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등록증
안옥수
나는 1934년 4월 21일, 벚꽃이 만발하던 때에 이 세상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바로 읍사무소에 가서 출생신고를 했다. 이것이 내가 이 세상의 일원이 되었다고 알리는 처음 등록이었다. 그 후 지금까지 살면서 여러 종류의 등록을 하고, 그 등록증을 소지하고서 내가 나임을 증명하면서 살아왔다.
어렸을 때는 출생 등록증을 소지하고 다니면서 살지는 않았지만 초등학교 입학시험을 보러갔을 때 호적초본을 제출해야만 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키가 큰 편이어서, 부모님이 일찍 학교에 입학시키려고 했던 모양이다. 입학시험에 선생님이 묻는 것은 모두 대답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은 삼각형 둘을 채상 위에 올려놓고 사각형을 만들라고 해서, 삼각형 하나를 돌려서 사각형을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결과는 입시에 떨어지고 말았다. 나는 떨어진 것이 너무 서운해서 눈물을 흘렸다. 우는 나를 본 아버지가 즉시 학교로 찾아가서 떨어진 이유를 물었더니 만 6세가 되지 않아 연령미달로 떨어졌노라고, 내년에 보내라고 했단다. 그래도 나는 서운했다. 일본말도 알아들을 수 있었고, 내 이름도 한자로 쓸 수 있었는데. 출생신고를 한 호적증명서 때문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중학교 학생증이 있어서 늘 몸에 소지해야만 했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중학교가 6년이었다. 5학년을 마치고 나니 학제가 바뀌어 고등학교 3학년의 학생증을 받고서 졸업을 했다. 그 후 대학, 대학원의 학생증을 발급 받았고, 그것은 주로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때 사용했던 것 같다.
18세가 되었을 때, 사진이 첨부된 도민증을 받았다. 6ㆍ25 동란 후에는 전국적으로 주민등록이 실시되고, 주민등록증이 발부되었다. 각종 서류에 주민등록 번호를 적기 시작했다. 주민등록 번호는 길어서 거기에 적혀있는 숫자가 여러 가지 정보를 가지고 있다. 앞 숫자는 생년월일이라서 보면 바로 소지자가 몇 살인지를 알 수 있고, 남녀 구별도 가능하고, 그 밖에도 여러 정보가 들어있는 것 같다. 관공서에서 서류를 발부받을 때, 은행업무, 우편업무, 모든 활동에 주민등록증을 제시하고, 내가 나임을 증명하게 되었다. 그밖에 의료보험증, 교통카드, 각종 병원 진료카드, 도서관 출입증, 책방 회원증 문인협회 회원증 등, 내 지갑에는 여러 개의 등록증이 들어있다.
직장을 가진 뒤로는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교수 증을 차례로 소지하게 되었고, 퇴직 후에는 경로 우대증과 경로우대 교통카드를 받았다. 하루는 인천 공항에서 손님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공항철도를 타려고, 경로 우대 교통카드를 출구에 댔더니 갑자기 ‘살펴 가세요.’하는 큰 소리가 울린다. 깜짝 놀라 두리번거렸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출구 기기에서 경로 우대 교통카드를 읽는 소리였다. 또 한 번은 의정부에 갈 일이 있었다. 의정부에서 내려서 경로 우대카드를 출구에 대고 나오려고 하는데 역원이 와서 나를 멈추게 했다. “아주머니는 왜 경로 우대카드를 쓰세요?”한다. 나는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나를 바라보며 “주민등록증 보여주세요.”한다. 나는 주민등록증을 백에서 꺼내 보여주었다. 한참 보더니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혼자 구시렁거리며 간다. ‘젊어보여서.’ 아마도 부정한 승객 한 명 잡았다고 생각했나보다. 무례한 직원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를 젊게 보고 그랬다니 더 시비를 걸지는 않았다.
외국에 갈 때는 여권을 발급 받고, 타국에 입국할 때는 입국 사증을 받고, 출국할 때는 출국도장을 받는다. 나는 여권을 꺼내놓고 여러 나라의 입국증과 출국증을 본다. 아직도 가보고 싶은 나라가 몇 개 더 있다. 그러나 작년에 고관절을 다친 후에는 실질적으로는 외국 여행이 불가능하다. 내 고관절에는 철 핀이 세 개나 박혀있다. 3개월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X-ray 찍고, 피검사를 한다. 뼈에 괴사현상이 나타날까봐 하는 것이란다. 이번 12월에는 골다공증 검사를 다시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도 여권을 보는 순간, 내가 공항에서 출국하려고 검사대를 통과할 때 삑~소리가 나면 무어라 설명하지 싶은 생각이 나 한영사전을 찾아본다. 고관절, hip joint란 단어를 찾았다. 이렇게 공항의 출국과 입국절차를 그려보다가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웃음이 났다.
그땐 딸이 샌프란시스코에 있을 때다. 명란젓이 먹고 싶으니 올 때 꼭 사오라고 한다. 그래서 명란젓을 사가지고 가는데 입국신고서에 다 자세히 썼다. 그런데 입국 조사 때 걸린 것이다. 원래 과일, 고기 등 생물은 공항을 통과할 수가 없다. 그러나 명란젓은 공장에서 포장되어 나온 상품이다. 그래서 가지고 가도 되리라는 생각이었다. 공항 검사대에서 이게 무어냐고 검사원이 묻는다. 이것은 명태 알인데 공장에서 처리된 상풍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그 검사원이 생선알(roe)이라고 쓴 영어를 이해 못하고 또 묻는다. 나는 화가 나서 생선알(egg)이라고 하면서 생선 알은 egg라고 안하고 roe라고 한다면서 너는 미국사람인데 너의 나라말인 영어도 모르느냐고 했더니 얼굴이 벌게지면서 빨리 나가란다. 그 때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온다. 무조건 유색인종인 외국 사람이라면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서 그랬는지, 아니면 나의 열등감의 발로였는지 모르겠다.
오늘은 또 하나의 등록증을 받았다.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발행이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증. 성명:안옥수(1034.04.21) 등록번호:R18.47548 뒷면에는 ’귀하께서 작성하신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보건복지부 지정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크기는 주민등록증과 꼭 같다. 전면 3분의 1은 흰색이고, 밑으로 3문의 2는 푸른 하늘색이다. 아주 평화스럽고 예뻐 보이는 카드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일할 때는 주민등록증과 그밖에 여러 용도의 등록증을 가지고 살았는데 이 세상을 떠날 때는 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증’을 제시함으로써 오랜 고통 없이 지구를 쉽게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소중하고, 마음이 가벼워지는 듯하다.
나는 백에서 지갑을 꺼내서 열고 이 예쁜 등록증을 쓰이는 순서대로 주민등록증 뒤에 고이 꽂았다. 앞에 있는 주민등록증 다음에 쓰일 것 같아서…….
2019. 10.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