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몇 차례 포고령을 통하여 우리 남쪽을 통치하던 미군사령관 맥아더는 두 달 뒤 또다른 포고령을 통하여 "조선 사람들은 구 조선총독부 관리들의 지시에 따를 것"을 점령군으로서 명한다고 하였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독립하지 못하였기에 미국이 적대국으로 싸운 일본에 속한 한 부류로 분류되어 미국은 우리에게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었다. 이 포고령이 나오기까지 두 달 동안 숨죽이고 지냈던 50 만명에 달하는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다시 기득권 세력으로 활개를 치고 나섰다.
이후 우리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예술, 군, 경찰, 행정 등등에 이들이 모든 권력을 장악한다. 특히 군에서 독립군 출신들은 "비적"이라 불리우며 천대받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또 이승만의 친일파 등용에 반대하며 제헌의회에 출마하여 이를 심판하겠다고 이승만과 같은 선거구인 동대문 을구에 출마하였던 최능진은 나중에 이승만 일파에 의하여 빨갱이로 몰리고 후보사퇴까지 당하게 된다.
이들이 일제식민지 치하에서 동족의 피를 빨고 동족을 죽음의 세계로 몰아 넣고 일본식으로 성을 바꾸고 이름을 고치는 것이 정당하다 하고, 신문의 신년호에는 일본국왕 부부사진을 싣고 천황폐하 운운하던 조선, 동아일보 등등의 적극적인 친일반민족행위는 "어쩔 수 없었던 일"로 치부되었다. 당시 2천만 조선인을 괴롭힌 친일파는 전체 50만명 정도로 파악되었다고 한다.
거듭 말하거니와 먹고 살기위해서 정말 "어쩔 수 없이" 징용에 끌려가고, 소학교 선생이 되고, 동척에서 운영하는 정미소에서 방아를 찧던 일을 하였던 일 등등은 36년의 짧지 않은 식민지 생활 중 그것을 "친일반민족행위"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출세와 명예를 위해서 "나는 천황폐하의 딸"이라고 한 모윤숙이나, "나의 정신적 조국은 대일본제국"이라 노래한 서정주와 같은 적극적인 배신행위, 항공기 한대에 10만원 하던 때에 조선총독부 앞에서 항공기와 고사포를 사서 바치고 기증식을 가진 행위를 한 조선일보 사장의 행위도 이것이 먹고살기 위한 일이었다고 한다면 목숨 버리고 이등박문을 사살한 안중근 의사나 독립군, 광복군은 다 허재비들인가?
나중에 전시 물자를 절약하기 위하여 100만원을 받고 신문을 자진 폐간하고도 일제의 탄압으로 폐간하였다고 나중에 억지를 부린 조선, 동아일보의 행위..... 이런 적극적인 민족배신행위를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면, 장준하 선생은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일본군을 탈출, 임시정부를 찾아 6천리를 걸어 광복군이 된 행위에 대하여, 또 끝까지 저항시를 쓰다가 후꾸오까 감옥에서 생체실험을 당한 윤동주 시인, 감옥에 갖혀서 끝까지 굴하지 않고 민족혼을 쓴 육사 이원록의 시는 또 무엇인가?
해방 후 나라를 일으키자면 인재가 없어 친일파 등용이 불가피 했다는 것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쓴 상투적인 변명수법에 불과하다. 문제는 그들이 아직까지도 전혀 반성도 하지 않고 자신들의 친일반민족행위를 정당화하고, 심지어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독립유공자를 심사하고 표창하는 주역이 된 사실을 어찌 설명하느냐의 문제가 더 심각한 문제이다. 일제 때 독립지사를 고문하던 친일 경찰이 해방 후 빨갱이 잡는다고 윤봉길 의사가 속했던 의열단장 김원봉도 구속하던 이 어이없는 현실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미소냉전의 산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민족배신자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것은 국제질서의 냉전의 산물이라 할 것이다. 힘이 없는 나라의 서러움은 여기에도 있다.
친일반민족행위도 문제거니와 반성하지 않는 뻔뻔함이 더 문제인 것이다.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은 전후에 나치점령시절 프랑스에서 나치 독일에 협력하여 동족에게 거머리 같은 행위를 한 자들을 처단하기 위하여 좌익세력과도 손 잡고 그 일을 해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역사적인 기록조차 제대로 된 것이 없는 실정이라 한다.
전에....결혼도 하기 전 오래 전에 내가 누구에게 들었던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일은.....청산리 전투에 참가한 북로군정서 소속 독립군이던 분이 해방되고 변변한 직업도 없이 서울 봉천동 달동네 살면서 아들을 겨우겨우 교육시켜 키웠는데 그 아들이 취직이 되어 첫 봉급을 받던 날 그렇게 기쁠 수가 없어 부부가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는 듣는 내 마음을 뭉클하게 하였었다. 그런데 친일파는 수 백억 원하는 건물의 주인이고, 독립군 후손은 그런 건물의 수위를 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란 말은 또 한번 나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그 뒤로 나는 독립운동과 해방 후 친일파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제는 기득권으로 자리잡은 친일파에 대하여 어찌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역사에 기록으로 남겨 반성하는 자료는 있어야 한다. 자기 아버지의 친일행위에 대하여도 빠짐없이 기록하고 친일파의 배신행위를 밝혀 나간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이어 창립된 민족문제연구소.(www.minjok.or.kr)
이 민족문제연구소가 창립되고 17년만에 영주에서도 드디어 창립총회가 열리게 된다.
3월 1일 12시, 기미년 3월 1일 12시에 만세를 불렀던 그 시간에 맞추어서 총회를 한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그것도 우리고장에서 무장독립단체 대한광복단이 탄생한 것을 기념하여 세워진 대한광복단기념공원에서 창립총회를 갖는다.
나는 이 행사에서 작은 역할 하나를 맡아 선배님들과 준비하고 있다. 그 선배님들 중 한 분은 상해 임시정부에서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증손자 되는 분도 있다. 석주 선생의 생가가 안동 법흥동의 99칸 집이라고 하는 것을 이 일을 하면서 처음 알았다.
나에게 이 일이 좋은 점.
1. 역사에 대해 제대로 모르는 내가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된다.
2. 안동, 영주, 예천, 봉화, 대구, 서울 등등에서 이일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사람들을 알게 되고 그 분들을 통하여 또 다른 사실을 배우게 된다. 예를 들어 구한말 의병장 왕산 허위 선생의 고향이 구미인 것도 이 일을 하면서 다시 알게 된 사실이다.
3. 내가 제일 아끼고 자랑하는 우리 통꽈 친구들 보다는 못하지만 사람 사이의 신뢰가 무엇인지 활동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다시 알게 된다.
여러가지 과제가 많지만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싫어질 때까지 하면 될 일인 것 같다.
첨부물은 내가 지역신문에 보도하여 달라고 보낸 신문보도 자료인데 한번씩 살펴보기 바란다.
첫댓글 참...설 전날 오준이와 국선이는 호프 적당히 하고 들어가셨는가? 그냥 가기엔 서운하다고 하더니만.....
후.....세상일과 물과 구름이란 사실 제 멋대로여서 인간이 원하는것과는 전혀 별개로 흘러가게 마련인것을...... 친일파의 후손들은 배워서 자손대대로 잘 살고(1212주역들도), 독립운운하던 선각자들의 후손들은 못배워서 남의 머슴살이도 마다하지 못해 혹은 굶어죽고 자손대대 그 찌들음을 못벗고, 나라위해 한평생바친 국군포로는 아직도 방치 되는데, 이나라는 친일파의거두요 반민주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을 하겠다고 설치고 다니니 그에 추종하고 동조하는 세력이나 지지하는 국민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진실을 알지못하고 사리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함으로 비롯되는 의견과 여론도 역시나 사회적으로나 법적으로 유효한것을.......
나도 3월1일날 민족문제연구소영주지회창립총회에 참석하고픈 마음이 있으나 그날은 애들 학교 데려다 주러 가야 하니 조금 아쉽네....
광복군 출신인 우리 영주봉화지회장님은 해방후 안동초등학교 선생님을 하셨는데 국회의장을 지낸 이효상씨가 경북도 학무국장일 때 교재의 내용을 놓고 그와 논쟁을 벌이고 괘씸죄에 걸려 단산 병산초등학교로 좌천된 후 사표를 내고 낭인으로 지내셨다고 한다. 광복군인 그분은 지금 기초생활대상자로 지내고 계시다. 그래서 그분 안동농림 후배되는 분이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는데 일제에 구속된 기록 등등 증거가 없어 기각되었다고 한다. 연구소 본부에서 그 증거를 찾아 유공자 등록이 되도록 기초자료를 보내달라해서 보냈다. 부디 증거를 찾아 국가유공자로 되어 회장님이 연금을 받으시고 노년이 조금이라도 편하시길 바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