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회[1].hwp
노자 도덕경 읽기 34강 (52장)
(1) 제52장 원문
天下有始, 以爲天下母. 旣得其母, 以知其子. 旣知其子, 復守其母, 沒身不殆. 塞其兌, 閉其門, 終身不勤. 開其兌, 濟其事, 終身不救. 見小曰明, 守柔曰强. 用其光, 復歸其明, 無遺身殃, 是爲習常.
천하유시, 이위천하모. 기득기모, 이지기자. 기지기자, 부수기모, 몰신불태. 색기태, 폐기문, 종신불근. 개기태, 제기사, 종신불구. 견소왈명, 수유왈강. 용기광, 보귀기명, 무유신앙, 시위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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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旣) : 이미. 이윽고. 다하다. 먼저. 이전에.
득(得) : 얻다. 이익. 분명해지다.
부(復) : 다시. 다시 또 하다. 거듭. 거듭하다.
몰(沒) : 죽다(歿). 끝내다. 끝나다.
태(殆) : 위태하다. 위태롭다.
색(塞) : 막다. 막히다.
태(兌) : 구멍. 바꾸다. 기뻐하다.
폐(閉) : 닫다. 닫히다.
근(勤) : 부지런하다. 일하다. 힘쓰다. 근심하다. 고생하다. 수고스럽다.
개(開) : 열다. 열리다.
제(濟) : 건너다. 나루. 돕다. 도움이 되다. 구제하다. 이루다. 이루려고 하다.
구(救) : 건지다. 돕다. 구제하다. 구원하다. 고치다.
유(遺) : 끼치다. 후세에 전하다. 남기다. 두다.
앙(殃) : 재앙. 재앙을 내리다.
습(習) : 익히다. 되풀이하여 행하다. 연습하다. 물들다. 익숙하다. 능하다.
상(常) : 늘. 항상. 불변의 도.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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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번역
천하에 시원(始原)이 있으니, 그것이 천하의 어미가 된다. 먼저 그 어미가 분명해짐으로써 그 자식을 알 수 있다. 이미 그 자식을 알고 다시 그 어미를 지킬 수 있으면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다. 구멍을 막고 문을 닫으면 평생 근심거리가 없다. 구멍을 열고 그 일을 이루려고 하면 평생 구제할 수 없다. 작은 것을 보면 밝고, 부드러움을 지키면 강하다. 그 빛을 써서 밝음으로 돌아가면 몸에 재앙을 남기지 않는다. 이것을 습상(불변의 도에 익숙함)이라 한다.
(3) 해설
52장의 전체적인 의미는 대강 다음과 같다. 무엇인가를 바로 알면 위태롭지 않고(不殆), 근심거리가 없고(不勤), 몸에 재앙거리를 남기지 않는다(遺殃)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바로 아는 것이 무엇인지. 또 그것을 알면 어떻게 해서 위태롭지 않게 되는지를 알기 어렵다. 바로 아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학문은 진리론 혹은 인식론과 관련된다. 바르게 앎으로써 불행을 막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가치론 혹은 행복론과 관련된다. 이 장(章)의 요지는 바르게 알면 적어도 쓸데없는 불행은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52장 중 중간의 구절만 죽간본에 나오고 앞 문장과 뒷 문장은 백서본부터 나온다. 따라서 중간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후대에 가면서 1장, 25장, 32장 40장과 대비하여 붙여진 내용으로 보아야 한다. 이 중 52장의 앞부분은 1장과 관련된다.
도라고 생각할 수 있는 도는 변함없는 도가 아니고, 지을 수 있는 이름은 변함없는 이름이 아니다. 이름 없음은 천지의 시원(始原)이고, 이름 있음은 만물의 어머니이다. 그러므로 항상 무욕(無欲, 도를 생각하지 않고 이름 지으려고 하지 않음)으로서 그 묘(妙)의(구분 없는) 세계를 볼 수 있고, 유욕(有欲, 도를 생각하고 이름 지으려고 함)으로서 그 요(徼)의(구분 있는) 세계를 보게 된다. 이 둘의 세계는 같은 곳에서 나온 곳으로 이름이 다를 뿐이다. 이 같음을 일러 현(玄, 깊어서 보이지 않음)이라 한다. 깊고 또 깊어서 보이지 않는 곳이 온갖 묘(妙)의 문이다.(1장)
52장은 “천하의 시원(始原)이 있으니, 그것이 천하의 어미가 된다. 먼저 그 어미가 분명해짐으로써 그 자식을 알 수 있다.”(天下有始 以爲天下母 旣得其母 以知其子)라는 말로 시작된다. 1장에 “이름 없음은 천지의 시원이고 이름 있음은 만물의 어머니이다.”(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는 말이 있다. 1장에서는 ‘천지’의 시원(天地之始)이라 하고 52장에서는 ‘천하’의 시원이 있다(天下有始)고 했다. 천지는 무(無)에서 유(有)가 만들어질 때 시작단계이다. 즉 천지가 만들어지고 천지의 조화 속에 천하의 만물이 생성된다. 천하라는 말은 넓은 의미로는 만물을 대표하는 것이고, 좁은 의미로는 인간들의 세상이다. 52장의 ‘천하의 시원’은 1장의 ‘만물의 어머니’인 이름 있음(有名)이다. 그 어머니의 자식은 만물이다.
그런데 1장에서 이름 지으려고 하지 않을 때 구분 없는(妙) 세계를 볼 수 있고, 이름 지으려고 할 때 구분 있는(徼) 세계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름을 짓고자 함이 없는 무욕(無欲)과 이름을 짓고자 함이 있는 유욕(有欲)이 같은 곳에서 나온 다른 이름(此兩者同出而異名)이라고 했다. 즉 이름이 있나 없나의 차이밖에 없다는 것이다. 노자는 이 차이에 주목하지 말고 같음에 주목하라고 말한다. 같음에 주목하는 것을 깊어서 보이지 않는다(玄)고 했으며, 깊고 또 깊어서 보이지 않는 곳이 온갖 구분 없는 세계의 문(衆妙之門)이라고 강조하였다. 구분 없는 세계는 무(無)의 세계이며, 더 나아가 도(道)의 세계이다. 이 세계들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1장에서는 말하고 있다.
52장에서 “그 어미가 분명해짐으로써 그 자식을 알 수 있다.”(旣得其母 以知其子)는 말은, 어머니가 곧 이름 있음(有名)이니 이름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 때문에 그 자식인 만물이 제각각 만물인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름을 얻기 전의 만물은 다만 천지(天地)일 뿐이다. 그런데 천지라는 것도 하나의 이름이다. 이름을 얻기 전의 천지는 무명(無名)이다. 그래서 이름 없음이 천지의 시원(無名天地之始)이다. 그런데 노자는 “이미 그 자식을 알고 다시 그 어미를 지킬 수 있으면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다.”(旣知其子 復守其母 沒身不殆)고 말한다. 왜 그런가? 이것에 대한 대답과 52장의 이어지는 문장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25장과 32장을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다.
(개별화되기 전의) 만물이 뒤섞인 채(chaos, 혼돈상태)로 이루어진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늘과 땅보다 먼저 생겼고, (소리 없이) 고요하도다! (형체 없이) 공허하도다! (對比 없이) 홀로 있고 (逝, 遠, 反의 일정성이) 바뀌지 않으며, (모든 곳에) 두루 가(미치)면서도 위태롭지 않으니 가히 천하의 어머니(만물을 낳는 모체)라 할 수 있겠다.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하므로 그냥 도라고 부르겠다. 억지로 이름하여(그 이유를 설명하면) 그것은 크다고 할 수 있고, 크다는 것은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고,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은 멀리 근원(根源)에 이르는 것이라 할 수 있고, 근원에 이른다는 것은 다시 되돌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25장)
도는 늘 이름이 없다. 오직 통나무 같이 (쓸모가) 작아서 천하에 신하로 삼아 거느릴 자가 없게 된다. ⋯⋯ 마름(재료를 필요한 규격대로 베거나 자름)을 시작함으로써 이름이 있게 된다. 또한 이름이 이미 있더라도 무릇 멈출 줄 알아야 한다. 멈출 줄 알면 위태하지 않게 된다.⋯⋯(32장)
우리는 무엇(what)에 대해 생각을 하려면 그것의 이름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이름을 떠올릴 때는 그 이름의 정의(定義, definition)에 따르게 된다. 정의는 뜻을 한정(限定, define)한다는 말이다. 뜻을 한정해야만 다른 것과 구분이 되면서 바로 그 무엇을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바나나’를 생각해보자. 바나나의 색과 모양이 떠오를 수 있다. 그리고 바나나 맛과 감촉 등이 떠오르고 그것에 얽힌 추억이 떠올 수 있다. 이 떠오르는 생각 중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통해 우리는 바나나를 정의할 수 있다. 네이버 사전에는 바나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초승달 모양의 긴 타원형으로 색깔은 주로 누런색이다. 맛과 향기가 좋다.” 여기에 나오는 ‘초승달 모양’, ‘누런색’, ‘맛 좋음’, ‘향기 좋음’ 등은 모두 바나나를 한정하는 용어들이다. 그리고 이 한정용어들을 담고 있는 그것에 ‘바나나’라고 이름 붙이면 그 이름도 또한 한정용어가 된다. 현대 철학자인 화이트헤드는 이 한정용어들을 한정형식(forms of definiteness), 또는 영원한 대상(eternal object)이라고 한다.
‘바나나는 초승달 모양의 누런색 과일이다.’고 정의했을 때, 이 정의 속에는 이미 바나나, 초승달 모양, 누런색 등의 한정형식들이 들어가 있다. 그래서 누군가 바나나는 초승달 모양이 아니고 눈썹 모양이라고 주장하거나, 누런색이 아니고 초록색이라고 주장하면 다투게 된다. 즉 앞의 정의는 잘못이라고 지적하는 측과 잘못이 아니라는 측의 다툼이다. 화이트헤드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의식한다는 것은 긍정⋅부정의 대비라고 한다. 의식한다는 것은 한정형식을 넣어서 생각한다는 것이고, 한정형식이 들어가면 그 한정형식이 아닌 것을 부정하게 된다. 모든 다툼과 재앙의 근원은 이것 때문이라는 사실을 노자는 일찍 알았다.
노자는 이름 없음(無名)이 근원이며, 여기서 천지(天地)라는 이름 있음(有名)이 나왔고, 이 이름 있음이 어미가 되어 수많은 이름을 낳아 만물이라는 자식이 나왔다는 것을 알아야 다툼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이 말은 이름에 얽매이면 긍정과 부정을 피할 수 없어서 다투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름이 있는 자식들을 알고 그 어미를 지키면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다(旣知其子, 復守其母, 沒身不殆)고 했다. 여기서 어미를 지킨다는 것은 이름(긍정⋅부정) 없는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이며, 이렇게 했을 때 다툼이 없어서 위태롭지 않다는 것이다.
부자(富者)라는 이름은 빈자(貧者)라는 이름과 대비되며, 부자를 긍정하면 빈자를 부정하게 된다. 그래서 부자와 빈자 사이에 갈등상황이 오게 된다. 부자와 빈자 사이의 구분을 축소해서, 부자는 키가 크고 빈자는 키가 작음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면 갈등상황은 오지 않는다. 물론 이때도 키를 의식하는 사람에게는 키의 크고 작음으로 갈등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 키에 대한 피해의식이나 우월의식이 있는 사람에게는 키의 크고 작음이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으로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그러나 키의 구분에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에게는 모두 같은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재산의 구분에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에게는 부자와 빈자 모두 같은 사람이다. 어린아이는 재산의 구분에 의미를 두지 않고 친구가 되며 함께 논다. 어린아이에게는 그냥 친구이지 부자 친구와 빈자 친구로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부자를 긍정하고 빈자를 부정하는 어린아이의 부모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빈자의 친구와 놀고 있는 어린아이를 보면서 간섭하려는지 모른다. 부자와 빈자를 구분해서 간섭하려는 부모는 자신의 생각이 성숙하며 옳고 어린아이의 생각은 미숙하며 옳지 않다고 여길 것이다. 노자는 오히려 어린아이의 생각이 도(道)에 가까우며 훌륭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만물을 접하여 이름으로 구분 짓는 일은 감각기관을 통하여 외부를 받아들일 때 이루어진다. 이때의 감각기관 중 대표적인 것이 이목구비(耳目口鼻)의 7태(兌, 구멍)이다. 노자는 이 구멍을 막으라고 한다. 그리고 그 구멍을 막고, 외부를 구분지어 받아들이는 모든 통로를 닫으면 종신토록 근심거리가 없다(塞其兌 閉其門 終身不勤)고 말한다. 반대로 이 구멍을 열고 그(한정형식으로 구분 짓는) 일을 이루려고 하면 종신토록 구제할 수 없다(開其兌 濟其事 終身不救 )고 말한다. 구분 짓는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어린아이에서 멀어져 구제불능이 된다. 다음에 노자는 “작은 것을 보면 밝고, 부드러움을 지키면 강하다”(見小曰明 守柔曰强)고 말한다. 이때의 작은 것은 박(樸)이다. 박은 통나무이며 자르기 전의 상태로서 무명(無名)이다. 우리는 이 통나무를 자르고 색칠하고 다듬어서 여러 가지 물건들을 만든다. 이때 통나무는 어미이며 여러 가지 물건들은 자식이다. 통나무는 이름이 통나무라는 이름 하나밖에 없으며 효용가치는 작다. 그러나 이것으로 만든 수많은 물건들은 이름이 많으며 효용가치가 크다. 그래서 이것들은 현실적인 부와 명예와 권력 등을 가져다 줄 수 있다. 노자는 현실적인 효용가치가 작은 통나무가 진정으로 큰 가치가 있음을 아는 것을 지혜가 밝다고 한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통나무보다 효용가치가 큰 물건들을 가지려고 하니까 그것으로 인한 근심과 다툼이 일어난다. 거기에 비해 통나무는 작은 것이기 때문에 이것으로 인한 근심과 다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으로 인한 재앙을 만나지 않는다.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은 한정형식으로 굳어지기 전의 유연한 상태로 있음이다. 한정형식이 들어가면 굳어지고 그 굳어진 생각들로 다투게 된다. 생각이 유연하지 못한 것은 굳어진 사고방식 때문인데 이것은 이름과 함께 시작된다. 이름 부르는 순간 그 이름이라는 한정형식이 진입한다. 하나의 사물이나 사실에는 수많은 이름이 모여 집합을 이루고 있다. 우리는 이 집합을 통해 사물이나 사실을 판단한다. 따라서 이 판단에는 수많은 긍정⋅부정의 한정형식이 진입해 있기 때문에 다툼을 피할 수 없으며, 그 다툼에서 이겨야 현실적인 부와 명예와 권력 등을 지닐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종신토록 근심거리가 있고 재앙을 만나게 된다.
노자는 이어서 “그 빛을 써서 밝음으로 돌아가면 몸에 재앙을 남기지 않는다.”(用其光, 復歸其明, 無遺身殃)고 말한다. 여기서의 빛은 지혜의 빛이다.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이름(단어와 문장)들을 익히면 정확한 판단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이름을 많이 알면 알수록 지혜가 밝지 못해 정확한 판단과는 멀어질 수 있다. 이름이 많아진 자식은 어미와 멀어져 어미를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를 화이트헤드는 ‘구체자로 전도된 오류’(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라고 말한다. 이 말은 한정형식들로 구성된 문장으로 내린 판단을 구체적인 사물이나 사실을 그려낸 것으로 오해 한다는 의미이다. 달리 말하면 구체적인 사물이나 사실은 언어로 담아낼 수 없는데도 담아낼 수 있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노자가 말하는 밝음은 상(常)을 아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구체적인 사물이나 사실은 과정(過程, process)이라고 말한다. 노자는 서원반(逝遠反)이라고 한다. 이것은 진정한 실재(實在)는 흐른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진정한 실재인 ‘흐르는 강물’을 한정형식이라는 ‘그릇’에 담으면 물은 동일한 물이지만, 흐름이 사라지고 물은 곧 부패하게 된다. 살아 숨 쉬고 있는 청개구리를 해부하여 표본으로 만들면,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생명의 흐름이 사라진다. 방부제에 의해 부패를 막고 있기 때문에 불변으로 보이지만 그 청개구리는 진정한 실재의 살아 있는 청개구리는 아니다. 언어는 한정형식을 지니기 때문에 방부제와 유사하다. 불변으로 가장(假裝)해서 진정한 실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진정한 실재인 과정을 질식시킨다.
노자는 ‘질식시키지 않은 상태로 있는 그대로의 전과정(全過程)’을 상(常)이라고 한다. 상(常)은 전과정이기 때문에 시원과 종말(어미와 자식)을 함께 볼 때 가능하다. 그래서 전과정인 상(常)을 아는 것을 밝다고 한다. 노자가 말하는 존재의 전과정은 40장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시원으로) 돌아가는 것은 도(道)의 움직임이고 약한 것은 도(道)의 쓰임이다. 천하 만물은 유(有)에서 나오고 유(有)는 무(無)에서 나온다.” 그런데 1장에서는 무명(無名)이 천지의 시원이고 유명(有名)이 만물의 어미라고 했다. 이름이 없는(無名) 시원에서 이름이 있는(有名) 천지가 나오고 천지의 자식들인 만물은 이름이 주어짐(有名)으로써 나온다. 그리고 만물은 다시 이름 없는(無名) 곳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도(道)의 움직임이다. 도의 움직임이 존재의 전과정이고, 이것이 불변의 도인 상(常)이다. 이 상(常)을 아는 것을 세상 이치에 밝다고 하고, 이 밝음은 지혜의 빛을 씀으로써 가능하다. 지혜의 빛을 씀은 약함을 사용하는 도(道)의 씀이다.
세상 사람들은 생존경쟁(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강해지는 방향으로 치닫는다. 한 발이라도 더 강한 쪽으로 가기위해 노심초사한다. 강한 쪽은 무(無)에서 유(有)의 방향이다. 그래서 한 발이라도 더 유(有)한 쪽으로 가지못하고 머뭇거리지는 않는지 걱정한다. 유(有)한 쪽은 있는 쪽이다. 재산, 명예, 지위, 권력, 학벌, 인맥, 스펙 등을 있게 하려고 노력하고, 남보다 부족하면 근심하고 위축된다. 그리고 있는 것을 자랑하고 잘난 체하며 갑질을 한다. 그래서 다투게 되며 무리가 생겨 재앙이 된다. 그런데 노자는 강해지는 유(有)의 방향으로 가지 말고 약해지는 무(無)의 방향으로 가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존재의 전과정인 상(常)을 알고 이것에 익숙하기(習常) 때문이다.
(4) 문제 제기
1. 노자는 약해지는 방향으로 가라고 하는데, 정말 약해지면 생존경쟁에서 밀려 짓눌리고 힘들게 살게 되지 않는가? 또는 시대의 흐름에 역행해도 불안하지 않는가?
2. 노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감각기관을 다 막고 문을 닫으면 세상과 소통은 하지 않고 산속에 홀로 살아야 하지 않는가?
3. 언어가 사물이나 사실을 아는데 오류가 있다면 지금까지 수많은 원리들은 어떻게 알아 내었으며 과학기술이 발전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