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당선된 한 광역자지단체장이 신문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식위정수(食爲政首)’. ‘먹여 살리는 일이 정치의 첫째 할 일’이라는 뜻으로, 다산 정약용(1762~1836)을 인용한 것입니다.
다산이 이 말을 언급한 것은 ‘논어고금주’ 중 논어 자로편의 주석입니다. 고대 중국의 성인인 기자(箕子)가 이렇게 행동했다고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니 이것을 정말 다산의 사상이 담긴 말로 봐야 한 것인지는 의문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정치인들이 이렇듯 자연스럽게 인용할 정도로 정치학의 사표(師表)로 여겨지는 인물이 조선 후기 최대 지성으로 평가 받는 다산 정약용입니다. 그러나 다산에게는 명백히 풀리지 않는 애매한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과연 천주교 신자였던가?
(중략)
하지만 다산은 한때 천주교를 믿었으나 결국 받아들이지 않은 배교자(背敎者)로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엔 ‘천주교에 학문적 관심을 가졌을 뿐 교회 내에서 뚜렷한 활동을 전개하지는 않았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서술이 나오는 등, 애초에 천주교 신자는 아니었던 것처럼 인식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산 연구자 중 한 명이며 조선 후기의 바다와도 같은 고전과 문집 속 문장을 발굴·재해석해 온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의 생각은 좀 다릅니다. 정 교수는 최근 출간한 900여 쪽 분량의 연구서 ‘서학(西學), 조선을 관통하다’에서 이 같은 주장을 했습니다. “다산은 천주교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으며, 천주교와 관계를 끊었다고 알려진 뒤에도 100% 배교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중략)
그 ‘증거’가 이번에 하나 밝혀진 게 있다고 합니다. 아직 조선인 신부가 없던 시절, 조선에 입국한 첫 외국인 신부는 청나라 강소성 출신 주문모(1752~1801)였습니다. 1795년(정조 18년) 한양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체포될 뻔했습니다. 한영익이라는 배교자가 밀고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추격을 피해 달아나 그 뒤로 6년 동안 전교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중략)
그 짧은 시간 동안 누군가 계산동을 찾아 한영익의 밀고 사실을 알려 주고 주문모 신부를 황급히 피신시켰던 것입니다.
그게 과연 누구였을까요.
(중략)
모든 자료가 주문모 신부를 탈출시킨 사람이 ‘그 무관’이었다고 지목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그 무관은 누구였을까요?
(중략)
다산 정약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잠깐, 다산이 무관이었다니 이건 또 무슨 얘길까요?
사연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까지 우부승지였던 다산은 서학 문제로 비방을 받아 체직(벼슬이 바뀜)됐고, 부사직 신분으로 규장각에서 ‘화성정리통고’의 교정 작업을 맡고 있었습니다. 정조 임금 입장에서 급여는 줘야 하겠기에 임시로 내린 부사직이 바로 중앙 군사조직인 오위(五衛)의 무관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잠시 동안 명목상의 무관으로서 무관 옷을 입고 궐내에서 근무하고 있었을 때 이런 사건이 터졌던 것이죠.
이후 신하들이 도대체 어떻게 주문모가 피신했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하자 정조 임금은 지나가는 말처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건 정약용이 알 것이다.”
(중략)
정민 교수는 지난해 “순교지 윤지충의 무덤 지석(誌石)의 글씨를 조사해 보니 다산이 쓴 것이었다”고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조상 제사를 거부할 수 없다며 배교한 뒤에도 다산이 신앙을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란 얘깁니다. “배교했다고 해서 신앙을 10대0으로 없애버린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다산에게서 7대3에서 5대5까지 여전히 신앙이 남아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중략)
정민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선 후기의 역사에서 천주교는 거대한 화산재로 덮인 폼페이 유적이었다.” 많은 기록이 가려지고 사라졌지만, 양반과 종이 절대자 앞에서 평등한 존재라는 사상은, 도덕과 윤리, 신분제도, 왕조의 시스템 자체를 뿌리부터 뒤집는 것이었고, 많은 지식인들의 사상에 은밀하면서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입니다. 그 ‘순교의 역사’가 세도정치를 뒤집는 ‘변혁의 역사’로서 자리잡을 수만 있었다면 한국근대사의 방향은 크게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남지만 말입니다.
출처
[유석재의 돌발史전] 다산 정약용, 창덕궁 근처에서 2㎞ 전력질주한 사연 - 조선일보 (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