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사상 중에 구원론이란 것이 있습니다.
구원을 얻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것이 「구원론」이란 과목입니다.
「구원론」이란 신학사상이 나오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우리는 인생을 사는 동안 가질 수 있는 것들이 꽤 많습니다.
우선 사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배우자, 자식, 형제, 친척, 친구 등등...
돈도 가질 수 있고, 집도, 자동차도 가질 수 있습니다.
명예, 지위, 학식 등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 중에서 내가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힌트; 집에 불이 나면 제일 먼저 가지고 나가는 것은?
나와 가장 오랫동안 함께 있어주는 것을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손꼽을 수 있을까요?
죽기 직전까지 나와 함께 해주는 것은 나의 몸뚱이입니다.
모든 것이 다 나를 떠나더라도 내 몸은 나와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 합니다.
그런데 내 몸뚱이 이상으로 죽은 다음에도 나와 함께 있는 것은 내 영혼뿐입니다.
구원론이란?
내가 가장 오랫동안 가지고 있는 내 영혼의 행복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원신학사상이 교회사 안에서 내용이 왜곡되는 바람에
수많은 신자들이 정신적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우선 가장 큰 오류는 구원론을 처벌적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가끔 스피커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차량들을 보곤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천당에 가고,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는
다분히 협박공갈조의 선교내용인데,
사실 일부 개신교의 이런 선교방식은 우리 교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더 심한 작태를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범위를 더 좁혀서 16세기 트리덴틴 공의회에서는
아예 가톨릭교회 이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못을 박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방주콤플렉스」라고 하기도 합니다.
구약에서 노아의 방주 안에 들어간 것들만 살아남은 것처럼
가톨릭교회라는 방주 안에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근대교회의 선교활동은 이런 관점에서 이루어져서 그 폐해가 컸던 것입니다.
특히 이런 사고방식으로 인하여 신앙관이 경직되고 편협해져서
그 후유증으로 교회 안에서는 분열증적, 편집증적인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소위 마녀재판과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왜곡된 구원론 두 번째는 죄에 관한 것입니다.
죄를 하나도 짓지 않아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구원론...
죄란 무엇인가?
교리서에서는 십계명의 율법을 따라 살지 않는 것을 죄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구원론 원칙의 일부만을 이야기하는 것일 뿐 본질적인 내용은 아닙니다.
그리고 구원론을 죄의 관점에서만 보게 되면 역시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특히 고해성사와 성체성사 때에 잘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고해성사때 너무 세세하게 죄를 고백하시는 분들을 보면
‘열심하신 분이구나’ 하는 느낌보다 ‘답답하다’ 는 느낌이 더 들고,
저렇게 자기 온몸을 밧줄로 꽁꽁 묶어놓고 어떻게 살려는 것일까?
하는 안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에는 비유적인 말씀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성격이 고지식한 분들은 그냥 글자 그대로만 받아들여서
스스로 자기 마음 안에 감옥을 짓고 그 안에서 수형자의 삶을 삽니다.
옛날 어떤 수도원에 고지식한 수사가 있었습니다.
이 수사는 하도 고지식해서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액면 그대로,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이어서
수사를 아는 사람들은 아무도 농담을 걸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고지식한 수사가 어느 날 신학적인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구원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수사, 저 수사에게 물어봐도 아무도 답을 해주지 않고 피하기만 해서
고지식한 수사는 하는 수 없이 성당에 철퍼덕 앉아서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보고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소리쳐 기도했습니다.
수사의 정성에 감동한 주님께서 입을 열어 답을 주셨는데
그때 마침 주님께서 당신이 키우는 개를 너무나 이뻐하신 터라
“우리 집 개처럼 살면 된다.” 하셨습니다.
주님 목소리에 놀라 펄쩍 뛰다 넘어진 수사는 재차 “어떻게 살라고요?” 물었지만
주님께서는 다시 입을 다물어버리셨습니다.
고지식한 수사는 얼결에 ‘그래. 개같이 살라 하셨다.’ 하고는
여기저기 다니면서 “주님께서 구원을 얻으려면 개같이 살라 하셨어.” 외치고 다녔는데,
그 바람에 정신 나간 수사취급만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지식한 수사는 굴하지 않고
개같이 살기 위해 식사도 개사료로 하고,
잠도 개집에서 자기 시작했습니다.
수사가 하도 극성을 부려서 아무도 못 말리는 바람에
고지식한 수사는 임종도 개집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수사의 영혼이 천당문 앞에 도착하자,
베드로사도가 나오더니 수사를 데리고 아주 큰 저택 쪽으로 갔습니다.
그 저택 안에는 개들이 드글드글하고
그 중에는 자기가 키우던 개도 한 마리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 수사가 “아니, 내가 평생 개집에서 살았는데
또 개들과 같이 살란 말입니까?” 하며 짜증을 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사도가 힐끔 보고 혀를 차며 말하기를
“언감생심 너는 저 큰 집이 아니라 그 옆 개집에서 살아야 한다.”
“아니 주님께서 개같이 살라 해서 평생 개같이 살았는데
내가 왜 천당에서도 개집에서 개같이 살아야 합니까?” 따지니
베드로사도 왈 “야, 임마.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개가 주인에게 헌신하고 순종하듯이 주님께 순종하며 살라 하신 것이지
정말 개같이 살라 하신 게 아니란 말이지. 이 꼴통아.”
하였다는 개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것인가? 하는 물음은 틀린 것입니다.
왜냐? 아무리 못된 자식이라도 다 이뻐하는 부모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구원의 기회를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선택하느냐 마느냐
받아들이느냐 거절하느냐인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대목이
바로 십자가형에 처해진 두 죄수이야기입니다.
두 죄수 중 한 사람은 주님을 거부했고, 한 사람은 주님을 인정했습니다.
주님께서 죄수의 과거를 묻지 않고
그를 데려가겠다고 하시는 복음의 대목이 바로 그것입니다.
구원이란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그래서 주님이 내게 절실히 필요한 분이심을 고백할 때,
즉 내가 하느님을 선택할 때 이루어진다는 것을
아주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천당, 연옥, 지옥은 본인이 선택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즉 내가 아무리 비천한 자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날 받아주실 거야 - 천당.
그래도 뭔가 나를 책망하지는 않으실까? - 연옥.
절대로 나같은 걸 받아주실 리 없어. - 지옥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계신지 자기 자리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