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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19년 1월 13일 주일오후설교
장로직분에 관한 주제설교
렉시오나리 : 시29; 행8:14-17
본문 : 딤전3:1-7; 딛1:5-9
제목 : “말씀을 잘 가르치는 사람”
주일오후찬송
경배찬송 - 시135편 1,2,3
렉시오나리 후의 찬송 - 시117편(고정)
아멘찬송 - 시119편 1,2,3
폐회찬송 - 시91편 1,5
말씀을 잘 가르치는 사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오늘 도달한 장로의 자격은 “가르치기를 잘 하며”라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한 아내의 남편이 된다”는 것을 “절제, 곧 술을 제어하는 것”, “근신, 곧 신중함, 감정이나 충동을 잘 억제하는 것”, “아담/단정, 곧 질서에 순응하는 것”의 내용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2절의 앞부분의 전반적인 내용은 “타락한 욕망을 잘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이 장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2절 말씀에서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나그네를 대접하며”인데, 이것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를 살필 때 다루었기 때문에 순서상 그 다음은 “가르치는 것을 잘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주제를 다루고 다음 주에는 3절의 내용을 다루겠습니다.
“가르치다”, 특히 이것은 교회에서 사용되는 것이므로 “말씀을 잘 가르치는 것”인데, 장로가 말씀을 잘 가르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을 포괄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가르치다”는 것에 익숙합니다. 일반적으로 세상에서도 오늘날에는 학교를 가지 않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과거에처럼 배움 자체가 없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더불어 교회에 오면 가르침이 많습니다. 특히 우리 교회 같은 경우는 가르침이 더 많은 교회에 속합니다. 이런 많고 많은 가르침들 속에서 “장로는 잘 가르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특별한 점들이 있을까요?
이 때 성경이 말하는 “가르침”이란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말하는 그런 종류의 가르침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만약 우리가 통상 사용하는 가르침의 의미라면 장로는 오히려 “선생님”에 가까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교회에서든 장로를 선출하려고 할 때 최우선적으로 학교의 선생님을 뽑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가르침이 “가르치는 기술”을 말하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침에 대해 말할 때 어디에 중점을 두고 있는지를 잘 살펴서 거기에 부합하는 사람을 장로로 세워야 할 것입니다.
첫째, 디모데전서 4장에서
가르침에 대해 생각해보기 위해서 우리가 처음 살필 내용은 디모데전서 4장 13절 이하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함께 13절과 14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1. 가르치는 것
여기에 보시면 사도께서 목사 디모데에게 명한 세 가지의 명령이 나옵니다. 하나는 “읽는 것”, 다음은 “권하는 것”, 그 다음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주석에 따르면1) 이 세 단어들은 앞에 정관사가 붙어서 셋 모두가 다 “예배를 위한 회중의 모임에서 인정된 항목들”이라고 합니다. 즉 이 셋은 예배 중에 목사가 해야 하는 직무와 관련이 되어 있고, 예배의 요소들입니다. 고대교회의 교부 중에 유스티누스는 예배의 정경을 묘사하면서 “주일이라 불리는 날에 도성이나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시간이 허락하는 한, 사도나 선지자의 글을 묵상하는 글을 읽고, 읽는 자가 읽기를 멈출 때, 의장이 구술로 가르치고 선한 일들을 닮을 것을 권면한다. 그 다음에 모든 이들이 일어나서 기도한다.”2)라고 썼습니다. 이 내용을 통해 고대교회 때부터 예배의 모습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것을 감독이 해설하는 방식으로 예배가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디모데전서 4장의 이 셋은 모두 예배 안에 있었던 요소를 말하는 것인데, “성경 본문 자체를 읽는 일과 그 말씀을 회중들에게 설명하는 일”입니다. 이 때 “읽는 것”이 성경본문을 읽는 것이라면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본문을 해설하여 회중들에게 오늘날로 치자면 설교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분은 이 둘을 분류하여 “권하는 것”은 “생활적인 요소”를, “가르치는 것”은 “교리적인 요소”를 말한다고 보았습니다.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을 상고하면서 우리는 바울 사도께서 목사 디모데에게 교회를 부탁하면서 어디에다 강조점을 두고 있는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예배 안에 “기도”도 있고, “찬송”도 있고, “구제를 위한 봉사”도 있고, “성찬”도 있음을 압니다. 그런데 사도께서는 목사 디모데에게 특별히 “착념할 것”을 말할 때 “말씀을 읽고 가르치는 일”에 중심을 두었습니다. 아마 디모데전서가 목회서신이 아니었다면 예배 전반을 다루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내용은 목사나 장로의 사역에 포커스가 있고, 그런 점에서 볼 때 참으로 중요한 것은 말씀을 바르게 읽고 해설하는 일입니다. 이 말씀을 “해설하는 일”을 “권한다” 혹은 “가르친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2. 장로의 회에서 안수, 예언으로 받은 것
그리고 그 다음 절인 14절을 보십시오. 사도께서는 목사 디모데에게 “장로의 회에서 안수받은 것”을 이야기합니다. 14절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네가 안수를 받을 때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았으므로 조심하라” 이 구절을 원문 그대로 직역하면 “조심 없이 말며”라는 말은 “주의하라! 태만히 여기지 말라!” 이런 뜻입니다. 무엇에 주의해야 할까요? 장로의 회에서 안수를 받을 때 예언을 통해 받은 너의 은사를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13절에서 사도께서는 목사 디모데의 사역이 말씀을 읽고 권하고 가르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사도께서는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네가 받은 것이 예언, 곧 말씀을 통해서 받은 은사라는 점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에”라고 14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목사 디모데가 말씀에 충실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목사/장로로서 안수를 받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기의 은사를 받았다는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목사/장로로서의 사역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합니다. 단지 그가 성실한 사람이거나, 자기가 맡은 일을 완수하기 위해서 말씀을 열심히 가르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세움을 받은 직분, 곧 그가 안수를 받은 것이 바로 예언의 은사가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바로 “이것을 받았다는 점에 대해” 주의를 태만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목사와 장로라는 직분은 그 직분 자체가 “예언의 직분”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교회들이 목사에게는 교회를 잘 경영할 수 있는 경영자의 능력을, 장로에게는 행정이나 교회의 사건을 잘 처리할 수 있는 행정가의 능력을 기대하는 것은 매우 슬픈 일입니다. 만약 목사나 장로로 세움을 받은 사람이 자신을 “나는 복지 시설을 운영하는데 크게 관심이 있으니까 목사로서 목회를 이 방향으로 해 봐야겠어”라고 생각하거나, “나는 재정관리 능력이 뛰어나니까 장로로서 여기에 매진해야 하겠다”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참 슬픈 일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은 목사가 무엇인지, 장로가 무엇인지, 그 근본을 모르는 것입니다. 목사나 장로는 그 직분 자체가 예언으로부터 말미암았습니다. “가르침”은 이 직분으로 “안수 받음”의 근본적 이유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요즘 큰 교회들에 가보면 행정목사, 음악목사 따위들이 있습니다, 큰 잘못입니다. 장로인데 말씀과 상관없이 교회 일을 잘 하면 된다, 큰 잘못입니다.
이것을 잘 하지 못하고 다른 것으로 매진해 보겠다는 것은, 의사가 “병은 잘 못 고치지만 병원 건물이 예쁘니까 많이 찾아와 주세요”라고 하거나, 자동차 정비사가 “자동차는 잘 못 수리하지만 저희 정비소에는 맛있는 커피가 있어요”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장로의 직임 자체가 “예언” 곧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장로는 말씀에 아주 능통한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3. 그리고 전승
그리고 여기에는 그 다음 주제로 넘어가는 연결요소가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전승”이라는 개념입니다.
우리는 디모데전서 4장의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라는 말에서 목사나 장로가 직분자로 세워지게 될 때 그것이 “사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말하자면 장로의 회에서 예언을 통해 안수를 받는다는 것은 “같은 신앙고백 공동체 안에” 들어오게 됨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언의 직무”라는 것은 “내 말씀”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같은 말씀, 곧 그리스도의 말씀”의 직무를 가리킵니다. 공통의 것, 교회가 함께 지니고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 가르침을, 말씀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그래서 말씀을 맡았다는 것은 “전승”, 곧 우리 주님으로부터 전해진 것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말씀하신 대위임령에는 “가르쳐 지키게 하라”가 있습니다.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지킵니까? 전승, 곧 전해져 내려온 것은 언제나 모든 교회가 동일하였습니다. 그리스도로부터 전해진 말씀! 내가 이해하고 생각하는 말씀이 아니라 주께서 전달해주시는 말씀, 그것에 대해 위임을 받은 것입니다.
둘째, “가르침” 곧 전승
이 “전승”, 곧 전해 받은 말씀이라는 것을 좀 더 생각해 봅시다.
함께 디도서 1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디도서 1장은 디모데전서와 함께 직분자들의 자격 요소들이 나오고 있는 대표적인 곳인데, 5절부터 장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중에 가르침에 대한 이야기가 9절에 나옵니다.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디도서에 나오는 장로의 자격 중 하나는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때의 장로의 태도는 어떤 것이어야 합니까?
제가 교회의 지도자에 해당하는 분들을 만나는 중에 가끔 “아! 이 사람은 굉장히 위험하다”라는 생각이 드는 분들이 간혹 있는데, 그분이 목사이건 장로이건 간에 성경 말씀을 자기 형편과 처지에 따라 함부로 인용하고 적용하는 분들입니다. 대화에서 말씀을 인용하는데, 말씀의 전후와도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 맘대로 말씀을 인용하는 것이 보이는 그런 분들 말입니다.
장로의 자격으로 나오는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킨다”라고 할 때,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장로의 태도는,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똑같은 종류의 말씀을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받아오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며, 말씀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모든 시대의 교회가 공유하는 어떤 것이라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말씀이라는 것을 죽은 문자로 여겨(실제 말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현실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여기므로), 정작 무언가 말씀을 사용할 때는 자기 맘대로, 임의로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분들은 사실상 복음을 존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이용하는” 태도이지, 복음을 “사랑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기인한, 말씀의 주인이신 성령님으로부터 기인한, 오랜 말씀 이해의 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허공에 붕 떠 있는” 말씀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말씀을 받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시대로부터 교회에 면면히 전해 내려온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조금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정리하자면 “신앙고백”입니다. 말씀은 말씀인데, 자기 마음대로 정의하는 말씀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온 방식으로서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이것을 교회의 네 표지 중에서 “사도성”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되, “전수된” 성경을 보는 것입니다. 이해의 틀이 있고, 기준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런 존중의 태도를 찾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헬라어에서 “가르침”을 의미하는 “디다케”에서나, “전해 받았다”를 의미하는 “파라디도미”가 나오는 성경 본문들을 쭉 읽어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는 것은 “독창적인 작업”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게 됩니다. 간단하게 두어 본문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1)
디모데전서 6장 20절과 디모데후서 1장 12절을 보면, 바울 사도께서는 목사 디모데에게 이렇게 부탁을 합니다.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이를 인하여 내가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디모데전서 6장에서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라고 할 때의 이 “부탁한 것”이란, 바울 사도께서 디모데에게 따로, 개인적으로 무언가를 귀띔해 준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바울과 디모데 사이에만 있었던, 어떤 사적인 유대관계에서 주고 받은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때 사도께서 디모데에게 “부탁한 것”이란 “전해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는 “자신도 그리스도께 받은 것”을 이제 목사 디모데에게 “전달해” 주었습니다. 따라서 목사 디모데가 받게 된 것은 “그냥 말씀, 그냥 가르침”이 아니라, “그 말씀, 그 가르침”입니다. 주님이 사도에게 주셨고, 다시 그 사도로부터 자신에게 전해진 바로 그것, 하나님의 말씀이고 복음인데 “전수된 것” 바로 그것인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에도 똑같이 바울 사도께서는 디모데에게 “나의 의탁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맡긴 것”이라는 뜻인데, 역시 이것도 “전수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2)
그 다음 고린도전서 15장 말씀을 한 번 보십시오. 2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뒤에 장사, 부활 등이 나옴.
어떻습니까? 분명하지 않습니까? 고린도전서 15장 말씀은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했는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면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이라고 합니다. 가르침인데, “전수된 가르침”입니다. 이어서 사도께서는 “내가 받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였다”고 합니다. 말씀은 결코 사적이지 않습니다.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내 이해 능력”보다는 그리스도로부터 사도를 통해 교회에 전달되어 오고 있는 바로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이 “가르침”을 말할 때 이것은 분명히 “전수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장로들에게 필요한 자세는 세상의 선생님들처럼 “가르치는 능력”으로 될 일이 아닙니다. 전수된 것을 올바로 가르치기 위해서는 티칭의 능력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올바른 사랑과, 교회 속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조금 다르게 말하자면 신앙고백에 기초한 말씀의 이해를 갖고, 그것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독창적으로 제 맘대로 끼워맞추기 식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수된 말씀”, 사도적 전승에 기초한 신앙고백적 말씀을 이해하는 사람이 장로로 필요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디모데전서 4장에서 “장로의 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할 때의 그 “공적 성격”으로서의 가르침이며, 디도서에서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킨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전수된 말씀!” 이것을 꼭 기억합시다.
셋째, 참된 가르침이란
끝으로, 디도서 1장에 나오는 마지막 주제를 살피고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다시 디도서 1장 9절 말씀을 보도록 합시다.
여기에는 우리가 앞서 살핀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한다”라는 말씀 다음에 더 붙어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을 끝으로 생각해 봅시다. 내용은 이것입니다.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가르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1)
먼저 한 부분은 김헌수 목사님의 설명을
한 번 인용해 보겠습니다.
“좋은 선생은 가르치는 대상의 수준을 알고 그 사람에게 맞는 방법으로 가르칩니다. 유능한 선생은 게으른 학생을 어떻게 거기에서 건져낼 수 있을지도 알고, 거역하는 사람을 어떻게 온유함으로 가르칠 수 있을지도 알고 있습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교회에서 직분자가 된다는 것은 “모든 성도들이”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직분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은 분명 모든 성도들이 다 갖추어야 할 것이지만, 실제로 회중들 안에는 이쪽 부분을 잘 갖춘 대신 저쪽 부분이 미비한 사람이 있고, 반대로 저쪽 부분은 아주 좋은데 이쪽은 부실한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장로는 “가르침”에 능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면에 완벽할 수 없으므로, 장로에게 부실한 점이 있을 수 있는데, 최소한 장로가 되려면 이 사람은 “가르침”에 있어서는 능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 디도서의 가르침, 그리고 김헌수 목사님의 설명을 따르자면 “잘 가르치는 사람”이란 대상의 형편과 수준을 잘 알고, 그에 따라서 잘 맞추어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무언가를 많이 갖고 있는 것과, 그것을 “잘 가르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장로가 된다는 것은 심방을 통해서 성도들의 삶의 실제 부분에 들어가서, 거기에 대해 가르치고, 지도하고, 권면하고, 다스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장로가 “가르침”에 있어 부실한 사람이어서, 그의 지도나 다스림을 듣는 성도가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만 잔뜩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심방이라는 것은 실제로 그 사람의 삶 속의 문제들을 “말씀을 가지고 교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의사의 역할을 할 장로가 진단도 잘못하고 처방도 잘못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고스란히 성도는 유익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장로의 중요한 자격 요건인 이 “가르침”이라는 것에서 우리가 꼭 생각해야 하는 점은 앞서 살핀 주제처럼 “전수된 말씀 위에 바르게 서는 것”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실제 성도들에게 펼칠 때, 성도들에게 좋은 선생이 되어 잘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도 함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장로는 언제나 성도들과 함께 공감하고, 함께 웃고 울며, 함께 마음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장로랍네” 하면서 상석에 앉아서 대우받기만 좋아하고, 진정으로 성도들의 형편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장로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이런 가르침에는 반드시 “책망할 수 있는 능력”도 따라야 합니다. “거스르는 자에게 책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습니다. 이것 역시 가르침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제가 목회를 시작하고 이제 우리 교회를 10년 정도 가르쳐보니까 느껴지는 점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특히 이 점, 책망의 말을 하는 것에 관하여는 .......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면이 함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먼저, 어떤 점에서 책망은 쉽습니다. 우리가 보통 통상의 교회들에서 “치는 설교”라고 하는 것, 그런 것은 듣는 대상은 지옥을 맛볼지 몰라도 하는 편에서는 어떤 면에서 쉽습니다. 여기에는 말씀을 하는 쪽에서는 한 가지만 갖추면 됩니다. 뭘까요? 네, “증오”만 갖추면 됩니다.
성도들 중 누군가가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것을 주님의 심정으로 끌어안고, 내가 합당한지 아닌지, 혹은 저 성도가 문제가 있는 것인지 아닌지, 고통하면서 이를 소화하지 않고, 단지 “증오”만 갖는 것입니다. “어디 목사한테 말이야!”라는 태도를 가지고 꾸짖고 책망하고 야단치는 것입니다.
단언컨대 이 사람은 선한 목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목자에 대해 배우면서 에스겔을 많이 살폈지만, 목자는 “양을 잡아먹는” 사람이 아니라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람입니다. 에스겔과 예레미야에서 하나님이 “내가 너희에게 목자를 보냈는데, 하도 너희가 양을 고통스럽게만 하니까 내가 친히 목자를 보내겠다” 하면서 보내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교회의 장로/목사는 주님의 목자되심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항명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발하는 것이 주님의 목자되심의 태도가 아닌 것입니다.
2)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책망은 몹시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결과를 말하자면 이것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또 좋은 목자가 안 되는 방법입니다. 남에게 좋은 말 하기는 쉽지요. 하지만 안 좋은 말 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안 하는 것이지요. 책망이 어려우니까 하지 않겠다.......이런 태도입니다.
이것은 “네 인생은 너의 것, 나의 것은 아니야”라는 태도를 말합니다. 책망하지 않지요. 왜 안 합니까? 내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을 길로 가든, 낭떠러지로 떨어지든 내 알 바 아니라는 것입니다. 책망이라는 바른 약을 쓰면 충분히 이 사람은 살 수 있는데, 이 약을 쓰는 과정 자체가 “나에게는” 힘듭니다. 그러니까 나는 안 힘들겠다는 것입니다. 괜히 쓴 소리 해서 미움 안 받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겉으로는 좋아보이지요? 우리 목사님, 우리 장로님, 참 좋은 분이시다.......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이건 자기 자식이라고 하면서 독약만 먹이는 꼴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잘 가르치는 장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말씀에서 들은 대로 이것은 참 어렵습니다. 한편으로는 장로도 사람인지라 자기 욕망에 충동질 당해 험한 말을 쏟아낼 수 있기 때문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역시 장로가 사람인지라 내가 험한 말 들을 수 있는 일은 안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잘 제어하면서 양떼들을 바른 길로 잘 인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가르침의 목표”입니다. 이런 장로가 교회에서 잘 나올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어떤 교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선한 목자와 순한 양들”이 교회 안에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이런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소망하면서 말씀을 맺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