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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금당(製錦堂)의 뜻은?
충주시 관아공원(官衙公園)에 가면 제금당(製錦堂)이란 작은 건물이 있습니다.
제금당(製錦堂)이란 당호(堂號)를 <백성들에게 길쌈을 권장한다>는 뜻이라고 쓴 글을 볼 수 있는데, 김왕기 선생님의 책 [산수화(山水畵)에 다소곳 숨어있는 중원문화(中原文化) 이야기]에 나옵니다. 총 3권으로 이 책 1권이 나온 것은 2004년으로 준비기간까지 따지면 20년이 훨씬 넘었다고 봐야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책을 지금 일반인이 구입하기는 어렵습니다.
조선중기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충주목(忠州牧)을 보면 객관(客館)이 여러번 나오는데, 조선후기 조병로(趙秉老) 목사가 충주읍성을 개축(改築)하면서 제금당(製錦堂)도 이때 새로 지은것 같습니다. 지금 관아건물이나 절집에 화려(華麗)한 단청(丹靑)을 입힌것은 궁궐을 본뜬 것인데,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아닌 경우가 허다(許多)했습니다. 청녕헌(淸寧軒)은 단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건물만 있고 사람들이 객관(客館)으로 사용(使用)하고 부른것을, 훗날 새로 건물을 지으면서 제금당(製錦堂)으로 당호(堂號)를 붙인 것일 겁니다. 책 많이 본 분들이 흔히 착오(錯誤)를 일으키는데 글자에 너무 억매이면 사실(事實)을 놓칩니다.
누정(樓亭)이나 관아건물(官衙建物)의 당호(堂號), 나아가 궁궐(宮闕) 현판(懸板)까지 나름 깊은 뜻이 있지만 한문 문맹자(漢文 文盲者)가 태반(太半)인 지금 시대에 잘 모른다고 책망(責望)할 사람도 없고, 사는데 불편할 건 더더욱 없습니다. 누정기(樓亭記)를 보면 누정(樓亭)을 세운 이유와 뜻이 나와 있습니다. 관아건물도 각종 읍지류(邑誌類)에 나와 있는데 사람들은 관심이 없습니다. 너나없이 한문(漢文)을 버린것은 스피드(speed)가 필요한 이 시대에 맞지않기 때문입니다.
우선 충주 관아공원에 있는 대표건물인 청녕헌(淸寧軒)이란 당호(堂號)의 의미(意味)를 살펴 봅니다. 만일 어느 사람이 <아! 맑을 淸자, 편안할 寧자, 집 軒자니까 이곳은 기운(氣運)이 맑고 머무르기 편안한 곳이 되라고 이름 지었구나>라고 말했다고 잘못은 아닙니다. 옆에 있는 다른 사람이 <그 말도 맞지만 고을 수령(守令)이 집무(執務)를 보는 곳이니 매사 공평(公平)하고 청렴(淸廉)해서 백성들의 삶을 편안(安寧)하게 하라는 뜻에서 이름을 지었다>고 주장한들 이 또한 잘못은 아닙니다.
한자(漢字) 청녕(淸寧)은 조선시대에는 널리 쓰고 식자(識者)라면 쉽게 아는 말이었지만 한문(漢文)에 애어른 할것없이 까막눈인 이 시대에는 이해못할 말이 되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검색하면 해온정(解慍亭)을 짓고 권근(權近)이 청녕(淸寧)으로 명명(命名)하기를 청(請)하면서 <하늘이 맑고 땅이 편안하다(天淸地寧)>는 뜻을 취(取)한 것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물론 이 건의(建議)는 채택(採擇)되지 않았습니다.
청녕(淸寧)은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 39장을 보면 다음 구절이 나오는데 이 부분을 딴 것입니다.
天得一以淸, 地得一以寧,
天得一以淸(천득일이청) : 하늘은 하나를 얻어 맑아지고(淸), 地得一以寧(지득일이녕) : 땅은 하나를 얻어 평안해지고(寧),
여기서 하나(一)는 도(道)를 말합니다.
가까운 청주시에 청녕각(淸寧閣)이 있고 전북 정읍시 태인면에 청녕헌(淸寧軒)이 있는데 동헌(東軒) 건물로 쓰였다고 합니다. 청녕(淸寧)이란 말은 태평(太平)하다는 뜻으로 많이 썼고, 심신(心身)이 맑고 편안(便安)하다는 뜻으로도 썼습니다.
충주시 용관동(龍觀洞)에 가면 관월정(觀月亭)이 있습니다. 콘크리트로 만든 작은 정자(亭子)인데 예전 어느 사람이 인터넷에 쓴 걸 보니 무슨 뜻인지 몰라 불평(不平)한 걸 본 기억이 납니다.
이 정자가 세워진 곳은 용관동(龍觀洞)이고 멀리 단월(丹月)쪽을 바라보는데(정면은 가주동 농공단지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분명히 정자이름을 지은 분은 이를 의식(意識)했을 겁니다. 용관동(龍觀洞)의 관(觀)자와 단월동(丹月洞)의 월(月)자를 따서 정자이름을 지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작은 정자(亭子)는 이 일대(一帶)에 사시던 분들이 동락회(同樂會)라는 계(契)모임을 만들고 돈을 갹출(醵出)해서 세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관월(觀月)은 쉽게 <달을 바라본다>는 뜻이고 달리 말하면 <달을 감상한다>는 뜻이지 어마어마하고 심오(深奧)한 뜻이 있는게 아닌데, 이러한 사정을 모르고 인터넷에 글쓴이는 관월정(觀月亭) 안에 써있는 한문(漢文)들에 질렸을 겁니다.
참고로 관월정기(觀月亭記) 앞부분과 뒷부분을 아래에 붙입니다. 한문(漢文)에 조금 숙달(熟達)된 분들은 쉽게 이해가 갈 것입니다. 예전에 찍은 사진을 글로 옮겼는데 사순봉(社舜峰)이 걸립니다. <사슴봉>을 한자로 옮긴 것인지, 아니면 두무봉(杜舞峰)의 오기(誤記)인지는 확신(確信)하지 못하겠습니다. 관월정기(觀月亭記)를 쓴 분이 문장(文章)을 짓다보니 만들어서 끼워넣은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
세재맹하지초 회우예성지이 용관지중 사순봉전 달천강상 관월정 군현필지 소장함집 시일야 천랑기청 남풍훈창 시이쾌 오인유락지정의 자약술작정지전말 개오동락회 자임인춘시발이(歲在孟夏之初 會于蘂城之而 龍觀之中 社舜峰前 達川江上 觀月亭 群賢畢至 少長咸集 是日也 天朗氣淸 南風薰暢 是以快 吾人遊樂之情矣 玆略述作亭之顚末 盖吾同樂會 自壬寅春始發而)
-중략(中略)-
고인일시 유게지소 역위후손 관감흥기지지 성차정이 명왈관월정 관월지칭 비단 유희이 송석양영소월지위야 유아회원 일치단결 여월지항축년 유락무궁지위야 후범등차정자 역시 관상하천지명월 상쾌지심 발연흥기 기불휴재 기불미재(古人一時 遊憩之所 亦爲後孫 觀感興起之地 成此亭而 名曰觀月亭 觀月之稱 非但 遊戱而 送夕陽迎素月之謂也 惟我會員 一致團結 如月之恒逐年 遊樂無窮之謂也 後凡登此亭者 亦是 觀上下天之明月 爽快之心 勃然興起 豈不休哉 豈不美哉)
관월정기(觀月亭記) 전문(全文)을 아래에 붙입니다.
觀月亭記
歲在孟夏之初 會于蘂城之而 龍觀之中 社舜峰前 達川江上 觀月亭 群賢畢至 少長咸集 是日也 天朗氣淸 南風薰暢 是以快 吾人遊樂之情矣 玆略述作亭之顚末 盖吾同樂會 自壬寅春始發 而會員醵出 會費 春秋一次式 會遊其餘金額 逐年殖貨 而至今十有載 成若干金子矣 迺營構一 會長 總務 及推進委員 其間 最勞心 活躍者也 會稽之前亭不過 暢敍幽情而 己環除之醉翁 只意在於山水間 至若此亭 則人無百年人而 亭子誠支 數百年之壽 故欲以標 當時 吾人 每年 春秋一次 會遊之跡非此於 古人一時 遊憩之所 亦爲後孫 觀感興起之地 成此亭而 名曰觀月亭 觀月之稱 非但 遊戱而 送夕陽迎素月之謂也 惟我會員 一致團結 如月之恒逐年 遊樂無窮之謂也 後凡登此亭者 亦是 觀上下天之明月 爽快之心 勃然興起 豈不休哉 豈不美哉 屬子作交以記 豈予亦會員中之一人 不可固辭 忘其孤陋 敢以萬詞 略記其實云爾
檀紀 四千三百五年 壬子肇夏
慶州 后人 盖窩 李哲雨 撰
충주 단월(丹月)에는 유주막삼거리가 있습니다. 유주막의 유래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는데, 유종호(柳宗鎬) 교수가 쓴 책을 보면 어떤 인물과 관련하여 풀이하고 있습니다.
이 의견에 동의(同意)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일제초기 작성된 <조선지지자료 충주군>을 보면 유주막(有酒幕)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주막이 있다>는 뜻입니다. 한자 유(有)자는 어려운 글자가 아닙니다.
표지석(標誌石)뿐 아니라 여러곳에 유주막(柳酒幕)으로 써놓았는데 신분이 높은분의 성(性)을 앞에 따서 주막(酒幕)이름을 짓는 경우는 없습니다. 신분사회인 조선시대에 영의정을 지낸 분의 성(性)을 따서 주막이름을 입에 올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대통령 성(性)을 따서 술집이름을 쓰는거와 다를바 없습니다.
<유주막>이나 이곳에서 멀지않은 곳에 있는 <돌고개> 유래에 특정인이 끼워든 것은 그 첫 유포자(流布者)가 이 집안 사람임을 증명하지만, 그리 똑똑했다고 볼순 없습니다. 인근에 살던 수많은 민초(民草)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게 땅이름인데, 생각있는 많은 분들도 이런 사실을 망각(忘覺)하고 애써 배제(排除)하였습니다. 작은 시골지역의 지명(地名)과 전설(傳說)에 권력(權力)이 영향을 준 것입니다.
연세(年歲)드신 분들은 주막(酒幕)이 무엇인지 잘 아실텐데 술과 음식을 팔고 잠자리만 제공한 곳이 아닙니다. 밤에는 도박(賭博)도 벌어지고 여인의 성(性)을 팔던 지하경제(地下經濟)가 흐르던 곳입니다. 유주막은 조선시대 영남으로 가는 길목에 놓인 오래된 주막(酒幕)으로 봐야 합니다.
살미면(乷味面) 세성리(洗星里) 세성(洗星)은 <새술막>의 <새술>자를 음이 비슷한 한자로 옮긴 것이지, <별을 씻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명(地名)에서는 이런 경우가 흔합니다. <새술막>은 <새로 생긴 주막>이란 뜻입니다. 유주막(有酒幕)을 지나면 바로 세성리 <새술막>이 있었습니다.
세성리(洗星里)는 <새술막>에서 <새술>자만 따서 한자 세성(洗星)으로 옮긴 것으로 한자음(漢字音)을 빌린 것입니다. 한자(漢字)로 음차(音借)한다고 합니다. 안림동 범의마을은 <범의터골>에서 <범의>자만 따서 한자 범의(凡衣)로 옮겼는데 분명히 범(虎)과 관련있습니다. 올해가 호랑이해인데 호암동(虎岩洞)의 호암(虎岩)은 <범바위>를 한자(漢字)로 뜻을 옮겼습니다. 한자로 훈차(訓借)한다고 합니다. 최근래 호암동은 연수동 이상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연수동 주민센터 앞을 가보거나 인터넷을 보면 연수동(連守洞)의 유래(由來)에 대해서 거창하게 써놓았습니다. 연수동은 연원역(連原驛)의 연(連)자와 동숫(東守)마루의 수(守)자를 한 자씩 따서 동(洞)이름을 지었는데 최근에 충주에서 가장 번듯한 곳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연원(連原)의 뜻풀이입니다. 연수동(連守洞)은 계명산 아래 구릉지에 있는데 작은 언덕들이 많습니다. 원(原)은 <언덕>이란 뜻으로 연원(連原)은 <언덕들이 잇닿아 있다>는 뜻입니다. 영어처럼 문법(文法)을 엄격히 따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한문에서는 앞뒤 글자가 뒤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강조(强調)의 의미로 혹은 발음(發音)의 편의상(便宜上) 글자배열을 바꿉니다. 입춘(立春)은 <봄이 들어서다>는 뜻이지 <봄을 세우다>란 뜻이 아닙니다. 해석을 우리말식으로 해야한다는 뜻에서 예를 들어 보았습니다.
수주팔봉(水周八峰)에 가면 모원정(慕源亭)이 있는데 정자안에 있는 모원정기(慕源亭記)를 유심히 본 분들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첫부분이 예남괴북 유검암산(蘂南槐北 有劍岩山)으로 시작합니다. <예성, 즉 충주의 남쪽 괴산의 북쪽에 검암산이 있는데>라고 모원정(慕源亭)의 위치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유(有)자는 <있다>는 뜻입니다.
모원정(慕源亭)은 팔봉(八峰)마을에서 바라보면 우측 봉우리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정면 2칸, 측면 2칸의 작은 정자입니다. 모원정(慕源亭)은 돌아가신 선친(先親)을 그리워한다는 뜻입니다.
모원정기(慕源亭記) 전문(全文)을 아래에 붙입니다.
慕源亭
蘂南槐北 有劍岩山 雲岸磅礴逶迤匝(糸奄)傍鑿岡 而通川岫中闢 而朗塏峰影 水瞻眺極佳 西接八峰村 容似桃源 而爽開 南望 玉山案峰 掛半空而嵬 長江環繞 天光如鏡面之平坦 蒼崖如屛 松韻奏自然律呂 白石晴沙 灘聲互起 加之百花爛漫 棹歌頻聞 綠陰方濃垂露 㲯毶霜染而楓葉落 而山庾白雪編山層 氷懸岩因此四時之景 而偸閒賞景寓物寄情 則可謂開豁心者 有超然自得之妙 此占基得宜也 湖西李雅明洙 姿質溫良氣宇不拘 勤儉稼穡康濟一家 年過六旬 旣不吝財致誠多年 作亭於斯 數間翼然於壁上 非但深於城市紛華之場 每盤桓乎 林皐泉石之美宜養性於烟霞風物之中於是乎 山川增彩草木生輝非徒 爲一人之事業 是鄕之名盛績也 噫 此亭之作奚止於斯越觀西麓父阡相見因陟降而不忘其親寓慕之情於斯頻起古有不忘其親而有作思亭者 盖其不忘 乃所以報本之一道也 且主傍祖灘翁 旣享於八峰院撤己積歲久未伸情 亦不無追遠未逮之感矣 俱緣於此而扁之曰 慕源亭 惟主人隨時登臨 而必會其義下庭而宜銘 于心動靜語默之間造次施爲之際恒思所以慕源而 乃己則勝坮名之吟風詠月 而操弄墨者 流實不矣 夫子所謂 人不忘其本者 亦可期而待之矣 然則作亭者之 爲功於世觀覽者之有賴於此亭 豈可以勝喩其大歟 要余名亭而記之文 雖不工述其所感 而記之 凡厥後仍莫倦於羹牆之慕奉先之道 永保其無彊安止 爲亭之美哉 余曰望其如此而識之
玄默 茂春 松齋 李鎬昌 記
금가면(金加面) 하담리(荷潭里)에 가면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을 기리는 작은 정자 모현정(慕賢亭)이 있습니다. 좀 낡긴 하였지만 정자에서 바라보는 경치(景致)가 근사(近似)합니다. 충주에 사는 풍산홍씨(豊山洪氏) 집안은 홍이상(洪履祥)의 후손(後孫)들이라고 하는데 모현정기(慕賢亭記) 일부분을 옮깁니다. 모현정(慕賢亭)이 무슨 뜻인가는 인용(引用)하는 마지막 구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중원지북 목호지상 유동왈하담 후유세록 굴곡위요환잡 전유군산 나열고강원수(中原之北 牧湖之上 有洞曰荷潭
後有細麓 屈曲圍繞環匝 前有群山 羅列高岡遠秀)
-중략(中略)-
내십일대조 모당 문경선생 이국조명신 입조사업지선덕 유풍수지 후세원근사림 설원향사 기우고종조 영폐철지후 자손지통지사한 무지가설의 정축춘 오종유지 제언탄성갈력건정 어원우미기당 왈모현 개취추모존현지의야
(乃十一代祖 慕堂 文敬先生 以國朝名臣 立朝事業之善德遺風垂之 後世遠近士林 設院享祀 曁于高宗朝 令廢撤之後 子孫之痛志士恨 無地可雪矣 丁丑春
吾宗有志 諸彦殫誠竭力建亭 於院右楣其堂 曰慕賢 盖取追慕尊賢之義也)
모현정기(慕賢亭記) 전문(全文)을 아래에 붙입니다.
慕賢亭記
中原之北 牧湖之上 有洞 曰荷潭 後有細麓 屈曲圍繞環匝 前有群山 羅列高岡遠秀 足以致靈運之淸標 左有太古煙霞之痼癖擬作堯天之乾坤 南有玉湖 大江之瀯聲喚起自然底律侶其泓崢幽絶可以爲愛林泉之奇勝 噫 此地有翼然丹雘而輪煥暎輝者 乃十一代祖 慕堂文敬先生 以國朝名臣立朝事業之善德遺風垂之 後世遠近士林設院享祀曁 于高宗朝令廢撤之後 子孫之痛志士恨 無地可雪矣 丁丑春 吾宗有志 諸彦殫誠竭力建亭 於院右楣其堂 曰慕賢 盖取追慕尊賢之義也 幸賁先生當 曰仁智之眞趣顧名思義一念于賢 而勿忘其赫赫志業 或接物而不忘 或臨機而追慕哉 鳴呼 於焉光陰已過 數十年之門爲風雨之所 頹破而寥寥未遑者 至今 曰而與僉宗議㝎始加重修儘吾宗光紫而所謂灵芝醴泉之有源者非耶 自今以後 登斯亭而逍遙乎 千沠萬流朝海之上盤桓乎 風淸月朗灑落爽快之時隨時而感發繼述之心應物而激勵无忝之志以盡事一不忘之誠則 豈非慕賢報本之義哉 日日所望者如此盖相勉旃
歲甲寅 槐月 上澣
十一代孫 承箕 謹書
수안보면(水安堡面) 오산마을에 가면 제법 규모를 갖춘 정자(亭子) 열락정(說樂亭)이 있습니다. 정자(亭子)와 현판(懸板)은 근래 새로 만들었는데 누정기(樓亭記)는 지금으로부터 꼭 60년전인 1962년에 썼습니다. 소나무도 울창하고 이 마을 뒷산 정상을 오르면 주정산(周井山) 봉수대(烽燧臺)가 있어서 많은 탐방객(探訪客)이 찾고 있습니다.
마을이 깔끔하고 운치(韻致)가 있는데 열락정기(說樂亭記) 앞부분을 아래에 붙입니다. 열락정(說樂亭)은 논어(論語) 첫부분 학이(學而)편에서 글자를 따서 이름지었는데, 자세한 사정(事情)은 마지막 구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
(學而時習之 不亦說呼 有朋自遠訪來 不亦樂呼)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열락정기(說樂亭記)는 지금 수안보면 이전 이름인 상모면(上芼面)이 괴산군(槐山郡)에서 중원군(中原郡)으로 편입되기(1963년)전인 1962년에 썼기 때문에 앞구절 신괴구연지지(新槐舊延之地) 즉 <예전 연풍군에서 새로 괴산군이 된 땅> 구절이 나오고 [상모면지], [수안보에 살으리랏다]에 번역문(飜譯文)이 나옵니다.
한가지 걸리는 것이 아래 보이는 기종영(其宗英)인데 종영(宗英)은 사람이름이 아니라 종친(宗親), 종실(宗室)의 뜻으로 많이 썼는데, 여기서는 <일가, 친척>이란 뜻으로 <집안 젊은이>를 말합니다. 종인(宗人)은 <집안사람>이고 종당(宗堂)은 <집안사당>을 말합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한 자 한 자 번역해서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신괴구연지지 상모면 온천리 오산 일색봉전 청계상 유정규연 미지이열락당 시합천이씨 세래장수지소야 일기종영 기현 태현 윤현 방여어구산초사 이언왈 아선조 호군공 휘흡 선조신축년간 조자기여매축 우차강수문학 계적후생 이사정창의 차명게의
(新槐舊延之地 上芼面 溫泉里 烏山 一色峰巓 淸溪上 有亭巋然 楣之以說樂棠 是陜川李氏 世來藏修之所也 日其宗英 錤鉉 太鉉 潤鉉 訪余於龜山樵社 而言曰 我先祖 護軍公 諱洽 宣祖辛丑年間 肇自畿驪邁軸 于此講修文學 啓迪後生 而斯亭創矣 此名揭矣)
열락정기(說樂亭記) 전문(全文)을 아래에 붙입니다.
說樂亭記
新槐舊延之地 上芼面 溫川里 烏山 一色峰巓 淸溪上 有亭巋然 楣之以說樂棠 是陜川李氏 世來藏修之所也 日其宗英 琪鉉 太鉉 潤鉉 訪余於龜山樵社 而言曰 我先祖 護軍公 諱洽 宣祖 辛丑年間 肇自畿驪簻軸于此 講修文學 啓迪後生 而斯亭創矣 次名揚矣 自是厥後有若 諱春載 德賢 德仁 復彦 祖聃 膺淳 膺聃 膺祉 號 鍾山 昌寅 號 重岩 性默 號 束村 溱鉉 號 仁溪 諸公 或 直幹而承緖 或旁抽而繼聲 時習之說 及人之樂 不墮乎 地而在乎 人作成人材 自不尠焉 鄕俗漸美 文風稍振庶 可爲西湖之鄒魯矣 噫 自島夷逞毒 鬼方騁佐以後 斯文之厄甚於焚坑經籍而芭籬 典禮而糞壤 黌堂全廢 絃誦無聞而斯亭 亦未免只有空墟 迺者 重岩 仁溪 二公 慨歎不己 曰累世說樂之所 竟至於斯爲昆者 何忍棄置而不念肯搆乎 遂謨諸諸族 乙亥春 復建數間茅棟 癸未春 更易之以瓦棟 因揭舊楣 欲圖其永保 然而尙無紀棠之文 不惟恐其先蹟之愈 久而愈泯 又頗有騷 人墨客 登眺者 亭無主人之譏子有垂惠 勿靳濡毫 余戲然歛袵 曰奉先孝思 誠然誠然 如余朽筆非其任 奈何辭之 固而請益勤 乃不獲己而忘陋復之 大抵 孝子慈孫之慕先也 不忍泯其跡 故一硯之舊也 而猶執而泣 一氈之微也 而或世守之 況累世藏修之地 肄業之所 又非一氈硯之可此則其有肯搆之責者 水不忍廢 地不忍荒 此說樂亭之所以復建也 顧今 彛倫斁塞 人道掃如辱先忘親者 滔滔而盛門之如此美擧 尙可以揭先徽 警俗態而諸先公 學術之正 擩染之深 亦可推而驗也 豈不善乎 亦不休乎 然凡爲諸公之後者 勿以此爲足更進一步 欲存諸公之跡 必傳諸公之心 欲傳諸公之心 必期於繼述諸公正學 習之熟 說之深而克致其及人之樂 一如諸先公之爲而永世勿替焉 則此棠肯搆之盡善盡美者也 斯亭也 將自與山高水長 同其壽矣 其敬念而勗之哉 用是爲張老之頌焉 繼之以詩曰
一色峰巓李氏亭 世來講學好門庭
說深胸抱培天性 樂及英材賴地靈
鞏固肇基先蔭厚 繼承肯構後昆馨
遊人欲識箇中趣 看取歲寒松栢靑
高宗九十九年 歲次 壬寅福月吉日 恩津 宋錫星 謹記
오산마을 안에는 북가정(北柯亭)이란 작은 정자가 있는데 열락정(說樂亭)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므로 북가정기(北柯亭記) 전문(全文)을 아래에 올립니다. 원문(原文)을 조금 다듬었습니다.
北柯亭記
西紀 一千八百拾參年 折衝將軍 副護軍 七代孫 諱 膺淳 膺圭 兩公等 樵欏茅亭 建立名之 曰柜亭 其後 宗族子弟等輩 以書堂使用 學文硏磨 及經傳講議 從事儒生 多數輩出耳 嗚呼 庚戌之歲 日人侵入後 管理疎忽 風磨雨洗 頹落朽損 維持困難 至於閉閱 但在空址之餘 噫 數十餘年 傳來中 昌寅及 湊鉉兩甫 先祖學業繼承 烏山一色峰嶺 說樂亭 創建合意 大宗會提議 宗會加決 財政及勞役 宗中一體負擔 一千九百四十二年 癸未 說樂亭 創建 北亭東南三間 瓦家修箿 松林陰害難保 故以含錫變更 復箿瓦家 風雪被害極甚 再次重建 計劃 一千九百八十年 大宗會結議依現位置 說樂亭重建 即說樂亭精神 先祖學文傳受 于澤之氣 潛在說樂亭 體木難棄而 體木全部 現位置遷移 柜亭一間 瓦家重建 即是北柯亭 維我李門 同時 千秋萬代繼承 左右蒼蒼松林之節介 永遠繁盛
西紀 一千九百九十三年 七月 日
이상 옆길로 한참 샜는데 제금당(製錦堂) 당호(堂號)로 돌아갑니다. 제금<製錦>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비단으로 옷을 짓는다>는 말인데 <고을을 정성껏 다스린다>, <어진이가 현령(縣令)의 자리에 앉는다>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충주 제금당(製錦堂)은 조선시대 객관(客館) 즉 영빈관(迎賓館)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현령(縣令)이란 조선시대 현감(縣監)으로 목사(牧使)아래 직책이지만, 춘추좌씨전 원문(原文)은 오랜 옛날 춘추시대 역사를 다룬 책이므로 지방에 파견하는 수령(守令)으로 보는게 타당합니다.
춘추좌씨전 원문:
子有美<錦>(자유미금) : 아름다운 비단이 있는 것을
不使人學<製>焉(불사인학제언) : 이제 겨우 옷을 짓는걸 배우는 사람에게 맡기지 마십시요.
.........................................................................
而使學者 <製>焉(이사학자제언) : 옷을 짓는걸 제대로 배운 사람이 지어야,
其爲美<錦>不亦多乎(기위미금불역다호) : 그 아름다운 비단이 멋있는 옷으로 만들어 지지 않겠습니까?
청음집 제6권
칠언율시(七言律詩) 164수(一百六十四首)
온양(溫陽)의 동각(東閣)에서 사제(舍弟) 중정(仲靜)에게 보이다
연못가의 작은 집은 먼지 하나 없거니와 / 臨池小閣絶纖埃
조용한 낮 연꽃 바람 살랑살랑 불어오네 / 晝靜荷風細細來
화극 서린 맑은 향기 속된 물건 밀쳐내고 / 畫戟淸香排俗物
대나무와 고목들은 시의 소재 감이 되네 / 新篁古木入詩材
대궐에선 백성들을 걱정하는 뜻 안 잊어 / 九重未忘憂民意
이 고을에 <제금>하는 인재 내려 보내었네 / 百里仍須<製錦>才
우습구나 늙은 이 형 쓸데없이 살아남아 / 堪笑老兄無用在
허연 머리 심사 온통 찬 재에다 붙인 꼴이 / 白頭心事着寒灰
[주D-001]화극(畫戟) : 누각의 들보에 둘러친 색칠한 창살을 말한다.
[주D-002]제금(製錦) : <비단으로 옷을 만든다>는 뜻으로, <어진 자가 고을 수령으로 나아가 정사를 펴는 것을 뜻한다.>
춘추 시대 정(鄭)나라의 자피(子皮)가 나이 어린 윤하(尹何)라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느 큰 고을을 다스리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자산(子産)이 윤하는 아직 나이가 어리고 정치가 미숙하여서 안 된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당신에게 아름다운 비단이 있을 경우, 그대는 옷 짓는 법을 이제 막 배우는 사람에게 그 비단을 주어서 옷을 만들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큰 벼슬이나 큰 고을은 많은 사람들의 몸을 감싸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막 정치를 배우고 있는 자에게 시험 삼아 다스리게 한단 말입니까?” 하였다. 《春秋左氏傳 襄公31年》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06
첫댓글 잘보았습니다.
''건물만 있고 사람들이 객관(客館)으로 사용(使用)하고 부른것을, 훗날 새로 건물을 지으면서 제금당(製錦堂)으로 당호(堂號)를 붙인 것일 겁니다. ''
이 부분이 잘 이해가 안되네요.
어느 건물 남아 있었다는 것인지요
선생님의 글에 낙서(落書)를 남겼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객관(客館)이란 구절이 몇번 보이지만 관아(官衙)안에 수많은 건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누구나 객관이 어디 있는줄 잘 알기 때문에, 특별히 객관으로 건물에 표시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조선후기 조병로 목사가 충주읍성을 개축하면서 건물을 새로 짓고 이때 당호(堂號)를 붙였을 것이라는 의견이었습니다.
청녕헌(淸寧軒), 제금당(製錦堂), 산고수청각(山高水淸閣) 등.
이 부분은 [忠州의 地誌]란 책에서 상량문(上樑文)을 본 기억이 납니다.
물론 건물에 단청(丹靑)도 하지 않았는데 훨씬 훗날에 했을 것입니다. 관아건물에 단청을 한 것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원래 하지 않았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지리지인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누정제영(樓亭題詠)은 물론 시문(詩文)이 붙어 있습니다. 당연 글과 현실(現實)은 다를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