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덕이∼”남자의 목소리가 돌담을 타넘었다. 개그계의 ‘느끼남’리마리오의 목소리 빰치는 그 음성은 으슥한 골목길을 울려 어두운 하늘을 향해 가늘게 메아리쳤다. 남자의 목소리는 신성일, 신영균, 배호 등 유명 연예인들의 목소리를 따온 느낌이 들었다. TV가 없던 시절, 도시락만한 밧데리를 찬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볼륨에 불을 뿜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가짜 가수, 가짜 배우가 넘치던 시대였다. 물론 목소리로 말이다. 얼굴보다는 목소리가 상전이던 시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목소리가 ‘맨발의 청춘’들의 애간장을 녹이던 시절, 그 중심에 라디오가 있었다.
#라디오의 시대
지금은 다채널 다매체의 홍수시대를 맞고 있으나, 불과 50여년 전만해도 제주는 매체의 ‘사막지대’였다.
간혹 일본을 오갔던 교포나 무역인들을 통해 어렵사리 트랜지스터 라디오 한 대를 구한 집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트랜지스터 라디오의 볼륨이 오를 즈음, 마을 주민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스무고개’‘인민열사’등 육지 전파에 귀를 ‘쫑긋’ 세웠다.
제주에 방송(KBS 제주방송국)이 시작된 것은 1950년, 한국전쟁의 한창 발발하던 때였다. 전쟁을 피해 제주로 몰려드는 1만여 명의 피난민들에게 수시로 변하는 전쟁의 전황을 알리고 주민과 피난민들을 위무할 전파 매체의 필요성에 따른 거였다.
방송국이 개국되면서 로컬뉴스와 각종 라디오 프로그램이 전파를 타고 제주사람들의 안방을 찾아들었다.
‘정오의 희망곡’‘노래의 꽃다발’등 점심때를 노린 음악프로그램들이 사랑하는 청춘남녀의 ‘핑크빛’ 사연이 적힌 엽서를 소개하는데 열을 올렸다.
저녁무렵이면 밭일에서 돌아오는 아버지, 특히 여름밤 처녀총각들이 해변으로 몰려가 정자나무 쉼팡에서 라디오를 즐겨 듣곤 했다. 한마디로 라디오는 대도시를, 산골마을을, 가난한 어부의 삶과 안방을 하나로 울렸다.
1960년대 이후 제주사람들은 가수 현인의 ‘신라의 달밤’과 최희준의 ‘맨발의 청춘’, 한명숙의 ‘노란 사쓰 입은 사나이’와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를 들으며 하루의 시름을 달랬다.
그 시절, 라디오는 상상의 물건이었다. 라디오 연속극은 청취자들에게 상상력을 유발시키는 힘을 지녔었다. 농구시합 중계시 아나운서는 선수의 일거수 일투족을 말로써 생생하게 풀어내야 했던 때였다. TV보다 더 그림 같았고, 만화보다 더 창의적인 세계를 꿈꾸게 했던 게 라디오였다.
#제주 라디오, 전국에 울렸다
제주 라디오가 제주에서만 전성시대를 누린 것은 아니다. 제주방송 개국 이래 제주 라디오 프로그램은 망망대해를 건너 강진, 영암, 진도, 완도, 목포 등 해남지역과 전라도 지역에 전파됐다.
제주 라디오가 전파를 타면서 제주는 육지 사람들에게 ‘꼭 와보고 싶은 관광지’‘신비와 낭만의 섬’으로 뚜렷이 각인됐다. 전국에서 청취자들의 엽서가 날아들었다. ‘귤림의 향기’라는 프로그램은 ‘밀감나무 한 그루면 자녀 대학 보낸다’는 소문이 무성해질 만큼 제주 농가들이 밀감농사에 매달려 있음을 생생하게 알렸다.
‘남해의 메아리’프로그램은 목포와 제주를 잇는 이원방송으로 진행됐는데, 특히 전라도 청취자들의 희망곡 신청이 쇄도했다. 제주 곳곳의 관광 명소가 소개되면서 ‘제주에 가고 싶다’는 사연이 적힌 엽서들이 넘쳐 났다.
#제주의 ‘라디오 스타’
제주 라디오가 뜨니 제주 방송인들의 인기도 동반 상승했다. 제주 라디오 초창기, 김청신·고려진·이경희 아나운서(KBS 제주방송국) 등 라디오 스타들이 등장했다.
이기형·조응방·이문교·이광언씨, 김순두·김종명·전문주씨, 이기형· 등은 한참 이후에 활동했던 아나운서 내지 기자였다.
라디오 스타들은 뉴스면 뉴스, 퀴즈쇼면 퀴즈쇼를 가리지 않아 1인 5역을 다했다. ‘한 낮의 꽃다발’ ‘정오의 희망곡’‘누가 누가 잘 하나’등이 당시 이름을 날렸던 프로그램이다.
라디오 스타에게 소문이 따르지 않으면 재미없다. 12시까지 야근하는 여성 아나운서에게 전화로 대뜸 “왜 밤늦게까지 고생하느냐”며 “나에게 시집오라”는 청취자가 있었는가 하면, 감기약을 지어 보내 아나운서를 감동시킨 청취자 등 별의별 독특한 취향을 가진 청취자도 많았다.
제주 라디오가 뜨니, 청소년도 떴다. 60년대 초, 당시 까까머리 학생이었던 장홍종씨(63. 전 방송인)은 제일극장에서 열린 ‘노래자랑’대회에 참가, 합격까지 했다가 학생신분이 밝혀져 합격이 취소되기도 했다.
이렇듯 당시에는 유명가수의 창법을 따라하는, 모창이 유행했던 만큼 무명가수들이 ‘끝발’날리던 때였다.
장홍종씨는 그 인연으로 이후 연극인 서정용씨, 작가 김가영씨와 함께 라디오 프로그램인 ‘제주 향토드라마’에 출연, 목소리로 1인 다역을 소화해내는 기염을 토했다.
그 때의 ‘라디오 스타들’은 비록 현장을 떠났으나, 그때의 감흥은 청취자들에게 아련히 남아있다. “순덕이∼”를 애타게 부른 그 남자의 추억에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