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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허필두 (211.♡.98.51)
조회 : 3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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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예전에 사거나 빌려 읽었던 책인데 지금은 어디에 놓아두었는지 알 수가 없어 다시 구입했습니다.
아내가 요즘 들어서 박노해 시인 폐인이 되었습니다.
지난 토요일 사진전을 다녀온 이후에 아내가 보라고
<사람만이 희망이다>, <오늘은 다르게>를 구청 앞 헌책방에서 2,500원씩 주고 골랐습니다.
어제 저녁에 집에 가 그 책들을 비닐로 포장을 했습니다.
책꽂이에서 <작가세계> 제35권에서 '박노해 특집'을 다루어서 들추어보았더니
몇년전 읽으면서 밑줄을 그은 게 보였는데 지금은 하나도 기억에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아이엄마에게 우선 김흥신과 김진주가 쓴 글을 먼저 읽어보라고 하였습니다.
그제는 <인물과 사상> 제9권과 제10권에 강준만과 김규항이 쓴 글을 읽었습니다.
'준법서약서'가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는데
이제는 그걸 썼던 시인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며칠전 박노해 시인께 드리려고 <노동의 새벽> 초판본을 어제 구했습니다.
집에 있는 것은 상태가 양호하지 않아 아무낙서도 되어있지 않고 판화도 그대로 두 장이
그대로 남아있는 책으로 보내드리려고 합니다.
아무래도 그 책은 저보다도 그 분이 더 필요하겠지요.
주말이나 다음주에 전에 찍은 사진과 함께 전해드릴까합니다.
요즘에는 그가 쓴 책을 다시 읽고 있습니다, 저도 아내도.
다시 그가 쓴 책을 다시 모았습니다.
6권에 23,500원이었습니다.
<노동의 새벽>, <참된 시작>,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민들레처럼>,<노동문학 1988>, <노동해방문학>
-출처:http://www.likethem.kr/board/bbs/board.php?bo_table=na_board&wr_id=782&page=2
참 80년대.....
20세
1984년 9월 25일이면 대학교 1학년 때입니다.
성남의 문무대에서 교련집체교육을 받을 때였지요.
그때는 박노해 시인이 누군지 알 수 없을 때였습니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사회문화연구회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던 시기였습니다.
몇번인가 나가고 말았지만........
<노동의 새벽>은 1984년 풀빛에서 나온 이후,
1997년부터는 해냄에서
다시 2004년부터는 다시 느린걸음에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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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2004년에는 <노동의 새벽> 출간 20주년 헌정음반도 나왔습니다.
노동의 새벽 20주년 헌정 음반 |
여러 아티스트 (Various Artists) | 로엔 | 2004-12-17 |
정가 : 13,000원 |
판매가 : 11,700원 (10%off, 1,300원 할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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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알라딘
22세
1986년 7월에는 고향에서 막노동을 할 때였습니다.
군대, 6개월 방위를 하기 전에 1986년 4월부터 8월까지 집앞 답풍교 공사현장에서 날일을 하였습니다.
24세
이 사진은 작가 조세희가 찍은 사진집 <침묵의 뿌리> 표제 사진이기도 했습니다.
이 책이 발간된 1988년 4월부터 8월 초까지 경남 양산군 양산읍 유산리 공사현장에서
잡부일을 할 때입니다.
참으로 고민스러운 시기였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대학생들이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위장취업을 할 시기였습니다.
만호제강 노조위원장도 알게 되었지요.
25세
1989년 1월은 대학교 4학년이었습니다.
김사인 노해문의 전투적 평론가였지요.
25세
1989년 10월에는 4학년 1학기를 다녔습니다.
1989년 4월에 구속 되는 바람에 강제로 휴학을 당해 어쩔수없이
가을학기에 다시 4학년 1학기를 다녔습니다.
26세
1990년 5월에는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시기입니다.
그 전년도에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아 먹고 살기 위해 4학년 2학기인 상반기에
대한출판문화협회의 편집인 교육과정을 수강하기 위해 춘천을 떠났습니다.
28세
박노해 시인의 형님이신 박기호 신부님
1992년 7월에 저는 실업자로 지낼 때였습니다.
민들레처럼
詩 : 박노해
작곡 : 조민하
노래 : 꽃다지(음반 : 수선전도)
노래 : 꽃다지(음반 : 금지의 벽을 넘어 완전한 자유를 노래하리라)
노래 : 곽경희(음반 : 노동가요 공식음반 1)
연주 : 노동가요 공식음반 1 반주곡
노래 : 윤선애 & 모하비(음반 : 노동의새벽20주년 기념음반)
연주 : 미디 연주곡
참고 : 윤선애 & 모하비의 곡은 윤선애가 노래를 부르고 모하비가 편곡 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모하비는 자신의 편곡의도가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버전이라고 한다.
민들레꽃처럼 살아야한다
내 가슴에 새긴 불타는 투혼
무수한 발길에 짓밟힌 대도
민들레처럼
모질고 모진이 생존의 땅에
내가 가야할 저 투쟁의 길에
온몸 부딪히며 살아야 한다
민들레처럼
특별하지 않을 지라도
결코 빛나지 않을지라도
흔하고 너른 들풀과 어우러져
거침없이 피어나는 민들레
아- 민들레 뜨거운 가슴
수천 수백의 꽃씨가 되어
아- 해방의 봄을 부른다
민들레의 투혼으로
-중략-
민들레처럼 전곡듣기
민들레처럼 - 꽃다지(수선전도)
민들레처럼 - 꽃다지(금지의 벽을 넘어 완전한 자유를 노래하리라)
민들레처럼 - 곽경희(노동가요 공식음반 1)
민들레처럼 - 노동가요 공식음반 1 반주곡
민들레처럼 - 윤선애 & 모하비(노동의새벽20주년 기념음반)
민들레처럼 - 미디 연주곡
-출처:인터넷에서 훔쳐옴
28세
1991년 7월에는 우아당이라는 출판사에서 편집일을 할 때입니다.
28세
1991년 11월에도 출판사에 다닐 시기
29세
1993년 6월에는 막노동을 할 때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사놓기만 하고 읽지를 않았고 지금은 홍천 시골집 사과박스 안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구청 앞 헌책방 진호에서 사서 읽고 생태채식연대에 기증하였으나
다시 보고 싶어 또 구입했습니다.
33세
1997년 7월이면 제1회 결혼을 시작을 하기도 전에 실패로 끝나고 매일 술만 퍼먹던 때
왜 30대에는 왜 그리 열정적으로 삶을 살지 않았는지.......
술과 여자를 탐하던 시기.......
좀더 인생을 진지하게 살았어야했는데.......
밑줄을 그으며 읽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박노해는 누구인가
김 정 란 시인, 상지대 교수
박노해가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서슬이 퍼렇던 70, 80년대를 피투성이로 통과한 시인,
학벌 위주의 우리 사회 안에서 대학 졸업장 없이도 누구보다도 사회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던 시인.
그는 우리에게 하나의 ‘현상’이었다. 자기 목소리를 가진다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하던 시절,
어떤 이들은 용감하게 몸을 던졌고,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귀한 꽃의 이미지로 남았다.
나는 그 꽃들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나는 행동하지 못했던 자신이 창피해서 스스로를 ‘비겁한 정원사’라고 불렀다.
나는 그 꽃들이 걱정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떤 꽃들은 허망하게 져버렸다.
그러나 박노해는 살아남았고, 석방된 뒤에는 비극적인 과거의 전력 때문에 휘황한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곤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의 말을 두고 또 많은 말들이 생산되고 있다.
문학적으로 나는 박노해에게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그의 문학적 기질과 나의 문학적 기질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그의 투명하고 소박한 시들을 잘 견디지 못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그의 자리에 놓아 두고 귀하게 여긴다.
《작가세계》에 편집위원으로 참여하면서 내가 맨 처음 특집작가로 추천했던 작가는 박상륭이었고,
그리고 두 번째로 추천했던 작가는 박노해였다.
그 이후에 이어진 작가들의 선택에 있어서 나는 대체로 조용히 다른 편집위원들의 견해를 수용했지만,
두 작가의 경우에는 강한 목소리를 냈다. 결국 꼭 내 주장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작가세계》라는 독특한 문학주의적 색채를 가진 잡지가 아니면 어디에서도 특집의
조명을 받기 어려웠을 두 명의 작가가 시차를 두고 나란히 특집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이 두 사람은 문학적으로는 양극단에 서 있는 작가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극단적 복잡성과 극단적 단순성. 따라서 얼핏 나의 선택이 일관성을 결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두 작가들은 진지함을 견지하고 있다는 공통성을 가지고 있으며,
문학에게 생생한 리얼리티를 부여할 줄 아는 작가들이라는 점에서 서로 만난다.
내가 이 두 작가를 맨 먼저 선택했던 것은 90년대 문학에 대한 강한 의구심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문학’의 이름으로 횡행하는 허위의식을 견딜 수 없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90년대 문학이 문학의 이름으로 파묻어 버린 ‘진실’을 복원하는 것이었다.
나에게 두 작가는 각기 상반된 방향에서 90년대 문학이 퍼뜨린 허위의식을 극복하게 해줄 대안으로 여겨졌다.
나는 두 작가들이 진실을 견지하기 위해서 허구의 형식으로 쓰여지는 문학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서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한 사람은 형이상학적, 종교적 사유 쪽으로, 한 사람은 현실적 실천 쪽으로 퉁겨나가기 직전의 자리에서 문학을 생산해낸다. 박상륭이 종교와 문학의 경계에 서 있다면, 박노해는 문학과 운동의 경계선 위에 서 있다. 나는 두 작가가 모두 문학적으로는 어떤 임계지역에 서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문학적 위상학이 직접성에 대한 갈망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판단했다. 박상륭은 언어의 실체성을 통해서 생의 한복판을 영적 직접성의 회로를 통해 관통한 문학적 실천의 작가이며, 박노해는 현실적 참여를 통해 실천적 문학에 몸을 던졌던 작가이다. 나에게 그 두 작가는 두 가지 실천의 전범으로 여겨졌다. 두 작가의 문학적 색채는 얼음과 불만큼 다르지만, 그들의 문학이 담보하고 있는 치열성과 리얼리티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그들이 보여 준 치열성의 교훈을 통해 90년대 문학이 표피성을 극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석방되고 난 뒤, 박노해는 시인으로서보다는 운동가의 활동에 몰두하는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그는 나의 비평적 관심으로부터 어느 정도 멀어졌다. 그런데, 그의 활동을 두고 많은 지식인들, 특히 좌파진영으로부터 비판적인 발언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박노해가 좌파의 정신적 스펙트럼 안에서 어디에 위치하는지, 그리고 그의 현재의 행보의 어떤 부분이 좌파 지식인들에게 상처가 되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뿐, 정확하게 알지는 못한다. 좌파진영 안에서 형성된 역사적 맥락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맥락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한, 박노해의 행보에 관해서 이런저런 견해를 표명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박노해에 대한 비판이 근거를 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은 나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좌파 지식인들의 반응은 박노해를 지나치게 엄격하게 ‘지식인’의 범주에 넣고 바라보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인 것처럼 보인다. 박노해는 지식인이라기보다는 그저 한 명의 감동적인 인간이 아닐까. 그를 둘러싸고 생겨난 지나친 거품만 걷어낸다면, 그는 나름대로 우리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 귀한 인간적 財源이 아닐까. 그를 ‘변절자’로 낙인찍어 아예 포기하는 대신, 그에게 그가 적절하게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을 부여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히 해나가게 도울 수는 없을까.
박노해는 세련된 지식인들이 할 수 없는 어떤 역할을 힘차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역할이 그의 생을 담보로 얻어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나는 그의 당장의 행보가 불안하다 하더라도, 그를 일거에 침몰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한 소박하기는 하지만, 그가 주장하는 변화의 내용이 분명히 귀기울여 들을 만한 것이라는 것, 따라서 그에게 지식인으로서의 논리적 치밀성을 요청하기보다는 대중운동가로서 그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위상을 인정해 주고, 점차로 다듬어지도록 도와 주자고 제안하고 싶다.
나는 박노해가 주장하는 모든 주장이 반드시 정교한 논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야 한다고 보지 않는다. 그의 역할은 훨씬 더 실용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게 지식인이 가져야 할 논리적 치밀성과 철학적 독창성을 강요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의 글에서 어떤 지적 과장과 영웅주의적 포즈가 읽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집중포화를 퍼부어서 잃어버리기에 박노해는 귀한 사람이다. 대중은 박노해의 존재를 요청하고 있다. 그의 존재는 어떤 다른 유명인사들보다도 대중을 위무하는 신선한 힘을 가지고 있다. 분명히 존재하는 박노해 현상을 긍정적인 쪽으로 바꾸어서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운동적 에너지원으로 활용할 수는 없을까. 어쨌든, 그가 하는 모든 이야기들은 인기 연예인들이나 인기 스포츠맨들이 하는 이야기보다는 대중에게 훨씬 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주지 않겠는가.
박노해의 변화
박노해를 비판하는 지식인들은 그의 ‘변화’를 ‘변절’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쓴 글을 꼼꼼히 읽어 보았지만, 나로서는 그가 ‘변절했다’는 어떤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 박노해의 변화가 그 자신의 주장처럼 ‘성숙’이며 ‘승화’라고까지 할 수 있을 만큼 깊고 바람직한 변화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변화가 ‘변절’이라고 매도당할 정도로 질나쁜 변화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노동자의 친구로 남아 있겠다고 선언하고 있으며, 노동의 가치와 의미를 두둔하고, 투쟁적 사회주의는 포기했지만 가치로서의 사회주의는 고수하겠다는 입장을 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우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그들의 논리에 투항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가 ‘돈이 되는 운동을 하겠다’고 말한다고 해서, 운동을 통해서 돈을 벌어서 혼자서 호의호식하겠다는 뜻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말을 70, 80년대의 관념적인 운동을 지양하고 삶 속에서 실제적인 변화를 끌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물질적 가치까지 배가시킬 수 있는 운동을 하겠다는 말로 이해한다. 그 말에 커다란 잘못은 없어 보인다. 어쨌든 현대사회란 돈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시대가 아닌가. 도덕적 정당성에만 목을 매달고 자기 희생을 각오해야만 계속할 수 있는 운동이라면, 어떻게 이 후기 산업사회에서 자본의 매력에 푹 빠져 있는 대중을 끌어들일 수 있겠는가.
나는 그의 ‘변화’가 이데올로기가 부서진 후, 세계의 변화를 창조적으로 수용하기 위해 나름대로의 깊은 고뇌를 거쳐 얻어진 결과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박노해가 그 변화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말투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는 ‘과거의 영예’라는 말을 당연한 것처럼 사용하고, 또 ‘과거의 영예’를 버리고 ‘울면서라도 앞으로 나아가기’로 결심했다고 비장한 어조로 말하고 있다. 거기에다가 이런저런 동서고금의 정치적 영웅들의 이야기를 덧붙인 것도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이런 대목을 읽으면서 독자는 박노해가 자신의 변화를 정당화시켜야 한다는 심리적 강박에 사로잡혀 자신의 과거를 어떤 신비한 아우라로 치장하고 싶어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가지게 된다. ‘세속을 떠난 수도사처럼 평온해 보인다’든가 ‘많은 인물들이 죽임을 당하고 나서야 영웅으로 치켜세워졌다’든가 하는 등의 영웅주의적 수사학이 ‘변화’의 내적 절박성을 훼손시켜 버리는 것이다. 자신을 시대의 순교자나 영웅들과 동일시하고 싶어하는 심리적 강박은 사실 역사에 의해서 고통당한 사람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나는 그것을 크게 탓하고 싶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 균형감각을 찾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전략이 미숙했다는 점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운동가에게 전략적 미숙성은 치명적인 결점이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변화’를 과거의 특별한 경험으로 신비화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진솔한 목소리로 자신의 심경이 변화하게 된 과정을 철저하게 고백했더라면, ‘변절’이라는 말까지는 듣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고통받았으므로 도덕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 따라서 나의 ‘변화’는 그러한 우위를 포기하면서 얻어진 영웅적 결단이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바람에 그가 제안하는 ‘변화’의 내용마저 의심받게 된 것은 아닐까.
‘위대한 인물’로 자신을 포장하고 싶은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박노해는 누구보다도 그러한 유혹에 저항해야 할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민중의 친구로 남아 있어야 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영웅의 아우라로 감싸기 시작하는 순간, 그는 그가 맹렬하게 비난하는 ‘엘리트주의자’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릴 것이다. 바깥으로부터 ‘영예’가 주어지더라도, 그것을 부정하고 낮은 자리에서 다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박노해 역시 과거의 운동경력을 프리미엄으로 사용하는 정치인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출처:http://www.shinyoungbok.pe.kr/jboard/?p=detail&code=board1&id=40&page=56
이 책을 읽게 되면 왜 그가 자기의 노선을 수정해야했으며 평화운동을 하며
채식주의자가 되었는지에 대하여 알 수 있습니다.
35세
1999년 9월
'현재의 아내'와 결혼을 할 시기
서른 다섯된 해에 처음으로 사회단체에 가입하여 후원금을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이되었습니다.
41세
2005년 10월에는 찬영이가 태어난 때마라톤을 시작한 지 3년이 되던 때였지요.
늘 아쉽습니다.
2007년
43세
지나간 세월은 늘 후회만 앞섭니다.
그렇게 살지 않기 위해 애쓰기로 했습니다.
20100124-박노해 시인의 첫 사진전 '라 광야'展에 다녀왔습니다
2010년 1월 18일 월요일, 오전 07시 40분 58초 +0900
<nanum@nanum.com> |
"허필두" <fernweh1@hanmail.net> |
46세 |
2010년 1월
46세
받은 날짜
2010년 09월 27일 07시 36분 23초
보낸 사람
나눔문화<nanum@nanum.com>
받는 사람
허필두traumwelt@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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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일터에서 전자메일을 읽을 수 없어 한참이나 지나서야 가끔
편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지난주 금요일 오전에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박노해 시인이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사진전시회를 하는데
주말에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아내와 아이들과의 나들이었습니다.
전 돈이 없어서 1만원짜리 도록이나 사자고 하니
아내는 이왕이면 10만원짜리를 사는 게 박노해 시인과 그 분들이
하시는 일에 도움을 줄 것 같다고 하여 사진집을 카드로 구입하였습니다.
서명을 받으며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먼훗날 우리 아이들이 기억할 수 있게 사진을 아이들과
사진을 같이 찍어도 되냐고 하니
딸아이 찬빈이와 막내 찬영이 뺨을 부비며 즐거워하셨습니다.
아내가 우리는 멀리서 왔다고 하니 어디에서 오셨나고 하기에
금천구 시흥5동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박노해 시인도 그곳을 잘 안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어머님께서 박미고개에 사시고 그곳에서 공장생활을 했으며,
형님이 시흥3동 성당에서 신부를 한 적이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1998~90년도에 <노동해방문학>에서 선생님의 글을 많이 접했으며,
<사람만이 희망이다>, <오늘은 다르게>를 잘 읽었노라고......
선생님의 <노동의 새벽> 초판본을 갖고 있다고 하니
당신도 그것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지금 헌책방에서도 구하고 힘들다고......
초판본을 드리겠다고 하니 잘 갖고 있다가
아이들에게 물려주라고......
그렇게 가까이에서 그 분을 뵈었습니다.
아이들과 아내가 아주 좋아했으며,
가슴 뭉클한 감동을 앉고 인사동 부산식당에 들러 저녁을 먹으며
찹쌀 동동주를 마셨더니 얼큰하게 취하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시집치고는 좀 비싼 편입니다. 18,000원
장수막걸리가 1,200원짜리 장수막걸리가 15병입니다.
2011년 2월 현재
47세
부끄럽지 않고 후회를 덜 할 수 있는 삶을 살기로 했습니다.
죽을 때 가장 아름답게 그걸 맞이할 수 있게 준비를 하고,
아이들이나 아내에게 불편함을 덜 주고,
주변 사람들을 힘 들지 않게 해야겠습니다.
자신은 없지만 무너지지 않기 위해 건강을 유지하고,
바꾸어나가야하는 세상과 함께 달려나아가는 삶을 꾸려나가기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잘 될지 모르겠습니다.
늘 다짐 속에서는 자기최면에 빠지지 않으면 그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할 것 같기도 합니다.
-2011.2.14. 아침에 말도 되지 않는 구라를 풀면서 이 아침을 받아들입니다.
첫댓글 '민들레처럼'은 아내가 좋아하는 노래입니다.
그 노래 가사를 다 잊어버렸으니 다시 부르고 싶다고
가사 좀 프린트를 해 오라고 했습니다.
천만다행이지요.
그와 저 사이에 공감하는 부분이 있으니......
만약 생각이 통하지 않은 다른 여자와 결혼을 했으면 꽤나 답답했을지도 모릅니다.
1980년대 대학을 함께 다녔고 그도 노래패 활동을 하여
저랑 통하는 부분이 많기도 하나 우린 늘 전쟁중입니다.
그가 요즈음은 제가 읽었던 <리영희 평전>을 펴들고 있습니다.
이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좀 걸러지고 억양이 낮아지기를 원하나.......
'깡패적 자아'를 가진 그가 이제는 단아한 여자로 바뀌길 바라지요.