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은 당시 명문이던 경남중,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입학 한 수재였다. 고교 시절 초기에는 '문과에 문재인, 이과에 승효상'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학업에 두각을 나타냈지만, 말기에는 극도로 가난한 자신의 처지에 낙망, 술·담배에도 손을 대며 방황을 하다 입시에 실패, 서울대학교 진학도 이루지 못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종로학원 진입 시험에서 일등을 하며 학원비를 면제받고 재수를 시작했지만, 서울에서 계속 재수 생활을 이어갈 만큼의 형편이 못되었기 때문에, 경희대학교를 일으킨 조영식 박사의 권유를 받고, 4년 전액장학금을 약속한 경희대학교 법대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대학시절 총학생회장이던 강삼재를 대신하여 박정희 유신 독재에 항거하는 집회를 주도하다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대학에서 제적당했다.
출소 후에는 신체검사도 생략된 채 군에 강제징집 되었다. 그러나 육군신병훈련소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특등사수', '선임분대장'으로 활약하면서 훈련을 마친 후에는 '특전사령부 제1공수 특전여단'에 차출되었다. 주특기는 '수중폭파'이다. 유도 유단자에 수영과 스쿠버다이빙 실력도 수준급이라고 한다. 당시 특전사 사령관 정병주와 여단장 전두환으로부터 두 차례의 최우수 특전사 표창을 수상했다.
전역 후에는 경희대 법대를 졸업한 후 다시 전두환 군부독재에 항거하다가 청량리 구치소에 투옥되었고 옥중에서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당시 안기부의 심문에서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라며 끝까지 자존심을 굽히지 않자 경희대 조영식 총장의 신원보증 아래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연수원 시험성적이 수석이었고 연수원 내 최고상인 법무부장관 표창도 받았지만 학생운동 이력으로 차석으로 밀려났고 판사임용도 좌절되었다. 이후 대형로펌의 영입제안을 거절한 채 미련없이 부산으로 낙향하여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어가게된다. 이 때 운명처럼 노무현을 만나 함께 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하였다.
문재인은 변호사로 활동하며 정치권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기도 했지만 한사코 거절했다. 그러나 노무현의 완곡한 설득으로 참여정부 초대 대통령 비서실 민정수석을 역임하였고 당시 그가 다룬 업무량은 타의추종을 불허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과정에서 건강악화로 1년만에 청와대를 떠난다.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히말라야로 트랙킹을 떠나 외부와 연락이 두절 된 상태에서 영자 신문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소추 소식을 듣고 즉시 귀국하여 그의 변호를 맡았다. 2005년에는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참여정부의 마지막 비서실장을 지냈다.
문재인은 공사간 구별이 뚜렷하고 원칙을 따진다는 평이 많다.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재직시절 한 비서관은 "아주 사소한 문제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어 보고서를 올리는 입장에서는 매일이 긴장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해찬 총리가 부적절한 인사들과 골프를 쳤다는 소식을 듣고 고심하던 노무현 대통령에게 해임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임기 내에는 동창들도 멀리하였다. 한 번은 고등학교 동창인 고위공직자가 문재인의 방을 들렸다가 얼굴도 못 본채 쫒겨나면서 동창들의 미움을 사기도하였다.
청와대의 모든 직원들에게 존댓말을 썼던 일화 또한 유명하다.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기 보다는 다양한 의견을 듣고 상황을 명확하게 정리해내는 업무스타일을 지녔다.
문재인의 일생은 권세와 정치로부터 초연한 삶이었다 하지만 늘 그의 뜻과는 반대로 흘러갔다. 참여정부가 막을 내리고 양산의 한적한 시골로 내려가 초야에 묻혀살던 2009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한다. 그의 인생을 송투리채 바꿔놓는 일생일대의 사건이었다.
이 후 문재인은 오합지졸로 갈피를 못찾던 야권의 새로운 구심점으로 떠오르며 정치에 입문하게 되었다.
첫댓글 문재야...
감옥에서 사시붙어 변호사 되고 어쩌다 권력에 끈이 닿아 감투 쓴 것 외엔 별로 특이한 점은 없습니다.
문재인은 2003년 마이뜨레아 라엘을 입국거부 추방시킨 노무현 정부때의 오른팔 이였던 자로서 그때 마이뜨레아 입국거부에 한몫 했을지도 모르는 인물, 문재인은 카톨릭 신자로서 이게 더욱 신빙성을 갖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