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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단이 재건되고 번제를 드림
스 3:1-7
1 이스라엘 자손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인지라
2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다 일어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그 위에서 드리려 할새
3 무리가 모든 나라 백성을 두려워하여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서 아침 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4 기록된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켜 번제를 매일 정수대로 날마다 드리고
5 그 후에는 항상 드리는 번제와 초하루와 여호와의 모든 거룩한 절기의 번제와 사람이 여호와께 기쁘게 드리는 예물을 드리되
6 일곱째 달 초하루부터 비로소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으나 그 때에 여호와의 성전 지대는 미처 놓지 못한지라
7 이에 석수와 목수에게 돈을 주고 또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기름을 주고 바사 왕 고레스의 명령대로 백향목을 레바논에서 욥바 해변까지 운송하게 하였더라
스 3:1-7 / [새 제단에서 첫 제물을 바치다] 이스라엘 백성이 저마다 자기 고향 마을로 가서 정착한 다음, 바로 ㄱ) 그해의 7월이 되자 온 백성이 한마음으로 단합하여 예루살렘에 모였다. (ㄱ. BC 537년) 2)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 형제 제사장들과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 형제들이 모두 단합하여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다시 건축하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규정된 대로 번제물을 바치게 되었다. 3) 그 땅의 주민들에게서 위험과 두려움이 크게 엄습하였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당당히 그 옛터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께 아침 저녁으로 번제물을 바쳤다. 4) 그러고 7월 15일부터 일주일 동안은 정해진 율법의 규정에 따라 초막절을 지켰다. 그들은 이 축제기간인 7일 동안에 매일 규정된 숫자의 제물을 바쳤다. 5) 이때부터 예루살렘에서는 다시 아침과 저녁에 규칙적으로 번제물을 드리고, 매월 초 하루와 모든 절기에 제물을 드리고, 여호와께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여 드리는 예물도 바쳤다. 6) 이스라엘 백성이 바사의 유형지에서 돌아온 해의 7월 1일부터 이렇게 다시 여호와께 정규적으로 제물을 바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성전재건을 위해서는 아직 주춧돌도 놓지 않았었다. 7) [성전재건의 시작] 온 이스라엘은 이제 옛날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와 같이 두로와 시돈의 석수와 목수들을 고용하고 레바논의 백향목은 바다에 띄워 욥바로 운송해 오도록 하였다. 그 값으로 두로와 시돈 사람들에게 곡물과 술과 기름을 주었다. 바사 왕 고레스가 성전재건의 책임자였고 그의 조서에 따라서 아람 족속들도 예루살렘의 성전재건에 힘을 쓰게 되었다.
포로로 잡혀 있던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주변의 대적들 때문에 곧바로 성전을 재건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이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고백되고, 성전 재건이 시작됩니다.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인지라(1-6) 이스라엘 자손이 유다로 돌아와 각자의 성읍에 살다가 일곱째 달에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한 마음이 되어서 예루살렘에 제단을 재건하는 일에 나섰습니다. 이 일은 제사장 예수아와 스룹바벨이 나서서 진행한 일로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제단과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이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이들이 만들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의 율법이 중요하게 받아들여진 것은 이스라엘이 겪은 역사가 가르쳐 준 교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전을 재건하는 일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헌신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된 삶을 살겠다는 고백과 의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뜻이 서 있다고 해서 현실적인 위협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이스라엘을 압박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믿음과 의지가 외부의 위협에 맞설만큼 강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성전 재건의 시작이 늦춰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겠다는 마음의 고백과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다짐이 기쁘게, 지속해서 드려진다면, 그들 안에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성전 재건을 위한 재료들(7)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일꾼, 재료가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수와 석수를 고용하고,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들로 백향목을 운송하게 했습니다. 성전이 재건되는 과정은 규모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지만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의 과정을 모형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솔로몬 성전과 재건되는 성전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확인하여 주고 있습니다.
적용: 성전 파괴와 포로 생활, 그리고 귀환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과거의 경험은 현재를 새롭게 시작하게 만드는 교훈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과거의 경험을 통해 현재를 새롭게 시작하는 다짐이 있습니까?
타락한 인간의 회개는 단순히 굴욕을 감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수천 년 간 익혀 온 자기 만족과 자기 의지를 버린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일부를 죽이는 것, 일종의 죽음을 겪는 것을 뜻합니다. 말 뿐인 뉘우침은 회개가 아닙니다. ‘묵은 땅을 갈 듯’ 삶을 고치고 ‘마음 가죽을 베어야’ 참 회개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인간으로서 완전하게 복종했고 완전하게 낮아졌습니다. 그의 낮아짐과 고난을 나눌 때 죽음을 정복한 그의 승리 또한 나눌 수 있습니다.
< 설 교 >
고향에 가져갈 것은 바벨론에 살 때 준비해야 한다
스 3:1-13 / 김경형목사
3장에서는 성전 터를 닦고 모든 백성이 제사를 드렸고, 초막절도 지켰고, 시돈 사람들과 두로 사람들과 기술자들을 동원해서 성전 기공식을 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어떤 기사는 토막토막 끊어져가지고 연결이 잘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있습니다. 그러나 계시적으로 보면 그것이 다 신앙 사상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을 하지 못하면 다음 것을 못하게 되어 있다 그 말이요. 마태복음 5장도 그렇습니다. 역사적으로 사건적으로 순서없이 되어 있는 것 같으나 전부는 그것이 계시적으로 그렇게 기록이 된 것입니다.
1장에서는 ‘바벨론에서 종노릇 하면서 어떻게 사느냐? 어떻게 살다 가느냐?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어떻게 살다 가느냐’ 그게 있었고, 2장에 보면 ‘성지로 돌아올 때에 너와 함께 따라오는 자손이 얼마냐? 한 가지 종류의 사람이냐, 각양의 사람이냐?’
우리는 2장에서 구원에 대한 다양성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성화구원 면에서의 말이지요. 또 2장 마지막에는 자기가 그동안 시온주의로 살면서 성전 짓는 데에 투자한 것이 있습니다. 역량대로 드리게 되는데, 포로로 살 동안에 허리띠를 졸라매고 ‘먹고 마시자’ 하는 그런 주의로 살지를 않고, 바벨론의 정신은 다 버리고 바벨론의 재산을 가지고 예루살렘의 성전을 짓는 데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한 겁니다.
그리고 또 바벨론의 것을 가지고는 안 되니 꾸어가지고 금은보석으로 마련을 했다 그 말이요. 이것은 보이지 않는 재산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앞으로 바벨론을 떠날 것인데 바벨론에 정이 붙은 사람은 그날에 고향에 가지고 가지 못할 것을 바벨론에다 건설하고 확장하고 투자하면서 바벨론에서 인정을 받고 대우를 받고 살겠지요? 이런 것은 바벨론 건설 확장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서 그렇게 건설하는 것은 가식적이다 그 말이요.
명예와 부요 존귀를 목적하며 바벨론에 투자를 하며 바벨론 주의로 살면 대우 받고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면 장차 고향으로 돌아갈 때는 가지고 갈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됩니다. 하지만 바벨론에서 시온주의 정신을 갖고 살다가 보면 고향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에 거기에 가서 쓸 수 있는 것을 가지고 갈 수 있게 된다 그 말이요.
돈이 많을 때에 성전을 짓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바벨론 생활 70평생 동안에 모으고 또 모으고, 마치 조개 속의 진주모양 서서히 서서히 키워나가는 거. 이를 위해 바벨론에서의 낭비는 아깝게 여기고, 고향 예루살렘에 가져가서 황폐해 있는 성전 터에다가 제사를 드릴 때에 바칠 수 있게 하는 것.
그래서 바벨론 70년 동안 유대인들이 산 그 때 그 정신을 이어받은 유대인들은 지금도 돈을 쓰되 외국에서 함부로 물 쓰듯 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돈을 써도 외국에 나가서 쓰지 않고 자기 나라 이스라엘에 들어와서 쓴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지요? 우리 한국 사람들은 어떻지요? 외국에 나가서 물 쓰듯 합니까? 그러니 나라꼴이 뭐가 됩니까?
드디어 스룹바벨의 인도로 고향에 돌아옵니다. 옛날 솔로몬의 성전을 본 노인들은 그 성전에 너무나 초래해서 펑펑 울었지요. 그런데 청년들은 자기 손으로 성전을 지었다고 해서 막 좋다고 그랬지요.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다윗이 이방을 칼로 정복을 해서 정복한 자들로부터 조공을 받은 것을 가지고 지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솔로몬의 재산은 하나도 없이 지었다 그 말이요. 재료는 전부는 외국 것이었다 그 말이지요.
그러나 스룹바벨의 성전은 포로생활을 하면서 중노동을 해서 많은 임금을 받아서 먹고 쓰고 남아돌아가서 그 돈으로 지은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노예이기 때문에 일반 노동자보다도 아주 저임금이라 그 말이요. 70년간을 하루하루 피를 짜고 뼈를 깎고 죽도록 노동을 해서 임금을 푼푼이 저축을 하고 모은 돈으로 성전이 되어졌다 그 말이요. 그야말로 이것이 성전이라 그 말이요. 백성들의 피와 땀방울이 아니더냐 그 말이요.
중노동에 저임금을 받아가면서 모든 돈으로 먹고 쓰고 입고 구경 가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것저것 다 무르고 70년간이나 고향에 돌아갈 것을 소망하던 사람이 고향에 돌아와서 중노동을 하면서 모은 그 돈으로 성전의 터를 놓을 때에 그 감격은 지금의 돈으로 말한다면 수십 억 수백억이 문제가 아니라 그 말이요.
우리가 구약의 성전을 가만히 보면 솔로몬의 성전이 있었고, 본문에 나오는 스룹바벨의 성전이 있었고, 후에 예수님 당시에 헤롯이 지은(수리한)성전이 있습니다. 이 성전이 각각 다릅니다.
스룹바벨이 성전을 지을 때에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는 무엇을 바쳤을까? 내 투자가 얼마나 되었느냐’ 하는 그게 있을 거란 말이요. 먹고 마시고 남은 것으로 성전을 지었다면 그 성전은 다 못 짓습니다. 지을 수가 없어요.
귀국령이 내릴 그 때를 생각을 하면서 ‘예루살렘을 떠나 70년이 되면 귀국을 한다. 그러니 오늘의 생활을 바로 하고 가자’ 하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았을 겁니다. 그리고 그 때 당시에 귀국하기 전에 바벨론에서 죽은 부모들이 있을 거라 그 말이요. 죽을 때에 유언하기를 ‘나의 재산을 헛으로 쓰지 말고, 낭비하지 말고, 먹고 마시고 낭비하지 말고 나의 재산을 성전을 짓는데 써라’ 하는 그런 유언이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때 당시 피를 짜고 뼈를 깎아 모아놓은 그 유산보다 더 좋은 것은 신앙 믿음의 유산을 넘겨주는 것이지요. ‘오늘날 성직자들이 이것을 물려주고 있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저는 요즘 들어서 자꾸 생각을 하는데, 성경대로 볼 때에 앞으로 분명히 조용하지는 않습니다. 말세가 되어 올수록 나라와 나라끼리 민족과 민족끼리 싸우고, 집안끼리 식구끼리 원수가 된다. 이제 그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런 걸 가만히 생각해 보며 테레비에 나오는 목사님들 설교를 들어보면, 그래도 유명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나오는 건데 내가 볼 때는 도무지 진리사상 정신이 나오지를 않고, 하나님의 뜻이 없는 거고, 사회구원을 외치고 있다 그 말이지요. 성경하고는 뜻이 멀어요.
그리고 현재 우리교회 교인들의 신앙이 이 모양인데 앞으로 우리 자녀들의 신앙이 참 큰일이겠다. 세상 이 바람이 부니 이렇게 날려갈 거고, 저 바람이 부니 저렇게 날려갈 거고. 그렇게 날려가다가 소돔 고모라처럼 유황불을 만나는 그런 생각을 하니까 아주 걱정이 태산 같아요.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내가 볼 때는 지금 진리의 교회를 보기가 참 힘들어. 진리 받는 교역자들도 다 변질이 되었고 세상과 믹샤가 돼 있고. 그래서 ‘바로 나가는 교회가 없을 텐데 앞으로 참말로 큰일이겠다. 요한계시록의 사건들이 일어날 때에 휘말리겠구나’ 자꾸 그런 생각을 해요. 어쨌든 신앙 믿음의 유산 이걸 넘겨주고, 이걸 또 넘겨받으려고 해야 되겠는데 그 말이요. 성전을 지을 때에 자기의 역량대로 갖다 넣어라.
귀국령이 내려질 때에 이스라엘이라도 부요한 자들은 다 바벨론에 남아 있었을 겁니다. 정신이 남아있으니까 몸뚱이도 남아 있을 테지. 바벨론에 정 붙이고, 자손들에게 유산도 넘겨주고, 자기의 출세도 넘겨주고. 스룹바벨이 성전을 지을 때에 너는 어떤 자로 살다 가겠느냐?
우리가 바벨론에서의 이스라엘을 두 종류로 볼 수가 있어요. 하나는 바벨론 주의로 사는 유대인, 하나는 시온주의로 사는 유대인 이 두 종류가 있다.
우리가 계시정신으로 영의 눈을 가지고 볼 때에 바벨론에서 허물어진 내 속의 성전 이게 보여져야 될 거라 그 말이요. 이게 보이지 않는 것은 눈이 어두운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허물어진 내 속의 성전이 어디에 가서 보면 보여지느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보면 내 속에 허물어진 성전이 보여집니다.
보이지 않는 이 성전을 위해서 어떻게 살겠느냐? 어떻게 살고 갈 것이냐? 성전은 쑥밭이 되고, 들짐승이 날뛰고 있는데 나는 고향 돌아갈 생각은커녕 바벨론에서 빌딩을 짓고 살지는 않는가?
이제 우리가 조상들이 짓지 못한 성전, 부모가 짓지 못한 성전을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내 손으로 짓자 그 말이요. 그 때 당시 역사적으로 보면 젊은이들이 가서 지었다 그 말이요. 얼마나 값진 성전이냐? 이 무형의 성전을 우리가 지을 줄 알아야 됩니다. 어디서 지어야지요?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최고의 도덕성, 최고의 신앙성 거기에 올라가서 성전을 지어야 됩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간 자는, 신앙의 도덕성에 올라가서 보는 자는 바벨론에서 허물어진 성전을 볼 수가 있다. 그 사람이 허물어진 성전을 볼 수가 있다 그 말이요.
우리는 주님을 바로 믿고, 영의 눈을 가지고 우리 속에 허물어진 성전을 볼 줄 알고, 이걸 잘 짓고 가야 되겠어요.
제단을 세우라
스 3:1-7 / 이성우목사(왜관교회)
오늘의 본문 말씀인 에스라 3장 1절~7절까지의 말씀은 바벨론 포로 생활 중에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금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 유다왕국 예루살렘 사람들이 돌아 온지 3개월 만에 처음으로 아직 성전 재건 사업을 착수하기 전에 먼저 무너진 성전이 있던 그 자리에 제단을 만들어 세우고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며, 초막절 절기를 지키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성전 재건을 위한 신앙적인 준비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디어 성전 재건을 위해서 기초를 놓는 공사를 시작하게 되었음과 함께 그 일을 통해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격해하고 기뻐하고 있는 모습을 증거하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이것은 성전 재건을 위한 물질적인 준비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 과거 자신들의 불신앙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을 보면서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 재건 이전에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제일 중요하고 우선적인 과업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유다 백성들은 성전 재건 사업을 착수하기 전에 먼저 신앙적인 준비를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입니다. 그들은 제단을 만들어서 성전 터 위, 곧 본래 제단이 있었던 그 자리에 세우고 그 위에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아침저녁으로 드렸을 뿐만 아니라 각종 제물을 그 위에 드리게 되었음을 오늘 본문 말씀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 2절 말씀을 보면, 그들이 제물을 드리기 위해 만들어 놓은 제단을 가리켜서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굳이 그 제단을 그냥 ‘제단’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본문과 같은 표현을 한 것은 이 표현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언약관계를 맺고 있으며,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에 단절될 수 없는 유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암시하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여기서 이 표현은 하나님의 선하신 보호와 인도를 부각시켜 주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다시금 만들어서 무너진 성전 터 위에 세우면서 자신들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면서 현재의 불행과 슬픔의 원인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신앙적으로 돌아보게 되었음을 본문은 은연중에 나타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의 불행의 원인이 자신들이 본래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인데 그 언약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비롯된 것이라고 하는 자기 반성적인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중재로 해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 그 언약의 핵심적인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특별한 관계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관계를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이 되셔서 그들을 사랑하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실 책임과 의무를 가지게 되는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섬기며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듣고 순종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언약을 맺을 때 그들은 짐승을 쪼개어 놓고 언약을 맺음으로써 만약 언약을 지키지 않게 된다면 쪼개어진 짐승처럼 그렇게 쪼개어지게 되는 불행과 죽음이 닥치게 될 것임을 경고하는 의미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본문 2절 말씀을 보면, 그들이 번제를 그 제단 위에 드리는데, 굳이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드렸음을 강조해서 표현하고 있는데, 이 표현이야말로 그들의 과거 불신앙과 불순종의 역사를 반성하는 신앙적인 표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고 살아가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제물을 드릴 때 어떻게 제물을 준비하여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가를 모세를 통해서 아주 소상하고도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니까 제물을 드린다고 해도 율법에 정한대로 하지 않고 자기들 멋대로 드림으로써 온전하지 않은 제물을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을 격노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랬던 그들이 이제 무너진 성전 터 위에 세워진 그 제단 위에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준비하여 하나님께 드리면서 과거 자신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의 역사를 뼈저리게 반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든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포로에서 돌아온 그들이 아직 성전 재건을 위한 기초석도 놓지 못한 상태에서 서둘러서 제단만을 만들어서 그 터 위에 놓고서는 지금 부지런히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있는 그런 분위기를 본문은 증거하고 있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와는 다르게 하나님의 제단 위에 열심히 제물을 드리고 있음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말 화려하게 지어진 예루살렘 성전에서 크고 멋진 번제 단 위에 제사장들을 통해서 제물을 드리긴 했지만 그들의 예배와 그들의 제물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없는 상태로 아무런 감동이나 감격스런 마음도 없이 그저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제물을 드려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께는 빈껍데기를 드리고 그들의 진짜 알맹이는 우상 앞에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격노케 했던 어마어마한 불신앙의 역사를 만들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사야서 1장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구약성경을 가만히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음을 알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아주 단순한 한 가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요구는 바로 모세를 중재로 해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요구를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요구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실하게 행동하셔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고 돌보시며 인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요구대로 순종하며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복을 보장하시지만 반대로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배반하면 징계하시겠다고 분명히 경고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출애굽기 20장의 말씀을 보면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 나라의 법이라고 할 수 있는 십계명이 소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내용이고 두 번째 계명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계명의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예배하고 하나님만 사랑하며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에는 전혀 반대의 결과가 주어지게 됨을 경고하고 있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의외로 성경은 아주 간단한 내용으로 되어 있으면서 아주 단순한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구약성경의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를 역사 이전 시대라고 구분하고 그 나머지 창세기 12장부터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는 장면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으면서 구약성경 나머지 전체의 내용은 그들이 만들어간 역사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 두 시대 모두 하나의 똑같은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희망을 새롭게 건축하라
스 3:1-7 / 이한규 목사
희망을 새롭게 건축하라
< 복된 절기를 만드는 길 >
‘절기(節氣)’라는 한자에서 ‘절(節)’ 자는 ‘마디’를 뜻한다. 결국 절기란 ‘대나무 마디와 같은 날’이란 뜻이다. 대나무는 마디가 있기에 줄기가 가늘고 속이 비었어도 비교적 높이 자랄 수 있다. 그 대나무 마디 같은 절기가 있기에 한 해가 다채롭게 되고 인생은 역동성 있게 된다. 몸에 관절이 없으면 매끄럽게 좋아 보여도 거의 쓸모없는 장식용 몸이 되듯이 절기가 없으면 인생이 매끄러울 것 같지만 오히려 지루해진다. 또한 생활 중에 마디 역할을 하는 절제하는 삶과 절도 있는 삶이 있어야 결국 큰 인물이 된다.
왜 하나님은 정해진 절기를 지키라고 성경 곳곳에서 말씀하셨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안에서 함께 모여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다져서 더욱 성숙해지고 승리하는 삶을 살라는 뜻이다. 절기를 잘 보내면 큰 인물로 자라도록 인생 마디가 튼튼해진다. 그처럼 복된 절기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절기에 모이기를 힘쓰라
당시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귀환해 각자의 성읍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초막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모였다(1절). 초막절은 추수 후 한가해졌을 때 백성들이 함께 모여 야외에 초막을 치고 일주일간 광야의 고난 시절을 기억하며 율법 교육을 받고 말씀을 들으면서 영혼을 새롭게 하고 꿈과 비전을 새롭게 하는 ‘7일간의 가을 심령 부흥회’ 성격을 가진 절기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에 함께 모여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 안에서 한 민족임을 확인하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처럼 명절에 전체 가족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며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믿음과 비전을 도전하면 비전을 향해 나아가는 인생 발걸음이 훨씬 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명절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힘써 모이라. 식사 준비로 부담되면 식당에서 식사한 후 교제하면 된다.
명절에 함께 모여 먼저 천국에 간 가족과 떨어진 가족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 안에서 교제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요즘은 명절에 가족이 함께 휴가지에서 모여 좋은 대화와 좋은 놀이로 교제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그것도 괜찮다. 그처럼 명절에 하나님 안에서 전체 가족 모임을 즐겁게 가지면 인생에 큰 힘이 된다. 명절에 모일 때 결혼 문제나 직장 문제나 재정 문제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와 관련된 부정적인 말을 힘써 삼가고 하나님중심적인 믿음의 말로 서로 용기와 격려와 도전을 주라.
요새 후대들은 명절 모임에 덜 참석한다. 그 모습에서 그들의 좌절감과 아픔을 읽을 수 있다. 그런 모습은 단순한 시대 변화의 양상이 아니라 가정과 사회의 위기 징조다. 후대들은 기존 질서가 아닌 새로운 질서를 찾아 몸부림치고 있다. 그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명절 모임에 후대의 참여를 지혜롭게 권고하고 이끌라. 명절에 전체 가족이 모여 좋은 시간을 가지면 상상 이상으로 복된 것을 많이 얻는다.
2. 절기 때 힘써 헌신하라
당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모였을 때 지도자인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다 일어나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모세의 율법대로 그 위에서 번제를 드리려고 했다(2절). 그래서 주변의 이방인들을 두려워하면서도 제단을 솔로몬 성전 터에 세우고 그 위에서 아침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면서 기록된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켜 번제를 매일 정수대로 날마다 드렸다(2-4절).
초막절은 유월절 및 오순절(칠칠절)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이 꼭 지켜야 할 3대 절기로서 장막절 혹은 수장절이라고도 한다. 그 절기는 추수한 산물에 대해 감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는 절기로서 유대 종교력 7월 15일에 시작해 8일 동안 지켰고 첫 날과 마지막 날에는 성회가 열렸다.
초막절 행사 때 가장 중요한 일은 번제 제물을 매일 정수대로 드리는 일이었다. 그때 드린 수송아지, 숫양, 숫염소가 총 215 마리였다(민 29:13-38). 그렇게 초막절을 지키면서 엄청난 제물을 바친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 힘써 드리는 삶이 있어야 함을 교훈한다. 그처럼 명절에 모여 예배하고 교제할 때 가장 우선적으로 배우고 실천해야 할 삶은 헌신하는 삶이다. 모든 인간관계는 더 받으려는 삶 때문에 벌어지면서 깨지고 반대로 더 드리려는 삶을 통해 깊어지면서 견고해진다.
3. 절기 후에도 헌신하라
당시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백성들이 최초의 초막절 절기를 끝낸 후 어떻게 했는가? 본문 5절의 ‘항상 드리는 번제’는 매일 아침저녁에 드리는 상번제를 뜻하고 ‘초하루’는 매월 첫 날의 종교 축제를 뜻한다. 그들은 초막절 행사 후 마음이 뜨거워져서 상번제와 초하루 종교 축제를 복원시켰고 절기에 번제를 드리는 삶과 기쁘게 자발적으로 예물을 드리는 삶도 복원시켰다(5절). 그처럼 초막절 모임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모임을 통해 배운 헌신적인 삶을 그 후에 지속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절기에 헌신하는 삶을 훈련한 후 절기 후에 일상에서도 헌신하는 삶을 실천하면 더 많이 받으려고 구차하게 살지 않으면서 참된 믿음을 방해하는 기복주의도 잘 극복하게 된다. 그처럼 헌신하는 삶이 틀이 되었다면 지금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너무 실망하지 말라. 드릴 줄 아는 사람은 어느 누구보다 풍요로운 복된 사람이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받기를 좋아한다. 그런 본능을 애써 부인할 필요는 없다. 그 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드릴 수 있는 마음과 능력을 구하라. 그런 복되고 성숙한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은 드릴 줄 아는 믿음을 주시고 능력도 주셔서 드리는 삶을 통해 영혼의 행복과 자유까지 주실 것이다. 받으려는 삶에 집착하면 상처와 실망의 악순환이 계속된다. 그런 악순환의 고리를 드리려는 삶으로 잘 끊어내라.
4. 성전 건축에 나서라
당시 초막절 행사를 할 때는 여호와의 성전 건축을 위한 기초 지대를 미처 놓지 못한 때였다(6절). 그런데 초막절 행사를 통해 믿음의 열정이 회복되어 성전 건축에 나서면서 석수와 목수에게 돈을 주고 또 솔로몬 왕이 성전을 건축할 때처럼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기름을 주고 바사 왕 고레스의 허락 하에 백향목을 레바논에서 욥바 해변까지 운송하게 했다(7절). 당시 백성들은 초막절 절기를 지내면서 그동안 마음에 품었던 성전 건축에 나섰다.
절기에 좋은 깨달음을 얻고 좋은 시간을 보냈으면 절기 이전보다 절기 이후가 더 좋은 날이 되도록 힘쓰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절을 지킨 후 성전 건축에 헌신했던 것처럼 명절 후에는 내가 새롭게 건축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성찰한 후 그것을 건축하는 데 나서보라. 그러면 그 절기 모임은 결과적으로 아주 복된 모임이 된다. 그처럼 절기를 성전 건축이나 인생에서 소중한 것을 새롭게 건축하는 계기로 삼으라.
명절은 세상에 치여 분주하게 살면서 사랑하는 가족까지 잊어버렸던 나를 새롭게 만들어 하나님과 가족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날이다. 이번 명절을 지나면서 가정과 교회 사랑을 새롭게 다짐하고 거룩한 비전을 따라 살겠다고 새롭게 다짐하라. 지금처럼 사랑을 많이 잃어버린 삭막한 겨울 세상에서 절기 모임을 통해 선한 다짐을 한 후 실천에 나서면 새로운 더 좋은 세상을 여는 선구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희망을 새롭게 건축하라 >
왜 요새 다수를 무차별로 공격하는 사람이 많아지는가? 남은 행복해 보이는데 나는 행복하지 않다는 생각이 남을 향한 공격성으로 표출된 것이다. 까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이 아랍인을 쏴 죽인 이유는 햇빛으로 눈이 부셨기 때문이었다. 남의 눈부신 삶이 나의 눈엣가시가 되는 불행한 삶이 왜 만연하는가? 절기를 의미 있게 보냄으로 삶의 의미를 새롭게 찾는 역사가 점차 줄어드는 것도 한 가지 핵심 이유다.
초막절 모임 후에 새롭게 성전 건축에 나섰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절기 모임 후에 영혼을 새롭게 건축하는 일에 나서서 절망의 기운을 몰아내고 희망을 새롭게 건축하라. 어떻게 희망이 건축되는가? 희생을 다짐해야 한다. 희생은 희망을 키운다. 새롭게 희생을 결단하면 새롭게 희망이 건축된다. 그리고 희망이 있다면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갈 수 있고 살아낼 수 있다. 희생적인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인가? 드리는 삶이다. 드리는 삶은 희망을 키우고 영혼을 튼튼하고 건강하게 만든다.
명절에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선물을 받으면 기분이 좋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선물을 주고 상대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더 기분이 좋다. 선물을 받을 때보다 선물을 줄 때의 기쁨은 더 크다. 더 나아가 나의 관심과 사랑을 통해 누군가가 힘과 용기를 얻고 일어서는 모습을 보면 영혼이 배불러지는 것 같다. 그처럼 남을 향한 나의 사랑과 관심은 남에게도 좋지만 내게는 더 좋게 되어 영혼의 활력소가 된다.
무엇보다 최고의 선물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나의 복음 전파를 통해 전도 대상자가 교회에 나오면 내 영혼은 최고로 풍성해진다. 지금 영혼에 갈급함을 느끼면 집회나 프로그램을 찾기보다 주위의 불신자나 낙심한 자나 소외된 자를 찾아 전도하고 일으키려고 하라. 또한 잘 일으키는 능력을 가진 자로 준비되도록 땀을 흘리라. 그러면 영혼의 갈급함은 어느새 사라질 것이다. 오늘 드리는 삶을 새로 다짐하고 오늘 이후에도 잘 실천해서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희망이 넘치게 하는 복된 심령이 되라.
우선, 역사 이전 시대의 내용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동행하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 기회를 선용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범죄 하여 하나님을 멀리함으로써 결국은 불행해지게 되었고 그 불행의 역사가 홍수 심판과 바벨탑 사건으로 끝이 나게 됩니다. 물론 성경의 이야기는 그 와중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두 번째로, 아브라함 이후의 역사를 보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하나님을 잘 섬기면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들도 하나님 대신 우상을 숭배하면서 하나님을 멀리하다가 결국은 나라가 망하고 포로생활을 하게 되는 불행을 겪게 되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성경은 그 와중에서 오늘 본문 말씀처럼 다시금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신약성경의 내용은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께서 온 인류에게 새로운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셨으며, 그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며 하나님께 예배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어떤 신분, 어떤 상황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께서 행복을 누리게 하시되 영원한 생명과 영광까지도 누리게 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너진 제단을 다시 세우고 온전한 제물을 기쁨으로 다시 드리는 일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가장 분명한 지름길입니다. 왜냐하면 예배를 드리는 것은 은혜의 보좌인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기쁨과 감격으로, 그리고 정성된 마음과 최선을 다해서 드리는 성도는 은혜의 길에 들어선 사람입니다.
영국의 총리를 세 번이나 지냈던 글래스턴이란 사람은 세계 3대 위인 가운데 한명에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정사에 바빠서 돌아다니며 시간 가는 줄도 몰라 아침인지, 저녁인지 분별하지 못한 적도 있지만, 주일 예배 시간을 잊어버려서 주일 예배에 빠진 일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내가 나라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은 주일 날 교회에 가서 공급받습니다.” 맥도널도 영국 수상도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가장 사모하며 기다리는 날은 주일 날 입니다. 나는 주일날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나는 내게 필요한 모든 힘을 예배 시간에 공급받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제단은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예배생활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행복하십니까? 만약 행복하시다면 그 행복이 어디에서부터 온 행복입니까? 아니면 불행하다고 여기십니까? 혹시 불행하시다면 그 불행이 무엇 때문이라고 여기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제단을 다시 세우고 구원받은 자의 감격과 기쁨을 가지고 정성껏,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심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신앙생활의 기초와 기본
스 3:1-13 / 박봉수목사
오래 전에 한옥 전문가 목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한옥을 그릴 때 그리는 순서가 꼭 주춧돌을 그리고, 기둥, 도리, 들보, 서까래, 지붕 순으로 그렸답니다. 그야말로 집을 짓는 순서대로 그렸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 그림이 제대로 그려질 리 없는 데도 고집스럽게 이렇게 그린다는 것입니다. 이 분은 그림조차도 주춧돌부터 그려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철저하게 집 짓는 순서에 각인이 되어 있는 분이었습니다.
이분 이야기를 들으면서 새삼스럽게 기초와 기본의 중요성을 다시 깨달았습니다. 집을 지을 때 지붕부터 지을 수 없고, 그냥 기둥부터 세울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주춧돌을 단단히 놓은 뒤에 그 위에 기둥을 세우고 나중에 지붕도 얹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초와 기본이 순서상 가장 앞 세워져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기초와 기본이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세워져야 한다는 것도 확인하게 됩니다.
교육도 그렇습니다. 기초와 기본이 중요합니다. 학생들을 훌륭한 사람으로 가르쳐 갈 때 기초와 기본이 중요합니다.
우선 기초가 필요합니다. 교육에서 기초란 실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 기초실력이 다져져야 중학교 실력을 닦을 수 있습니다. 중학교 실력이 기초로 든든히 세워져야 고등학교 실력이 쌓여집니다. 기초실력이 잘 닦인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기본이 필요합니다. 교육의 기본이란 성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인간 됨됨이 곧 기본 성품이 잘 다듬어져야 합니다. 정직하고, 근면하고, 예의 바르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기본 성품이 잘 다듬어져야 합니다. 이런 기본 성품이 다듬어지지 않은 채 실력만 쌓이면 결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기초 실력이 닦여야 합니다. 기본 성품도 잘 다듬어져야 합니다. 그 위에 다양한 실력과 전문적인 소양이 얹혀져서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도 기초와 기본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잘 세워지지 않으면 훌륭한 신앙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신앙생활의 기초와 기본의 중요성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사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이방신을 섬기자 하나님께서 징계하셨습니다. 먼저 북 왕국이 주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남 왕국은 주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이 때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은 예루살렘 성전을 철저하게 파괴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주류 인사들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신앙생활의 기초가 무너진 것입니다. 저들의 신앙생활을 이끌어 줄 말씀과 영적 지도자들이 다 사라졌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나님의 율례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신앙생활의 기본이 엉망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 왕조가 망하고, 성전이 무너지고, 영적 지도자들이 사라질 때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는 끝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끝내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저들을 돌아보시고 구원 역사를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바벨론이 멸망하고 바사가 들어서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유다 땅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전 537년에 1차 포로귀환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이 포로에서 돌아와 다시 이스라엘의 재건에 나섰습니다. 그 때 스룹바벨의 인도로 저들이 제일 먼저 했던 것이 바로 성전을 재건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때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1-6을 보면 포로 귀환한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일단 먼저 번제단을 쌓고 초막절을 준수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7-13을 보면 성전 재건 공사를 위한 석수와 목수, 목재의 준비, 그리고 성전 지대를 놓음과 동시에 커다란 축제가 벌어진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무너진 신앙생활의 기초와 기본이 다시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기초
오늘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 귀환 후 성전을 재건하는 처음 단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저들이 성전 재건의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제사부터 드렸다는 사실입니다. 상식적으로 성전을 짓고 난 뒤에 제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재건 공사 전에 제단만 만들고 제사부터 드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3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무리가 모든 나라 백성을 두려워하여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서 아침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모든 나라백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제사부터 드렸다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 공사에 나선 사람들의 수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스 2:64를 보면 포로 귀환한 사람들의 수가 불과 사만이천삼백육십 명입니다. 그 중에 이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수는 보다 작았을테니까 그렇게 많은 수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들을 에워싼 나라들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 있는 동안 이 땅에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하고 살았던 많은 사람들, 인접한 곳에 살고 있는 사마리아사람들, 주변의 암몬, 모압, 에돔, 아라비아 사람들 등등. 한 구약신학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그들의 처지는 이방이라는 대양에 둘러싸인 작은 섬 바로 그것이었다.”
저들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언제 어떤 형태로 공격해 올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성전을 재건하겠다고 나섰지만 두렵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 하에서 저들이 제일 먼저 하나님께 제사부터 드렸습니다. 이것은 저들의 믿음의 표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믿음의 표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실 것을 믿는다는 믿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그 어떤 어려움이 있다고 해도 성전재건 공사를 강행하겠다는 믿음의 고백을 제사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을 재건하기 전에 이미 무너진 신앙생활의 기초를 쌓고 있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믿음을 고백하며 신앙생활의 기초를 굳건히 쌓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이 믿음으로 저들은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성전재건이 대업을 이룰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기초는 바로 믿음입니다. 이 기초를 든든하게 세워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굳건히 해야 합니다.
놀라운 그림 두 개를 준비했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화초 줄기만 잡고 화분 전체를 들고 있는 그림이고, 다른 하나는 화초 줄기에 맹견이 줄에 매어있는 그림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화초의 뿌리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든든하게 자리를 잡고 있음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뿌리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굳건하면 우리 신앙생활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막 9:23에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야 믿는 자에게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에스라서를 자세하게 살펴보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가졌던 믿음의 내용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었느냐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의 주도적인 역사하심을 믿었습니다.
에스라에서 가장 중요한 강조점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주도하심(initiative)에 대한 믿음입니다.
스 1:1을 보면 “바사와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여기서 감동시킨다는 말은 원래 히브리어 의미로는 “잠자던 사람을 깨운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잠자던 고레스의 마음을 깨우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유다 땅으로 돌아갈 수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도 무너지고 남의 나라에 포로로 끌려와있고 이제 한낱 희망도 없이 이국에 동화되어 소멸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역사의 물꼬를 새롭게 트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도하셔서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지금 에스라는 이 사실을 믿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생활의 기초를 다시 든든하게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더라도 일제의 압제 속에 희망을 잃어버릴 수 밖에 없는 때가 있었습니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3.1만세 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압제는 오히려 더 거세졌습니다. 임시정부가 갖가지 독립을 위한 몸부림을 쳤습니다만 사태는 오히려 더 악화될 뿐이었습니다. 많은 독립투사들이 변절해 가고 말았고 점점 글도 잃어버리고 일본의 한 부분으로 동화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생각지 않게 연합군에 미군이 참전케 하시고, 전대미문의 원자폭탄을 일본에 투하하셔서 항복하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뜻하지 않게 우리 민족이 독립을 얻게 되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도적인 역사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주도적인 역사를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섬세한 도우심을 믿었습니다.
에스라를 읽어보면 주목할만한 동일한 표현이 반복해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입니다.(7:9, 28, 8:18, 22, 31)
한 예를 들어보면 스 7:9를 보면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에스라가 바벨론 땅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먼 여정을 회상하면서 한 말입니다. 4달이나 걸린 긴 여정이었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손의 도우심으로 무사히 그 긴 여정을 마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섬세한 도우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삶 속에서 불기둥으로 구름기둥으로 우리의 걸음을 섬세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기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저 하나님께 제사부터 드린 뒤에 본격적으로 성전재건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7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이에 석수와 목수에게 돈을 주고 또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기름을 주고 바사 왕 고레스의 명령대로 백향목을 레바논에서 욥바 해변까지 운송하게 하였더라.” 이 말씀은 당시 사람들이 성전재건을 위해 정말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특히 시돈과 두로의 고급 기술자들을 많은 경비를 들여서 초청했습니다. 당시 최고 비싼 자재인 레바논의 백향목도 바다로 운송해서 수입했습니다. 이것은 첫 번째 성전이었던 솔로몬 성전 때 투입되었던 전문 기술자들과 고급 자재들을 사용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솔로몬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부강했던 때입니다. 재정적으로 가장 풍족했던 때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나라가 망해서 남의 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입니다. 백성들이 지금 자기들의 살림살이를 걱정해야 할 판입니다. 그럴 때 이렇게 최고의 기술자, 최상의 자재로 성전을 지으려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자기들 살 집을 마련하는 일, 자기들 생업을 위해 터전을 닦는 일, 자기 아이들 교육을 위해 준비하는 일 등등 시급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성전 재건하는 일을 최우선적 과제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드와이트 무디는 근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역자 중 하나로 하나님께 쓰임 받은 분입니다. 이분은 가난한 벽돌공의 여섯 째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열일곱 살 때 보스턴의 구둣방에 취직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하나님의 큰 일꾼으로 쓰임 받을 자격이나 조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훗날 기자가 그 비결을 물었습니다. 무디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려서 어머님께 받은 교훈을 그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하나님 일은 가장 먼저, 내 일은 나중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우선주의”(God first!) 이것이 신앙생활의 기본입니다. 이 기본이 잘 갖춰진 사람들이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2-3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 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겨우 성전의 지대 곧 성전의 기초만을 놓았습니다. 어린 시절 옛 성전을 보았던 노인들은 자기들 생전에 성전을 다시 지을 수 있다는 감격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젊은 세대들은 성전 짓는 일에 참여했다는 기쁨에 즐거이 노래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일 때문에 울고, 그리고 하나님의 일 때문에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래 전 한 청년이 본당에서 통곡하며 기도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나오는 것을 복도에서 마주쳤습니다. 눈이 퉁퉁 부었더라구요. 기도도 해주고 위로해 주기 위해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슬프게 울었느냐고...
자기가 교회학교 교사를 하고 있는데 반 아이 하나가 학교에서 교회 다닌다고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받고 있다는 겁니다. 그 아이가 따돌림이 두려워서 교회 나오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는 거예요. 지금 그 아이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 때문에 통곡하며 울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의 일 때문에 정말 기뻐할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우선주의를 지켜가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에는 기초가 있습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기초가 든든해야 그 위에 좋은 건물을 지을 수 있습니다. 기초가 부실하면 사상누각처럼 제대로 건물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역사하신다는 사실, 하나님께서 섬세하게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믿을 때 우리 신앙에 기초가 든든히 세워지게 됩니다.
신앙에는 기본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우선주의입니다. 기본이 바로 서야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지탱해 갈 수 있습니다. 늘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일 때문에 정말 기뻐할 줄 알고, 하나님 때문에 크게 슬퍼할 줄 아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우선주의를 철저하게 지켜갈 때 신앙생활의 기본충실하게 세워지게 됩니다.
에스라 3:1-7
찬송 199장 / 정읍 하이랑교회
고레스 왕의 조서에 따라 팔레스틴으로 귀환한 유대 백성들은 일단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약 3개월 후인 7월이 되자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여 성전 재건을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우선 그들은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렸는데 이것은 자신들이 이제부터 오직 하나님께 헌신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영위하겠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어서 그들은 초막절을 지키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예물을 바쳤는데 이렇게 하여 성전 재건을 위한 영적 준비가 끝나자(1-6절)
비로소 그들은 성전 재건을 위한 실질적 준비에 들어갔다.(7절)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함에 있어서 유대 백성들은 석수와 목수를 고용하거나 목재를 준비하는 일이 급선무가 아니라 먼저 자신들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는 일이 훨씬 더 시급하고 중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오늘 말씀의 내용을 통해서 얻게 되는 교훈은
① 현실에 대한 어려움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수록 더욱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서 그분의 보호와 도우심을 의지하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70년간에 걸친 포로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유대 백성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폐허뿐이었으며 더구나 사마리아인들을 비롯한 주변 족속들의 위협 역시 만만치 않았다.(스4장)
하지만 그들은 이와 같은 현실적 난관과 위기로 인해 오히려 하나님께 간구하고 매어달리는 자세를 지니게 되었다.(3절)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성도들에게는 언제나 평안과 축복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뜻밖의 환난과 곤고가 닥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와 같은 시련과 고난을 더 큰 영적 유익과 축복의 계기로 삼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시 119:71)
② 자신의 삶에 있어서 우선 순위를 올바로 정할 수 있어야 한다.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 절대 절명의 과제였지만 유대 백성들은 기능공들의 고용이나 건축 재료의 준비에 앞서서 먼저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다짐하고 자신들의 영적 상태를 점검했다.
이는 그들이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시127:1)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매사에 시간을 다투는 현대 사회의 일원으로서 자칫하면 현실적 분주함에 정신을 빼앗겨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고 영적으로 풍성한 삶을 영위하는 데에 실패하기가 쉽다.
그러므로 삶의 우선 순위를 올바로 정해 놓고 무슨 일에든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를 힘써야 한다.(마6:33, 고전10:31)
2절)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다 일어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그 위에서 드리려 할새」 스룹바벨과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제사드릴 단을 만들었다.
훼파된 성전에는 제단도 무너져 있었기에 가장 먼저 제사드릴 제단을 수축하였다.
그런데 성경은 이들이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드리기 위하여 제단을 만들었다고 말씀한다.
즉 스룹바벨과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회복하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회복하려 한 것이다.
10절에 따르면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전의 지대를 놓고 하나님을 찬양할 때에도 ‘다윗의 규례대로’(10절) 하나님을 찬양했다.
즉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께 대한 제사나 찬양이나 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회복하려 하였다.
70년의 세월은 짧은 기간이 아니다.
한 사람이 태어나 성장하고 죽음을 맞는 기간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70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들의 의식이나 습성이 변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바벨론과 바사의 종교와 문화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스룹바벨과 신앙 지도자들은 율법에 명시된 규례대로 하나님을 경배하였다.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고 개선되어야 한다.
옛 습성에 얽매인 교회는 시대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올바로 감당할 수 없다.
그런데 교회의 개혁은 새로운 법과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처음 하나님이 계시해 준 계명과 규례로 돌아가야 한다는 역설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겉은 시대에 어울리도록 변화시킬 수 있으나 교회의 본질은 변화될 수 없다.
모세가 기록한 제단에 대한 규례와 양식은 ‘하나님의 계시’이다.(출20:25)
제사의 방법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다.(레1:3-13)
이와 같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들은 절대 불변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것이 기독교의 개혁 운동이 아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정해 놓으신 말씀과 규례의 틀 속에서 개혁을 해야 올바른 개혁이다.
교회의 개혁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세상이 변한다고 해서 교회의 본질까지 변화시켜서는 안된다.
교회의 개혁을 도모할 때, 또 어떤 계획을 논의할 때 과연 그 계획이 하나님의 말씀과 부합이 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교회 안에서 시도 되어지는 그 어떤 형식이나 계획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의 행사와 예배 중에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에 어긋나는 것이 있으면 고쳐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교회 개혁의 근거요, 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