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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송필경 베트남평화의료연대 대표
노회찬이 가장 존경하는 호치민은?
1969년 9월 2일, 호치민 지도력의 대단원은 막을 내렸다. 불멸이라 믿었던 사람이 눈을 감았다. 운명은 썩은 시대를 천천히 분해하도록 그에게 79년이라는 생애를 주었다. 시대와 싸울 만한 충분한 시간을 갖고 있었고, 쓰러졌을 때 그는 승리자였다.
그가 존경하는 칼 마르크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그리고 먼저 간 혁명 선배들을 만나러 갈 날을 대비하여 이렇게 유언했다.
내가 죽은 뒤에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내 시신은 화장해 달라. 위생상 좋고 땅도 절약되기 때문이다. 재는 언덕에 뿌려 달라. 탐다오와 바비 근처에 좋은 언덕이 있는 듯하다. 재가 뿌려진 곳 위에는 단순하고 넓고 튼튼하며 통풍이 잘되는 집을 세워 방문객들을 쉬어가게 하는 것이 좋겠다.
베트남인민은 그의 바램을 전혀 들어주지 않았다. 그를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나 존경하였기에 삶의 하나하나 흔적과 체취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 어마어마한 기념관을 만들었다. 그의 시신은 선배 레닌처럼 영원히 썩지 않게 방부처리 되어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고통스러운 전쟁을 이겨내고 혁명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선배의 혁명가들이 이루지 못한 자신의 마음속의 혁명도 이루어냈던 희귀한 혁명가이었다. 그는 '혁명의 4대 덕행' 즉 근면, 절약, 청렴, 정직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그는 귀국 후 박보 동굴에서 혁명을 꿈꿀 때 그의 베개 옆에는 정약용의 목민심서가 항상 있었다고 한다. 그는 지식인에게 주는 1953년 '정치교서'에서 이렇게 밝혔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기억하자. '수신'과 '제가'는 바로 자기를 개혁함이다. 자기 개혁은 멀고 험난하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각자의 마음속 혁명이다." 흔히들 생각하는 공산혁명가의 냄새가 어디에도 풍기지 않는다.
'뉴욕 타임즈'는 전 세계의 찬사를 전하면서 다음과 같이 조사를 썼다.
'타임'지는 그의 얼굴 사진을 표지에 실었다. '타임'지는 미국이 가장 먼저 타도해야 할 적으로 몰았던 이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고별사를 바쳤다.
그의 한결같은 꿋꿋함은 피비린 학살과 짐승같은 증오의 전쟁 속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대낮같이 밝고 명랑하고 행복한 얼굴을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 지켜낼 수 있었든 것이 아니었을까?.
그는 "적'에게서도 존경을 받은 그런 인물이었다.
호치민 그는 누구인가
호치민의 전기 작가 Charles Fenn은 이렇게 썼다.
인류 역사에서 호치민같은 인물을 만나기란 그리 쉽지 않다. 호치민이란 인물의 인간과 사상이 좌우의 이데올로기의 틀 속에서 평가하기에는 너무도 거대한,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이념적 평가로서는 처리될 수 없는 확실한 역사적 실천이 그의 삶 자체에 구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생애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놀라운 사실은 그의 인생 자체가 방편으로서 사회주의를 선택했을 뿐이지 이념에 결코 구속되지 않았으며 정치적 감각이 국제적이라는 사실이다.(그는 5개 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했다)
호치민의 일생에서 가장 감명주는 부분은 자기 신념에 대한 헌신이며, 항상 대의를 위하여 자기개인을 희생할 줄 아는 인간적 순수성이다. 그는 평생을 자기희생 정신 속에서 살았고, 끊임없는 좌절 속에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조직을 만들며 살았다. 대의를 위하여 인간적 허식을 중시하지 않는 점, 민족의 독립과 자유의 이상의 실현을 위하여 순수하게 자아를 헌신하는 그의 인간적 순진성이 자못 감동을 주는 것이다.
무엇이 그를 역사적 자이언트로 만들었는가?
영웅이 시대를 만들었는가, 시대가 영웅을 만들었는가 따위의 역사적 가설은 베트남에서는 별 쓸모가 없는 논쟁이다. 민중의 시대정신을 완벽한 리더쉽으로 구현한, 다시 말해 민중과 지도자가 한데 어루어져 이루어진 베트남의 현대사는 세계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다.
호치민을 가능케 한 일차적인 것은 베트남 민중의 외세척결 정신이다. 이 시대정신은 그들 자신의 역사 속에서 축적해온 독립의지를 정확히 인식하여야만 이해되는 것이다. 특히 그들의 현대사는 전 국토가 미국의 공중폭격의 실험장이었으며, 남쪽 지역 대부분의 마을은 '학살의 미라이'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세를 업고 주체를 팔어먹는 지극한 부패세력들에 대하여 민중들은 대의명분을 위하여 처절한 힘의 대결에서 한발도 물러서지 않은 것이다.
애초 격이 달라도 너무 다른, 게임도 안되는 악어들(디엠, 키, 티우 따위)을 전면에 내세워 패권을 노리는 미제국주의에 대한 베트콩의 투쟁을 단순한 게릴라전으로 보는 것은 베트콩에 대한 너무 천박한 이해이다. 우리가 중시해야 할 사실은 베트콩은 북쪽의 공산군 전사가 아니라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외세척결이라는 명분으로 조직된 전사라는 점이다. 더욱이 그들은 호의 리더쉽에 의해 똘똘 뭉쳐진 조직인 것이다. 즉 누가 시켜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렇게 행동했다. 그들이 구현하고자 한 외세척결은 생명을 바쳐야 할 그 무엇으로 최후의 한 순간까지 그들을 지배한 것이었다.
이렇게 민중이 전쟁과 학살 때문에 전 국토를 적신 피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역사에서 흘러내린 피는 말라버리는 법이 없이 언제나 기억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미라이 학살 기념관을 지키는 할머니가 아직도 피비린내를 느끼듯이 그 피비린내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민중들이 기꺼이 조국을 위해 피를 흘리는 것은 역사이래 외세에 받아온 억압의 에너지가 뭉치고 뭉쳐 이루어진 하나의 필연이며 역사의 가르침인 것이다.
이 민중의 뜻이 모아지고 농축된 엑기스를 호치민의 리더쉽으로 무장하여 그들의 이상인 독립과 자주가 베트남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염소 수염에 갸날픈 몸매, 보통 셔츠에 카키색 바지, 고무로 만든 하얀 샌들을 주로 신는 호치민은 민중의 의지를 조직화하는데 평생의 열정을 쏟아 부었다.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권력이 초래할 수 있는 친인척 비리의 가능성을 철저하게 차단하였다.
『사실상 호치민의 가족은 일찍 사별한 모친을 제외하면 전 가족이 독립혁명의 전사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다. 형님과 누나는 호치민에 못지않은 독립투쟁 경력을 지녔으나, 그는 형과 누나를 결코 권력의 중심부로 유인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철저하게 배제하였다. 그가 대통령이 될 때까지 그의 형과 누나는 '호치민'이란 그들의 지도자가 그들의 동생인 '구엔 신 쿵'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1945년 베트남이 독립했을 때 형은 동생 호치민을 30년만에 하노이에서 만났다.
호치민은 그를 대통령 관저가 아니라 근처 친척집에서 만나 한 시간 가량 회포를 풀었다. 형은 그 때조차도 동생이 그가 존경하는 '대통령 호치민' 그 자신인 줄 몰랐다고 한다. 누나는 뒤늦게 신문에 난 새 지도자의 얼굴과 동생의 얼굴, 대통령의 출생 가문이 자신의 가문과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깜짝 놀란 그녀는 '오리 두마리와 달걀 20개'를 싸들고 하노이로 갔다. 대통령은 반갑게 그녀를 맞이하였다. 대통령 관저에서 누나가 가져온 선물을 함께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을로 돌아갔다. 사망할 때까지 그녀는 자신의 마을에서 안락하게 살았다.』
이처럼 소박한 호치민은 민중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다. 호치민의 국내 정책들이 항상 성공적이기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특히 마오주의적 오류 때문에 빚어진 농업정책 실패는 심각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호(호아저씨)가 우리에게 나쁜 일을 할 리가 없다"는 인민들의 믿음은 언제나 호치민의 지도력을 가능케 한 원천이었다.
이런 신뢰를 바탕으로 호치민은 민중의 외세척결 정신을 '민족의 독립과 자주'라는 인류보편적 가치(universal values of humman beings)로 승화시키는 세계사적 자이언트로 우뚝 솟는다. 프랑스 혁명 정신과 미국의 독립선언은 인류의 자유와 평등을 선언한 세계사적 의의는 있지만 이들의 자유와 평등은 강대국 자기들 울타리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자기들 끼리만의 약속이었다. 2차 대전시 프랑스 자신들은 독일에 대해 그토록 저항하였지만 1960년대까지 자신들의 식민지를 혹독하게 수탈한 것, 베트남 인민의 자주독립의지를 전쟁의 광기로 몰고 간 미국을 보면 그들이 부르짖는 이상은 제 3세계에서는 확실히 기만적인 것이었다.
베트남에서 공산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된 시대적 배경은 바로 서구 식민주의자들의 이런 기만적인 분위기였고 전쟁의 광기라는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서 호치민의 리더쉽은 새로운 가치관, 세계관을 인민에게 제시하면서 힘차게 뻗어 나갔던 것이다. 1945년 9월 2일 베트남은 독립을 선언했고 그 독립선언문은 호치민이 직접 집필했다. 그는 이 선언문에서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문과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언급하면서 인류의 진정한 자유·평등·박애를 선언한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다른 공산혁명 지도자와 사뭇 다른 자세를 보여주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독립은 프랑스와 미국의 악랄한 이기주의 때문에 당분간 좌절되어 버리고 광기의 전쟁에 휩싸이에 되는 것이다. 베트남 민족해방전쟁을 거시적 관점에서 평가해 볼 때 30여년에 걸친 이 투쟁은 세계역사상 최대의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이며, 이것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는 인류보편적 가치인 자유의 확대를 제3세계 약소국이 스스로 쟁취한 세계사적 의의를 갖는다.
다시 말해 베트남의 현대사는 세계사의 보편적 전개양식에서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는 '인간 존엄과 자유의 확대'라는 역사의 이념과 보조를 맞추고 있음은 의논의 여지가 없다. 즉 인민의 평등과 자유를 갈망하는 것을 수용하는 측면에서 매우 래디칼한 자기 탈바꿈의 역사이며, 제3세계 어느 나라보다 훨씬 더 주체적이고 근원적인 것이다.
너무나 엄청난 피의 희생을 지불하면서 북폭, 구정대공세, 협상, 민족통일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은 민중의 불굴의 의지를 지도자는 한치도 어긋남 없이 수용하여 독립과 자유를 주체적으로 확보해간 역사인 것이다. 단절없이, 주체성 상실없이 그들의 역사가 보편사 속에서 제시한 문제의 결말을 확실히 본 역사라는 것을 우리는 확실히 인식하여야 한다. 제대로 된 도로 하나없이 싸구려 농산물을 팔아먹는 후진국이라는 멸시감으로 베트남을 쳐다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그들이 그들의 역사 속에서 축적해온 저력을 올바르게 보아야 한다. 1973년 사실상 패배한 한국군이 철군하는 마당에서 '쪼그만 그러나 지독한' 베트콩 새끼들를 '1당10'으로 물리쳤다고 자랑하시는 군지휘자의 모습을 보면 역사를 몰라도 너무 모르고 천박하기 그지 없을 뿐이다.(아직도 이렇게 믿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경애하는 수령도 아니고, 민족의 태양도 아니고, 위대한 장군동지도 아닌 호 아저씨(박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고 1969년 9월 2일 세상을 떠난다.
결국 호치민 사후 베트남은 민족통일전쟁은 완성이 되는데 이 전쟁의 승리를 공산주의 이념의 실현으로 이해하여서는 안된다. 그것은 매우 피상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 된다. '인간의 존엄과 자유의 확대' 즉 프랑스 혁명정신과 미국의 독립선언에서 나타낸 인류보편적가치를 약소국 스스로 쟁취한 세계역사의 한 분수령을 이루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나의 평(securitad)==== 호치민은 비록 공산주의자였지만 의당 존경받아야 마땅한 위인입니다. 삶 자체가 부귀와는 거리가 먼 검소한 생활을 했고 인민은 항상 마음속으로 그를 존경하며 따랐습니다. 북베트남이 세계 최강 미국과 전력이 상대적으로 강한 남베트남을 이긴 것은 월맹이 공산주의자들이기 때문이 아니었고 다만 인민의 마음속으로 우러나오는 진정한 지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맹자가 말하길 혼탁한 세상을 통일할 자 패자가 아닌 바로 인자라고 했습니다. 그는 부정부패에다 인권을 개무시하던 곧 망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인 월남 정부와는 달리 인과 덕을 그리고 청빈함을 가지고 있었기에 제국주의에 착취받던 민중의 마음을 모았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베트남 사람들은 호치민을 마땅히 국부로 여기고 그를 존경합니다. 한 평생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그의 삶과 가치관이야 말로 마땅히 우리가 본받아야 할 가치인 것입니다. 북한의 뽀글이와 호치민은 땅과 하늘 차이입니다. 뽀글이는 북한의 민중을 착취하면서 존재하는 스탈린식의 통치자인 반면에 호치민은 가장 높은 권력과 자리에 올라 있으면서도 항상 민중과 백성을 생각했으며 감히 호의호식을 즐기려고 하지 않았던 이상적인 혁명가였던 것입니다. 호치민에 대한 평전을 한번 읽어보십시오 그의 팬이 확실히 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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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 위의 뽀글이 부자와 그똘마니들과는 차원이 틀리지요 이미 북한은 공산주의 보다는 군주제라고 할수있으니...
아마 베트남이 냉전 붕괴 이후에도 별 영향을 받지않고 개방을 할 수 있었던것도 그만큼 떳떳 했기 때문이겠지요. 한편으론 베트남의 저런 유연성이 부럽기도 하고 과연 북쪽의 위정자들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주장한 대로 떳떳할 수 있을까?
우리 남쪽은 비록 흑탕물에서 뒹굴었다고 해도 흑탕물에서 뒹굴었다고 솔직히 말하죠. 제가 북한을 비롯해서 일부 극좌들을 싫어하는 이유가 이중성 때문입니다. 마치 자신들은 아닌것 처럼 위장하는...............
호치민이 구엔장군과 찍은 사진을 봤습니다, 유명한 사진인데...그 사진이 투쟁중의 사진인줄 알았더니 아니더군요 한 국가의 최고자리에 위치한 사람이 반바지에 허름한 셔츠차림...한쪽은 양복이라고 입었는데 (외국 사절을 맞기 위해서라더군요) 정말 어울리지 않더군요 입어보지 않아서 말이지요...
마오쩌둥은 뺴는게 좋지 않을까...
마오는 처음에는 좋았지만 후에는 문화대혁명을 뒤에서 조종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