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난생 처음으로 '피사리' 혹은 '논매기' 라고 하는 매우 고된 일을 해 보았습니다. 남원하고도 운봉, 지리산 자락 백두대간이 지나는 능선 아래 산골짜기 논에서요.
기계가 들어가기도 힘든 외딴 골짜기에 있는 한 마지기 정도나 되는 논인데
오래 전 귀농한 지인이 친환경으로 쌀농사를 짓는 곳입니다.
봄에 모를 심은 뒤 우렁이만 1킬로그램이나 집어넣어 놓고는 일체의 화학적 농자재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가서 보니 그야말로 '모 반(半), 피 반(半)'이랄까, 모 보다도 피가 훨씬 많은 듯 했어요. 피밭에 모 포기들이 겨우 얹혀 지내고 있다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피'는 벼과에 속하는 1년생 풀로써 아주 오래 전에는 구황작물로 심기도 했다는데요. 유기농법 벼농사에서 이놈들은 골칫덩이 불청객일 뿐이지요. 잎의 생김새도 벼하고 아주 비슷한 데다 벼가 심겨진 논에서 잘 자라기 때문에 벼를 제대로 키워 수확하려면 어떻게든 이놈들을 다 죽여 없애야만 한다는 겁니다. 우리 입에 들어오는 양식을 지켜야하니까요.
모를 심은 지 보름 정도 지난 이즈막이 딱 초벌 논매기 시점인가 봅니다.
논 농사에서 논매기는 초벌, 두벌, 세벌해서 수확하기까지 모두 세 차례 김을 매주어야 한다는군요. (물론 관행농의 경우는 다른 이야기겠습니다)
농사를 짓는 집안에서 나고 자란 것도 아니고 귀촌해서 시골(산골)에 살고는 있지만 농사를 아직 잘 모르기 때문에 저도 이제사 알게 된 농지식입니다. 오십년이 넘도록 입에 밥을 넣고 살고 있으면서도 이런 기본적인 지식도 몰랐다는 사실이 조금은 부끄럽습니다.
아무튼 지인의 지원요청을 받고는 어제 아침 일찍 논으로 가 요즘은 경험하기 힘든 '논매기'를 온몸으로 진하게 체험하게 되었던 겁니다.
무논 바닥의 뻘이 갯벌의 뻘 못잖게 깊고도 찐득찐득해서 발이 푹푹 빠지면 걸음을 옮기기도 쉽지 않고, 줄곧 허리를 숙여 해야 하는 일이라 노동의 강도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친환경 논이라 무논 속에는 수생식물인 벼와 피 말고도 일부러 집어넣은 우렁이를 비롯, 개구리, 올챙이, 물방개, 소금쟁이 등 온갖 생물이 공존하고 있었는데요, 이처럼 온갖 생물이 공존한다는 점은 참으로 고무적이라 할 수 있겠으나 그놈의 거머리란 넘들도 제 세상인 양 드글드글하더란 것입니다.
피를 뽑느라 허리 아픈 건 참을 수 있어도 거머리란 넘들에게 피를 뽑히는 건 상상조차 끔찍한 일입니다. 해서 논으로 가기 전 읍내 농기구점에 들러 물장화도 한 켤레 사 가지고 갔습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주홍빛 물장화,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이 장화는 처음 신으니 제법 패셔너블하게 보이기도 했으나 논바닥에서 나의 두 다리와 더불어 온통 고생을 한 끝에 한나절만에 진흙 투성이가 되어 스타일을 딱 구기게 되었더라는 거죠.
처음에 논에 도착해 물 속을 들여다 보니 세상에나 거머리가....
도저히 그 속에 들어갈 맘이 일지를 않고 다시 집으로 가고만 싶었지만, 도와주겠다 하고서 왔으니 그럴 수도 없고, 그래도 평소 마음 비우기 연습도 근근히 해오던 차라 거머리에 관한 상을 지우고는 무심히 물 속으로 들어가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바지를 이중으로 껴입고 물장화와 고무장갑으로 완전무장한 덕에 거머리 피해는 전혀 입지 않은 채 한나절 열심히 논매기 작업을 했습니다. 나중에는 장화 신은 발등 위로 지나는 거머리가 친근하게 다 느껴지더군요. ㅎㅎ
모와 피의 경계가 모호하기만 했던 이랬던 논이
이렇게 바뀌어가더군요.
자, 이렇게 해서 개구리 울음소리 요란한 초여름의 하루 한나절을 논매기로 고되게 보내고 난 뒤 거의 녹초가 되어 오후 늦게 집으로 돌아와보니, 현관 앞에 반가운 택배 아이스박스가 놓여있었습니다. 미래수산에 주문한 생선들이 담긴.
한 동안 반찬 걱정에서 벗어나려 생금테 외에 이것저것 주문했는데, 생금테가 씨알이 통통하고도 신선해 보이길래 요놈들 먼저 요리를 하기로 했습니다. 총알오징어도 함께요.
고된 노동으로 온 근육이 다 아플 정도로 고생했으니 맛있는 음식으로 보상받을만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아래와 같이 '치유의 밥상'이 차려졌습니다.
생금테는 바닥에 무를 깔고서 고추장 양념에 조림을 했는데 아주 부드럽고 담백하니 입에서 살살 녹는 맛이었고요, 찜기에 찐 총알오징어 맛도 달고 구수하더군요. 석수농장의 유황열무는 몇 년째 여름 밥상의 필수가 된 지 오래고요.
전음방 덕에 요리가 즐겁고 식생활이 즐겁습니다. 고맙습니다.
첫댓글 와.. 진짜 고생하셨겠어요 ㅜ.ㅜ
저희 부모님이 가족들 먹을량으로
지으시는 논에는 저런 피가 없던데..
아무래도 적당히 약을 하셔서겠죠?
친환경이 쉬운 일이 아니네요ㅜ
근데.. 우렁이알 진짜 신기해요 ㅎㅎ
조림이랑 열무 비주얼이 최곱니다!
고봉밥 먹고 싶은 밥상이어요
지금 6월이 우렁이가 알을 낳는 시기라고 하는군요. 논에서 탈출해서 엉뚱한 데다 알낳는 놈들도 있다고 해요~ 고봉밥! 이또한 그리운 언어입니다~^^
무척 고되보이는데
하고난 후의 논에서
왠지 희열 같은게 느껴집니다ㅎ
보람된 하루를 맛난 음식으로
상 받으셨네요~
빙고!! ^^
희열 맞지요~
고되었으되 이를 통해 느끼고 얻은 바가 컸답니다. 고맙습니다~
감동적인 글입니다~
노동과 치유의 밥상^^
그대로 전해져 오네요~
지금의 우리는 전음방도 있고 먹거리가 흔한 시절에 살고있는 덕에 맛있는 노동의 보상을 받기도 하는데요, 옛날 분들은...ㅎ
고맙습니다~
피와 벼의 구별방법은
벼잎은 잎가장자리도 그냥 초록색인데.....
피 잎은 가장자리가 빨간색입니다.
아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그런 특징을 알았으니 두벌 세벌 때는 확실히 가릴 수 있겠습니다~ ^^
@김혜정(남원지리산) 모판에 있을 때도 피사리 해요..
아주 작지만 가장자리가 빤간잎을 가진 놈들을 골라내는 일이죠..
@맹명희 아이쿠, 그건 꽤나 정교한 작업일 것만 같습니다. 돋보기와 핀셋이 필요할 것 같기도 하고요.
여든 여덟 번 손이 가야 한다던 옛말이 실감납니다~
@김혜정(남원지리산) 그건 어른들보다 10세 미만의 소녀들이 손이 섬세해서 더 잘 해요..
저도 아주 어릴 때 해 본 겁니다,
@맹명희 아 그러셨군요.. 아마도 선생님께선 어린 소녀적에도 뭣이든 아주 잘 하셨을 거라 생각해요~^^
'치유의 밥상' 이해가 갑니다.
저도 그런 마음으로 맛난거~비싼거~
사먹으며 스스로를 위로받던 때가 있었거든요.
단편소설같은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따뜻하신 공감의 댓글에 또 한번 위로받습니다. 고맙습니다~^^
어릴적 모습을 보는것같아 너무흐뭇합니다 아!!거머리 생각만 해도 인상이 그려집니다 다리에 붙어서 피빨아 먹는 그모습 아이아이 싫어 싫어
저도 너무 징그러웠어요. 그란디 장화 신은 덕분에 흡혈을 면할 수 있었네요~^^ 고맙습니다..
김혜정님 이용해주셔서 감사드리구요..푸짐한 밥상입니다...고운후기글 감사드려요...
저역시 농부의딸이라...모내기할때 거머리를 정말 무서워했는데요...요즘은 장화가 예쁘기도하고 잘 나와있어서
편리하고 좋더라구요..걱정을 안해도 될듯합니다...어릴적 모내기할때의 추억이 생각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