지신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현 후 마지막 토요일인 그저께 나환자가 고백하였듯이
“주님께서는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고 믿음을 고백해야 하고,
더 나아가서 씻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요르단 강을 깨끗하게 하는 당신의 세례로 공생활을 시작하신 주님은
공생활을 마칠 때 제자들의 발을 모두 씻어주셨습니다.
더러운 발을 씻어주신 것이고, 종처럼 자기 몸을 굽혀야만 씻어줄 수 있는 발을 씻어주신 것입니다.
이에 너무 황공스러운 베드로가 그럴 수는 없다고 겸손을 떨지만
주님께서는 그러면 너와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고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증언하듯
주님께서는 뜨거운 성령의 세례로 우리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황공스러운 죄와 사랑의 관계를 우리는 부담스럽다고 피할 수 없습니다.
대신 사랑의 세례를 받은 우리가 이제 사랑의 세례를 퍼부으면 됩니다.
치유 받은 치유자, 세례 받은 세례자, 사랑 받은 사랑의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처럼 “너도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말을 들읍시다.
여러분 "아들" 또는 "딸아"하는 소리를 들으면 좋지요?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
<우리를 살려내기 위해서>
세례성사의 효과에서 가장 먼저 얘기하는 것이 ‘모든 죄를 용서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마르 16,16)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더군다나 죄인들인 군중 틈에 끼여서 아주 평범하게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죄인도 아니시면서 죄인들 속에서 세례를 받으셨을까?
예수님은 분명히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세례를 받으신 것은 바로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고
그래서 세상 안에 직접 들어오신 것입니다.
마치 불 속에 있는 사람을 살려내기 위해서는 불 속에 뛰어들어야 하듯이 말입니다.
나지안즈의 성 그레고리오는 주님의 세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전, 또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먼저 요르단강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영과 육신이시므로 성령과 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 성령을 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은총으로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따라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티토 3,5-7).
일찍이 세례자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셨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창세기의 말씀을 기억함으로써 이해를 도울 수 있겠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창세 2,7)
고 하였습니다.
‘생명의 숨’을 불어 넣을 그릇을 만드는 일은 요한이 하고
그 그릇을 채우는 일은 하느님께서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다’는 의미는
‘하느님의 생명’을 준다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역할은 하느님의 생명을 받기 위해 그릇을 준비하는 일인데
그것은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리는 회개요,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바탕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무엇을 망설입니까?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사도 22,16)
우리는 가끔 세례를 주신 분을 기억합니다.
좋은 일입니다.
교리를 가르쳐 주신 분들, 신부님, 수녀님, 대부, 대모를 기억합니다.
다들 고맙고 소중한 분들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으니 감사해야 마땅합니다.
그들은 나의 영적 생명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을 통해 하느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 세례를 받은 것도 중요하지만 은총은 분명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사방 팔방에서 모여들어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특별하지 않게 겸손한 모습으로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우리도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 받는 아들, 딸이 되었다는 것을 상기했으면 좋겠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생명의 숨을 넣어주신 주님의 세례를 기억하고
우리의 세례를 새롭게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고 기뻐하는 날이 지속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새롭게 태어나면서 받은 이름, 세례명을 자주 불러 나의 정체성을 일깨우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갈라 3,27)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순례지 본당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
16세기 유럽에서는 종교 개혁의 선풍이 일었는데
그 가운데 근본주의자였던 후터, 메논, 제논 등은 칼뱅이 주도하는 종교 개혁이 권력화의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가톨릭 교회의 권력을 분양받고자 동참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진정한 제자로 살고자 신앙의 개혁을 한 것이다.
유아 세례는 부모의 신앙 봉헌식에 불과하다.
성년이 되어 직접 자기 일생을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고자 하는 고백의 결단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 진정한 세례성사다.”
유아 세례를 받은 이도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들을 ‘재세례파’라고 하는데,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미국으로 건너가 펜실베이니아 주에 정착한 그들을 ‘청교도’라고도 부른다.
그 후손들은 500년 전통을 이어 지금도 신앙 공동체로 살아오고 있다.
그들은 세례를 대단히 중요시한다.
단순한 입교 예절이 아니라 평생을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겠다는 투신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은 ‘제자도’(弟子道)란 말도 즐겨 쓴다.
스승의 십자가를 진정으로 따르는 삶이 제자의 길이라는 뜻이다.
세례성사가 입교 예식에 불과하면 자신의 삶이 변화될 수 없다.
세상 물신을 숭배하는 삶에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이로 변형되는 은총이 세례성사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왜 인간에게 세례를 받으셨어야 할까?’
예수님의 탄생과 삶과 죽음과 부활의 궤적은 구원을 향한 인간의 여정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예수님과 하나를 이룰 때 구원의 삶을 살게 된다.
사람은 예수님처럼 하늘의 점지로 태어났는데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투신이 진정한 세례의 삶이며 제자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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