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트3국 한가운데 자리 잡은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Rīga)는, 라트비아뿐만 아니라 발트3국 전체에서도 가장 많은 인구가 거주하고 있는 경제와 무역의 중심지다. 우리나라 대기업들도 대부분 리가에 진출해 있어 발트3국 중에서는 한국인 교민의 수나 한국과의 교역량도 가장 많은 곳이지만, 라트비아의 이야기는 언론에 자주 등장하지 않아 제대로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 |
리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다우가바강. 러시아 내부에서 발트해로 흐르는 이 웅장한 강은, 리가에게 무역적 요충지의 가치를 부여하긴 했으나, 동시에 수많은 강대국들의 각축장인 되는 비극을 낳기도 했다. <사진: 김향란>
리가는 첫눈에는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의 모습을 많이 닮은 것처럼 보인다. 한자동맹 시절 중세상인들이 만들어놓은 길드 건물들이 구시가지에 가득하고 에스토니아와 같이 독일의 오랜 지배를 받은 영향으로 그 흔적을 많이 찾을 수 있다. 독일의 사상가인 요한 헤르더(요한 헤더)와 오페라 작곡가 바그너 등 유럽의 명사들에게 사상적 예술적 동기를 부여한 무대가 되기도 했다. 바그너는 1837년부터 1839년까지 2년의 짧은 기간 동안 리가에 거주했지만, 크리스마스 럴럴의 대명사인 ‘소나무야(Oh, Tanenbaum)’와 그의 대표적인 오페라인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영감을 리가에서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외에도 유럽 건축사에 어마어마한 족적을 담긴 미하일 아이젠스타인(Mikhail Eisenstein)이 설계한 아르누보 양식의 건물들은 유럽 전체에서도 최고로 알려져 있으며, 역시 리가에서 태어난 그의 아들 세르게이 아이젠스타인(예이젠시테인)은 세계 영화사상 최고의 명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전함 포템킨]의 감독으로 유명하다. 세계 최경량 카메라인 미녹스 카메라가 최초로 개발 생산된 곳이며, 1985년 우리나라에서 개봉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영화 [백야]의 주연인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의 고향 역시 리가이다. 러시아의 민요로 잘 알려진 ‘백만 송이 장미’도 알고 보면 리가 태생의 작곡가 라이몬즈 파울스(Raimonds Pauls)가 작곡한 라트비아의 노래다. 그 후 러시아의 여가수 푸가초바(Alla Pugatschowa)의 음반에 수록되면서 러시아의 노래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그 내용은 러시아와는 상관없는 라트비아 전설 속의 이야기다.
이처럼 우리가 모르는 사이 유럽 문화사에서 자기 일을 묵묵히 수행해온 리가는, 발트3국 최대의 도시라고 하지만 한국인의 눈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작고 아담하기만 하다. 그러나 일단 탐험을 시작하면 곳곳에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많이 숨어 있는 흥미로운 지역이 바로 리가이다.
발트독일인들의 흔적
리가 건설의 시작은 공식적으로 12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발트해 무역거점으로서의 가치가 점차 부각되기 시작할 무렵, 독일은 발트해에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리가를 그 거점으로 선택한 것이다. 독일 브레멘의 대주교였던 알베르트(Albert) 대주교가 리가만에 배를 댄 것이 바로 리가 역사의 시작으로 기록된다. | |
독일은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를 병합하여 리보니아라는 공국을 건설하여 발트해안 지역의 지배를 확실히 하기 시작했으며, 라트비아인들은 독일인들의 지배를 받는 농노로 전락했다. 이후 폴란드, 스웨덴, 제정 러시아가 번갈아가면서 라트비아를 지배했지만 발트독일인이라 불리던 독일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고유 권리를 인정받으며 1차 대전 전까지 라트비아에서의 문화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배경으로 리가 구시가지에는 발트독일인들과, 리가를 거점으로 삼아 무역활동을 해온 중세 상인들이 건설한 건물이 아주 많다. | |
검은머리전당의 낮과 밤 <출처: Arroww at commons.wikimedia.org, 서진석>
무엇보다 가장 대표적인 건물은 검은머리전당이다. 이 건물을 사용했던 검은머리길드는 아프리카, 남미 등지를 돌아다니며 무역을 해온 미혼 상인들이 결성한 무역 조합으로써, 이집트 출신의 한 흑인 성인을 수호신으로 여겨 건물마다 그 성인의 얼굴을 장식했다. 리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다우가바강(서드비나강)이 내려다보이는 시청광장 한쪽에 있는 화려한 외부장식의 이 건물은, 상인들이 리가에 머무는 동안 여관이나 연회 장소로 사용되었다. 원래는 같은 장소의 다른 건물을 임대해 사용했으나 15세기에 건물을 사들여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거친 후에 지금의 모습으로 이어져 내려오게 되었다. 2차 대전 중 독일군의 폭격으로 인해 80%가 파괴되고 독일의 잔재라는 미명하에 소련 정부가 완전히 철거해버린 가슴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2001년 리가 건설 8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새로 복원되었다.
검은머리전당 광장 앞 한쪽 구석에는 세계 최초로 크리스마스트리가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자리가 표시되어 있다. 전설에 의하면 1510년 겨울, 길드 회원들이 그 자리에 갖가지 장식을 한 전나무를 세우고 밤새도록 즐긴 것이 유래가 되어 전 세계로 퍼졌다는 것인데, 라트비아 관광청은 그 사실을 내세워 겨울마다 대대적인 홍보를 하고 있다.
그 외에도 눈여겨 보아야 할 건물은, 바로 리가의 상징과도 같은 삼형제(Trīs brāļi) 건물이다. 이웃 나라 에스토니아의 탈린에 있는 ‘세자매’와 견줄만한 이 세 건물은 리가에 있는 석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의 다양한 기간 동안 만들어진 집 세 채가 어깨를 맞닿아 서 있다. 오른편 흰 건물이 15세기에 세워진 가장 맏형으로, 왼편으로 갈수록 나이가 한 세기씩 젊어진다. 현재는 라트비아 건축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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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김새에 비해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리가의 명물 삼형제 건물. <사진: 김향란> |
스웨덴문으로 가는 골목길. 과거에는 군사시설이었으나 현재는 아기자기하고 깔끔한 선물가게들이 밀집된 골목으로 바뀌어 있다. <사진: 김향란> |
금으로 만든 수탉이 우는 도시, 리가
리가 시내에서는 유독 높은 교회 첨탑이 많이 보인다. 그리고 그 첨탑마다 서 있는 금빛 찬란한 수탉 모양의 풍향계는 리가의 이미지를 만들어주는 중요한 상징물 중 하나이다. | |
가장 대표적인 것은 베드로 성당 꼭대기에 서 있는 금수탉이다. 13세기 리가 상인들의 헌금에 의해서 건설된 이 성당은, 리가의 중요한 랜드마크로서 현재는 미사를 드리는 성당이라기보다는 높은 첨탑 위에서 구시가지를 관망할 수 있는 전망대로 사용되고 있다.
무역도시인 리가에서 풍향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 성당에 가장 먼저 수탉 모양 풍향계가 생겼는데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 베드로에게 새벽닭이 울기 전 예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말한 구절과 연결되어 베드로와 수탉이 자연스럽게 연관짓게 되었다고 한다. 닭이 어둠을 내쫓고 새벽을 부르는 신령한 동물이라는 지역의 토속신앙과도 연결되어 리가의 높은 첨탑에는 어김없이 수탉이 올라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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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성당과 함께 리가 역사의 시작부터 이 도시를 굽어보던 역사적인 건물인 야고보 성당. 이 건물의 꼭대기에서도 어김없이 금수탉을 볼 수 있다. <사진: 김향란> |
리가의 스카이라인을 장식하는 베드로 성당과 검은머리전당. 높은 첨탑 위에는 리가 구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사진:김향란> |
베드로 성당 뒤편으로는 리가를 건설한 알베르트 공의 고향인 브레멘에서 그림 형제의 동화 [브레멘 음악대]에 등장하는 주인공들로 구성된 재미있는 동상이 조성되어 또 다른 재미있는 볼거리를 만들어준다.
베드로 성당과 견줄만한 중요한 성당 건물은 돔성당이다. 1201년 알베르트 대주교가 리가 건설을 시작했을 당시부터 대주교 관저와 대성당으로 사용되었던 이 성당은 수백 년 동안 증축되면서 세 가지 건축양식이 한 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초기 고딕양식의 기반 위에 바로크 양식의 첨탑을 중심으로 바실리카 양식이 혼합된 웅장한 모습 이외에도 1884년 완성되어 한때는 세계 최대 규모였던 파이프 오르간 역시 중요한 자랑거리다. 관광객이 몰리는 여름철에는 연주를 들을 수 있는 공연이 자주 열린다.
지배의 흔적
라트비아 역시 수백 년 동안 주변 국가들의 끊임 없는 지배를 받았고, 리가 구시가지 곳곳에는 외부세력의 지배와 거기에 맞서 싸우기 위한 투쟁의 흔적들이 잘 녹아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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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가 구시가지 동편에 남아 있는 성벽의 흔적. 대부분 파괴되고 그 일부가 소련 시절에 복원되었다. <사진:김향란> |
유명세에 비해서 볼 것은 없다는 불평이 이어지는 스웨덴문. 역사적으로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진: 김향란> |
리가 구시가지 역시 한때는 육중한 성곽으로 둘러싸인 성곽도시였으나 여러 전쟁과 침략으로 전부 파괴되었고 현재는 그 일부만이 구시가지 동편에 복원되어 있다. 성벽을 따라 걷다 보면 구시가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사자 얼굴이 양각된 문을 볼 수 있다. 이 문은 성벽을 통과해 구시가지로 바로 들어갈 수 있도록 17세기 말에 새로 만들어진 문이었는데, 1621년 당시 라트비아를 지배하던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스웨덴이 라트비아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으로 기념하여 ‘스웨덴문’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나 문이 만들어진지 몇 년 지나지 않아 스웨덴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하게 되고, 라트비아 전역은 제정 러시아의 지배에 들어간다.
다우가바 강변에 위치한 리가성(Rigas pils)은 1340년 리보니아 기사단 사령관의 관저로 건설된 곳이었으나, 이후 폴란드, 스웨덴, 제정 러시아 등 라트비아를 지배한 국가의 지역사령부 건물로 줄곧 사용되어 왔다. 리가성 위에서 어떤 나라의 깃발이 휘날리는가를 통해 라트비아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파악해야 했던 시절도 있었다. 현재 라트비아 공화국의 국기가 펄럭이고 있는 리가성은 대통령 집무실로 쓰이고 있으며 이외에도 문학박물관, 사진박물관 등 다양한 박물관이 위치해 있어 관람도 가능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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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폴란드, 스웨덴, 제정 러시아 등 라트비아를 지배한 세력들의 흔적이 그대로 담겨 있는 리가성. 대통령 집무실이 된 지금, 라트비아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사진:김향란> |
라트비아의 자유와 해방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 <사진: 서진석> |
오랜 지배의 역사에 맞서 싸운 라트비아인들의 투쟁의 흔적을 잘 보여주는 것은, 바로 리가 시내 한가운데 있는 ‘자유의 여신상(Brīvības piemineklis)’이다. 1차대전 종전 후 잠시 독립을 이루었던 1935년에 조성된 42미터 높이의 푸른색 석상은 라트비아 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신 밀다(Milda)의 모습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민들의 성금을 모아 완공된 이 건물은 라트비아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고, 2차대전 발발 후 소련에 의해 시베리아로 끌려가거나 독립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라트비아인들을 추모하기 위한 사람들의 헌화가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있다. 여신상 아래쪽으로는 1차대전 중 라트비아의 독립을 위해서 싸우던 용사들의 활약상과 라트비아의 민족서사시 라츠플레시스의 내용을 소재로 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검은머리전당 바로 앞에 위치한 검은색 상자 같은 건물은 소련 시절 라트비아 출신으로 독일군과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그 이후 모스크바로 건너가 스탈린의 개인호위병으로까지 활동했던 소총수들의 업적을 기린 기념관이었으나, 현재는 1차 대전 종전부터 1991년 독립까지 라트비아인들의 투쟁의 자료들을 전시해 놓은 점령박물관으로 변화되었다. 한때 그 기념관의 주인공이었던 라트비아 소총수들의 붉은 석상이 여전히 그 옆에 서 있어 역사의 아이러니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 |
리가의 아르누보 양식
강성했던 리가의 과거를 보여주는 아르누보 건물들. 현재는 관공서나 학교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 서진석>
리가는 구시가지 이외에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집중적으로 건설된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의 건물들로도 명성이 높다. 아르누보 양식은 유럽적인 소재에 국한하지 않고 이집트, 이슬람, 자연 등 다양한 요소들을 일반 건물에 과감히 차용한,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건축양식이었다. 요즘 회자되는 포스트 모더니즘과 맞먹을 새로운 예술양식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인 셈이었고, 리가는 브뤼셀, 헬싱키 등과 함께 19세기 말 아르누보 양식의 대표적인 도시로서 명성을 알리게 되었다.
리가 태생의 유대인 미하일 아이젠스타인의 설계에 의해서 대대적으로 만들어진 이 건물들은 구시가지에서 멀지 않은 지역에 집중적으로 밀집되어 있다.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외관의 건물들은 현재 학교, 관공서, 아파트 등의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으며, 중세 시절부터 무역도시로서의 명성을 알렸던 리가가 얼마나 부강한 도시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가는 길 리가는 발트3국에서 가장 많은 노선이 취항하는 도시이므로, 한국에서 연결편을 찾는 것이 가장 수월하다. 루프트한자, 에어프랑스, 핀에어 같은 유럽의 주요항공사 이외에도 아에로플로트, 우즈베크 항공, 터키 항공 등 다양한 항공사가 리가로 가는 노선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발트3국 여행시 리가를 거점지역으로 삼아도 좋다. 라이언에어 같은 저가 항공 역시 리가로 가는 취항노선을 점차 확장하는 중이다.
러시아의 모스크바, 상트 페테르부르크 등 대도시나 인근 키예프나 민스크 등지에서의 기차 노선 역시 잘 마련되어 있으나, 서유럽에서 오는 기차 노선은 아직 전무하다. 그 외 유로라인 같은 국제버스노선을 통해 유럽에서 버스로 들어오는 것도 가능하다. 빌뉴스나 탈린에서 출발하는 버스는 수시로 있으며 5시간 정도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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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작시기
1930년
- 건축가
P. 드라이마니스, 리가 시장 건설 사무소
- 위치
라트비아 리가
- 양식
기능주의
- 재료
벽돌, 강철, 유리
리가의 쇼핑객들이 무리지어 주요 철도의 철로 아래를 지나 유럽의 가장 멋진 시장 중 하나로 들어간다. 지붕이 높고 커다란 다섯 개의 홀은 옛 시가지의 해자를 따라 다우가바 강의 제방 위에 줄지어 있다. 이 건물들은 원래 라트비아 서부의 바이노데에 있는 독일 해군 비행선 사단이 건설한 독일의 체펠린 비행선 격납고였다. 길이 240미터, 너비 42미터, 높이는 35미터이다. 독일군은 비행선을 이용하여 이곳에서 불과 643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공격할 계획이었다. 1917년, 비행선이 도착했고, 비행선과 그 밖의 군용기를 위한 새 격납고가 지어졌다.
전쟁이 끝난 뒤, 신생 라트비아 정부는 1926년, 격납고를 분해하여 리가로 옮겼다. 1928년 비용 문제로 건설이 중단되기도 했으나 1930년 11월 2일, 시장이 공식적으로 문을 열었다. 다시 지어진 것은 격납고의 상층부뿐이다. 콘크리트와 벽돌 파사드에 아래쪽 외벽은 아르데코 양식을 띠고 있다. 이 시장은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리가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 홀은 면적이 5만 7천 제곱미터에 이르며, 1,250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었다. 각각의 홀이 저마다 서로 다른 품목—육류, 생선, 유제품, 채소, 과일 등—을 취급하고 있다. 그 거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아늑하고 활기찬 분위기가 느껴진다. 라트비아가 소비에트 연방에 소속되어 있는 동안에는 잠시 쇠퇴하였으나, 다시 독립국이 되고 EU에 가입하면서 다시 한번 번영을 맞고 있다.
리바트 국립 미술관
라트비아 국립 미술관은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 자리한다. 초대 미술관장을 맡은 독일의 건축가 빌헬름 노이만(Wilhelm Neumann)의 설계로 1905년에 개관했다. 리가는 러시아 내륙에서 오는 물자들과 발트해 연안에서 수입되는 물건들을 교류하는 도시다. 이같은 도시의 특성은 문화와 예술에서도 잘 나타난다. 미술의 경우 러시아를 비롯해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의 화풍에 영향을 받았다. 라트비아 미술을 대표하는 예카브스 카자크스의 <해변에서>는 독일 표현주의를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꼽힌다.
이곳은 회화, 조각, 판화 등 5만 2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라트비아 지방의 화가들이 그린 것들이 주를 이루고 있고,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영향을 받은 사실적인 그림들이 전시돼 있다. 2개 층을 사용하는 이곳은 발트해 연안 미술가들의 작품과 라트비아 미술가들의 작품으로 분류해 전시하고 있다. 18세기 중반부터 1945년까지의 작품들은 라트비아의 역사를 잘 반영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리가 (라트비아어: Rīga, 에스토니아어: Riia, 러시아어: Рига, 리투아니아어: Ryga)는 라트비아의 수도로, 발트 해와 다우가바 강에 접해 있다. 리가는 발트 3국 가운데 가장 큰 도시(2011년 7월 현재 인구는 702,891명)이다. 면적은 307.17㎢로서, 해발 1~10m 사이에 분포해 있으며,[1] 평지와 사구(sandy plain)로 되어 있다.[1]
리가의 구시가지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항구 공업도시로 라트비아의 공업생산의 약 70%를 산출한다. 전기기계·차량·농기계 제조·화학·섬유·유리공업이 발달되어 있다.
리가 역사
1201년 독일 브레멘의 주교였던 알베르트(Alberts)가 이 도시를 건설하였다. 1282년에는 한자 동맹 가맹도시가 되어, 발트해 연안의 주요 상업도시로 번영을 누렸다.
1621년 스웨덴이 이 도시를 점령하여 요새화하였으나, 1721년 이후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918년 라트비아의 독립과 함께 수도가 되었다.
리가 주민
인구는 약 74만 명이다. 45%의 주민이 라트비아인, 40%가 러시아인, 4%가 벨라루스인, 3%가 우크라이나인, 2%가 폴란드인, 1%가 리투아니아인 등이다. 대부분이 개신교를 믿지만 일부는 러시아 정교회를 믿는다.
◆ 라트비아 리가
= 라트비아는 발트3국 가운데 가장 많은 인구가 거주하는 경제무역 중심지다. 수도는 리가. 러시아에서 발트해로 흐르는 다우가바강이 도시를 가로지른다. 리가는 발트해를 통해 해양으로 나아가려는 독일인에 의해 1201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했다. 그 후 폴란드, 스웨덴, 러시아 지배를 받아 독특한 문화를 이어오고 있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구시가지는 그 규모가 작아 걸어서 이동할 수 있다. 여정의 중심은 검은머리전당. 중세시대 검은머리길드가 사용한 데서 붙은 이름이다. 화려한 장식의 건물은 지금 관광안내소와 콘서트홀로 사용되고 있다. 1209년 건설된 피터성당 역시 리가의 명물. 123m 높이 첨탑에 오르면 리가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피터성당과 함께 중요한 건물은 돔성당이다. 초기 고딕양식 기반 위에 바로크 양식과 바실리카 양식이 혼합된 웅장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삼형제 건물은 리가의 상징과도 같다. 리가 석조건물 중 가장 오래되었다. 15~18세기 오랜 시간에 걸쳐 다양한 양식으로 지어진 것이 특징이다. 현재 리가 건축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다양한 건축물 조화 이루는 리가
에스토니아와 리투아니아 사이에 위치한 라트비아는 색다른 매력이 느껴지는 곳이다. 거대한 다우가바강이 도심을 가로지르는 리가는 라트비아의 수도로 발트 3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그래도 유럽 다른 도시들에 비하면 아담한 편이다. 리가 구시가를 걷다보면 성벽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곳이 한때 거대한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회색의 스웨덴 문을 지나면 구시가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구시가지에는 성 베드로 성당과 성 야곱 성당, 돔 성당 등 오래된 성당과 미술관, 박물관 등이 있다. 고전주의와 고딕, 바로크, 현대적인 건축물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게다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세워진 아르누보 양식 건물들도 곳곳에 있어 아름다운 도시 풍경을 완성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