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나에게 길들여진거야
이건 애
시 집에서 식구들이 모여 놀다가 간단히 국수로 저녁을 먹은 뒤 각기 헤어져 돌아오
는 길이었다. 차 안에서 남편은 국수가 맛있어 두 그릇이나 먹었다 하고 아이들
은 맛이 없어 남겼다면서 동시에 누가 국수육수를 만들었느냐고 물었다.
부지런한 어머니가 해놓으신 국물에 국수만 삶았을 뿐이라고 하니 남편, 아이들 제각
각 역시나 하는 표정들이다. 여전히 남편은 어머님 손맛이 좋고 아이들은 내가 하는 맛
이 더 좋다고 우겨댄다.
'그래 니네는 이미 내 손에 길들여진거야.'
아쉽지만 숫자적으로 우위인 걸로 만족하며 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남편 앞에서 기
세 등등해진다.
길들여진다는 건 익숙해진다는 걸까? 틈새없이 받아들여지는 것, 너무나 익숙하여 편
안한 것... 갑자기 <어린왕자>에서 여우가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너무도 평범하게 서로가 익숙해지는 것… 그것은 사랑입니다.'
결혼한 지 18여 년! 난 남편의 입맛을 아직 길들이지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죽을 때까지 아마 그러할 것이다. 결혼하고 처음 식탁 앞에 앉았던 그 아침을 나는 아직
도 잊지 못하고 있다. 아예 밥을 해보지 않고 시집을 간 것도 아니고 딴에는 손맛도 있
다고 믿었기에 자신있게 밥상을 차렸는데 몇 번 숟갈을 들어올리던 남편은 그냥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리곤 아침엔 밥을 먹지 않는 습관이 있어서 넘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나
는 그러려니 하고 다음날부터는 일찍 일어날 필요도 없어서 늑장을 부리고 있었는데 어
느날 아침,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오늘은 안 오려나. 올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사무실에 나가기 전에 어머니 집에 들러 아침을 해결하고 간
거였는데 그날은 일이 있어 들르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가운데에서 나만 바보 만들
어놓았다고 대판 싸우던 날 남편이 말했다. 도저히 간이 맞지 않아 밥이 넘어가지 않노
라고 했다. 세상에, 그동안 별천지 음식을 먹고 살았나 도대체 뭐가 안 맞는다는 건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 역시 시집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시
집 음식은 우선 짰다. 그리고 뭐든 빨간 고춧가루가 들어가야 했다. 허옇고 싱겁고 맹한
음식은 젓가락도 대지 않았다. 얼큰하고 빨갛고 짠 음식들은 친정집과는 대조적이었다.
밥도 고슬고슬한 밥이 아닌 눅진한 밥만 좋아했다.
서른 해를 길들여진 남편의 입맛을 어떻게 바꿀 수가 있을까. 언제나 때만 되면 아버
지의 밥상을 차리느라 전전긍긍하던 친정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두 번 똑같은 걸 올
려도 안 되고 시거워진 김치엔 손도 안 되고 뭐든 금방 바글바글 끓여내야만 겨우 밥을
잡숫던 아버지 때문에, 엄마는 때만 되면 신경이 쓰인다고 이미 돌아가신 할머니를 원
망했었다. 버릇을 그렇게 들여놓아서 평생 고쳐지지 않는다고, 젓가락이 어디로 갈지
몰라서 머뭇거리는 걸 보면 불안해진다던 엄마를 나는 비로소 이해할 수가 있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고 했던가. 그럴 수 없다면 누구 입맛이든 바꿔야 했는
데 그건 서로에게 고통이었다. 하지만 합집합과 차집합 사이엔 교집합이 있듯 가족이라
는 울타리 안에서 조금씩 서로에게 맞추고 흡수되어 가는 동안 입맛도 닮아갔다. 나는
국에다 물을 붓고 남편은 간장을 부으면서, 매운 음식으로 입안이 얼얼해져 맛마저 모
르고 넘긴다할지라도 상대방이 맛있게 먹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 내 배가 부르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것만을 고집하지 않는 것,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
들이는 것 거기에 비로소 편안함이 있었다.
"엄마, 집에 만두 있어?"
배가 고픈 듯 먹을거리를 생각해낸 아이들이 나를 쳐다본다. 내가 이 세상에 없어도
나를 잊지 않을, 내 손맛을 기억할 이미 내게 길들여진 아이들이 거기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살아갈 것이다.
2004/19 집
첫댓글 나는
국에다 물을 붓고 남편은 간장을 부으면서, 매운 음식으로 입안이 얼얼해져 맛마저 모
르고 넘긴다할지라도 상대방이 맛있게 먹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 내 배가 부르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것만을 고집하지 않는 것,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
들이는 것 거기에 비로소 편안함이 있었다.
내것만을 고집하지 않는 것,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
들이는 것 거기에 비로소 편안함이 있었다.
배가 고픈 듯 먹을거리를 생각해낸 아이들이 나를 쳐다본다. 내가 이 세상에 없어도
나를 잊지 않을, 내 손맛을 기억할 이미 내게 길들여진 아이들이 거기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